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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이전 호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제는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이 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은 50년 전 당시 맑스주의 정치 분석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시리즈 두 번째 판에만 실렸던 글을 다시 연재하고 개정판을 발행하기로 했다. 주로 추가된 부분은 몇몇을 제외하면, 현대 독자들의 우려에 주로 답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 원본 초안에서는 대부분 그 당시 지면의 제약으로 생략한 글을 다시 삽입한 것이다.
위기가 추동한 자본주의의 부상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맑스가 「자본」 3권과 다른 저작에서 발전시킨, 생산양식의 진정한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분석이다. 「자본」 1권이 출간되기 20년 전, 맑스는 이 확산하는 생산양식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생산력을 혁명화할 잠재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이 생산양식을 봉건제로부터의 진보로 본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이나 일상적인 공포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한 원시적 축적은 "그저 하나의 목가적인 것일 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정복, 노예화, 약탈, 살인, 요컨대 폭력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잔혹한 사실이다.”(1)
대부분 농노를 “자유”롭고 “가난한 노동자”로 바꾸어버린 공유지의 약탈과 함께, 자본주의는 유럽 밖으로 터져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지구의 나머지에 대한 약탈을 동반했다.
“미국에서의 금과 은의 발견, 그 대륙의 광산에서 원주민에게 저지른 절멸, 노예화, 그리고 매장, 인도에 대한 정복의 시작과 약탈, 아프리카를 흑인 사냥을 위한 보존 구역으로 변화시킨 것은 모두 자본주의 생산 시대의 새벽을 특징짓는다.”(2)
최근의 연구는 전쟁을 통한 “절멸”, 야만적인 착취, 그리고 미국으로 들여온 질병이 5천6백만의 인구 또는 1600년대 당시 인구의 90%를 죽였다고 보았다.(3) “자본은 (이 세상에) 머리에서 발까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모든 모공을 피와 먼지로 채우면서”라는 맑스의 결론은 전혀 놀랍지 않다.(4)
이전 생산양식의 위기는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재화의 부족이 원인이었던 반면,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는 이전 시대에는 “부조리해 보였을” “만연한 과잉 생산”의 산물이었다.(5)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 이후에야 맑스는 왜 그런지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앞서 설명한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러한 역동적 생산양식인지 뿐만 아니라, 왜 자본 축적이 위기에 뒤따르는 호경기의 형태인지도 설명한다. 고전적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자본의 평가절하, 집중의 고도화, 집중되고 새로워진 더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 그러므로 위기의 속도와 강도가 모두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낮은 수준의 일반 이윤율로 이윤율 하락 경향이 극복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재생산 과정은 단순히 평가절하와 새로운 축적이 순환하며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하게는 나선(sprial)이 점점 좁아져, 궁극적으로 더 이상의 축적이 불가능한 특정 시점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윤율이 너무 낮아 불변 자본에의 재투자가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일 때보다 더 적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점에 유기적 구성이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본주의의 빠른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바로 그 동일한 법칙이, 이제는 자본주의 붕괴의 추동력이 된다.”(6)
그러나, 축적이 그 궁극적 한계에 이르기 훨씬 이전부터 자본의 중앙 집중화(concentration and celtralisation)는 생산양식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온다. 부(wealth)가 축적될수록, 과도할 정도의 자본의 통제력 역시 소수 또는 독점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함께 번영해 왔으면서, 또한 그 아래에 있었던 생산양식에 족쇄가 된다.”(7)
이는 특정 시점까지 자본의 축적은 인류의 역사적 이해에 전반적으로 기여하지만, 그 속에서 더 수준 높은 생산양식의 물질적인 전제조건이 발전한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자본이 세계적 수준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게 되면,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 – 상품 교환 없는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 – 의 물질적 기반이 이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새로워진 축적과 경제적 확장이 여전히 발생해 왔다는 것도 보여주지만, 그러한 축적은 “인류의 이해관계에 가장 좋은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 또한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한 것이다. 19세기, 봉건적 관계의 마지막 잔여물을 무너뜨리고 보편적인 삶의 질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등 자본의 축적은 여전히 진보적인 힘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확장과 기계화의 증가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관련되어 있었는데, 대개 자본주의 생산 기술과 경쟁하는 것이 점점 불가능해진 가내수공업과 소규모 장인들의 점진적인 제거로 이뤄졌다. 보기를 들어, 영국에서는 1834년 면직물 산업에서 역직기(power-looms)보다 2배나 많은 베틀이 여전히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베틀 방직공은 점점 경쟁할 능력을 잃었고, 1846-48년의 위기 이후에는 이 산업에서 완전히 방출되어 공장 생산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여전히 상당한 정도의 수공업 생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산업 영역에서부터 증가한 자본의 축적으로 인한 생산향상은, 19세기 중반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다른 발전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비슷한 그림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1850년의 자본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 보았을 때 여전히 지배적인 생산양식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의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이 국내외적으로 공고해졌다. 소규모 수공업자들은 제거되었다. 농노 제도의 점진적인 폐지, 이에 동반한 인구의 증가와 농업의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은 자본이 확장을 촉진할 임금 노동자의 지속적인 공급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수송과 의사소통 영역에서의 개선, 자본의 회전 기간의 단축은 (원자재와 완제품의 운송 시간의 단축과 필수적인 재고의 규모를 축소함으로써) 결국 이윤율 하락에 역경향(counter-tendency)를 제공했고, 동시에 자본의 확장을 더 강화할 기술적 기반을 제공했다.
