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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성차별, 페미니즘 그리고 성해방

  • 성차별, 페미니즘1) 그리고 성해방

     

    1. 들어가며

     

    올해 들어 미투 운동에 이어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 성차별성 폭력 끝장 집회까지 성차별에 맞선 여성들의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페미니스트 카페 회원뿐만 아니라 그동안 페미니즘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던 많은 여성도 참가하였다. 여성들의 참가가 증가한 이유로 집회 주최 측에서는 “성범죄 피해를 내 탓이게 하는 구조에 의문이 늘면서 시위 공감대 커진 듯”2)이라고 보았다. 참가자들 역시 “여성들이 느끼는 상시적인 공포와 왜곡된 사회 구조에 대해 여성 스스로가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법현실에 지난 8월 1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는 성차별성 폭력 끝장 집회를 열어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주로 10대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30살 이하 연령층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한 구조에서 어릴 때부터 경쟁하며 자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작업장 내 성별 분업과 기회구조의 차별, 사회 곳곳에 깊숙이 뿌리박힌 성차별 구조와 문화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전의 페미니즘 운동은 의식 있는 소수 고학력 여성과 선도적인 여성 노동자가 주도했다면 지금은 위와 같은 대중이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이 글은 성차별에 맞선 집회 참가자들의 주장과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의 현실과 역사적 배경, 전망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성차별 반대는 단순히(여성과 남성의) 의식을 개혁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며 사회 구조화된 성차별에 기인함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여성 대 남성의 이분법을 넘어 성해방의 단초를 마련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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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회 곳곳에 만연한 성차별

     

    성차별은 전통과 관습이란 명목으로, 한편으로는 가족 생계라는 명목으로, 한편으로는 차별적인 성역할로 재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경제적 불평등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데 경제적 불평등의 고통은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제적 불평등의 고통은 노동계급 여성에게 더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의하면 20대 여성 실업률은 2016년 11월 7.3%로 1999년 이후 최고라는 수치를 보이고도 2017년 6월 7.9%, 2018년 6월 7.8%를 기록했다. 거기에 청년 여성 전체 일자리 중 비정규직 비율은 35.4%나 된다. 일자리를 가진 여성 셋 중 한 명이 비정규직인 셈이다.

     

    ① 성적 대상화

     

    여성은 오랫동안 외모로 평가받았다. 직업적 능력과 상관없이 나이 든 여성은 한물간 여성으로 취급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여성의 95%가 자신의 몸을 바꾸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을 이윤의 원천으로 바꾸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몸마저도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성적 대상화로 왜곡시키고 있다. 여성은 점점 더 과장된 섹시 이미지에 맞추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는 사회 곳곳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성의 상품화는 성적 자유가 아니라 상업적인 섹시함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성을 비롯한 오직 사고 팔릴 수 있는 것만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결국 섹슈얼리티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개인의 능력도 축소된다. 여성의 몸을 이렇게 성적으로 상품화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 성매매3)

     

    성매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성 노동은 개인적 선택의 문제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와 여성의 일반적인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매매와 성 노동의 규모와 성격은 빈곤, 양극화, 경제위기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성매매는(남성 권력 재생산을 위한 일부일처제에 따른) 여성 억압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성의 몸과 성관계 능력 자체가 상품이 되는 것과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은 다르다. 성적 착취는 여성 억압과 소외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사례 중 하나다. 많은 여성이 성매매에 종사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 대다수가 성매매 이외에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 실질적인 선택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들 삶의 물질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4)

     

    ② 낙태 금지

     

    현재 한국사회에서 낙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낙태는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이처럼 낙태가 널리 실행되고 있는데 굳이 낙태를 법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낙태 금지는 종교, 법, 교육, 노동현장 등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성억압과 성차별과 깊은 관련 있다.

     

    - 성적 자유와 지배계급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자유가 여성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남성은 책임은 덜 지면서 더 많은 섹스를 할 수 있었으며 여성은 이용만 당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은 여성은 섹스를 즐기지도 않고 성욕도 없으며 단지 남성에게 쾌락을 주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여성 성억압 논리를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5) 이런 상황에서 보수세력은 성적 대상화가 극심해지는 현상을 이용해서 성적 자유 규제와 임신중절을 부정하려고 한다.

     

    지배계급은 오랫동안 대중의 섹슈얼리티를 두려워하고 악마화해 왔다. 스레츠코 호로바트6)는 지배계급이 대중의 섹슈얼리티를 두려워한 이유를 사랑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욕망은 전체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의 자유방임주의부터 이슬람 근본주의까지 적대시한다. 왜? 욕망은 본질에서 혁명적이고 기존 사회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즉, 욕망은 현 사회체제에 위협적이고 전복적이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

     

    계급사회에서 욕망 역시 철저하게 계급화 되어있다.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이슬람근본주의 사회의 사례를 통해 피지배계급의 욕망은 철저하게 억압당하지만, 최고위 계급에는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섹스와 출산의 분리를 한편으로는 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 이것이 노동계급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와 출산에 대한 모순된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섹스와 출산의 분리는 성 해방의 전제 조건이다. 여성이 가족 안에서 어머니이자 가정을 돌보는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 여성 억압을 형성하기 때문에 출산을 통제하는 것이 성 해방의 근본적 요건이다.

     

    더 나아가 빌헬름 라이히7)는 성의 억압은 그 기원에 있어서 결혼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유산법과 관련이 있으므로 지배계급 자체에서 시작되고 순결의 도덕률이 지배계급의 모든 여성에게 강요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억압은 성적 불안과 죄의식의 수단으로 합치된 대중 속에 깊은 뿌리를 심어왔던 교회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성적 만족을 바라는 염원은 성적 분열과 도착으로 투사되어 나타남으로써 다시 결혼과 가족을 침해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성적 억압은 권위에 복종하게 만들고 부모에게 어린이를 묶어두게 한다. 이들이 자라면서 국가 권위와 물질적 착취에 굴종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국 억압된 대중의 지성적 비판 능력을 마비시키고 창조적 힘의 발전과 인간 자유를 위한 성취와 열망을 질식시킨다. 이것이 대중 행동의 비합리성8)의 근거라고 라이히는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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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가족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그들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형성된다. 예를 들어 봉건제 시대 귀족의 아내는 가사와 임신/육아보다는 사교에 능숙한 외모 가꾸기와 역할이 중요하고 상인/수공업자의 아내는 사교보다는 가사, 육아 및 근검절약하는 생활 태도가 강조되었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가족을 벗어나 대규모 제조업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 여성은 가정 바깥에서 일하면서도 여전히 무보수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

     

    -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의 역할

     

    가족은 계급사회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계급사회를 유지하는 데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윤 축적을 위한 노동자 착취만이 유일한 추동력이다. 그런 이유로 가족 역시 이런 목표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유용하다. 가족제도는 경제적(자본의 사회 구성원 재생산 비용에 대한 책임 회피), 이데올로기적(핵가족/가부장/성역할/성차별 이데올로기) 구실을 통해서 자본축적이라는 목표에 이바지한다.

     

    사회적 분업이라는 역사적 사건 때문에 여성이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을 하더라도 가사의 부담을 느끼고 있다. 제2차 대전 이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늘고 교육수준이 높아지자 일하는 남성이 여성을 부양한다는 핵가족 이데올로기와 현실 간의 틈이 더 크게 벌어졌다. 틈이 벌어지자 이상적 모델로서 가족의 필요성은 자본주의 체제에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그 결과 여성들은 직장 생활을 유지하면서 좋은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지 못하면 실패로 여기고 남성들은 가족 모두가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벌어 오지 못하면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느낀다. 여성과 남성이 가정에서 하는 무보수 노동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양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계급에 엄청난 가치가 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그래서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고 주거 환경이 열악하다면 사회를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부족 탓이라고 믿게 만든다. 결국, 핵가족은 사람들을 원자화하며 문제에 대한 집단적 해결책에서 멀어지게 한다. 또한, 가족 이데올로기는 위계질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심어준다. 이는 빌헬름 라이히의 견해처럼 결국 자본과 국가에 대한 복종으로까지 이어진다.

