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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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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 불능에 이른 국민 투표

     

    우리는 30년 전에 "해체에 대한 테제(Theses on Decomposition)"1)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정치 기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해체되어 가는 원심력 경향을 더욱 통제하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계급으로부터 나온 파렴치한 정치적 모험가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대변동에 고통받아왔던 이들의 포퓰리즘적 저항을 자신들만의 자기-확장에 이용해왔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포퓰리즘의 확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게을렀다. 이것이 우리가 왜 이제야 포퓰리즘에 대해 - 여전히 조직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2) - 전반적인 글을 출간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상황에서 완벽한 분석을 내놓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이 글이 새로운 사상과 토론 심화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영국에서의 EU 국민투표와 그 이후의 일들로 나타난 전례 없는 혼잡과 무질서의 광경만큼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영국의 자본가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통제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모험가들 손에 좌지우지된 적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브렉시트 결과에 대한 준비의 실패는 영국 지배 계급 내부의 혼란을 보여준다.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탈퇴 운동가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약속했던, 그리고 탈퇴 캠페인 버스의 모든 벽에 붙어있었던, 브렉시트 투표가 가져다줄 NHS3)를 위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 추가 자금은 본질적으로 '오타'였음을 설명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라지는 UKIP4)대표 자리에서 사임했고, 모든 브렉시트 쓰레기더미를 그를 따르던 탈퇴 찬성자들의 무릎에 던져버렸다. 보리스 존슨은, 전임 의사소통 담당국장(director of communications) 구토 하리(Guto Harri)는 존슨의 "심장은 브렉시트 운동에 있지 않았다"며, 존슨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대의는 순수하게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에 도전하는 그의 리더십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위적 조작이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투표의 모든 기간 존슨의 선전부장이었으며, 존슨이 영국 총리가 되기 위한 운동을 운영할 예정이었던(그러나 반복적으로 그 일에 관심이 없음을 선언해왔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는 그의 오랜 친구 존슨이 총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로 후보자 등록 마감 고작 2시간 전에 스스로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존슨의 등에 칼을 꽂았다. 앤드레아 리드섬(Andrea Leadsom)은 고작 3년 전에는 탈퇴가 영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면서 토리당 대표 경선에 확고한 탈퇴 지지자로 입후보했다. 거짓말, 위선, 말 바꾸기들 - 이 모든 것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지배계급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야망이나 사소한 맞수들의 비판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역사적, 국가적 이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영국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이와 비견할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우리는 쇠퇴하는 중세 질서에 대한 마지막 갈망을 보여준 장미 전쟁(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로 극화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탈퇴 의견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금융과 산업의 사장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결과에 대한 모든 징후가 "당신의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만약 이를 인용해도 된다면, 워털루 전쟁 이후의 웰링턴 대공)5)임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는데에도. 20%, 그 이후 30%로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Sterling)가 즉각적으로 붕괴했던 것은 브렉시트가 기대한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민 투표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은행과 사업가들이 사무실을, 또는 사업체를 더블린이나 파리로 옮기는 것과 같이 탈출을 향해 질주하는 가감 없는 장관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세계에서 해외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경제 상황에서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이 즉각적으로 법인세를 15%로 내리기로 한 것은 영국에 기업들을 잡아두기 위한 명백한 긴급 비상조치였다.

     

    제국의 반격

     

    영국의 지배계급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별력 있게 존속을 지지해왔던 확고하고 역량이 뛰어난 정치인인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캐머런의 즉각적인 후임 총리가 되었고(애초에 9월 이전에는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다), 언론과 토리당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그녀의 반대편인 앤드리아 리드섬과 마이클 고브가 직장을 잃은 것은 국가의 유력한 지배계급 일부에 대해 신속하고 통일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의 진화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단계에서 통일된 부르주아 정책이 분해되어가는 전반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너머의 추동력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문제에 기여한 토론"에서 분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국제 현상은 특정 국가의 역사와 특징들의 영향 아래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서 토리당은 항상 그 EU에서 영국의 구성원 자격을 실제로 허락한 적이 없는, "유럽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한 측면을 담당해 왔고, 그 근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유럽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의 - 그리고 그 전에는 잉글랜드의 - 지리학적 위치는 영국이 대륙의 국가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유럽의 경쟁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지주 권력의 부재 또한 프랑스가 19세기 이전, 또는 독일이 1870년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 지배를 바랄 수 없도록 했고, 오직 주요 강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하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루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생존의 이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2. 영국의 섬으로서의 지리학적 위치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한 국가의 지위는 대항해시대, 세계 제국주의의 개막을 결정지었다. 적어도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에 모양새를 갖추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유럽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변했다. 영국의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지배적인 지위는 더는 유지 가능하지 않았고, 근대적 전쟁 기술들 - 공군,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 로 인해 유럽 정치로부터의 고립이 더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 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urchill)이다. 그는 1946년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고 요구하였으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견해는 전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편집자 주 : 처칠의 구상에서 유럽연방국에 영국이 포함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아 논쟁이 되고 있다.> 특히 소련(USSR)의 몰락과 1990년대 독일 통일이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권력을 증가시킴에 따라 EU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증가했다.6) 국민투표 운동 동안 보리스 존슨은 EU가 “히틀러” 독일 지배의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중상모략을 하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똑같은 언어로, 그와 똑같은 감수성들을 이미 1990년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그 이후에는 대처 정부의 총리가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전후 정치 기관 내에서 권위와 규율의 상실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다만 리들리는 정부로부터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존슨의 반향은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때 누렸던 지위. 그 지위의 상실은 영국 국민(노동계급을 포함하여)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적 집착은 - 영국이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 이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더 많은 소부르주아지는 영국이 오늘날 오직 2등급, 또는 3등급의 강대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탈퇴 운동가들의 다수가 EU의 "족쇄"로부터 영국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세계는 영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러 몰려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 경제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 권력의 상실에 대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분노와 적개심은 미국 국민이 자신들의 지위 일부를 잃었다고 인식한 결과(트럼프의 "다시 위대한 아메리카를 만들자"는 지속적인 테마)로서의 감성들, 그리고 냉전 시기 그들이 자신들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성들에 견주어볼 만하다.

     

    포퓰리즘에 대한 양보로서의 국민투표

     

    보리스 존슨의 포퓰리즘 광대 짓은 더욱 극적이었고, 더욱 많은 미디어로부터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데이비드 캐머런의 낡은, 최상위 계급의 "책임감 있는" 페르소나가 발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캐머런은 지배 계급 내에서 얼마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이용한 무대를 만든 것은 캐머런이었다.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국민투표는 의회 선거보다 통제하기 훨씬 어렵고, 그러하기에 언제나 도박을 의미한다.7) 카지노에 중독된 것처럼, 캐머런은 반복하여 스스로 도박사임을 드러내었는데,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승리했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그다음이 브렉시트였다. 그의 보수당은 언제나 경제, 영국(연합 왕국)8), 그리고 국방의 최고의 보호자임을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과 조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이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대부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위험 요소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쇠퇴기의 그릇된 형식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관한 결정은 전체 대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 그룹들의 조언을 받은(로비를 받은)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관점에 의하면, 이를테면 2004년 EU의 헌법 조약(Constitutional Treaty)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투표자들이 조약 문서를 읽으려고도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국민투표들에서 자주 “잘못된” 결과를 얻었던 지배계급이 이 조약을 연기시켰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프랑스, 네덜란드, 최초에는 아일랜드에 대해).9)

     

    오늘날 영국 부르주아 정당 내부에 메이 정부가 프랑스와 아일랜드 정부가 헌법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망친 뒤 했던 것과 같은 속임수를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국민투표를 무시하거나 뒤집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영국 부르주아지가 그 추종자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중의 의지”의 “민주주의적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오직 포퓰리즘 사상에 신뢰를 부여하고 그들을 보다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테리사 메이의 전략은 EU로부터 탈퇴하게 된 영국을 조직할 책임을 떠맡은 채, 장관직에서 최대한 잘 해보려고 애쓰고, 가장 잘 알려진 탈퇴 찬성자 셋과 함께 브렉시트의 길을 멈추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광대인 존슨을 국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 해외 인사들을 공포와 유쾌함과 불신이 뒤섞인 감정으로 환영하는 것 - 도 분명 이러한 폭넓은 전략의 일부이다. 존슨을 EU 탈퇴 협상이라는 논란이 많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메이는 탈퇴 운동가들의 주요한 발언들이 거의 확실하게 적대적인 언어로 가득할 대부분의 격렬한 비난 - 그리고 불신 - 에 직면할 것을, 그리고 이는 측면 저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을 확신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갖는, 엘리트가 단순히 그들에게 불편한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과정은 협잡이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 효율성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치에 대한 포퓰리즘 개념에서는 “사람들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에 의한 선출된 대표자들의 부패를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정적 경험과 나치 독일이 국민투표를 이용했던 경험 이후 전후(post-war) 헌법에서 그러한 국민투표를 배제한 까닭이다.10)

     

    탈선한 선거

     

    만약 브렉시트가 통제에서 벗어난 국민투표였다면,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선거이다.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처음 공언되었을 때에는 그 사실이 거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선두는 부시 왕가, 공화국 귀족들의 선호하는 선택, 그리고 잠재적인 강력한 기금 조달자(언제나 미국 선거에서 결정적인 고려사항)는 젭 부시(Jeb Bush)였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트럼프는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다음 주(state) 선거에서 계속 이겨나갔다. 부시는 ‘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나갔고, 다른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당 대표자들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는 테드 크루즈(Ted Cruz)뿐이라는 불쾌한 전망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기네 상원 의원들로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리고 트럼프보다 아주 조금 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벌써 트럼프 후보는 제국주의 동맹들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은 70년 동안 그 효과성이 상호 방어의 불가침 -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 - 에 의존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보증국이었다. 트럼프가 만약 러시아가 발트 해 국가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는지”에 대한 그의 판단에 미국의 반응이 달려있을 것이라고 선언한 방식으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NATO 동맹과 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할 준비가 되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때가 온다는 것은, 푸틴의 마피아 국가에 직접 대면하고 있는 동유럽 지배계급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것이며, 중국이라는 용으로부터 보호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는 없다는 트럼프의 최근의 발언(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크리미아(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 일부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트럼프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가능성은 큰데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러시아 정보국의 민주당 IT 시스템 해킹을 환영하고 푸틴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트럼프에 조금이라도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공화당이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격렬하게 반러시아적이었으며,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강력한 군대 조직과 세계 각지에 배치된 다수의 군대를 옹호하는 것(이것은 재정 적자 수준을 급등하게 한 레이건의 엄청난 군비 증강이었다)을 떠올려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그 후보를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취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4년, 프라이머리에서 종교적 우익과 “보수 연합”의 지지로 인해 승리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오늘날 “티 파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일관적이었다. 연방 정부 예산, 특히 사회 안전망에 대한 예산의 대대적인 감축, 군비 증강, 소련에 대항하는 핵무기의 사용 준비 등. 그것은 전통적인 극우 정책이었으나,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의 필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지배층이 그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골드워터 2.0 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차이는 유익하다. 골드워터 후보는 그 시기 “티 파티 운동”에 의해 대표되는, 골드워터의 패배 이후 몇 년 동안 물러서야 했던 - 보수당의 권력 장악을 대표한다. 최근의 10~20년 동안 이러한 경향이 돌아왔으며, 이 경향이 GOP11) 권력을 다소간 성공적으로 차지해 왔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 연합”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사회 변화(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의 시작,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를 경험하는 미국 내에서 진정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대표했다. 비록 많은 티파티의 “원인”이 골드워터와 같을지라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반대하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티파티는 보수의 연합이라기보다 신경증적인 반응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유 무역에만 관심이 있는 대(大)부르주아지의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나서는 자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되었다: 낙태(당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총기 규제(총기에 저항하기 위해), 재정적 보수주의와 낮은 세금, “오바마케어”(사회주의, 이는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 테드 크루즈의 신용 일부는 상원에서 오바마케어에 저항하는 대중 호소 필리버스터를 한 것에 바탕을 뒀다), 결혼(신성한), 민주당(만약 사탄이 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당일 것이다). 자, 짧은 몇 달의 기간 트럼프는 효과적으로 당의 핵심 골자를 빼버렸다. 우리는 그 스스로 낙태, 총기 규제, 결혼(그 스스로 세 번이나 했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인물, 과거 스스로 악마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던 인물이 후보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최저 임금의 인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바마케어의 유지, 고립주의 해외 정책으로의 회귀, 재정 적자 폭의 증대, 그리고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저임금 노동을 제공해 온 천백만의 이민자들의 추방을 제안한다.

     

    브렉시트에서의 영국의 토리당처럼, 공화당과 잠재적인 미국의 모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입장과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완전히 불합리한 정책을 가진 말안장 위에 스스로 올라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의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후보 당선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더욱 불안정한 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수준에서 유럽 국가들 - 우리는 이들이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큰 단일 시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은 이미 허약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들은 2007/8년의 금융 위기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협을 경험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주요 유럽 경제권에 남아있지만, EU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오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게 파탄 날 것이며, 이는 적어도 금융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브렉시트가 유럽의 은행, 보험, 그리고 주식거래의 중심지인 런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브렉시트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포퓰리즘 정당들만을 고취하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내년 반유럽주의자이며 포퓰리스트인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있는 국민 전선이 프랑스 대선에서는 가장 큰 단독 정당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정부는 영국의 유럽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능한 부드럽고 마찰 없이 이뤄내려는 열망과 영국에 대한 어떤 양보(이를테면 인구의 이동은 제한한 채 시장에의 접근은 허락하는)도 다른 이들에게 – 지적하자면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에 - 같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실질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가리 찢겼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유럽의 남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중단될 것이다. 터키 에르도안(Erdogan)의 쿠데타와 시리아 난민들을 공갈·협박의 비열한 게임의 말로써 쓰는 것에 대해 EU는 통일된 반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록 EU 그 자체가 제국주의 동맹이었던 적은 없으나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NATO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 어떤 것도 러시아가 동유럽의 측면,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국가들을 무너뜨리는 압력에 반격하는 NATO의 능력에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가 가끔 프랑스의 국민 전선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일의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운동에는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유일한, 가장 뚜렷한 승자는 사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후보자는 이미 미국의 신뢰성에 한 방 펀치를 날렸다. 핵무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말해둬야겠는데, 매우 두려운 전망이다.12)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불안정과 전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지배적인 제국주의적 지위를 모든 이민자에 저항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결의이며 이 상황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구에 대한 분노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는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 모험주의자이며 국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이나 감성도 결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왜곡시키든 바꾸든 그들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익살은 그것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때까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완전히 하찮은 것들이며 세계화의 패배자들의 울부짖는 분노, 절망,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와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가장 무도하고 모순적인 발언을 대충 지껄여버린다. 그의 지지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듣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슨과 트럼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수 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의 거칠고 대담하며, 자기-몰입적인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는, 루스벨트의 고립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끝났다. 미국 지배 계급의 중요한 분파는 여전히 바깥 세계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발달이 늦은 성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노동 계급의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지언정 절대 계급의식의 표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되었든 미국에서의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되었든, 프랑스의 국민 전선의 마린 르 펜이 되었든, 또는 독일의 포퓰리즘인 페기다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되었든, 이러한 당과 운동이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곳에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 변화로부터 가장 고통받은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패배한 수년의 경험이 그들에게 지배 엘리트를 위협할 방법은 똑같은 엘리트에 대한 저주를 정책으로 하는 무책임한 정당을 향해 보란 듯이 투표하는 것일 뿐임을, 합리적으로 결론 내린 이들이 있는 곳임을 모든 투표 수치는 보여준다. 비극이라면, 이러한 노동자들이 정확히 1970년대 투쟁에 가장 대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선전의 공통 주제는 “우리”는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실제로 통제해 본 적 없다. 보스턴 UK의 한 거주자가 “우리는 단지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때란, 일자리가 있었을 때, 그 일자리가 적절한 임금을 보장해 줄 때, 노동 계급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가 실업과 태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변화가 뭔가 긍정적이고 조절 가능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이다.

     

    브렉시트 투표가 영국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목조 뒤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더욱 자유롭다고 느끼는 새롭고 추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에 이민을 멈추라고 투표한 많은 - 아마도 절대다수 - 이들은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외국인 혐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과정에서 실제의 사회관계를 마치 자연적인 힘으로, 요소로, 마치 날씨와 같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력은 훨씬 파괴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본질적으로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와 같은 과학적 발견의 시대, 사람들이 더는 궂은 날씨를 마녀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의 경제적인 비통함이 그들의 불행한 이민자 동료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

     

    우리는 이 글을 “해체에 대한 테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해체에 대한 테제는 거의 30년 전인 1990년에 썼다. 우리는 그 테제를 인용하며 결론을 짓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의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이 해체될 위험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힘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해체의 다양한 측면들에 직면한다.”

     

    ● 연대와 집단적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 원자화에 직면한다.

    ● 조직의 필요는 모든 사회적 삶의 기반이 되는 관계의 파괴, 사회적 해체에 직면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그 자신의 힘은 지속해서 사회에 만연한 절망과 허무주의로 활력을 잃는다. 의식, 명석함, 일관되며 통일된 생각, 이론의 달콤함은 환상, 마약, 분파주의, 신비주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 또는 파괴의 가운데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 위험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들이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지배계급에 위험한데, 포퓰리즘이 지배계급의 정치 기관들을 통제할 능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지탱하는 기둥인 민주주의의 신비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혼란에 대해 어떤 대안적 전망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허약함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만이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유혹의 말 -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약속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불가능한 약속에 자신을 맡긴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8월, Jens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주>

    1) International Review 107, 2001년 출판

    2) International Review의 이 주제를 보라.

    3) 국가 의료 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4) 영국 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1991년 세워진 포퓰리즘 정당. 그 선전은 본질적으로 EU 탈퇴와 이민 반대이다. 역설적으로 유럽 의회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 영국 정당을 구성하는 22명의 MEPs 를 보유하고 있다.

    5) EU와 영국 재무부가 탈퇴 캠프가 승리할 경우 상황에 대한 계획에 대해 일정정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준비가 부적절하며 - 아마도 보다 적절하게는 - 아무도 탈퇴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것이라도 진실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은 탈퇴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다. 명백히, 파라지는 국민투표 날 잔류파의 승리를 인정했으나, 잔류파가 패배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6) 1973년 보수당 정권 아래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그 구성원 자격은 1975년 노동당 정부의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다.

    7) 대처가 의회 선거에서 40%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통합 왕국 연합이라고 이야기된다.

    9) 이러한 불편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 정부들은 헌법 조약을 채택하지 않았고, 2009년 리스본 조약으로 기존의 협정을 단순히 수정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구했다.

    10)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와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치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11) “Grand Old Party”,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된 공화당의 구어식 표현이다.

