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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0

 

'제목을 글쓴 날짜로 대신할래요' 라는 기능이,

마치 바로 지금의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착각에 푹 빠진 채로 체크를 해버렸다!

 

나를 가득가득 메우고 있는,

혹은 나를 비켜지나가기만 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것들, 그것들, 바로 그것들 때문에

글을 쓸 수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쓰고 싶다.

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 또 들어버렸다.

"그건, 그런 걸 설명할 언어가 없어서, 체계가 없어서 그래요.."

어떤 종류의 안도감과, 어떤 종류의 책임감이 동시에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더 이상 무 기 력

이란 말로 이런 류의 순간의 내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휘 청 휘 청

거려도 되는,

내가 '사람'이란 사실을 느낀다는 것에,

 

 

휴우(한숨쉬는소리, 어떤 한숨?)

 

 

- 권김현영 씨의 섹슈얼리티와 폭력 강연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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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이영란 모노드라마

 

 



 

 

*

모처럼 느껴보는 살아있는 숨소리, 꼬물거림, 가벼운 발걸음의 나들이로서 오늘의 날씨와 내 기분은 좋았다!

자궁이동설부터 시작해서, 파펜하임에 초점을 맞춰 기존 정신분석학의 남근중심적 관점 비꼬기,

거식증과 폭식증 이야기로 이어지는 히스테리의 개념 변천사는 꽤 무난해서 조금은 나른했지만

인어공주가 가랑이와 목소리 둘 다를 욕망하고 있다는 것, 거품으로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살아있을 그 모습을 상상해보는 건 마음이 훈훈했다. 꺄하.

 

*

그렇지만, 생리나 월경이 여성성의 핵심인지에 대해서는..

여성성과 생리의 관계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꼬리표 가득 물고 있는 의문들.

<우리> 여성들, 이란 말은 조심조심 또 조심..

 

*

엄마들의 철학, '내 몸은 내가 간수하자' 와 마녀인 엄마들.

난자채취와 어린시절 성추행의 경험.

몸 몸 몸 들의 이야기.

 

 

*

문득 인트로를 보다가 떠오른 시 하나.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해서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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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움찔,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요즘.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더 깊숙이 빠져들테니 잠시 이 시기를 반갑게 맞아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은 도피하고 싶은 마음의 변명일까.

 

빠져나오려고 하는 내 조급한 마음이, 내 짜증을 돋우는 것인지,

혹은 어쨌든 내게 아직은 힘이란 게 남아있다는 걸 알리는 몸부림인지 헷갈린다.

 

제일 무서운 건,

무엇을 생각하고 떠올리든 '귀찮다'는 거다.

 

방에 몸을 돌돌 말아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설거지라고 하면서.. 샤워라도 하면서.. 컴퓨터라도 하면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류의 온갖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무서웠다. 정말-_-

 

마치 가위라도 눌린듯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놀라다가

발가락을 살짝 살짝 움직여봤다.

손가락도 움찔움찔.

헤에. 갓난아기처럼, 내 몸의 소소한 움직임이 기뻤다.

 

그래, 어쨌거나 살아있어.

 

담배 생각이 자주 나는 요즘이다.

난 중독되는 건 싫다.

중독되는 건 사람이란 걸로 충분하다.

담배 생각이 이전에 비해 더 '자주' 나고, 그 사실에 짜증내는 모습이 맘에 안든다.

필 수도 있고,

안 필 수도 있는 거다. (자기최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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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해지고 싶다'는 마음,

 

사람들을 대량으로,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만나게 되는 기간이 올해에도 왔다. 

시작 그리고 끝의 무수한 가닥들이 맞닿아 겹쳐지는 경계의 시기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라는 말들을 보고 듣는데,

이런 류의 말들이 괜시리 내 마음 속에 크게 울렸다.

 

나의 경우엔,

언젠가부터 사람들을 볼 때에,

'아, 참 좋다'라고 내 마음이 따스해지는 때는 많더라도,

'아, 이들과 너무 너무 친해지고 싶다'라고 내 마음이 달아올라 조바심이 나는 때는 많이 적어졌다.