     

     

    3. 페미니스트의 모순

     

    - 여성의 이해관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여성 역시 남성과 마찬가지로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고 이를 반영하듯 페미니즘 내에서도 상충한 관점들이 존재한다. 영국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마가렛 대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영국 페미니즘의 위대한 영웅이며 대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여성 권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서 논쟁이 된 적이 있다. 또한,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박근혜 논쟁이 2002년 ∼ 2004년 있었다. 한쪽에서는 ‘박근혜가 여성이므로 여성운동 차원에서 연대세력으로 상정하고 지지하자는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이며 이는 곧 가부장제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9)

     

    고위직에 오른 여성들일수록 여성의 자유에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10) 그러므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로,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결국 하찮은 것으로 무시하는 셈이다. 많은 여성이 그 어느 때보다 노동계급에 더 많이 속한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삶에 또 다른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여성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만큼 강력한 잠재력이 있는 사회 세력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성차별은 계급 관계 속에서 문제 제기와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 맑스주의에 대한 주류 페미니즘 시각의 한계

     

    주류 페미니즘에서 보는 맑스주의 비판의 전제는 ①성역할 차이를 인정 ②여성 노동이라는 모호한 개념 ③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이다.

     

    우선 성역할의 차이를 인정하고 들어가는데 이는 현재 사회에서 성차별의 근거를 제공하고 남성과 여성의 선천적 본성에 따른 역할 구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여성 노동? 남성이 하던 노동을 여성이 하는 것을 여성 노동이라고 하는지 육아/가사와 같은 성별 분업 이후 여성의 영역에서 행해지던 노동을 일컫는지 명확하지 않다. 만약 첫 번째 사례라면 여성 노동 무시라는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노동 무시라는 용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맑스주의 핵심에 대한 왜곡과 무지를 들어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육아/가사노동을 여성 노동이라고 지칭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선천적 성 본성의 차이에 따른 성역할 구분으로 전형적인 성차별의 근거이다.

    또한, 이 모든 비판의 전제에 포함된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이다. 이는 단순히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몰이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노동은 상품을 창출하지 못하는 노동이다.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사용가치와 가치를 지녀야 하며 가치는 교환 과정에서 나타난다. 가정 내에서 행해지는 육아와 가사는 교환되지 않기에 경제적으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인 것이다. 맑스가 수많은 저서에서 말하고 있는 주장의 핵심 전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주류 페미니즘은 철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혼동하면서 철학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이 경제적으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맑스의 핵심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담한 왜곡을 하는 것이다. 육아/가사노동이 사회적 재생산과 밀접한 중요한 노동임에도 개별 가족 단위에 책임을 떠넘기는 자본과 국가의 가족 이데올로기와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 없이는 여성해방은 요원하다는 것을 주류 페미니즘은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의지도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 참가자들의 모순된 주장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시위 참가자들과 주최 측은 시위를 ‘성대결’로 보는 시각에 대해 “우리는 남성이 아니라 기득권을 비판하고 있다. .... 이에 대한 책임을 모든 남성한테 묻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든’ 사회와 정부, 공권력을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11) 그러면서도 2차 시위에서 주장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철성 경찰청장·문무일 검찰총장 파면, 여남 경찰 비율 9:1 요구가 포함돼 있다. (여남 경찰 9:1 정도는 주장해야, 성비가 5:5 정도라도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대답) 또 폴리스라인 안 취재를 여성 기자들에게만 허용한 것도, 언론사가 여성을 더 뽑으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순수하게 불법촬영 문제 해결을 사회에 요청하고 싶어 거리에 나온 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앞뒤 모순적인 내용은 결국 성차별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무지와 불법촬영의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결과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 억압과 성적 대상화, 성 상품화 속에서 불법촬영 문제를 판단해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성차별의 역사적 배경을 밝힘으로써 성차별을 넘어 성해방의 전망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4. 성차별의 역사적 배경과 자본주의에서 작동 방식

     

    - 평등에서 계급과 억압으로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류는 오랫동안 계급도 없고 여성 차별도 없는 사회에서 살았고 협동과 평등에 기반을 둔 유랑적 수렵, 채집사회가 인류사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만에서 2만 년 전 목축과 경작은 이러한 평등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잉여를 생산한 자들이 잉여 사용도 통제하며 집단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계급, 사유재산이 등장하게 된다.

     

    움직임의 시발은 지금의 인도 북부,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였고 가축의 사육, 즉 목축이었다. (최초의 사회적 분업) 가축에서 생기는 우유와 고기에 대한 개별 가족의 사적 소유가 발달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력의 필요는 노예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고 모권 씨족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녀들은 상속자가 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모권이 중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강화된 아버지의 지위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이 상속 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이 차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춤추는 욕망은 결국 모권을 폐지하게 된다.  

     

    - 일부일처제12)

     

    아버지의 상승한 지위를 반영한 일부일처제는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목적이었다.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특히 여성에게 혼전/ 혼외 순결을 강요하였다. (강제적 일부일처제는 한편으로는 매춘과 혼외정사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녀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하게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 권위 유지) 그리고 이전에 비하면 결혼 유대가 훨씬 더 공고해졌고 그럴수록 여자의 지위는 추락해갔다. 즉, 여성에 대한 차별과 성 억압이 가정과 종교, 학교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강요되었다. 일부일처제는 원시적, 자연 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경제적 조건에 의한) 사적 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가족 형태로 한 성(性)에 의한 다른 성의 예속이다. 그리고 일부일처제의 성립 과정은 계급의 발생과 필연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성차별은 계급의 발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엥겔스는 “원시 공산주의 세대에서 여성이 집안 살림을 맡아보는 것은 남성이 식료품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활동이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에서는 집안 살림은 사사로운 일로 전락했다. 그래서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 즉 육아와 가사를 사회적 일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 강조한다.

     

    - 성차별과 자본주의 이윤 착취

     

    자본주의에서 모든 차별은 피지배자들을 분열시켜서 지배자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사회의 지배계급은 소수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열을 조장한다. 인종 차별 역시 자본주의 태동과 맥을 같이하며 성차별 등 각종 차별은 지배를 더 쉽게 유지하려는 방법이다. 통계적으로 인종 불평등이 더 심한 곳에서 임금과 노조조직률은 더 낮고 이윤은 더 크다. 즉, 노동자들끼리 분열이 심한 곳일수록 노동조건은 더 열악한 것이다.

     

     

    5. 나가며 - 노동계급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여성 억압의 역사적 배경에서 보듯이 성차별과 성해방은 따로따로가 아니고 육아와 출산의 사회화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육아와 출산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가능하며, 여성 노동계급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남성 노동계급과 연대 속에서 가능하다. 성차별과 성 억압은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계급 발생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에 성적 자유와 성 평등은 남녀 간의 문제가 결코 아니며 계급 타파와 인간해방의 주제이다. 이런 점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성차별성 폭력 끝장 집회 참가자들의 주장처럼 여성의 적은 남성이 아니다. 여성 차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자본주의에서 작동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페미니즘은 오히려 성 평등과 성 해방의 장벽이 될 뿐이라는 것을 다양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성해방이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옹호한다든가.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하건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포장되기도 한다. 게다가 개인적 정체성을 결정적 요인으로 여기는 관점들은 결국 연대세력의 분열과 파편화를 강화하는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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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조덕연

     

     

    <주>

     

    1)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과 억압에 대한 기본적 거부를 나타내며 그것은 성차별에 반대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태도다. 페미니즘 사상은 단일한 학파의 사상으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주디스 오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2)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한겨레신문. 2018. 6. 21>

     

    3) 성매매의 기원은 여성 억압의 기원과 맥을 같이하는 형식적(강제적) 일부일처제에 있다. 형식적(강제적) 일부일처제의 강요는 한편으로는 가족을 경제단위로, 다른 한편으로는 혼외정사와 매춘으로 나타났다. 일부일처제에서 혼전 순결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이지만 특히 여성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결혼 후 혼외 순결 역시 여성에게 훨씬 엄격하다. 즉, 일부일처제는 여성에게는 성억압, 남성에게는 성의 파편화로 나타난다.