    12) 골드워터 패배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슨의 선전은 골드워터의 슬로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음을 알고 있다”와 대비되게 “당신의 창자에서, 당신이 그가 괴짜임을 안다”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8/14087/brexit-trump-setbacks-ruling-class-nothing-good-proleta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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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박근혜 정권의 탄생 직전에 창간한 『코뮤니스트』를 박근혜가 파면되어 구속된 시점에 발간한다. 지난 몇 년의 엄중한 정세에서 코뮤니스트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코뮤니스트를 제때 발행하지 못한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기에 독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사과드린다.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대중과 약속한 것은 혁명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이행하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과 운동의 절박함을 담아 다시 약속드린다. 앞으로 코뮤니스트는 정기적으로 정세에 맞춰 발행할 것이다. 또한, 코뮤니스트 정치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알릴 것이다. 코뮤니스트가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혁명 조직 건설의 기초를 마련할 것이다. 코뮤니스트 지지자와 독자가 직접 참여하는 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번호는 장기간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현 정세와 코뮤니스트 정치에 중심을 두었다.
<코뮤니스트 정치>에는 촛불 투쟁이 만들어 낸 조기 대선 정국에서 정권 교체와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촛불 투쟁이 향해야 할 길과 대대적 촛불 투쟁에 대한 분석 글을 실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려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계획과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혁명 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에서 개최한 토론회 발제문을 실었다.
<문화예술>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관람기와 코뮤니스트 남궁원 동지 추모집을 코뮤니스트 추모문화 정립 의지를 담아 소개했다.
<국제정세>에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침체와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인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를 다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들은 현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을 갖기 위해 작년 기사도 실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이번 호부터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연속해서 소개할 예정이다. 우리의 정치 원칙이 코뮤니스트의 유일한 강령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열어놓고 토론할 생각이며, 내외부의 어떠한 논쟁과 검증과 공헌도 기꺼이 받아들여 함께 발전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코뮤니스트 혁명가>에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왜곡되어 잘못 알려진 혁명가의 명예회복과 혁명적 복원의 시작을 알리는 특별한 약속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연재 번역 글은 이번이 4회 인데, 앞으로 속도를 높여 빠른 시일 안에 완료할 것이다. 코뮤니스트는 앞으로 한국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좌익공산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고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사상적 기반을 제공할 계획이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시기에 출범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그동안 수많은 내외부의 걸림돌과 싸우면서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손실도 있었고, 반성도 있었고, 교훈도 얻었다. 우리는 이 과정이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코뮤니스트』를 재편하면서, 새롭게 창간한다는 각오로 5호를 발행한다.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코뮤니스트 창간 정신을 계속 발전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혁명운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평가와 그에 따른 원칙을 되새기려 한다. 인터내셔널의 관점으로 코뮤니스트 운동을 생성해 나가려는 주체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정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책을 사서 읽는 동지들을 단순한 구매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의 시대에 서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로 생각한다. 동지들의 적극적인 비판적 문제의식을 기대한다. 우리는 항상 열려있고, 동지들과 토론하기를 원한다.
애매모호한 진보 좌파, 노동 정치에 대한 허상을 깨고,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위해!“
 
- 2012년 10월 8일 『코뮤니스트』 창간사 중에서

 

박근혜 정권이 저물고 새로운 부르주아 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노동자의 삶과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4년과 촛불 투쟁의 경험은 오히려 야만의 자본주의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유일한 목표가 코뮤니스트 혁명임을 증명하고 있다. 촛불 투쟁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현실이 암울하다고 자본주의 타도와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향하는 길에 우회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공개적으로, 공세적으로 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나가야 할 때이다.

 
“미래는 야만이 아니라 코뮤니즘이어야 한다.”

 
2017년 4월 10일
코뮤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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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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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17 봄호_5호 목차

□ 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정치
‣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면적 투쟁으로!!
‣ 대대적 촛불 투쟁은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 <노동자의 책> 이진영 동지에 대한 탄압을 규탄한다!
‣ 대대적 촛불 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inspiration)   

□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
‣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 문화예술 
‣ 나, 다니엘 블레이크
‣ 남궁원이 부른다. ‘청계천8가’에서 ‘인터내셔널’까지

□ 국제 정세
‣ 트럼프: 여전히 문제는 자본주의
‣ 대통령 트럼프 :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
‣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 코뮤니즘을 향하여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며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 코뮤니스트 혁명가
‣ 선거 – 실비아 팽크허스트
‣ 실비아 팽크허스트 : 혁명가들은 왜 노동당에 반대하는가?
‣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 연재 번역
‣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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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가    격 :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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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안톤 판네쿡

 

 

들어가는 말

 

1920년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다. 레닌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 코민테른 제2차 대회를 앞두고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를 출간했으며, 같은 해 안톤 판네쿡이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10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그룹들은 그의 책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따라서 좌익공산주의를 [좌익소아병] 또는 [초좌익]으로 매도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좌익공산주의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10년이 채 안됐다. 이는 좌익공산주의를 제대로 소개하기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좌익공산주의를 한 사람의 책 한권만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100년 전 러시아의 상황을 현재 한국의 상황과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가 판네쿡의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을 번역 및 게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좌익공산주의를 왜곡한 것에 대한 반박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쇠퇴기 하에서 노동조합, 의회주의, 공동전선와 민족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의 활성화 등을 위해서이다.

 

이 팸플릿은 총 9장으로 구성된 이유로 이번 호를 포함하여 총 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안톤 판네쿡 생애

 

판네.JPG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 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좌익공산주의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의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가장 일관되고 지속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해방세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지배와 종속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일련의 인상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흥미롭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남아 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판네쿡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당대의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루카치, 코르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그 대부분은 판네쿡 사상의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대한 좌우의 수정주의와 권위주의 세력의 종파적 대응 때문이었다.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두 가지 힘에 의해 일어나는데, 하나는 물질적 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힘이며, 후자는 전자에 그 근원을 둔다. 경제의 물질적 발전은 의식을 만들어 내고 의식은 혁명 의지를 활성화시킨다.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향의 기능으로서 발달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과학(Marxist science)은 먼저 사회주의당 이론과 그다음 공산당 이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혁명운동에 엄청나고 건강한 지적 통일을 부여한다. 이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에 서서히 인식되고 있는 동안에, 대중들 자신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증대하는 정도로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급격한 경제 붕괴는 대중들이 공산주의를 지적으로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혁명을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모순은 혁명을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만드는 모순, 망설임 그리고 좌절의 근원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 그 자체는 새로운 추진력을 발휘하고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정들은 갑자기 너무나 거대하게 발생하는 봉기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방해받는다.

 

서유럽에 관한 한, 혁명의 발전은 주로 두 가지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 경제 붕괴와 소비에트 러시아(Soviet Russia)의 사례.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 그렇게 빨리 그리고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 부르주아지의 나약함, 소농과의 동맹, 혁명이 전시에 발생했다는 사실 - 여기서 상술할 필요는 없다. 노동자가 지배자라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공산주의 건설에 참여했던 국가라는 사례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엄청난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데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자신의 물질적 환경의 결과에 가장 강하게 좌우된다. 만약 자본주의가 그 낡은 힘을 완전히 유지했다면, 저 멀리 러시아로부터의 소식은 인상을 거의 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그러나 소부르주아처럼 소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용기도 없이, 러시아와 인류 전체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이 러트거스(Rutgers)1)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대중들에게 느낀 충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서유럽의 모든 사람은 급격한 경제 호전을 기대했고 혼란과 야만의 장소로써 러시아를 수동압착기(lying press)로 묘사했다. 이내 대중들은 그들의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부터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 혼란은 전통적인 문명의 발상지에서 확산된 반면에, 러시아에서의 신질서(new order)는 증대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그 대중들이 이곳에서도 동요하고 있다.

 

경제 붕괴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경제적으로 이미 완전히 산산조각 났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멈출 수 없는 하락에 들어서 있다. 영국은 너무 심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재건에 대한 자국 정부의 활발한 시도가 붕괴를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하며 미국에서는 위기의 첫 번째 위협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국에서, 대략 이와 같은 순서로, 대중들 내에서 불만은 커지고 있다. 대중들은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때리는 총파업운동(great strike-movement)으로 궁핍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이 투쟁들은 서서히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신념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대중들은 공산주의가 그들에게 보여준, 즉 현실의 필연성이 그들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길을 더욱더 뒤따르고 있다.

 

이 필연성과 분위기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들을 짊어졌던, 이를테면 공산주의자 전위(communist vanguard)는 이 국가들에서 발전해 왔다. 이 전위는 목표를 또렷하게 인식하며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 스스로 조직을 재편성한다. 이 발전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두드러진 점은, 이데올로기적 용어와 조직적 용어 두 가지에 있어서,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의 뚜렷한 구분이다. 이 구분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경제 위기에 빠졌던 – 부르주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불가피했던 - 중유럽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중유럽에서의 위기가 너무나 엄청나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USP은, 그들이 아직도 광범위하게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방법, 전통, 구호 및 지도부를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의 가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모든 사회민주주의당은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는 대중들 사이에 전투적인 혁명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생디칼리즘(syndicalism) 및 공산주의 관점의 이론적 혼합을 간과하도록 한다. 프랑스 공산주의 그룹들은 최근에 사회민주주의당과 노동조합운동에서 스스로 분리했으며 지금은 공산당 창당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국에서 낡고 익숙한 조건들에 대한 전쟁의 지대한 영향은 서로 다른 기원과 새로운 조직 형성의 아직 구성되지 않은 공산주의 운동을 발생시켜 왔다. 미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당이 모스크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 반하여 두 개의 공산당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당에서 분리했다.

 

반동의 맹공격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의외의 회복력은 협상하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서구의 노동당에게 새롭고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다. 제2인터내셔널은 파산하고 있다. 모스크바를 향한 중도파 그룹들의 전면적인 움직임은 대중들의 성장하는 혁명적 분위기의 강한 욕구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이 그룹들은 대단히 달랐던 그 그룹들의 이전 관점을 사용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빌렸으며 낡은 사회민주주의 개념과 방법을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이전시키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 혁명을 위한 기회가 더욱 무르익었다는 징후로서, 바로 본래의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 이제 막 나타나고 있다. 그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입성 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원칙을 지지하는 선언과 같은 방향으로, 위에서 언급되었던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뚜렷한 차이는 또다시 희미해지고 있다. 몇몇 원칙의 확고함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3인터내셔널 외부에서 그러한 당들을 공식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무엇일지라도, 그 당들은 새로운 구호로 입에 발린 말을 함으로서 전투적인 대중들에 대한 그 당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교묘히 각국 혁명운동 지도부의 환심을 산다. 이것이 모든 지배계급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대중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기보다는, 가능한 한 그 영향력으로 혁명을 끌어내리기 위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는 이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증대된 힘만을 보며 취약성의 증가는 보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러시아의 등장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평범하고 복잡하지 않은 방식을 얻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이제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극도로 복잡하고 고된 과정으로 만드는 힘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강령과 전술에 대한 쟁점과 해법은 추상적인 원칙에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경험에 의해, 현실적인 삶의 실천에 의해 결정된다. 공산주의 목표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은 그들이 늘 해왔던 것처럼 이전의 혁명적 실천을 기반으로 정교해져야 한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이 지점까지 진행되었던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원동력, 조건 및 방식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은 그 당시 서유럽 관찰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너무나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상승세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왔고, 그것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 서유럽에서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보인다. 그것의 최초 결과는 예상한 대로 열광의 감격 도취였으며, 서유럽에서 혁명이 직면한 문제들은 과소평가되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앞에,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민주주의 양식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평의회 체제, 산업, 농업 및 교육의 재조직이라는 그 힘의 모든 광채와 순수성으로 새로운 질서의 원칙들을 밝혔다. 많은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대한 묘사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내용을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며 포괄적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사례를 목가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독일에서 표면화되었던 힘들은 나머지 유럽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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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주의가 1918년 11월에 붕괴되었을 때, 노동자 계급은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4년간의 전쟁에 따른 마음과 정신의 황폐화와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의 휩쓸림은 전후 몇 주 내에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과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할 수 없게 했으며, 공권력이 약해졌을 때 공산주의 선전의 집중적이었지만 짧은 기간은 이 부족을 보충할 수 없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훨씬 많이 배웠다. 노동자들의 각성 상태를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 빨갛게 몸치장을 하면서, 부르주아지는 즉시 자신의 권력 기구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평의회는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당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었다. 군인으로서 무장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아닌 그들 스스로 무장 해제했다. 가장 활동적인 노동자 그룹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백군(white guards)에게 진압 당했고 부르주아지는 무장된 자경단civil militias을 만들었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묵인 아래,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은 혁명 중에 쟁취했던 노동조건의 모든 개선을 서서히 강탈당했다.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길은 자본주의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혼란으로 더욱 깊이 침몰시키기 위해 철조망으로 차단당했다.

 

물론, 독일 혁명의 과정에서 쌓였던 경험들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혁명의 발전은 각국에서 다른 과정으로 전개될 것이다. 권력은 정치 및 군사적 붕괴의 결과로서 준비가 안 된 대중들의 수중으로 갑자기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고 이렇게 하여 승리했을 때 더 높은 정도의 성숙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 11월 혁명 이후 열풍의 속도로 발생했던 것은 이미 다른 국가에서 더욱 조용히 발생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를 도출하고 있고, 내전을 위한 군사적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의 도움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정치적 기만을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혁명은 확실한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며 일반적 의의에서 확실한 교훈을 제공한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더디고 고된 과정일 것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이것에 원인이 있는 힘들을 드러내 보였다. 서유럽에서 혁명 발전의 더딘 속도는, 비록 상대적일지라도, 모순되는 전술적 경향의 충돌을 초래했다. 급격한 혁명 발전의 시기에, 전술적 차이가 즉시 행동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의식적으로 되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원칙에 입각한 시위는 사람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동시에 대중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며 정치적 행동은 낡은 신념들을 뒤집는다. 그러나 외부적인 침체의 시기가 시작될 때, 반대 및 혁명적 구호를 방치하는 대중들이 더 이상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어려움이 늘어나고 적수가 각각의 교전으로 더욱 거대하게 부상하는 것처럼 보일 때, 공산당이 약세를 보이고 패배만을 경험할 때 - 관점은 갈리며, 새로운 행동 방침과 새로운 전술적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바로 그때 모든 지역 편차에 대하여 각국에서 인식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이 부상한다. 하나의 경향은 언행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명확하게 하려고 하며, 이것을 위하여 낡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신념들에 반대하여 가능한 가장 분명하게 새로운 원칙들을 제기하려고 한다. 다른 경향은 여전히 방관자로서의 대중들을 현실 활동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고 그래서 그들을 단념시킬지도 모를 그 무엇이든 가능한 한 방지하기 위해 차이점보다는 합의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대중들 사이에 냉철하고 분명한 분리를 위한 노력이고 두 번째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다. 전자는 급진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으며, 후자는 기회주의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는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러시아 혁명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국들의 공력에 대한 러시아의 확고한 저항과 더불어, 서유럽의 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지금껏 결정하지 못한 노동자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보다 많은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회주의는 거의 틀림없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내에서 강력한 세력이 될 것이다.

 

기회주의(opportunism)는 순종적이고 회유적인 태도와 어휘뿐만 아니라 더욱 신랄한 방식으로서 발본주의(radicalism)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분명하고 원칙에 입각한 전술의 부족은 너무나 자주 공격적인 표현을 광신적으로 감춘다. 그리고 확실히, 혁명적 상황에서, 그 모든 기회주의의 희망으로 위대한 혁명적 행동에 급작스럽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기회주의의 특징이다. 기회주의의 본질은 앞으로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항상 목전의 문제만을 감안하며, 심층에 기초한 결정요인을 인식하기보다 현상의 표면적인 측면을 주시한다. 힘이 즉각적으로 특정 목표의 달성에 충분히 않을 때, 그러한 힘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다른 방식 즉,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목표는 목전의 성공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미래의 영구적인 성공을 위한 조건들을 희생시킨다. 기회주의는 다른 '진보'그룹들과 동맹한다는 그리고 낡은 신념에 양보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당성을 구하며, 그것은 흔히 권력을 잡을 수 있거나 하다못해, 자본가계급의 연합인, 적을 분열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하여 투쟁에 더욱 유리한 조건들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의 권력은 항상 환상으로 드러나며, 개인의 권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이 아니라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행사되었다. 이 모순은 그 경야經夜에 혼란, 부패 그리고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hegemony) 행사를 위해 충분히 준비된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국가 권력의 장악은 다시 빼앗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잖이 힘이 빠진 반동 세력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계급 적대의 분열은 - 개량주의의 매우 과시된 구호 - 드러나지 않게 연합한 부르주아지의 통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고 혼란시키며 약화시킨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전위가 정상적인 조건들이 충족되기 이전에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명확성, 통찰력, 연대 및 자율성 면에서 얻어진 것만이 공산주의를 향한 그 이상의 발전 토대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다.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는 이러한 기회주의 정책 사례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사례들은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非사회주의 노동자 그룹들 또는 다른 계급들의 도움을 구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부패했고 최종적으로 붕괴될 전술들을 초래했다. 지금 제3인터내셔널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선의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원칙에 입각한 정책과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미래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조용한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는 끝났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있다. 전 세계는 우리의 선전이 다수를 명료한 공산주의 통찰력으로 획득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대중들 자신과 전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모면하려면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개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때, 소규모 당은 원칙에 따라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폭넓은 대중들을 빨리 모으려는 노력으로 필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기회주의가 아닌가?

 

혁명은 소규모 급진정당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거대 대중정당 또는 서로 다른 정당들의 연합에 의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 대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당에 의해 선동된 행동은 간혹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으나 (간혹 있는 사건) 결정적인 힘은 대중들의 무의식 내 깊은 심리적 요인에 그리고 세계정치의 중요한 사건에 있다. 혁명당의 기능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전체 대중들에게 사전에 냉철한 이해를 선전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혁명의 과정에서 당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대중들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강령, 구호 그리고 지시를 제고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따라서 위대한 목적의 명료성에 이르는 데에 그 자신의 목표를 표현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투쟁에 앞서게 된다.

 

대중들이 계속해서 소극적이라면, 이것은 보람이 없는 전술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원칙의 명료성은 처음에는 혁명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포된 영향력을 미치고 혁명은 투쟁에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는 그 활동적인 힘을 드러낸다. 반면에 만약 원칙의 희석, 동맹의 결성 및 양보에 따라 거대정당에 모이려고 시도해 왔다면, 그때 이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불충분함을 꿰뚫어 보지 않고도 혁명의 시기에 분명치 않은 부류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한다. 전통적 관점에의 순응은 그렇게 되는 전제조건인 혁명이 없이 권력을 잡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결과는 혁명의 과정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패하도록 운명 지어졌는데 왜냐하면 가장 급진적인 생각이 대중들이 혁명에 참여하자마자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혁명이 완수되지 않는 한 적당함은 그들을 충족시킬 뿐이다. 혁명은 동시에 대중들의 사고에 엄청난 대격변을 수반한다. 그것은 혁명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며, 스스로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하여 혁명의 지도력은 분명한 원칙이라는 세계이행 권력 덕분에 공산당의 몫이 된다.