대규모 초기 자본 지출이 필요한 철도와 같은 영역에 대한 몇몇 국가의 경제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를 향한 경향은 민간의 자본가들이 자본 축적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815년에서 1835년까지 영국의 정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추정되며, 1835년부터 1960년까지의 정부 지출 증가는 영국 국민소득의 약 1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경제 영역에서의 많은 정부 조치는 사실 생산과 자본의 움직임에 제한을 가한 봉건적 법적 규제를 제거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보기를 들어 전통적인 기업들의 특권적 독점 정책이 19세기 초반, 폐기되었다. 국가의 조치는 투자자들의 위험을 낮춤으로써 투자를 촉진하는 경향을 보였고, 회사의 빚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책임을 그들이 투자한 양만큼으로 제한하는 1862년 법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동시에, 국가는 계급투쟁에 대한 반응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과 삶의 수준을 개선하고 지원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보기를 들면, 1847년 10시간 법)
영국은 19세기 중반 가장 선진화된 자본주의 경제로서, 자유방임주의 조치를 외 무역 영역에까지 확장한 첫 번째 국가였다. 영국 식민지의 항구들은, 비록 그 속에서 영국 상품에 여전히 더 낮은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1822년에서 25년까지 해외 상품에 개방되었다. 1843년에는 기계류의 자유로운 수출이 허가되었고, 1842년-45년의 관세 개혁이 이뤄졌는데, 이는 거의 모든 원자재가 무관세로 영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곡물 조령(Corn Laws)은 1846년, 17세기의 항해 조례는 1849년 마침내 폐지되었다. 우리는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가진 해외자본과 무역이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가진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가들이 자유무역 정책의 첫 지지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덜 발전한 자본(국가)의 가격을 낮추는 동안 영국 수출은 그들의 가치 이상에서 판매되었다. 따라서 영국 수출은 유럽과 미국의 다른 개발도상국 국가들에 주로 이뤄졌다. 따라서 수출은 영국의 국가 총생산에서 점점 더 중요한 부분이 되어, 1800년 1억 8천5백만 달러에서 1850년 3억 5천만 달러까지 증가했다.(9)
1815년경 이후, 영국은 투자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자본 수출이 상품 수출을 뛰어넘었다. 1854년 총자본 수출은 2억1천만 파운드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10) 이 현상은 자본 수출이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수단 중 하나라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를 제공한다. 1850년 영국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으로 이뤄져 있었고, 따라서 높은 수준의 이윤율은 영국 자본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해외 자본에 투자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11) 따라서, 영국 자본의 투자는 해외 자본의 축적, 그러므로 자본의 세계화에 기여했지만, 일단 해외 국가 자본의 축적 수준이 영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진행되자 각국의 자본가들은 자본을 가장 먼저 유럽과 그 외 지역의 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50년까지는 아직 영국이 유일하게 영향력 있는 자본 수출국이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그림은, 19세기 유럽과 미국에 존재했던 것처럼, 생산된 상품의 양과 다양성의 증가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와 생활 수준의 증가로 이어지는, 가속하는 축적 중 하나였다. 실질 임금은 증가하고 있었고 이는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부록 표1을 보라). 비록 수출은 산출의 작은 비율을 차지했으나, 세계 무역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고(12), 이는 자본의 세계적 확장을 반영했다. 그런데도 이 시점 자본주의 회사의 구조 대부분은 여전히 개인 기업가가 그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자본의 축적에는 자본의 집중이 필요했고, 자본의 집중은 19세기 하반기 회사 구조를 빠르게 변화시켰다. 개인 기업가가 자신의 사업을 경영하는 것으로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이 필요한 양만큼의 자본을 모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첫 번째 신호는 합자 회사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합자 회사는 투자자가 아닌 이들에게서 이윤의 공유를 대가로 사업을 위한 자본 제공을 가능케 했다. 1872년 영국부터 프랑스까지, 1870-72년 사이의 독일에 퍼져있던 유한 책임의 주주들이 투자한 합자 회사들이 출범했다. 영국에서는 등록된 그런 회사들의 숫자가 1885년 8,692개에서 1914년 62,762개로 증가했다(13). 합자 회사의 등장은 세계의 모든 선진 국가들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자본 집중을 가능케 했다.