     

    4) 주디스 오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5) 에이미 리닛 ‘성관계에 대한 욕망은 상호적이지 남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 피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신을 만족할 수 있게 해 준다’

     

    6) ‘사랑의 급진성’ <오월의 봄> 저자

     

    7) ①1918년∼1927년; 빈대학 입학, 프로이트로부터 사사를 받으며 정신분석요법 실험

    ②1928년∼1933년; 성정치 활동, 성위생상담소 개설, 정신분석과 맑스주의를 결합하여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관계와 결부시킴.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프로이트와 치열한 논쟁/의견대립 이후 결별. 1930년부터 독일에서 활동

    ③외국 망명 - 1939년 이후 미국에 최종 정착하면서 오르곤 에너지 실험에 집중

     

    8) 여기서 말하는 비합리성은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이다는 의미가 아니다. 목적에 맞지 않는 행동, 생각을 의미한다.

     

    9) 오장미경 ‘한국 여성운동과 여성 내부의 차이’ 진보평론 20호

     

    10) 여성은 모든 것을 달성한 시기에 살고 있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 발상. 즉, 여성이 너무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오늘날 여성 문제라고 주장한다.

     

    11) 한겨레신문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2018-06-21

     

    12)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이지만 남성, 특히 지배계급 남성에게는 일부다처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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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 인간의 본성과 코뮤니즘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소재와 대립한다. 그는 자연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유용한 형태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타고난 신체의 힘인 팔, 다리, 머리, 손 등을 움직인다. 그는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자기 외부의 자연에 작용을 가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며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의 본성까지도 변화시킨다.” (자본론 I-1, 강신준 역, p.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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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즘(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만든 오랜 주장은 결국 코뮤니즘은 내재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대체로 거만한 주장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고 완전히 근거가 없으나, 또한 매우 끈질기게 제기되었다. 아마도 세상의 일반 상식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 따위를 지지하고자 할 때 항상 쓰이는, 종종 들어보았을 “그게 상식이잖아”라는 말과 같이, ‘인간 본성’에 대해 주장한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 외의 어떤 다른 주장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를 의미한다. 라디오 토크쇼의 진행자 수준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그게 상식이잖아’ 와는 달리, ‘인간 본성’ 주장은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심지어 사회과학자들이 사용할 정도로 충분한 권위를 갖고 있다. 보기를 들어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은 그가 보수당 런던 시장으로 있을 때, 불평등이 “질투의 정신”을 조장하고, 이에 덧붙여 탐욕이 “경제 활동의 가치 있는 박차”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의 인문학 교수 마크 헌터(Mark Hunter)가 쓴 에세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공격과 같다.

     

     

    그런데도 ‘인간 본성’ 주장은 그럴듯한데, 그 이유의 일부는 그것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있는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보기를 들어 기독교는 인간이 모두 ‘사악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며, 이것이 사후 세계에 구원을 가져다줄 교회의 권력과 이번 생애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국가의 권력을 모두 정당화했다. 또한, 그것은 역사적 경험,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이루고자 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는 단순한 사실과 더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마지막 이유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우리를 험하게 대하거나, 우리가 친구에게 실망할 때,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그저 냉담하게 보일 때 느끼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을 상당 부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그 주장이 적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확실히 가장 마지막 근거, 개인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가장 명백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일상적인 삶은 수많은 이기심, 냉담함, 그리고 공감의 부족 등등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러나 삶은 또한 친절함, 자기희생, 그리고 연대 - 작업장에서 서로를 돕고 지켜주는 사람들, 어려움에 부닥친 낯선 이를 도와주는 사람들, 목숨을 걸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사람들, 스스로 선한 대의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사람들과 같은 수많은 반대의 사례들 또한 제공한다. 만약 이기적인 것이 정말 인간의 본성이라면, 만약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면, 그러한 이타적 행동은 존재하지 않거나 잘해봐야 극단적인 경우에 불과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 주장은 다양한 다른 형태가 있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전형적으로 다음과 같다. “코뮤니즘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작동할 리가 없다. 그리고 당신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연설자는 인간 본성이 완전히 당신의 주장에 반대된다고 이야기하거나, 당신의 생각에 공감하는 척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인간이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결함이 너무 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주장은 사회주의/코뮤니즘에 반대하거나 종종 자본주의가 인간의 사회적 발전의 정점이 아닐 수도 있으며 보다 우월한 생산 양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데 이용된다. 많은 코뮤니스트가 바로 이 지점에서 함정에 빠진다.

     

     

     

     

    바로 그 출발점에서 인간의 본성 주장이 제기되면, 그 누구도 영원하고, 지속적이며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음을 지적해야 한다. 생존 본능, 또는 종족 보존의 욕구와 같은 진실로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특질은 동물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인간 본성' 주장의 가장 크고 명백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그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그럴 가치가 없는 당신의 적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함정’은 인간 본질은 이기적이라거나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추동되므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사는 사회로부터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는 사회’에 기초한 코뮤니스트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가장 흔한 형식의 '인간 본성' 주장에 코뮤니즘의 지지자들이 반대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이다.

     

     

    '인간 본성' 주장에 반대하는 데 경험이 부족한 코뮤니스트는 인간의 협력과 이타주의적 행위의 갖가지 예시를 인용하며 그 주장의 가장 명백하게 약한 측면을 공격하곤 한다. 이러한 종류의 역공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핵심에 다가가야 한다. 인간 본성 주장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 또는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부의 ‘낙수 효과’가 있다는 이론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과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것은 반박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뿌리 뽑을 가치가 있다.

     

     

    그 주장이,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한다는 주장임을 가정한다면, 우리는 '인간 본성'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때까지 점진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짓눌러버릴 수 있다. 인간 본성 주장을 어떻게 반박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러한 주장의 현실적인 발표문부터 시작해 보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항상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코뮤니즘은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왜 항상 자본주의가 존재해 왔고, 자본주의보다 뛰어난 체제가 존재할 수 없는지의 이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은 개인에게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도록 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은 인용이 아니지만, 코뮤니즘의 지지자들이 자주 대응해야 하는 전형적인 유형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자본주의를 자기 이해 추구 행위를 사회적으로 긍정적 결과로 바꿀 수 있는 체제로 방어하면서 코뮤니즘을 불가능하다고 공격한다. 명백하게도 이 주장의 공식은 다양해질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허수아비 인형 같은 주장이라는 비난을 하기 전, 우리는 이것이 코뮤니즘에 반대하기 위해 사용된 인간 본성에 기반한 주장에 대한 것임을 기억하자. 반대가 반드시 주어진 반대 견해의 실제 주장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반박해야 할 것은 코뮤니즘이 '인간 본성'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그러므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 바로 자본주의에 만족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제 반대주장,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반대주장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우선, 그 주장은 논리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 주장은 본질에 대해 호소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과 비슷하다. 만약 당신이 아프다면, 당신은 현대적인 약을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본성이 원래 가야 할 방향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인간 본성'의 존재를 지지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이는 연금술사들이 수 세기 동안 찾아왔던 철학자의 돌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자들의 용어로 ‘사회적 상수’ - 모든 사회에서 똑같은 인간의 행동 특성 – 에 대한 모든 유의미한 연구들은 인간의 심리와 태도가 변수이며, 개인이 발전시킨 사회적인 틀에 연결되어있는 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났다. 사실, 우리가 이러한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성격,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그러한 특징들까지 지적하길 원했다면, 우리는 ‘선천적인’ 것에 반대되는 ‘후천적인’ 것의 엄청난 중요성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 교육과, 인간 존재가 성장한 사회적 환경의 결정적인 역할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 본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썼듯이, “모든 역사는 인간 본성의 지속적인 변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조상들이 자기의 이해와 탐욕이 주요한 동기였다면, 우리 종은 절대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20세기 동안, 인류학자들은 세계의 다양한 외진 지역, 현대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한, 십수 개의 수렵-채취 사회를 발견하고 연구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또는 다른 지역의 사막이든, 정글이든, 그 어떤 곳에서도 사회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아이를 포함하여 약 20명에서 50명 정도의 작은 무리를 짓고 살았으며, 이용 가능한 사냥감과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따라 상대적으로 구획된 지역 내에서 캠프에서 캠프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이웃한 무리에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었으며, 이웃한 무리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대부분의 이러한 사회들은 전쟁을 몰랐고, 전쟁을 아는 곳은 수렵-채취자들이 아닌 호전적인 그룹과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각각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적 기풍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육아에 있어서 비지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공유, 협력, 그리고 합의적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가치, 나머지 모든 것의 기저에 있는 것은 바로 개인의 평등이었다.

