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삼님의 [고미숙의 개드립?] 에 관련된 글.

 

고미숙의 글을 읽으며, 왜 불편했었는지를, 프레시안 기사의 첫머리를 읽으며 깨달았다.

 

나 이렇게 살고 있다,가 아니라 넌 왜 이렇게 못사니-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이런 채근이 글 곳곳에 배어있다.

마치 자신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동기를 모두 이해하는 것 처럼 굴면서, 원인을 제시해주기도 하지만,

그 삶을 살아본 경험에 대한 얘기는 전연 아니고, 그저 자신의 분석만을 강요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 발로 뛰어올라, 그 발이 땅에 닫기 전에 다른 발을 띄우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걸.

 

이들이 그토록 공박해왔던 근대(성)에서, 

고미숙씨 자신은 거기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은 고미숙씨 같은 부류에게는 언제나 외부이고 타자일 뿐이다.

아무리 외부가 내부의 동질성에 균열을 일으키니 뭐니 말해도, 자신들은 외부가 될 생각도, 외부를 만날 생각도 없다.

 

수유너머의 작업이 철학의 쟁점을 모던:포스트모던의 도식으로 옮기는 데 기여한만큼,

그 또한 정치이고, 계급투쟁이었다.

 

그네들은 근대라는 막대기에 괴상한 옷을 걸쳐 놓고, 십자군 전쟁을 치뤘다.

그 옷은 그네들이 그리고 오려 꾸몄다.

자신들의 이론이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하리라고 여겼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이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야 말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형태였을 뿐.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는 부류는 몇 백년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철학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계급투쟁이다.

역사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사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