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22/11/18 12:37

2022/11/18 이제야 언니에게

<타인의 집> 손원평

44쪽. 지구 자체가 거대한 공동묘지이며 삶은 그 공동묘지 위를 끊임없이 순환해 생겨난 결과일 뿐이라고 위안하며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발을 디디는 게 인생이라면 그 죽음이 얼마 전 나와 같은 공간에 머물던 사람에게 닥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작자기 위안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정확히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일상으로 느껴질 때쯤,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화언니와 희진이의 특징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들의 껄끄러운 관계를 알아버린 후에도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행동 패턴과 시간을 파악한 나였으니까. 하지만 엮이지 않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그건 어느 날 재화언니가 내 방문을 두드리면서 곤란한 부탁을 하는 것으로 촉발됐다. -151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161쪽.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야가 물었다. 

이모는 내가 겪은 일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앙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야.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162쪽. 낯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을 때마다 제야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 중에도 있을까. 나와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 해도 절망스럽럽고 없다 해도 고통스러웠다.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165쪽. 새해가 되고 겨울이 멀어지고 바람은 순해졌다. 저녁 산책을 하며 제야는 이모에게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다.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이모가 말했다.

나는 내가 쓸모없는 것같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아. 나쁜 생각을 끊지 못하고 벌벌 떨고 사람을 경계하고 겉돌면서 점점 더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만 집중하는 것 같아. 쓸모없어야 아무 것도 안 할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당연해지니까. 왜냐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니까.

제야는 앞만 보고 걸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그럼 나는 뭐지 이모?

꼭 무언가를 해야 되느는 건 아니야. 너는 지금으로도 충분해.

167쪽. 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살아가고 있어.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서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어. 네가 조급해하지 않으면 좋겠어. 뭔가를 시작하더라도 여름 지나고 하면 좋겠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이모. 다람쥐 쳇바퀴 같은 거. 좋다가 힘들어지는 거. 힘들어서 내려왔는데 다시 타고 싶은 거. 아무것도 아닌 거. 근데 다람쥐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과인 거.

넌 다람쥐가 아니야.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해. 언젠가 정말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때가 오면 저절로로 달리게 될 거야.

나는 지금 이모 옆에 있어서 좋아. 안전하다고 생각해.

근데 우리 속에 있는 것 같아?

안전하니까. 

173쪽. 이모는 애를 쓰는 걸까? 이모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애쓰는 건 아주 멋지고 좋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이모가 애쓰는 걸까봐 여전히 두렵다.

이모의 말을 여기 적어둔다.

한숨이 날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아직 젊다. 지금도 나는 부자지만 앞으로 더 부자가 될 거야. 무슨 일 있을 때는 젊고 돈 많은 솔로 이모를 생각해.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이모의 말을 적어둔다.

나는 절대 이모에게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도망칠 생각으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모에게는 늘 웃으며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이모도 웃게 할 것이다. 

180쪽. 제니에게도 승호에게도 남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연애를 하다니 정말 남자를 밝힌다고 생각할까봐 겁이 났다. 그건 사실 제야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연애를 하다니. 그건 사실 제야의 머릿속 당숙이 하는 말이었다. 넌 정말 남자를 밝히는 애구나. 제야는 당숙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남자에게 잘해서 인정받으면 당숙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야는 늘 남자의 기분과 욕구를 살폈다. 자기감정을 모두 남자의 사랑과 연결시켰다. 남자가 있으나 없으나 우울하고 불안하고 외롭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남자가 점점 커져서 모든 걸 없애주길 바랐다. 제야의 기억과 망상을. 제야 자체를. 

189쪽. 눈을 떴을 때는 저물녘이었다. 창이 열려 있었다. 내가 창을 열어두고 잤나? 제야는 벽에 등을 기대고 창을 빤히 쳐다봤다. 제니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제니를 괴롭힐 것만 같았다. 자기를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제야는 이모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제니를 잃는 중이라고. 제야는 가깝고 익숙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우울과 불행, 자책감, 죽고 싶다는 열망.

