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2014/05/15

어제 진행했던 기자회견문을 작성하면서

'니가 모든 문제의 시발이다' 운운하는 문구를 넣었다.

 

역시나 기자회견문을 읽는데

쫀득쫀득하니 좋더라.

사람들이 힘주어 읽는터라 발음도 된소리로 변하고.

 

나는 다른 사람이 그 문장을 읽는 대목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혼자 고개를 숙이고 킥킥 거렸다.

 

아, 내가 이렇게 재밌는 사람인데.

2014/05/15 11:38 2014/05/15 11:38

분류없음2014/04/17

지난 주말엔, 서버에서 뭘 한답시고

root 권한으로 깔짝거리다,

root 디렉토리에서 chmod 644 * 을 실행하는 만용을 저질렀다.(사용자 디렉토리에 있는 줄 알았다 ㅠ)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 뭔가 이상한데, 이게 뭐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어버버버 거리다, 다시 로그인해볼까 하고 로그아웃해버리고..

이제 쉘 접속도 안되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멘붕, 멘붕, 멘붕.

다행이도 원격으로 터미널 접속할 수 있어서 해결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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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능력 바깥의 일을 덥썩 덥썩 받아오는 것 같다.

모르면 배우고 노력하면 되니까, 그것 자체가 문제인건 아닌데,

문제가 되는 건, 내가 배우려는 자세도 부족하고, 노력도 안한다는 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자존심 같은 게 있는건데,

남에게 도움 요청하는 걸 지지리도 못하고, 내가 잘 모른다는 걸 티내는 것도 싫어한다.

그럼 혼자서 노력이라도 해야하는데, 그것도 별반 안하고,

벅찬 과제들 앞에서 허우적허우적 거리기만 한다.

아.. 이거 정말정말 안 좋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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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7 11:53 2014/04/17 11:53

지나간다2014/03/31

주말 섬진강에 다녀왔다.
임실 강진면 부근에서 순창쪽으로, 섬진강 길 자전거 타고 달렸다.
불과 몇 년전에 왔을 때만해도 비포장도로였는데,
지금은 다니기 편하게 정리해놓았다.
나에겐, 주말 걷거나 자전거 타며 바람쐬고 싶은 사람들에겐 좋은 일이나
강변 마을 사람들과 강에게는 좋은 일일지 잘 모르겠다.
 

오늘은 완연한 봄이다.

햇살이 너무 따사해, 바깥에 잠시 누으니 마음이 포근하다.

 

어디로 넘어간다는 게, 그리 멀어보이던 게,

바로 코 앞이라는 걸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다.

요즘 부쩍들어 이런 글도 자주 남기고, 그만큼 생각도 자주하고 있다.

내 믿음은 얼마나 갸냘프고 가벼운 것이었나.

왠지 이번엔 정말 그렇게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희망사항인건지, 그저 가정해보는 건지 이미 모호하다.)

그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마다할 것 같지 않다.

나에게 그런 선택지가 주어질 일은 그닥 없겠으나,

아무튼 이런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하고 싶은 건, 혹은 원하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에게 인정 받는 것?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굴레인지 요즘에야 실감한다.

동시에 내가 겪은 세상이 티끌만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한편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 평소라면 그냥 넘길일도 넘기지 못한 채,

꼬박꼬박 마음의 소리를 내뱉곤 했다.

 

정신을 남긴다는 것, 그 무거운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가볍게 던졌나.

놓을 수 있는 것과 놓지 못하는 것을 잘 추려야겠다.

2014/03/31 23:34 2014/03/31 23:34

분류없음Ubuntu 12.04 + APM 삽질기

1. Ubuntu 12.04 + ssh 설치

 

2.

apt-get update

apt-get install apache2

sudo apt-get install libapache2-mod-auth-mysql

sudo apt-get install mysql-server mysql-client

sudo apt-get install php5 php5-cli curl memcached php5-curl php5-gd php5-memcache php5-mysql php-apc php5-xsl php5-imap libssh2-php libapache2-mod-php5 php5-gd php5-xmlrpc php5-intl

sudo apt-get install phpmyadmin

(apache2.conf 에 '/etc/phpmyadmin/apache.conf'를 Include 시키라는 글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에러메세지 나온다.)

