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 퀴즈 하나 :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 아니면 아름답다? daum이나 naver의 사전을 보면 beautiful의 뜻은 '아름다운'으로 나온다. 그런데 '아름다운'으로 검색을 하면(한영모드에서) '아름다운'이라는 표제어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연하다. 국어사전에 '아름다운'은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은 '아름답다'의 많은 활용형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다시 daum이나 naver의 한영사전에서 '아름답다'를 검색하면 beautiful이 나온다. 즉, 한영모드와 영한모드에 비대칭이 발생한다.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으로 해야 하는가?
우리말은 동사, 형용사, 체언(+서술형어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지만 영어는 서술어의 기능을 동사가 독점한다. 예를 들어 "나 학생"이라는 글자의 집합을 보여주고 즉각 떠오르는 문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우리나라 사람은 "나는 학생이다"라는 문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 당연하다. 우리말은 체언이 서술어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나는 학생을 보았다"라는 문장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긴몰라도 드물것이다. 왜냐하면 '보다'라는 새로운 단어를 추가하기보다는 주어진 단어만 가지고 자족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를테니. 그런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에게 "I student"(좀더 정확히는 I a student가 되겠지만)를 보여주면 그들도 "I am a student"라는 문장을 떠올릴까? 아마 우리보다 훨씬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I saw a student" "I hit a student" 등등 말이다. 세상에 서술어 없는 언어는 없다. 영어는 동사가 서술어의 기능을 독점한다. 따라서 영어는 반드시 동사가 필요하다.
두개의 언어에서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단적으로 우리말의 조사 중에 영어에 없는 것이 있다. '학교에"에서의 조사 '에'는 to로 번역되지만 '나는'에서 조사 '는'은 영어로 번역될 수 없다. 사실상 I 자체에 '는'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I의 뜻은 '나'라고 보기 보다는 '나는'으로 보는게 맞을 것이다. 일반명사인 경우는? Tom의 뜻은 무엇인가? 경우에 따라서 톰은, 톰을, 톰에게 등등을 뜻한다. 문장의 위치에 따라서 뜻이 달라진다는 거다.(그때 그때 달라요~)
나는 beautiful의 뜻을 '아름답다'로 사전에 실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I am beautiful"에서 am의 뜻은? 없다! 우리말로 번역이 안된다. 단지 문장의 주어와 시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허사일 뿐이다. '아름답다'란 뜻은 beautiful이라는 단어에서 온전히 주어진다. 그러면 'a beautiful flower'는? 당근 '아름다운 꽃'이다. 이때 beautiful은 아름다운으로 번역될 뿐이다. 똑같은 Tom이 어떨때는 '톰은'으로 어떨때는 '톰을'로 번역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시콜콜하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사전은 아주 시시콜콜해야한다. 아주 정교해야 한다. 우리말에 대한 매우 깊고 정교한 이해를 토대로 '영한'사전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 '만들었어야 했다...." 언제? 1945년 이후에. 해방후 아주 한참동안 영한사전은 영일사전을 그냥 그대로 베꼈다. 아주 쉬었다. 표제어, 뜻 할 것없이 그냥 그대로 베꼈다. 당시 울나라 지식인들 일어를 얼마나 잘했나? 영일사전 펼쳐놓고 영어단어 쓰고 옆에 일본어로 된 해석 한글로 옮기는 것..여반장이었을 것이다. 소위 해방후 울나라에 일한사전이 새로 출판된 것이 대략 196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일한사전은 필요가 없었다는 말씀이다. 해방 후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한사전이 새로 편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말과 일어가 차이가 많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좀더 주체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일본어는 우리말과 너무나 비슷하다. 영어. 프랑스어를 번역하는 것에 비하면 일본어번역은 정말 식은 죽 먹기다. 해방이후에도 수많은 서양책들이 일본어를 통해 번역된 소이연이다. 그말은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서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이해했다는 뜻이다. 너무 어처구니 없지 않은가...?
영일사전을 통째로 영한사전으로 베낀 결과 일본식 어휘들이 대거 우리말에 침투해 들어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해방이후 우리말에 대한 전략 부재'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즉, 국어학자들이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영한사전을 만드는 과정에 아주 많은 참여를 했어야 했다. 생각해보시라! 당신은 일년에 국어사전 몇번이나 보는가? 그리고 영한사전은 몇번이나 보는가? 즉, 우리말을 갈고 닦는데 국어사전보다 오히려 영한사전이 더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제대로된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다고? 그렇다면 제대로된 영한사전을 만들여야 한다. 사전에서 anniversary 찾아보라. '기념일, 주기, 기념제..'등등이 나온다. 그런데 1891년 영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콧이 만든 영한사전에는 '돌'이라는 풀이가 있다. blind 뜻풀이가 '발'로 나온 영한사전 본 적이 있는가?
시시콜콜하다고? 언어에 대해선 좀더 시시콜콜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도 일본인처럼 우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democracy를 일본인들이 '민주주의'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서양 근대국가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democracy의 뜻을 이해하는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에게 알려준 '민주주의'일 뿐, 우리 스스로 이해한 democracy는 없다고 본다... 나는 이것이 슬프다.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이해한 세상...나는 그것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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