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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위기와 대안 사회
대안 사회라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는 길이 여러 가지 경로로 열려있다는 뜻을 담고 있거든요. 특히 반(反)세계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라는 상투적인 말로 역사 발전 법칙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나는 맑스주의자로서 이른바 “대안 사회”는 코뮤니즘(공산주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노동운동 진영이 많이 쓰는 말은 “좌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부르주아 진영에 속하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도 국민의 힘에서는 “좌파”라고 높여주잖아요. 우리에게는 오직 사회주의자,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강연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를 도표로 그려봤습니다. 동지들은 그 역사를 따라가면서 내 이야기를 들으면 한눈에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도표를 따라가 보죠. 가로로 보면 연도가 1848년부터 2009년까지 되어 있는데 이 연도가 다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로를 보시면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를 설명하는 용어가 첫 번째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개념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가로와 세로를 따라가면서 자세하게 풀어나가죠.
자본주의가 위기가 있다, 또는 자본주의가 내리막길이다,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있다는 표현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또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가 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지난번 세계자본주의 위기를 경험하셨잖아요. 그런데 요즘 또 무슨 주식 값이 오르고 미국 경기가 좀 나아지는 것 같으니,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난다, 잘못된 환상이 유포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와 있다는 걸 설명하려는 거예요.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가는 경제가 나쁘다 좋다 이런 식의 말과 해석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거의 목숨을 다했다는 거죠.
맑스, 「코뮤니스트 선언」
1848년이 왜 중요한 해냐면, 맑스라고 하는 사람이 「코뮤니스트 선언」이라는 책을 낸 유명한 해입니다. 이 책은 필독 교양서입니다. 옛날에는 이 책이 금서라고 해서 숨기고 몰래 보고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교양서입니다. 그러니까 맑스를 얘기하지 않고서 자본주의와 코뮤니즘 얘기를 할 수 없게 돼 있는데,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맑스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무튼, 출발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거지요. 160년 전에 맑스는 ‘코뮤니스트 선언’을 합니다. 세계 역사를 그렇게 본 거고 혁명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결국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을 건설한다는 책을 쓴 것이 1848년이에요.
그래서 맑스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거고요, 어떤 다른 이론을 가지고도 자본주의 문제를 얘기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도표에서 1848년 밑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상승기 그다음에 쇠퇴기라는 말이 쓰여 있잖아요. 자본주의의 역사가 더 오래됐지만, 봉건제 이후의 자본주의가 계속 발전하고 성장한 시기를 상승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상승기가 언제까지냐 하면 1914년이에요. 1914년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입니다.
봉건제 때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사회였으니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이 부르주아혁명으로 만들어지고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상승했다는 거지요, 계속 생산력이 발전하고 계속 발전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상승하면서도 부침이 있어요. 호황기가 있고 불황기가 있고 호황기가 있고 불황기 있고 이런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뭐라고 부르냐면, 부르주아 경제학 쪽에서는 경기 변동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맑스 이론에서는 공황이라 그럽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만일 2009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출발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를 공황의 측면에서 얘길 하면 ‘80년 만의 대공황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29년의 대공황이 80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공황은 10년마다 한 번 씩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10년이 주기에요. 공황 주기설이라 그러죠.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상승하면서도 주기가 계속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추세는 상승이라는 거지요. 맑스가 살았던 당시는 자본주의의 상승기였고, 그때 자본주의를 자유 경쟁 자본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상승하는 시기가 꺾인 역사적 사건이 1차 세계대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는 의문을 많이 갖는 거지요. 여러분이 흔히 이해하는 전쟁의 원인을 무슨 전쟁광이 있다든지 무슨 인간의 어떤 공격성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전쟁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1차 세계대전도 오스트리아에서 우연히 황제를 암살해서 일어났다고 흔히 이렇게 이해하잖아요.
1차 세계대전 의미, 자본주의 내리막길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자본주의가 계속 생산력을 발전시켜 왔는데 더는 발전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통해서 파괴하고, 파괴한 것을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생산력을 다시 유지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1914년만 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 전체에서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있었던 유럽에 있는 나라들 하고 자본주의의 바깥에 있었던 식민지들이 있어요. 그 당시에 이 나라들을 자본 외적 세계라 그럽니다. 자본주의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존재했던 나라들에 대해 침략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는 거죠.
1차 세계대전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더는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바깥에 있는 나라들을 약탈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자본주의는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자본주의 쇠퇴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1914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1차 세계대전은 단순한 1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더는 발전 상승하지 못하고 계속 내리막길로 가는 그 시점이었고, 전쟁은 결국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자본주의 바깥에 있었던 식민지국들을 약탈하고 정복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다시 한번 상승시켜 보자고 하는 움직임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자본주의 위기가 왔을 때 자본주의는 그걸 모면하는 방법이 있어요. 망하지 않고 계속 살아남는 방법이 있는데, 살아남는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일으키거나 히틀러 같은 파시즘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왜 안 죽는가? 안 죽는 이유가 있지요.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을 야만의 생태로 몰고 가고 전쟁을 통해서 모든 노동자를 죽입니다. 전쟁터에서 누가 죽습니까? 다 노동자가 죽어요. 노동자가 전장에 내몰리는 거고, 실제로 부르주아 자본가들은 죽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들끼리 총 쏴서 한두 명 죽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전쟁이라는 것은 노동자들을 살육하는 마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거예요. (노동계급에 필요한 유일한 전쟁은 계급전쟁!) 노동자를 살육의 마당으로 몰지 말라 우린 죽지 않는다 이런 거지요. 노동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노동 강도에, 실업에, 구조조정에 죽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살기 위해서 일으키는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못 된다는 거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 가지 면으로 노동자를 죽이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죽이고, 그다음에 육체적으로 죽이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지요. 그리고 또 공장에서 산재로 목숨을 잃고, 투쟁하다가 분신하고 말이죠.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노동자의 대량 학살과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본주의인 거고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어쨌든 1차 대전 이후에 자본주의는 계속 내리막길인데,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부터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했는데 이 독점자본주의를 우리가 흔히 제국주의라 부릅니다. 제국주의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단계지요. 그것이 쇠퇴기가 시작되면서 발전된 자본주의 형태로 나아가게 됐음을 얘기하는 거예요.