 

공산주의를 사회민주주의와 구별 짓는 평의회 체제와 독재라는 새로운 원칙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강조와는 대조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는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이어받은 투쟁의 방식에 최대한 의지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 의회 활동을 평의회 체제로 대체했고 공장을 기반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건설했으며, 서유럽에서 첫 번째 충격은 이 사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독일공산당(KPD)은 의회 선거를 거부했고 노동조합으로부터 즉각적이나 점진적인 조직 분리에 찬성하는 운동을 했다. 그러나 1919년 혁명이 느슨해지고 침체되었을 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의회주의를 선택하는 데에 이르고 산업별 노동조합에 반대하여 낡은 노동조합연맹을 지지하는 데에 이르는 이전과는 다른 전술을 도입했다. 이 배후에 있는 주된 논거는 공산당은 계속해서 전적으로 의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대중들에 대한, 선거운동과 의회 연설을 통해 최고에 도달하는 대중들에 대한, 그리고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함에 따라 700만 명까지 조합원을 증원시켰던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이 영국 사회주의당BSP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노동당이 제2인터내셔널에 속할지라도 다수의 노동조합주의자와의 관계 상실을 두려워하여 노동당과 단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들은 공산주의적 기회주의의 강령적 진술로서 간주될 수 있는「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 : 베를린 감옥에서 집필」의 저자인 우리의 친구 칼 라덱(Karl Radek)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진술되었고 결집되었다.2) 공산주의는 모든 선전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목표로서 노동자 평의회의 점진적인 도입과 함께 (부르주아) 의회 활동과 노동조합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무기로 남는다는 점을 통해서 여기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토대, 조건 및 어려움에 대한 검토는 이것이 어디까지 옳은지를 보여줄 것이다.

 


 

서유럽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은 여러 차례 강조되었다. 이 힘의 기반을 분석해보자. 그 힘의 기반은 부르주아지의 수에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이 수적으로 훨씬 더 많다. 그 힘의 기반이 전체 경제생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중요한 권력 요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중유럽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그렇다면 그 힘의 기반은 모든 강압 수단을 포함하여,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분명히,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틀 방해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정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러나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지의 힘이 없는 지배에서 빠져 나갔으며 국가의 강압 기구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대중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는 이 국가 권력을 다시 건설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한 번 더 지배하에 두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보였을 때, 그들의 헤게모니를 재건하기 위해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에 또 하나의 숨겨진 원천을 보유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숨겨진 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부르주아 사고방식에 완전히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붕괴된 이후 그들 자신의 손으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부활시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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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험은 우리에게 서유럽에서의 혁명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낡은 부르주아 생산양식과 이와 함께 발전했던 수백 년간의 문명은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에 그것들 자체를 강하게 새겨 넣었다. 이런 이유로, 서유럽 대중들의 사고방식과 내면은 부르주아 문화의 지배를 경험하지 못한 동유럽 대중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했던 서로 다른 과정을 구별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중세 이래로 프티 부르주아지와 초기 자본주의 생산에 기초한 강력한 시민 계급(burgher class)이 있었다. 봉건주의가 쇠퇴하면서, 시골 지역에서도 똑같이 강력한 자영농 계급 - 각자는 또한 그 자신의 소규모 사업의 주인이었다 - 이 성장했다. 부르주아 감수성은 이 토대 위에서 단단한 민족 문화로 발전했는데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서 선두에 섰던 영국과 프랑스 두 해양국에서 그러했다. 19세기에, 전체 경제의 자본으로의 종속과 대부분의 외진 농장의 자본주의 세계무역 체제로의 편입은 이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고 개선시켰으며, 언론, 학교 및 교회의 심리적인 선전 활동은 민족 문화를, 자본이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끌어 모은, 대중들의 뇌리에 확고히 주입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모국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형태일지라도, 유럽인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웠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그리고 그 당시까지 침체되었지만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파도가 낡고 낙후된 소농 경제 및 프티 부르주아 문화와 연결될 수 있었던 중유럽,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동유럽 국가로 압력을 가했을 때, 매우 상이한 물질적 조건과 전통에 직면했다.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심지어 엘베 강 동부 독일에서도 정신적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자는 대규모 토지, 가부장적인 봉건주의 및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와 더불어 원시 농업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곳 대중들은 백지처럼 수용적으로 더욱 원시적이며 간단하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연관되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지한' 러시아인들은 노동의 새로운 세계의 전위로 주장할 수 있다고 흔히 조롱하면서 표현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관련하여, 암스테르담 공산주의 대회4)에서 영국의 한 대표는 차이점을 상당히 정확하게 강조했다. 러시아인들은 더 무지할지 모르지만, 영국 노동자들은 그들 사이에 공산주의 선전을 더욱 힘들게 하는 편견으로 가득 찼다. 이 '편견'은 영국, 서유럽 그리고 미국의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화 상태로 만드는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측면일 뿐이다.

 

이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전체 내용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의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다변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간신히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 프티 부르주아와 소농의 노동 형태에 그 기원을 두고 점진적으로 공동체라는 그리고 인정되는 규율의 필연성이라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감각으로 대체될 뿐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다. 이 특징은 아마 앵글로색슨(Anglo-Saxon) 국가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개인의 관점은 총체로서 포괄적인 사회 대신에 그의 작업장에 제한된다. 너무 절대적으로 분업의 원칙은, 정치 그 자체로, 전 사회의 통치 체제, 누구나의 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전문가들, 정치가들의 전문화된 분야인, 지배하는 계층의 독점으로서 보인다. 수세기에 걸친 물질적, 지적 무역과 더불어, 문학과 예술 즉 부르주아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에게 단단히 박혔고, 외면적인 무관심 또는 표면적인 국제주의보다 무의식에 훨씬 깊게 기반을 둔 민족단결의 감정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민족적 계급연대로 그 자신을 표현하며, 국제 행동을 적지 않게 저해한다.

 

부르주아 문화는 주로 사고(thought)의 전통적인 태도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존재한다. 대중들은 실질(real terms)로 생각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따라갔다. 부르주아적 사고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와 전통은 통합적이지 않다. 이전 세기의 무수한 계급투쟁으로부터 남겨진 정신적인 반사 작용은 낡은 부르주아 세계를 구분 짓는 사고의 정치 및 종교 체제로서 존속하고, 이런 이유로 그것에서 기인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그룹, 교회, 분파, 정당으로 분열된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적 과거는 새로운 세계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계급통일을 방해하는 조직 전통으로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존속한다. 이 낡은 조직에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위의 추종자와 지지자를 이룬다. 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지도자를 공급하는 것은 지식인계급(intelligentsia)이다. 지식인계급 - 성직자, 교원, 문인, 언론인, 예술가, 정치인 - 은 무수한 계급을 형성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조성, 발전 및 전파시키는 기능을 한다. 지식인계급은 부르주아 문화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며, 자본의 헤게모니와 대중들의 이익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본의 헤게모니는 대중들에 대한 이 그룹의 지적 지도력에 뿌리박고 있다. 억압당하는 대중들이 흔히 자본과 그 기구에 반대하여 투쟁할지라도, 그들은 지식인계급의 지도력 하에서 그렇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공동투쟁에서 쟁취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이 지도자들이 드러내 놓고 자본주의의 편으로 전향하자마자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한 버팀대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그들 투쟁의 표현으로서 살아있는 힘이 되었던 쇠퇴하는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문화투쟁(Kulturkampf)5) 이후 독일에서의 가톨릭교(Catholicism)와 마찬가지로, 흔히 국가를 강화했던 반동 체제로서 후에 그 가치를 입증했다. 그 이론적 기여라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것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처럼, 낡은 이데올로기를 파괴하고 끝장내는 데에 있어 사회민주주의가 수행했던 역할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정신적으로 전문가로서 정치 및 다른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인 유형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 다루는 대신에 지도자들이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반세기의 극심한 계급투쟁에서 발전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자본주의를 파묻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과 통제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4년 8월과 1918년 11월에 이는 대중들을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 그리고 반동의 무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서유럽에서, 이를테면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과거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작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란 계급의 통일을 방해하도록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되는 그룹으로 나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이 계급 통일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순전히 정치 방침을 계급 정치로 대치하는 어느 정도의 그 기회주의적 전술로 인하여, 실패했다. 그것은 단지 그룹의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위기시기에 대중들이 필사적이 되어 행동을 할 때, 대중들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는, 1918년 11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이 전통의 힘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다시 대두되며, 일시적인 승리를 패배로 만든다. 우리의 관점에서 부르주아 개념의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힘은 독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슬로건에 대한 존경, 이념과 강령의 오랜 습관의 힘. 요점은 의회의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정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이다. 러시아에 대한 더러운 거짓말의 폭격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 증거가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신감의 부족, 대중들의 그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의 부족,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투쟁, 그들의 혁명적 목표, 그들의 이상의 화신이었던 당, 조직, 그리고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그것이다. 이 조직의 엄청난 정신적이고 도덕적이며 물질적 힘인 이 거대한 기계는 노동운동이 우세한 자본의 앞잡이였고, 지금은 다시 한 번 대중들 내에서 타오르는 모든 혁명적 경향을 짓밟았던 시기를 포함하는 투쟁 형태의 전통을 구현했던 대중들 자신의 수년간의 노력으로 공들여 만들어졌다.


이 사례는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빠른 붕괴와 정신의 미성숙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작동하는 부르주아지 전통의 힘으로 표현된다. 프롤레타리아가 헤게모니와 자유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신의 성숙을, 번영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모순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한 모순은 오직 혁명적 발전의 과정에서, 자발적인 봉기와 권력 쟁취, 그리고 후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만 해결된다. 혁명이,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낡은 투쟁 수단뿐만 아니라 새로운 투쟁 수단을 사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랫동안 자본의 요새를 헛되이 공격한다는 과정을 취할 것이라는 점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라덱의 개요(schema)에서 제기되었던 장기간에 걸친 전술과 신중히 조작된 포위 작전은 이와 같이 불발로 끝난다. 만약 권력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전술적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획득하느냐가 아니다. 이것은 코뮤니스트에게는 너무 쉬운 선택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지속적인 계급 권력의 기반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이다. '단호한 소수파(resolute minority)'는 전체로서 계급의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대중들이 그들의 머리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무관심을 발생시키기 위해 그러한 권력 장악을 받아들인다면, 진정으로 수동적인 대중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쟁취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반동의 적극적인 추종자로서 언제 어느 때나 혁명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교수대와의 연합(coalition with the gallows on hand)'은 고작 이러한 종류의 옹호될 수 없는 당독재(party dictatorship)를 위장할 뿐이다.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부르주아지의 파산한 지배를 파괴하고, 공산당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냉철한 전위가 정치 지배를 장악할 때, 공산당은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나약함의 근원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그리고 미래에 닥쳐올 혁명 투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업만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성공적으로 완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대중들 스스로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것은 대중들 자신을 활동의 정점으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결단력(initiative)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자신감(self-confidence)을 상승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직 형태의 지배와 낡은 지도부의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불가피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키고 대중들의 물질적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연립정부에 합류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본주의 외면의 맹공격에 대비하여 생산과 방어의 재조직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반혁명을 방지하는 전제조건이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지배하는 그러한 권력은 정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성과 독립성의 결여에 의해 야기된다. 혁명 발전의 과정은 의존성과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해방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이미 오랜 제도이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미 그것에 대항해 몇 세대 동안 투쟁하고 있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시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당대의 단계에 상응하는 투쟁의 방법들, 형식들 그리고 지원들을 창조해 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곧 임시방편으로 여겨지기보다, 지속적이고 절대적이며, 그리고 완벽한 형식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결국 파괴되어야 하는, 발전의 족쇄가 되었다. 계급이 거듭되는 대격변과 급격한 발전에 휘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특정 국면의 대변인으로서 계속해서 특정 단계에 남아 있으며, 그들의 엄청난 영향력은 운동을 방해할 수 있다. 행동의 형태는 도그마(dogma)가 되고, 조직은 변화된 투쟁 조건에 다시 맞추고 재적응시키기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격상된다. 이것은 여전히 적용된다.

 

계급투쟁 발전의 모든 단계는 지금의 발전이 훨씬 빠른 페이스로 선행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만약 그 자신의 과업을 분명히 인식하고 과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면 이전 단계의 전통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혁명은 내부 투쟁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저항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안에서부터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산주의를 향해 성숙해진다.

 


옮긴이 ❙ 성승욱
 

 

<주>

 

 

 

 

 

 

1)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 회원인 S. J. 러트거스는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또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 참석했으며 암스테르담에 제3인터내셔널 서유럽 서기국 설립을 위해 1919년 말 귀국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따르면 갑자기 얼어붙게 만든 기초를 야기했던, 서기국 기관지의 독점적 발행에서 의회 전술과 노동조합 전술에 관해 좌파 지향의 글을 썼다.

 

2) 여기서 판네쿡은 라덱이 수감 중 작성한 두 개 글의 제목을 혼동하고 있다. 「독일 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The Development of the German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은 하이델베르크 회의 전 쓰였고「세계혁명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공산당의 전술The 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ctics of the Communist Parties in the Struggle for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은 그 이후 쓰였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3) 다음에 나오는 단락은 호르터Herman Gorter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omrade Lenin」에서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를 인용했다.

 

 

 

4) 문제의 암스테르담 대회는 서기국을 설립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5) 1860년대 말 독일 루르 지방의 첫 노동조합은 가톨릭 사제들의 작품이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비스마르크Bismarck는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 대한 공동전선을 위해서 가톨릭교와 그 정치대표인 젠트럼Zentrum (독일기독교민주동맹Christian Democrat Union의 전신) 에 대한 그의 운동을 중단했다.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84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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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한국에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Left Communism)가 소개된 것은 80년대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공산주의좌파 진영에서 레닌 '최악의 저작'으로 혹평 하는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가 그것인데, 이에 대한 재평가와 비판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기관지  '코뮤니스트'에 연재 중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이 팸플릿의 권위는 90년 넘는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가진 '공산주의좌파'를 '좌익소아병' 한 단어로 매도하며 오랜기간 세계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한국운동사회도 지배해왔으며, 계급투쟁의 중요한 시기마다 기회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 도구로 전락해왔다. 한국에 공산주의좌파가 공산주의자 자신에 의해 체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중반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공산주의(혁명적 맑스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무려 20년 넘는 기간 공산주의좌파는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구체적인 이론적 쟁점에 대한 논쟁도 없는 상태에서 이상주의적인 '극좌파' 또는'초 좌익'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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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좌파에 기원을 두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론, 즉 1920~30년대 볼셰비키와의 논쟁과 유럽 혁명의 실패로부터 자신을 정립한 '평의회 공산주의(Council Communism)'와, 그것에서 시작하여 '당(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평의회주의(Councilism)'를 '공산주의좌파'와 혼동하는 운동세력이 이곳에서는 아직 다수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이 사회주의자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혁명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사상노선에 대해 역사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좌파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1. 기원과 구분


1) 공산주의좌파


공산주의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연속성에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이다.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좌파를 형성했는데, 러시아의 레닌과 함께했었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1),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2)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회주의 세력이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자 자신들의 정당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로서 활동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전망을 확인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운동 내부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마르크스, 엥겔스에 기원을 두었다는 조직들이 서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예전의 개량주의자들이 장악한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과거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먹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동원의 앞잡이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반면에 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들게 한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좌파 흐름이었다. 또한,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좌파 흐름이었다. 이들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던 1919년, 코민테른 창설 총회에서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라는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등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그간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발전되고 혁명적인 입장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시인이자 공산주의좌파였던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3)는'국제 프롤레타리아 선두의 전위 투사'로서 당시의 레닌을 환영했고,"세계 노동계급은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조직화, 집중화, 형태 그리고 표현을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에서 발견한다." 라면서 소비에트를 찬양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악명 높은 팸플릿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통해 호르터와 그의 동료 판네쿡을 '소아병'에 걸린 극좌파로 혹평한다.


그러나 1917년 두 사람은 국제 혁명운동 내에서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회민주주의 당들과 노동조합의 참전은 이들에게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도덕적 비열함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지도자들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조직형태의 파탄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러한 낡은 노동조합에 맞서,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대치시켰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당 형태에 맞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의 발전에만 집중된 정치적 전위의 '새로운 형태'를 옹호했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 특히 독일에서 그러한 관점은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1919년 말에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독일 공산주의좌파들은 새로운 당인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이 당은 짧았지만, 독일 노동자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 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1920년 초 우익들의 카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산주의좌파 활동가들은 루르 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안에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유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지라도, 낡은 의회주의 및 노동조합 전술에 대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거부는,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는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전술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코민테른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 내부를 변질시켰다.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이었던 소비에트에 비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고,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행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로 제시되었다.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 활동의 강조, 동양인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을 호소, 그리고 애국적 민족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정책 등이 그것이었다. 이때 공산주의좌파들은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했듯이,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했다.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 민족해방에 대한 국제주의적 입장, 프롤레타리아 독립성을 훼손하는 통일전선의 거부 등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공산주의좌파들은 코민테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활동했다. 독일­네덜란드의 판네쿡과 호르터,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러시아의 오신스키, 스미르노프, 영국의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4) 등 공산주의좌파(코민테른에서의 공산주의 좌파 흐름)는 본질에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요약과 현재>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주로 활약했다. 즉, 공산주의좌파는 1920~30년대에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서 분리해 나왔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 특히 독일,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의 연속적인 공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반혁명과 파시즘 아래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남았고, 68혁명 이후 고무되어 1970~80년대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건설했고, 현재에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볼셰비키와의 논쟁, 그리고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속했던 공산주의좌파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타났으며, 네덜란드의 판네쿡과 독일의 칼 스로더(Karl Schroder), 오토 륄레(Otto Rühle)5)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 후 폴 매틱(Paul Mattick)6)이 중요한 이론가가 되었다.


판네쿡은 190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독일에서 활동했는데, 브레멘에 있는 동안, 항만 노동자의 아주 중요한 비공인파업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을 아주 이른 시기에 거부하게 된다.


오토 륄레도 판네쿡처럼 1920년대 볼셰비즘을 거부하는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히 다른 조직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정립한 최초의 인물 중의 하나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욱 세밀하게 정립 되어갔고, 그 경향들은 평의회 공산주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독일혁명의 실패를 겪은 이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평의회 민주주의'의 방어와 '당 권력'의 거부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20년대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처음에는 레닌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볼셰비즘과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10월 혁명이 짜리즘(tsarism)을 붕괴시켰고 봉건 관계를 끝장냈지만, 러시아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와 상관없다'는 것에 근거해, 러시아에서의 생산이 계급사회인 사적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치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스크바를 언급하면서, 러시아가 더는 공산주의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1930년대에, 수많은 잡지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개토론장을 제공했는데, 당시 공산주의좌파들은 자신들을'평의회공산주의자'라고 칭했었다. 잡지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폴 매틱의 '국제 평의회 통신(후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가 됨)'이었는데, 평의회 공산주의 주요 이론가들인 판네쿡, 오토 륄레, 칼 코르쉬(Karl Korsch)7)가 기고했었다. 이러한 잡지들 속에서 발전한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분석은 높은 수준이었지만, 반혁명의 기나긴 어둠은 이들을 오랜 기간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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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0~70년대의 급진적 정치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레닌주의 그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8년 이후의 리버테리안(자유의지주의)경향 좌파의 생각에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 평의회 공산주의는 초기에 레닌주의와 결별한 그룹과 사상가들인 '상황주의자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 '존슨-포레스트' 경향들과 접촉했고, 몇몇 경우에는 가족 역사 내의 우연성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노암 촘스키는 뉴욕에 있는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삼촌에 의해 급진적 정치와 처음 만났다. 이후 현재까지 평의회 공산주의는 실천(조직)적 운동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으로 자리 잡아 여러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안톤 판네쿡, 오토 륄레, 아펠(Jan Appel), 칸느 메이예르(Henk Canne-Meijer), 폴 매틱, 칼 코르쉬, 카요 브렌델(Cajo Brendel)8)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볼셰비키(레닌)와의 논쟁에서 자신들을 정립했는데,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다. 당에 대한 권력의 거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의 분리, 노동조합과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결실을 제거한 일종의 반혁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스탈린을 볼셰비즘과 볼셰비키 혁명의 계승자로 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좌파와 유사한 기원을 두지만, 국제적인 분파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들은 반혁명시기 이후 오랜 기간 고립되었다가 1960~70년대부터 재발견되어 이론화되었으나 실천적 운동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혁명, 독일혁명의 경험 속에서 '반의회주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했지만, 여전히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도식적인 완결된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평의회주의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1926~7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테제에 맞서 모든 공산주의좌파들은 반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평의회주의자들은 '자율'과 '자주관리'에 기반을 둔 '한 지역(국가)'에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 후 평의회주의자들은 특히 1930년대 공개적으로 '지방적 및 민족적' 사회주의 건설의 테제를 이론화했다.


