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대학과 학생의 역할을

행인님의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에 관련된 글.


신문 기사

1964년 63항쟁 당시,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고 이윤식씨에게 모교가 명예학위를 수여한다고 하는 기사가 떴다. 학교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씨의 희생이 우리나라의 민주 헌정질서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켜 00대의 명예를 높였기에 명예 졸업장을 수여한다"고 한다. 사회의 발전, 특히 군사정권의 광포한 폭력에 맞서 싸웠던 사람의 명예가 반세기만에 회복된다는 점에 대해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매우 어색하다. 이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는 학교가 다름 아니라 지난 430 메이데이 전야제 행사를 교직원, 세콤, 학생들을 동원해서 막았던 바로 그 학교이기 때문이다.


대학

"왜 우리 학굔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는 어떤 분의 덧글이 있었다.(위 트랙백 건 글의 덧글을 참조) 조금만이라도 생각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혹은 학교 구성원들이라면, "왜 하필 우리 학굔가?"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니라 "왜 여기까지 밀려왔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선 한국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다시 반추해야 한다. 어쩌면 이 관점은 단지 "한국사회"라는 한정된 공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또는 바로 그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공간이기 때문에 적실성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말해, 왜 대학이라는 공간이었는가라는 질문은 애초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에서도 그렇고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에서도 대답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다는 거다.

첫째, 대학은 말 그대로 "진리와 정의"를 참구하는 공간이다. 이 "진리와 정의"라는 어구는 "지성"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도 있겠다. "지성"이라는 것이 단지 지식을 머리 속에 차곡차곡 쟁여놓는 행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삶에 투영하고 환경을 바꾸어나가기 위한 연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오늘날의 대학은 "진리와 정의"를 찾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기계를 제작하는 취업학원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 공간에서는 계급이라던가 구조의 문제라던가 하는 부분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기보다는 시장지상주의 하에서 어떻게 경쟁을 뚫을 것인가 하는 부분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그러한 행위를 "교육"이라고 포장한다.

대학의 몰락이 이렇게 현실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여전히 사회의 구조를 개선하고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본연의 취지를 잃지 말 것을 요구받는다. 이번에 개최되어 진행중인 "세계시민포럼"에서 빈곤, 질병, 환경 등 국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학의 참여와 기여가 강조되었다. 대학이 자신의 담장을 허물과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기초적인 요청이 국제적 행사에서 다시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어디서 뭘 하고 자빠져 있는지도 모르던 한승수가 난데없이 등장해 한국이 인권선진국이라는 배꼽빠질 이야기를 하는 통에 만방의 조소가 빗발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학은 이렇게 담장 안에 고립되어 취업예비생들을 양산하는 자격증 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차원에서, 대학은 과거에 그랬듯이 소외되고 박해받는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그 학교를 단지 월급받는 직장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 즉 대학을 "진리와 정의"를 참구하는 곳, 다시 말해 "지성"을 쌓는 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학이 노동자, 빈민을 비롯한 모든 힘 없는 자들의 소도가 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한국사회"에서 첫 번째로 이야기한 내용들은 특히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적실성을 가진다. 적어도 대학이라는 곳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탈할 수 없는 곳이었고, 대학의 구성원들은 음으로 양으로 이러한 대학의 기능을 인정했으며, 그런 배경으로 인해 군사정권의 살인적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대학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민주화의 성지로 "명동성당"을 꼽기도 한다. 적어도 일정부분 그런 역할을 종교시설이 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만 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한국사회의 오늘날과 같은, 비록 아직은 그 실체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대학이 수행한 역할 역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학의 역할이 2~30년 전에 끝날 수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특히, 시장지상주의가 본격적으로 판을 치기 시작한 이래, 지난 10여년 간 대학은 과거 수행했던 '소도'의 역할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이명박 정권만을 보더라도 그렇다. 메이데이 집회 참가자에 대한 무차별 연행과 관련해 인권단체들이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또다시 강제연행이 이루어졌다. 그 구차한 현행 집시법 하에서조차 알량하게 허용되던 노상 기자회견이 이 정부 들어와서는 아예 집회로 간주되어 원봉되는 것이다.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모든 집회는 모두 불법집회고 따라서 불허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치적 내막은 모두 차치하고라도, 현행법의 체계만을 가지고 따질 때 경찰의 이러한 집회불허는 모두 위법이다. 집회는 그것이 진행되고 난 후에야 불법인지의 여부가 판단되는 것이지 시작도 하기 전에 불법이라고 규정될 사안이 아니다. 헌법이 그렇게 보장하고 있고, 최소한 현행 집시법조차도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경찰이 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정권차원에서 벌어지는 탄압의 강도는 과거 군사정권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이 수준이며, 한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정권의 시각은 겨우 1789혁명 전 앙샹 레짐 당시의 유럽 수준이다. 논의외 얘기지만, 이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과정일 뿐 목적이 아니다"라고 하는 담론은 아직까지는 배부른 소리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목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거리에 나서 자신의 목소리를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학은 자신의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세계시민포럼에서 요청되고 있는 대학과 사회의 소통이다.


