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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위계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나이가 들수록,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이 많아진다.

내 세계의 부서지고 깨짐을 경험하고 싶어서 말을 할지언정,

내 말의 옳음-이런 게 있기나 한건지-을 확인하기 위해,

말을 하고 싶진 않아.  

 

피해의 폭로라는 전략과 피해자화라는 폭력 사이에서,

자신의 편협함을 망각하는 편협함과 인정투쟁의 절박함 사이에서,

 

경험이 위계적인 권력이 되지 않도록.

 

 

- 2007년의 서늘한 마침표와 시작점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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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졸렬해지자. 좀 더.

숨 막힐 것 같은 '공적'언어들에 대한 강제에 움츠러들지 말자.

졸렬해지자, 마음을 내뱉자.



<당신은>


 당신은, 새터 도중에 내가 누군가 챙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술 마시는 양을 조절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함께 있던 어떤 동기/후배/선배가 과반이 “모두” 모였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을” 때, 눈치 챌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그 사람이 혹시 어디선가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온 새터 장소를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동기/선배/후배에게 “힘들지 않냐”고 마음을 담아 물어보는 일을 했었습니까?

 당신은, 아래와 같은 일을 겪고 난 뒤 새터 이후에 “미안하다”라는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들음으로써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고학번 서포터즈’에서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고 그것이 내 잘못도 아니었음에도 나는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해야 하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다. 몸이 부딪쳐 튕겨나갔지만 그것은 몸이 약한 내 잘못인 것 같았고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최대한 크게 내도 뒤처지는 것 역시 다른 반 서포터즈들과 비교해 ‘약점’이 될 수 있는 내 잘못이 될 수 있었다. (중략..) 폭력적인 언사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동기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이 앞섰다.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투명한, 사라진 존재로 만드는 분위기.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자신이 없어야 할 곳임을 느낄 때, 가슴까지 따끔한 가시밭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 <2006년 사회대 새터의 분위기 폭력을 ‘느끼고’, 비판하며>, 작년 새터 직후 한 학우의 글


  “남자애들은 이렇게 응원하고 여자애들은 뭐, 옆에서 박수치면 되겠다.” , “응원을 하려면 높은 목소리는 효과가 없어. 낮은 목소리가 있어야지.”라는 말에서, 그런 말뿐이 아니라 응원에 남자들의 ‘우렁찬 목소리와 힘찬 동작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분위기.. (중략) ‘저도 07,08,09 새터에까지 와서 선배들(대부분이 남자)처럼 멋진 고학번 서포터즈가 되고 싶어요’ 라고 다짐하는 학우도 있지만 화장실에서 겨우 조그맣게 ‘결국은 남자들만 남는 건가요’ 라고 묻는 학우도 있다는 걸 아시는지. (중략) 반의 열광적인 다른 반 쳐들어가기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쉬러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시는지.

 - 2006년 사회대 새맞이 기획단 문화팀 평가서 중

 

 

