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인민각개의 탄생

2014/06/03 21:13

세월호는 우리에게 2가지 과제를 던진다. 하나는 사회와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우리 문명의 근본 틀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1. 사회와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나는 "투표 똑바로 하자"는 댓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권재민의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서의 참정권을 투표권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보통 저 문구는 "우리가 주권을 행사할 길이 투표말고는 없으니 이거라도 제대로하자"는 대단히 자조적이고 패배적이고 지극히 수동적인 맥락에서 쓰인다는 것이 문제다. 참정권을 투표권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보편적 참정권이 화두가 된 이래로 지배계급과 기득권층들이 줄곧 애용한 수법이다. 당연히! 투표권은 참정권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세월호와 관련한 각종 운동(집회, 모임, 선언 등등)들이 반정부투쟁을 그 중점목표로 삼는 것도 반대한다. 세월호는 나쁜 정치인 몰아내고 좋은 정치인 앉힌다고 해서, 나쁜 관료 몰아내고 좋은 관료 앉힌다고 해서 해결될 물제가 아니다. 박그네 몰아내고 그자리에 철수를 앉힌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김대중/노무현을 앉혀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박그네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월호 때문이 아니라 부정선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느 주인이 아랫것들한테 일을 맡겨놓고 4년이나 5년에 한번 보고받고 결재하는가? 도대체 어느 사장이 4년이나 5년에 한번 보고받고 결재받는가? 어느 회사 사장이나 다들 매일매일 보고받고, 의논하고, 토론하고 결재한다. 그렇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상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전문가의 식견은 그것을 보조할 뿐, 결코 국가와 사회의 초석이 될 수는 없다.

 나는 주장한다.

(1) 사법에서 배심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라.

(2) 입법 배심제를 실시하자. 국회의원 정족수의 3~5배 정도의 입법배심단을 구성하고 국회의원과 입법배심원들이 법안 표결에 참여한다. 국회의원은 동료 국회의원을 설득하는 대신 입법배심원을 설득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 국회는 마땅히 국민 전체를 골고루 대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국회에서 최대 집단은 사법인들이다. 누가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우리의 이익은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 무작위 추첨으로 선정한 입법배심원단이 지금의 국회의원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크다고 믿는다.

(3) 행정 배심제를 실시하자. 행정의 주요 현안에 대해 배심담을 구성하여 관료의 정책에 대해 찬반투표를 하도록 하자.

(4) 대법원장, 검찰총장, 경찰총장, 고등법원장, 고등검찰총장, 광역지방경찰청장을 직선으로!

(5) 헌법재판소의 구성을 법관에서 일반 시민으로 바꿔야한다.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농민, 공무원, 자영업자, 중소기업, 대기업, 청년학생, 노인 층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사람들로 헌법재판소를 구성하여야 한다.(구체적인 항목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위 집단표에 여성을 넣을 것이지를 계속 고민중이다.)

다들 기억하자고 한다. 그런데 뭘 기억할건가??? 시민의 상식이 전문가/관료의 전문지식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2. 우리 문명의 틀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근대라는 단어 자체는 좋아하지 않지만 방편적으로 사용하자면, 나는 조선을 이땅의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인민의 정치 제도권 진입이 조선보다 더 광범위하게 허용되었던 사회가 당시 있었는가? 조선은 과거제가 가장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던 국가였다. 조선초 성리학은 근대사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다만 16세기 후반부터 흐름이 크게 흔들리면서 결국 19세기말 이후 일본의 간섭 그리고 미국의 간섭으로 인하여 이른바 '근대성'의 획득 혹은 '근대적 개인'의 성립이 크게 억압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문명의 과제는 바로 '개인'의 출현이다. 공동체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주체적 개인의 탄생!

나는 주장한다.