또한, 평의회주의자들은 당이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평의회(소비에트)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계급투쟁의 퇴조기(계급의식의 하강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자체의 몰락을 가져온다. 당시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해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결합하여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평의회주의가 주장했던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계급이 역사적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은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과 혁명적 생디칼리즘(syndicalism)으로 이어졌으며, 1917~23년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학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의회주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오토 륄레,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as),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헨리 시몽(Henri Simon)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방해되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이들은 반혁명의 암흑기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가 68혁명 이후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재해석 되어 나타났지만, 운동이 성숙함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을 거부하는 편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평의회주의는 현재에는 독자적인 사상이나 노선을 가진 운동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평의회 공산주의를 리버테리안적으로 해석한 일부 그룹에 의해 '노동자 자주관리'와 '평의회 민주주의'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이론과 한계


1) 레닌과 소련사회 비판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소련사회를 처음으로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했는데,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주의 노선과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근거로 하여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형식의 조직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출발점은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국가주의와 지도자 중심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즉,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 관료에 의한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소련의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의미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자평의회에 의하여 일하는 대중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생산에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1938년 레닌의 철학에 대해 분석한 팸플릿(Lenin as Philosopher)을 출판했다. 여기서 판네쿡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러시아에서 짜리즘에 반대한 투쟁은, 오래전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한 투쟁과 닮아 있었다. 러시아의 교회와 종교는 현존권력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종교에 반대한 투쟁은 사회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역사유물론을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유물론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사고했다. 유물론이란 교회와 종교에 반대한 영혼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혁명 전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와 혁명적 프랑스의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도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그의 당 구성원들이 자신을 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8년 3월 볼셰비즘은 이미 최소화된 권력이었던 소비에트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은 10월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가 말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는 그러한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철폐와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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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 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는 내전 동안에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평의회를 약화시켰고, 1921년 3월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그들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 당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속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2) 노동자평의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과거의 조직들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직들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판네쿡은 평의회 조직체계에서는 일반 대중 위에 군림하던 전문적인 지도자를 없앰으로써 지도자와 대중들 간의 갈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평의회가 사회주의 변혁과 건설과정에서 중심적인 조직의 역할이 부여되지만, 평의회는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일부 임의적인 혁명적 집단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였다.


평의회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분석에서 판네쿡은, 평의회는 일하는 대중들의 실천으로부터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도부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비공인파업이나 공장점거 투쟁 등과 같은 실천적 활동에서 태생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파업위원회에 평의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계급공동체'의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두 개의 실천이 국가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자본주의 국가 자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한데, 바로 이때 노동자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할 때까지 평의회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이론은 특정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불안정노동과 미조직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대공장)' 중심의 투쟁형식은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로의 투쟁 확산에 약점이 있고, 투쟁이 전면화되지 않는 한 광장에서의 평의회 민주주의 실현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상시기에도 평의회 형식의 조직은 노조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역, 업종, 고용형태 까지 넘어서서 가장 넓게 계급을 포괄하는 아래로부터의 계급조직이어야 하고, 내용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평의회민주주의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나 미조직프롤레타리아까지 포괄한 새로운 '평의회 운동'의 경험과 전형이 필요하다.


3) 자발성과 대중행동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실질적인 혁명은 반자본주의적 힘이 친자본주의적 힘보다 더 성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자본주의적 관계 아래에서의 그러한 힘은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것은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자신의 반란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모든 필요한 결정사항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개념에서는 노동자와 운동가 사이의 분할에 기초해서는 공산주의가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계급에 행동을 호소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의 일부로 사고한다. 그들은 계급과 함께하면서 자본주의 흥망성쇠를 향한 발전경향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현재 활동과 그들의 목적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선전그룹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노동자에게 필요한 행동의 과정을 제안할 뿐이라 주장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스스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 미래의 전망 즉, 공산주의 혁명의 최종목표를 밝히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현재 필요한 것을 완전히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이라 말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행동이 일어나는 어디든 참여하며, 모든 경우에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이 분리된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러한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모든 결정에서 자신들의 직접 참여가 증대될 때 운동이 발전하고 혁명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의 주체'문제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에 대한 고찰은 이른바 '당 중심(주의)' 운동에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투쟁 속에서 자기 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계급 스스로 성숙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고 역사적 역할을 할 때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연결하고, 계급적 단결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며 계급의식을 질적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혁명조직(당)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4) 한계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노선에는 많은 한계가 있고, 오늘날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과 논란이 뒤따른다. 특히 자본과 그들의 방어자들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자발성을 방어하려는 노력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계급구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로 비쳐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행동, 그리고 인종과 여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 '계급중심(환원)'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노동자 운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계급정치의 중핵'으로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에 대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들은 1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렬한 사회적 갈등의 순간마다 출현해왔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시작하여, 헝가리로부터 칠레까지, 폴란드로부터 이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수천 번의 비공인파업과 광장점거에서의 대중총회를 통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3. 평의회주의 오류와 변형


1) 당에 대한 거부


평의회 공산주의자였던 오토 륄레는 1924년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하나의 당이 프롤레타리아적(的)이라는 단어 상의 의미만으로 당이 혁명적 성격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당의 혁명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단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변할 때 말이다."


륄레는 처음에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의 과업'이라며, 이전의 당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조직)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의회주자들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부족했다.


2) 경제주의 오류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추진력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이미 세계시장의 형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일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기지로서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의회주의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정치수준에서 가로막혀'노동자계급의 조건에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정복을 진행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을 옛 사회 내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궤적, 즉 세계 수준에서의 정치권력 획득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의회주의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성격'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기반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경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일국에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노동자 착취를 전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의 비중이 압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의식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성격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평의회주의자들은 간과했다.


이처럼 평의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관리'기획으로 바꾸었고, 그 안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찬양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좌파들은 공산주의는 관리가 아니며, 자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서, 공산주의는 '자본의 완전한 파괴'라고 주장했다.


3) 평의회주의의 변형


당 조직에 대한 거부,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 평의회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주장해온 평의회주의는 반혁명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생존능력을 상실했으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여러 조류와 만나 변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는 무정부주의와 연결되었고,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은 '자주 관리', '노동자 통제'라는 경제주의 이론으로 정식화되었고,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주요 주장에도 평의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좌익공산주의자, 평의회 공산주의자, 리버테리안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교류가 활발하고, '공산주의 최종 목표'와 '당과 계급의 역할,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열린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리버테리안,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내부에서 평의회주의의 정치조직 거부와 경제주의 논리는 약화 되었다.

 

 

4. 이탈리아 좌익분파와 평의회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좌파


1920~30년대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유럽혁명의 실패는 독일에서 공산주의좌파들을 파편화시켰다.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지라도, 나치 테러로 제압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반혁명의 전면화와 '평의회주의' 흐름은 좌익세력을 더욱 분산시켰으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원칙적 기반 위에서 국제적 토론과 협동을 위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반혁명에 대해 줄기찬 투쟁을 했다.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과 좌익반대파 망명그룹과 논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개방적 정신은 망명분파에 의해 성취된 보편적 강령의 진전과 함께 빌랑(Bilan)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반혁명과 계급투쟁의 퇴조 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정의했다. 그 임무는 첫째, 전쟁에 직면하여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할 것, 둘째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대조표'를 만들 것, 셋째,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독일-네덜란드 좌파가 러시아 혁명의 퇴행과 볼셰비키 당이 보인 반혁명적 역할에 대해 '10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당과 혁명을 모두 버리는 '평의회주의'로 경도된 반면, 이탈리아 좌파는 항상 명확하게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에 대한 '평의회주의적' 관점을 가진 네덜란드 좌파와 '당이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하면서 투쟁했다.


전쟁 시기 수감 및 가택연금 속에서도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9)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 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같은 해 프랑스 망명분파는 프랑스 공산주의좌파(Gauch Communiste de France, GCF)를 만들었다. 이때 프랑스 공산주의좌파는 빌랑의 정신에 따라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이행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이들은 이탈리아 좌파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훌륭한 공헌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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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분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 중에서 명료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생시켰고, 기존 혁명그룹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혁명의 시기인 1917~1920년대에서, 반혁명의 시기인 1930~ 1940년대를 거쳐, 계급투쟁의 부활기인 1968년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은 공산주의좌파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쇄신하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게 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좌파들은 조직, 사상,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확대되고 심화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좌파들이 90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계급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과 곤경을 만나면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 약점을 보완하고 계급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는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각종 기회주의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역할)을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의 극단적 오류와 경직된 강령주의로 공산주의 운동 단일화를 가로막은 '보르디가주의'와의 기나긴 투쟁10)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고 확장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은 평의회주의의 오류와 평의회 공산주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평의회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해결책은 오류이었을지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혁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부에서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량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킬 혁명의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계급의식을 방어하고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실천운동이다.


~형로


2014년 4월

 

<주>


1. 안톤 판네쿡(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좌파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2. 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 이론에의 기여자였으며,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였다.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자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었다.


3. 헤르만 호르터(1864~1927)는 네덜란드 시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88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안내자(De Nieuwe Gids : The New Guide)를 공동작업 했던 네덜란드 작가들의 매우 영향력 있는 그룹인 '80년대인들(De Tachtigers)‘의 주요 회원이었다.


4.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는 영국의 공산주의좌파이자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e)였다.


5. 오토 륄레(1874-1943)는 전쟁공채에 반대하여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투표한 공산주의좌파이며 독일공산당 창립멤버였다.


6. 폴 매틱(1904-1981)은 독일 공산주의좌파이며, 이후 미국에서 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주창자이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혁명사상의 반대자였다.


7.칼 코르쉬(1886-1961)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서구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창립 문서 중 하나를 작성한 독일 공산주의좌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사회주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 되었지만 후에 모택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8. 카요 브렌델(1915-2007)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좌파였으며 제2세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판네쿡의 동조자였다.


9. 오노라토 데이먼(1893~1979)는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처음으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 혁명가였다.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이후, 그는 조직된 이탈리아 좌파와 함께 활동했으며, 흔히 기관지 공산주의 투사(Battaglia Comunista)로 알려진, 국제공산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 PCint)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1945년에 창립된 국제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상으로 가장 큰 공산주의좌파 조직이었다.

 

10. 보르디가주의와의 투쟁은 [코뮤니스트 4호]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구조와 기능 2 :  당과 계급, 당의 중앙화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 를 참고 바람.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국제 공산주의(혁명) 조직은 다음과 같다.


ICC(국제공산주의흐름): http://en.internationalism.org

ICT(국제공산주의경향): http://www.leftcom.org

IP(국제주의자전망): http://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

ICG(국제공산주의그룹): http://gci-icg.org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의 국제적인 토론 그룹(포럼)은 다음과 같다.


Controversies (국제주의 공산주의좌파 포럼) :  http://leftcommunism.org

Internationalist Discussion Network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  http://groups.yahoo.com/group/intsdiscnet


*세계 여러 곳에서 최근 10여 년간 생겨난 신생 공산주의좌파 그룹들과 공산주의좌파 친화적 그룹,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조직은 다음 호부터 별도로 소개 예정이라서 제외했다.

 

 


<참고문헌>
 

1.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1920, V.레닌


 
2.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2008, 오세철
 


3. [좌파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1998,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
 


4. [러시아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2004, International Review


 
5. [평의회 공산주의], 1939, 폴 매틱
 


6.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1999, 카요 브렌델
 


7. [WHAT IS COUNCIL COMMUNISM?], 2000, Wage Slave X


 
8. [Council communism - an introduction], 2005, libcom
 


9. [혁명적 전통- 평의회 공산주의], 1995, 스티브 라이트


 
10. [노동자평의회], 2005, 빛나는 전망, 안톤 판네쿡


 
11.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1984, J. P. Geber


12.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1900–68)], 1988 and 2008, Philippe Bourrinet


13.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6-45], 1992,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4. [THE COUNCIL 'COMMUNISTS BETWEEN THE NEW DEAL AND FASCISM], 1976, Gabriella M. Bonacch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8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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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월드컵을 넘어 코뮤니즘으로! 코뮤니스트 4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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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I.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의 두 운동: 개량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투쟁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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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


우리는 레닌의 정연한 저작들을 이해함으로써 현재 유일하게 맑스주의에 충실한 좌익 공산주의에 적대적으로 그것을 인용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그 저작의 첫 페이지를 읽었는지 의심할 것이다. 그 저작은 ‘긴급한’ 필요에 의한 2차 세계대회의 테제의 이론적 합의안의 전조가 되었으며, 2판 부제는 맑즈주의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대중 담론 에세이(이 ‘대중 담론’의 부제는 저자의 겸손함으로 인해 고전적 제국주의로 부쳐왔다)이다.
첫째 장은 스탈린주의 추행의 위대한 업적들을 파괴하는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결과는 1914년의 훨씬 더 불명예스런 사회-애국주의자들이 한 짓보다 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국사회주의라는 비열한 '이론'이다. 그동안 스탈린-후르시쵸프주의 신문과 볼셰비키 공산당 역사에 대해 ‘수정된’ 단기과정은 그 이론이 레닌에 기초한다고 여전히 계속 떠들어댄다!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완전한 날조까지 해 왔다. 다음은 '단결! (Unitā)'의 1960년 8월 31일에 실린 글이다.

 

좌익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오직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지원이 있을 때에만 방어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혁명을 고무시키는 것이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책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좌익에 대한 첫 번째 날조다. 좌익은 러시아 바깥의 혁명을 인터내셔널의 코뮤니스트 활동을 통해 고무시키길 바랐지, 러시아 국가의 전쟁을 통한 방법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발상은 초기 '스탈린주의'를 특징지으며, 좀 더 근대적인 ‘스탈린주의’나 악명높은 후르시쵸프주의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거대한 날조가 레닌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이 국제 혁명을 '고무시키는' 이론은 맑스주의 - 맑스주의에 따르면 혁명의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의 성숙에 달려 있다 - 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레닌이 증명했다'고 새로운 책자는 지적한다. '사실 이는 레닌주의의 '평화 공존' 개념의 가정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책자는 트로츠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레닌을 죽이려 했다는 음모와 같은 날조와 상관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여전히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맑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잠재기에 필요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첫 번째 장이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다뤘음을 상기해보자. 러시아 혁명의 성격이 보편적이며 국제적으로 중요하다는 레닌의 명백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읽은 이라면, 후르시쵸프나 톨리아티(Togliatti)와 같은 오늘날 레닌주의자들의 공식적인 테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20차 러시아 당 대회 이후, 이 작자들이 각 국가들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국가 나름의 길'이 있으며, 따라서 그 길은 상황에 따라 러시아의 길과 다소 다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조작된 주장에 따르면, 대체 다른 모든 혁명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어떤 성격이, 레닌의 용어로, 본질적이지 않은가? 그들은 그것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소비에트 체계, 혁명적 테러리즘, 그리고 왜 아니겠는가, 봉기 폭력들이 모두 러시아만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들이란다. 의회(제헌의회)의 파괴 자체가 러시아 혁명의 특색이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던, 그리고 진정한 레닌과 원칙적인 측면에서 함께 열광하고 이의 없이 동의하며 기뻐 날뛰었던,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의 첫 번째 성취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레닌을 읽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난 처음의 몇 달 동안(1917년 10월 25일 - 11월 7일), 후진적 러시아와 서구의 선진국 사이의 거대한 차이는 서구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우리의 혁명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게 했을 수 있다.'

 

이것이 대중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번 더 지적할 필요는 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 혁명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는 서유럽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1920년, 레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 누구나 둘 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반대의 경향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레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 아시아나 미국에서 혁명을 그리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러시아와 대서양 사이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항복하지 않으려면, 그런 조건이어야만 했다.