 겨울딛기 디딤이들은 보았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여러 비판의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응원들이 2006년에는 ‘언터쳐블(untouchable)'한 응원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점점 더 손쉽게 고민을 놓게 되는 상황들을. 그 속에서 고학번 서포터즈의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심지어 응원을 주도하는 상황들을. 2006년 새터 이후에, 어떤 반에서는 반 이름의 사과자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반에서는 반대표의 사과문이 타 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사후(事後)에 그리 야단스레 사과할 일을, 어째서 그 당시에는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내 의지가 아닌, 술의 탓입니까. 아니면, 새터는 ‘원래 그러고 놀려고 가는’ 곳이어서 저지르고 보는 것입니까.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건을 공유한 사람들. 그러나 그 기억들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기억이란 것이 왜곡되고 굴절될 수 있고, 기억은 쉽게 추억이 되고 추억은 쉽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질 수 있습니다. 기억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제 생각해봅니다. 누구의 기억은 쉬이 인정받고, 누구의 기억은 조용히 은폐되는지를. 누군가의 기억이 ‘대다수의 기억’으로, 새터에 대한 ‘보편적 기억’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누군가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묻혀 개인의 고통으로만 남게 되고 어디로도 들리지 않게 된다면, 어떤가요. 인정받은 기억과 인정받지 못하는 기억은 단순한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두가 즐거웠던’ 새터에서 ‘즐기지 못한’ 나는 사회대의 구성원이 아닙니까? ‘재미있었던’ 새터 이야기에 쉽게 끼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다른 이의 말을 듣고만 있는 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가요? 내년 내후년 새터에, 작년 재작년 새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른 일정을 핑계로 씁쓸하게 불참하는 고학번 선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앞으로의 대학생활에서 새터의 기억은 편협되게-모든 개인의 기억은 편협하겠지만, 자신의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 편협함을 말하고자 해요-기억되고 비슷한 기억끼리 반복 재생산이 이어지기 쉽지 않을까요.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고, 나의 기억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내가 나와 유사한 여러 기억들과 함께 <우리>의 기억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 자신에게, <우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없었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기억과 우리의 기억이 알려짐으로써 당신과의 관계에 작게나마 ‘변화’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당신에게 2007년 새터에서는 내가, 우리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를, 당신이 우리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내가 나의 기억을 말하듯,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말하듯, 그리고 인정받기를 원하듯이 당신의 기억도 들려질 수 있기를 원해요. 재미있으셨나요? 즐거우셨나요?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셨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언제든 더 활발한 대화를 원하시는 분이라면, 겨울딛기 프로젝트 커뮤니티로 방문해주세요. 들려주세요. 당신의 기억도. 

 

2007 사회대 겨울딛기 프로젝트 온라인 커뮤니티 주소 http://club.cyworld.com/stepon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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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인가, 조증인가.

권태 [倦怠]

[명사]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조병 [, mania]

기분이 들떠서 쉽게 흥분하는 상태가 1주일 이상 계속되는 증세.

...증세는 유쾌한 감정, 자신감, 자기도취, 자기확신, 자기만족, 허세, 낭비벽 등이 나타난다. 의욕적으로 여러 계획들을 세워서 바로 실패하거나 포기할 만한 일들을 벌여 놓기도 한다..

 

-

 

모임 평가글을 써야 하는데(써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계속해서 글은 쓰지 않고,

결국은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있다. 에엑.

 

지난 2주정도 동안, 무척이나 '꽉찬' 생활을 해오면서도,

나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착착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2주정도 보다 덜 꽉찬 일정이었던 이번 주는 어째 이상하다..

 

몸보다 머리가 훨씬 바쁘고 피곤해한다. 많이 활동하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생각조각들이 뭉치고 뭉쳐서 질질 흘러내린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흘러내리고, 회의 중에도 흘러내리고. 자기 전에도 흘러 넘치는 게 보인다. 흑. 머리 땜에 몸이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남은 방학기간과, 다가오는 한 학기에 대한 생각들, 하고 싶은 계획들이 뭉클뭉클 솟구친다.

문제는, 생산적인 계획 세우기가 아니라, 붕 뜬 구름 같은 생각들로,

바로 지금, 내가 해오던 것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도피하고 있는 느낌이 함께 든다는 것이다.

 

해보고 싶은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어째 좀 찜찜하다는 것. 꺄악.

 

마음을 가라앉게 할 필요가 있다. 좀 더 자세히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떠오른 생각들 중에 몇 개는 대략이라도 메모해둬야지..  

 

-학내 성소모임, 혹은 여성주의 학회 관련한 네트워크 형성 방안이 없을까

 

-학생모임과 성희롱, 성폭력 상담소와의 연계 방법은 어떤 식으로 (활발하게) 가능할지 

 

-1학기에 학교 외부 활동의 수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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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개새끼들

미친놈들"

 

지금 나는

엄청 큰 소리로 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딘가 마구마구 지금 내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를 뱉어내야지만이 내가 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욕을 입밖으로 잘 뱉어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어린 시절,

욕하며 싸우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지켜보면서-,

욕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시끄러웠다.