/etc/apache2/mods-enabled/php5.conf에

<IfModule mod_php5.c> 바로 아래에

'AddHandler application/x-httpd-php .html .htm' 추가해준다.

sudo apt-get install munin-node munin (서버모니터링 할 수 있게)

 

 

rewrite mod 사용

sudo a2enmod rewrite

vi로 /etc/apache2/apache.conf 열어서

맨 아래

<IfModule mod_rewrite.c>

rewriteEngine On

</IfModule>

넣어준다.

그리고 /etc/apache2/site-enabled/

이 안에 가상호스트 설정 파일을 만드는데, /etc/apache2/site-availabled/default 이 파일을 가져다 쓰면 된다. 

ServerAdmin

ServerName aaa.domain

ServerAlias bbb.domain

DocumentRoot /home/ccc/blahblah

그리고 아래에

<Directory /var/www> 이걸 <Directory /home/ccc/blahblah>로 수정하고

AllowOverride all 로 수정

sudo /etc/init.d/apache2 restart

아파치 재시작.

 

vsftpd 설치

그냥 vsftpd 설치하면 혼자 쓰는 서버는 상관없으나 여러 아이디로 접속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sudo add-apt-repository ppa:thefrontiergroup/vsftpd

이렇게 하면 없는 명령어라고 나올 터.

'sudo apt-get install python-software-properties'

이걸 먼저 해준다.

그리고 sudo add-apt-repository ppa:thefrontiergroup/vsftpd

sudo apt-get update

sudo apt-get install vsftpd

vi /etc/vsftpd.conf 하고서

anonymous_enable=NO

local_enable=Yes 주석제거

chroot_local_user=YES 주석제거

chroot_list_enable=YES 주석제거

chroot_list_file=/etc/vsftpd.chroot_list 주석제거

allow_writeable_chroot=YES 삽입

/etc/vsftpd.chroot_list 에 root 접근 허용할 id 기록해놓으면 된다. 비워놓아도 무방

 

* 추가 : 그리고 업로드된 파일의 퍼미션을 정해주는 옵션이 있다.

이걸 그대로 두고 xe의 쉬운 설치를 이용했더니 업로드된 파일의 퍼미션이 모두 600이어서 먹통이 된다.

local_umask=022 이 부분 주석 해제하고 그 아래에 아래를 삽입하면 된다.

file_open_mode=0644 

 

sudo /etc/init.d/vsftpd restart

 

ZendGaurdLoader

php -i | grep extension_dir 로 extension_dir 확인한다.

/usr/lib/php5/20090626 이라고 나왔다.

wget http://downloads.zend.com/guard/5.5.0/ZendGuardLoader-php-5.3-linux-glibc23-x86_64.tar.gz
tar xzf ZendGuardLoader-php-5.3-linux-glibc23-x86_64.tar.gz

cp ZendGuardLoader-php-5.3-linux-glibc23-x86_64/php-5.3.x/ZendGuardLoader.so /usr/lib/php5/20090626/

그 다음

vi /etc/php5/conf.d/zend_extensions.ini
zend_extension=/usr/lib/php5/20090626/ZendGuardLoader.so

이렇게 저장해주고, 퍼미션 설정

chmod 644 /usr/lib/php5/20090626/ZendGuardLoader.so
chown 0:0 /usr/lib/php5/20090626/ZendGuardLoader.so

2014/03/13 12:46 2014/03/13 12:46

분류없음2014/03/11

내일, 영 자신 없지만, 서버를 새로 세팅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 부딪힐지 짐작이 안되니,
외려 긴장도 안된다.

다 업체에 맡겨버리고 싶지만
앞으로를 보면, 그냥 부딪혀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지금 서버는 내가 처음 설치했던 서버가 아닌데다가,
중간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설치해놓은터라,

문제가 생겨도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건지 찾지도 못하고 끙끙대기만 하니.

 

그나저나, 일은 큰일.

2014/03/11 17:26 2014/03/11 17:26

지나간다2014/02/26

뭔가 하는 게

안하는 것보다 낫다는 게 지론이지만

지금 하는 건 정말 나은 건지 확신이 안든다

2014/02/26 01:55 2014/02/26 01:55

분류없음노동(운동)의 중심성 논의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박재영

예전에 CurrentInside 사이트에 있던 글이고, 그 사이트는 없어졌다.