주인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묘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 학교에 "남"들이 들어오는가? 학교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 왜 "남"들이 학교를 제것인냥 사용하려 하는가? 집회시위로 인하여 침해되는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예전의 일을 잠깐 돌이켜보자. 한 때, 행인이 학부생이었을 당시, "학교를  주민에게 돌려주자"라는 취지의 일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 일환 중 하나가 '생활도서관'이었고, 비록 행인이 '생활도서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에 동의하고 함께 움직였고, 지금도 그 애착이 깊다.

그런데 '생활도서관' 수준의 학생자치운동의 일환으로는 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요구했던 것이 바로 중앙도서관 개가서고 24시간 전면 개방이었다. 당연히 학생은 물론 지역주민에게도 서고를 개방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자는 얘기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씨도 먹히지 않았다.

학교측의 난색은 예상했던 것이다. 시스템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은 관리의 문제를 들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앙도서관은 마치 지하철 개찰구처럼 학생증을 인식해야만 출입할 수 있는 자동출입시스템을 도입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왜 내가 등록금 내고 다니는 학교의 도서관에 "남"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가라는 반발. 도서관에 자리도 없어서 힘든데, 왜 학교와 상관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야 하는가라는 매우 도식적인 질문.

결정적으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는 자신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그 학교의 운영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내고 있는 등록금이 중요한 것이지 미래에 자신들이 제공할 세금은 현실에서 중요도가 떨어진다. 더불어, 언제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권리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이 없다. 물론 대학 졸업하면 도서관 다닐 일이 있겠느냐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허구한날 야근에 철야에, 윗사람 눈치보면서 먹고 살 일이 바쁠 텐데 배부르게 무슨 도서관씩이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학교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이 철저한 주인정신의 뒷면에, 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은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경쟁으로 내몰고 있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 바로 그 사회의 구조를 전복하는데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사회,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그 사회의 기득권세력이 가지고 있는 요구에 철저하게 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인"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성은 이렇게 극도로 결핍된 형태로 발현한다. 새삼스레 노예와 주인을 구분하는 철학적 담론을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이 현상은 매우 도착적이다. 바로 이 전도된 주인의식이, 대학을 찾아온 노동자들에게 초대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하고, 마치 자신들이 학교의 재단이사장이나 총장이 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자기합리화의 일환으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절차적 민주주의다.


자각

절차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연히 지켜야할 절차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런 절차가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절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예컨대 중운위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430 행사를 학내에 유치할 수 없다는 논리. 중운위 운영규칙에 그런 절차규정이 있던가? 학교 운영규칙에 있던가? 아니면 법에 있던가?

근본적인 문제는 '절차'에 대한 맹목이 가치에 대한 판단력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현상을 우리는 매일매일 목도한다. 바로 이명박 정권이 그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입만 열면 나오는 "법치주의"라는 것이 바로 '절차'에 대한 맹목이다. 이명박 정권이 이야기하고 있는 "법치"는 과거 군사정권이 목청높혀 외치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구호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군사정권과는 다르게, 애꿎은 소크라테스를 갖다 붙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고로, 절차적 민주주의 혹은 절차적 법치를 매우 잘 수행했던 집단으로 '나치'를 들 수 있다. 무척 재밌지 않은가?