웬 고상한 결심이람, 이라고 사춘기 시절에 이를 뒤엎으려는 시도를 해봤었지만,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딱히 욕을 해야 할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다.

욕 할 마음이 들지 않는데, 옆에서 다 한다고 일부러 욕을 하는 건 유치하게 느껴졌다. 

난 내가 욕을 하지 않는거라고 믿기로 했다. 사실은 못하는 거 였으면서.  

 

대학에 와서, 내가 얻은 것들, 배우고 나서야 내게 절실했음을 알았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분노하기, 이다. 정확히는, 분노한 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기, 랄까.   

바로 이런 마음이 '분노'라는 거구나, 하는 걸 느끼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내 대학생활의 어떤 시기는, 오롯이, 분노하는 마음만이 내 온 몸을 채우고 나를 움직이게 하기도 했다.

그게 내 분노를 '건강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 믿기도 했었다.

 

분노보다는 사랑이, 내게 더 행복한 동력일 수 있다는 것,

더 힘든만큼 더 가치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받아 안은 이후에 나는 분노하더라도 오래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분노할 일도 새삼 줄었으며, 편안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

분노의 감정을 넘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만큼 활활 타올라 내가 죽어버려야만 가라앉을 듯한

그런 일들이 있다.. 오늘이, 또 그러하다.

 

"개새끼들

미친놈들"

 

기타 등등의 욕을 하고 싶지만, 또 나오지 않는다.

"개새끼" 라고 하면, 어쩐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공격인 듯한 느낌과, 어째서 '개'취급 받는 게 욕인가 싶기도 하고,

'미친' 사람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지는 "미친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걸 따지고 있는 나 자신도 미친년일지 모르거든. 내 분노를 알맞게 표현해 줄 수 있는 통쾌한 말들은 과연 있기나 한걸까.

 

모르겠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지만, 그 사정을 공개적으로 밝힐 사정도 되지 못한다. 젠장할. 젠장할.

 

모쪼록 내가 살아나갈 수 있길. 내가 할 수 있는 내 몫을 해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이란 이 포스트 제목은 김연수의 소설들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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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여행1 _ 고정희 시인 생가

하노이님의 [더 먼저 더 오래] 에 관련된 글.

 

27-28일 여행의 루트를 대강 정리하자면,

 

27일>> 빠른 9시 10분 서울 센트럴시티에서 해남으로 출발 -> 오후 2시경 해남버스터미널 도착 -> 식사 -> 4시 반 고정희 시인 생가가 있는 송정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1인 850원) -> 5시 좀 넘어서 생가 도착 !!!  -> 6시 45분쯤 해남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 저녁 7시 반 터미널에서  땅끝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다(1인 3700원) -> 땅끝마을까지는 한 시간 정도 소요 -> 저녁 -> 하얀거탑을 본 후 잠 속으로 

 

28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땅끝 전망대까지 걸어 올라감 -> 약 30분이 걸려 땅끝 전망대 도착, 일출 기다림 -> 구름에 가려 잘 안보이던 해가 7시가 좀 넘어서야 모습을 드러냄! -> 땅끝 모노레일카를 타고 땅끝슈퍼로 이동 -> 땅끝슈퍼에서 해남버스터미널로(한시간 정도 소요) -> 식사 -> 오전 11시 서울로 출발~ -> 4시 넘어서 서울 도착.

 

서울에서 해남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기도 하고, 28일날 오전에 서울로 출발해야 했기에,

해남에서 정말로 가보고 싶은 단 한 곳, 고정희 시인 생가만 꼭 가자고 정한 채로 무작정 내려갔다.