 



 

그건

 [다가간만큼의 멀어짐을 인정하기] 라는 이전 글에서와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내가 이전의 관계들에서, 가까이 간 만큼의 멀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내게 있어 무언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부단한 부딪침,

때로 그 부딪침은 서로를 감싸안아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도 하고

때로는 뜨겁게 활활 타올라서 진땀을 빼게 하는 것은 물론 데어서 아프기도 하고

짓물러서 피와 고름이 흘러넘치기도 하는,

그런 부딪침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친하지 않았을 때'라는 표현을 쓰자면,

친하지 않았을 때의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피상적이거나 가식적이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게 보인 그 모습, 내가 보인 그 모습은 그 자체로 나였고 그 자체로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무언가에 있어서 '껍데기' 가려진 '본질'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내가 그닥 하고 싶은 일이 아니며,

내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지금의 관계와는 또 '다른' 무엇, 그 사람의 무엇,

그리고 나의 무엇을 발견하고 싶고 확인해나가고 싶은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부딪침의 과정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러면서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류의 감정들-사랑, 미움, 원망, 고마움, 기쁨 등등-을 상상하게 된다.

 

내게 있어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참 이중적, 다중적이다.

너무 좋지만, 그래서 미리 슬프다.

 

미래의 슬픔을 가져와 느끼는 척하면서 관계를 닫거나

더이상 새로이 맺어나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굳이 '나'와 '그 무언가'가 친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의 관계에도 감사하고 즐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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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임 소개글

 

2007년 새내기 자료집용.

무겁자면 너무나 무거운, 가볍자면 너무나 가벼운.

말 말 말 말 들.

 



<여우입술 소개글>


 


관계자 외 절대 환영~


여성주의 소모임 <여우입술>을 소개합니다! 




 안녕. 당신과 이렇게 글로 만나게 되어 -예상보다 더- 설레네요. 이 글을 누가 얼마나 읽어볼까, 내 마음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은 잠깐 꽁꽁 싸매어 키보드 옆에 던져두고, 곧 있을, 언젠가는 있을, 당신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여성주의 소모임 <여우입술>을 소개하려 한답니다. 예의를 차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나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드리자면, 나는 04년도에 새내기였고, 05학번들이 어설프게 새내기란 이름표를 떨어질듯 말듯 팔락거리며 붙이고 다니던 2005년 말경에 <여우입술>이란 모임을 제안해서 시작하게 된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죠. 소모임 ‘대표’냐구요? 대략난감한 표정을 날려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내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또 내 필요에 의해서, 나는 당신에게 아마도 되물을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대표’란 어떤 의미를 가진 거죠?”, “당신에게 ‘대표’란 어떤 건가요?” 라고. 꺄울.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다, 그쵸? 변명을 하자면, 내가 위와 같은 식의 대화를 즐겨 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씨를 따라 하기 위해서라거나, 상대방이 내게 왜 저런 걸 묻는 걸까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의심하기 때문은 아니랍니다. 정말로 난 궁금한 거예요.


 


