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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록 [2]

내용도 허접하고 영어는 더욱 허접했던 오늘의 발표. 아... 좌절이다. 내일 또다른 제 2, 제 3의 허접 발표가 또 기다리고 있으니 이번 주 좌절 연속이다. 듣는 사람들도 괴로웠을 거다. 어찌 보면 고마운 사람들 (ㅜ.ㅜ)...

 

이 와중에 짬을 내어 글을 쓴다. 망중한이라 했던가.. 나의 방어기제는 급한 일들이 많아지면 역치가 상상초월 수준으로 높아져서 마음이 오히려 안정된다는 것. 아마도 무의식 세계는 지금 난리굿이 벌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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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갑 만들기

이건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했던 일 같다. 연대기는 주로 살고 있었던 집에 근거해서 파악할 수 있다. 전세방을 옮겨다녔기 때문에 기억나는 집의 구조를 통해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갑이라 함은 털장갑이 아니라 (가짜) 가죽 장갑(진짜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이라 구분이 불가능), 결혼식 등의 예식에 사용하는 레이스 장갑, 체육대회나 각종 테이프커팅 행사에 사용하는 흰색 장갑을 말한다.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재단된 보따리를 우리집에 풀어놓고 가면 재봉틀로 바느질하고, 마무리해서 뒤집는 것이 일이었다. 엄마는 재봉틀에 앉아서 재단된 감을 두장 겹쳐 손가락 모양을 따라 박음질을 하셨고,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감을 재봉틀에 올려주기, 경쾌한 소리와 함께 줄줄줄 꽈배기처럼 내려오는 장갑들을 쪽가위로 잘라서 하나씩 떼어놓기, 모양을 내기 위해 2차 박음질이 필요한 장갑들을 다시 재봉틀에 올려놓기, 그리고 마지막에 뒤집기 등이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오빠는 일을 별로 거들지 않았던거 같다. 이미 그 때 학생이어서 그랬나?  그래봤자 초등학생인데? 하여간 장갑이 재봉틀에서 뚝딱 만들어져 내려오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기하고 재밌었다. 새로운 장갑이 오면 꼭 끼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많은 레이스 장갑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 집 말고 이 일을 하는 곳이 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엄마 없을 때 재봉틀에 올라가서 전등 켜놓고 장난치다가 감전되어 화들짝 놀랬던 기억은 난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우리 엄마가 받았던 임금이 얼마였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러나 실밥이 많이 날렸고, 엄마가 하루종일 백열전구 밑에서 일을 하면서 몹시도 힘들어했었다는 건 기억이 난다. 

 

2. 라디오 부속품?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는 품목이다. 길이 1~2센티미터 되는 플라스틱 사출물 ("ㄷ" 모양)의 홈에 여러 개의 철심을 끼우고 자그마한 프레스 같은 것으로 꾹 눌러주는 것인데, 사람들 말로는 이것이 라디오의  부속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 일은 우리 동네 전체에서 아주 인기(?)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 한 거 같지는 않고, 인근 공장에서 물량이 딸려 온 동네에 이 일을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단가가 무지하니 싸서 천 개를 조립해야 겨우 백원 정도 받았던 거 같다. 그 때도 힘든 것에 비해 가격이 형편없이 싸다고 온동네 사람들(울 엄마, 아줌마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욕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도 안 하는 철심 대여섯 개를 하루 종일 박고 있다보면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고 시커멓게 색도 변하고, 어깨도 아프고, 무엇보다 쇳가루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다. 그래서 이 일은 주로 마당,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하고는 했다. 겨울에는 일이 없었나?

 

3. 신발 주머니

울 엄마가 처녀 적에 익힌 재봉 기술은 두고두고 우리 집 살림에 큰 (아니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동안에는 신발주머니 만드는 일을 하셨다. 근데 이게 이쁜 만화 그림 그려진 신발주머니가 아니라 시커먼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그야말로 가장 싸구려 품목이었고 울 엄마는 남는 천을 이용해서 우리 신발주머니랑 도시락 가방 같은 것도 만들어주셨다. 정말 뽀다구 안 나는 품목이었다. 이것도 장갑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엄마한테 재단된 감 올려주고, 줄줄이 내려오는 신발주머니 받아서 쪽가위로 자르고, 실밥 정리해서  다시 올리고, 그리고 마지막 뒤집기.. 먼지는 장갑보다 덜했던거 같은데, 천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가 싫었고, 무엇보다 감이 뻣뻣해서 뒤집기를 할 때 손의 피부가 많이 상했던거 같다. 임금은 역시 형편없이 낮았던 걸로 기억되고 심각했던 것은 물량 공급과 기한이 일정치 않아서 아주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무렵 다른 집들에서는 또다른 일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레이스 자르기. 이게 뭐냐 하면, 레이스는 보통 넓은 폭으로 한꺼번에 여러 칼럼(?)이 직조되는데, 그걸 가위로 잘라 분리하여 여러 개의 레이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 일도 먼지가 굉장히 많이 날리고, 하루 종일 가위질을 해야하는 데다가,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힘들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또 기억나는 일은 구슬 만드는 일인데.. 목걸이 알처럼 가운데 구멍이 뚤린 구슬의 양쪽을 실로 왔다갔다하면서 겉을 감싸는 일이다. 장식용 비드처럼 쓰였던거 같은데, 나중에 고정을 시키는 본드 냄새가 문제였다.

 

4. 내가 학업도 작파하고 이런 일에만 매달렸다는 것은 아니다. 울 엄마한테는 이게 생업이었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효도의 한 품목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일하는데 옆에 디비져 누워서 텔레비전이나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어려서는 싸가지가 있는 편이었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같이 신발주머니를 뒤집으면서 수다를 떨었던 기억도 난다.

울 아빠가 실업자도 아니었고, 빚보증을 잘못 서서 가정 경제가 파탄난 것도 아니었는데, 항상 그렇게 아둥바둥 일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는게 새삼 놀랍다. 울 엄마의 (생업에 가까운 부업)  행렬은 최근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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