     

    수렵-채취 사회의 고도로 발달한 평등 의식은 각각의 사람이 그 또는 그녀가 음식을 찾거나 획득할 수 있는 능력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음식에 대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음식은 공유된다. 그것은 아무도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부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적인 재화는 공유된다. 그것은 아무도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각의 사람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고유한 결정을 한다. 그것은 심지어 부모조차도 그들의 자녀들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지시적인 육아가 있다. 그것은 그룹의 결정이 합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사도 없고, “중요 인물”이나 두목도 없다.

     

     

    만약 단지 한 명의 인류학자가 이 모든 것을 보고했더라면,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로맨틱한 몽상가이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색깔의 많은 인류학자는 많은 다양한 수렵-채취 문화에 대해 똑같은 보편적 이야기를 전한다. 물론 문화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으며 모든 문화가 평화롭고 매우 평등한 것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같다. 인류학자들은 그들이 연구한 수렵-채취 문화의 평등, 개인의 자율성, 아이에 대한 관대한 대우, 협력, 그리고 공유하는 정도에 잇달아 놀라워했다. 혹시 당신이 ‘호전적인 원시 부족’ 또는 노예를 부리는 원주민의 이야기, 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천박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족 문화에 대해 읽어보았다면, 당신은 수렵-채취 사회의 무리에 대해 읽은 것이 아니다. 이 평등주의적 수렵-채취 사회의 유형은 약 1만 년 전 농업과 유목이 등장하고 첫 국가가 나타나기 이전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지배적인 존재 양식인 원시적 코뮤니즘을 설명한다. 이제 '인간 본성'이 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기본값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모두 명확해졌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리나 부족에게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것이 낯선 사회에서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탐욕과 이기심이 우리 본성의 일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 반대로 협력과 상호 협조가 대부분의 우리 역사에서, 많은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특징이었다는 점이 명확히 한다면, 이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인간 본성'에 관심을 기울일 때이다. 자본주의 체계는 착취에 기반한다. 잉여가치는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으로부터 뽑아내며 모든 이윤의 원천이다. 그것은 말 못 할 정도로 인간의 비참함과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현재에도 그렇다. 자본주의는 확실히 승자독식의 체제이다.(1) 탐욕과 이기심은 덕목으로서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그러나 과연 자본주의에 사는 모든 사람이 탐욕스러움과 이기적인 것이 사실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이타적인 행위의 수많은 예시가 있다. 사실, 그것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는 체계로서 유지될 수 없다. 그저 하나의 보기만 들어보자. ‘2015년 간병인 가치 보고서’는 영국 경제를 지탱하는 간병인의 가치를 살펴보았는데, 2001년 이후 간병인의 가치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해, 6천8백만 파운드에서 거의 두 배인 1억3천2백만 파운드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증가의 원인을 친척과 식구를 돌보는 데 사용하는 시간과 그에 동반하는 대체 돌봄(replacement care)의 증가로 보았다. 만약 사람 중 정말 극소수라도 그들의 사랑하는 이들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자본주의 국가에 미치는 경제적인 충격은 재앙적인 것이 될 것이다.

     

     

    세계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엘리트와 그들에게 빌붙어 사는 이들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동기가 부여되는 것은 확실히 진실이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들은 ‘자연적으로’ 이기적이지 않다. 비록 우리 중 일부가 이기적일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며, 이기적으로 되도록 교육받지만 말이다.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소수의 엘리트는, 그들 중 일부, 빌 게이츠와 같은 인물이 그의 ‘재단’으로 자신을 자애로운 것처럼 연기하려 할지라도 탐욕, 자기애, 그리고 이기심에 경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단’은 클린턴 재단이 잘 보여주듯이 종종 자기선전, 부패, 그리고 돈세탁을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다.

     

     

    엘리트 자본주의자들은 세계의 경제와 정부의 영광스러운 주인이다. 그들은 지속해서 찬양되고, 존경받으며, ‘지상의 법 위에’ 존재로 여겨지며, 인류의 하찮은 민중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방해받지 않는 부(anabashed opulence)의 세계에 살도록 허락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에서 세계에 대한 탐욕은 이상적인 정당한 변명을 찾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악한 이기심을 인류가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바꾸는 착취 체계를 선전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사고(思考) 실험을 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구상에 사는 75억의 사람에게 지금 당장 그들에게 아래의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싶은지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경제 체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소득 불평등을 일으키며, 동시에 평등한 기회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모든 사람이 영구적인 경제적 결핍 하에서 살아가는 데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를 거부하며, 수십의 나라들에 끝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키고, 수억의 사람들이 기근, 질병, 기아에 허덕이고, 지구와 인류의 건강을 황폐화하는 동시에 그러한 파괴의 대가를 극소수의 특권을 가진 이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이들에게 외부화시키는 사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체제에서 살기를 실제로 선택할까? 솔직하게 대답해보자. 거의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체제 아래에서 행복한 유일한 사람은 현재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특권적인 경제적 지위가 보호되고 강화되는, 몇 안 되는 자본주의자 그룹일 것이다. 사실은 자본주의의 논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소수의 권력, 지위, 그리고 특권을 보호하고 영속화하면서 그 외의 모든 이들을 빈곤에 빠뜨린다.

     

     

    이상적인 “자수성가형 인간”을 잘 나타내는 이기심, 질투, 그리고 탐욕은 그저 자본주의 경제적 실체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일 뿐이며,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원시 코뮤니즘 사회 이후, 또는 심지어 촌락 공동체가 있는 중세 이후 '인간 본성'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개인주의는 작은 독립 소유자들이 마을과 시골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세계의 관념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종종 경쟁자들을 파산시킴으로써 성공해 온 이러한 신출내기 부르주아지, 작은 소유자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광신도 같은 지지자였고, 개인주의를 일종의 자연의 법칙으로 여겼다.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적 “생존을 위한 투쟁”,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가져다 쓰면서도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약탈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연대와 단결, 상호 지원을 학습한, 따라서 개인주의의 지배적인 이념에 반격을 날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등장시켰다. 노동계급에 연대란 그들의 물질적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 존재가 “자연적으로 이기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만약 노동계급이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필연의 산물이다. 자기방어를 위해 사회적 조건이 허락되는 한 노동자들은 연합하고 연대할 수밖에 없다. 파업한 이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남편, 아내, 그리고 가족들 등 일자리뿐만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 사이의 연대와 지원의 수많은 사례를 과거 파업은 보여준다.  

     

     