다른 곳에 옮겨놓았던 걸 우연히 찾게돼서 이곳에 다시 옮겨놓는다.

 


1/

 

참으로 고전적인(?) 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노동(운동)의 중심성이라. 무릇 모든 운동 중에서 가장 힘있고 중요한 그런 운동이 바로 노동운동이라는 얘기다. 한때 누구나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 말이, 지금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분위기가 변한 건 바로 얼마전의 일일뿐이다. 그때가 아마도 94년을 전후한 때일 것이다. 알튀세르, 발리바르에 대한 학습 열풍이 불면서 노동(운동)의 중심성은 폐기 처분되고, 사회적 적대의 다차원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이후 노동(운동)의 중심성이라는 화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멀어져만 갔다. 그런데 한때를 풍미하던 담론이 쇠퇴해져 가면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를 따져 보는 일은 아주 귀찮은 일이라, 아무도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없다. 이 자리에서 그걸 해낼 수는 없는 게 글쓰는 이의 능력이지만, 그래도 간략한 대차대조표 정도는 정리해 보는 게 어떨까 한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묻지는 말자. 그냥 한번 해보는 거니까. 사실 그냥 하다고는 했지만 이 문제는 너무나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다. (계급)주체의 형성이라는 화두로서의 노동(운동)의 중심성이라는 논의는, 사실상 혁명에 대하여 논하라고 주문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할 정도로 사람 기를 죽이게 한다. 그렇게 벌려 놓다가는 죽을 때까지 글을 끝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일단은 계급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의, 더 정확하게는 일반적으로 오해되는 것들로 범위를 축소시켜 보겠다.

 

 

 

 

2/

 

노동(운동)의 중심성이란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노동운동, 이거 중요하다. 노동운동이 빠지면 뭐가 얘기꺼리가 될 수 있나? 쪽수도 제일 많고, 돈도 제일 많다. 역사적 경험도 제일 풍부하다. 그뿐인가? 현정권의 노동관련 전략·전술은 사실상 신자유주의로의 전진이란 전체 국가운영 목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축이다. 여기에 맞서는 노동운동-좋다.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럼 노동운동만 중요하다는 얘기냐? 뭐 이런 논리다. 여성운동도 있고 환경운동도 있다.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운동은 없다. 그런데 왜 노동운동만 유독 대접받아야 하는가? 유독 노동운동이 다른 운동에 비해서 대접받아야 할 이유가 뭔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는가? 그냥 자본주의 사회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계급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둘뿐이니까, 그래서 그런가? 그렇다면 가부장주의 사회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 또 반생태적 사회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 이 수준에서의 질문이라면 사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아그리빠를 그릴 때 앞에서 보고 그리는 것과 옆에서 보고 그릴 때의 결과는 다르다. 하지만 모두 아그리빠를 그린 건 마찬가지다. 사회를 보는 것은 시야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지만, 모두들 하나의 사회를 대상으로 말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름을 뭐라 붙이든 말이다. 물론 자유기업센터의 공병호같은 저질은 제외하고 말이다. 어쨌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표현은 애정과 애착의 문제, 즉 가치판단의 문제로 귀결되며 그것은 알다시피 논리 같은 것이 개입할 자리를 없애 버린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단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고, 또 그래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지금의 세상이 아니고 다른 세상일 테니까 말이다.

 

 

 

 

3/

 

사회적 적대의 다차원성 혹은 억압의 다면성이란 개념은 결국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대립되는 표현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사회적 적대가 노동적대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인정하기는 쉽다. 눈에 훤히 보이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예컨대 아무리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사회적 적대가 복수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여러 개가 있으면 어떻할거냐라는 거다.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뭔가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판단의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게 그 복수의 적대들간의 관계와 구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무궁무진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중립이란 건 없다. 혹은 중도나 객관적인 총체성 같은 그런 단어들은 머리와 입으로나 가능한 말이지, 현실 속의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렵지 않다. 쉽게 생각해보라. 훌륭한 노동투사라도 집에 돌아가면, 재떨이 가져와 라고 말하는 남편이 될 수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단한 페미니스트라도 전철이나 전화가 파업으로 중단되어 버린다면 불평을 할 수 있다. 넉넉한 마음의 생태주의자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외치고 다니면서도 정작 자신의 집에서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은 부인일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생각 가능한 일이다. 이런 걸 회피하면 그 다음은 공허함만이 남는다. 예컨대 이런 표현이 대표적이다.

