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의 추억 돋게 만드는 유시민

그제 진 vs 유 맞짱이 애초부터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면, 어제 토론회는 유시민이 공격자 입장이 될 듯 하여 그나마 좀 볼만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또 시청. 실은 손석희 옹이 이제 뉴스에 안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고별방송 삼아 본 의미도 있고. 암튼 그런데 유시민과 전원책은 토론을 하러 나온 건지, 아니면 어그로 끌어서 지들 유튜브 시청률 높일라고 나온 건지. 저런 자들이 계속 비싼 전파 타는 건 사회악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그닥 영양가 없는 내용들이 왔다갔다 하는 터라 단지 말장난 들여다보는 재미로 보고 있었는데, 그만 유시민 덕분에 잊고 있었던 옛 일이 생각났다. 2004년 17대 총선 직후 전개되었던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의 분노. 이 블로그에도 당시 상당히 많은 에피소드들이 올라가 있기에 뒤벼보면 흥미로운 소재들이 꽤 될 거다만 시간 관계상 패스.

암튼 탄핵정국을 거치면서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돌이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고, 당시 열우당이 152석을 획득하면서 의석 과반수를 넘겨버린다. 여담이지만, 진영을 떠나서 난 이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사 기질을 봤다. 저절로 엄지손가락이 척하고 올라가게 만드는 그 기질. 물론 그 기질로 인하여 결국 좌절하지만. 아무튼 17대 총선은 오로지 노무현 혼자 일으킨 바람으로 판을 뒤엎어버린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석 과반수를 획득한 열우당과 그 주변의 인사들이 기획했던 게 소위 '4대 악법 개혁(개폐)투쟁'이었다. 언론관계법(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 그리고 국가보안법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4대 개혁 입법'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변한 게 없다.

당시 한나라당은 천막당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와신상담의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촛불을 들고. 당시 한나라당에서 이 전황을 진두지휘하게 된 자가 바로 503... 박근혜였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이 박근혜를 전면에 내세웠고, 박근혜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구호 하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했다. "나라를 살리겠습니다!"

열우당을 위시한 진영의 4대 악법 개폐 투쟁에 맞서 "구국의 일념"으로 전개된 전장에서 한나라당은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그 어떤 4대 입법도 열우당의 뜻대로 된 게 하나도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게 오로지 박근혜의 뛰어난 리더십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뭐든 손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한쪽에서는 박근혜를 위시한 한나라당의 배수진을 친 전술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집안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정부여당의 지리멸렬이 있었다.

우선 국가보안법. 보안법 철폐투쟁에 기름을 부은 건 노 전 대통령의 말이었다. 이제 박물관으로 보내버리자. 대빵의 한 마디에 고무된 탄돌이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보안법을 철폐한답시고 동을 떴고, 여기에 참여연대 등이 가세하고, 김기식 같은 자가 민주노동당에 와설랑은 "열우당 2중대면 어떠냐, 보안법만 철폐되면 되지"라고 하고, 그 감언이설에 훅간 민주노동당은 그야말로 당력을 총동원하여 길바닥에 몰빵하고, 민주노총은 남한 최대 통일운동단체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면서 여의도에 천막을 쳤고,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을 전면에서 하고 있던 몇몇 단체는 민주노동당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죄다 빼가면서도 민주노동당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다는 개소리를 연신 퍼부어댔다. 와, 진짜 추억 돋네...

난 그 때도 그랬고 그 과정 중에도 그랬고 나중에 평가에서도 그랬지만, 이따위 투쟁으로 국가보안법이 철폐되기는 커녕 오히려 수구반동들의 결집만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누차 주장했다. 하지만 뭐 나같은 듣보잡의 견해는 일절 수용되지 않았다. 후일담이지만, 난 민주노동당이 망트리를 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보안법 철폐투쟁 올인에 있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무튼 이렇게 의석 10석짜리 미니정당이 뭐 빠지게 보안법 철폐 올인하고 있는 동안, 이 민주노동당을 부추겼던 열우당 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지들 안에서조차도 폐지냐 개정이냐를 놓고 의견이 불일이치하였던 데다가 개정을 놓고도 민변출신과 전대협출신의 의견이 다르고, 노땅과 신삥의 인식이 달랐다. 애초 전면 폐지를 할 것처럼 나섰던 열우당 안에서 절반 가까이가 폐지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웃긴 결과로 나타났느냐면, 토론회를 갔는데 갈 때마다 말이 달라지고, 같은 당에서 나온 패널들끼리도 말이 달랐다. 이거 이러다가는 뭐 제대로 되겠나 싶었는데 그 와중에도 민주노동당은 허구한날 문자로 보안법 관련 집회에 당직자들 '필참' 뿌려댔고. 아, ㅆㅂ 갑자기 욕나오네...