    이것은 연대와 이타주의가 하나 이상의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연대를 필요로 하지만, 다른 이에 대한 연대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조차 발견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사회에 유용하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일견 진부한 생각으로 표현된다. 어떤 이들은 이타주의는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 어쨌든 그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코뮤니스트들이 방어하는 아이디어, 개인의 이해와 집단의 이해 사이에 어떠한 필연적인 대립은 없으며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개인과 사회의 대립은 착취와 사적 소유에 기반한 사회의 표현이다.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사람과 이러한 억압과 착취를 보장하고 영속화하는 당사자 기관 사이에 조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는 점에서 완전히 논리적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이타주의는 오직 자선 또는 희생의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한 부정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긍정, 공유, 그리고 서로가 보완하며 꽃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우리에게 믿기를 바라는 것과는 반대로, 코뮤니즘은 개인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그/그녀가 만들어 낸 것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고, 개인을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에 대한 부정은 후기 자본주의의 독특한 형식, 제국주의 단계에서 극한에 달했다.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는 어떤 착취의 형식도 없어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도 없고, 계급도 없으며, 모든 것은 이윤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필요로 생산되고, 사회의 구성원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인류는 오직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그 측정할 수 없는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개인의 이해와 집단의 이해 사이의 대립은 사라질 것이므로, 각 개인이 번영하기 위한 새롭고 굉장한 전망이 열릴 것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규범이었던 지루한 획일성을 지속시키는 것과는 달리, 코뮤니즘은 무엇보다 다양성의 사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은 대부분 사람을 전 생애에 걸쳐 제한하고 제약하는 규칙인 노동의 분리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에서는 모든 새로운 기술적 돌파구로, 더 심화한 수준의 전문화가 아니라, 대신 각각의 개인이 개발할 수 있는 활동 범위의 확장이 있을 것이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코뮤니스트 사회는 어떤 사람도 배타적인 활동 영역을 갖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그가 원하는 부문에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이며,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규제하므로 한 사람이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소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는, 사냥꾼, 낚시꾼, 소몰이꾼, 목동, 그리고 비평가가 되지 않더라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인간 본성에 근본적인 것,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서 두드러진 무절제함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사실은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경향임을 알 수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대다수는 어느 정도는 코뮤니스트이다. 코뮤니즘이 맑스가 정의한 것처럼, “그의 능력에 비례하는 (무언가)에서 그의 필요에 따른 (무언가로)”를 의미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공유하고, 돕고, 그리고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한 이들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그저 조언, 어떤 일에 대한 보조, 공감, 또는 감정적 지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친구, 함께 일하는 동료, 친척, 연인, 심지어 완전히 모르는 사람조차도 종종 그렇게 행동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모든 인간 사회성의 기반이다.” 그것은 “사회성의 원재료이며 사회적 평화의 궁극적인 내용인 궁극적인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정”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모든 회의론자, 반대만 할 뿐인 사람들이 뭐라고 주장하든지 간에, 코뮤니즘은 인류를 위해 만들어진다. 인간 존재는 단언컨대 코뮤니스트 사회에서 살 수 있고, 그러한 사회가 살아 숨 쉴 수 있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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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gosum

    2018년 6월 15일

     

    역주

     

    (1) 약자는 악마에게 잡혀 죽는다는 의미로,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판치는 경쟁’을 강조하는 문구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6-15/human-nature-and-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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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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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조국)의 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이탈했다.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과 1923년 사이에 혁명적인 노동자 봉기를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를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노동자당’을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급평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의회주의, 선거주의 환상을 확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으로 현실에서는 개량이 없는 개량주의의 옹호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한 ‘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코뮤니스트 정당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수용은 부르주아의 재무장화에 참여, 인민전선에 참여, 그리고 전후 국가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본의 진정한 협력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 또는 ‘코뮤니스트’를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수많은 그룹과 조직이 있다. 그들의 오류는 대부분 앞서 말한 ‘사회민주주의’를 재창조하려 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부활시키려는 희극적인 시도라서 더욱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맑스주의’의 아름으로 계급운동 전반에 끼진 악영향과 혼란은 운동의 퇴보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동일시하면서 강령까지 만드는데,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맹렬히 비난했던 반동적인 입장일 뿐이다.

     

    “근대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구이다; 그것은 자본가, 모든 자본가의 이상적인 공동 기구이다. 그것이 생산력을 장악할수록, 자본가의 진정한 공동 기구가 될수록, 점점 더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임노동자, 프롤레타리아로 남게 된다. 자본주의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극단으로 더욱 밀어붙인다.”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사회적 변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정치〮경제적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착취체제를 ‘진보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이거나, 심지어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가짜 세력과 우리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노동자계급을 지속해서 공격하고 혁명적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반공주의(반코뮤니즘)이다. 또한 마오주의자와 게바라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기(인민전선, 단계론, 국가 미화, 민족주의 등)를 갖고 있기에 반코뮤니즘 경향에 속한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코뮤니즘으로 바꾸는 혁명은 경제의 '자주 관리'나 '국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임노동, 상품생산, 국가의 의식적인 폐지가 필수적이다. 이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인간 필요의 충분한 만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 건설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와 무관한 일국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코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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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이나 중국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는 세력과 이른바 ‘입당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 또한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협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부정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이른바 ‘민족자결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여러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충돌 (스페인 내전, 아비시니아, 중일전쟁)을 지지했고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성과 교정 없이 국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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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다양한 스탈린주의, 정통 트로츠키주의 자임세력, 그리고 마오주의 경향은 서로 대립하면서 일치하지 않는 정치세력이지만, 우리는 이들 모두를 자본주의의 좌파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강령, 전술 또는 개념은 수없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타락시키고 붕괴시켜왔다. 여전히 ‘좌파통합’ 또는 ‘좌파 공동전선’을 내세우며 반성과 교정 없는 낡은 것들을 지속시키려는 시도는 그들의 전통이자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세력에 맞선 오늘날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오직 국경과 지역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향한 전망을 함께 세우고 국제적 코뮤니스트 강령에 따라 단결하고 투쟁하는 세력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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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세계의 계급투쟁 : 국제주의 노동자들의 목소리

  • 세계의 계급투쟁 : 국제주의 노동자들의 목소리

     

    “현재의 노동자 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아직 이에 맞서 대대적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에 머물러 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로 넓어져 총체적 지배를 심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모순은 코뮤니스트 혁명 이전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은 한 억압받는 계급의 저항과 투쟁의 물결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본에 맞선 모든 투쟁은 코뮤니스트 강령이 계급 속에 깊이 뿌리내릴 때만 비로소 혁명을 향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세계자본주의의 끝 모를 경제위기와 제국주의 전쟁 위협,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들과 동전의 양면인 테러리즘, 파시즘과 닮아 있는 포퓰리즘.. 이 모든 현상은 세계 곳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수준을 하락시키고 생존 조건을 위협하고 있지만, 그에 맞선 투쟁은 아직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현재의 자본가 권력은 자신이 만든 위기를 노동자계급에 전가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싹부터 잘라내기 위해 세계적으로 우파, 좌파 정권을 가리지 않고 선제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 노동자계급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반대로 쇠퇴하는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 즉 자본가계급의 총체적 위기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기는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에게는 다시 한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깨고 혁명적 투쟁에 나설 가능성을 열어준다. 문제는 계급투쟁의 부활만으로는 안 되고, 그와 동시에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히는 의식적 투쟁이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아프리카의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 유럽과 남미의 노동자투쟁, 북미와 아시아의 노동자투쟁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투쟁의 물결은 대부분의 성과를 또 다른 지배계급에 빼앗긴 채, (질적으로도)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2년 전 한국의 촛불 투쟁도 마찬가지였다. 대대적인 투쟁, 사상 초유의 분출이 질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퇴색해버린 원인은 모든 위기와 고통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투쟁과 코뮤니즘을 목표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후퇴 속에서도 지금은 비록 소수이지만,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밝혀줄 분명한 흐름에 주목한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고 코뮤니즘이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임을 밝히며 “혁명을 향한 출발점”이 되려는 흐름이다. 「코뮤니스트」 8호에서는 끊임없이 계급투쟁에 참여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코뮤니즘을 위해 투쟁하는 국제주의 노동자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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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연금 "개악"에 맞선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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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7일 국가두마는 세 번째 독회에서 정년 연장을 위한 법안을 승인했다. (여름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이 법안에 반대하는 수백 건의 시위가 있었다. 7월에만 225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의 대부분은 옛 공산당이 조직하거나 지배했지만, 많은 시위대는 공산당과 다른 구호를 외쳤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항의 시위에 참여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위는 결국 정부의 탄압과 자율적 운동의 결합으로 정부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정부와 두마는 감히 올리가히르(러시아의 신흥재벌)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방안을 고안해 낼 수 없었다. 러시아의 자본은 누진소득세 도입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와 정치적인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앙상하게 재분배되는 소득의 작은 부분(세금)조차도 희생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올리가히르는 비대해져서, 고급빌라와 요트를 사고, 세련된 스타일로 그들만의 부유층 향락을 즐기기 위해 그 지위를 보존하고 싶어 한다.

     

    현재의 자본에 비해 세계는 너무 작아졌기 때문에 자본은 모든 국가에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정년연장을 포함하여 극단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해야 한다. 낡은 권력인 부르주아지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 자본 간의 국제적 경쟁은 심화되고 있고, 인구 한파(감소)는 점점 격화되고, 경쟁력 싸움에서 주요 강대국은 사회적 지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함께 인류는 자신을 손상하면서 끊임없는 파괴의 대가로만 살아남게 되었다. 자본주의 아래 인류에 대한 전망을 완전히 상실한 사회관계의 유례없는 비인간화가 러시아를 괴롭히는 생리적 빈곤에 더해졌다.