 

대둔산 대흥사나 윤선도와 관련한 곳도 가보고 싶었고 고천암 일몰도 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알아볼 때 해남의 대중교통편이 그리 원활하지는 않다는 이야기와 어느 곳이건 시간을 길게 잡아야 한다는 말을 봤었고, 실제로 버스시간 간격이 참 넓었다. 땅끝마을의 경우엔 그나마 자주 있는 편이지만 버스터미널에서 땅끝마을까지 한시간 정도 걸린다는 거..

 

고정희 시인 생가를 다녀오자 벌써 해는 져서 어두웠고, 날이 생각보다 많이 추워서, 바로 땅끝마을로 가서 자고 일출을 보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해남터미널에서

 

 

터미널에 도착하고 나서, 생가에 가는 버스는 2시간 후에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시골느낌이었다. 좋았다..흐흐) 어딘지 잘 알 수 없어서 무작정 택시를 타자니 어쩐지 겁나기도 했고, 밥 먹고 여기저기 둘러보면 되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인터넷에서는 해남 여행 루트에 시인 생가를 잘 찾아볼 수 없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들 중에서는 고정희 시인 생가 장소를 모르시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후훗. 물어보고 난 후에 2시간 있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왔을 때도 아저씨들은 얼굴을 기억해 주시고 어떤 버스를 타면 된다, 어디에 내리면 된다, 등등 신경써주셨다. >_< 호홋.

 

 

 하늘이랑, 하늘과 산이 만나는 선이 참 예뻐서, 마구마구 찍은 사진들.

 

 

버스에서 내려준 곳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생가가 나온다. '사람 사는 곳' 같아 보였다.(이상한 표현이네..) 생가와 함께 있는 일반 가정집은 고정희 시인의 유족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집이다. 사람이 있나 확인하고, 생가를 보러 왔다는 걸 알렸고, 들어가서 보세요, 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가에 들어갔다.

 

바로 옆에 늘 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였는지, 생가 안 역시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여기는 내 방이오", 하고 들어올 것처럼 생기있어 보였다. 난방이 되지 않아 방 안 공기는 차고, 발은 무척 시렸지만, 곳곳에 서려 있는 어떤 기운들 덕분에 마냥 들떠버렸다. 고정희 시인 역시 동인이었던 '또하나의문화'의 여러 동인들이 이 곳을 참 아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여러 흔적들. 그 외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흔적들과, 그녀의 흔적이 섞이고 섞여, 쌓이고 쌓여서, 어쩜 그리 포근한지. 그대로 거기에 눌러 앉아 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꽤 많이 쌓여있는 방명록들을 넘겨보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시인에게 쓰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혹은 정해두진 않았지만 이 곳을 찾을 어떤 누군가에게 쓰는, 그런 여러 글들... 나 역시 시인에게, 그리고 언젠가의 나 자신이 봤으면 하는 글을 써두었다. 꼭 다시 올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 "다음에 뵐게요."라는 말도 잊지 않고 써두었다는 거. 후훗.

 

+ 참, 고정희 시인이 고모할머니라며 이 곳에 살고 있다는, 11살, 3살짜리 자매인 두 아이. 말친구 해줘서 고마웠고, 은근히 부러웠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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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새단장,

 

해남 여행 기록을 남기러 들어왔다가,

블로그를 새단장 해버렸다!

 

기본 스킨도 아예 바꾸고,

그 스킨에서 이것저것 편집도 해봤다 헤헤.

 

얼마 전,

덕수궁미술관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열심히 열심히 에너지를 쑥쑥 받아왔던,

장 뒤뷔페의 그림과

 

시간이 많지 않아서, 하나 하나 온 신경을 집중하며 보느라

그날 하루 엄청 피곤했지만, 그래도,

나나연작에서 느껴지던 생생함, 열정이 아직까지 뿌듯뿌듯한

니키 드 생팔의 그림을 넣어놔서 기분이 좋다.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던 순간들, 느낌들을

내 블로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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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먼저 더 오래

 

고정희 시인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알고,

언젠가는 가보리라,  결심한지 일년이 좀 지났을까.

 

최근의 여러 무리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이번이 아니면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가야 하는 모임을 하나 포기하고, 주말을 비워서 다녀왔다.