200쪽. 나는 그가 스스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길 원한다. 내가 나를 혐오하게 된 만큼, 증오하고 자책하고 망가뜨린 만큼, 아니 나보다 훨씬 크고 깊게. 변명 없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수치스러워하길.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힘이 세고 덩치가 크고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 짐승이어도 좋다. 아무튼 그 무엇이 그를 강간하길 원한다. 자기 죄를 알 필요도 없다. 재산을 뺏을 필요도 없다. 가족을 해칠 필요도 없다. 명예를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가 당하면 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면 된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할까? 너도 즐긴 거 아니냐고 말할까? 네가 죽을힘으로 반항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까? 다 큰 남자가 겁도 없이, 다 큰 남자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 큰 남자가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어선 안 돼, 그런 말을 할까? 다 큰 남자가 술을 마신 것 자체가 문제라고, 다 큰 남자가 착각한 거 아니냐고, 다 큰 남자가 이미 소문이 나버렸으니 인생 글러먹었다고, 다 큰 남자가 총각도 아닌데 먼저 자빠졌는지 자빠뜨렸는지 알 게 뭐냐고 말할까? 가해자 보듯 그를 볼까?

206쪽.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가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돈이 많으면 돈이 많은데 무슨 대수냐, 궁핍하면 불쌍하니까 눈감아주자, 돈이 적당히 있으면 먹고살 만해서 잠깐 딴 생각을...... 그러므로 이곳에서 남자는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여성 할례가 있다고 들었다. 더럽고 불경하다며 생리하는 여자를 격리한다고 들었다. 여자를 재산 취급한다고 들었다. 결혼 지참금이 적다고 여자를 학대한다고 들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 해주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기겁할까? 우리는 뭐 다르나? 대한민국은 달라? 내 아들이 한 달에 거둬들이는 돈이 얼만데 젊어서 여자애 하나 건드린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이 땅은...... 야만인들. 파렴치한들. 

나는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날 그 일이 없었어어도 그는 분명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잊었어요? 저 사람이 나를 강간했잖아요.

말하니까 다들 얼어붙었다. 불편해졌다. 혀를 찼다. 남사스럽게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염치없게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벌레 보듯 나를 봤다. 난 벌레가 아니다. 인간이다. 나도 부끄러움을 안다. 나는 부끄럽지가 않다. 

216쪽.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은 그다. 그는 분명 그러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를 생각하고 그날을 생각하고 어떻게든 내 잘못을 찾아내려는 내가, 그의 친절과 다정함을 아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내가, 술 때문이었을까 의심하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는 자기를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자기를 저주했다면 내게 빌었을 것이다. 변명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사랑한다. 아낀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할 것이고, 자기 잘못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그렇게 지내는데, 그런 자기를 유지하는데, 어째서 나는 나를 저주하나.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가. 어째서 나조차 내게 책임을 묻는가. 나를 걱정했던 그와 나를 강간한 그는 한 사람이다. 친절하고 비열할 수 있다. 다정하고 잔인할 수 있다. 진실하고 천박할 수 있다. 그게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괴물이라고 말하기는 너무 쉽다. 너무 쉬운 그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너무 쉬워서, 아무 힘이 없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아닌 사람이어서 나를 강간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기만하는 편이 훨씬 쉬우니까. 그는 쉬운 인생을 살 것이다. 나는 여태 애썼다. 다시 애쓸 것이다. 나는 애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다. 

222쪽. 내가 고향에 이있지 않아도, 도시의 익명에 둘러싸여 있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잖아. 부모님이 있고, 친척들이 있고, 동네 사람들이 있지. 학교 사람들도 있고,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이 쌓일수록 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어. 내가 그럴 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 자체가 너무 끔찍했지.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226쪽. 여행하는 동안 나를 둘러싼 공기를 생각했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유령같은 공기가 가진 힘에 대해. 그 힘을 만들어내는 또다른 힘과 작용들에 대해.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어떤 힘에 둘러싸여 있는지. 나는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게 될 거야. 하지만 어릴 때, 나와 승호와 함께일 때 나는 달랐어. 강릉 이모와 함께일 때도 나는 달랐지. 나는 그냥 나였어. 나를 주장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나를 부정할 필요도 없었어. 

229쪽. 이런 말 정말 쓰기 싫지만 그래도 쓴다. 너도 잘 알겠지만 확인하는 마음으로 쓴다.

만약에 네가 성범죄르를 당한다면 증거를 꼭 남겨야 해. 녹음이든 사진이든 남겨야 해. 몸을 씻지 말고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 당시 입었던 옷과 속옷도 다 챙겨야 해. 안전한 장소는 없어. 집도 바깥도 위험해. 사람이 많은 곳도 사람이 없는 곳도 위험해. 도시도 시골도 버스도 택시도 공개된 장소도 밀폐된 장소도 위험해.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밤도 새벽도 다 위험해. '괜찮겠지'란 생각은 위험해.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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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8 12:37 2022/11/1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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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11/09 05:21

2022/11/09 공진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무실에서 몸에 좋은 거라고 공진단을 줬다.