 

"먼저 우리는 '억압의 다면성과 다차원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제약하는 비인간적인 억압을 주로 계급적 억압으로 접근하였다. 물론 비인간적 억압의 근저에는 계급적 억압이 의연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계급억압 환원론'으로 흐를 때 사회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제약하는 억압의 다양한 측면과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 …… 20세기적인 인간해방운동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식적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20세기적 지평 위에서 전재되었던 해방운동 과정에서 쟁취된 해방의 다양한 차원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조희연,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당대, p.147)

 

조희연씨같은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복수의 적대와 억압의 존재 자체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소위 '현실사회주의'가 생태 파괴적 산업화를 추구했다는 사실, 그곳에도 여전히 여성억압의 문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그 사회의 권력이 스탈린처럼 개인숭배라는 종교적 수준의 파시즘적인 권력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것은 복수의 적대가 존재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복수의 적대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었는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복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계급억압 환원론'이라고 노동적대의 문제를 취급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일종의 논리적 속임수다. 예를 들어 나는 아버지이면서 아들이기도 하고, 남자이면서 남편이기도 하며,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이면서 자주 거짓말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기도 하다. 분명히 복수의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각각의 존재를 키워주는 상호작용을 하기조차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들 살아간다. 그런 사람이 나는 통상적인 수준의 남자로서 살아간다면 남자환원론인가? 물론 개인과 집단 혹은 조직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차이가 얼마나 결정적일까?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계급억압 환원론을 핑계로 사실상 복수의 적대간 관계와 구조, 그 재생산에 대한 분석을 포기한다는 데 있다. 아니 혼자서 분석을 포기하는 정도라면 별 문제가 없을 턴데 남들한테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데 큰 문제가 있다. 앞서 인용한 조희연의 글 바로 다음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써 있다.

 

"계급적 억압과 여타 억압들간의 관계에 대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적 억압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 억압의 기제는 여타 억압의 기제를 규정하면서 내재적·외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여타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 계급환원론적 관점은 바로 다양한 억압의 정당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계급억압의 부산물로 인식하는 데 있다. 다양한 해방적 실천이 계급적 실천운동의 수단화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문구다. 내가 하는 일이 계급적 실천운동이 아닌데, 그걸 보고 뭐라 그러지 마라.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거니까 말이다. 너보고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나보고도 뭐라고 그러지 말아라. 쉽게 표현하면 이런 얘기 아닌가? 예컨대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혹은 그들을 대표하는 이론가들이 많이 하는 말이다. 중요한 게 있으면 그 중요한 것이 뭔가 역할을 해도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로는 중요하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나아가 조직적·실천적으로는 나서지 말라고 한다. 계급환원론이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말이다. 물론 좀더 가까운데 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다. 예를 들자면, 민주노동당의 이재영 국장 같은 사람. 그가 쓴 [우리 당의 여섯 가지 성격]같은 글을 이런 류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노련한 문건이다.

 

솔직해지자. 인용한 조희연의 글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중심성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대개의 생각 아닌가? 물론 우리 모두가 그런 생각을 의도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좀더 치열한 분석과 실천을 포기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차라리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아예 잘못된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더 진지한 자세가 아닐까? 말로는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발로 차버리는 그런 태도보다도 말이다. (솔직히 이런 식의 태도는 신물날 정도로 많이들 본다. 개방된 연대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라고 선전하면서도 조직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는 운동조직-예컨대 현재라면 아마도 정당운동을 추진하는 두 세력, 민주노동당과 청년진보당이 그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예 솔직하게 생태주의자들처럼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전혀 다른 새로운 류의 신인류, 신생활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훨씬 가까운 느낌이 든다. 박노해처럼 사람만이 중요하다고 외치며 생태적인 삶만이 자신을 구원할거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쟁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보다는, 윤구병씨처럼 모든 것을 던지고 땅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사람이 더욱 커 보인다.