(1) 선거 및 피선거 연령을 만 16세로 낮춰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 및 자신의 친구가 시의원이되고 시장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물론 실수를 할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 어른들이 있는 것 아닌가?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한다. 어른들은 메밀밭의 파수꾼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2) 존대어법을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가능한한 반말 중심으로 우리의 말글살이를 재편해야 한다. 몇년전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추락에서 밝혀졌듯이 지금 우리 언어생활은 상사/어른에 대한 존대와 예의가 지나치다. 히딩크는 운동장에서 선후배가 말을 놓게 했다. 물론 존대어를 쓰면서도 얼마든지 논쟁은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론적일 뿐 현실에서 한사람은 반말을, 한사람은 경어를 쓰면 이게 평등한 대화가 안된다. 존칭은 그 자체가 권력을 나타낸다. 존대어. 정말 너무너무 많다. 과감히 줄이자. 이걸 국가가 주도해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교육시키자. 어차피 서른살 넘은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 살다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각종 드라마 등을 통해서 비존대어법을 보급하자. 그럴려면 당연히 비존대어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라고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3) 모든 사물은 그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신문기사 보라. "....박원순시장은 이명박전대통령과 오세훈전 서울시장을 만났고 이자리에 홍길동비서실장과 김길동 전관세청장이 있었고....박시장은...이전대톨령은...오전시장은...홀비서실장은...김전청장은..."이렇게 나온다. 구역질 나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사회면을 보라. "홍길동씨는 길을 가다 김길동씨와 만나서 함께 이길동씨 집에 가서...홍씨는...김씨는...이씨는..." 염병할! 국가의 주인은 홍씨 이씨 김씨로 부르고 주인의 종들은 꼬박꼬박 직함으로 불러준다. 이러면 안된다. 영어처럼 직함은 이름 앞에 오고 이름 뒤에는 씨를 쓰거나 그냥 생략해야 한다. 즉, 기사 처음에는 "오세훈 전서울시장"이 아니라 "전서울시장 오세훈"은..전대통령 이명박은...이렇께 쓰고, 이후에는 이명박은...오세훈은..박원순은.... 이렇게 기사를 써야한다. 첨에는 공무원이나 공직자부터 시작하고 점점 일반 시민사회로 퍼져나가게 한다. 역시 드라마를 통해서 대중을 교육시킨다. 그래서 회사에서 "홍부장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홍길동! 이라고 부르게 되기까지(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지속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어야한다. 또한 친구들 사이에 이름을 부를 때 뒤에 접사를 생략하도록 한다. 즉, 길동아! 라고 부르는 대신 홍길동! 혹은 길동! 이라고 부르게 한다. 왜냐하면, 선/후배 간에 이름을 부를 때 선배는 길동아! 라고 부르는데 후배는 길동형! 이라고 부르는게 현실이다. 이러면 안된다. 이름 부르는 순간에 벌써 두사람의 권력관계가 성립해버린다. 이름 뒤에 접사를 생략하도록 어릴 때부터 습관을 갖도록 하자.

(4) 우리 언어의 큰 약점 중 하나가 2인칭 대명사가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남녀노소가 상대를 부를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영어 유(you)를 직수입할 것을 제안한다. 역시 드라마나 광고등을 통해서 대중들이 익숙해지도록 유도한다.

(5) 목록을 만들자면 한도끝도 없다. 원칙은 하나. 공동체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민각개의 탄생을 위해 과감하게, 다소 심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법적, 제도적 굴레를 없애야 한다. 그래서 우스개소리로 "설령 내게 유리하더라도 국가가 시키면 하기 싫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밀어부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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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신문기사 : "...김대중대통령은 이명박전서울시장과 박근혜전한나라당대표를 만났고 이자리에에는 김영삼전대통령 시절 청와대수석비서관을 지낸 이재동(가칭)전수석비서관이 있었는데.....이날 박전한나라당대표는 이전서울시장과...또한 이전수석비서관은 김전대통령의 뜻을...김대통령은..." 뭐 대충 이렇다. 기사 뒤에 가면 성에 직함만 붙어 나온다. 정말 헛갈려 돌아버리겠다.

 

그런데 일반인들에 대한 기사는 이렇다. "...홍길동씨는...고길동씨를....이에 고씨는 홍씨를...."

 

일단 첫째 : 일반인들은 그냥 씨라 부르고 윗넘들은 다들 직함을 붙인다. 씨바 이게 말이되냐? 일반 시민들은 하대해도되고 관료들은 깍듯이 직함을 붙인다? 좃도 이건 말이 안된다. 이런 구역질나는 태도를 버려야한다.

 

두번째 : 애시당초 윗대가리넘들을 무슨무슨 직함으로 부르는 것 자체를 바꿔야 한다. 뭐? 우리말의 특징이라고? 좃을 까라! 그따위 특징은 버려도되지 않을까? 직함으로 부르는 관습을 혁명적으로 때려부숴야 할 때이다.

 

이게 일반인들의 삶에서 실현되기는 매우 어렵다. 언론이 앞장서서 바꿔야한다. TV, 신문 등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관련된 사람을 씨로 불러야 한다. 직함이 필요한 경우는 이름 앞에 적으면 된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아니라 전대통령 김영삼씨로 불러야 한다. 이건 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부터서는 그냥 김영삼씨로 부르면 된다. TV토론등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차츰 일반인들의 삶으로 퍼질 수 있게 된다.