오래 두면 상한다고 그래서 먹었는데 그 후로 몸이 계속 가렵더니

두드러기가 났다.

오른쪽 엄지손가락, 왼쪽 종아리

너무 가려워서 모기에 물릴 때 바르는 약을 발랐는데 쓰라리다.

지금까지도 쓰라리다.

가려움을 참았으면 되는데 긁는 순간은 시원하겠지만

이렇게 오래오래 상처가 남아서 괴롭힌다.

 

지난 주에 세 개의 사건이 있었고

세 개의 사건 때문에 괴로웠다.

상담가가 내 패턴을 말해주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에 꽉 막히면

의외로 한 개의 상황에 에너지를 집중해서 터뜨린다.

그래서 회복불능의 관계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내 문제를 잘 안다고 말하고

그래도 이번에는 노력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하니

그건 알지만 어쨌든 그런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책은 하지 말고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잘 보라고 했다.

네.

 

상담자는 세 개의 사건에 대해서 나름대로 듣고 분석한 후에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만 치환시키지는 말라고 했다.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내 잘못이라고 떠안는 건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자신을 알고 조금 더 나아지는 데에도

별 도움이 안되니

인정할 건 인정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덤테기를 다 씌우지는 말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다.

맞는 말 하는데 알았다고 하지 뭐라고 하나.

 

너무 지친 것같으니 수도원에 가서 

피세정념,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멀어져서 자신 안에 가라앉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피정을 계획했는데

사무실 워크숍이 있어서 그냥 거기로 갔다.

교육이 다 끝났고 이제 편집거리만 남아있는데 

주1회 정도는 사무실에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무실에 그렇게 얘기하자 자리가 없으니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세상에 머물 곳 하나쯤 있는 게 다행이다.

 

지난주부터 강화에서만 지낼 계획이었는데

남편 상황이 갑자기 급변하여 다시 내가 용인에 있게 되었다.

강화에는 교감하는 생명들이 많아서 마음이 나긋나긋해지는데

용인에서는 홀로 외로운 출장모드가 된다.

바삭바삭. 

일정표와 체크리스트를 작성해서

한줄씩 지워가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 줄 지우는 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도 진도를, 현재를 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가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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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9 05:21 2022/11/09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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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11/01 20:35

2022/11/01 회피

뉴스를 애써 피하고 있다.

나는 아마도 감당을 못할 것이다. 

그저 촬영본을 백업하고 하드를 비운다.

내일부터 진행될 편집을 위한 준비를 한다.

내일 저녁 수업이 끝나고 나면

이제 단 한 개의 교육만 남는다. 

촬영과 편집에 더 집중을 하겠다.

내 일만 바라보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

수습은 하되 자책은 하지 않겠다.

이 결심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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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1 20:35 2022/11/01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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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10/30 23:47

2022/10/30 후회

공든탑을 열심히 열심히 쌓다가 무너뜨려버렸다. 

6개월간 쌓아올린 공든탑이었다.

그냥 참았으면 되었을걸 나는 왜 그 밤에 갑자기 말을 쏟아냈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잘 참아왔는데

DMC 대회의실에서 영화가 막끝났는데

갑자기 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말았다.

상처받은 건 나인데

결국 일을 다 망쳐버린 건 내가 되고 말았다.

마음이 너무 무겁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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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30 23:47 2022/10/30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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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9/20 23:01

2022/09/20 하루2천자 시작

슬프든 기쁘든 외롭든 쓰겠다.

매주 화요일에는 오전과 오후에 각각 수업이 있다. 

오전 수업을 한참 진행하고 있는데 텔래그램이 왔다.

내 영화의 촬영감독이었던 h가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였다.

장례식 없이 내일이 발인이라고 한다. 

그 후로 수업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후 수업 전에 잠깐 서점에 들러서 책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서점으로 가다가 교육장으로 곧바로 갔다.

수업 전에 안정을 유지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차단막을 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두번째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뭘 먹기가 힘들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밥을 먹는 둘째 옆에서 나도 밥을 먹었다.

"우리 집에 왔던 그 이모 맞지?" 묻다가 밥을 먹고

또 한참 있다가  "왜 그런지 알아?" 물었고

나는 잘모르겠다고 했다.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 다만 장례식없이 곧바로 발인이라면 .... 하는데 말을 더 못 이어갔다.

피하고 싶은 단어를 소리내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있다 둘째가 말했다. 

"정말 그런 거라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아는 사람한테 그런 일이 일어난거야"

라고 했다. 

좀있다가 큰애의 전화가 왔다.

