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쉬고 있는 김에,

짧게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다녀올까 하다, 심심할까봐,

한 친구 꼬셔서 같이 다녀왔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 남해안을 돌기로 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도 없이,

출발 전날에서야 일단 진주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매일매일, 아침에서야 그날 어디 돌아볼지를 정했다.

 

첫날은 진주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둑해졌고,

통영에 도착해서는 재래시장이 있는 곳으로 가 근처에서 밥 먹고 일찍 잤다.

 

다음 날은 일찍 일어나서 배타고 소매물도 부터 갔다.

이른 새벽인데, 여객선 터미널에는 배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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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고 소매물도 들어가는데, 멀미를 꽤나 했다.

어렸을 땐, 멀미를 심하게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괜찮았었다.

그런데, 몸이 약해진 겐지, 배에서 내리고서도 한동안 어질어질 땅을 잘 못짚었다.

배는 어스름녁에 출발했는데, 가다 보니 바다 너머로 해가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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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물도에 도착해서 섬을 돌아봤다.

곳곳에 묘가 있었다. 이곳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을테고, 그 흔적은 곳곳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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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바라본 바다는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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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섬을 가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빠져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계단 길을 다 올라가니 등대가 나오고, 탁 트여 바다가 보인다.

그런데, 이 때도 이리저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고 온 일들이 떠오르고, 머리속이 온통 해야할 일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다.

풍경을 보면서도 뭔가 심드렁..

돌아다니는 내내, 이런 마음이 있었다. 고질병이다. 분리가 잘 안된다.

 

다시 배타고 돌아와서,

점심먹고 동피랑 마을에 갔다.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마을이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공동체의 누릴 수 있는 최대 수명에 대해 고민했다.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게 아니라, 살고 있던 이들이 삶을 지속하는 게 우선이어야 할텐데..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간다 쳐도, 이 다음 세대는..?

 

달빛요정에 대한 오마쥬로 보이는 벽화도 있어서 재밌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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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남해.

바로 가는 차가 없어서 진주로 들려서 이동했다.

남해에서는 일행이 한 명 더 생겼다.

 

다음날 아침, 아예 차를 렌트해 움직였다.

금산 보리암을 먼저 올랐다.

보리암은 작년 여름에 처음 가봤었는데, 풍광이 참 좋았더랬다.

이번에도 좋았다.

이게 핸드폰 카메라로는 잘 안담기는데,

산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가슴을 환기시켰다.

바다에 적셔진 햇살이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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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일렁임이 보일 듯 말듯..

금산에는 원효가 참선했다는 바위도 있는데,

우리가 그 쪽으로 가는 걸 지켜보던 아주머니들이

바위 위에 한 번 올라가보라고 부추킨다.

엄두가 안나서 그만뒀다.

바위에 올라가려는 마음 먹는 것 자체로 반절은 깨치겠다 싶었다.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사일여의 마음이 아니면,

100길 낭떨어지 쯤 되는 바위 위에 올라갈 수 있을까 싶다.

 

끝없이 펼쳐져 있을 바다와

그 바다가 겪었을 무수한 시간이 어렴풋이 조망된다.

원효가 봤을 바다도 이 바다고,

뭇 존재가 거쳐갔을 이곳.

 

금산에서 내려와

상주 은모래해변으로 갔다.

작년에 들렀을 때도, 감탄했지만,

남해의 바다는,

내가 지금껏 본 바다 중 가장 예쁘다.

바다를 많이 못봐서 그런 것일테지만ㅎㅎ

동해는 시원해서, 차가웠고,

서해는 이런 탁트인 맛이 없다.

남해의 바다는 비늘이 곱다.

모래도 고왔다.

겨울이지만,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으며 걸었다.

발이 좀 시려웠다.;

일행은 멀리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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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동지였다.

해가 참 짧았다.

몇 시간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해가 벌써 까무룩.

남해읍내로 돌아와 시장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동지날이니 팥죽 먹어야지 않겠냐며, 팥죽도 한 그릇씩 주셨다.

아아, 감동 ㅠ

 

남해 음식이 입에 잘 맞았다.

전주에 살고 있고, 전주 음식 맛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맛이 너무 강하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남해에서 먹은 음식들은, 매운탕도 맛이 순했다.

어쩌면 밋밋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쨋든, 그런 맛이 좋았다.

 

다음 날엔, 순천으로.

순천에, 일행의 친구가 있어 밥도 얻어먹었다. ㅎ

순천만을 돌아보고 다니, 해가 짧아 다른 곳을 가기가 어정쩡한 시간이 돼버렸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얘기를 나누다,

내가 구례로 가자고 적극 제안해서 밤에 구례로 이동했다.

구례구역에 도착해서 보니,

이런! 동절기 성삼재행 버스 운행을 안한다는 공지가 붙어있다.