노동자를 전쟁터로 내몬 사회민주주의
그런데 1929년이 대공황이고 1917년이 러시아혁명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유럽에 많은 사회주의 세력이 있어요. 그런데 사회주의자는 당연히 전쟁을 반대해야 합니다. 노동자를 죽음터로 몰아내는 거니까 당연히 전쟁을 반대해야죠. 그런데 이 당시의 사회주의 세력들은 전쟁을 찬성한 겁니다. 이른바 애국주의라 그러는데 자기 국가의 깃발을 들고 모든 노동자를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로 몰아넣습니다. 이거는 자본가만 그런 게 아니라 이때 사회주의 세력들이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때 전쟁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전쟁터로 몰아넣은 사회주의 세력을 요즘 표현하는 대로 사회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지요, 말하자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세상을 자연스럽게 모순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면서 건설할 수 있다는 이런 주장이에요. 다른 말로 혁명 없이 대안 사회를 만든다는 겁니다. 혁명을 통해서 대안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사회주의입니다. 혁명을 통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개량이라고 얘기하지요. 조금씩 조금씩 뭔가 개선하면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나가면 사회주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사회민주주의라고 해요. 우리나라에 그런 세력들이 있다는 거지요. 보기를 들면 진보당, 정의당이 그럴 수 있고, 노동당도 그럴 수 있다고 봐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를 가칭 팔아먹는 세력들이 있다면, 이 세력들은 1차 세계대전 때 유럽 좌파 세력과 비슷합니다.
내가 그래서 좌파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그랬잖아요. 사회민주주의도 좌파라 그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좌파라 부르지 않고 우파의 한 종류라고 부른다는 거지요.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자본주의는 개선이나 개량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뭘 통해서 갑니까? 혁명을 통해서만이 대안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때 이른바 좌파들 오류는 자기 국가의 깃발을 들고 모든 노동자를 앞세워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게 역사적인 과오이고 오류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철저하게 반대해야만 하고 노동자가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혁명이 일어난 데가 러시아였단 말이지요. 실제로는 어디에서 먼저 일어났어야 했습니까? 러시아는 농업 국가란 말이지요. 물론 공업도 조금 있었습니다만, 러시아혁명을 우리는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주의혁명의 성격을 갖고 있으나, 혁명에 성공은 했지만, 결국은 어떻게 됐어요. 러시아 하나만 혁명을 한 거죠. 실제로 혁명은 세계혁명이 돼야 하거든요. 한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봐야 소용없는 거예요. 사실은 어디에서 일어나야 해요? 러시아보다 훨씬 더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는 유럽이지요. 유럽에서 사실 혁명이 일어났어야 했는데 유럽에서 혁명이 실패합니다. 유럽의 중심이 독일이었어요. 1919년에 독일혁명이 실패합니다. 그런데 만일 독일이 성공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세계적인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했겠죠. 그때 뭔가 세계혁명을 통해서 한 단계 나가지 못하고 러시아만 성공하고 유럽은 실패하니까 어떻게 됐어요? 러시아는 올바르게 사회주의로 갈 수가 없었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여러분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게 아시는 분이 많은데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혁명은 사회주의혁명이었습니다만, 실제로 농업 국가였고,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결국은 러시아 사회라는 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유럽의 혁명이 성공했으면 같이 손을 잡고 세계 전체를 확 뒤집어 놨을 거예요. 유럽이 실패해 버리니까 러시아는 어떻게 됐습니까. 포위됐지요. 또 자체적으로도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 국가였고 아무리 레닌 등의 혁명가들이 러시아혁명을 일으켰어도 그건 권력만 잡은 거지요. 러시아라고 하는 농업 국가를 사회주의 코뮤니즘으로 변혁시키지 못했다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회귀해 버렸다는 겁니다.
아직도 러시아를 사회주의로 해석하고 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아요. 분명히 말합니다. 사회주의 아닙니다. 북한도 사회주의 아닙니다. 중국도 사회주의 아니거든요. 이 문제를 올바르게 보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요.
제가 「소련은 무엇이었나」(빛나는 전망, 2009)를 번역했어요. 그 책은 러시아가 왜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소련이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한 두 가지 조건을 얘기했습니다. 유럽혁명이 실패한 것, 그래서 전체로 포위 당한 것, 그러면서도 러시아 자체는 농업 국가였다는 얘기죠. 그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사회주의 사회는 한 군데도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세계 역사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 사회는 한 군데도 없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회주의를 가장한 세력들에게 속지 마시라고 제가 얘기하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북한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쿠바도 그렇고 차베스 베네수엘라도 그렇고, 제발 사기 치지 말란 말이죠. 사회주의 아닌 걸 사회주의라 참칭하면 안 됩니다. 주위에서 혹시 운동하는 사람들이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였다고, 설명하면 분명히 아니라고 여러분은 공격하셔야 합니다. ‘공부 좀 해라’하면서 거꾸로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도표를 보면, 1928년 아래에 반(反)혁명의 시작이라고 제가 썼죠. 1928년은 스탈린이 집권한 해입니다. 스탈린의 소련의 헌법이 만들어진 해가 1928년입니다. 소련을 내가 자본주의라고 얘기했는데 소련이 반(反)혁명적인 자본주의 체제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그 시점은 스탈린이 집권한 1928년이라는 거죠.