나치의 악몽을 겪은 법철학자 라드부르흐는, 이전까지도 '법적 안정성'과 '정의'의 문제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법이 그 진정성을 잃어버렸을 때는 '정의'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바로 여기서, 확립된 '절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절차'가 부당한 원리원칙에 근거하고 있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절차'를 뒤집어야 한다는 행동원리가 도출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명제는 이렇게 또다시 우리 앞에 제 면면을 보여주게 되는 거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주인"이라는 주체적 사고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상기해야할 것은 바로 자신이 어떤 것의 "주인"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장 안에서, 등록금을 낸 주체로서 다만 대학에 대한 주인의식으로 안주한다면, 그것은 "주인"된 자각의 극히 일부분만을 이룬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에는 특히 그렇지만, 대학을 다니는 학생의 대부분은 그 등록금이며 생활비며 교재비용 등을 자신들의 부모에 의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우골탑을 넘어 부모의 뼈와 살을 발라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실정인 거다. 그렇다면, "등록금"의 제공에 의해 "주인"됨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볼 때도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 바로 학생들의 부모들이다.

이 부모들은 등록금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명목의 세금을 국가에 납부함으로써 그 중 일부를 교육기관에 투여하도록 기여하고 있다. 어떤 특정 대학에 다니는 학생의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학생들을 위하여 이들은 일정한 형태로 부담을 지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은 이 땅 모든 학교의 "주인"이다.

이런 단순논리뿐만이 아니라, 다시금 제기하는 자각의 요청은 학생 스스로가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주인"임과 동시에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감지하라는 것이다. 왜 "주인"이 같은 주체의 일부일 뿐인 기득권 세력의 요구에 그토록 굴종적인 복종을 감내하는가? 왜 "주인"으로서, 자신들을 인턴세대로 몰아가고 있는 이 사회구조에 대해 짱돌을 드는 대신, 저들이 요구하는 스펙을 짜맞추려고 밤새 토익책을 긁어대며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이가 덧글로, 학생들이 그렇게 되도록 니들은 뭐했냐는 힐난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확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20대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청년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할 수 있었던 일과 그 성과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현실을 살아나가는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그 성과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역할이 뭔지를 깨닫는 것은 앞선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선 세대를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 청년세대의 본분이자 특권이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역사는 장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뒤집어 이야기하면, 역사는 그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 만드는 것이고, 바로 청년들이 그 시대의 "주인"이다. 이 각성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순간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바로 이 기대가 위 트랙백 건 글에 덧글을 달아주신 "연부네 집"님이 말씀하신 "낙관"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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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11:29 2009/05/0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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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09/05/06 16:32

    애써 외면하려 했는데, 연구실 선배 블러그에서 노동절 건국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포스팅을 읽었다. 마음도 답답하고, 외면하는게 능사는 아니다 싶어 몇 글자 적어본다. 돌아오는게 아니었다. 다시금, 대학과 학생의 역할을 몇명 오지 않는 조용한 블러그지만, 이 포스팅을 보는 분들은 위의 두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정리가 잘 되어있고, 기본적으로 이 글은 선배의 말에 대한 나의 긴 리플이기 때문이다. 학부생활 4년, 휴학생활까지 포함하여 5년간 다..

  1.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걸 감지는 커녕 상상도 못하고 있을지도 모를 자식을 둔 부모로서 심히 부끄럽군요.
    산오리의 단순한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배가 부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회구조를 아는건 졸업한 이후의 일이겠죠..ㅠㅠ

    • 저도 주변 사람들과 그런 이야기 합니다. 학생들이 제 스스로 벌어서 학교 다니고 생활을 한다면, 아마도 대학에서 430 참가단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거라구요. 저는 대학이 꼭 필요한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당해년도 80% 이상 대학진학율을 유지하는 나라가 정상은 아니죠. 그런 학생들에게 사회구조를 알아달라고 하소연 하는 것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꾸 부탁을 하게 됩니다. 건강하시죠?^^

  2. 대학이라는 공간의 주인은 학교에 속하는 구성원만이 아니라는것

    저도 잠시 잊고 있었네요.

    시의적절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3.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학교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이 철저한 주인정신의 뒷면에, 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은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지적이시네요..
    마음 한편이 여전히 답답하지만요...

