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의식의 문제 : 당 계급 토론을 위한 기초
프랑스 코뮤니스트 사이 일련의 토론 부분을 담은 글이다. 특별히 이 글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내부 분파로 부르는 동지들이 제출한 문서에 대한 답변이다. 그 분파가 ICC에서 탈퇴한 지 몇 년이 지났다. 글 끝에 실린 인용문은 그 내부 분파의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의식의 문제는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문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만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후의 혁명들의 실패, 특히 러시아혁명의 실패라는 불행한 유산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 맞서는 강령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당에 대한 모든 생각이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볼셰비키(나중에 코뮤니스트)당이 자본주의 반(反)혁명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1917년 지주, 자본가,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협력자들의 임시정부를 전복하기 전과 전복 과정에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명료한 표현으로서 수행한 역할을 흐려버렸기 때문에 사실이다. 당이 점차 계급의 기반을 대체한 러시아 내전(1918-21)에서 벌어진 일들은 당이 사회주의를 위한 선전을 확산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란으로 이끄는데 계급의 가장 의식적이고, 선진적이며, 명료한 부분이라는 전반적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게 만들었다. 당이 봉기를 이끌고 당의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강령으로 계급에 되돌아간 인간의 대대적인 변혁만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노동계급의 절대 다수의 작업일 수 있고 또한 말 그대로 사상의 생산의 주인(자본가계급)이 극복되는 시작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확장은 「혁명적 전망」(21-30쪽)에 게재된 ‘계급의식’에 대한 연재물에 실려 있다. 이는 수정되어 소책자로 재출간될 것이며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에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 중에 있다.
의식의 문제는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분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방법론적 정식화의 실질적 차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에 그 차이가 존재한다면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을 여기서 다시 서술하는데 논의를 한정하려고 한다.
첫째, 혁명, 혹은 코뮤니스트 의식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개념은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 ‘즉자적’ 계급의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깨달음과 그 착취를 끝장내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코뮤니스트 의식은 자본주의 생산과 분배의 관계가 부과한 예속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극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의 길이, 수단, 투쟁의 형식, 전술, 전략과 정치 강령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인식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코뮤니스트 의식은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고 있는 정치적 형식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맑스의 말을 빌리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떠밀린 프롤레타리아트가 당면한 이해를 방어하는 기반 위에서 싸울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싸워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역사는 또한 투쟁의 도구를 줄 수 있고 계급투쟁의 궁극적 결과인 봉기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총체로서 완전한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를 풀 수 없고 혁명당이 그 안에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정치 강령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올바른 유물론적, 변증법적 해석으로부터 관념적, 기계적, 평의회적, 경제주의적 입장을 구별해 내는 것이야말로 의식의 문제이고 당과 계급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본질적인 문제는 특정한 수준에서 정치적이 될 수 있고, 스스로 피할 수 없는 의식의 성숙으로 이끄는, 경제적 요구 투쟁의 발전을 통하여, 의식이 계급의 내부로부터 생겨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또는 계급 외부로부터 의식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계급의 바깥에서 당이 만들어지고 혁명적 정치의식의 위로부터 주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이 계급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계급의 모든 요구를 종합하고 역사적 과업에 속하는 요구를 종합하는 것은 더 진전된 논의의 부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만이 그 의식은 “외부에” 존재한다. 사회학적 구성으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든, 소부르주아든, 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지식인이든 간에, 당은 계급 안에서 태어난다. 당은 조그만 경제적 요구로부터 완전한 정치 강령에 이르게 하는 보다 보편적인 전략적 요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투쟁의 요구를 스스로 만든다. 당의 정치 지식은 다양한 계급 경험의 역사적 종합의 결과이다. 그것은 승리의 원인을 맨 앞에 내세우듯이 패배의 원인으로부터도 배운다. 그것은 매일 계급투쟁의 뒤틀림과 반전으로부터 때로는 숨겨져 있거나 본능적이고 부문적인 계급투쟁으로부터 나오는 충동 뒤에서 이끌어낸다. 당은 전 계급에게 정치적 전술과 전략을 통해 이 계급투쟁의 경험을 되돌려준다. 이처럼 그 관계는 계급과 그로부터 분리되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더 앞서는 사려 깊은 부분 속에서, 계급 스스로 내부에서 형성되는 관계다. 이러한 앞선 부분은 아래로부터, 노동자로부터 충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적 전략으로 만들어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부분으로서의 당이다.