노고단 들리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쌍계사, 화엄사 들리기로 했다.

 

아침에 나오니,

눈이 펑펑 쏟아진다.

온 세상이 하얗다.

설레고 좋았다. 다른 세상에 온 기분.

이때서부터야, 두고온 현실과 좀 분리가 되기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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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를 먼저 들렀다.

사박사박 눈길을 올라, 절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근처에 있던 차문화관을 들렀다.

쌍계사 근처가 차 시배지라고 적혀 있었다.

쌍계사 다리 바로 오른편에 있는 찻집에 갔다.

차가 맛있었다. 은은하고 구수하고.

게다가!! 쌌다. 관광지라면 관광지인데, 도심 찻집보다 쌌다.

엉엉. 감동이야..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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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커피를 마시면 머리도 어지럽고 속도 안 좋고,

아무래도 차가 훨씬 편하고 좋다.

차를 더 즐겨봐야겠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찻집이 문을 닫아가는 추세여서.. 커피집만 늘어나고..

 

다음은 화엄사.

화엄사는 꽤나 자주 간 절이다.

생각나면 한 번씩 기차타고 갔으니.

새벽기차 타고 가면 들렀다 오전에 바로 돌아올 수 있는 절.

그런데, 화엄사를 매번 들리면서, 화엄사 위쪽에 구층암이라는 암자가 있다는 걸 안 건 얼마되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알게 됐던가?

이 날도 구층암에 올라서, 마루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는데,

암자에 계신 스님이, 들어와 차 한잔 하고 가라한다.

온갖 다기와 차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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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야생차였다. 절 주변에 있는 야생찻잎을 따서 말린 거라고 한다.

이거 귀한거라며, 맛있지 않냐고 물으셨는데, 맛은 있었지만,

속으론 쌍계사 앞에서 마신 차가 더 맛있었다고 생각했다ㅋ;

어쨋든 구층암에서 마신 차도 맛있었다. 쌍계사 앞에서 마신 차가 은은하고 구수했다면,

구층암에서 마신 차는 쏴한 느낌이 들정도로 맛이 강했다.

 

차를 마시고, 차값을 해야하니, 물을 길어다 놓으래서,

동행이 열심히 물을 길어 날랐다. ㅎㅎ

난 뒤에서 사진이나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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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하면 재워줄테니 와도 된대서, 옳다구니, 나중에 오겠다고 대답했다. ㅎㅎ

 

햇볕이 드는 마루 한쪽에 고양이 가족...이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가까이 가니 경계하며 고개를 쭈뼛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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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올라가면서 보니, 화엄사 근처가 차 시배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런. 쌍계사 근처도 차 시배지고, 화엄사 근처도 차 시배지구나. 허허허허

 

 

하루 내 산사들을 다니면서 문득 깨달은 게,

난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왔었지만,

바다보다 산사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바다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도, 필요에 따라 기억을 조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들을 들리면서, 마음먹었던 발원을 살포시 했다.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아픔을 외면하지 않기.

 

금강문을 넘어서면서,

문수동자 보현동자 상을 봤는데,

아하, 했다.

얼마전 NLP 수업 들으면서, 창조분아 떠올려보라할 때

어떤 동자가 어디 올라타고서 빙긋 웃으며 비누거품을 불고 있는 게 떠올랐었다.

절에서 봤던 사람일거라 싶었지만 그게 누군지 몰랐었는데,

이날 보니 문수보살 아니면 보현보살이었겠다.

그런데 내 이미지에서 코끼리를 탔는지 사자를 탔는지는 모르겠던데ㅎㅎ

뭐, 내 멋대로 짬뽕시킨 색다른 존재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문수동자가 더 끌리는데..

 

절을 몇 군데 들리니, 입장료도 만만찮다.

조계종 신도증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든다 -_-;;

 

 

이날 일행은 돌아가고,

저녁부터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

...

해남으로 갔다.

도착해서 일단 자고.

아침 일찍 나오니, 또 눈이 잔뜩이다.

땅끝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버스가 내리막길을 내려가지 못해 내려서 걸어내려갔다.

 

이리저리 땅끝 부근에 도착하니 저편에 해가 솟는다.

눈도 오고, 날이 궂어서 해 보는 건 기대를 안했는데,

거짓말처럼 해가 동그랗게 퐁당 올라온다.

이렇게 동그란 해 떠오르는 걸 보는 건 처음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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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이 크리스마스라 방송국에서 카메라 들고 나와있다.

어떤 소원을 빌었느냐고 묻는다.

시크하게 웃으며, 세계평화를 기원했다고 말했다.

훗훗

당황하며 몇가지 질문을 더 했는데, 대답이 별로 신통치 않던지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보길도를 나가볼까 했는데,

배가 안뜬다. 9시면 안내방송을 하겠다던게, 11시로 늦춰치고..