19세기 후반 만들어진 대부분의 결합은 수평적 성격이었다(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 지주 회사 등). 그 말은, 회사들끼리의 협정이나 실질적 결합으로 유사한 상품을 생산하여 경쟁을 제거하고 자신의 상품을 위한 독점적 시장을 만드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20세기 초반 무렵, 이러한 나라들의 국가 생산의 많은 부분은 사실상 생산 독점을 이룬 몇몇 산업 연합체의 통제 아래 있었다. 미국 자본은 이 시기 유럽과는 달리 독점과 연합체 형성에 대한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집중되었다. 1897년, 미국에는 약 10억 달러 규모 자본의 82개의 산업 연합체가 존재했다. 1904년에 이르러서 이 수치는 318개 산업 연합체, 70억 달러 이상의 자본, 그리고 5,300개의 개별 설립체로 증가했다.(14) 1910년쯤에는 산업 연합체는 미국에서 직물 생산의 50%, 유리 제품의 54%, 면직물과 인쇄 원단의 60%, 식품류의 62%, 음료류의 72%, 비철금속 생산의 77%, 화학제품의 81%, 철 금속의 84%를 책임지고 있었다. 더 높은 수준의 집중을 포함한 중앙 집중은, 미국의 이러한 주도적 회사들이 보유한 평균 자본 양의 증가로 뒷받침된다:
“미국의 13개 선도 제조 산업에서 각 제조공장의 평균 자본 양은 1850년에서 1910년 사이 39배로 증가했고, 평균 생산 가치는 19배로 증가했다.”
1895년에서 고작 10년 후, 미국의 2,274개의 제조 회사가 이른바 “대호황 시대”(Gilded Age)의 “악덕 자본가들”(robber barrons)이 지배하는 고작 157개의 법인 기업으로 합병되었다. 대부분의 이 법인 기업들은 “자신의 산업을 지배”했으며,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나 JP모건(J.P.Morgan)과 같은 이들의 재산을 불렸다. 그러나, 세기가 바뀔 때 즈음, 자본의 독점 조직으로 향하던 바로 그 경향이 다른 자본 국가들에서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1896년과 1901년 사이 영국에서는 재봉, 표백분, 포틀랜드 시멘트, 벽지, 담배, 그리고 대부분의 섬유가공 제조 부문에서 대규모 연합체들이 형성되었다. 1906년 독일에서는 생산의 다양한 부문에서 대규모 연합체들이 존재했고, 세기의 초반 무렵 프랑스에서는 금속, 설탕, 유리 등의 산업들에서 신디케이트가 있었다. 기타 등등, 세기초, 부하린은 F.라울(F.Laur)의 수치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산업 기업들에 투자된 5억 가운데, 2억 2천 5백만, 다시 말해 거의 절반이 카르텔과 트러스트로 조직된 생산에 투자되었다.”(18)
따라서, 세기가 바뀌는 즈음에,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경제의 많은 산업에서 경쟁은 사실상 제거되어 있었다. 이것은 독점자본이 통제하는 산업들에서 경쟁이 한꺼번에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국가 사이 경쟁이 전에 없이 치열해졌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각 자본주의 국가의 범위 내 개별 기업 사이 경쟁이 대부분이었던 상황이 독점 자본 사이의 국제 경쟁이 대부분인 상황으로 변했고, 이는 가치 법칙 작동의 변화와 초국적 수준에서의 이윤율 균등화를 포함하는 움직임이었다. 다시 말해, 이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존재를 암시했다:
“가격의 수준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역이나 ”국가“ 생산에서처럼 생산 비용이 결정하지 않는다. 대개 ”국가“ 그리고 지역의 차이는 세계 가격의 일반적 결과로서 없어지고, 세계의 가격이 개별 생산자들, 개별 국가들, 개별 영역들에 압력을 행사한다.”(19)
부하린은 국제 수준에서의 가격의 균등화 경향을 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옥수수 가격을 인용하며 묘사했는데, 옥수수 가격은 곡물 생산의 크게 다른 다양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범위의 가격 차이만을 보여주었다.