물론 그전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지요. 여러분이 잘 아는 레닌은 1924년에 죽었어요. 그럼, 레닌이 살아 있으면 나았겠느냐?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물론 스탈린의 반혁명세력보다 훨씬 나았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쨌든 세계 역사로 보면 스탈린을 추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스탈린주의 변종들이 많아요. 어떤 겁니까. 스탈린의 변종들,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이들을 소(小)스탈린이라 부르죠.
파시즘
그러니까 정확한 의미의 사회주의 입장에서,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우리가 해석한다면 인류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봐야 하고 지금까지 잘못 얘기한 사람들을 야단쳐야 하고 공부 좀 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1928년이 중요한 해입니다. 그런데 1929년이 대공황이죠. 대공황을 지나면서 어떻게 됐어요. 유럽은 혁명이 실패했잖아요. 실패하면서 뭐가 들어섭니까? 이른바 파시즘이 들어섭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지만, 히틀러라는 세력은 자기들을 뭐라고 불렀냐 하면 민족사회주의라고 불렀어요. 히틀러 당의 이름입니다. 파시스트도 사회주의를 썼다는 말이죠. 민족주의의 변형이지요. 그래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 무솔리니 등등의 유럽 전체가 완전히 반혁명이 되는 거예요, 소련도 스탈린이 들어서면서 반혁명이 돼버렸고, 유럽도 혁명에 실패하고 사회주의 맛이 간 세력들은 애국 깃발 들고 전쟁터로 노동자를 내몰았고, 극우민족주의 세력은 정권을 잡고 파시스트 정권이 됐다는 거지요. 이게 유럽의 역사입니다. 1929년 자본주의의 대공황 후에 이루어진 또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반동화와 반혁명적 세력의 정권 장악이 소련과 유럽 양쪽에서 다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는 흔히 얘기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난 사회주의 아니라고 얘기했어요) 스탈린으로 등장한 거고 유럽에서는 히틀러로 등장한 거라는 거지요. 그래서 세계 역사가 묘한 겁니다. 그래서 둘은 마치 다른 것처럼 겉으론 싸우지만, 실제로는 손을 잡습니다. 이쪽은 극우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았고, 저쪽은 반(反)혁명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체제는 뭐에요? 체제 자체는 자본주의고, 또 우리가 얘기하는 국가자본주의였다는 거예요.
결국, 자본주의가 1차 세계대전 때부터 내리막길인데 어떻게 버텼어요? 전쟁을 통해서 또는 파시즘을 통해서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잉여가치를 뽑아낸 거예요, 계속 그렇게 연명했다는 거지요. 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파괴했잖아요. 파괴된 거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뭔가 조금 자본주의에 숨통이 트였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숨통은 뭣으로 유지했습니까? 지금 말씀드린 대로 한쪽은 파시스트 반혁명세력이, 다른 한쪽은 스탈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됐어요. 계속 내리막길이니까 자본주의는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이게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가 다시 연명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쇠퇴를 스스로 막기 위해서 일으킨 세계전쟁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났단 말이죠. 파괴하고 죽여야 살아난다는 거지요.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물질을 파괴하고 인간을 죽여야 그다음에 자본주의가 살아나요. 살아나서 어떻게 됐어요. 자본주의 역사에서 예기치 못한 호황이 일어났어요. 1945년부터 1970년 정도까지 25년이 자본주의의 호황 시기입니다. 나는 지금 쇠퇴기라고 얘기했잖아요. 쇠퇴하는 큰 추세 속에서도 자본주의는 25년 동안 역사에 드문 호황기를 맞았거든요. 25년 동안의 호황기를 가지고 자본주의가 잘나간다고 했지요.
자본주의 25년의 호황기
자본주의가 그러면 이 25년 동안 호황이 왜 벌어졌는가를 해석해야 하는데 그 해석에 대해서는 제 글 번역 「자본주의의 쇠퇴」(빛나는 전망, 2009) 속에 있습니다.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는 나중에 보시길 바랍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엄청난 파괴가 이루어졌지요. 그러니까 다시 복구해야 하잖아요. 파괴된 것의 복구 재건이지요. 재건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다시 한번 숨통을 트인 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정부 적자 재정 적자 부채를 통해서였죠. 여러분이 최근에 우리나라 국가 부채가 어느 정도 늘어났는지 보셨을 거예요. 미국은 물론 더 엄청난 국가 부채를 갖고 있지요. 그 이후에 자본주의가 살아나는 방식은 엄청난 국가 부채를 통해서였습니다.
지금 내가 얘기했지요. 파괴된 시설과 공장의 복구, 또 하나는 엄청난 빚을 지면서 그 빚은 누구한테 가게 돼 있어요? 국가가 지는 빚은 누구 몫입니까? 우리 노동자 몫이에요. 노동자가 벌어서 피땀 흘려서 정부와 자본가한테 대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국가 부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자만 죽게 돼 있어요.