비슷한 대화를 하고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기도하자, 라는 말을 했고

큰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얼마전에 학교에서 친구도 그랬다고 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었더라도 같이 수업을 듣고 얼굴을 아는 친구라 했다.

정말 공기처럼 떠도는 것같다.

mi가 내게 피하라고 했던 사람이 있다. 

j에게는 우울증이 있고 가까운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니, 우울증이라는 건 말이야 맑은 유리컵에 물감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아.

언니한테까지 퍼지기전에, 언니....피해.

2009년에 그 경고를 들었고 어제 j를 다시 만날 계획이었다. 

회의가 6시 30분에 끝났고 j에게 어디서 만날지를 물으니

이렇게 저렇게 동선을 고민하다가 차 때문에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늘 j를 걱정했는데 h라니. 놀랍고 슬프고 속상하다. 

먼 데 일이라도 오늘 같은 일을 들으면 나는 늘 j와 y를 떠올렸다.

j와는 절교를 했다가 화해했고 다시 만나는 첫날이 어제였다.

남편에게 j이야기를 하며 마음을 좀 내어달라고 했다. 

"y는 내가 잘 연락할테니 j에게 가끔 연락을 하자,

어쩌면 아무도 연락을 안하는 사람일 수도 있어."

남편은 한숨을 쉬더니 알았다고 했다.

남편은 j를 경계한다.

내가 j를 만나는 걸 경계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알게된 j의 비극과

내가 늘 마음을 쓸 수밖에 없었던 첫 만남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수긍은 했지만 오늘도 내켜하지는 않는 것같다.

남편은 그에게 향하는 마음의 색깔이 무엇이든

연상의 남성에 대해서는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마음을 감지하면 나는 말이 많아진다.

많은 말을 하는 스스로를 느끼는 건 구차하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구차함을 꿀꺽 삼켜서라도 후회할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k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j가 떠올랐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전화를  했다.

j는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1년 전에 나는 j에게 절교를 통고했고 j는 억울해했다.

그 때 말했다.

"그냥 멀어지는 방법도 있었어. 그런데 그동안의 시간에 대한 예의를 위해 나는 정식으로 이별을 통고하는 거야"

j는 이럴 수는 없다며, 일단 지금 더 얘기하는 건 힘들겠지만 이건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뿐. 나는 그의 번호를 내 전화에서 지웠고 그 또한 내게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1년에 한 번 영화제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관계.

그리고 지난 2년동안 나는 영화제에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2년동안 우리는 타인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k의 죽음 이후 만약에 j마저 절교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못 견딜 것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영화제에서 j를 만났고

오랜만의 대화를 나눴고 그리고 말했다.

"k가 죽은 후에 형 생각이 제일 먼저 나더라.

예전같지는 않겠지만 안부는 묻고 살자"

j는 고맙다고 하더니 저번 주에 월요일에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내가 너무 먼 길을 운전해야 하니 다음 주에 만나자고 했다.

1년에 한 번이든 한 달에 한 번이든 나는 너의 안부를 살피겠다,

라고 다짐을 했는데 만남은 순조롭게 성사되는 것같았다.

오늘 h 소식을 듣고 혼자 있는 게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견디기로 했다. 

일을 하자 일을. 기계처럼 일을 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상태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무너진 마음 그대로 누군가에게 말을 시작한다면

마음 뿐 아니라 일상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그저 매일 쓰고 매일 생각하고 매일 할 일을 하자.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미안 (2,25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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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0 23:01 2022/09/2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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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8/20 08:57

2022/08/20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

44쪽.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79쪽. 식당을 나와 숙소를 향해 걷는 동안 나는 얼마간 흥분 상태였던 것같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인파가 눈앞에서 활짝 갈라지며 자, 이제 넌 앞으로만 걸어, 라고 말해주는 것같았어.

93쪽.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120쪽.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122쪽.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음 마비되어, 그 낯선 할머니와 작별한 일이 어느 사이 멀어진다.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밖으로 빠져나간다.

136쪽.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155쪽. 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 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134쪽.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68쪽. 차가웠지.

아니, 부드러웠지.

나는 고쳐 중얼거린다.

돌같이 단단했지.

입술을 뗄 때마다 피에 젖은 얼굴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린다.

아니, 솜같이 가벼웠지.

311쪽.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4쪽. 하지만 내가 까서 준 귤을 받아들면, 평생 새겨진 습관대로 반으로 갈라 큰 쪽을 나에게 건네며 가만히 웃었어. 그럴 때면 심장이 벌어지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나. 아이를 낳아 기르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생각했던 것도.