다른 말로, 독점 자본간 국제 경쟁은 다양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일정한 상호의존성을 암시했고, 이는 세계 무역의 증가, 세계 시장의 존재, 그리고 이른바 세계 수준에서의 분업으로 표현되었다. 일단 세계 경제가 존재하고, 가치 법칙이 세계적 수준에서 작동하면, 세계 자본의 개념과 함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이 현실이 된다.
다른 한 편, 자본의 입장에서 세계 경제의 성장과 국가별 독점자본 사이의 세계 경쟁은 제국주의의 등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제국주의’는 일반적인 전쟁, 정복이나 영토 합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의는 부하린이 그의 책,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설명한다.” -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정책부터 베트남에서의 러시아와 영국의 정복까지. 제국주의 시대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대표하는데, 무엇보다 자본의 가장 높은 수준의 구성을 이룬 국가 자본 간의 세계적 경쟁의 결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19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책과 전쟁, 정복, 그리고 영토 합병 등의 앞선 예시를 구분할 수 있다. 제국주의는 특수한 역사적 범주이며, 세계 경제의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볼 것은 세계 경제의 발전이다.
세계 자본주의 경쟁의 발전을 이끌었던 19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계가 지속적인 세계화는 그 자체로 가속화된 자본 축적의 산물이었으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하면서 나타나는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였다. 부하린이 보기로 든 것을 보면, 아래의 표는 1860년 – 1914년 사이에 어떻게 일반 이윤율이 하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에 직면해 대부분 선진 국가의 자본은 하락을 상쇄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해외 수출(유기적 구성이 낮은 지역으로 공장 생산품을 수출하고, 값싼 원자재를 수입)과 자본 수출에 의존했다.
“해외 무역에 투자된 자본은 높은 이윤율을 위한 역할이다. 왜냐하면, 그 자본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생산 시설을 보유한 다른 국가들에서 생산된 상품과 경쟁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선진 국가는 설령 경쟁국보다 더 싼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해도, 그 가치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판매할 수 있다. 선진국의 노동이 더 중요하게 착취되는 만큼, 이윤율은 증가한다. 왜냐하면 높은 질적 수준의 대가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판매되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와의 관계에서 – 상품이 수출되거나, 또는 상품이 수입되는 - 같은 조건이 갖춰질 수 있다. 이 나라는 상품에 그것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물화된 노동을 제공할 수 있고, 그 대가로 이 나라가 생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싼 가격에 상품을 받을 수도 있다. 같은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이 보편적으로 확산하기 전에 이를 맘껏 이용한 제조업자는 자신의 상품을 그의 경쟁자보다 싼 가격에, 그러나 그 개별 가치보다는 비싸게 판매한다. 다시 말해, 그는 그가 고용한 특별히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잉여가치로 착취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잉여 이윤을 지키고, 다른 한 편, 식민지 등에 투자된 자본은 높은 이윤율을 누린다. 이것이 가능한 단순한 이유는 그곳이 후진적 발전 수준으로 인한 높은 이윤율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이유를 첨가하자면, 노예들,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 등의 존재가 더 심한 노동 착취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하게 투자되고 그들에 의해 본국으로 회수된 자본이 현실화한 높은 이윤율이 평균 이윤율을 형성하는 한 요인으로 삼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20)
19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세계무역은 아래와 같이 성장했다.