자 어쨌든, 그 25년 동안의 호황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몰핀 주사 맞아서 잠깐 반짝 정도의 모습이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됐어요? 그 25년 이후 70년 초반에 이른바 여러분이 잘 아는 오일 쇼크가 일어납니다. 오일 쇼크는 공황의 한 종류예요. 아까 얘기하는 10년마다 주기인데 오일 쇼크는 중규모 정도의 공황이에요. 대공황 있고 중공황 있고 소공황이 있다면 70년대 초반 오일 쇼크는 중규모의 공황이지요. 이렇게 되니까 다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잖아요. 25년 동안 조금 뜯어 먹을 게 있었죠. 그런데 이 25년 동안에 무엇이 살아났냐 하면 노동자 투쟁이 살아났어요. 그전까지는 노동자가 다 죽었잖아요. 전쟁을 통해서 죽고, 억압 당하면서 죽고, 파시스트한테 탄압 당해서 죽었는데, 2차 대전 끝난 다음에 조금 호황이 와서 얻어먹을 게 많으니까 어떻게 돼요? 노동자 투쟁이 활성화됩니다. 자본주의는 호황기에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고 불황기에 노동자는 움츠러듭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별로 없잖아요? 지금 여러분 투쟁을 보세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지요? 소소한 것들이 있습니다만, 이런 공황기에는 노동자가 움츠러들게 돼 있지요. 여러분은 거꾸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어요. 노동자를 죽게 만들고 죽을 지경이니까 이판사판 붙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는 일어날 것이라고 역으로 해석하는 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아요. 항상 호황기에 먹을 게 있으니까 너 내놔라 이런 거지요.
자본주의가 25년 호황이니까 떡고물을 만들어 놨잖아요. 복지도 만들고 나눠주기도 하고 그랬단 말이죠. 유럽을 중심으로 노동자 투쟁이 활성화됐어요. 노동자 투쟁 이야기는 다시 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자본주의의 호황과 불황과 노동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냐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25년 호황기에 노동자 투쟁이 좀 일어났는데 어떻게 됐어요? 70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자본주의가 자기 모습을 바꾼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먹을 게 많았지요. 우리가 흔히 개량의 토대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자본주의가 흔히 얘기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다고 하죠. 서유럽도 그런 식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이고 미국도 복지국가 모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그 복지국가의 모델이 더는 못 버틴 거지요 못 버티니까 어떻게 돼요? 그러면 자본주의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지요. 다시 노동자한테 베풀었던 거나 나눠줬던 걸 다시 뺏는 거지요. 모든 자본이 노동자한테 양보했던 것을 전면적으로 철수시키고 다시 뺏어버리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가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하잖아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개념이 뭐냐 하면, 지난 25년 동안에 호황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냈던 것을 가지고 다 나눠줬는데 그걸 가지고 더는 유지할 수 없으니까 다시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동자한테 준 것을 다시 뺏어야 하겠다 이겁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에게 줬던 거 다시 뺏는 겁니다. 모든 복지를 삭감하는 겁니다. 우리는 복지도 없지만, 유럽 같은 데는 상당한 복지국가 모델을 유지했단 말이죠. 보기를 들면 실업자라도 얘 셋만 있으면 먹고살아요. 이른바 나눠줄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던 거지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그거 가지고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뺏어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본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70년대 초반 이후에 지금까지 그랬어요.
자본주의의 쇠퇴
자, 이제 보십시오. 이론입니다. 도대체 왜 자본주의가 상승하다가 쇠퇴하고 마지막 단계로 와있고, 왜 대안적인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완전히 철폐하고 노동자가 인간 답게, 노동자가 노동자 답게 사는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느냐는 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란 말이지요. 주장이 아니라 그걸 이론적으로 해명해야 하잖아요. 그 과학을 낸 사람이 맑스라는 사람입니다. 역사 유물론이고 역사 유물론에 근거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론입니다.
자본주의 전에 뭐가 있었어요. 봉건사회가 있었지요. 봉건사회가 왜 자본주의로 가느냐. 그리고 자본주의가 왜 그를 넘어서는 사회로 갈 수밖에 없냐고 이걸 설명해야 하잖아요. 자본주의가 그냥 잘나가는 게 아니라 잘나갈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잖아요. 그것이 역사 유물론인데 간단하게 이렇게만 얘기하겠습니다.
어느 사회가 유지되려면 그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을 우리가 생산력이란 말로 부릅니다. 그 생산력이라는 말은 꼭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에요, 물론 물질적인 게 그 기반이겠죠. 그게 생산력입니다. 그 생산력이 계속 발전해 왔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생산력이 계속 발전하지 않고 정체하고, 오히려 생산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에선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계급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첨예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본주의는 어떻게 먹고 살아요? 자본주의를 얘기할 때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투쟁이라고 보통 이야기하잖아요. 이거 잘못된 이햅니다.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자의 투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사람하고 싸우는 건 줄 알아요. 악덕 자본가가 있으니 때려 부수자고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굉장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냐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법칙하고 싸우는 거예요. 그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법칙이 뭡니까, 자본주의는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이윤이 있어야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때문에 그 이윤을 남기는 법칙을 때려 부수지 않으면 자본주의하고 싸울 수 없는 거예요. 자본가하고 백날 싸워 소용없어요. 자본가는 자본의 법칙에 따르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싸움이 어려운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은 쉬운 건데, 노동자는 구체적인 인간들이고 이 체제가 움직이는 법칙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의 법칙이기 때문에 싸움이 참 어려운 거지요.