316쪽.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떠렁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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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0 08:57 2022/08/2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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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8/13 08:08

2022/08/13 화해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

언젠가 면담하던 학생이 내게 물었다.

너무 중요하고 너무 대단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도 깊이 연관되어있기때문이었다.

나도 그래. 나도 한 번 마음이 돌아서면 다시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더라.

방글방글 웃으면서 마음 속에 선을 긋고 떠나온 사람들, 장소들, 시간들.

이제 새로운 만남들은 없으니 별로 없는 지금의 관계들만은 소중히 여기고

조금 더 마음을 쓰자, 그냥 그렇게 돌아서지 말자

생각하지만 생각은 마음을 당해내지 못하네.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랜만에 그 애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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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3 08:08 2022/08/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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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7/28 06:48

2022/07/28 가스라이팅

며칠째 시계를 찾고 있다. 

시계가 없다. 

시계가 없으면 일을 못한다.

지우개가 없어도 일을 못하는데 시계가 없으니 일 하기는 더 힘들지.

우물의 표면을 덮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걷어내야 할 일을 할 수 있어서

잡동사니를 걷어내려고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한 줄을 쓰고 나서 남편 전화를 받았다.

......

통화가 끝나고 나니 쓸 말이 다 사라져버렸다.

미움도 사랑도 없는 담담한 상태.

이번 생애 우리가 닿으려고 하는 곳.

 

"참새들은 다 죽었어요.
어제 몇시간동안 손에 붙은 본드를 떼면서
힘센 내가 이 정도인데
참새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어요.
끈끈이 정말 무서운 거더라구요.
제가 발견했을 땐 세 마리가 살아있었는데
네개의 끈끈이를 갖고 나와서
한마리씩 떼어내는동안 한마리는 죽었어요.
어디에다가 둬도 그 끈끈한 게 사라지지 않아서
수건 위에 올려두고
모이와 물을 입에 대주었는데
큰나무캠프힐 촬영을 다녀올 동안
더 쌩쌩해졌어요.
그래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집에 도착했을 때
한마리가 죽어있었고
방금 전화해봤더니 남은 한마리도 죽었다고 합니다.

어제 닭장에서 처음 참새들을 보았을때의 그 충격이
지금도 가셔지지가 않아요.
죽음이 연루된 일을 당하면 늘 후회가
멈추지않는 후회가 몰려듭니다.
늘 5시쯤에 눈이 떠지는데
요즘 마감이 있는 책읽기가 있어서
일어나자마자 책을 읽고
한의원에 갔다가 줌회의를 했어요.
그리고나서 12시쯤에 닭장에 간 겁니다.

닭장에 조금만 빨리 갔으면
전날 강화에 도착하자마자 닭장에 갔으면
이런 후회에서 시작해서
남편에 대한 원망을 시작하고
그 원망을 시작으로
가라앉아있던 미움의 분말까지
온통 휘저어진 상태가 되었다가
강화집을 떠나기 전에
집에 와서 참새 좀 살려달라고 연락을 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편이 잡으려던 게 참새가 아니라
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미 너무 많이 미움이 진행된 상태라 변한 건 없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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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8 06:48 2022/07/28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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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7/25 11:36

2022/07/25_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44쪽. 자존감이란 무엇인가 자존감에 대한 정의는 심리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 대다수가 자존감이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저마다 자존감을 다른 의미로 정의하고 사용한다. 이것은 자존감 연구 분야에서 제기되는 주요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이다. 자존감의 개념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의견 차이나 논쟁을 모두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57쪽. 덴마크의 경우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직업의 귀천이 있었으나 직업 간 소득 격차를 줄이자 불과 한 세대 만에 직업의 귀천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겠다.

69쪽. 청소년기의 자존감과 관련해서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청소년기에 도달하면 아이들은 사회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자기의 암묵적인 신념과 과치관, 심리 상태를 기초로 일부 변형하여 수용 또는 거부하여 자기만의 가치 평가 기준을 확립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의 중고등학교는 경쟁교육, 입시 위주 교육이 지배하는 아수라장과 같다. 이것은 당연히 청소년들이 가치 평가 기준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커녕 자존감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73쪽. 결국 십대들은 자기의 결단과 노력으로 심리 치료를 받거나 자기 분석 등을 통해 자준감의 기초를 복원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다.

77쪽. 우리는 청년기에 정립한 인생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속 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인생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며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런데 청년기에 건강한 인생목표를 정립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손상될 가능성도 커진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직장에 취직해서 돈 버느라 바쁘게 하루하루를 흘려보낸다면? 결국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정한 기준을 따랐기 때문이다.