 

해남여행을 다룬 수많은 인터넷 글들 중에서

고정희 시인 생가를 여행 루트에 포함하고 있는 여행 안내글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시인 생가를 방문한 기록들을 자세히 훑으며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살피다가, 결국 주소 한 줄만 기억해 놓은 채

일단 해남으로 떠났다.

 

여행은 .. 짧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갑자기 여러 소음들이 낯설게 느껴지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틈 속에 함께 하는 것이 익숙치 않게 느껴질만큼

내게 편안함, 평온함을 안겨주었다.

 

벌써 그 곳에 다시 가볼 생각을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번처럼 차가운 바람과 공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떨어야 했던 그런 날 말고,

(이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약간은 따뜻할 때에. 약간만 서늘한 때에. 가보고 싶다.

 

여행에 관한 기록은 곧 남겨놔야지!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문닫지 못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을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는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

 

 

이번 여행 덕분에 더 알게 된 고정희님의 시 중에서,

요즘의 내게 가장 마음에 와닿는. 언제까지나 기억하고픈 시가 있다.   

다 좋지만.. 3연과 5, 6연 참 마음에 든다.

 

'상처와 눈물, 외로움'이 '사랑의 삼보'라 하셨지만,

그것들이 사랑의 모든 구성요소는 아니라고. 그들의 합이 사랑은 아니라고.

단지, 사랑을 더 값지게 하는 것, 사랑이 필요로 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사랑은 내게 언제나 어떤 것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상처와 눈물, 외로움과 분리되어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주어진 게 아니라,

그 모든 과정들 자체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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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살아가는' 방법,

 

 

요즘들어 계속 드는 생각인데,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여기서 '살아나가는 방법'이란, 죽지 않고 호흡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간다는 뜻)

 

현명한, 똑똑한 노예가 되거나,

 

우울하게 미치거나,

 

명랑하게 미치거나.

 

물론 이런 세 가지 방법들은, 어느 한 사람에게 한 가지만 해당하는 게 아니고,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으면서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연속적이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고, 강제되기도 하고. 그런 거라고.

생각해봤다. 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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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간만큼의 멀어짐을 인정하기

 

언젠가부터, 몸이 느끼고 알게 되었던 내게 있어 사실인게 있다.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중에 꼭 그만큼 멀어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다가가는 법 뿐만 아니라

멀어지는 법 역시 알아야 한다는 것.

 

시작과 끝, 끝과 시작, 시작과 끝, 끝과 시작.

돌고 돌고 돌고 끊없이 이어지지만,

하나 하나 하나 가 모두 하나 하나 하나 인 관계들. 사람들.

 

 

한 때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적당한 거리두기"로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상에나 적당한 게 있기나 한건지.

 

넘쳐 흐르거나 모자라 허우적대는,

관계의 찌질함과 끈적함을 인정하지 않는 가식적인 쿨함은 내가 못견디겠더라.

 

지금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두려움 없이 연이 닿는대로 나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다가가려고 하면서, 동시에 그만큼 많아질 많은 멀어짐을 준비하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고자함과, 동시에 깊어지는 만큼 멀어질 큰 괴로움을 준비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어이없고 또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런 어이없음으로 점철된 게, 삶이 아닐까 하는 그런 또 어이없는 생각.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이 작은 미소와 코웃음 한 번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일찍 죽고 싶은 소박한 소원이 있었다.

그럼 당장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당장 죽는 것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내가 바랬던 그 소원이 무척이나 일방향적인 이기적이었음을, 시인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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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맞이 청소

 

*

 

열장짜리건 한장짜리건 낼까지 내야 할 레뽀를 쓰기 싫어서,

'아직은 글이 안써지네, 삘 받으면 써야지' 이런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계속 빈등빈등 컴질하던 때처럼 ..

 

회의 정리를 미리 해두겠답시고 컴을 켠 후에는

계속해서 다른 것들을 하게 된다 흑

 



내일은 고향에서 엄마가 오신다.

