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출마와 양심

박지원 의원이 추미애 법무부장관 후보자에게 진도간첩단 사건의 후처리에 대하여 질의한 일이 있다. 진도간첩단 사건은 기존에 헌재에서도 관련한 위헌결정이 있었고, 재심에서도 배상판결이 났던 사건이다. 그런데 재심 후 대법원이 이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지금까지 사건이 계류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박 의원이 추 후보자에게 법무부 장관이 되면 상고를 취하할 수 있겠느냐고 질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추 후보자는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1980년 안기부가 기획한 조작간첩단 사건이었던 진도간첩단 사건의 핵심 피해자 중 한 사람이 석달윤이다. 석달윤은 간첩 방조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무기징역을 선고한 당시 1심 판사가 여상규다. 당시 재판과정에서 석달윤의 피해가 충분히 인정될 수 있었음에도 법원은 검찰의 기소내용에만 근거하여 무기징역을 내렸던 것이다. 2009년 재심 이후 상고 계류된 상황에서 2018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서 여상규 의원에게 소회를 묻자 여상규는 도리어 화를 냈다.

한 사람의 인생, 아니 그 사람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평생을 두고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장본인 중 하나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정을 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공분을 샀다.

그 여상규가 2020 불출마를 선언했다.

한겨레: 여상규, 총총선 불출마 선언 "당 지도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해"

그가 불출마하겠다는 이유는 우선 "극심한 편 가르기에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속한 정당이 야당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안타깝다. 정치판이 양극단으로 갈려 싸우게 된 한 복판에 여상규가 있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자가 국회 법사위원장까지 하는 나라의 정치에 환멸을 느껴야 할 사람은 여상규가 아니라 주권자들이다. 타인의 인생을,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는 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야당이 정치적 역량을 보여줄리가 없다. 서로의 부끄러움을 "우리가 남이가"라는 공감대로 감싸주는 것 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여상규가 명목상으로야 함구했지만, 그가 불출마를 선언하는 배경에 자신의 과오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기를 바란다. 평생을 석고대죄하면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겠다만, 관련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말을 아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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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14:35 2020/01/0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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