83쪽. 은퇴 이후의 중녀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인생 목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인생 목표는 죽는 순간에 맞춰져 있지 않다. 대부분의 목표가 길게 잡아야 직장 생활 혹은 경제 활동을 마감하는 50대 정도까지만 유효하다. 따라서 직장에서 은퇴하거나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인생 목표를 상실한 상태에 놓인다. 이미 평균 수명이 80세 이상을 돌파한 고령 사회에서 인생 목표가 없는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끔찍한 일일 수밖에 없다. 중장년이라는 나이라도 인생 목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88쪽. 한국인들은 80년대를 지나면서 이웃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 개혁이 아니라 철저한 각개약진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의 한국인들, 특히 노인들은 유사 이래 최고 수준으로 고독해져 있다. 한국 사회가 관계와 공동체의 복원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현재의 노인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91쪽. 너새니얼 브랜든. 자존감이 가치와 능력의 두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가치에 대한 믿음은 자기존중을 가져오고 자기능력에 대한 믿음인 자기 효능감은 자기 신뢰를 가져온다. 사람의 가치와 능력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상호작용하여 자존감을 상승시킨다는 브랜든의 주장은 훗날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93쪽. 어렸을 때부터 반복적으로 성취를 경험했던 사람은 현재의 능력이 다소 부족한 경우에도 자신감이나 자기 효능감이 강한 편이다. 반면 현재 상당히 우수한 기술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과거에 성취 경험이 적은 경우, 자신감이나 자기 효능감이 부족할 수 있다. 상당수의 심리학자들이 어렸을 때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해본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117쪽. 병적인 인정 욕구는 착한 아이가 되려는 욕구, 권력욕이나 명예욕, 돈에 대한 욕망 등으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꿔 나타날 수 있다.

116쪽.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 쉽게 말해 ‘나에게는 힘이 없다’는 확신을 갖는다. 자신의 힘을 불신하는 사람은 스스로 삶이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상황을 아주 두려워한다. 그 결과 강한 의존욕구가 유발된다. 강한 힘에 적극적으로 의존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존을 위해 누군가에게 의존하기 쉬운데, 대인불신이 심한 만큼 의존대상은 극소수일 수밖에 없다.

123쪽. 미국의 주류 심리학에서는 자존감 낮은 이들의 자기 파괴 욕규와 불행을 자초하는 경향을 ‘자기 충적적 예언’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내가 나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믿으면 불행해지는 일만 골라서 하게 되어 실제로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136쪽. 사람이 수치감을 체험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도덕적이지 못할 때이다.

둘째, 학대를 경험할 때이다. 예를 들어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 대부분이 수치심에 시달린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피해자인데,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사회가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고 사회적 제도와 관습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으로 상대에게 성적 대상, 성적 놀이감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회에 수용되지 못할 거라는 기분에 빠지게 하는 이유가 크다.

139쪽. 자기 혐오 “내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야” ... 상대에게 분출하는 통로를 차단하면 분노는 스스로를 공격하게 된다. 그 결과 깡패가 아니라 계속 매를 맞고 있는 한심한 자기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학대 심리가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경로이다.

141쪽.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얼굴이 빨개지면 울음을 터뜨리거나 언성을 높이기 전에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령 수치감이라고 판단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에 대해 언어로 표현해보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을 체험하는 원인을 파악하여 그것을 제거할 필요 역시 있다.

143쪽. 자존감 낮은 사람이 집착하는 것.

연애중독자의 사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연애는 친구 관계에 매달리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쪽에 일방적으로 맞춰주는 관계가 되기 쉽다. 이런 식의 연애가 지속되면 아픔과 상처만 남기고 매번 실패로 끝나며, 결국 더 절박해져서 또 다른 사람을 찾아 새로운 연애로 달려가게 된다. 하지만 상대가 바뀌어도 같은 패턴의 관계가 반복되다 보면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릴 수 있다.

145쪽. 또한 사랑받기라는 유아적 욕구에서 벗어나 사랑하기라는 성숙한 욕구를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관계 중독은 타인을 사랑하지는 못하면서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심리 치료나 상담 등을 통해 사랑받기라는 유아적 욕구와 과감히 결별해야 비로소 관계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첫걸음이 시작된다. 한두 사람과의 관계에 집착하고 매달리기보다 여러 사람들과 두루 관계를 맺고 건강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건강한 대인 관계를 경험할 필요도 있다. 이로써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147쪽.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남드한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다. 나들이 아무리 좋게 평가하고 반복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도, 상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분명히 자기를 싫어하고 버릴 거라고 두려워한다. 또한 자기확신이 부족하고 실수를 매우 두려워한다. 때문에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항상 무언가를 감추려 하며 위장이나 포장을 하는 데 익숙해져있다.

