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2/24 14:36

2022/12/24 붕대감기

23쪽. 어린이집에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은정은 서균이가 아직 깨어나지 않아서요, 말하며 울어버렸다. 엄마들 사이에서 어떻게 소문이 돌았을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소문 같은 건 돌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두들 걱정하며 말을 아끼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누구 한 아이의 엄마라도, 인사치레로라도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많이 힘드시지요? 서균이는 좀 어떤가요? 하고 말을 걸어준다면 좋을텐데.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은정은 그런 적립을 해둬야 한다는 생각도,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예측도 하지 못했다. 그런 식의 적립과 인출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노골적인 이해관계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친분을 쌓는 사람들을 남몰래 폄하했다. 학부모가 되면 더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가 도태되거나 정보에서 소외되는것을 예방하기 위해 옷을 잘 차려입고 학부모 총회에 나가고,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은 엄마들과도 모임을 만든다고들 했는데, 은정은 그런 작위적인 인간관계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얻을 것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만나 웃어 보이는 일은 회사에서 충분히 하고 있었으므로, 아이 엄마들하고까지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건 공교육의 실패일 테고 은정은 그 실패에서 비롯되는 부차적인 노력을 떠맡고 싶지 안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관계를 통해 얻을 것도 줄 것도 별로 없었다. 인간으로서 필요한 감정의 교류는 남편과 아이에게서 충족하면 되고, 정보는 책과 인터넷에서 얻으면 그만이었다.

60쪽. 세연이 달라진 것은 3년쯤 전부터였다. 아마도 율아에게 갑작스레 수족구가, 그리고 곧바로 장염이 찾아와 진경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여름부터였을 것이다. 세연이 갑자기계정을 닫았다. 몇 주 후 다시 계정을 연 세여는 더이상 일상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공유하는 글들의 성격이 달라졌고, 자주 댓글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달라지더니,쓰는 글들의 결도 달라졌다.

물론, 아이 때문에 추모 집회에 나갈 수 없었고, 그 어떤 행동도 할 수는 없었지만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어난 그 사건 이후 진경의 내면 역시 만만찮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세연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는 아니었다. 에너지 코어를 흡수한 캡틴 마블이 분노로 불타는 불주먹을 갖게 됐다면, 세연이 흡수한 무언가는 세연의 말캉말캉한 부분, 풍부하던 감정, 미성숙한 생각들, 마음의빈 공간들과 어떤 너그러움까지 모조리 태워 없애버린 것 같았다. 세연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지극히 적어졌고, 타인의 글에 대한 반응도 줄어들었다. 좋아해도 될 글인지 아닌지 몹시 신중하게 따져보고 위험하지 않은 글에만 반응을 했다. 진경은 자신이 올바름과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세연에게는 진경과 나눈 시간보다 올바름이, 자신의 원칙들이 더 중요했다. 대단히 건조한 어조로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책과 출판사에서 앞으로 나올 책들의 소식을 전하거나, 여성주의 관련 글들을 공유하거나, 이슈들에 관한 이력을 피력하거나, 하고 싶은, 지금 당장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그래서 짜증나는, 그래도 죽도록 하고 싶은, 그래서 우울한, 일들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했고 앞으로 분명히 할 일들에 대해서만 짧게 또박또박 적어 올리는 세연을 보면 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스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칙칙 소리가 나게 미스트를 뿌려주고 싶었다.

62쪽.세연처럼 똑바로 노려보고 매 순간 진지하게만 대하기에 진경은 자기 삶이 너무 팍팍하고 바싹 말라 있다고 생각햇다. 강해지라는 말을 들으면 혈관을 억지로 쫙 늘려서 강철 바를 밀어 넣으라는 말을 듣는 것 같았다. 

받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고 싶기도 했다. 네가 전에 말했었잖아. 여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는 안 될 것같은데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말이아. 너는 안타까워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때 너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많이 놀랐어. 그날 집에 가서 어떤 사람들이 결혼한 여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들을 찾아보았어. 그 말들에 대해 내가 반발심이나 슬픔이나 분노나, 혹은 어떤 사람들처럼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너는 놀랐을지도 모르겠어. 그것에 대해 무엇을 느낄 만한 자리 자체가 내 삶에는 없다는 걸 네가 이해하게 되면 더 놀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이야. 내가 삶으로 꽉 차서 폭발해버리지 않게 하려면 나는 나의 어떤 부분을 헐어서 공간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낸 공간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부정적 감정을 채울 수는 없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모르고 내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미움을 집어넣을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 그게 내가 해낼 수 있었던 최선의 생각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들어가면 그 자리는 꽉 차버리는 걸.

66쪽. 진경은 되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단정하고 올바른 여자도, 꼿꼿하고 강하고 바쁘고 카리스마 있는 여자도 되고 싶지 않았다. 진경은 가능하면 닳고 닳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 진저리가 쳐질 만큼 통속적인 여자가 되어 엄마의 가슴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너무 사랑했고, 인생을 낭비하기 싫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진경은 자신이 엄마의 기대를 뛰어넘을 만큼 똑똑하고 재치 있으면서도 다정하고 생기발랄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햇다. 하지만 엄마는 진경에게 결코 충분한 사랑을 준 적이 없었기에, 진경은 결국 목바른 사람이 되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연애가 끝나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맸다. 한 연애가 끝나기 전에 다른 연애가 시작되는 일도 잇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계속 진경의 발에 맞지 않는 단정한 모카신을 신기려고 들었다. 진경은 집에서 도망쳐 나오기 위해 결혼했다.  

  

 

160쪽. 너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걸로 강해지려고 하지.

자신을 드러내는 건 징징거리는 것이고, 

그건 곧 약자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나도 과묵해지고,

멋있어지고 싶어.

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외로움을 잘 못 견디는 내가 싫지만,

미움받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거나,

이리저리 단어를 검열하는내가 더 한심하게 느껴져.

나는 바보같은 말을 하면서 견딜 거야.

농담이라는 것의 위대함도 잊어버리고,

바보 같은 말을,

직설법이 아닌 문법으로 된 말들을 

더이상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주지도 앟는 세상한테,

모두가 올바르고 심각하고 훌륭한 말들만 하게 돼서

여유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이 끔찍한 세상한테, 

계속 같이 놀자고 멍청한 소리를 하고

헛발질을 할 거야.

난 바보고 멍청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화를 내나 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서서 싸우고 있는데

너는 그렇게 한가하냐고

자꾸만 물어보나 봐.

하지만 미안해, 이게 나야.

이렇게 웃음이 없고 똑바르기만 한 세상을

난 못 견디겠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22/12/24 14:36 2022/12/24 14:36

트랙백

https://blog.jinbo.net/haruharu/trackback/26

댓글

1 ... 4 5 6 7 8 9 10 11 12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