표지판에 보니 땅끝길이란 게 보여서, 거기를 걸어보기로 했다.

사구미 해변을 목표로 사박사박 걸어갔다.

이때쯤 돼서야, 어딘가 떠나있다는 느낌도 들고 좋았다.

눈이 와서 차도 별로 안다니고,

사람도 없고.

흥얼흥얼 노래르 부르며 걸었다.

길 옆으로 풍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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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호까지 걷고 나니,

표지판이 해변쪽을 가르킨다.

음.. 그런데 해변쪽에 아무리 봐도 길이 없다.

그냥 해변을 따라 걸으라는 건가, 궁리를 하며 해변 옆쪽에 걸을만한 길이 조금 있길래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다 내리막길에서 줄에 걸려 몸이 공중으로 붕떴다. 30cm는 떴을거야ㅠ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던 터라 어정쩡한 자세에서 가슴, 배, 허벅지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충격을 골고루 분산시키는 훌륭한 낙법이라니!!

모래사장이어서 뭐, 다치지는 않았다만,

아무래도 내가 걷고 있는 곳이 길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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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따라 죽 걸어오니, 여전히 표지판이 서 있었다.

그런데..

표지판이 가르키는 방향에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바다를 헤엄쳐 건넌 다음에, 바위를 타고 올라 산을 넘어야 했다.

내가 길 없는 길 가는 걸 마다하지 않고 좋아하긴 하지만,

저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대체 누가! 표지판을 이렇게 꽂아놓아서 날 농락한걸까..

표지판만 꽂아놓고 아직 길을 못만든걸까..

다시 해안을 거슬러 돌아가.. 결국 도로를 걸을 수 밖에..

사구미 해안에 도착해서.. 앉아서 바다를 좀 보다..

(해남 바다보다 남해 바다가 훨씬 맑다. 같은 남해인데.. 왜 이렇게 다르지? 남해 바다는 바로 옆 통영 바다보다도 훨씬 맑았다. - 이런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해남읍으로 돌아갔다.

 

다음엔 미황사.

 

대웅전이, 단청도 없고, 혹은 있었지만 다 벗겨졌고, 수수해서 좋았다.

템플스테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묵언중이었다.

나도 1주일 정도 묵언 해보면 좋겠단 생각이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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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터에 절이 있다.

뒷산을 올라보려고 나섰다.

오르기 시작하면서, 뭔가 불편하고 오르기 싫다는 마음이 툭툭 튀어나왔다.

길을 잘 모르겠고,

눈이 쌓여 있는데, 오르는 발자국이 2~3개 있고, 내려오는 발자국은 없고,

발자국이 얼마 없으니, 어두워지면 길을 못찾겠다 싶고,

그래서 길을 잃으면, 배낭에 건빵도 한 봉지 가득있고 대충 옷 껴입고 낙엽 글어 모으면 하룻밤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하며.. 올랐다.

오르다 보니 대밭삼거리라는 이정표가 나왔는데,

올라온 길이 1.6km인데,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 1.6km를 더 가야한다고 쓰여있다.

거길 다 올라가면 시간맞춰 못 내려가겠구나 싶다.

아래에서 표지판을 읽을 땐 꼭데기까지 2km가 안될 것 같았는데..

왜 이런 것일까.. 번민하며,

이렇게 내키지 않는데 계속 오르게 하는 당위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몇 가지 답이 떠오르면서, 내가 그런 당위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그만 내려가도 좋겠단 마음이 들면서 편해졌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보자싶어, 아주 조금 더 가다, 전망 트이는 곳에 도착해 한바퀴 휘돌아보고 다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아무리 얕은 산이라지만, 눈이 쌓여있어 미끄러웠고,

어둑해져서 내려오면 정말 하룻밤 산에서 보내겠구나 싶었다. ㅎㅎ

내려와서 표지판 보니, 내가 올라간 길은 올라가려고 했던 길과 완전 다른 길. 음...;

뭐.. 나중에 다시 올라가봐도 되는 것이니.

 

절 앞에 다원이 있어 들어가서 차를 마셨다.

이번엔 말차.

말차는 처음 마셔본다.

열심히 거품을 냈는데, 거품이 잘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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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버리고 내려오니, 마음이 편해져서,

이날 돌아갈까, 아침에 일찍 올라가야 하더라도 하루 더 머물까 고민이었는데,

후자로 빠르게 정리됐다.

그래서 다시 땅끝으로 가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밤하늘 잠깐 보면서 별 세다가,

일찍 골아떨어졌다.

푹 자고,

땅끝 조금 더 돌아보고,

광주 거쳐 전주로.

 

 

아아, 다시!

몇가지 화두와 해결은 있었다.

얼마나 기억하고, 삶에 반영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