1914년에 이르면, 영국은 그 산업 생산의 25%, 독일은 약 20%를 수출했다.
처음에는, 영국 수출과 경쟁할 수 있는 지점까지의 유럽 자본의 발전은 자유 무역으로의 운동을 동반했다. 1860년대 동안, 유럽의 관세는 일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었다(비록 미국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국내 자본 중앙집중화 심화와 함께한 국제 경쟁의 심화는 유럽에서의 자유무역을 향한 운동의 역전, 보호주의의 증가로 나아갔다. 따라서,
“... 1870년대 미국과 오스트리아 밀의 경쟁 증가, 서구 유럽 국가들의 산업 설비의 엄청난 증가, 1873년에서 1896년의 불황으로, 보호주의의 물결이 대륙을 뒤덮었다. 오스트리아는 1878년, 1882년 그리고 1888년, 프랑스는 1881년, 1885년, 1887년, 그리고 1892년, 벨기에는 1887년, 이탈리아는 1878년, 1887년, 그리고 1891년, 그리고 러시아는 1877년과 1892년에 관세를 높였다.”(21)
1870년대 후반 이후 개별 ‘국가 경제’, 즉 자국 시장을 해외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지속적 관세 장벽의 상승은 독점 자본으로 나아가는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자본 경쟁의 세계 시장으로서의 확장 과정 일부로 봐야 한다.
따라서 관세 장벽은 제국주의 발전의 한 측면이다. 왜냐하면, 독점자본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다른 국가들과의 국경 강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세 장벽은, 자국 시장에서 생산 비용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상품이 판매되도록, 세계 시장에 판매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종종 생산 비용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덤핑)되도록 함으로써, 세계 시장에서 해외자본 사이의 경쟁을 촉진했다. 이러한 관행들은 자본주의의 성격에 있어 유의미하며 영구적인 변화의 초기 징후였다; 덤핑이 발생한다는 것은 해외 무역이 더는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는 유효한 수단이 아니며, 자국 시장에서의 높은 가격은 노동력의 교환가치, 결국 자본가의 생산 비용을 상승시킬 뿐이란 의미가 된다. (이는 노동자들이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사실, 20세기 초반, 실질임금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농업을 희생한 대가로 이룬 산업 자본의 확장은 생산이 단일 작물이나 육류를 생산하는 지역으로부터 식료품(주로 곡물과 육류)을 수입하는데 점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의미였다. 자본 축적은 산업을 위해 덜 발전된, 또는 저개발 경제로부터 더 많은 양의 원자재 수입을 필요하게 했다. 더욱이, 이러한 원자재가 값싼 가격에 구해졌다면, 그들은 생산 비용을 낮추고, 따라서 이윤율 하락 경향을 뒤집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10년, 전동기 타이어와 발전소에 필요한 고무의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한 덕에 고무 가격이 파운드당 2/9(14p)에서 12/6(62.5p)로 상승했다. 일부 고무 회사의 이윤이 결과적으로 연 200% 증가했다. 이는 자본가, 회사 후원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곧 수백만의 자본이 남미, 중앙아프리카, 인도, 실론 등의 고무 재배 플랜테이션에 투여되었다. 이윽고 고무 생산이 증가하자, 가격이 이전 수준 또는 그 이하인 2/6(12.5p)까지 떨어졌다. 전동기 오일의 경우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원자재를 향한 극한까지의 쇄도가 결국 현대 유럽에 정착한 과열된 비밀 외교를 불러온 많은 경제적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것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22)