사람하고 싸우는 건 쉽습니다. 사람하고 싸우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싸움이 상당히 어려운 거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가, 다시 말해 자본의 대리인인 자본가계급과 그냥 노동력 팔아먹고 피땀 다 뺏기고 연명하는 인간은 노동자들이죠. 힘없는 인간들 노동을 통해서만 살 수 있는 이 인간들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 사이에는 적대적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짐승도 싸우는데 인간은 당연히 싸우는 거지요. 그래서 자본과 노동계급 사이 피나는 투쟁이 격화되면서 생산력이 떨어집니다. 싸우니까 생산력이 오르겠습니까? 이걸 죽이게 만들어야 생산력이 올라가지요. 뽑아 먹히지 않고 싸우니까 자본은 유지를 못 합니다. 노동자가 일하지 않을 권리 그래서 이 사회가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권리가 노동자의 유일한 권리입니다. 노동자의 파업권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권리입니다. 노래 말에도 그런 거 있잖아요. 기계를 멈춰라! 공장을 멈추라고요. 그렇지요. 자본가도 살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살지 못해요. 생산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요. 그래서 이 싸움이 격렬해져서 생산력이 더는 늘지 않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돼요? 늘지 않으면 그 체제는 죽는 거지요 그러니까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떤 체제겠어요?
노동자가 흥겹게 행복하게 그리고 억압 당하지 않고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연대하고 스스로 자유로운 그런 사회가 자본주의는 아니었고 아니잖아요.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노동자 다 죽이는 사회였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선 더는 생산력 증진이 안 되고 계급투쟁이 계속 일어나고 생태계가 다 파괴돼 인류를 파멸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다음 그 사회가 뭡니까? 그것을 우리는 사회주의 또는 한 단계 더 가면 코뮤니즘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그런데 사회주의와 코뮤니즘은 한 번도 건설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1917년에 한 번 해보려고 그랬죠. 결국은 어떻게 됐어요? 안 됐잖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앞으로 오히려 건설할 가능성이 더 큰 거지요. 옛날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굉장히 불균등했어요. 유럽에는 굉장히 선진적인 자본주의가 있고 러시아처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가려는 데도 있고 아주 편차가 컸단 말이지요. 남미 같은 데도 있고, 제삼 세계도 있고, 아프리카 같은 데도 있고, 뭐 이랬단 말이지요. 옛날 백 년 전 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중심부에서는 깨져버렸고 변두리 소련 같은 데서 좀 해 보려다 망해 버렸다는 거지요.
요즘에 자본주의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불균등하지요. 여전히 농업 국가가 있지만, 그 불균등성이 굉장히 줄어들고 있어요. 편차가 크지 않다는 거지요. 물론 빈국이 있고 부국이 있고 이런 편차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자본주의 전체가 작동하는 방식은 옛날처럼 자본주의 바깥에 있는 국가도 없고 다 국가가 자본주의 안에 있고 다 연결이 되어 있지요. 모든 것이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법칙으로 움직이죠.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자본주의에 진행 속도로 보면 계속 내리막길이고 다 죽어가고 있고 그래서 새로운 체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넘어선 대안 사회, 코뮤니즘을 만들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는 게 과학입니다.
그냥 우리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자본주의 분석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지요. 자본주의 분석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그다음 사회에 대한 상을 그릴 수가 없는 거예요. 자본주의도 봉건사회에 대해 철저한 분석을 해보면 거기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지가 나온 겁니다. 그게 자본주의 핵심적 세력이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될 사회는 주인이 누구예요? 지금 자본주의는 주인이 누굽니까? 부르주아 세력이란 말이지요. 자본가계급이지요. 그런데 앞으로의 사회는 누구예요? 그 주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죠. 그런데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갈 때는 주인이 새롭게 부르주아지로 등장했지만, 앞으로 사회의 주인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노동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그런데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착취 당하고 억압 당하고 목숨을 잃어 왔던 이 세력이지요. 이들을 누가 생산해 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생산해 낸 겁니다. 이게 자본주의와 다른 거예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온 것하고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가는 건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은 농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르주아라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고 앞으로의 사회는 자본주의에서 억압 착취 당했던 바로 그 노동자들이 그다음 사회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당연히 노동자가 해방되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니까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과학이고, 맑스가 말한 역사 유물론입니다. 생산관계의 모순이 더는 생산력의 발전을 이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내리막길입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방식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쇠퇴론입니다. 자본주의 쇠퇴론은 1914년까지 상승기, 191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쇠퇴하는 거지요. 한꺼번에 팍 죽는 게 아니에요. 서서히 내리막길인데 중간 25년 동안 반짝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살아남는 방식이 이윤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를 더 학문적으로 표현하면 잉여가치라 이야기합니다. 제가 잉여가치라고 썼잖아요, 잉여가치가 있어야 자본주의가 살아남아요. 그런데 잉여가치가 생산 활동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이 있고 생산된 것이 유통을 통해서, 시장을 통해서 실현되지요. 그러니까 두 가지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잉여가치가 생산되고 실현됩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자본주의가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왜 몰락할 수밖에 없고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과정에 모순이 늘어나고 잉여가치가 실현되는 데서 모순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산되는 데서 나타나는 모순을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이라고 얘기합니다. 이윤이 계속 있어야 자본주의가 버티잖아요. 이윤율이 저하하니까 자본주의가 버텨낼 수 없죠. 그런데 생산된 걸 팔아야 하잖아요. 시장의 실현 과정인데 팔 데가 있어야 하잖아요.
옛날에 1914년대는 팔았어요. 자본주의 바깥에 식민지가 있었기 때문에 팔아먹을 곳이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 식민지 나라들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니까 자본주의 시장은 이미 포화가 됐습니다. 그러면 소비를 진작하면 되지 않냐? 가짜 수요를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거예요. 광고를 통해 가짜 욕구 만들어서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시장은 이미 포화해 있고 이는 결국 이윤율 저하를 심화시키죠.