 

사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슨 일이 되겠는가? 다시 말해 복수의 적대가 있다는 사실과 복수의 적대가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는 사실이며, 현실은 후자의 문제가 전자를 압도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구분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적대의 다차원성 혹은 억압의 다면성이란 개념은 결국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대립되는 표현이다. 하지만 적대의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냐를 이해방식이 복수의 적대를 대하는 태도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적대의 다차원성 혹은 억압의 다면성이란 개념은 결국 노동(운동)의 중심성과 전혀 대립되는 표현이 아니다.

 

 

 

 

4/

 

억압의 다면성과 다차원성에 대한 인정은 또한 그에 대응하는 인간해방운동의 다면성과 다차원성의 인정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해방의 프로젝트는 단일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복합적 해방의 프로젝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쉽게 말해보자. 발리바르를 따라, 사회적 적대가 노동적대, 성 차의 문제, 지식 차의 문제, 생태의 문제라는 복수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운동 역시 노동운동, 성차운동, 지식차운동, 생태운동이란 복수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 건가? 따라서 해방이란 노동해방, 성해방처럼 여러 가지 형태가 모두 함께 있어야 하는 건가? 이런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괜한 억지일까?

 

문제는 운동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조직들을 운동 그 자체로 치환하는 것이 이 논리의 핵심이다. 운동을 조직으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이 위와 같은 진술을 허깨비로 만든다. 부문운동이니 영역운동이니 하는 분류는 그야말로 분류에 불과하다. 이같은 사고가 개별운동이 사회적 적대와 직선적으로 대응하는 단일운동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노동적대가 여러 사회적 적대중 하나라고 해서, 혹은 성 차의 문제가 여러 사회적 적대중 하나라고 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운동 또한 여러 종류의 구분되는 별개의 운동중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엄밀하게 말해서 운동은 그저 운동이다. 그것은 일체의 억압과 폭력에 대해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것이지, 단순하게 하나의 적대만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운동, 더 정확하게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운동만 하나? 여성운동도 하고 생태운동도 한다. 또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운동조직은 여성운동만 하나? 노동운동도 하고 생태운동도 한다. 또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노동적대와 맞서는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 여성운동은 성 차의 문제에 맞서는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조직들의 구성형태와 재생산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지, 단지 노동적대나 성 차 문제에 해당하는 고유한 운동의 내용이 따로 있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사고가 가장 뿌리깊은 자본주의 체제 구성이데올로기의 핵심중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를 따라가 보자. 그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체제가 자신을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편이라고 말한다. 경제의 가장 깊은 구석이라는 생산라인 혹은 공장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 태도와 행동을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국가를 전제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Reading Capital}에서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런 점에서 전 생애에 걸쳐 일관된 주장과 이론을 펼쳐나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알튀세르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은 학습하는데 도움이 될지언정, 그의 핵심적인 주장을 이해하는데 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캘리니코스같은 사람들과 그 반대의 입장에 선 포스트맑스주의자들은 그렇게들 알튀세르를 오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브뤼노프 역시 {국가와 자본}(새길)에서 그런 점을 일관되게 분석하고 있다. 다시 우리의 논의로 돌아가 보자. 사회적 적대와 일직선적으로 대응하는 그런 고유성을 가진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의 사회적 적대와 다양한 방식으로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운동들은 복수의 사회적 적대들간의 관계와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여성운동조직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생태환경운동단체같은 형태를 띠기도 하며, 노동조합운동같은 형태를 띠기도 한다. 그 반대는 아니다. 노동운동+여성운동+생태운동=해방같은 등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사고로는 죽어도 연대라는 단어와 차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식의 사고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은커녕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데 도움만 줄뿐이다. 자본주의 생명력은 바로 분할하고 나누는데 있다. 대중을 항상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나누고 분류하며, 그것을 통해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 노동조합운동에서는 아주 열렬한 투사가 선거 때만 되면 DJ에게 표를 던지는 행위를 아무런 혼란 없이 당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렇다. 하지만 정작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으며 뗄래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몸으로 알고 있다. 전경련을 보라. 늘 정부의 간섭 배제와 시장의 자유를 외치지만, 자신이 손해보아야 하는 일에는 항상 국가를 불러들인다. 우리는 그것을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그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들의 삶이다. 나로서는 운동이란 것도 이래야 한다고 본다. 차이와 연대는 논리가 아니다. 복수의 사회적 적대를 구분하고, 또 복수의 운동을 구분하고, 그런 다음 그런 운동들간의 연대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논리에 불과하다. 논리가 아닌 본능적 행동이 필요한 건 바로 연대를 위해서이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혁명적 실천 없이 혁명적 이론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