그러므로, 값싼 원자재 탐색은 유럽 국가 간의 과거 저개발 지역에 대한 통제, 합병을 위한 라이벌 경쟁의 증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1870년 이후 중요한 광물의 매장지를 포함한 지역의 합병, 단일작물재배 농업 지역을 점령하고 개발 정도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19세기 자본주의 생산양식 세계화의 또 다른 측면은, 자본의 이윤극대화와 이윤율 하락 상쇄 시도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국가들에서 낮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국가들, 다시 말해, 높은 이윤율을 획득할 수 있는 지역으로 자본 수출 비중의 증가였다. 우리는 19세기 중반 가장 높은 수준의 유기적 구성을 이룬 영국이 프랑스와 미국으로 자본을 수출하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았다. 1875년 정도까지 영국의 자본 수출은 주로 수출된 지역 자본의 확장에 이바지하는 서유럽과 미국으로 이뤄졌다. 미국과 유럽 자본이 그 유기적 구성으로 인해 자본 수출국으로 바꾸는 지점에까지 축적됨에 따라, 영국 자본은 해외 투자로 더욱 이윤을 낼 수 있는 지역을 찾았는데, 이 지역은 명백히도 대영제국 식민지(Empire)과 라틴 아메리카였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 런던의 대규모 잠재 투자자는 채무자로부터 평균 수익률로 자국에서 3.18%, 식민지에서 3.33%, 그리고 해외 지역에서 5.39%의 이익을 거둬왔던 것으로 계산되었다.(23) 1913년, 영국 해외 투자에서 대영제국 식민지가 47%, 미국이 20%,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가 20%를 차지했고, 영국은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자본 수출국이었다. 1914년, 영국의 총 수출은 약 37억 파운드를 초과했다(주요하게 철도 40%, 정부 및 지방정부 대출 30%, 원자재 생산 10%). 그런데도 19세기 후반기, 처음은 프랑스, 이후에는 독일 자본이 덜 개발된 국가들에 대한 보다 높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투자로 영국 자본과 주로 경쟁했다. 1880년, 프랑스 해외 투자는 5억 9천5백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이 수치는 1914년까지 세 배로 증가했다. 이 중 반이 유럽에 투자되었다 - 다시, 주로 덜 개발된 중앙, 동유럽의 국가들이었는데, 그 외 17%는 미국에 또 다른 17%는 라틴 아메리카에 투자되었다.(24)
따라서 해외 투자는 자본의 세계화와 세계 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하린이 지적했듯이, 자본의 세계화는 자본의 이해관계의 세계화와 함께하지 않았다. 자본 수출 비율의 증가는, 해외 무역의 증가와 같이, 실질적, 잠재적 투자 지역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려는 대부분 선진 강대국의 경쟁, 그리고 그로 인한 적대적 관계의 첨예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후진”의 지역에서 투자자 이해는 군사적 위협 또는 군대의 사용으로 결국 지켜졌다(보기를 들면 채무 불이행 이후 프랑스의 튀니스 식민화, 또는 채무 불이행 이후 영국의 이집트 식민화).
이 간단한 개요는 세계 경제의 발전과 제국주의의 발전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경제의 세계화, 자본의 세계화와 함께, 엄청난 결과로 가득한 자본의 “국가적(자국중심주의적)” 결합 과정, 자본의 “국가화(자국중심주의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25)
고도로 집중된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한 시도는, 자본주의가 세계적 체제가 되는 지점까지 자본 관계의 세계화로 이끌었지만, 또한 자본가들의 경쟁이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기 위한 선진국 간의 경쟁이 되는 지점까지, 자본의 국가화(자국중심주의)의 증가(보호무역주의 등의 증가)로도 이끌었다. 그러한 제국주의 국가 사이 경쟁에는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사력의 존재가 필요했는데, 이는 약한, 저개발 경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장 선진화된 강대국 사이의 직접적인 분쟁의 결과를 결정짓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1850년 이후 계속, 선진 자본 국가 사이의 경쟁이 증가함에 따라, 군무장 비용은 매년 증가했고, 1890년에서 1914년 사이의 군비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모든 선진국에서 국방비 지출은 정부 지출 가운데 단일 항목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그리고 계속 증가했다). 아래의 표는 1875년부터 1908년까지, 8개 선진국의 정부 군비 지출 증가현황이다.