왜 서유럽 혁명의 발전이 러시아의 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러시아는 후진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그러했으며, 그것은 봉건적 전제정치로부터 겨우 몇 달 전에 벗어났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그 혁명은 전제정치나 봉건주의를 몇 세기 전에 전복한, 프랑스나 영국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실제 차이와 함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국가들의 혁명이 더 명확하고, 단호하며, 압도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비교하여 보다 덜 화려하고, 더욱 불확실하고, 망설여지게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레닌 저작의 중심 가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남아있는 노동 인민'에 대한 헤게모니는 산업화된 서유럽에서 더욱 쉽고 완벽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역겨운 정도로는 제3인터내셔널의 시체로부터 일어난 것들 정도에만 비교되는 제2인터내셔널의 몇몇 속물들만이 그러한 우스꽝스런 일이 일어난 후에 프롤레타리아 테러, 독재, 의회의 파괴가 유럽적인 것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성격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의 기회주의자들은 붉은 러시아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오늘날 더욱 역겨운 이들이 그들이 격찬하는 방식대로 모든 이들이 믿는 체하며 이를 반복한다.
만일 러시아 혁명이 진실된 선거 시스템의 설립 몇 달 후에 의회를 없앴다면, 한 세기동안 의회가 있었던 나라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오늘날 배신자들은 호색한의 얼굴을 하고 이러한 국가에서는 의회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재미로, 부주의하게, 또는 위대한 블라디미르가 보드카에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모든 혁명의 특징들

볼셰비키 혁명은 시작될 때에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다양할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과정은 모든 지역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밝히기 위해 레닌은 글을 썼다. 그 과정이란 무엇인가? 이 저작 뿐만 아니라 가짜가 아닌 맑스-레닌주의적 저작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우리는 그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한 이들과 함께, 누구든 40년 동안의 사건들이 역사가 거꾸로 흘렀다고 믿는 이는 그럴 것이라고 이해된다. 1920년,

 

'우리는 이제 충분한 국제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성격이 지역적이지도 않고, 특히 민족적이지도 않으며, 러시아만의 것이 아니라 국제적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앞의 책, p.512)

여기서 저자는 오해를 피하고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국제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혁명의 몇몇 특징 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한 특징과 부차적인 특징이 모든 나라들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의미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국제적인 타당성‘(이 단어는 '가치'라는 말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특징들이 그런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앞의 책, 512쪽)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정확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좌익의 테제였다. 레닌은 그것을 직후에 설명한다. 하지만 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이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몇몇이 그러한지, 맑스주의 혁명 강령이 되는지(또는 그렇게 승인되는지) 지적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제국 황실의 숙청은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하며, 여전히 그에 대한 소음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어디서든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특징이 아니다. 황실이 없는 나라들에서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짜르의 후손들은 왕조의 계승권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런 계승권이 없는 곳에서 살해는 무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바깥의 모든 혁명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유의미한 특징들은 전부가 아니라 오직 몇몇이 될 것이다. 어떤 것들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것들이 그러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세심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가장 중요한 구절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진실을 과장하고, 우리 혁명의 특정 근본적인 특징들을 넘어서까지 과장하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오류일 것이다. 선진국 중 적어도 한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 직후 뚜렷한 변화, 즉 러시아가 더 이상 혁명의 모델이길 멈추고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안에서) 다시 후진국이 될 것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놓치는 것 역시 오류가 될 것이다.‘(앞의 책, 512쪽)

 

혁명이 곧 유럽으로 전파될 것이다 : 이것이 레닌주의의 중심 사상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의 승리 이후, 러시아는 경제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적 경로에서 독일식 구조가 저 뒤에 남겨놓은 후진국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레닌의 사상은 소비에트 독일, 또는 소비에트 유럽의 옆에서 사회주의 러시아가 낡은 경제로부터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그로부터 비록 국가의 형태를 띄더라도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아이디어로 완성된다.
그런 견해는 레닌 이후 분별없이 유행했던 개념, 한 나라가 모델이 되는, 주도적인 나라의 사회주의라는 공허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모방할 만한 모델이라는 이론과 러시아가 혁명의 후방에 있다는 이론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질된 국가의 길과 위에서 언급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반복된다'는 강한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같은 모순이 있다 : 러시아 모델 이론이 바로 오늘날 모방적인 공존(emulative coexistence)이라는 미신의 첫 번째 토대였다.
1920년 러시아로 되돌아가 보면, 약속된 땅에 대한 묘사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프롤레타리아 주인들 앞에서, 우리는 위대한 레닌의 겸손한 학생들로서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길과 그것이 작동하는 바를 보았다는 믿음, 마치 그것이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일종의 스푸트니크과 같이 발명되고, 만들어진 무언가인 것처럼 여기는 믿음과 단호하게 싸웠다.
사회주의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맑스주의자로서, 빛나는 인간의 메커니즘이 아직 그 구실을 하기 시작하기 전인 전세계와 러시아를 위해 사회주의가 어떤 길이 되어야 할지 알았고, 그것을 확신했다. 행진하는 혁명군은 흘륭했고, 굳건했으며 고통스러웠지만, 공산주의의 즐거움을 향한 길로 인정되었다. 모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신과 러시아의 혁명군에게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고, 그들은 오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이 대륙의 모든 부르주아 국가들을 전복시킬 수만 있었다면.
오늘날의 사악한 공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반맑스주의자와 반레닌주의자의 입장은 모델 이론에 입각해 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10월 혁명에 대해 언급할 때 그러한 엄청난 오류를 다음과 같이 의인화했다. : '자본'에 반대하는 혁명.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 만약 승리했다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경제적 결정주의와 유물론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대신 자발적 관념론이 진실이고 빛나는 것이다. 레닌은 역사를 창조하고,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모범이 되는 모델을 창조할 수 있었던, 따라서 대망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 신화의 영웅이 된다. 순례자들은 예언자의 망토 끝자락에 키스하는 수 밖에 없다. 모델을 심사숙고하고 그 모습과 비밀을 기다리고 있는 서구의 대중들에게 이야기해주면, 그들은 그것을 흉내낸다.
그러나 레닌은 메시아인 체 하지 않고 그 곳에 있다. 그래서 그가 더 겸손하며, 위대하다. 그는 맑스주의 유물론의 모든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대해 그의 변증법으로 가르치며, 그 모델을 비웃는다. 가엽게도 그 모델이 구식이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리 되리란 것을 믿고 바란다.
레닌을 자본의 처형자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숙이고 빛을 향해 눈을 뜰 것이다. 그람시는 그의 초라한 육체적 힘이 그의 관점의 날카로움을 유지시켜 주는 한 실제로 그러했다.
오늘날 블라디미르의 푸르게 빛나는 두 눈은 죽었지만, 그의 전형적인, 가차없는 논쟁의 힘과 전 세계가 기적적인 모방 덕에 공산주의로 변할 것이라는 몰상식한 해설을 혼동하는 것으로 충분한 어리석은 모방모델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많은 것들 중에 우리가 남긴 것이다.

 

 

러시아가 가르쳐 준 것

 

그러므로 레닌주의의 견해에서 러시아 혁명은 세계에 사회주의의 구조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다른, 더욱 위대한 국제적인 기능, 혼자만의 수단과 군대로 모든 곳에 있는 자본과 그 패거리들의 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한 가르침은 교의의 중요한 행간에 이미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최초로 증명된 것이다.
비록 그 시기에는 오늘날보다 상업 자본주의와 그것을 모방하는 가증스런 서구의 진정한 낙인에 의한 오염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러시아식 뼈대의 사진을 찍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비유가 허용된다면, 혁명적 사건들을 영상으로 담아, 그로부터 소위 결정적인 순서로, 모든 유럽에 보편적으로 타당하도록 뽑아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시기의 압도적인 열정에 활기없는 것이 아닌, 역동적인 모델이 등장하는 것이다. 넌더리나는 조리법이 아니라, 사회적 부활의 분출하는 불꽃으로서.

그러므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지금, 모든(이것은 레닌의 강조다, 악당들아!) 나라에게 그들의 가까운, 피치못할 미래에 대한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밝히는 것은 러시아 모델이다'(앞의 책, 512쪽)

 

우리가 너무 긴 호흡으로 이야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모델은 현재의 재생산에 대한 현재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인 미래에 봉사할 과거로부터의 교훈으로 의미를 가진다.
비록 인간은 순진하게 모방하는 동물이고, 1960년의 인간은 이에 대한 안타까운 증거이지만, 1920년,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도약하는 그러한 권력의 돌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혁명 이론의 무오류성에 대한 거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열정적이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대지의 선진 노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혁명적 계급 본능으로 이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파악해 왔다.'(앞의 책, 512쪽)

 

문화도 아니고, 부르주아 학파의 가르침을 따라하는 것도 아닌, 본능!

 

레닌은 우리에게 그의 뛰어난 연구의 과정에서 보편적인 혁명 전선의 다양한 필수불가결한 특징들에 대해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볼셰비키 이론과 전술의 근본적인 지점들의 국제적인 '중요성'이 있다.'(앞의 책 512쪽)'

 

여기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의 서론은 논쟁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시국적인 발언을 포함하여 가장 시급한 중요성을 살려 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어들은 레닌이 약속한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우리는 이를 항상 유의미한, 이라고 이야기한다) 특징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화한 것을 주석으로 달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들은 '주요한' 것들이며, 레닌은 그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술이다.
국제적인 반향과 함께 영광스런 볼셰비키 공산당을 특징짓는 것은 그 교의에 있는 원칙의 체계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론이 원칙의 체계에 묶여있는 반면, 전술은 자유롭고, 불편부당하다고 이야기할 권리는 없다. 모스크바에서의 몇몇 대회에서 우리 좌익이 주장한 것은 레닌 그 자신이 섰던 입장 위에 있다 :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칙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게다가 그 원칙들은 모든 나라에,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에 타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1922년 로마 테제가 그 증거다.
이 문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자 지도자들과 카우츠키, 바우어, 아들러 등의 중도파를 비난하는데, 그들은 저속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은 아니었을지라도, ‘반동으로 증명된 이들’과 배신자들에게 볼셰비키 당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준 이론적이고 전술적인 원칙 체계들의 보편적인 타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닌은 가공의 민주주의, 평화롭고 유혈사태에 이르지 않는(우리는 여기에 '모방하는'을 덧붙일 권리가 있다) 세계 혁명의 특징들을 러시아 혁명의 특징들과 위선적으로 대비시키는 (바우어의) 팜플렛, 소위 '세계 혁명'의 현학, 야비함, 수치스러움에 뺨을 때린다. 사실 모든 혁명에 속한 것임에 틀림없는 그러한 특징과 모든 것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아는 1920년의 상황에서, 서유럽에서의 혁명 전투는 주어졌다.
레닌은 중도주의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 후, 카우츠키를 지적하며 오래 전 1902년 그가 맑스주의자였을 때 쓴 글 '슬라브 민족과 혁명'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기서 카우츠키는 혁명의 중심이 19세기의 초반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 영국으로, 독일로 이동한 이후, 유럽 혁명의 지도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갔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의 머지않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저술했던 레닌은 카우츠키에게 외친다, '1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메아리 친다, 5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슬라브 프롤레타리아의 엄청나게 기억할만한 착취 위에, 그런 얼음 비석 위로, 폐쇄된 얼음 껍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파시즘, 공존, 데탕트(detente),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길!
레닌이 국제 연맹을 자본의 요새라고 그 혐오스러움을 드러낸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레닌을 져버리고 국제연합의 그야말로 돈독이 오른 녹색 테이블 위에 그러한 비문을 쓴다.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불꽃을 후대에 넘겨주는 근대의 올림픽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 죽은 카우츠키와 언제나 빛나는 레닌은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러시아로 옮겨가는 불꽃을 보았다. 오늘날 러시아는 영광으로 빛나던 순간 이후 땅에 떨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불꽃이 다시 타오를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의 서두에 묘사했던 것처럼, 수치스러운 미국과 타락한 러시아 모두의 경쟁적인 억압에 맞서는 부활하는 서유럽을 생각한다. 양쪽 모두의 악의적인 외교관들이 포악한 독일의 문제를 외설스럽게 조작할 동안, (비록 장기적으로라고 할지라도) 그런 나라들을 통해 그 역사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저항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든 적이 되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백인이 힘을 잃고, 그들의 황인 흑인 형제들이 포효하며 행진하는 과정에서 반세기는 회복할 것이다.

 

 

독재와 실리주의자들

 

우리는 레닌의 글을 소개하는 이 장에서 칼 카우츠키, 오토 바우어, 프리드리히 아들러 등에 대한 파괴적인 공격 속에, 레닌은 언제나 그런 인물들, 중도주의자, 독립주의자(independents), 제 2.5 인터내셔널 주의자들처럼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에 있는 이들에 반대하여 가장 강력한 일격을 날려왔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만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을 우익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또는 사회애국주의자들, 부르주아지의 공개된 동맹들(open allies)과 경찰들, 이름하여 샤이데만, 노스케, 밴데발트, 맥도널드, 등등보다 전쟁과, 전후에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들로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실 카우츠키는 독일에서 사회-사이비 애국주의 의회의 주류에 저항하는 반대파를 만든 첫 번째 인물이었다. (우리는 의회주의의 쟁점에 대해, 그것을 다뤄야 할 때, 칼 리프크네히트 스스로 1914년 8월 14일 당의 규율에 고개를 숙인 것을 다룰 것이다. 그것은 의회 그룹의 규율에 따라, 슬프게도 카이저 정부의 전쟁 공채에 찬성하는 투표를 조용히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바우어와 과거의 맑스주의자 빅터의 아들 프리츠 아들러가 소위 오스트리아-맑스주의(마치 민족적 맑스주의가 있는 것처럼!)의 지도자들이었다. 빈에서 프리츠는 용감하게도 전쟁에 반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이론가로서 - 이런 평판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는데 - 맑스주의와 독재는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볼셰비즘과 레닌주의를 건전한 사회주의의 위반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에 따르면, 맑스주의자는 자유, 민주적 합의, 대중의 지지, 다수 '시민'의 자유 민주주의적 의견의 자유라는 규칙을 깨지 않을 의무가 있다. 그런 그들이야말로 맑스에 대한 가장 수치스러운 왜곡을 만든 이들이다.
레닌은 불과 칼로 그들에게 덤벼들며, 우리는 생사를 건 역사적 전투의 목격자이자 투사로서, 그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날 그런 진정한,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 우리의 영원한 적대자들이 파라부르주아(parabourgeois)라고 형용사 '구체적인'을 붙여 부를 - 행동은, 그 스타일과 교훈이라는 점 모두에서, 그리고 탁월한 레닌의 논쟁이 기록된 형식 그 자체가 의미심장하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역사 앞에서의 그의 엄청난 책임 때문에, 이 극단적으로 비학자적인 대중의 지도자는, 이제 막 최근의 반제정 혁명으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에 직면하여, 변절자들이 칠칠지못한 비난을 자신에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레닌은 쓰고 있다. : 우리는 국민투표와 숫자로 표현된 합의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부르주아 시대의 노예제와 노예근성의 병리적 잔여물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젊은 이들은, 그리고 어떤 오염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테제나 이론서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도) 규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정치적으로 말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을 흉포하게 공격하라! 그렇게 하면 너는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 편에서 우리는 레닌을, 다시말해 수백만의 인물들과 함께 실제 전투 속에 있었던 그 시절의 혁명가들의 보기로 들 수 있고, 다른 한 편에서 멍청이들, 레닌의 저작과 활동에 대해 파렴치한 왜곡을 이용했던 바보들의 가련하고 비참한 종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블록 안에, 전선에, 가공의 적의 오른편에서 고립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배신자들이 했던 짓의 반복일 뿐인 반대의 규범을 따랐다. 기회주의 역병의 세 번째 역사적 파동의 승리자는 우익, 중도 사회주의자와 함께 연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전시를 훨씬 넘어서서 평화의 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카톨릭와 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회적 입장에서, 오염된 프롤레타리아와의 연합 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와의 연합, 나아가 중간 계급과의 공공연한 협력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론적 질문은 실질적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이 맑스를 잘못 해석한 교수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에 단지 기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있다. 이 악당들은 서쪽의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는 군대가 볼셰비키 권력과 혁명 전부를 유혈낭자하게 소탕하려고 돌진해 올 때, 백군과 연대하여 영광스런 레닌주의 전위에 의해 저질러진 '독재'와 '테러'의 범죄를 벌하는, 그들의 승리를 바랐다. 우리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승리가 오직 역사의 '필연적인 것으로 예견할 수 있을' 방법으로 성취될 때, 그런 전선을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배신당한다는 것을 배웠다.
가장 호전적인 반볼셰비키, 카우츠키가, 러시아에서는 그 응답이 총살이었겠지만, 위와 같이 썼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배신자 카우츠키'를 썼고, 트로츠키는 경외로운 '트로츠키주의와 공산주의'를 썼다.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은 오늘날 – 다른 나라에서는 이제 용서된 - 독재와 테러가 '1917년 러시아의 독특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들은 레닌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문장으로 발음했던 것처럼 자유주의-맑스주의자(liberal-marxists)들이고, 맑스주의자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몽땅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지로 간 이들이 아닌가?

 

 

중상모략은 언제나 똑같다

 

오늘날 바우어, 아들어의 이름은 그들의 볼셰비즘 비판을 기억하기 위해, 동시에 '독재와 테러 없는'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이론에 대해, 패배를 선언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다(Rome의 1960년 9월 2일, ‘Messagero’를 보라) ; 실제로 그것은 옳다 (바로 옆에 앉아서 보는 것보다 반대편 극단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것처럼, 이런 표현을 해도 된다면, 의회의 여흥 정도의 가치가 있는, 언제나 똑같은 옛날 이야기다.)
폴란드인 도이(Deutcher)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이후의 러시아(Russia after Stalin)'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이 최신 저자의 견해는 현대 러시아는, 무엇이라 부르든, 자유주의적인,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미국인, '러시아주의자인', 크론(Croan)은 도이의 테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토 바우어의 1931년 책, '세계 전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테제와 같은 것이라고 논쟁했다.
만약 40년이 지난 후에도 레닌이 영원히 제거하려 했던, 오토 바우어와 같은, 레닌주의의 자칭 문하생들과 더러운 위조자들이 우리의 길을 막는다면?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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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H.칸느 메이예르

 

 

 

헤르만 호르터는 1927년 9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스위스로 갔다. 하지만 생의 최후가 가까워졌음을 느꼈고, 그래서 스위스에서 묵는 것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브뤼셀에서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호텔에서 같은 날 밤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삶처럼 용감하고 참되었다. 그는 10시간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무덤에 대고 말할 리 없는 미출판된 저작과 쟁점이 되는 엄격한 지침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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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고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이 모든 국가에서 민족 부르주아지의 명령과 처분에 따랐을 때, 헤르만 호르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가 계급에게 굴복하게 했던 모든 '이론가'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리고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붕괴 원인을 분석했다.


헤르만 호르터는 저명한 네덜란드 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1864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는 고전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그는 그의 시 '5월'로 문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시는 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언어로 자연을 찬미하는 시 였다. 그는 전통을 깨고 규칙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실제로 느꼈던 감정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썼다. 문단 보다 폭풍 같은 열정적인 충동과 시는 그러한 종류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 최상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호르터 주위에 한 무리의 젊은 시인들이 모여들었고 '80년대의 운동'으로 알려진 문학 혁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호르터는 곧 이 운동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깊이도 부족했다. 그는 원인을 찾았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강력한 발전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고대문명을 다시 공부했다. 그 결과는 “ 80년대 운동의 비판” 이라는 수필로 표현되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번역했으며, 그리고 칸트에 열중했다. 그런 다음 “자본”을 읽는다. 그는 원하는 것을 맑스에게서 발견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깊이 공부했다.

 

1890년에 호르터는 네덜란드에서 사회민주노동당(S.D.A.P)에 가입했다. 처음에 이 당은 그의 입당을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당의 비위를 맞추기에는 너무 유능하고 똑똑했다. 순식간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스주의에 관해 가장 위대한 이론가 가운데 한 명으로, 그리고 네덜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가 중의 한 명으로 부각되었다. 사회민주노동당 조직의, Het Volk는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멋진 꿈, 붙잡을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평했다. Het Volk는 호르터가 냉철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라고 인정했지만 그가 당에 지장을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호르터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인, 출세 제일주의(careerism)라는 사회주의를 그가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의원에게 성스럽거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조합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대중을 기꺼이 살해할 의향이 있었다.

 

계급투쟁을 가라앉히는 경향, 그들을 개량주의자로 만드는 경향은 S·D·A·P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무기인 맑스주의로 무장한 호르터는 S·D·A·P의 자본주의적 타협 행위와 배신을 폭로했다. 투쟁은 날카롭고 격렬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향력 있는 맑스주의 그룹이 S·D·A·P 내에 만들어졌다. 이 그룹의 대부분은 1909년에 축출되었고 사회민주당(S·D·P)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 당을 결성했다. 호르터는 SDP에 가입했다.