153쪽. 자존감 낮은 사람이 소속된 모임이나 조직에는 분란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다. 악성 루머와 이간질의 명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은 침체와 답보를 면할 수 없다.

179쪽. 윌리엄 제임스. 자존감의 본질과 관련한 세가지 중요사항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존한다.

-자기 개념과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정이든 비난이든 가치 판단에는 감정적 반응이 수반된다.

182쪽. 자존감을 논하면서 연대의 필요성을 말하면 일부 심리학자들은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고 존중해주는 소속 집단의 존재는 잘못된 사회가 강요하는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선한 이웃과의 연대와 건강한 소속집단은 자존감의 수호자이자 중요한 원천이다.

185쪽. 사람은 자존감이 낮아지면 기본 욕구가 아니라 의존 욕구, 지배 욕구, 과시 욕구 같은 병적인 욕구를 실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무가치함, 무력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당사자가 의식하건 의삭히자 못하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인생 목표는 과시 욕구의 실현이나 무가치감의 방어를 위해 설정된 병리적인 목표일 수 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가능성은 낮다. 자존감이 낮은 경우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낮아지고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185쪽. 건강한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살아간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기쁨과 만족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누군가가 부산이 너무 좋아서 그곳에 가기를 바란다면, 그는 수원에 도착해서도 기쁘고, 대전에 도착해서도 기쁘며, 대구에 도착해서는 더더욱 기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쫓기는 삶, 고통을 피하기 위한 삶을 산다면 기쁨과 만족을 맛볼 여유가 없다. 그는 서울이 무서워서 수원으로 달려가고, 수원에 도착해서도 무서워서 부산까지 달려갈 것이다. 끝없이 도망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가 되든 행복해질 수 없다.

187쪽. 인간의 삶의 방식이란 본질적으로 세계를 변혁하면서 사는 것이지, 단지 적응하는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세계를 변혁하려는 욕구와 능력을 상실한 인간은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88쪽. 일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더라도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신뢰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불신하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을 경우 어려움을 겪으면 크게 낙담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역경에 직면했을 때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회복 탄력성이 약해지는 것이다.

189쪽. 건강한 자존심을 지닌 사람에게서 항상 ‘당당함’이 풍겨져 나오는 이유를 알겠는가. 올바른 인생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달려가고, 불의한 세상에 적응하기보다 바꿔보려 애쓰며, 시련과 난관에 부딪혀도 거침없이 질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멋지며, 이 과정에서 자존감은 계속 높아진다.

190쪽. 자기존중의 욕구란 풀어서 설명하면 사회적 가치가 높은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 사회 기여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사회적 쓸모가 있는 가치 있는 존재이고 사회 기여 활동을 하고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므로 자기 존중이 가능해진다.

192쪽. 매슬로의 욕구 위계 이론을 비판하는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외지인은 애초부터 마을에 수용되고 사랑받을 뿐만 아니라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장에는 마을에 들어가서 정착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수용에 집중할 뿐이다.

193쪽. 그런데 정신 건강이 양호하지 않다는 것은 어린 시절 살아받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고,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여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받기에 집착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랑의 욕구를 원만히 충족시키기가 힘들다. 타인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그 결과 건강한 사회 집단에 소속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존중의 욕구가 전면화될 가능성이 낮다. 즉 사랑하기가 아닌 사랑받기에 몰두하느라 사회에 기여하려는 자기존중의 욕구에 눈을 돌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195쪽. 어떤 것이 기본적인 욕구인가 아니면 부차적인 욕구인가는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인가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욕구가 실현되지 않았을 때,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난다면 그 욕구는 기본적인 욕구일 가능성이 높다.

196쪽. 기본소득제의 바탕이 되는 철학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현 시점에서 사회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수용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사랑과 존중을 받아야 마땅한 존엄한 존재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주면 자식의 자존감의 기초가 튼튼히 닦인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을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주면 모두의 자존감은 그 기초가 복구되거나 튼튼해질 것이다.

199쪽. 사회적 비교를 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비교는 세계를 인식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방법이다. 사람들은 여러 사물현상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각각의 본질과 특성을 더 정확히 파악하며, 사물 현상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연필을 다른 연필들과 비교해봐야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연필의 특성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비교란 사람의 인식 과정에서 필수적인 수단이자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억지로 비교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인식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는 것이다.