 너와 나, 당신과 나는 ‘똑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게 맞나요? 얼핏, 같은 문자에 같은 문법 틀 안에서, 더구나 지구 반대편 사람도 아닌, 멀어봤자 꿈의 열차 KTX로 3시간 안이면 갈 수 있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이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정말 ‘똑같은’ 의미를 지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왜 대화를 하는 거죠? 어차피 다 아는 것들이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우리는 대화를 하고, 오해를 하고, 다투기도 하고, 놀라서 감동 받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죠. 그건 왜죠. 내가 하는 말, 그리고 당신이 하는 말. 그 속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쟤도 있고 걔도 있어서가 아닐까요. 같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마법 같은 어떤 것이, 계속해서 서로를 궁금해 하고 대화하고 싶도록 하는 게 아닐까요. 내가 말을 하고, 당신이 말을 하고, 쟤가 말을 하고, 걔가 말을 하고, 그러다 <우리>의 말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을 해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왜 이리 서두가 기냐’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무례한 생각 짚기를 잠깐 해봐요. 그런데 난 처음부터 계속해서 여우입술 소개를 하고 있는 게 맞아요! 나, 너, 쟤, 걔.. 이들이 서로 대화, 소통 할 ‘꺼리’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것이 아닌 적당한 껍질에 싸여서 적당한 이름들 속에 나를 숨기고 몸을 움츠린 채, 그 이름들에 모독당하면서” 살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특히 여우입술은, 그 '소통'이 여성주의들(feminisms)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며, 여성적인 것, 여성주의적인 사고를 매개로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제인 프리드먼에 의하면 여성주의들(feminisms)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열등하며 여성이란 섹스로 인해 직면하게 되는 차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는 공통적인 기반이 있지만,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사람들 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페미니즘들이 있을 수 있어요. 여우입술 속에도 그 다양함이 있지요. <반>구성원이면서 <여성주의>라는 끈의 관심을 공통분모로 해서, 이와 관련한 그 어떤 일이든 그 어떤 생각이든 나눠볼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여우입술이예요. 함께 같은 책을 골라 읽으며 공부를 하기도 하고, 온라인에서든 오프라인에서든 모여서 소란스럽게 영화를 보거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그런 모임이에요. 더 궁금한 게 있다면, 이 글을 쓴 하노이를 붙잡고 <여우입술>의 “여우..”까지만 말을 꺼내면 너무 기뻐서 지구 밖으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니, 이 분은 조심하시고, 주로 05학번 06학번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주세요. 꺄하. 보고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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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말이야,

작은 것, 방바닥에 부끄럽게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한 올처럼 작은 것에도 민감해지고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사실은 뭐,

'작은 것'이라 불렀지만, '큰 것'이 뭐냐고 질문 받는다면 딱히 할 말도 없는 것 같다. -_-

스치는 듯한 말 한마디에,

말 한마디까지도 아니고, 문자로 보낸 말의 한음절음절에,

온라인 립흘 하나에,

내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터질듯 부풀었다가 할 때, 그럴 때 말이다.

 

 

만약 지금의 나처럼

피 흘리는 시기라면

"아 삐리리~ 생리 때문이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이유를 갖다 붙이고 합리화시키면(설명가능해지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는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째서 "하자"가 아니라 "해라"고 문자를 끝낸 걸까. (별 생각 없이 그랬을 텐데. 별 생각 하는 내가 싫어)

왜 하필 지금 물어볼까. (그 사람이 신도 아니고 내 상태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냐 생각하면서도 미워)

물어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일 독촉하는 게 아닐까. (이러나 저러나 종이 한 장 차인데. 평소엔 기분 나빠하지 않으면서 이럴 때만 초시니컬해진다는..)

 

 

결국 작디 작은 연약한 날개짓에

내 온 몸은 큰 파도에 휩싸여서

당장이라도 전부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때가 있다. -_-

 

 

이럴 때면, 문득,

친구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게 정말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하기 싫어서 그렇게 문제로 보이는 게 아닐까?"

 

응.

하기 싫은 거야.

 

하기 싫은 내 목소리에 귀를 막진 말아야지.

하지만

너무 너무 하기 싫어서, 하는 순간도 있는거야. -_- 

난 성인군자가 아닌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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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와 나

누군가 내게 '대단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기분이 아예 나쁘다면 거짓일 것이고,

나름의 뿌듯함이나 우쭐함, '인정' 받았다는 느낌으로  

들뜨기도 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하노이는 참 대단한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괜시리 서글퍼지고 외로워져서,

수도꼭지를 어설프게 돌려 틀어놓은 듯,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쩐지 내겐,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난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으니, 앞으로도 하노이 혼자 열심히 해'

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들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단하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자신과 나와의 거리를 크게 벌이는 것같은 느낌에,

괜시리 외로워졌던 게 아닐까 싶다.

나에겐 그/녀와 무언가 '함께' 하고 싶은, 그/녀가 내게 개입해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욕구들을 버렸다고, 놓았다고 생각해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이니, 불쑥불쑥 나타나는 일을 나도 막을 순 없잖아.  