 

또하나,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드라마 등에서 이런 호칭을 쓰도록 권고하는 방법이 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나 쓸 수법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나는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서 사장을 홍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홍길동씨! 라고 부르는 장면. 물론 처음에는 매우 낯설것이다. 당연하다. 수백년을 지켜온 버릇인데. 하지만 이렇게라도 바꿔야 한다. 1945년 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바꿔나가야 한다. Better later than n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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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생각해보는 영어공영어론

2011/10/09 19:50

90년대 후반에 영어공영어논쟁이 있었다. 복거일씨가 문제를 제기해서 발생했는데 찬성진영의 요지는 대략, 영어 잘해야 경제활동이 편해지고, 세계와 의사소통이 편해지고, 영어로 된 지식.정보를 좀더 쉽게 습득할 수 있다...뭐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첨부터 모국어로 습득시키자는 주장인데, 영어로 된 텍스트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오리지날 텍스트가 영어인 것만 따지자면 조금 계산이 달라진다. 즉, 원 텍스트가 프랑스어이고 그걸 영어로 번역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건 프랑스어로 쓰여진 텍스트를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것이다. 영어로 쓰여진 그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과 원래의 프랑스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다시 말해, 영어로 쓰여진 그 수많은 텍스트는 영어사용자가 이해한 세상이지 세상에 대한 그 자체의 지식은 아니다. 물량공세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법. 난 오히려, 영어로 된 텍스트를 잘 이해한다는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이 영어사용자보다 더 유리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약간의 역설이지만, 내 똥냄새를 맡아본 사람이 남의 똥 냄새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로 남의 똥 냄새를 맡아봐야 내 똥 냄새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오늘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뭐 이런 세세한 내용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난 영어공영어론에 찬성하지도 않지만 발악발악 반대하지도 않는다. 뭐 우리가 한글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당시 복거일씨가 좀더 근복적인 문제제기를 했기를 바랬다. 지금 대충 찬성론자의 말을 훑어보면 문제의식이 얼마나 얕은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그럼 내가 바랬던 그 '근본적'인 문제제기란 무엇인가? 영어공영어론이 우리말의 약점을 공론화했다면 민족주의니 뭐니에 휩쓸려버리기보다는 좀더 우리말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이다.

 

1945년 소위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부재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는 존칭어법의 개발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다시피 존칭은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부분이 비산업사회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는 현재의 산업사회에서 너무나 큰 불편함을 초래하고 있다. 이 부분을 국가와 국어학계가 개입해서 좀더 간편한 존칭어법을 개발하고 보급했어야 하며,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야한다. 극단적으로 반말을 표준으로 삼는 한이 있더라도 존칭때문에 우리 내부의 의사소통이 걸리적거려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생면부지의 상대방을 부르는 2인칭대명사의 부재도 문제다. 심지어 남영신씨는 영어의 '유'를 도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녀노소가 같이 쓸 수 있는 2인칭대명사의 개발을 요구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참고로 남영신씨가 쓴 국어사전 정말 강추다. 왜? 그 사전에서 '껍데기'라는 표제어를 보면 답이 나온다. 아마 오르가즘을 느낄 것이다.

 

철자법을 보자. 우리나라 어느 누구도 'ㅔ'발음과 'ㅐ'발음을 귀나 입으로 구별하는 사람이 없다.(글쎄..몇명은 아직 가능할까?ㅋㅋ) 훈민정음 창제 초기에는 당연히 양자의 발음이 구별되었다.(구별되니 구별해서 썼겠지~) 그러나 지금은? 다른 예를 들어보자. '부부'의 경우, 앞의 ㅂ과 뒤의 ㅂ이 발음이 다르다. 귀는 구별못하지만 입은 구별해서 발음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달리 발음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달리 발음된다는 뜻이다. 뒤의 ㅂ은 순경음ㅂ이라고도 한다. 유성음과 유성음 사이에서 무성음ㅂ이 유성음화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발음이 구별되지만 우리는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는다. 그런데 'ㅔ'와 'ㅐ'는? 귀도 입도 구별못하는데 굳이 구별해서 써야할까?

 

이런 등등의 문제에 대해 해방이후 우리사회는 아무런 해법을 고민하지 않은 채 지금껏 흘러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 영어공영어 논쟁이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영어공영어 진영에서 좀더 정확한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했다면 말이다. 봐라. 우리말 존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쓰면 지위 고하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우리말 씨바 호칭때문에 좃나 피곤하다. 영어를 쓰면 아무나 상대방을 이름이나 '유'라고 부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냐? 뭐 대충 이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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