201쪽. 사회적 비교가 본의 아니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잘못된 기준으로 사회적 비교를 한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고 학대하는 문화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의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직업이나 돈 같은 잘못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곧 그 사회가 불의한 사회이자 병든 사회임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아주 낮은 평가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오히려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치는 본말전도, 가치역전의 사회라 할 수 있다.

205쪽. 또다른 이유는 실험 참가자들이 자기 혼자만 일탈자가 되는 것에 대해 커다란 심리적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회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사회 혹은 집단으로부터 고립되거나 버림받는 것을 아주 두려워한다. 또한 자기 존중의 욕구때문에 타인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거나 바보취급을 당하는 것도 싫어한다.

207쪽. 자존감을 정상화시키는 첫걸음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거듭 강조했듯이,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 쓸모, 사회에 대한 기여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일단 자신을 올바른 사회적 가치로 평가할 수 있어야 자존감을 높이는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

210쪽. 자기가 원하는 이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악행이나 어리석은 방황이 아닌 의미가 있는 삶, 행복한 삶이 되려면 최소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라서 젊은이들을 위한 올바른 조언은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부터 치열하게 탐구하라.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라”가 되어야 한다.

212쪽. 자기사랑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존중 뿐만 아니라 타인 사랑과 존중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인간인 타인들, 나아가 인류도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인간 사랑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의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그와 달리 자기사랑(자기애)을 이기주의와 혼동했던 프로이트같은 심리학자들은 자기사랑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프롬은 이런 견해를 비판하면서 자기사랑이 이기주의와 명백히 다른 것임을 밝혔다.

“이기심과 자기사랑(자기애)은 동일한 것이기는 커녕 사실상 정반대 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214쪽. 자기사랑을 방해하는 요인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죄의식 혹은 죄책감을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 부도덕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남들한테 제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자기를 사랑할 수 없고 존중할 수도 없다. 이런 사람은 잠자리가 편치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기를 혐오하고 미워하게 되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기공격과 파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일부러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거나 알코올을 절제하지 않는 것,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15쪽. 어떤 이들은 ‘사람의 가치를 사회적 쓸모로 평가하자’는 생각을 신념화하기가 그렇게 어렵나고, 이런저런 공부를 해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해야만 그것이 가능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현재의 한국상황을 고려하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어지간한 신념 없이는 사람을 부당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회의 잘못된 통념과 가치관에 맞서기가 대단히 힘들기 때문이다.

216쪽.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심리학적 처방이 자존감의 기초를 복구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 정작 자존감을 확립하거나 높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데 있다.

221쪽. 자존감을 논하면서 선한 이웃과의 연대나 건강한 소속 집단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일부 심리학자들은 거부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존감은 오직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에 동의할 수 ㅇ벗다. 자존감 확립에는 반드시 타인들이 필요하다. 단지 무차별적인 다수의 타인들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건강한 타인들이 필요할 뿐이다. 자존감은 타인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의 내면에서 조작되는 주관적 심리가 아니다. 객관적인 자기개념과 자기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 타인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내가 나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거울을 필요로 하듯이 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평가에는 타인이라는 거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자존감 확립과 향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한 타인들 혹은 사회 집단이다. 우리에게는 나를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존중해주며 건강한 신념과 가치관을 나와 공유하고,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동료나 조직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고 그것을 더 높이기 위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 또한 목표 달성에 필요한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 속에서 성취를 경험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227쪽. 심리학자 윌리엄 데이먼은 “현실세계를 무시한 전형적인 자존감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하여 아이들이 이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229쪽. 고대 로마 제국에서 검투 노예였던 스파르다쿠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동료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권유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서 도망치면,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리라는 것을.... 병적인 사회, 불의한 사회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유린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나 하나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고 있는 사회악을 타파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실천은 최상의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실천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듯이, 오늘날에는 병든 한국을 개혁하기 위한 실천이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런 실천에서 발을 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도록 만든다.

231쪽. 물론 나도 다른 심리학자들처럼 열심히 심리 치료를 하고 마음 수양을 하면 자존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설파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크게 부담을 줄 수 있는 말은 가능한한 하지 말고, 듣기 좋은 위로의 말을 많이 해야 책이 잘 팔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과는 타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무엇보다 내 자존감부터 손상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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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5 11:36 2022/07/2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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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22/07/24 23:38

2022/07/24

처음은 늘 0이다.

0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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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4 23:38 2022/07/2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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