     

    오늘날의 대안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서운 거짓과 허상에 맞서 조직화한 노동자계급이 앞장서서 끊임없이 광범위하게 투쟁하는 것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과학적 코뮤니스트 의식을 위한 투쟁, 그리고 노동계급의 조직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이다.

     

    지금의 상황은 모든 노동자와 학생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의 노동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하자! 함께 투쟁하기 위해 일터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동료들과 노동자 그룹을 조직하자! 여러 노동자 그룹과 공동행동을 준비하자! 국제주의 노동자 운동에 참여하자!

     

    계급투쟁의 자기 조직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행사만이 피할 수 없는 파괴로부터 사회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동참하자! 지금 시작하자!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 이 문서는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맑스주의 노동자 그룹, 국제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작성했다.

     

    2018년 10월 6일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0-07/against-pension-%E2%80%9Creform-in-russia

     

     

    그라나다 지하철 노동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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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길(Nuevo Curso)

     

    그라나다 지하철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라나다 지하철 동지들은 현재 수용할 수 없는 노동 조건을 거부하기 위해 오늘 24시간 파업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사용자와 지하철 시스템 운영자 그리고 안달루시아 평의회의 부르주아 정치인들 모두의 태도는 지하철 노동자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번 월요일, 지하철 노동자들의 대규모 집회가 투쟁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고, 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하면, 해방연맹은 지하철 노동자 투쟁을 지원할 것이다. 아래는 오늘 열린 집회에서 해방연맹이 배포한 유인물이다.

     

    그라나다 지하철 파업은 왜 “이기적인” 투쟁이 아닌가?

     

    우리가 일하는 회사에서 노동자의 처지에서 바라보면 두 개의 상반된 세력과 마주친다. 우리는 일상의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기 위해 투쟁한다. 사측에서 뭐라 떠들든 간에, 우리의 요구는 ‘이기적 요구’가 아니라 - 보기를 들어 적절한 노동 조건과 생활임금같이 - 모든 노동자들이 바라는 기본적인 요구이다. 하지만 회사는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불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 그것은 노동자들이 지불하는 배당금이다.

     

    사용자들은 우리에게 회사를 도우라고 요청하는 뻔뻔함이 있는데, 이는 실제로 더 많은 배당금 지불을 위해 우리의 생활 수준이 악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우리의 임금과 노동조건의 수준이 이윤 창출에 달려있고,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불할 수 없다면 우리의 요구는 ‘공정”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이 있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윤의 일부가 더 많은 자본으로 전환되어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고 떠든다. 이렇게 재투자된 자본에 대한 수익은 실제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자에게 훨씬 적다. 사회에서 소비하는 모든 것을 만드는 생산자를 더욱 심하게 착취하고 억압하는 이런 사회는 거꾸로 된 세상이다. 그리고 이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곳에서 전 세계의 모든 전쟁, 지구 파괴, 수억 명의 소외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이윤보다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사업장에서 파업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을 지켜낼 때, 그들은 새롭고 정당한 세계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사용자와 주주들에게 지불할 이윤 창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직된 세계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조직된 사회를 ”코뮤니즘“이라고 부른다. 코뮤니즘은 전체주의 독재, 군국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와는 정반대이다. 코뮤니즘은 우리에게 진정한 미래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이며, 해방연맹은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해방연맹(Liga Emancipación/Emancipation League)

    2018년 9월 21일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0-01/the-struggle-of-the-metro-workers-of-granada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노동자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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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민주주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집단행동을 결정할 때마다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뿌린다. 우리는 진정한 자주적 노동자 투쟁을 아래로부터 조직한다. 대중총회에서 파업위원회를 선출하여 파업을 조직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과 연결시킨다. 파업위원회는 대중총회에 책임이 있으며 즉시 소환할 수 있다. 대중의 필요에 따라 파업위원회의 위원을 교체할 수 있다.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와 수십억의 자본가 자금을 배경으로 선거에 나온 하나 또는 다른 정당에 5년마다 투표하는 자본주의의 선거제도와 비교해보라.

     

    우리 제도는 지역 차원의 평의회(위원회)를 기반으로 하고 중앙의 상위조직에 파견할 위원을 선출한다. 평의회 위원은 누군가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과는 다르다. 실제로 국회의원들은 그들을 선출한 유권자를 대표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나 정당만을 대표한다. 그리고 한 번 선출되면 그들을 수년간 소환할 수 없다. 하지만 평의회(위원회) 제도는 완전히 다르다. 모든 수준에서 평의회가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신속하게 소환할 수 있다.

     

    인간의 필요 충족을 위한 생산

     

    평의회는 현재 실행되는 부르주아 제도보다 훨씬 "민주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통제 없이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새로운 풀뿌리 기반의 직접민주주의 정치 구조에 머물지 말고, 이윤을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개인과 지역 사회의 필요를 직접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본과 돈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해야 하고, 노동과 자원의 배분 그리고 공동의 합의로 정한 우선순위에 따른 새로운 회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노동과 임금 노예 생활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의미 있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균등하게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뮤니즘 세계는 칼 맑스의 본래 주장처럼 조직될 것이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각각," 코뮤니즘은 소련에 등장한 국가 자본주의의 악몽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특히 그 모델은 중국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었다. 중국에서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을 훔쳐서 그것을 완전히 왜곡한 장본인들이 국가자본주의를 진두지휘했다. 이 괴물 같은 왜곡은 코뮤니즘에 대한 맑스의 전망인 계급, 민족, 그리고 국가 없는 세계, 다시 말해 세계적인 인간공동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어떤 운동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코뮤니즘 사회에 도달하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정적 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주장이다. 인간의 본성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종류에 따라 형성된다. 우리는 300년간 자본주의의 경쟁, 전쟁, 탐욕을 겪었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혁명은 항상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켰다. 혁명은 사람들에게 “낡은 오물을 치워 버리도록”(칼 맑스) 할 것이다. 미래는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계급전쟁!

    자본주의 고통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

    노동자의 가짜 친구를 경계하자!

     

    2018년 9월 18일 오로라(Aurora)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9-13/the-working-class-holds-the-key-to-a-new-world

     

    정리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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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더 깊은 생각

