결론부터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yes도 no도 아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때문에 식민지가 되었다는 시각은, 첫째 일제의 아주 편리한 해석이었고, 둘째 다카끼 마사오가 수출드라이브를 펴면서 민중을 탄압할 때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도구였으며, 마지막으로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주체적이고 독립된 시각의 결여를 보여준다. 처음 두가지는 설명안해도 알 것이고, 세번째만 조금 부연하겠다.

 

우리가 조선후기를 공부할 때 지겹게 듣는 단어가 있다. 바로 '실학'이다. 그러나 김용옥씨가 '독기학설'에서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실학자는 성리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른바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꿈은 성리학에 기반한 제대로된 국가였다. 조선초의 건강한 유교국가로 돌아가자! 이게 그들의 목표였다. 정약용은 결코 조선, 그리고 성리학을 갈아 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그리고 성리학은 정약용, 그리고 대다수 성리학자들에게는 처음과 끝이었다. 그들 성리학자 말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최한기. 이 이야기를 왜하냐고?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말하고자 함이다. 김용옥씨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1945년 해방은 되었지만 독립하지는 못했다. 독립? 그렇다.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독립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이후 일제식민지라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뭐랄까... anything but 쪽팔이라고나 할까? 일제가 조선은 봉건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은 봉건주의라고 주장해야했다. 일제가 조선에는 자본주의 맹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에는 자본주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해야 했다. 일제가 자신들은 개방해서 흥했고 너희는 쇄국해서 망했다고 주장했다. 이건 맞는 말인것 같았다.

 

내 생각은 이렇다. 조선은 봉건주의 아니다. 역사적으로 봉건제는 매우 특이한 제도이며 중세유럽, 중국 주나라, 일본 막부 이렇게 세가지 버전이 있다. 자본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봉건제가 필요하다? 마르크스가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다. 마르크스는 영국이 봉건제에서 어떻게 자본주의로 발전했는가를 보였을 뿐, 그 흐름이(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모든 나라에 일관되게 적용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편지에서 남기기도 했다. 자 어쨌든! 우리는 매우 기본적인 미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인가? 자본주의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가? 자본주의는 불가피한 것인가? 산업화, 민주화 등은 자본주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가? 등등에 대한 질문을 하여야 한다.

 

쇄국정책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개방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런 정책의 기반을 어디에서 찾는가이다. 즉, 쇄국정책의 기반을 구시대의 기득권층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이 떠오르는 중인 그리고 광범위한 민중에게서 찾을 것인가? 이것이 본질적인 질문이어야 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당시의 흐름에서는 쇄국정책이 더 타당했다고 본다. 물론 문 걸어잠그고 눈가리고 아웅하자는 말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쇄국을 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핵심사항은 선별해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당시 열강들이 주장하는 통상개방은 결코 우리에게 유리한 내용이 없었다. 그리고 정권의 기반을 민중, 중인에게서 찾았어야 했다. 즉, 동학혁명의 그 세력들, 만민공동회의 그 세력들, 성리학을 훌쩍 뛰어넘어 자연과학에 기반한 패러다임으로 무장했던 지식인들. 바로 그들에 기반해서 정책(그것이 개방이든 쇄국이든 간에)을 추진했어야 했다. 이것이 본질이다. 쇄국때문에 망했다고?? 매우 편리한 방식이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다.

 

장하준씨가 말했듯이 우리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으로 성장하였다. 80년대 말만 해도 외국에서 뭔가를 수입할 때 껀껀이 국가에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다. "씹새끼야. 우리가 수출로 먹고사는데 너는 니 혼자 잘먹고 잘살자고 외국에서 수입을 하냐 이 호로새끼야!"하고 말하는 관리의 눈초리말이다.

 

한미FTA는 우리에겐 너무 급격한 변화이며 너무나 큰 risk를 지는 것이다. 물론 찬성론자들의 기대대로 결과적으로 잘 될 수도 있다. 별다른 희생없이 양적 질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risk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가 잃을 게 없을 때는 마구 인파이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않는가... 규모면에서 여타의 FTA완 비교가 되지 않고 내용에서도 매우 중차대한 사항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상대는 깡패국가 미국이다. 난 우리나라가 미국과 '평등'하게 '호혜'적인 조약 혹은 협정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너무 패배적이라고? 씨바 한미SOFA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는 미국과 대등하게 협정을 맺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너무 미국 편향적이고 너무 편파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고 있고 미국의 시선으로 세상을 심지어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나라당이 무슨 주장을 해도 무조건 한나라를 지지하는 38%가 있는데 씨바 무슨놈의 대등한 협정!

 

한미FTA는 할려면 단계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일차개방, 이차개방...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너무 성급하고 조급했다. 물론 첫단추를 잘못 꿴 노무현의 실착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진보진영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노무현 집권 기간동안 진보진영은 노무현과 소통을 하지 못했다. 거의 전적으로 노무현한테 이래라 저래라 요구만 했을 뿐 도대체 어떻게 해야 노무현(및 주변세력)과 접점을 넓히면서 연대의 전선을 공고히 하여 전선 저쪽의 한나라당, 독점자본, 수구세력들과 대결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 이게 내가 민노당/진보신당 등등의 사람들에게 갖는 아쉬움이다. 진중권을 보면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놈이 원하는 건 무얼까?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한 걸음 진보일까? 전자라면 그는 성공했다. 그러나 후자라면? 한심한 놈일 뿐이다. 목수정으로 해서 김상봉으로 해서 노회찬 기타등등...목소리 키우고 항상 옳은 말만 한다고 해서 사회가 진보하냐? 씨바 그러면 인류는 이미 옛날 옛적에 지상낙원을 건설했을 것이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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