그런데도 아직 버티는 이유는 뭐냐? 다 포화하여 팔아먹을 곳이 없는데. 중국에 시장이 있고 인도에 시장 있으니 팔아먹을 곳이 많지 않으냐고. 이미 제가 중국이나 러시아나 자본주의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시장이 없는 자본주의지요. 자본주의는 꼭 시장이 있어서 자본주의가 아닌 거예요. 시장이 없는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누가 가지고 있어요. 나라 전체 국가가 가지고 있지요. 국가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지금은 국가가 가지고 있는 시장을 민영화하고 사유화시키니까 중국에서 돈 억수로 버는 자본가들도 수백 만 수천 만 나타나고 있잖습니까.
이제는 국가의 영역에서 민간부문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수요가 있고 팔아먹을 곳이 조금 생겼죠. 종전에 시장이 없었던 데가 시장이 생기면서, 조금 자본주의가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국가가 시장이었던 가짜 사회주의 국가들, 지금 사유화하면서 사적 자본주의로 나가고 있으니까, 옛날보다는 시장이 좀 생겼지요. 그런데 그것도 이제 조금 있으면 시장이 다 포화가 됩니다. 다른 말로 생산에서 이윤은 계속 떨어지고 팔아먹을 곳이 없으니까 안 팔려요. 그런데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생산을 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잉생산이란 말이지요. 계획해서 생산하는 게 아니라 수요 예측해서 무조건 무계획적으로 생산하니까 과잉생산입니다. 과잉인데 팔아먹을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생산의 과정과 잉여가치가 실현되는 시장과는 분리돼 있지 않고, 악순환이죠. 그래서 결국 잉여가치가 있어야 살아남는 자본주의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코뮤니즘은 꿈으로 이룩되는 게 아닙니다.
도표에서 제가 객관주의, 주관주의라고 썼는데 그 뜻은 이런 겁니다. 자본주의를 객관적으로 분석했더니, 붕괴할 수밖에 없는 모순도 있고 자동으로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그 당시에 있었다는 거지요. 이런 입장은 제2 인터내셔널 제3 인터내셔널이 다 그랬는데 이를 객관주의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그런 자연법칙 때문에 자본주의가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다른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경향과 달리 주관주의는 이런 겁니다.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모순만 가지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주인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 당시 아주 유명한 혁명가였던 안톤 판네쿡이라는 혁명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아까 얘기한 이윤율이 저하한다든지 시장이 포화한다든지 그래서 자본주의가 법칙적으로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거지요.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서 자기해방을 했을 때만이 사회주의가 온다는 거예요.
이른바 그 사회의 주체가 되는 계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양쪽 편향을 다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 사회, 다시 말해 코뮤니즘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코뮤니즘은 꿈으로 이룩하는 게 아닙니다. 꿈은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거지요. 머릿속에만 있으면 그건 그냥 관념이에요. 그런데 코뮤니즘은 물질적 필요성입니다. 꿈으로 되는 게 아니라 물질적 필연성이죠. 그 물질적 필연성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노동계급이죠.
자본주의의 두 축인 자본과 노동계급의 투쟁을 계급투쟁이라고 얘기하는데 계급투쟁이 격렬해졌을 때 결국 선택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1914년 1차 세계대전 때 선택은 뭐였어요. 전쟁이냐? 사회주의혁명이냐? 입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을 전쟁으로 끌고 간 세력이 누구였어요? 사회민주주의 세력, 개량주의 세력이었고, 혁명이라고 얘기한 세력이 혁명세력입니다. 그런 혁명세력이 모여 만든 조직이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전쟁으로 가버리니까 한 축이 혁명을 일으켰지만, 세계혁명은 결국 실패했죠. 그리고 스탈린이 1928년 권력을 잡으면서 반혁명이 시작됐습니다.
그다음에 이 반혁명에 대한 대립 거부 투쟁이 잠깐 보였던 게 68이었고,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앞으로 올 것은 무엇입니까? 지구는 거의 편차가 없이 하나의 자본의 법칙이 지배하는 총체적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죠. 그럼 여기서 오로지 있을 것은 뭐예요? 다시 한번 사회주의혁명이냐? 야만이냐? 의 선택이에요. 인류의 선택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본은 어떻게 하겠어요. 자본 쪽에서 보면 전쟁을 일으키겠죠. 자본의 선택은 전쟁과 파시즘이고, 우리의 선택, 즉 노동자의 선택은 우리를 야만으로 내모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통해서죠. 그래서 새로운 대안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정말 짐승 같은 야만의 시대로 우리를 몰고 갈 것인가. 이게 우리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이 선택이 100년이 지나 다시 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이 선택이 있었어요.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혁명을 선택한 세력은 러시아에서 성공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중간마다 선택의 기로가 좀 있었지만,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죠. 그런데 다시 한번 백 년이 지났잖아요.
또 한 번 인류의 선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고, 그 선택은 다시 전쟁인가 혁명인가입니다.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선택이지요. 이걸 누가 선택해요? 노동계급이 선택하는 겁니다. 고용이 불안하니까 좀 먹고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편안하게 살겠다는 게 노동자가 아닙니다. 그것 하려고 노동하는 거 아니에요. 더는 죽지 않으려고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죽지 않으려고, 또 인간답게 살려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선택이지요.