 

대추리에 가서, 지킴이분들을 만나고 짧지만 곁에 있으면서

내가 계속해서 꿀꺽꿀꺽 삼켜 먹어야 했던 말이, '대단하세요', '멋져요' 였다.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쩐지 경계를 뚜렷하게 하는 것만 같아서(경계는 이미 있는데도..).

 

무언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딱히 생각나는 좋은 말이 없었다.

결국은 대부분을 침묵...

 

'이렇게 잠깐잠깐 띄엄띄엄 다녀가는 나 같은 사람들이 얄밉지 않으세요?'

라는 물음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무언가가 두려워서..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공장만을 '현장'으로 생각하는 어떤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보면서,

'당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학교라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차별에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 다른 '현장'들과 단절된 공간이 아니다'는 말걸기를 주로 해왔다고 생각하는 나는,

 

차별과 폭력으로 인한 피해조차도, 여러 권력관계들조차도 위계적으로 생각하는 듯이-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나는,

 

내 생활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종류의 운동들과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것들 간의 연결지점을 찾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했다.

     

굳이 거칠게 내가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나누자면,

나는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낀 것들을 통해

내가 직접적으로 활동하는 영역과의 연결지점-그건 나 자신과의 연결을 찾는 노력과 유사하고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을 언어화해내거나 교류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여러 상황들에 놓이번 나는 매번 이런 생각들로 갈등하고 고민에 빠진다.

대추리에서 2차 철거가 있던 전날에 대추리의 길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용역버스를 막다가 철거가 시작되기 직전, 단대 학생회 차원에서 내가 속한 단대는 철수하고 서울로 올라가 저녁에 있을 국방부 앞에서의 집회 홍보에 주력하자고 결정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집에 가서 나는 펑펑 울었는데. 대체 서울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차라리 사람들이 모였던 바로 그곳에서 철거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게 낫지 않았을지 하는 자괴감으로, 무력감이 컸었다..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내가 평택의 평화에 '관심'이 많고, 주민분들이나 지킴이분들에게 크게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쨌거나, 그 사안에 있어서의 나의 위치를 계속해서 성찰해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자기비하를 가장한 책임회피는 그만.

좀 더 뻔뻔스럽게, 내가 할 일들을 찾아 나가고 싶다.

 

덧/

지신밟기는 보기만 해도 서럽게 흥겨웠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_-

제대로 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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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오래될, 부탁.

나(들)를 포함한 너(희)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난 잠들지 못하고 있어.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는 지금 막 불쑥 생각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두둥실 나타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어.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그 같은 상황(들)을 몇 십 번, 몇 백 번 떠올렸는지 너(희)가 그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언젠가는' 내 몸과 내 심장과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쑤셔넣어져, 내 일상 곳곳에서 튀어나와 내 발목을 붙잡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기를. 어디든지, 어떻게든, 언젠가는. 제발 내 속에서만 나만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함께 파괴되자는 권유는 아니야. 단지 나는 그만. 이젠 파괴가 아니라 마주보고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나(들) 중의 내가, "내가 너를 덮치면 어쩔려고" 류의 농담조로 말을 한다는 건, 내가 무서웠기 때문도 있다, 내 무서움도 섞여있었다는 거야. 너와 내가 매우 큰 변수라서가 아니라, 일순간 너와 내가 남자와 여자로 환원되기 쉽게 느껴지는 그 상황이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농담처럼 내 공포를 섞어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 반어적인 말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분명 나는 나(들) 중의 내 선택으로, 너(희)와 함께 하고 있었다. 하지만. 편안함과 즐거움, 재미와 흥분, 설렘과 함께, 공포라는 감정도 있었다는 거야. 현실에서 내가 너를 정말로 너를 덮칠 수 있는 여건과 의지가 받쳐준다면, 내가 그런 류의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닐까? 강자는 말하지 않고, 통보하지 않고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유리한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자기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해주면 되는 게-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때도 많겠지-그 권력관계라는 거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농담처럼 던지는 그 말-농담이 맞지만-에서 해부되어 들릴 수 있었던 그 목소리도 들어줬으면 하는 건 너무나 큰 바람이었을까. 나조차도 그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내질러 피섞인 비명이 되었을 때에야 어렴풋이 눈치챘으니까 말이지.