 

사실 이런 분류들이 횡행하는 것은 조직의 보신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운동을 자꾸 예로 들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다시 한번 예를 들어보자. 경실련 같은 소위 종합적 시민운동단체를 보자. 이들이 기반 하는 이론은 사실 간단하다. 시민사회가 있고 국가/정치와 경제가 시민사회를 포위하고 있다. 시민들이 나서서 시민사회를 구출하자. 뭐 이런 논리 아닌가? 시민사회론 같은 것의 이론적인 문제점은 다 제쳐두고라도(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글들이 있지만, 적어도 그람시가 경실련이나 심지어는 조선일보조차 이용해먹을 정도로 녹녹한 시민사회이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정도만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김세균, 임영일, 발리바르와 월러스틴 등의 글을 보라.),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사회가 있으니까 시민운동이다라는 식의 단선적인 운동에 대한 이해방식이다. 이렇게 운동을 이해하게 되면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문제에 대응하는 종합적인 시민운동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종합적인 형태로 이슈를 다루는 방식의 운동의 우리나라의 역사적 맥락에서 생긴 것이지 시민사회론 같은 이론이 던져준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이론화는 사후적인 것이다. 또하나, 시민사회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즉 민중이나 노동자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운동은 따로 있는 무엇이 된다. 그들보고 하는 말, 너희는 시민운동말고 계급운동이나 해라. 단 계급이기적이나 계급환원론적으로만 말고. 자기는 모든지 다 하면서 말이다. 경실련이 경실련 노동자회를 만들고 시민운동이고 다른 사람들이 무엇무엇노동자회같은 것을 만들면 노동운동이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분류는 배제를 필연화한다. 배제를 위한 분류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너랑 달라. 이 말만 남는다. 그렇다면 소위 진보운동은 뭐 다른 게 있나? 나는 너랑 달라 - 이 말은 자신만을 위해서 쓰여진다. 예컨대 노동(운동)의 중심성이란 명제를 노조운동의 주도적 운영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배제를 위한 분류의 가장 적절한 이해방식이라 하겠다. 이런 식의 낯뜨거운 행태보다는 좀 덜 하기는 하지만 정당은 정치투쟁, 노조는 경제투쟁 같은 이분법이 공공연히 판을 치는 것 역시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앞서도 말했지만 정치와 경제는 절대 다른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민주노총은 자신의 일을 정당으로 넘겨버리고, 정당은 또한 자신의 일을 노조로 넘겨버린다. 공공연한 이 역할분담. 이 역할분담은 환상의 발레조는 될지 모르지만, 무대 앞의 대중을 그저 관객으로만 놓아두는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사고들이 부문운동 또는 운동을 이러저러한 방식의 분류표로 이해하는 것의 결과다.

 

 

 

 

5/

 