  • 노란 조끼 운동에 대한 더 깊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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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 2019년 1월 초 – 노란 조끼 운동이 퇴조기에 접어들었는지 아니면 한 달 이상의 격렬한 활동과 국가와의 심각한 충돌 이후, 잠시 숨 고르기에 접어들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마도 프랑스 사회의 - 일부 과장된 논평이 묘사하듯이 - 다양한 계층의, 그러나 주로 하위 계층으로 이루어진 이 “봉기”의 몇몇 특징은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저항을 촉발시켰으며, 우회로 근처에 모여 가장 “전략적으로” 민감한 지점의 도로를 막고, 그 외 투쟁의 새로운 계획을 세운 프롤레타리아에 속하는 이들과, 일부 빈곤에 빠진 소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존재 양식의 충돌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똑같은 과정 -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 에 의해 뭉쳤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비참함의 원인인 경제위기는 자본가들을 가능한 더욱 냉혹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봉기가 일어난 곳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가 밀집된 대도시의 “교외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서비스 삭감(병원, 학교, 대중교통, 공공 기관)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정부가 수십 년간 유예 없이 추진해온 임금삭감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프랑스 작은 마을(Deep France/La France profonde) “사람들” -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낙후되거나 쇠퇴한 계급으로 이해되는 - 이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임금이 너무 낮은 탓에, 또는 대형마트의 개점으로 지역 상점의 고객이 극적으로 감소한 탓에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힘들어진 “평범한” 사람들이 생긴다. 그들은, 많은 지역 버스와 철도 서비스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직접 돌아다녀야 하고, 소형 병원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기 위해서는 수 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한다. 모든 것이 예산 제약, 긴축재정의 결과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긴축 재정에 대해 더 말해보자. 그것은 일반적인 ‘유럽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완성이고 불안정한) 초국가적인, 유럽연합을 통해 유럽의 부르주아지가 합의하여 부과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평범한 노동조합이나 정치적 시위에 참여한 경험이 드물거나 없으며, 부르주아 세력과 직접 대립한 경험은 더 적은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새롭지 않은 패턴을 따라, 사회 하층부에 축적된 분노는 갑자기 폭발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노동조합과 “좌파”의 몇몇 분파, 그리고 다소 “급진적인” 좌파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리고 또한 노란 조끼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기를 원하는, 르 펜[1]으로 대표되는 준-파시스트 “포퓰리즘”의 주장과는 또 반대로, 이 운동이 시작하고 발전한 장소도 국민전선이 선거에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지역이 아니고, 최근 여론조사에서 내무부 장관과 가까운 동맹이 인기가 높아진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포퓰리스트”나 민족주의 우파가 이 운동을 지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운동은 모든 제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formations)에 대한 건강한 불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치적인 지도자들은 이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물론, 형태가 없는 개방된 성격을 감안할 때, 운동의 계급 간 특성은 누구나 쉽게 안쪽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 극우파들은 이를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작은 마을의 현을 불태우려는 시도는 정확히는 신-파시스트 호전파의 행동이다. 거리에서 피켓에 인종차별주의자와 외국인 혐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종종 라 마르세예즈를 동반한 삼색기의 거대한 물결을 목격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우익이라고, “포퓰리스트”라고, 또는 “정체성”에 기반해 있다고 환원시키는 것은 실제 흔적과 거리가 멀다. 사실, 당신이 노란 조끼들이 언론과 의회에 보낸 주장을 살펴본다면[3], 그 주장에는 “포퓰리스트”가 정부에 있을 때[4], 그들의 실제 정책을 거부하는 노란 조끼의 여러 가지 “요점”이 있다. 그리고 포퓰리스트들은 선거 운동에서 한 공약(텅 빈 약속)을 강제에 의해 철회해야만 했다.

     

    “요점”을 간추려보면, 진보적 소득세[5], 고된 직업을 가진 이들에 대한 55세와 60세부터의 연금[6], 그리고 생활비에 연동된 한 달 최소 2,000유로의 연금 요구이다. 이를 제쳐두더라도, 이것은 이탈리아 마테오 살비니에 의해 통과된 ‘월 1,520유로 이상의 연금 연동’ 거부 조치와 반대되는 것이다. “요점”으로 돌아가서, 그것은 최저임금과 임금 일반의 인상, 물가상승과의 연동, 그리고 (권리보장 측면에서) 외국에서 체결된 계약에 대해서도 프랑스에서 일한다면 이들에 대해 “프랑스의” 임금을 지불할 것에 대한 요구이다.[7](역자 주 : 이주노동자에 대한 임금차별 철폐) 그리고 다시 불안정한 일자리 규제, 상대적으로 저렴한 에너지 가격으로 에너지 서비스를 재구성하는 것, 사회 서비스 삭감을 철회하고 노인·장애인·아동을 위한 향상된 돌봄서비스를 통한 사회 서비스 확충, 주택 혜택 및 학생을 위한 복지 등도 모두 요구한다. 또한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 보호 요구 [8] 그리고 “심지어” 망명 신청자가 잘 대우받고 통합이 촉진되도록 이민자를 위한 프랑스어[9], 프랑스 역사 강좌에 대한 요구도 있다 : 물론 이것은 민족주의의 길을 여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거대하고 명백하게 반동적인 자본에 의해 무너진 소부르주아지의 요구로서, 자본주의적 존재 방식이 중소영세기업을 보호하는 법률에 의해 결코 중단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10]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것이 사실이나, 본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다양한 “사람”의 운동에서 이는 보통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만"의 일부분은, 10년이 넘는 자본주의 경기 침체를 관리하려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부서지고 거절당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이러한 자발적 주장은 모든 즉자성과 자발성으로 표현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학적 지평을 나타내며, 그렇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자본의 공격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반응으로서, 생존의 필요에 대한 자발적 표현이며, 계급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반-자본주의 관점의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이지만, 급진적 개량주의에게 이러한 요구는 단지 계급의 반응 정도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레시피)에 불과하다. 그것은 깊은 위기에 빠진 체제 내부의 경제-사회적 공간을 정복하자(이것이 그들의 환상이다)는 슬로건이며, 따라서 그 공간은 그들을 수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체제가 슬로건을 받아들이더라도, 상황을 다시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만,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그러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지금까지 주어진 것을 되돌리기 전에.

     

    어쨌든 “불만”은 요구이다. 그 요구는 소위 평조합원 노동조합주의가 주도하는 급진적-개량주의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짐의 일부이다. 이들은 적은 수로 이뤄진 혁명가들보다 프롤레타리아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이 혁명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물질적 필요를 개량주의로 치부하며 경멸하고 거부하는 추상적인(형이상학적인)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취하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혁명가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 말고, 중요한 점은 실질적인 임금 인상을 경시하거나 55세에 은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 누가 그렇게 어리석은가? - 중요한 점은 적절한 방식으로 노동 계급의 요구와 부르주아 계급의 요구를 대비시키는 것이다. 즉, 즉자적 요구에서 시작하여 이를 계속해서 거부하는 체제의 혁명적 전복을 목표로 하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회성 파업이 아닌 몇 달 전부터 선포된 봉기의 흐름 속에서, 마크롱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불가피한 반발을 고려하면서도, 적자를 증가시킨(그는 단지 올해뿐이라고 말한다) 유류·연금에 대한 세금 인상을 철회했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 부르주아지(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를 타격하기 위해, 노란 조끼 프롤레타리아 부문의 주장은 단지 공감이나 도덕적 지지만이 아니라, 계급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충분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당연히 '포퓰리스트'를 포함하여, 국가와 모든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대표자들과 정면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면이 요구된다. 그것은 계급 소요를 질적으로 도약하게 할 도구이며, 계급 소요에 전략과 반자본주의 전술을 제공하며, 계급투쟁으로부터 활성화된 에너지를 부르주아 체제의 공격으로 향하도록 해 준다; 이외에 앞으로 나아갈 다른 방법은 없다. 요약하자면, 코뮤니스트 당, 국제적인 국제주의자 당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다. 당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프롤레타리아트와 쇠퇴한 소부르주아지의 분노는 붕괴되어 흩어지고 말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잔인하게, 또는 거짓된 약속과 함께. 노란 조끼들로 표현되는 그 어떤 정부에 대한 환상도 그저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그곳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희망도 끝날 것이다. 거리 시위에서 한 참여자는 개량주의의 범위를 벗어나는 질문을 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적인 활동만이, 이 단순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 : «만약 (마크롱이) 물러난다면, 누가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11]

     

    2019년 1월 8일

    CB

     

    <주>

     

    [1] 마린 르 펜은 국민연합의 최고 경영자, 지도자이며, 국민연합이라는 이름은 2018년 국민전선에서 바뀌었다.

     

    [2] 출처는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레가(Lega)의 수장이며 르 펜의 동맹이다. 레가는 다른 “포퓰리스트” 당인 디 마이오(Di Maio)의 오성운동(Five Star Movement)와 연합하고 있다.

     

    [3] 이러한 확실성이 가리키는 것은 경험 부족, 대단한 교묘함, 그리고 정치적 미성숙이며, 운동 그 자체에서 비롯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단계의 주어진, 불가피한 요인들이다. 프랑스에서 그 목록은 “노란 조끼”의 “불만 호소문(Les “cahiers de doleances”)”, France-debat인 로버트 듀고(Robert Dugot)의 글에서 보고되었다. 이탈리아 번역판은 Sinistrainrete 웹사이트에 있다. 불만 호소문(cahiers de doleances) 는 1789년 5월 5일, 프랑스 대혁명의 첫 번째 행동을 열었던 삼부회 준비를 위해 모든 사회적 계층의 불만을 모은 문서이다.

     

    [4] 이에 더해, 우리는 이러한 “자치 지역”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정부 프로그램 또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5] 트럼프와 살비니의 일률과세뿐만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정부가 지속적인 방식으로 자본과 거대 자산에 대해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집행한 재정 정책에 직면해,

     

    [6] 그 예로 석공과 정육업자들이 언급된다.