 

내가 농담으로 한 그 말과, 너(희)가 이미 실행에 옮기면서 "우리, xx할까?"라고 물었던 그 때 그 말. 나는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아마도 앞으로도, 고민했고 고민할테지. 내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마치 젠틀하게, 여성주의적으로 동의를 구하듯 물어보는것'처럼' 여겨지는 너(희)의 말이 폭력적이었을 수 있을까. 모두 내 책임으로 넘길 수 없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그 말을 미리 함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빌미를 던져준 것일까. 나는 차마 끝까지 쿨하게 갈 수는 없었던 사람일 뿐일까. 그 때 나는 끝까지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수 십가지 갈래들을 상상하며, 끊임없이 가지를 뻗쳐나가 햇빛을 못보게 되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밤을 지샜다. 그냥 해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너(희)는 내게 원하는 걸 말했는데, 나는 나(들)안의 여러 나의 목소리들 하나 하나가 앞다투어 지껄여대는 통에,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들) 중의 나는 너(희)가 미웠다. 너(희)가, 너(희)의 흔적이.

너(희)가 그 자리들에서 소위 '진보'라고 일컬어지고 '좌파'라고 일컬어지고 '여성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따위의 말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너(희)를 그렇게 칭하며 이야기할 때, 나는, 내게 이미 행동을 취하며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의 너(희)의 모습이 언제나 어김없이 떠오른다. 나는, 너(희)의 흔적에 포함 된 진보니 좌파니 여성주의 따위 조차도 밉다. 너(희) 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어서 일까. 너(희) 자체라는 게 애초에 없어서일까. 나는 그것들이 미웠다. 그것들에 함께 하려 했던 내가 미웠다.

그런 것들을 입에 담거나 관련한 행동을 한다면 보다 더 결백하라는 요구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나는 그 이미지들이 겹치건만, 너(희)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 보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것.

 

너(희)와 겹치는 생활공간에서 발견되는, 발견할 수밖에 없는 너(희), 너(희)의 흔적도 미웠다. 떠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떠난나면, 그 모든 원인이 너(희)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너(희)가 있는 그 공간이 너(희)로 인해 또 미웠다. 떠나고 싶다. 이제 학년이 높아졌으니, 여학우였으니, 공부할 게 많을테니, 졸업을 해야 할테니, 등등으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할 수도 있다. 상관있어 할 수도 있다. 너(희)가 떠나기만 하면, 마치 그걸로 내가 편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따위는 하지도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 생각들, 그리고 또 그런 류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의 실행에 옮기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나(들) 중의 어떤 내가 정말 '쟤(들)가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더라도, 그 어떤 나의 목소리를 인정은 해도 동조하지 못하는 내 목소리들이 더 많다는 걸, 나는 알 수 있다. 그것은,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희)를 가장 빨리 떠올리고 가장 많이 원망했던 순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우리, xx할까?"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 절망감. 어떤 나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싶은 순간에, 너(희)의 모습이 재빨리 떠오를 때면,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희)를 떠올리고 나는 내 욕망의 검열을 강화하고 내 욕망을 회의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쩌면 이러한 면들은 너(희)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 하게 된 어떤 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다 더 신중해져서 함께 더 즐길 수 있게 될 가능성을 크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전히 잊고 싶지는 않은 일이다. 진심으로. 

 

세상이란 곳은 내 안의 어떤 나도 감히 어찌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도 있는, 지랄 맞은 곳이니, 언젠가의 어떤 나는 너(희)에게 "우리, xx할까?"라고 먼저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장면도 충분히 상상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언젠가의 어떤 나는 그 때의 어떤 나와 지금의 어떤 나를 모두 포함하는 변화된 변화 중인 변화할 나일 거다. 내 변화에 너(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꽤 크게 차지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 너(희)는, 나(들)은 서로에게 세상에게 관여 중이라는 것,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좋아한다면, 이해하고자 노력을 한다면, 차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말, 언어' 그 자체의 한 면만이 아니라, 그 상황과 분위기를, 얼핏 놓치기 쉬운, 말하고 있는 그 사람조차도 모를 수도 있는, 유령같은 타자들의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보자고, 너(희)에게도, 나(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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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나는

벌레를 잡지 못한다. '잡지'?