이는 투쟁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이 일정 정도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오늘날 같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요구의 부분적 측면과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에 대한 세계적 전망의 결여가 당의 존재를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당은 세계적 계급의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전위로서 당 내부부터 그 의식을 만들 수 없다면 계급의 적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듯이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은 계급 밖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변증법적으로 연관된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계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계급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당이 항상 존재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매 순간에 정치적 준거가 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을 향한 계급투쟁의 정치적 진화가 당 없이 일어날 수 있다거나 당이 단순히 조직자이며 전 계급이 독립적으로 정치 강령과 그를 실행할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투쟁을 일반화할 뿐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당을 기껏 대부분의 반혁명 시기에 연구센터로 여기면서 오직 혁명 시기에만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논지를 위험하다고 본다. 이는 객관적 조건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투쟁으로 강제한 후 주요 경제위기가 당을 만드는 시점과 두 실체 사이의 모든 연결고리를 기계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그 투쟁의 과정에서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 또는 너무 늦게 만들어진 당 때문에 정치적으로 유린되었고, 유혈적으로 억압되었는지를, 그리고 하루에 날조될 수 없는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심각하게 지체함으로써 계급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객관적 조건은 계급투쟁을 작동하게 할 수 있다. 그 조건들은 계급과 당 사이의 관계를 편하게 하고 강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은 무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쨌든 너무 늦은 것이다. 아주 한참. 당은 봉기 단계 전에 역사적 시기에 이미 존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당은 계급 자체와의 관계를 작고, 사소하지만 효과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건들, 위기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 의지는 이른바 당에 의해 쥐어질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결과로 또 다른 정치적 패배로의 길을 닦을 것이다. 이는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소생을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당이 계급의 부분, 즉 계급투쟁의 일시적 도구가 아닌 영속적 도구이기 때문이다. 당이 계급과 함께 성장하고 정치적 지도력을 줌으로써 계급과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패배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당이 오로지 계급투쟁이 시작된 후에만 만들어지고 그 투쟁과 함께한다는 이론을 지닌다면 패배는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계급투쟁이 사라지거나 낮은 수준의 투쟁만이 있는 시기에 그늘과 같은 후퇴가 있더라도.
이는 당이 당 주위의 사회적 맥락과 독립적인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엄청난 반혁명 시기에 당과 계급을 통일하는 박약한 관계는 깨어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의 적에 의해 패퇴되어 당은 말 그대로 지워져버린다. 그러나 이는 그 상황에 따른 최소한의 정치적, 조직적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수행하는데 더욱 진전된 요소들을 막아낼 수 없다. 당은 개입되거나, 생성하고 사라지는 조건들을 선택할 수 없다. 반대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은 계급투쟁의 리듬과 당의 개입 가능성의 정도를 규정한다. 그 수위가 어떠하든 계급투쟁을 위한 준거가 되려는 시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쟁의 요구를 궁극적 요구로 만드는 것 외에 경제투쟁에서 당의 주요 임무는 투쟁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투쟁이나 방어적인 경제 투쟁은 경제적, 노동조합주의적 투쟁을 정치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피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경제 투쟁은 요구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일으키고 정치적 적을 떠나지 않으면서 쇠퇴한다. 계급의식의 더 높은 수준에서 다음 투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지식으로 어떠한 경제투쟁도, 승리하든 패배하든 간에, 변혁시키는 임무가 있는 혁명당의 개입이 없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면, 당의 우선성은 당면 요구라는 자연스러운 영역으로부터 계급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투쟁이 착취의 의식과 계급의 적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볼 때, 조직적 측면이나 정치적 수준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투쟁을 유발시킨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나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요구투쟁의 틀 안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와 더불어 혁명적 습격으로 이끌고 코뮤니스트 강령을 정교화하는 전략적 준거의 틀로서 당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식화가 가능하다.
“노동계급이 당면한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을 하게 될 때, 그것은 객관적으로 계급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정식화는 의식의 문제에 관한 당과 계급 사이의 이 관계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계급의 경제적 요구는 스스로 전술, 전략, 그리고 코뮤니스트 강령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의식을 기계적으로 결정할 만큼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계급의 운동과 그 역사적 역할의 독립적 성숙에 위임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반대가 진실이다. 경제적 수준으로부터 정치적 수준으로 투쟁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질적인 도약을 수행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계급 전위, 곧 당이기 때문이다.
위와 똑같이 다음의 정식화도 허약한 주장이다.
“경제적 요구투쟁은 계급과 그 투쟁의 역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표현, 다시 말해 일정한 발전의 수준에서 계급정당이 되는 정치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계급의 경험을 종합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그리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를 지배이데올로기의 혼돈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의식을 위한 객관적 조건이다.”
이 경우 당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계급에 맡겨지고 그래서 당은 계급 스스로의 정치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단계에서만 만들어진다. 당은 계급 투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그리고 전술과 전략이 된 것도 그것이 갇혀 있는 경제적 우리를 부수면서 계급을 혁명적 길로 되돌리는 일련의 경제투쟁, 그리고 그것의 종합과 정교화의 역사적 성과가 된다. 그러나 당은 전체로서 계급이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독립적으로 끝내고 난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은 계급투쟁이 매번 반복되는 동안 이미 결정된 진화적 과정을 논리적으로 끝내고 나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당-계급관계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코뮤니즘 이론과 실천의 기본에 대한 근본적 동의와 명료성은 우리가 열정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 모든 일관된 혁명적인 힘이 함께 오는 과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Bilan & Perspectives No. 6 (2005년 12월)
번역 ㅣ 오세철
<원문 출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23호,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ICT), 2005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05-06-01/the-question-of-consciousness-a-basis-for-discussion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