또 다른 방식의 분류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계급은 인적 구성으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이다. 몇 가지 지표들, 예를 들어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임금의 사회적 수준, 사회적 직책 수준, 교육 수준, 노동의 양태 같은 지표들로 인구를 분류하고 이들중 일부를 노동자계급으로, 또 다른 일부를 자본가계급으로, 어느 쪽에도 분류하기 힘든 이들을 중간층 같은 식으로 계급을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식의 논리가 희화화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계급연합당'같은 개념이다. 계급을 몇 가지 지표들로 분류하여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계급연합당 같은 사고가 나타난다. 가령 노동자만으로 당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자당 혹은 노동계급당이 아니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어느 한 계급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연합'당이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 - 이런 식으로 사고하게 되면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인간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사고하게 된다. 세상에 어떤 당이나 조직이라도 인적구성으로 분류해 놓으면 단일한 사람들만으로 채워지는 경우는 없다. 동일한 노동운동 내에서도 대기업노동자들과 중소기업노동자들이 다르고, 육체노동자와 사무노동자가 다르다. 그들을 몇 가지 공통된 지표로 묶는다고 그들간의 차이가 없어지는가? 결국 이런 식이라면 모든 당과 모든 조직은 연합당이며 연합조직이 되는 게 아닌가? 계급연합당을 주장하건, 계급당을 주장하건 계급이란 개념을 인적구성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분류된 인간들의 지표로 이해하는 한 동일한 지반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의 결과가 결국 민주노동당을 '노동자가 앞장서는 민중들의 당'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규정한 것이다. 나로서는 노동자와 민중이란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계급은 분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말은 80년대 후반 서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급론 논쟁에서 회자되었던 말이다. 솔직히 이런 말이 여전히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성과가 이제와서는 깡그리 무시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아 몹시 아쉽다. 관심이 있다면 {경제와 사회}에서 이루어진 서관모의 계급론 논쟁을 참고하라.) 만약 분류될 수 있다면, 연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덧셈하는 능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덧셈하는 능력보다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계급을 구성해내는 실천이다. 민중이 있고 혹은 노동자가 있어서 그들을 모으는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모든 전략과 전술은 그다지 의미가 없게 된다. 단 하나의 전략과 전술만이 남는다. 학습하라, 조직하라, 선전하라! 이 문구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측면에서라면 분명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맨 처음 발언자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겠지만, 이 말이 쓰여진 효과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계급투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호명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우리 사회에서는 계급이건 민중이건 이런 측면에선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계급은 계급투쟁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만 내가 노동자요 혹은 노동자당이요 한다고 해서 노동자가 많이들 가입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외연을 넓혀서 민중을 호명한다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여성이라고 해서 다 여성운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생태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급은 계급투쟁 속에서 형성된다는 발리바르의 어려운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생태운동단체들은 대체로 이러한 점들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서독의 녹색당의 경험과 역사,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생태운동은 그들이 주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편적인 인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생태가 파괴되는 정도가 너무 심각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생태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좀더 쟁점 중심적이다. 있는 쟁점은 끝까지 세밀하게 쫓아다니고, 없는 쟁점은 자꾸 만들어낸다. 반핵운동에서 유전자조작반대까지 생태운동의 역사는 아주 구체적이다. 또 생태운동은 학생운동부터 일반사회운동까지 대체로 일관되게 쟁점 중심적이다. 또 그들은 태백산 골짜기, 동강 같은 쟁점의 현장에서부터 국회,행정부,법원같은 공공기관뿐만 아니라 사기업 등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계된 모든 부분을 쫓아다닌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를 나눠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구체적인 쟁점과 투쟁 속에서 생태운동의 주체들이 구성되고 또 재생산된다. 그들은 친생태적 인류(이들을 새로운 계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새로운 계급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보편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열려진 과제가 아니다.)를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분류하지 않는다. 그들이 분류하는 것은 정세 속의 쟁점들이다.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말하는 이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런 형태의 자기 활동이다. 대체로 정해진 운동형식에만 매달린다. 거시적으로 보면, 기업별노조체제에 안주하는 지금의 민주노총이 그렇고, 작게는 임금과 단협투쟁에만 매달리는 개별 노조들이 그렇다. 여기에 정치는 딴나라의 문제가 된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불법적, 편파적 정리해고를 묵인하는 노동조합은 바로 이러한 자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운동을 분류하고, 운동주체를 분류하며, 그 분류된 형식을 절대시하는 습속. 바로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6/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노동(운동)의 중심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글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하면서 남들을 비판하는 듯 했지만, 사실 내자신의 사고에 대한 반성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중심이 된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본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바대로 운동을 형식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며, 분류를 절대화하는 사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가 중심적이라거나 혹은 누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노동운동이 우리 운동의 중심이 될지 아닐지는 현실속 권력과 조직, 그리고 투쟁을 통해 결과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현재 노조운동이 우리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결과다. 우리나라 노조운동의 역사는 그들이 우리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을 만 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 내용이다. 실제 어떤 방식과 형태로 노조운동이 재생산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지극히 부족하다. 요근래에 벌어진 몇 가지의 논쟁들에 주목한다. 노동시간단축 논쟁, 사회적 조합주의 논쟁, IMF체제에 대한 평가와 대안에서의 논쟁들은 이러한 부족함을 메워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노조운동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고민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거창한 박사학위 논문보다도, 뛰어난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 같은 절규도 필요 없다. 월간 {작은 책}같은 진솔한 글들, 투박하지만 각종의 노동매체에서 전해주는 논쟁들 - 뭐 이런 것들이 좀더 많아지고 좀더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전국적 정치신문을 지향한다는 민주노동당의 정치신문이 고작해야 민주노총의 기관지인 {노동과 세계}보다도 별로 볼 게 없는 현실, 그조차도 몇 부 발행되지 않는다는 사실, 사회과학서점에 배포되는 팜플렛이 고작해야 트로츠키주의 기관지 정도밖에는 없는 현실 , 이런 현실들은 우리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어쨌든 단편적으로 알려지는 몇 가지 사실들을 근거로 한다면, 앞으로도 노조운동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미지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조합주의 논쟁에서도 약간은 밝혀졌듯이 노조운동의 향방이 노동운동의 구성과 탈자본주의적 전망을 갖는다기 보다는, 사회적 합의체계의 형태로 편입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전망이 문제가 아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역사의 주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역사 속의 주체는 있다. 그들은 누군가?