그 과정을 다 복기하려니 오늘 시간 다 갈 듯하여 대충 수습하고, 그리하여 이런 망트리를 타는 와중에 갑자기 노 전 대통령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말을 해버린다. 뭐 당장 안 해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식의 발언으로 인하여 보안법 철폐투쟁은 웃기는 몰골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노무현 정권 당시에 오히려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은 늘어나는 현상을 보였다. 내 사랑하는 동생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실형을 살게 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아, 진짜 욕이 막...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국가보안법은 그냥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 엄청난 인원과 물량과 자원이 여의도에 쏟아부어졌지만, 그냥 그렇게 끝났다. 과거사법은 다음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고 신문법은 하나마나한 개정으로 종쳤다. 그나마 하나 건졌다고 생각했던 게 사학법이었는데, 그 사학법마저도 노무현 정권이 정권의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로스쿨법을 통과시키려고 다시 무위로 돌려버렸다. 개정되었던 것보다 더 못한 상태로 재개악해버렸던 거다. 이거 관련한 포스트도 이 블로그 어딘가에 있을텐데, 귀찮으니 안 찾는 것으로.

이 과정이 어떻게 의회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면, 한나라당이 의회 내에서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난장판을 벌임으로써 이렇게 된 게 아/니/다/!!!!

한나라당은 장외에서 "나라를 살리겠습니다"라는 구호 하나만 걸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근혜와 이명박이 촛불을 들고 서있던 장면이라든가, 전여옥이 박근혜에게 우비 씌워주던 장면이 다 이때 나온 거다. 이 와중에 수구보수세력은 결집을 했고, 여론을 움직였다. 반면 열우당은 자중지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대통령 입만 바라보다가 우왕좌왕 했다. 그래서 다 망했던 거다.

어제 유시민은 마치 야당이 의회에서 폭력난동을 부리는 통에 4대 개혁안이 물거품이 되었던 것처럼 주장했다. 기실 당시의 그 개판이 된 와중에 유시민이 끼친 영향도 상당한데, 사학법 개폐과정에서 수시로 말을 바꾸거나 강력한 보안법 폐지 입장에서 서 있다가 정작 야당과의 관계가 경색되고 원내에서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입을 닥치는 등 그가 보여준 설레발과 좌충우돌이 열우당 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거다. 당시 열우당 내에서도 그렇고 바깥에서도 그렇고 유시민은 노무현의 복심이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자가 이따위로 행동하니 그 복심 눈치 보던 자들이 우왕좌왕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거고.

그런데 이건 쏙 빼고 당시 야당이 개판을 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에라이, 양심에 털이 나도 유분수지... 유시민은 사람들의 기억이라는 게 지 입맛에 따라 조립될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듯하다. 조지오웰의 '1984'에는 기억을 재조립하는 과정이 나온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명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가 나온다. 유시민은 빅브라더가 되고 싶은 걸까? 하긴 뭐 그 주제도 되지 않는다는 걸 지도 잘 알겠지만.

아직도 저런 자를 '진보'적 인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웃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 '좌파'들이 정말 존재감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 슬프기도 하다. 뭐 그렇다고. 운동과 정치에 당분간 일정하게 거리를 두기로 한 입장에서, 이 정도로만 하고, 난 빨리 기능사 시험이나 알아보러 나가야겠다. 노닥거리느라 벌써 시간이...

에이, ㅆ... 그래도 유시민 이 거짓말쟁이가 사람을 화딱지 나게 만드는 건 좀 지적을 해야겠다. 내가 왠만해서는 기분 나쁜게 5분 이상을 가지 않는 사람인데, 이자가 어제 토론회에서 한 거짓말은 지금까지도 사람 열받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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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3 10:45 2020/01/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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