멀기도 하고 오는데 돈도 많이 들고 해서

아주 뜨음하게 오시는지라, 오겠다고 하면 반갑고 설레지만!

 

"이나 김치 좀 가져가야지.."라는 말이 나올 때부터

나의 난감함이 시작된다.

무겁게시리 가방 가득 가져오면서 힘들어할 게 뻔하기 때문. -_-

 

나: 그런 거 택배로 보내면 되지. 뭐하러 힘들 게 직접 가져오게..

엄마: 별로 안무겁다. 안무겁게 쬐끔만 싸놨어. 안무거운만큼만 가져가면 되지뭐.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

근데 언제나 마중나가보면 무거워서, 둘이 나눠 들어도 둘다 낑낑거렸잖아!! T_T

심지어 내가 마중 못나갔을 땐,

"이렇게 무거운 거 들고 오느라 힘든데 넌 나오지도 않고.." 라고 투덜댔잖아!! T_T

(남동생이 마중안가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흣)

 

이젠, 전화로 적당히 말리다가 안되겠다 싶으면 대강 지는척, 고마운척-_-(실제로 고마운 일이고 고맙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 마무리 짓고,

마중 나가서 예상했던 장면-무거운 짐들을 낑낑대며 가져오는 모습-을 목격해도

울컥 해서 짜증내지 않으려고-"안그런다며!!! 내가 뭐랬어!!"-마음의 준비를 해간다.

 

여기서 난감함이 끝이 아니라는 거!

 

집에 엄마가 있으면,

집에 엄마가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사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너무나 안정돼.

퀘퀘한 내 자취집이

그야말로 '환해지는' 느낌이 들어. 엄마가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

공기가 다르게 느껴져.

내게 있어 그런 존재의 사람이니까. '엄마'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이십여년 간 나를 케어해준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런거야.

 

그런데!!!!!

난 엄마가 내 방에까지 와서, 서울까지 와서-엄마도 설레하면서 온게 보이는데-,  

무상으로 힘든 가사노동하는 걸 보는 게 너무 불편해!

그리고 그게 다 '날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게 불편해!

 

엄마가 방에 올 때 항상 몇시간씩 삐까뻔쩍하게 방을 변신시켜 줄 때면 ...

닦여나간 먼지들이 다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듯, 그렇게 갑갑하다.

감사하는 만큼, 마음에 그늘이 져. -_-

 

그렇지만,, 절대 말려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엄마맞이 청소'를 한다.

 

청결함이나 청소에 남동생보다는 민감하지만 엄마보다는 무디기에-_-.

그리고 주위에 친구들과 비교해봐서도 무딘 편이기에;;

나 좋은대로 해놓고 사는 모습 그대로 두면

엄마가 할 일이 참 많아지기 때문에

엄마맞이 청소를 한다.

 

물론 내가 정말 나로써는 열심히, 불필요한 부분까지 마구 청소를 해도,

나보다 훨씬 가사노동에 있어 전문성을 가진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해놔도,

내가 미처 못본 부분들을 잡아내서,

"사는 꼬라지하고는~" 하면서 일을 시작하실테지만-_-

그래도 최대한 줄여 봐야지하는 생각.

 

청소를 하다가 문득 든 느낌인데.

그냥,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엄마맞이 청소를 하는 게 즐거웠다.

나를 위해서, 내가 필요한만큼 청소를 하는 것도 그럭저럭 유쾌할 땐 유쾌하지만,

(하지만 남동생에 비해 내가 더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했을 때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못난 감정에 휩싸이기도... -_-)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기쁨이 있구나, 하는 생각.

엄마를 위해서, 라고 하지만 그건 동시에 엄마가 일을 덜하면 내 마음이 좀 편해지니까, 

내 마음을 위해서 이기도 한것이구. 후훗.

 

엄마가 있을 땐 옆에 둘 수 없는 담배를 제거하는 걸로 마무리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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