진정한 노동자의 삶은 자기들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그게 노동자의 삶이죠. 그거 못 만들면 죽어야죠. 솔직하게 얘기하면, 야만으로 죽든지 조금 배불러 죽든지, 그렇게 사는 것은 죽은 겁니다.
혁명 전략, 당과 평의회
어쨌든 제가 보기엔 자본주의 역사에서 다시 한번 이런 선택의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제가 당장 몇 년 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잘 분석하셔야 해요.
그런 점에서 계급투쟁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투쟁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 걸 얻어 내겠습니까? 노사 협조해서 어떻게 얻어 내겠습니까? 자본가들이 줄 거 같아요? 2차 대전 이후에 조금 잘나갈 때 20 여 년 동안은 좀 줬어요. 요즘은 줄 게 없는데 뭘 주겠어요? 뺏는 거지요. 있는 걸 뺏는 겁니다. 고혈을 짜고 죽여서 이래서 뺏는 거지 줄 게 없다는 거죠. 그래서 계급투쟁 밖에 없습니다. 협조해서 되는 일 없습니다. 아니 협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자본주의에요. 진정으로 협동하고 연대하고 같이 잘살자는 사회는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그걸 못하게 만드는 사회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 법칙을 깨뜨리는 새로운 사회만이 진정으로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그런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론도 있고 사상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동자도 무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무기가 뭡니까? 무기를 혁명 전략이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는 대중들의 자기 조직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걸 노동조합이라고 그럽니다. 또 하나는 뭐에요 정치세력의 자기 조직이 있었어요. 그게 혁명당이에요.
그래서 두 축이지요. 대중에게 자기 조직의 축이 하나 있었고 이른바 혁명 세력들에게도 자기 조직의 축이 있었어요. 이 두 가지 무기를 가지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뚜벅 뚜벅 오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지금 달라졌잖아요. 혁명당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정치세력은 당연히 당이 있어야 하는 건데 정의당, 진보당, 노동당은 말이 당이지 그건 당이 아니에요. 우리가 당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혁명당만 당이라 그럽니다. 혁명을 할 수 있는 정치조직만 당이라 그러지 나머지는 자본주의 당 중의 하나에요. 개량주의 수준의 당은 혁명세력의 전략이 아니지요. 그건 누구의 전략이에요? 그건 자본의 전략입니다.
우리에게 혁명당이 있느냐 없느냐는 이게 앞으로의 과제에요. 세계에는 뭐가 있어야 해요? 세계혁명당이 있어야 해죠. 이미 1919년에 만들어졌던 세계혁명당으로서 제3 인터내셔널은 망하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진짜 우리가 세계혁명당을 만들어야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입니다.
그 다음에 노동조합이 뭐로 달라졌습니까? 소비에트죠. 옛날에는 노동조합이 중요한 전투적인 조직이에요. 파업도 하고 협상도 했던 주도세력이었죠. 이 노동조합이 어떻게 됐습니까? 1차 대전 당시에 유럽을 보면 노동조합이 다 맛이 갔어요. 그러니까 이때는 당과 노동조합 양쪽이 다 맛이 간 겁니다. 혁명당은 사회민주당 개량주의 정당으로 맛이 갔고, 그다음에 노동조합은 어떻게 됐어요. 역시 조합주의 개량주의로 맛이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더는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투쟁 기구가 아니라는 거지요. 노동자를 조국의 깃발을 들게 해서 전쟁터로 몰아낸 것도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조직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이미 백 년 전에 노동조합은 이른바 혁명 전략으로서 자기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노동조합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조합 역사를 보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맛이 갔잖아요? 유럽에서는 100년이 걸려서 천천히 맛이 갔는데, 여기는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말만 양치기 파업이나 하고 진짜 싸움 다운 싸움 한번 해 본 적 있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 대중 기구를 전 이렇게 봅니다. 노동조합이 아니라 파업위원회, 대중총회와 같은 거죠. 파업이 물론 매번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앞으로는 파업이 계속 있어야 하겠지요. 자본주의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그래서 파업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일상화되는 파업위원회, 노동자가 아래로부터 중심이 되어 만드는 조직이지요. 이게 노동자평의회고 이게 소비에트입니다.
우리가 관료화된 노동조합을 어떻게 넘어 섭니까? 위에서 내리박기식 이런 게 아니고 아래로부터 스스로 만들고 투쟁해 나가는 이런 자기조직 이런 모습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맹아적인 것들이 파업위원회나 대중총회나 이런 걸로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것이 지역으로 보면 지역평의회를 만드는 거죠. 이런 조직이 됐을 때만이 혁명적인 무기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또는 조합 바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용노동자가, 실업노동자가, 여성노동자가어떤 형식적 틀에 갇히지 않고 전면적 싸워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싸우는데 공장 안에서만 싸우면 되겠어요? 공장 안에서 싸우지만 진정한 싸움은 큰 마당에서 싸우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전체 노동자를 묶어 낼 수 있는 조직이 뭡니까? 우리는 새로운 대안을 상정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나가는 끊임없는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자기 조직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런 얘기 했을 때 제3 노총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혁명적인 제3 노총 만들면 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상으로 대중조직을 투쟁 조직화시킬 수 있겠느냐는 고민들을 사실은 노동조합 안팎에서 해야 합니다. 동시에 혁명세력들이 같이 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혁명 전략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하고 혁명당 건설과 노동대중들의 자기 조직화 과정이 어깨동무하고 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무기를 갖고 만드는 거지, 소리 질러서 되는 것도 아니고 교육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을 내겠습니다.