벌레에 손대지 못한다.

벌레를 맨손으로 만지지 못한다.

 

동생과 살기 위해 오래된 투룸으로 옮기면서,

이전에는 혼자 냉랭하게 깔끔한 신축 원룸에서는 단 한 번 마주친 커다란 바퀴벌레와 비슷한 크기의 벌레들을

이 곳에서는 종종 만나야만 했다.

 

동생이 있을 땐 괜찮지만,

동생이 없을 때 벌레와 마주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걔도 나 땜에 놀랐겠지만, 나도 걔땜에 놀란다.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 동작이 경직되었음을 느낀다.

 

마주쳤던 걔가, 내가 당황한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그 이후가 더욱 공포스러워서, 나는 점차 강해지게 되었다.

 

 



조용히 고무장갑을 끼고 신발을 신고 나서 벌레를 향해

에프킬라 류의 스프레이를 열심히 뿜어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생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집에 벌레의 시체들은 하나 둘 늘어났다.

벌레를 건드릴 수 없는 나는, 스프레이를 뿜어댄 이후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살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했었다.

 

오늘은..

통로도 아니고 바로 내 방바닥의 주요한 부분에서 벌레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엄지손가락만한 벌레였다. 더듬이 부분에는 먼지를 이고 있어서 문득 미안뜨끔했다.

 

당황한 나는,

근처에 있던 신문지로 그 벌레를 덮고, 눌렀다. 맨손으로!

잠깐 누르다 신문지를 들춰봤는데 벌레가 생생한 모습으로 기어 나오려 해서

나도 모르게 신문지를 다시 덮고 꾸욱꾸욱 눌러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문지를 들췄다가

파편을 흘깃 보고, 놀라서 다시 덮어버렸다.

 

죽였다, 는 생각이 드니까 무서워졌다.

 

내 두 손을 가만히 쳐다봤다. 무서웠다.  내 손이, 내가.

 

사라지면 내가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서(물론 불편함 이상으로 마음이 긴장되긴 하지만..)

징그럽다고 해서.. 무섭다고 해서..

어쨌든 내가 그렇게 죽여도 되는 건지.

문득 무서워졌다.

 

찜찜한 마음으로 신문지 덮인 그 상태 그대로 두고,

집을 나서는데

 

"벌레 보듯 한다"는 일상적인 표현이 떠올라서 더 괴로웠다.

 

 

내가 좀 더 힘들더라도

살아서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 없을까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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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칼, 정호승

부드러운 칼, 정호승

 

칼을 버리러 강가에 간다

어제는 칼을 갈기 위해 강가로 갔으나

오늘은 칼을 버리기 위해 강가로 간다

강물은 아직 깊고 푸르다

여기저기 상처 난 알몸을 드러낸 채

홍수에 떠내려 온 나뭇가지들 옆에 앉아

평생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낸다

햇살에 칼이 웃는다

눈부신 햇살에 칼이 자꾸 부드러워진다

물새 한 마리

잠시 칼날 위에 앉았다가 떠나가고

나는 푸른 이끼가 낀 나뭇가지를 던지듯

강물에 칼을 던진다

다시는 헤엄쳐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대숲 너머 멀리 칼을 던진다

강물이 깊숙이 칼을 껴안고 웃는다

칼은 이제 증오가 아니라 미소라고

분노가 아닌 웃음이라고

강가에 풀을 뜯던 소 한 마리가 따라 웃는다

배고픈 물고기들이 우르르 칼끝으로 몰려들어

톡톡 입을 대고 건드리다가

마침내 부드러운 칼을 배불리 먹고

뜨겁게 산란을 하기 시작한다

 

-

 

분노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건, 내가 지친다.

분노 뒤에 웃음이, 슬픔 뒤에 행복이 올거란 믿음은,

바로 지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뿐,

바로 지금의, 뒤엉켜 연결된 여러 가닥들을 느끼지 못하게 할 뿐.  

 

오래도록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슬퍼하고 싶다.  

언제고 다시, 누구에게든 슬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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