 

그해 SDP는 호르터의 저작인 맑스주의와 수정주의를 발행했다. 이 저작은 모든 수정주의적 활동의 반(反)사회주의적 특징을 폭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SDP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하는 일을 훌륭하게 했다. 그런다음 지도부 권력에 대한 변화가 와서 원즌쿱과 라벤스테이즌은 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즉시 기회주의로 변질되었다. 조직화된 기구로서, 네덜란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은 “프로이센 주의”에 많이 경도 되었으며 “연합한”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이 투표장에서 투표하기를 원했던 Winjnkoop과 Ravensteijn은 의회에서 '연합한 이유'를 옹호했다.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이라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을 저 버릴수 없다는 것이 호르터의 그 이유였다. 호르터는 제국주의 연합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는 동일하게 남았다. 모든 제국주의는 투쟁해서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전쟁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제국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 그것은 세계 혁명이라는 방법 이었다. 노동자는 사회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도록 해야만 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호르터는 열렬한 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착실한 맑스주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이중적인 성격을 보지 못했다. 승리를 위해서 혁명은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퇴각하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세력들은 세계 혁명을 더 잘 실현시키기 위해서 힘을 쏟아 부었다.

 

친구이자 이제껏 등한시된 또 한 명의 저명한 네덜란드 맑스주의자인 안톤 판네쿡과 함께, 호르터는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했다. 그들은 이 혁명이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즉, 자본주의적 혁명이었는 것을 보여준다. 농민들은 소규모 농지와 사유 재산 및 토지의 분배를 열망했다. 사회주의에 대해 동조하는 1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1억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있었다. 만일 세계 혁명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원하기 위해서 왔다면, 천 만명은 세계를 장악하고 해방시키는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혁명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기가 시작된 러시아에서 존재하는 계급 조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러시아가 세계 혁명의 중심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 투쟁에 적대하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을 것이다.

호르터는 비합법적으로 1921년 제3인터내셔널 제3차 회의에 K.A.P.D의 대의원이며 이러한 관점의 방어자로서 참석했다. 레닌은 이미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선택하였고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라는 저작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끝장 낼려고 하는 대회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되었으며, 그리고 자본주의 정치로의 가교는 통일전선이라는 슬로건에 기반을 두었다.

 

호르터는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레닌의 소아병(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하여 날카롭게 반박했다. 거장다운 묘사로, 그는 레닌의 전술이 어떻게 하여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세계 투쟁을 붕괴시키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 그리고 세계 혁명에 대해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억압을 강요했음이 틀림없다. 레닌주의는 투쟁을 연장시키고 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켰다.

 

호르터는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존재를 표현! 하는 것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당의 선전으로서도 청산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즉, 레닌의 자본주의 방식에 반대하는, 반의회주의, 전세계 의회와 노동조합주의의 후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공산당의 점진적인 감소와 제거가모든 지역에 '합법' 정당을 존재하게 한다는 레닌의 좌익 전술을 발전시켰다. 호르터는 좌익의 역사 유물론적 토대와 반(反)의회주의 전술의 개요를 서술했다. 그는 모든 계급 운동의 중심에 직장 위원회를 배치하는 전술은 이론가들에 의해 '발견' 혹은 '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매 시기는 일반 노동자들이 그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에 따르는 그 자신의 법칙이 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의회와 노동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국가에서,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에 반대해서 건설하고 발전시켰던 이론 조직을 발견했다. 그래서 직장 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그 통풍구를 발견했던 형태로 왔다. 좌익의 전술들은 프롤레타리아 그 자신에 의해 발전했다.

 

호르터는 이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 방식의 원인을 분석하고 설명했으며, 그의 '공개서한' 에서 그것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표현! 이라고 했다.


호르터는 레닌이 서구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 대해 적용하려고 한 전술은 실수라고 생각했다. 서구 사회가 혼돈 상태에 빠지고 동구 사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이 지점에서 하루-이틀 추측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제1, 제2, 그리고 제3 인터내서널은 끝났다. 제4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아나키즘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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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터와 판네쿡은 좌익의 이론적 서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유일한 세력이고, 계급의식과 집권의식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활동을 변질 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계급사회의 안전판으로서 파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은 산업 분야에서 의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좌익은 21개 조항을 제외하지 않았으나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호르터는 제3인터내셔널의 와해는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그의 앞에서 러시아의 후퇴에 따라 야기되었던 재앙 이후, 마침내 부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산주의를 보았다.

 

호르터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이슈가 된 시집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닌 계급투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그의 시 가운데 한 편에서 말하듯이, 그는 '자연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다음에 그는 팬이라 불리는 500여 페이지 분량의 위대한 시를 썼다. 그는 1907년부터 1916년까지 그 시를 쓰는데 9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서, 그는 경이로운 것으로서, 인류 정신의 압축, 세대의 성장, 혁명과 공공복지의 모체로서 공장을 본다.

 

호르터의 미 출판된 작품 가운데, 'Der Aredarraad'(소비에트 위원회)라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호르터는 공산주의를 현재로 가져와서 혁명의 중심인 직장 위원회를 묘사한다. 그는 계급인 노동자들에 대해 모든 사랑을 담아서 이 시를 썼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배계급, 거짓된 문화의 세계는 어떻게 이 위대한 시가' 소비에트 위원회'라는 주제를 중심에 둘 수 있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반 의회주의자인 케네 메이에르에 의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기사로부터 기 알드레드가 요약하고 수정함)
알드레드에 이한 반-의회주의 개척자로 부터


옮긴이|김명수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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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성승욱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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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우리는 작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출범하면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하며1)


“지난 수십 년간 사민주의(의회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노동자계급 내부의 장애물들은 노동자계급 고유의 무기인 단결력과 전투성, 그리고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을 무력화시켰다. 자본의 공격은 강화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가,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들에 의해 여전히 여러 장벽에 막혀있다. (생략)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1)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자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투쟁과 실업자, 빈민, 청년, 소수자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에 기반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반한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3)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생략)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생략)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핵심은 낡은 노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 정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코뮤니스트 정치가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경로와 입장을 통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과 실천을 주장해왔다. 이글은 노동조합 문제에 대한 보다 실천적인 접근을 위해 우리와 원칙에서 가장 근접해있는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의 입장을 소개, 평가하여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논쟁과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이글은 노동조합의 탄생에서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조합의 변화, 68혁명 이후 현재까지 노동조합의 역할과 계급투쟁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실천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노동조합의 탄생에서 68혁명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글의 결론 일부를 미리 밝히자면,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개입하는 원칙을 소개하고 정립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넘어선 운동, 즉 ‘반노동조합 노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과거 코민테른의 노동조합 개입방식인 전달 벨트(노동조합이 당과 계급 사이의 전달 벨트 역할) 전술은 폐기되어야 하며,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을 지도장악할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장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직접 만나고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의 자기 조직화를 위해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운동에 개입한다.

 

코뮤니스트는 임금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어떠한 투쟁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무관하다며 기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뮤니스트들은 어떻게 노동조합 기구가 항상 이 투쟁들을 궤도 이탈시키고 통제하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범위를 넘어서 비공인 투쟁을 시도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생존조건의 지속적인 악화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외부 또는 노동조합에 대항한 비공인 파업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투쟁은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투쟁위원으로 구성된 파업(투쟁)위원회에 의해 유지 확장된다.

 

코뮤니스트는 계급투쟁과 노동자운동에 개입함에서 공장(작업장)뿐만이 아니라, 지역에서도 국제주의/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자 정치 그룹은 각각의 위치/ 장소/ 지역에서 코뮤니스트와 동조자로 구성된다.

 

현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외부에서 그들에 적대하여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를 위하여 반(反)노동조합 노선"을 고수해야 한다. 노동자총회, 투쟁위원회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정치적 틀을 항상 제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혁명적 상황의 성숙은, 반(反)자본주의적 투쟁 기구들의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들로 발전하는 능력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특징을 취하는 그러한 조직들의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에 따라 명확히 나타날 것이다.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은 코뮤니스트노동자들의 활동적이고 조직화된 개입 없이 자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세적 시기에 어떻게 투쟁 기구들의 개별적 경험들이 혁명 전략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국가(자본) 기구화 진행이 아직 온전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탄압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반(反)노동조합 노선은 노동조합 안의 노동자를 포기하거나, 반(反)노조정서에 역이용 당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노동조합을 개조하거나 장악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에 비하면 기우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아직 새로운 운동의 출현과 그 주체가 준비되어있지 않을 뿐이다.


1. 노동조합의 탄생과 성격의 변화

 

노동조합은 19세기, 일상생활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목적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심각한 갈등의 국면에서 탄생했으며, 조직과 계급의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자본주의 최대의 번영 시기에, 노동 계급은 종종 격렬하고 처참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지속적인 조합조직을 건설했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이 기관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개혁과 투쟁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2)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을 해온 노동계급 조직이었고 그들의 계급에 충성을 다 하는 투사들로 구성되었다.”3)


비록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고 시도하지 않는 체제 내의 조직이었을지라도 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여러모로, 이러한 노동조합은, 과도한 관료주의 없이 노동자에 의해 창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달랐다. 비록 이러한 노동조합이 계급의 제한된 도구였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혁명가들에 의해 이 부분(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방어하기 위한 단순한 조직이었다)이 인식되었을지라도 4)


“노동계급의 방어적인 조직으로써 처음 나타났던 노조들은 인간 이하의 노동환경에 직면했고, 오래된 친목단체나 회사의 확장으로서의 산업적 측면에서 그들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노조는 그들의 열망에 기초해서 개량주의 수준까지도 도달하지 않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이며 경제적인 분석을 이용하자면, 개량주의는 혁명적인 행동에 대한 요구 없이 법적인 발전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조합들에게는 발전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물음은 전혀 없었으며 더군다나 사회주의에 대한 물음조차 없었다. 노조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좀 더 참을만하고 덜 굴욕적인 노동환경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해왔듯이, 자본에 좀 더 적합한 노동환경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노동조합들은, 혁명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노동계급의식을 가지며 오늘날 노동조합들의 왜곡된 계급의식, 타락과는 대비되는 건전한 구성을 가진 조직이었다.”5)


이러한 초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상승기’ 또는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라는 경제적 조건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현재의 노동조합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이 체제로부터 용인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마찬가지로 계급의 결합에서 하나의 중심이 되었고, 이 속에서 계급의 연대와 계급의식이 발전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것으로부터 "공산주의의 학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개입활동을 했다.”6)

 

“이러한 노동조합은 그것의 역사적인 시기가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완전히 다르게 탄생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상승 국면 동안에 탄생했으며, “자유경쟁” 시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두 가지 측면 -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 - 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1. 비록 자본가 계급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 구조는 계급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그러한 개선(생활조건, 노동조건) 비용을 큰 어려움이 없이 흡수할 만큼의 충분한 이윤을 가졌다.

2.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이미 나타났으나 아직 제국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생산 및 금융 독점은 형성되지 않았다.

또 다른 본질적인 측면 : 이러한 역사적 국면 동안 부르주아지, 국가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합법화시키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분명히 중재 조직이지만, 부르주아 국가는 이 중재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조합/노동자와 부르주아지 간의 충돌을 수반할 뿐이었다. 7)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또는 자본주의 쇠퇴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노동조합의 특징과 역할은 변했다.

 

“제국주의 시대인 20세기에 변한 것은 무엇이었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는 거대한 제조업 및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금융 센터를 형성하는, 제국주의 특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국제경쟁이라는 맥락에서,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조합을 합법적으로 인정(이 단계는 19세기 말에 시작했다.)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임금을 관리하기 위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중재자로서 노동조합을 인정했다 (국제적인 수준의 '국민 국가제도’에 대한 자본의 재평가와 경쟁의 요구에 따라). 수년간 노동조합은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발전은 피할 수 없는, 노동조합이라는 본질의 결과였다 : - 노동자와 자본가 - 라는 두 당사자 사이의 조정을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심지어 지배계급과 국가 양쪽에서 승인, 합법성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는 19세기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충돌은 주로 지역적이고 제한적인 특징을 띤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구조 변화 (자유경쟁의 소멸), 생산 및 금융 독점의 보급, 국제 경쟁은 민족국가의 수준으로 충돌의 규모를 상승시키고 국가고용주협회는 노동과 자본 간의 경제적 충돌에 점점 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수년간, 노동조합은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의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만약 노동조합에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이 남아 있다면, 변화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이다.”8)


“20세기 초에 이르러 노동조합의 성격은 변화했다. 사회 전반으로 가치법칙이 확장되면서 노동조합과 다른 중요한 노동계급 조직들은 자본주의 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자 대중정당들 역시 이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태의 예 중 하나는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노동조합이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9)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진입하면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자계급에게 개혁 및 생존조건의 개선을 용인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노동조합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 옹호라는 그것의 근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이후, 그리고 임금노동의 폐지와 그와 더불어 노동조합의 소멸이 주요 사안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사적인 상황에 직면한 이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옹호자로,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대리자로 되어버렸다. 이것이 노동조합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새로운 쇠퇴기에 유일한 생존기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전개는 쇠퇴기 이전의 노동조합의 관료주의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생활의 모든 구조들을 자신 속에 흡입해 버리려는 국가의 가차 없는 경향을 통해 조장되었다.”10)

 

2. 노동조합의 역사적 변화와 계급과의 대립

 

그렇다면 노동조합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경과하면서 어떻게 성격을 바꾸었으며, 노동자계급과 무엇으로 대립하게 되었는가?

 

노동조합주의

우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해당되는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 새로운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초기부터 존재했다.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활동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 양식으로 교체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의 좋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특징은 혁명성이 아니라 보수성이다.

 

“노동조합주의는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로 널리 퍼진 후에, 자본주의적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특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 초기에 풍부한 미개척지는 마을에서 노동자 부족 현상과 상대적인 고임금 및 좋은 조건들을 만들었다. 미국 노동 총동맹은 나라에서 권력을 갖게 되었고, 점점 그 조합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생활 표준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다.

 

명백히 그러한 조건들하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는 생각이 노동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날 리는 없다.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충분하고, 꽤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현재 존재하는 질서에 적대적인, 분할된 계급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가능한 모든 것들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대부분이 유럽에서 건너온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 공간이 있었다. 이런 급속한 농업 인구의 증가로 인해, 에너지와 행운이 함께한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기능공, 소상인, 심지어 부유한 자본가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이 필요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본주의적 정신이 노동계급에게 널리 유포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경우가 발생했다. 여기서는 영국이 세계의 상업과 대산업을 독점했고, 외국 시장에서 경쟁자가 없었으며, 영국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부유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본가들은 산업 평화를 위해 조합과 고임금을 허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정신에 물들게 되었다.”11)

현재 거의 모든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는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치, 곧 조직화된 투쟁의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된 힘의 최초 형태를 구현했다. 하지만 초기 영국과 미국의 노동조합들에서 이런 가치는 종종 잘못 적용되어, 결국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인 협소한 동업조합으로 전락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형태는 자본주의의 발달 차이들로 인해,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같은 양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서서히 소멸해갈 때,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은 때때로 그것들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조합주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계급의식과 불안정 노동계급이 증가할수록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조합주의를 만들었고,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갔다.

 

따라서 새로운 조합주의는 모든 조합주의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으며, 노동 계급과 노동조합주의 사이에는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게 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생디칼리즘(전투적 조합주의) 역시 그것의 전투성과 무관하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주의이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의 개량으로 제한하는 데 반해, 노동자의 삶을 방어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까지 향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평의회이다. 부르주아 권력의 파괴와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의 정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다.

 

전쟁과 혁명의 시기, 노동조합의 본질

 

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 이들 모두 - 일부를 제외한 - 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들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줄을 섰다. 사회민주주의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입장에 있는 노동조합의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 12)

 

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의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의 수적인 증가와 사회적 힘은 1914년 이후 계속 증가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수적으로 줄어든 몇몇 나라에서도 그만큼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점차로 커져 왔다. 노동조합들에게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 참사는 그들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사건이었다고 이야기된다. 이것은 그때까지 자본주의가 노동조합을 파괴적인 힘으로 두려워했고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협력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지배(자주 관리가 아닌 노동조합의 노동자통제)”라는 수많은 경험은 자본가들이 만족할만한 효과에 의해 그들을 만족시켜왔다. “노동자들의 지배”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약화시켜왔고, 공장의 공정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특별히 자본주의적인 총체인) 조국의 방어자로서 뿐만 아니라 착취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로서 눈에 띄었다.”13)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인 1917년 러시아에서이다.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이 성공한 유일한 곳이다. 당시 노동조합은 볼셰비키 당에 지도되지 않았고, 혁명적 행동의 주역도 아니었다.

 

“지배계급(황제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의 정치권력이 빈농과의 동맹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되었고 볼셰비키 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유일한 시기. 그런데 혁명은 볼셰비키가 기존의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는 일 없이 일어났다 (“전달 벨트”로서 노동조합을 활용하지 않고서). 혁명가에게 소비에트와 그전의 기본적인 단계인 공장위원회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조직이 있었다. 볼셰비키는 노동대중과 군인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동시에 볼셰비키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단 한 곳도! 확실히, 없었다. 1917년 전후 러시아에서 노동조합에 의해 공개적으로 수행되었던 몇몇 반혁명적 활동보다 더 적었다. 예) 철도 노동조합은 반혁명적 구조위원회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군대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우편 및 전신 노동조합은 스몰리 협회와 교신하여 볼셰비키를 방해하였으며 은행 노동조합은 혁명 조직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파업을 선언하였다.”14)

세 번째는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과 대규모 공장점거가 잇따랐던 1919~20년의 “붉은 2년” 동안이다. 토리노와 밀라노 등지에서 타올랐던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 상황에서 이탈리아사회당은 손 놓고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또한 이들과 함께 투쟁의 확산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혁명적 기회를 유실했고 뒤이어 반동적 공세를 초래했다. 붉은 2년에 이어 끔찍한 검은 2년이 뒤따랐고,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으로 반동의 최고조에 달했다.

 

“최근의 사례는 “붉은 2년” 동안 이탈리아노동총동맹 [CGdL] 의 행동이었다. 공장점거가 한창일 때, 계급투쟁(적어도 단순한 요구의 영역에서라도)을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 대신 이탈리아노동총동맹은 이탈리아사회당과 함께 확실한 반대를 했다. 그들은 공장에서의 시위를 고립시켰고 동시에 금속노동자의 쟁의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지올리티(Giolitti) 정부에 제출한 문서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이전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산업의 정확한 상태, 그들의 재정 및 기술적인 작업에 대해서 가능한 한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규제의 실행에 기여하는 노동조합의 소산인 공장 대표자를 통해서, 직원에 대한 고용과 해고를 통제하고 따라서 필수적인 규율과 함께 작업장 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을 장려한다.”15)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은 그들의 개량주의적 지도부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핵심은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개량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혁명적 관점에서 명백하게 혹은 잠재적으로 혁명기였던 1917년과 “붉은 2년”의 역사적이고 중요한 순간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1920년대 이후 코민테른이 반혁명의 도구로 전락하여 노동조합을 장악했지만, 이전의 혁명시기 노동조합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도되거나 공산주의 강령과 일치하는 혁명적 행동을 한 경우는 어떠한 곳에도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며,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의 관계 설정의 토대이다.