    • 사회의 주인됨은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답답합니다. 산오리님 말씀처럼 '졸업 후'에 자신들이 겪어보면서 느끼게 되겠죠.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장년이 되어 생활에 쫓기고 경쟁에 치이면서 '주인'됨을 자각하더라도 '주인'으로 살기는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하루 속히 '주인'된 자각을 해주길 바라는 거구요. ㅜㅜ

  4. 흠흠...
    제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적을 두고 있던 대학교는 파업을 자주 유치(?)하던 곳이었답니다. 그 당시 사석에서 '신원 미상 외부인의 상주에 따른 성폭행과 추행의 우려' 운운하는 지인을 본 적도 있습니다만...-_-;

    산오리님 말씀대로 대부분의 학생이 배불러 뵈지는 않습니다만 가끔은 씁쓸하고 헛웃음 나올 때도 있죵. 대학생들의 보수화 혹은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는 이미 학교를 졸업해 버린 이들의 책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생들을 포함해서 "진보의 아이템"이라 불릴 만한 그네들의 정치적 요구를 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물적 토대의 부재 -그것이 정당이 됐건 정책생산 능력이 됐건- 와 많은 대학생들에게 추상적인 외침으로만 다가오는 운동의 정치, 거리의 정치가 가지는 현실적인 한계점이 학교 구성원이 느끼는 정치적 효능감을 떨어뜨린 탓이 아닌가 싶네요.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다는, 돌이켜 보면 '정부에서 금지하는 월드컵 응원'이었던 것 같다는, 무엇을 위한 시위였고 대관절 무엇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지난해 촛불 시위에 참여했었던 갓 대학교 2학년이 된 후배의 말은 스스로를 착잡하게 만들었습니다.

    10년 전 "극렬좌경세력"의 손에 이끌려 "불법폭력시위"의 언저리를 맴돌던 한 젊은이는 이제는 후배들에게 집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지 않습니다. 이미 학교를 떠난 이들이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정치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수단들 확보하지 않는 한 집회와 시위를 통한 정치참여가 대개는 정치적 무관심의 정치사회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치적 효능감이 떨어지는 데 따른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가 적대감과 어우러진 장면이 일전에 포스팅하신 "예비군의 모습"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대에게 "짱돌을 들라"고 하기에 앞서 이미 20대를 지난 이들이 그들에게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들의 의견을 정치과정에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년 혹은 30년째 "짱돌을 들자"(이제는 그마저도 노쇠하여 힘이 없어서인지 "니들이 들어라"라고 이야기합니다만)는 이야기만 하는, 도대체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무엇으로 하겠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성, 진영 논리에 갖힌 비합리성, 가끔은 편견적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현실인식, 상대방에 대한 배려없음처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운 모습들이 "운동권"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당... ㅠ..ㅠ

    • "20대에게 "짱돌을 들라"고 하기에 앞서 이미 20대를 지난 이들이 그들에게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들의 의견을 정치과정에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라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저도 이미 그런 생각을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그러한 제시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나 구체적 프로그램을 가지지 못한 측도 책임이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무엇으로 하겠다는 것인지"를 생각지 않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거죠.

      과거 운동이 누군가 프로그램을 제시해주고, 그 프로그램을 통해 감화받음으로써 이루어졌는가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 프로그램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운동'이라는 걸 청년들이 자각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적어도 낡은 "운동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라면 자신들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혹은 전복할 뭔가를 꾸며보는 것도 필요할 터인데, 현실에서 보면 비판은 난무할 뿐 자기 자신의 주체적 대안모색은 그리 보이질 않네요.

      저도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5. 공부를 하는 것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수 있기 위함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착한 편에 붙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저도 도서관에 카드를 찍고 들어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보니 쳇, 우리 학교에서는 학교문을 좀 열자는 운동조차 없었죠.

    • 오랜만에 뵙네요. "착한 편에 붙기"가 너무 어려운데다가 요즘은 어느 편이 "착한 편"인지조차 헷갈리고 있습니다. ^^;;

  6. 이른바 민주화 운동가들이 최근에 보이는 행태를 볼 때
    대학생들이 운동에 대해 비웃는 이유 중 하나가 나올 것 같습니다.
    만약에 대학생들이 사회운동을 비웃는다면 말이죠.
    최근에 황석영 씨의 행보를 보면 재미있더라구요.

    2007년 대선 때에는 이른바 '사회 원로'로서 정동영 후보 밀어주기,
    그러다가 이번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자진해서 수행.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 대학생들이 사회운동을 비웃는다기 보다는 학생들이 사회에 눈 돌릴 틈도 주지 않는 사회가 대단한 거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