 

그러나 노동의 중심성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노동해야 하고 또 그렇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공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과학자들의 연구실에서도 이루어지며('과학은 노동과정이다'), 가정의 싱크대에서도 이루어진다(가사노동). 노동은 학교에서도 이루어지며, 국회에서도 이루어진다(사회적 공장). 노동은 육체적 현실이며 정신적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 몸과 내 마음에 새겨진, 떼어낼 수 없는 코드다. 우리는 노동의 개념을 이렇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자연에 대해서조차도 노동이란 개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생태맑스주의). 사회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인식을 확장해야 하며, 나날이 등장하는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문명을 적극적으로 용해해내야만 한다. 그것없이 탈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만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2014/02/24 13:49 2014/02/24 13:49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한 번, 두 번, 

세 번 쯤 다시 뒤적거리고서 전체 얼개가 얼추 맞춰지는 구성.

이런 구성이 좋은데, 아주 좋은데,

그냥 무협지나 읽고 싶은 마음상태일 땐, 좀 번거롭게 느껴지네 ㅋ

 

주제들이 연달아 너무 비슷한 거 아닌지 싶다.

이전 작에서도, 그 이전 작에서도,

관계에서 소통의 불가능성과 그것을 뛰어넘는 가능성으로서 사랑.

내가 보는 게 전부이진 않겠지만,

큰 줄기에서 그다지 벗어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순간은 가능하기도, 가능하지 않기도 한데,

김연수의 작품은 가능하지 않은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실상, 우리는 매 순간 이별하며 살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들지만, 어쨋든, 좋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자음과모음, 2012

 

2014/02/18 16:55 2014/02/18 16:55

분류없음살 책들

  • DNA 독트린, 3중 나선 - 리처드 르원틴

  •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 루이기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 거대사 관련 - 데이비드 크리스찬

  • 한국 역사 - 한국역사연구회

  •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 데이비드 하비

  •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 뒤메닐, 레비

  •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 백승욱

  • 연안행

  • 김학철 평전

  •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 와다 하루끼

  •  

  • 포크송대백과!

2014/02/01 13:26 2014/02/01 13:26

지나간다2014/01/17

요즘 별다른 이유 없이,
자꾸 늦게 잔다.
그러니 피로가 풀릴리 만무.
 
멘탈에 크게 문제가 있진 않으나,
미묘한 어긋남, 균열.
 
지금도 일은 많은데,
대개 영양가 없는 일들이고,
자꾸 팽개치고 싶다.
혹은 팽개치고 싶어서 영양가 없다.
일의 성패에 크게 매달리지 않으니
마음이 후달리지는 않는다.
요즘은 고립되는 게 그다지 두렵지 않은데,
이 또한 일의 결과에 달관해서이다.
이거 매너리즘 맞지? 아마?
 
 
그리고 나를 고립시킬 필요가 있는 듯.
난 기댈 곳 없는 혼자임을 확인할 때 에너지를 채우는 인간이니.
2014/01/17 02:01 2014/01/17 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