 

스탈린주의와 노동조합

 

1930년대 노동조합은 자본의 보조적 기관으로서 자신의 잠재적 특성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스탈린주의였다. 서구에서 노동조합의 반동적인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상황의 악화는 러시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진행된 이래 예전의 모든 부르주아 세계는 그것으로부터 착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36년 이후로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를 약화시키면서도 실제로는 착취의 구체화를 강화하는 거의 모든 수단은 스탈린주의 러시아 안에서 그 모델을 찾았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 안에서 자본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노동조합에게 매우 강한 힘을 주면서도, 착취를 근본적으로 강화하여 자본가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 결국, 노동조합의 본질적 운명을 폭로하게 된 셈이다.

 

“정치적 권리와 공장 안팎에서 모임을 개최할 권리에 대한 완전한 억압; 고용주에 의해 강요된 초과노동이나 공식적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기본급; 고용주의 결정에 따른 징계수단이나 벌금, 고용주는 또한 공장 법규를 명령한다.; 시간동작연구와 무수히 많은 통제, 일한 분량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 기술적“자격”과 임금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내에서의 위계적 분화; 오직 자본에게만 이익이 되는 단체협약, 생산자들의 손해로 향하는 끝없는 생산성의 향상, 법에 따른 혹은 실제적인 파업금지 ; 짧게 말해, 서구에서 노조조직을 점점 더 부정적인 조직으로 이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1930년대 러시아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자본과 노조에게 영향을 주었다.”16)


다른 어떤 부르주아지보다도 스탈린식 관료주의는 노동 주기의 가속화와 최대한의 직업분류로 프롤레타리아를 가르고 나누어 착취를 증대시켰다. 러시아에서 노동조합과 관료주의는 그들의 서구식 상대방을 제압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 관리자는 노동하고 있는 그들의 동료에 대한 착취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은 노동자의 기본급을 능가하며 그들의 팀 안 노동자들의 숫자 비율에 따른 보너스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임금이 보통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부터 증대되는 것을 보며 이 착취를 증가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의 관리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노동에서 그들의 동료들의 적으로 변한다.”17)

1939년 통과된 노동법은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의 임금을 특징화시키는 기본적 특징은 전문노동자와 비전문 노동자 사이의 임금에 서열화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보수로써 소부르주아의 서열화는 사회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수년 동안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는 그치지 않고 서열화와 싸웠다.

 

수년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맑스 사상의 충실한 표현으로써 임금노동을 통한 산업발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반대로 맑시즘은 임금노동의 폐지와 사회의 경제적 서열화의 폐지, 모든 개인적 요구의 무제한적 만족의 폐지, 개인적 집단적 만족에 필수불가결한 위대한 자유의 폐지를 확립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혁명적인 어떤 것도 현재의 역사적 고비에 실현될 수 없다.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안에서의 임금차이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직접시장관계에 의해 성립된 조건이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임금격차는 헌법에 따라, 원칙이라는 상태를 확보했으며 결국 이것에 대한 투쟁은 범죄가 된다.”18)

한편,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보다 파업할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서구에서 사실상 이러한 권리는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그들의 대표, 즉 노동조합이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 일어나는 파업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조나 국가와의 제휴를 맞이하게 된다. 종종 노동자들의 직접적 패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에게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렇다. 1936년의 프랑스의 혁명적 파업이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실패한 이후로, 거의 모든 나라는 파업이 노동조합에 의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19)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파업은 노동조합에게 위임되었다. 그뿐 아니라 계급투쟁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일상적 관계 안에서 노동조합은 둘 사이의 완충장치로서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노동자를 자본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을 돕는 앞잡이로서 나타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도 서구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주적 투쟁이 아닌 노동조합에 의해 독점되어 버린 자본에 대한 노동의 모든 투쟁의 표현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분명히 드러난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윤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노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희생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해서, 곧 다음 말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들의 몫을 나누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정부와 노동조합 사이, 심지어 직접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중재자와의 사이에서의 협상이 되었다. 문제는 결코 ‘희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나 분명히 ‘어떻게 희생의 도입을 조직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대본의 마지막 행동은, 수백 번 연기되었던 것으로, 언제나 똑같았다. 국가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에 의한 새로운 희생이 그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승리했다며 외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 없었더라면 더욱 나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3. 소결 : 68 이전 과거 노동조합의 특징

 

과거의 노동조합들은 많은 점에서 오늘날과는 달랐지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노동조합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중재 기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형식에서 필수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역할의 발전은 노동조합이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으며, '제도적' 노동조합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은 언제나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 그것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둘째, 노동조합은 대표단과 대의권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노동조합의 초기 관료화의 과정은 단순했지만, 이것은 노동조합의 실제 활동의 중요하고 공식적인 반영이었다. 이것은 결국 공식적으로 노동조합-형태의 특징과 연관된다. 사실상 그것은 관료주의의 조건들을 창출하는 중재와 협상이라는 기능과 결합된 바로 대표단과 대의권이다. 노동조합이 파업과 투쟁을 독점하면서 대의권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노동자 직접행동의 분출과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다. 노동조합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개량주의를 위한 공간일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형태의 본질과 관련 있다. 사실상 자본과 노동 간의 중재 기관으로서, 노동조합의 행동 지형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그것이다. 그래서 제3인터내셔널 시기에 노동조합이 혁명 조직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날 경제 확장시기에 노동조합이 개량과 임금 상승을 얻어낸 것도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었지 중재의 결과가 아니었다. 자본의 공격과 자본주의 주기적인 축적 위기는 노동조합들을 더욱 개량주의로 고착화 시킨다.

 

“경제 위기의 강풍과 역풍 사이에서 노동계급의 노동 및 생활 조건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그 공격이 민족경제의, 자본주의 발전의, 시장 확장의 이해관계 방어를 위한 합의의 관행에 기초하기 때문에, 각각 이전의 “개선” 을 무효화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상에 불과한 그러한 요구의 정식화를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축적의 위기에서, 노동조합은 자본의 경제적 한계를 받아들인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 그 자체가 매일의 계급투쟁에서 주된 장애물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부과한다.”21)


<다음 호에 계속>

 

 

 

<주>

 

1)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3)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5)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6)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7)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8) 위의 글

 

9)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 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10)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11) [노동조합주의], 1936, 판네쿡

 

12)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3)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5) 위의 글

 

16)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7) 위의 글

18) 위의 글

19) 위의 글

 

20)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2005, 국제공산주의흐름

21) [오늘날 코뮤니스트의 과업과 노동조합], 1997,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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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시대 - 국제공산주의흐름

파국의 시대1)


국제공산주의 흐름
 


오늘날 혁명가들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에 반응해야 했던 사람들과 대전 이후 뒤따른 혁명적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이 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비슷하게 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 그로부터 도출된 공산주의 강령과 전술을 다시 고무시키는데 필수불가결했다.


 「국제평론」에 실렸던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련된 연재물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확장에 깔려있는 기본적 과정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이 지구의 전(前) 자본주의의 지역으로부터 그 체제의 진정한 핵심인 부르주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밀어닥친 재난의 귀환을 예측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원제목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을 1915년 감옥에서 썼을 때, 1914년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은 교전하는 양 진영의 노동계급에게 퍼부었던 파괴와 참상 때문에 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배신행위, 즉,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훈련된 국제주의의 전수된 봉홧불인 대다수 사회민주당의 결정이 그들의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191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제2인터내셔널과 그를 구성하는 당의 수많은 회의에서 통과된 전쟁 반대 선언에서 울려 퍼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 학살하는 것을 재가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에 파국이었다.

 

 이는 지금은 서로 다른 국민정당으로 쪼개지고 그 다수가 지도정당으로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를 위한 강제 징병 관료로서 서명하게 한, 인터내셔널의 죽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을 배신행위로 끌고 간 “사회 쇼비니스트” 또는 “사회 애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끔찍한 와해 속에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인 “중도주의자들”은 온갖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평화 정책의 가능성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사회 애국주의자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설 수 없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우츠키의 경우에는, 인터내셔널이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근거로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주 멀어졌다. 이와 같은 트라우마의 시대에 오직 소수만이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의 전쟁 노력을 인터내셔널이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유보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문서를 전쟁 전야에 채택한 인터내셔널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앞당기는 수단으로서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위기를 사용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의 개전시기에 민족주의적 히스테리에 직면하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에서 묘사된 “학살 분위기”는 혁명적 좌파의 훌륭한 투사들까지도 의문과 어려움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보기를 들자. 라이히스타그(Reichstag)에서의 전쟁 채권에 대한 당 투표를 발표한 「독일사민당」 신문인 「Vorẅarts」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닌은 이것이 정치 경찰과 함께 공모한 헛소문이라고 처음에 믿었다. 독일의회에서 반(反) 군사주의자 리브크네히트는 처음에는 당 규율을 벗어나 전쟁채권에 대한 투표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사회민주주의 내의 좌익반대파가 불완전한 개인들의 소수집단이었음을 그녀가 느낌 정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라이히스타그) 대표들의 활동에 맞서는 가장 활발한 행동을 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일관성 없는 인물들(집단)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 칼(리브크네히트)은 하늘의 구름처럼 떠돌아 붙잡을 수 없군요. 프란츠(메링)는 문자캠페인 말고는 관심도 없습니다. 클라라(제트킨)의 반응은 히스테리 같고 가장 어두운 절망인 것 같고요.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려 합니다.”2)


 아나키스트 중에는 역시 혼란과 철저한 배신이 있었다. 덕망 있는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독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프랑스 문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나코-트렌치스트라고 불렸고,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CCTT의 경우에는 특히 애국주의의 매혹이 강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그 이질적 성격 때문에 “맑스주의 당”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뿌리부터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많은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그들이 전에 지녔던 동일한 국제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방어했다.3)

 

 

제국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공공연하게, 재조직화와 재집단화의 작업은 민족주의적 열광과 국가억압에도 불구하고 선전과 선동의 기본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전의 사민주의 좌파 그룹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전쟁이 오랫동안 운동을 붙들어 왔던 가정들을 어떻게 휩쓸어갔는가를 이해하는 투철한 노력, 이론적 재점검이었다. 국가 방어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조심스럽게 선택한, 맑스와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하면서, 반역자들이 그들의 애국주의를 위장한 “사회주의적” 포장을 찢어버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경우에는 러시아 짜리즘이 제기한 반동적 위협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맑스주의 경향의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이론적 탐구의 필요성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취리히 도서관에서 조용히 헤겔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레닌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코뮨(The Commune)」에 최근 실린 논문에서 미국의 맑스주의-인본주의 위원회의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레닌의 헤겔 연구는 그의 멘토인 플레하노프와 (확장해서 그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이 조야한 유물론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헤겔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역사의 진정한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고 주장한다.4)


 물론 헤겔의 기본적인 변증법적 원칙 중의 하나는 한 시대에서의 합리적인 것은 다른 시대에서는 비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특히 플레하노프 같은 사회 쇼비니스트들에 레닌이 응답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 쇼비니스트들(플레하노프가 이끄는)은 1870년 전쟁에서의 맑스의 전술을 인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합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조국을 방어할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있다는 1891년 엥겔스의 성명에 대한 독일의 입장들(Lensch, David 등 집단의 유형)이 그렇다. … 이러한 모든 인용들은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 편에 서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무모하게 왜곡시키는 보기들이다. …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시대의 전쟁에 대한 맑스의 태도를 인용하고,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는 맑스의 언명을 반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언명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맑스를 왜곡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견해를 사회주의자의 견해로 대체하고 있다." 5)

 

 여기에 맑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가 반동적 체제가 되었다는 열쇠가 있다. 전쟁이 그것을 증명했으며 이는 운동의 낡은 전술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와 옛 시대의 위기에 있는 자본주의 특성, 그리고 계급투쟁이 맞닥뜨린 새로운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뜻했다. 좌익 분파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진화의 이러한 기본적 분석은 보편적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은 전쟁으로 이끄는 시기의 제국주의 현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기반으로, 인류가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엥겔스의 언명을 담아, 이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이 전쟁은 야만이다.”고하면서 당면한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이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억제되지 않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서 특정한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낡은 전략은 모든 진보적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고삐 풀린 시대에 민족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민족(국가)의 이해는 제국주의라는 필멸의 계급의 적의 지배아래 노동대중을 몰아넣는 구실로만 봉사할 뿐이다.”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전쟁은 국민국가 스스로 인류진보를 진전시키는데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룩셈부르크와 같은 방향으로 쓰고 있다.

“국민국가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틀로, 계급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국가형식으로 스스로 성장했다."6)


 이보다 더 유명한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처럼 세계 강대국 사이의 유혈적 갈등은 이들 강대국들이 전 지구를 분할하고 제국주의적 먹이는 제국주의 도깨비들 사이의 폭력적인 숙원풀이를 통해 다시 분할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다.


 “검토하고 있는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는 지구의 마지막 분할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분할이 가능하고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이 지구상의 미점령지역의 장악을 완결지었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어 미래에는 재분할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소유자로서 주인없는 지역을 넘기는 대신 하나의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임을 말한다.”7)

 

같은 책에서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를 “기생과 쇠퇴” 또는 “소멸해가는 자본주의”로 특징지우고 있다. 기생적이라는 의미는 특히 영국의 경우 공업국이 지구적 부에 생산적으로 공헌한 경향이 점점 금융자본과 식민지로부터 빨아들인 초과이윤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비판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금융투기의 만개와 몇몇 강대국들의 탈공업화의 증거를 보면 직관의 요소를 담고 있다).  쇠퇴의 의미는 (레닌은 성장의 절대적 정체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으로부터 독점으로 기우는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더 고도의 생산양식으로 그 자리를 양보할 필요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라는 저술은 수많은 약점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는 겉으로 드러난 징표들의 기술에 가깝다. (“(제국주의를8) ) 정의하는 다섯 가지 특징들”은 특정 국가와 블록이 제국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좌파들의 인용구이기도 하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정의했던 것처럼 축적 과정에서의 현상의 뿌리로 다가가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다. 식민지로부터의 초과이윤으로 기생하며 사는 선진 자본주의 중심국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제국주의 기획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 언저리의 “노동귀족”을 매수한다는 견해)는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 형식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커다란 간극을 남기고 있다. 더구나 독점시기(거대 사적연합이라는 의미의)는 무엇보다 전쟁과정을 통해 이미 국가자본주의의 엄청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고도의” 표현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분명히 부하린이 했는데,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시대”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삶의 총체가 무엇보다 경쟁하는 제국주의와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기구에 의해 삼켜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인물 중 하나였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국가에 대한 총체적 대조를 해보면, 제국주의 국가는 그 기능의 복잡성의 엄청난 증가와 사회의 경제적 삶으로의 격렬한 침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전반적인 생산영역과 전반적인 상품순환영역을 지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혼합기업의 중간유형은 순수한 국가규제로 대체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중앙집중화 과정은 더욱 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을 위해 금융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배계급의 상이한 하위집단을 제거하고 그들을 단일한 금융자본주의 집단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거대한 국가기업의 주주 또는 동업자가 되었다. 착취의 보존자와 방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국가는 착취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직접 맞부딪치는 단일한, 집중화된 착취조직으로 전환된다. 시장가격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는 노동력의 보존을 위해 충분한 일정한 배급량을 할당받는다.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관료주의는 그 중요성과 권력이 꾸준히 성장하는 군사당국의 입장과 전적으로 발맞추어 기능의 조직화를 완수한다. 국민경제는 군사적 방식으로 구성되고 거대하고 규율있는 육군과 해군을 가진 국가로 흡수된다. 노동자는 그들의 투쟁에서 이와 같은 괴물 같은 기구의 무소불위와 맞서야 하며 그들의 모든 진전은 직접적으로 국가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범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착취에 대항하는 반란은 부르주아지의 국가조직에 맞서는 직접적 반란의 의미를 지닌다.”9)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와 전쟁경제는 분명히 뒤이은 세기의 근본적 특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괴물의 전능한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부하린은 앞으로의 모든 중요한 노동자투쟁은 국가와 맞서는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일한 깊은 부르주아지 국가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대체하는, 다시말해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구를 “폭발시키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결론짓는다. 이는 기존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데 대한 모든 가정들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뮨의 경험 이후까지도 이러한 가정들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고 이는 점차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적 입장이 되었다. 판네쿡은 1921년 부하린과 같은 입장을 취했고, 부하린은 레닌이 부하린을 아나키즘으로 넘어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응답을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이해할 필요성 때문에 끊임없이 진화하는 변증법에 다시 빠져들었고, 판네쿡과 부하린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결론은 10월 혁명전야에 쓴 「국가와 혁명」에 정식화되었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7)」에는 맑스가 확신한, 경제모순에서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향한 추동을 말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이윤율 저하에 의해 발생하는 압력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시장 확대의 필요성에 인식을 포함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처럼 부하린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적 “지구화”의 과정이 통일된 세계경제를 창조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앞으로 쇠퇴의 길만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전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적절한 임무는 적어도 큰 틀에서는 세계시장의 창조였다. 그리고 그 시장에 기반한 생산의 창조다.”10)

 

 이처럼 맑스주의를 호전적 진영의 어느 하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왜곡시키고, 현상유지로 되돌리기를 원했던 사회 쇼비니스트들과 중도주의자들에 맞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진보적 자본주의는 없고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역사적 의제에 올랐음을 만장일치로 확인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


 역사적 시기의 똑같은 근본적 문제는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고양되는 국제적 물결의 절정의 지점인 1917년 러시아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짜르의 제거가 그들의 근본적 문제의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발견했을 때, 사회민주주의의 우익과 중도파는 옛 짜르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2월을 합법적 혁명으로 주장한 모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의 숙원을 풀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대항권력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맞서 그들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주의가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맑스의 저작물을 빠르게 훑어간 멘셰비키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과 볼셰비키는 역사적인 등넘기 놀이를 하는 모험주의자들의 일당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이 내놓은 응답은 항상 역사의 운동을 총체성으로 강조한 헤겔에 대한 그의 독해와 일치했다. 동시에 그 응답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헌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성숙해야 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출현은 이러저러한 국가만을 검토함으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제국주의 이론이 보여준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구적 체제였으며 그 쇠퇴와 전복의 필요성 역시 지구적 규모에서 무르익는다.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이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었다. 고립된 러시아 혁명은 있을 수 없고 러시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국제혁명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었다. 이는 레닌이 망명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그를 환영하러 나온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한 폭탄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 선원, 그리고 노동자 동지들. 동지들과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 동지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칼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법정소환에서 인민이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맞서 그들의 무기를 들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 동지들의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11)


 혁명적인 국제주의 좌파가 코민테른 1차 대회에 함께했을 때 10월 혁명에 의해 속박을 푼 혁명적 격정은 최고조에 있었다. 1월 베를린에서의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분쇄되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건설되었다. 그리고 유럽, 미국의 일부와 남미는 대중파업이 움켜쥐었다. 그 때의 혁명적 열정은 1차 대회가 채택한 기본 텍스트에 실려 있다. 「독일공산주의당(KPD)」의 창립대회에서의 로자의 연설과 나란히 새 시대의 새벽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위해 싸우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과 의회에의 참여를 통해 자본주의 내부에서 조직하는 작업은 근본적 존재기반을 잃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그 흔적 속에 남겨진 경제적, 사회적 혼돈으로 나타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위기는 소비에트로 조직된 권력을 위한 직접 투쟁이 현실적이며 긴급을 요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강령은 식민지와 반(半)반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유효했다. 더구나 이러한 새로운 최대 강령은 이전 시기동안 노동계급을 “대표”했지만 1914-17년 전쟁과 혁명의 검증이라는 역사적 검증이 적용되자마자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한 조직과 완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개혁주의자,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우익이 아닌 자본의 시종으로 규정되었다. 1차 대회에서의 논쟁은 초기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전투의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가장 대담한 결론에도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의 경험이 다소 다른 길을 걸었지만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이 더 이상 단순히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톱니로써 직접적인 반혁명의 장애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공장과 거리에서 조직의 평의회 형식을 통해 밖에서 조직화되고 맞서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독일, 스위스, 핀란드, 미국, 영국과 기타 국가들의 대표들 증언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계급투쟁이 작업장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살아있는 중심부는 코민테른의 공식문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단순히 관련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을 사보타주하는데 사용된 지배계급의 직접적 무기였던 도구인, 의회의 빈껍데기와는 날카롭게 대조되었다. 이는 1917년 러시아와 1918년 독일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비슷하게 코민테른의 “선언”은 민족투쟁이 과거 시대의 산물이고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는 경쟁하는 제국주의적 이해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혁명적 결론은 새로운 시대의 새벽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다수를 따르게 한 것처럼 보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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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대회의 논쟁

  

1914년으로부터의 경우처럼 역사가 가속화할 때, 1-2년은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21년 6월 코민테른 3차 대회 때까지 창립대회에서 보인 혁명으로의 즉각적 확장에 대한 희망은 가장 심각한 타격으로 고통 받았다. 러시아는 3년 동안의 내전으로 소진되었고 적군이 백군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지만, 정치적 희생은 극에 달했다. 소비에트가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상실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혁명”국가의 관료화가 심화되면서 가장 계급의식이 강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목숨을 잃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엄격함과 적색 테러의 파괴적 과잉으로 마침내 노동계급의 공공연한 반란을 자극했다. 소비에트의 부흥과 노동자 군사화와 첵카의 억압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한 크론슈타트 선원과 노동자들의 무장봉기에 뒤이어 3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에 육화된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 운동을 백군의 반혁명 표현으로만 바라보았고 무자비하고 유혈적으로 그 운동을 억압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 기지의 고립 표현이었다. 패배는 패배를 낳았다. 헝가리와 바바리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위니펙과 시애틀의 총파업, 레드 클리데사이드(Red Clydeside), 이탈리아 공장점거, 독일의 루르 봉기, 그리고 기타 수많은 대중운동들의 패배가 그것이다.