제가 자본주의 역사의 중요한 연도를 얘기하면서 쭉 말씀드렸고, 왜 이렇게 죽어가고 사멸하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인가를 설명하는 이론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대안 사회, 코뮤니스트 사회를 만드는 주체는 우리 노동계급이라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계급이 혁명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무기를 가져야 하겠냐는 걸 말씀드렸고 이제 결론적으로 얘기합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그냥 경제적 위기라고 하지 않길 바랍니다. 맑스주의 내에서는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이런 걸 구분하질 않아요. 개념을 기능적으로 구분하질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회를 분석할 때 정치 따로 있고 경제 따로 있고 문화 따로 있고 사회 따로 있고 이렇게 분석하는 게 있잖아요. 이건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분석이에요. 맑스주의에서는 그렇게 분석을 안 합니다. 위기도 경제적 위기 이렇게 얘길 안 해요. 자본주의 위기지요. 자본주의의 한 측면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 위기인 거죠. 총체적 위기는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표출됩니다. 물론 경제적 측면도 중요하기는 하지요. 그런데 결국은 어떤 점에서 파탄입니까?
인류의 문명적 관점과 대안 사회
우리는 문명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인류의 문명, 이 자본주의 문명 자체가 총체적으로 파탄이라는 거예요. 전체 문명적 관점에서 위기이기 때문에 결국은 총체적인 대안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경제, 사회, 환경, 보건까지 모든 영역에서 엄청나게 복잡한 모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화하는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은 새로운 축적의 순환이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50년 넘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실패했고, 오직 전쟁만이 살아 있는 자본과 죽은 자본을 파괴함으로써 이 새로운 순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50개 이상의 분쟁은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빈곤, 전쟁, 기후위기, 생태파괴 등 총제적 위기는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없고, 이걸 오직 해결할 수 있는 사회는 코뮤니스트 사회밖에 없음을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코뮤니즘만이 인류의 유일한 대안이며 그 주체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게 오늘의 결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가장한 또는 참칭한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소련이고 중국이고 북한이고 자신들이 사회주의라고 하더라도, 저는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를 참칭했다고 제가 비판한 거예요. 오히려 자본가계급이지 노동계급 편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세력들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노동계급을 헷갈리게 하지 말라, 마치 자기네들이 노동계급 편인 것처럼 하지 말라 위장하지 말라 이겁니다.
저는 이것이 앞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봐요. 참칭한 부르주아지와의 투쟁 다음에 각종 민족주의와의 투쟁이 중요합니다. 참칭한 사회주의는 다 민족주의거든요. 스탈린주의는 소련의 민족주의, 히틀러는 독일의 민족주의 이런 거예요. 김일성주의는 북한의 민족주의, 모택동은 중국의 민족주의라는 거지요.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민족주의, 카스트로는 쿠바의 민족주의라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해방투쟁이 있었고, 그 투쟁에 역사의 시기가 특수했어요. 그런데 대체로 이런 민족을 내세운 투쟁은 어떤 혁명이었냐면 다 부르주아혁명이었습니다. 그런 혁명이 사회주의혁명인 적이 없어요. 자신들은 사회주의혁명이라고 위장했지만, 다 부르주아혁명이에요. 그래서 식민지를 해방시켜 부르주아 국가를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세력은 각종 민족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노동계급에게는 조국이 없다. 이게 중요한 말입니다. 노동계급에게는 자기 나라가 없단 말이지요. 자기 조국이라고 깃발 들고 다 전쟁터로 몰아 넣는다는 거지요. 현재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자기 조국이 없는 겁니다. 이를 “노동자 국제주의” 그러잖아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그냥 나온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걸 다 극복했을 때 우리가 단결할 수 있지요. 아니면 자본가들이 민족으로 갈라치고, 국가로 갈라치고, 성으로 갈라치고, 직업으로 갈라치고, 현장으로 갈라치고, 정규직 비정규직 갈라치잖아요? 이 갈라쳐 온 전략이 자본의 전략이에요.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지요. 이게 자본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자본이 살 수 있으니까요. 계속 갈라치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이 어려운 거지요.
자본은 하나의 법칙이기 때문에 단결돼 있어요. 그 법칙으로 다 단결돼요. 사람으로 단결하지 않고, 법칙으로 단결하는데 노동자는 사람이니까 단결이 어려운 겁니다. 남녀가 다르다, 나이가 다르다, 정규직 비정규직이 다르다고 다 갈라치게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노동자들끼리 싸우는 거고 단결된 투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특별히 세계적으로 보면 국가와 민족으로 갈라칩니다. 그러니까 민족을 팔아서 노동자끼리 싸우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노동자를 민족의 이름 앞에 총알받이 시키지 말라는 거죠. 우리는 그런 점에서 노동계급이 조국이 없다는 철저한 노동자 국제주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양측의 착취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합니다. 노동계급이 전쟁의 고통과 대학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민족주의를 비롯한 양측의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과 국경을 넘어 투쟁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강요하는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대량학살과 전쟁을 끝장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 인류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발전시키는 진보적 역할을 중단했습니다.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임금 노동, 화폐, 국가가 없는 새로운 사회, 바로 코뮤니즘입니다.
사실 오늘 강연 내용이 조금 어렵지만, 나름대로 쉽게 도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어쨌든 몫은 여러분 몫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자본주의를 아주 깊이 파고들어 가고, 그다음에 진정한 우리 대안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드린 거고, 가짜 대안 사회는 없고 진짜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대안이 여러 개 있는 게 아닙니다. 선택지가 여러 개 있는 게 아닙니다. 유일한 대안은 하나, 코뮤니즘밖에 없습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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