1914년, 총국방비 지출은 영국이 77,029,300파운드, 독일 97,845,960파운드, 프랑스 1,717,202,233프랑, 러시아 825,946,421루블, 미국 313,204,990달러로 추정된다.(26)
세계대전은 이러한 제국주의 간 경쟁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욱일승천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분석이 ‘매끄러운’, 간단한 확장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축적이 잔혹한 경쟁과 호황-불황-회복의 이른바 “경기 순환”(business cycle)의 맥락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겠다. 여기서 각 불황의 시기에는 가장 덜 경쟁적인 기업이 파산하고, 높은 유기적 구성의 경쟁자에게 인수된다. 자본의 평가절하(일반 가격 하락의 결과로)로 가능해지는, 뒤이은 “회복”기는 보다 더 집중되고 중앙화된 자본의 기반이 된다. 자본 확장에 따라 이윤율의 균등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자본의 주기적 위기는 세계적으로 균일해지고, 확산한다. 그러므로, 보기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는 1840년과 82년 사이, 같은 순환 단계를 공유한 것은 연 28%에 불과했으나, 1882년에서 1925년 사이에는 그것이 연 65%에 이르렀다; 세기가 바뀔 때 즈음, 분석한 17개국이 거의 같은 위기와 회복의 유형을 보여주었다.(27)
위기가 보다 값비싸지는 것과 같이, 각 연쇄는 체제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각 위기는 더욱더 높은 수준의 자본의 집중화와 중앙화로 이끌었고, 각 순환 위기마다 더 적은 수의 파산시킬 경쟁자를 남겼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본의 중앙화는 각 국가 자본 내에서의 독점 자본의 이해가 국가의 이해와 엮일 때까지 진행되었다. 자본주의 경쟁은, 지금까지 인류에 풍요의 진정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각 국가가 그 자신의 국가 자본을 보호하려 함에 따라, 이제 생산력에 대한 제한적 억제로 이끌었다. 우리가 볼 수 있듯, 자본주의는 이제 쇠퇴하는 사회체제였으며, 그 존속은 오직 국가 사이 첫 국제 분쟁으로 세계를 밀어 넘어뜨려서만 가능했다.
부록
2023년 2월 28일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자본」, 1권(Penguin Classics, 1990), 874쪽
(2) 위의 책, 915쪽
(3) H.W.French. Born in Blaqckness(Liveright, 2021), 175쪽을 보라.
(4) 「자본」, 1권, 926쪽
(5) 「코뮤니스트 선언」(1975, Peking Edition), 40쪽
(6) 폴 매틱, The Permanent Crisis – Henryk Grossman’s Interpretation of Marx’s Theory Of Capitalist Accumulation, marxixst.org
(7) 「자본」, 1권, 929쪽
(8) W.Ashworth. A Short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Economy, 1850-1950. 131-132쪽
(9) The Fontana Economic History of Europe, 4권, 670쪽
(10) Ashworth, 앞의 책, 170쪽
(11) 사실 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이다. 영국은 보다 역동적인 생산 국가로 자본을 수출한 첫 번째 국가가 아니다. 자국의 소규모 생산경제에 직면한 네덜란드 상업 자본은 영국의 산업 혁명 대부분의 자본을 댔다. 영국이 미국 자본 축적에 자본을 댈 때, (미국) 자본이 지원한 (영국) 자본을 따라잡을 때까지, 똑같은 유형이 반복되었다. 1970년대 위기 이후 현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 자본이 상업적 경쟁자인 중국을 탄생시켰다. 후자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 맥락이 이제 변화했으며, 제국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이전의 평화로운 화해가 반복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12) 1800년 2억8천만 파운드에서 1830년, 3억 8천만 파운드, 1850년 8억 파운드로 추정됨. Ashforth, 위의 책, 30쪽.
(13) 위의 책, 94쪽
(14) 위의 책, 96쪽
(15) 위의 책, 68쪽
(16) Timothy Wu, The Curse of Bigness(Columbia Global Reports, 2018), 24-5 쪽
(17) Ashworth, 위의 책, 96쪽
(18) 부하린, 「제국주의와 세계 경제」, 69쪽
(19) 위의 책, 23쪽
(20) 맑스, 「자본」 3권, 238쪽(Larence and Wishart, 1974)
(21) D.B. Clough and C.W Cole, Economic History of Europe, 610-611쪽
(22) John Maclean, The War after War, 8쪽
(23) By A. Cairncross, Ashworth, 위의 책, 171쪽을 보라
(24) 수치는 Ashworth, 위의 책, 173-174쪽, 그리고 Clough and Cole, 위의 책, 657-661쪽에서 가져옴
(25) 부하린, 위의 책, 80쪽
(26) 앞의 인용에서, 126쪽
(27) O. Schwarz, “Finanzen der Gegenwart” in Handworterbuch der Staatswissen에서 인용. 부하린은 “... 저자의 독일, 오스트리아 지출 수치는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특별 예산이 포함되지 않았고, 한 번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관련 수치는 개별 주의 “지출”을 포함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33.5-56.9 증가는 실제로 더 크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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