 

점점 그들의 고립을 깨달으면서 러시아에서 권력에 매달리는 당과 그 밖의 기타 공산주의당들은 폴란드로의 적군의 진주, 1921년 3월 독일에서의 3월 행동 등 이 혁명을 확산시키는데 처절한 수단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노동계급 권력에 진정으로 필요한 계급의식과 조직의 대대적인 발전 없이 혁명의 속도를 강제하는 실패한 시도였다. 그 동안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깊은 경제적 위기 징후를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을 세계 산업 발전소와 채권자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스스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코민테른 내에서 1920년 2차 대회는 이미 이와 같은 연이은 패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대회에서 배포된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의 발간으로 상징화되었다.1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있는 경험을 드러내는 대신 볼셰비키의 경험, 또는 그 경험의 특정한 유형이 보편적 모형으로 제시되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이후 듀마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혁명적 의회주의”의 전술은 모든 곳에서 유효했고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최근에 형성되어 프롤레타리아 삶의 모든 징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 그러므로 모든 국가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부패한 관료로부터 노동조합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의 정식화와 함께, 이를 거부하는 좌익 공산주의의 경향에 확고한 반대를 밀고 나갔으며 독일의 「통합사회민주당(USPD)」과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당(PSI)」과 같은 당들을 통해 대중정당으로서 공산주의 당들을 설립하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21년은 단기적 성공과 수적인 성장을 위해 원칙과 장기 목표를 희생하는 기회주의로 편향되는 증거를 더욱더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사회민주주의당을 명백하게 비판하는 대신, “그들의 지도자들을 싸우도록 강제”하거나 그들의 노동계급 멤버쉽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궤변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공작정치는 대중을 어떻게든 계급의식화되게 하려는 간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술은 “통일전선” 전술의 선포를 하게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의회에서의 담합을 하는, “노동자 정부”의 무원칙적 슬로건으로까지 나아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배후에는 “소비에트”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와 일시적 타협을 하여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버티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917년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저주받은 비밀외교의 실행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을지라도 말이다. (1922년 “소비에트” 국가는 일 년 후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살상하는 데 사용된 무기를 공급하는 비밀협정을 독일과 맺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고,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되는 퇴행으로의 길을 걷게 되는 자본주의의 현상유지로 통합되는 궤적의 가속화를 의미했다.

 

이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모든 명료함과 모든 심각한 논쟁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러한 기회주의적 경로에 대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응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는 견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1920년의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강령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든 역사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14)

 

같은 해에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좌파의 주장은 의회 선거운동이 이전시기에서는 입증되었지만, 혁명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낡은 실천을 입증시키지 못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적” 목소리조차도 새로운 시대의 특정과 결과를 이해하는 진정한 시도를 했다. 
 

1921년 6월, 7월의 3차 대회에서의 트로츠키가 제출한 세계 정세에 대한 보고와 테제는 신용과 의제 자본으로 뛰어오른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을 보증하기 위해 심대하게 몸살을 앓는 자본주의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을 내놓았다. 전후 회복의 첫 번째 징후를 분석하면서 트로츠키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사실과 호황 자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째로 경제적 원인이 있다. 전쟁 후 국제적 연결망은 극히 단축된 형식이지만 시작되었고 모든 상품 유형에 대한 보편적 수요가 있었다. 둘째, 정치적, 금융적 원인이다. 유럽 정부들은 전쟁 이후 따라와야만 하는 위기에 대한 숙명적 두려움이 있었고 전쟁이 만든 가공적 호황을 동원해제의 기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 정부들은 계속해서 엄청난 화폐량을 유통시켰으며 새로운 공채를 발행하고 이윤, 임금, 그리고 빵 가격을 규제함으로써 동원이 해제된 노동자의 소득을 기본국가기금으로 지급했으며 국가의 가공적인 경제부흥을 괴했다. 이처럼 이러한 간격 사이에 의제 자본은 특히 산업이 침체에 바진 국가들에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이후 자본주의의 전체 생명은 그 자신의 경제법칙을 어기면서 스스로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이와 같은 진단을 입증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 자본주의는 새롭고 더욱 파괴적인 전쟁을 분명히 풀어놓을 것이라는 이해를 심화시키려고 했다.(영국이라는 옛 권력과 미국이라는 떠오르는 권력 사이의 절박한 충돌이라는 연역이 충분한 근거 없이도 넓게 퍼졌을지라도) 그러나 이와 같은 문서에 담겨진 가장 중요한 명료한 사실은 새로운 시기의 도래가 쇠퇴, 공공연한 위기, 그리고 혁명이 동시적임을 의미하지 않았고 1919년에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다”는 원래의 정식화에서 보였던 모호함은 자본주의가 동시에 “마지막” 경제적 위기와 혁명적 갈등의 끊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진전된 이해는 1921년 6월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텍스트 “3차대회의 주요 교훈”에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계급은 생산에 뿌리박고 있다. 계급은 노동의 사회조직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 계급은 더 이상의 존재에 필요한 조건이 생산력의 향상, 다시 말해 경제의 더 나아간 발전과 모순될 때 그 기반을 잃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시기에 부르주아지가 발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살아있는 근거를 잃고 기생적이 된 하나의 계급이 즉각적 죽음으로 내모는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가 계급규칙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각각의 계급은 국가 - 정치기구와 조직의 수단인 군대, 경찰, 당, 법원, 언론 등등의 수단에 의해 스스로 권력을 유지한다. 경제적 기초에 관련을 맺어 “상부구조”를 대표하는 이러한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지배계급은 사회 발전에 대한 직접적 제동장치가 된 후 수년,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권력을 영속화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긴 시간을 견디지만 한물간 지배계급은 그가 지배하는 국가와 인민을 그들과 함께 끌어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쇠퇴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순수한 기계적 개념은 몇몇 특정 그룹의 동지들이 핵심에서 오류를 범하는 이론, 즉, 영웅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수동성의 벽”을 흔드는 주도하는 소수라는 그릇된 이론을 만들게 한다. 투쟁의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의해 수행되는 중단 없는 공격을 말하는 그릇된 이론, 무장봉기의 방법을 적용하며 수행되는 부분 전투를 말하는 그릇된 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론들이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공산주의」라는 비엔나 저널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술 이론들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이처럼 쇠퇴의 징후는 경제적 수준에서의 회복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1919-21년의 패배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혁명의 임박한 순간이 아닌 혁명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할 뜨거운 문구가 있었다. 3차 대회가 채택한 별도의 텍스트인 “전술에 대한 테제”는 매우 정확하게 노동계급의 확신과 자기의식을 세우기 위해 공산주의당들이 방어적 투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밀고 나갔으며, 쇠퇴와 혁명이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이러한 입장은 「3월 행동」의 반(半)반란의 접근방식을 대체로 정당화한 “공격의 이론”을 거부하는 필요성에 입각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이라는 전제 아래 공산주의당이 대중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다소 영구적이고 봉기적 공격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이론은 벨라 쿤과 기타 혁명가에 의해 독일 「공산주의당」 내에서 좌파에 의해 견지되었으며, 이는 이 점에 대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과 그 주위의 세력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았더라도 「공산주의 좌파」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15)

 

 이러한 면에서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선언의 개입은 매우 교훈적이다. 「전술에 대한 테제」에서 “종파적”이라는 딱지에 근거해 보면,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태도는 책임있는 소수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그 시기에 그 개입이 곤혹스럽게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식라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방해와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KAPD는 모든 일정에서 스스로 충실한 부분이었으며 그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한 곳에서 동의의 지점을 인식하는 데 기꺼이 노력했다. 그들은 종파적 태도의 본질인 스스로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6)

 

보기를 들어 세계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다수의 KAPD 대표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재구성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통제를 다시 획득하고 있다는 트로츠키 분석의 많은 부분에 동의했다. 따라서 시맨은 특히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을 잠정적으로 제쳐두는 국제 부르주아지의 능력을 강조했다.

 

트로츠키의 보고와 세계정세에 대한 테제가 대체로 “공격성의 이론”의 편에선 세력에 대한 반박으로 정식화되어 있음을 전제했을 때, 여기서의 함의는 KAPD가 더 이상의 자본의 안정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투쟁이 어느 순간에도 공격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견해의 관점은 수많은 개입에서 명료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세계의 경제 정서에 대한 트로츠키의 발표에 대한 응답에서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어떻게 트로츠키 동지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 모두가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작은 위기와 순환적이고 순간적인 소생이라는 짧은 시기 사이의 관계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대한 역사적 시기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의 부흥과 쇠퇴의 문제를 제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전에 상승하고 있었던 큰 곡선이 지금은 저항할 수 없이 하강하고 있고, 이러한 넓은 곡선 내에서 일반적 하강 속에서 아직 동요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17)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 대한 KAPD의 견해에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쇠퇴의 징후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명의 급작스럽고 명백한 몰락을 의미했다.
 같은 의미로 코민테른의 전술에 대한 헴펠의 해석은 “종파주의적” KAPD가 방어적 투쟁을 거부하고 매순간의 공격적 투쟁을 요구했다는 비난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 행동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어떠한 부분적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개개 행동과 개개 전투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의 이러한 전투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전투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요구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독일과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40-50년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효과에 종속되어 왔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투쟁에 익숙해왔다. 슬로건은 부분적 행동에 상응해야 한다. 보기를 들어보자. 한 기업에서 또는 다른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다.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투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꼴사나울 것이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될 수 있는 정도로, 힘의 균형에 적응해야 한다.”18)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개입의 뒤에는 코민테른이 자본주의 생명에서 새로운 시기와 그에 따른 계급투쟁이 시작됐다는 이해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KAPD의 주장이 있었다. 일시적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에 동의하는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테제에 표현되지 않았던 것은 총체성으로 보인 흥성하는 자본주의의 이전 시기와 비교되는 쇠퇴의 시기의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19)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후로 생존할 것이라는 방식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본은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그 힘을 재구성한다.”20)


 이러한 전망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다음 세기에 체제로서 지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술에 대한 토론에서 헴펠은 코뮤니스트가 특히 전술로서 노동조합과 의회문제를 밀고 나가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관련하여 새로운 시기의 의미를 도출한다. KAPD가 때대로 동질화되었던 아나키스트와 대조적으로, 헴펠은 의회와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전시기에서 옳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옛 노동자 운동의 임무를 회고해 보면, 더 구체적으로 혁명의 발발시기 이전의 노동자 운동을 돌이켜보면, 한 편으로는 그 임무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인 당 덕분에 부르주아지와 관료주의 노동계급의 대표에게 남겨놓은 의회와 기구에 대표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임무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이는 노동계급에게 이득이었고 옳았다. 그들 편에서 보면 노동계급의 경제 조직은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개선하는 과업이 있었고 투쟁을 밀고 나가 투쟁이 끝났을 때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전의 노동자 조직의 임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졌고 다른 임무가 조명을 받았다. 노동자 조직은 더 이상 임금 인상이나 개선을 위해 의회에서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한정되지 않았다.”21)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 머물렀던 모든 노동자 조직이 그들의 혁명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투쟁에서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경험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것은 노동계급이 왜 프롤레타리아 자기조직화의 필요성과 국가와 자본에 직접 대응할 필요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창출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것은 소규모 방어적 파업과 더 넓은 대중파업 모두에게 진실이었다. 베르히만은 노동조합을 국가의 부분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옛 노동조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근본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파괴를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대로 노동조합이 혁명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가 되었음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23)
 

비슷한 맥락에서 샤크스는 대중 정당 개념으로의 퇴행과 사회민주주의 당에 대한 공개편지의 전술을 모두 비판했다. 이들은 한물간 사회민주주의 실천과 조직 형식으로의 퇴행이거나 더 나쁘게는 그들 자신을 적에게 넘겨준 사회민주주의 당으로의 퇴행이었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자에 의해서거나 적어도 승자로 나타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다. 3차 대회 이후 수년 동안 공식적인 공산주의당들은 수백만 노동자들을 명령할 수 있었던 대규모 조직으로 남았다. KAPD는 곧 수많은 요소로 분열되었고 그 중 소수가 1921년 모스크바에서의 대표들이 표현했던 명확성을 유지했다. 진정으로 종파적인 오류가 특히 KAPD의 호르터 주위의 에센 경향이 “제4인터내셔널” (KAI 혹은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세우려고 한 성급한 결정을 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그때 혁명의 후퇴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코민테른의 퇴행에 맞서 싸우는 국제적 분파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민테른의 미성숙한 파괴는 10월 혁명의 본질을 점점 부르주아 혁명으로 거부하는 회귀를 수반했다. “죽음의 위기”의 시기에 임금 투쟁은 기회주의적이라는 KAI의 슈뢰더 경향 역시 종파주의적 견해였다. 다른 경향들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평의회주의”로 알려진 경향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혁명적 전위의 보다 일반적인 약화와 분열의 표현은 증가하는 패배와 반혁명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서의 공산주의당의 유지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산물이었지만 이러한 당들은 파시스트와 민주적 학살자와 함께 그들의 전위성을 등치시키는 끔찍한 특수성을 보였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쇠퇴이론에 뿌리를 내려 혁명의 최고점에 만들어진 산물인 KAPD와 이탈리아 좌파의 가장 명료한 입장은 소규모이지만 고통스럽게 고립된 혁명가 그룹들의 참을성 있는 노력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반혁명의 안개가 걷히면서 이러한 입장들은 새로운 혁명 세대의 출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며 그들은 다음 혁명당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 성과로 남아있다.

 

옮긴이|오세

 

 

<주>

1.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ICC), 「International Review」, 2010, 4th Quarter, 143, 15-21

2. 1914년 말 콘스탄틴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 피터 네틀 「로자 룩셈부르크」, OUP, 1969

3. 그러나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 내의 현재의 가능한 시도들을 더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4. “80년 후 레닌의 헤겔과의 조우: 비판적 평가”, http://thecommune.wordpress.com/ideas/lenins-encounter-with-hegel-after-eighty-years-a-

critical-assessment/

5.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1915, 전집, 21권

6. Nashe Slovo, 1916년 2월 4일

7.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VI, “강대국 사이의 세계분할”, 전집, 22권

8. 역자 주

9. “제국주의 국가 이론에 대하여”, 1915

10.  맑스가 엥겔스에게, 1858년 10월 8일, 「전집」 40권, 347쪽, Lawrence and Wishart

11.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1권, “짜르의 전복”, 15장, “볼셰비키와 레닌”, 296쪽, Pathfinder, 1980 에서 인용

12. 1차 대회에서의 이러한 토론을 더 자세하게 보려면, 「국제평론」 123호 “역사    유물론의 핵심인 데카당스 이론” 제4부를 볼 것.
(http://en.internationalism.org/ir/123_decadence)

13. 우리는 이 텍스트가 호르터의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대한 답변이나 비판없이 쓰여지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14. “거대한 차원의 유전이라는 벼락맞은 인상을 준 엄청난 사회·경제적 효과와 함께, 세계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세계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신들의 황혼]이 가깝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한 부문이었던 주기적 경제 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예기치 못할 정도의 계급적대의 무서운 분출, 모든 계층의 인민의 일반적 참상이라는 사회적 유기체 전체의 격동적 경련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운명적 경고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점증하는 적대감,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이 전에 무관심했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더욱 퍼지는 의식이 해결될 수 없음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의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견디기 힘든 연장은 야만으로의 퇴보인가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인가라는 역사적 대안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내려놓는 혼동을 만들었다.”

15. 보기를 들면 앞의 각주에서 인용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강령의 서문은 자본주의의 마지막이며 명백한 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반란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3월 행동」 동안의 몇몇 KAPD 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보기를 들면 총파업에 참가하도록 미고용노동자를 이용한, 「독일통합공산주의당(VKPD)」와의 무비판적 동맹이라든지, 막스 호엘츠와 기타가 이끄는 “독립” 무장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맺기를 들 수 있다. 또한 3차 대회에서의 헴펠의 개입을 보라(La Gauche Allemande, 41쪽). 여기서 「3월 행동」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는 없었지만 일관성을 상실한 입장인, 정부의 전복이라는 슬로건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못한 어던 종류의 “노동자 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개입에 대한 영문 번역은 www.libcom.org, “interventions by the KAPD at the 3r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21), parts1-5“를 볼 것)

16.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에 대한 헴펠의 태도는 이러한 조류의 진정으로 혁명적 표현으로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종파적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La Gauche Allemande, 44-45쪽을 볼 것)

17. 「La Gauche Allemande」, Invariance, 1973, 21쪽

18. 「La Gauche Allemande」, 40쪽

19. 윗 글, 21쪽

20. 윗 글, 22쪽

21. 윗 글, 33쪽

22. 윗 글, 34쪽

23. 윗 글, 56쪽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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