     

    [7] 그것은 이민 노동자들이 속한 부문과 또한 결과적으로 자국의 노동력이 속한 부분 모두에서의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훨씬 급진적인 주장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얼마 전 몬팔코네의 조선소에 일하는 동유럽 또는 극동지역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나라에서 받는 정도와 유사한 수준의 임금, 당연히 이탈리아의 임금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는 관행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나쁜 관행이 없어졌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럴 것이라는 데에는 회의적이다.

     

    [8] 저항 초기의, 노란 조끼는 환경에 대해 “조롱한다”고 이야기한 이들과는 반대로

     

    [9] 우리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면, 매우 상식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10] 이런 것 가운데는 소규모 거래와 거대한 대형마켓의 개점의 중지, 프랑스 산업의 보호 및 이전의 금지 또는 중지, 중소사업에 대한, 그리고 운송업자와 농업인에게 영향을 주는 연료에 대한 세금의 감면이 있다. 경찰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경찰, 사법부, 군대에 대한 자원의 확충 요구는 없었다.

     

    [11] 2019년 1월, 르 몽드 리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tique) 사건기록

     

     

    출처┃국제코뮤니스트경향(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9-01-18/some-further-thoughts-on-the-yellow-vests-movement

     

    번역┃dong 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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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다가오는 이스라엘 총선 : 계급의 전망

다가오는 이스라엘 총선 : 계급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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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서문

  

2018년 12월 말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Amos Oz)가 79세로 별세했다. 그는 근대 이스라엘 국가의 지난한 역사를 연대기로 기록한 탁월한 소설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점증하는 군사적 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자였다. 1967년, 6일 전쟁의 열광의 한가운데에서 오즈는 그 점령이 이스라엘 사회에 가져올 도덕적으로 부패한 영향력을 경고한 드문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점령의 즉각 종결과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옹호했다. 이 견지는 그 당시 과격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곧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무제한적 포퓰리즘의 시대에는 심지어 이렇게 온건한 제안조차도 극도로 공상적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우익 네타냐후 정권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설을 향한 그 어떤 진전도 말살시키려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 해오고 있는 와중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의 대대적인 국외 추방을 초래하게 될 한 국가 해법인 ‘더 위대한 이스라엘’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보다 더 우파에 속하는 이들로부터 점점 더 커지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은 그 시온주의 국가의 군사적 파괴를 결정하게 될 이슬람주의 분파들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는데, 이 해법은 의심의 여지 없이 또 다른 대대적 국외 추방, 즉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추방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점점 더 험악해지는 분위기에서 이스라엘 내부로부터 나오는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인 입장의 흔치 않은 표현의 하나인 한 기고문의 출현을 우리는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고문의 저자는,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모든 국가의 투쟁과 슬로건은 반동적으로 되어 버렸다는 맑스주의의 입장을 취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제국주의가 만든 함정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계급에 기반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단결이고 모든 부르주아 국가에 대항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거침없이 주장한다.

  

상당히 올바르게도 이 동지는 이러한 전망을 대표할 혁명 정당의 건설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세계 자본의 주요 중심지에서 노동자계급이 그 역사적인 기획인 코뮤니즘을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국제적인 발전의 일부로서만 오직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사이에 어떤 지속적인 단결도 오직 계급투쟁의 전 세계적인 재생의 일부분으로서, 최근 모든 곳에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만,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는 그 특별한 역사 때문에 더 증가한 힘을 방출하는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의 물결을 물리칠 수 있는 운동의 한 일부로서만 오직 가능할 것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적인 대안을 중동에서 옹호하는 극소수의 출현은,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이러한 혁명적 미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결 고리이고, 이 혁명적 미래는 여전히 가능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ICC

  

2019년 4월에 예정된 이스라엘의 조기 총선에서는 이 시온주의 국가의 불안정성이 주목될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조기 총선 요청을 선택한 것은 텔아비브 정권이 직면한 곤경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 검찰이 네타냐후를 뇌물 수수 및 사기 혐의로 고소하려는 결정이 예상되는 것 또한 조기 총선을 발의하려는 그의 결심에 한 요소로서 작용하면서 시온주의 체제는 극심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노동자계급은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수십 년간의 군사 점령 대가를 계속 지불할 가능성의 측면에서 지독한 악화를 느낀다. 보건과 교육 체계의 재정 지원은 미흡하고 소비 재화와 용역의 가격은 상승하여, 빈곤에 처하게 된 국내 노동자 사이의 여러 계층은 그들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의 20%가 빈곤하게 사는 이 나라는 서방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중의 하나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점령군에 저항하는 웨스트뱅크(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파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그 남쪽 국경은 분단 장벽 근처로 무장된 저항을 진행해가려는 하마스의 계속된 시도 때문에 불안정하다. 이슬람 투사들은 남쪽의 이스라엘인들에 대항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북쪽 국경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있는 이란 혁명군의 기지들을 계속 군사적으로 공격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이스라엘군과 헤즈볼라는 전쟁 가능성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근접해 있다. 미국 행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있는 이슬람주의자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국경에서 공격적인 정책(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인해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혹독한 상황에 처해 있다)을 펼치고 있고 이란의 민병대를 (이들이 장래의 전쟁에서 헤즈볼라를 돕게 될까 두려워하며) 시리아에서 몰아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이러한 상황은 그 불안정성과 위기를 표시한다. 차별주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노동자계급이 점령과 국가의 군사적 공격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그와 동시에 정부가 경제를 운영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을 수용하게 될 조건을 유지하려 모색한다. 해외의 우익-포퓰리스트와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지배 계급은 민족주의적 보이콧과 박탈과 처벌(BDS) 운동에 대항해 싸우면서 시온주의적 식민화 계획을 생생히 유지하기 위해서 대중들을 억압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민족적 억압과 자본주의의 잔혹한 착취라는 이스라엘의 조건을 더는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부는 네타냐후 정부에 대항하는 이스라엘 야당이 이스라엘의 부르주아 엘리트에 봉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당에 의해 이미 동원된다.

  

정치적 대안의 부재

  

이스라엘의 정치체계는 파편화되어 있고 허약하다. 정치적으로 우파 정당들은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Likud)당을 위주로 전통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우파 정당 사이에서도 분열과 위기가 있다. 크네셋(Knesset) 안에는 1973년 창당된 극히 배타주의적인 신자유주의 형태인 리쿠드가 가장 큰 정치 분파이지만, 리쿠드보다 작은 다른 정당도 있는데, 이들의 정책은 더 극심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이다. 이러한 정당은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게 될 더 위대한 이스라엘(The Greater Israel)을 만들려는 목표를 추진한다. 네타냐후의 연정에 참여한 유일하게 ‘중도적’ 분파는 이전의 리쿠드 당원 몇몇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렇지만, 이 분파는 네타냐후와 정치적 우파들이 국가의 경제를 자본주의적 극단으로 내몰아 가는데 협력했다.

  

네타냐후에 대해 반대파를 형성하는 정당은 정책과 이념에 있어서 균일하지 않다. 그들 중의 하나는 노동당인데, 그 기회주의적이고 사회배타적인 정책을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불신한다. 다른 하나는 작은 사회민주주의적 시온주의 당, 메레츠(Meretz)인데, 그 정치적 선거 영향력은 협소하다.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정치정당에 의해 대표되는데, 이 안에서 스탈린주의적인 이스라엘 코뮤니스트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좌파-중심 뒤죽박죽 집합체의 문제는 정치적 측면에서 그들의 이질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과 아랍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유사-좌파 시온주의자 분파들도 반시온주의 아랍 코뮤니스트 당들도 수십 년간의 점령, 잔인한 자본주의, 긴축 정책과 계속되는 사회적 위기로부터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상황은 이스라엘이 정착민-국가로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계속해서 식민화하는 한 유감스럽긴 하지만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점령 문제는 이 나라의 정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정치적 우파가 점령과 식민화의 강화를 갈망한다면 정치적 유사-좌파는 이미 사멸한 두 나라(Two-States) 해법을 추진하는데, 그 해법 상으로는 작은 팔레스타인 반투스탄(Bantustan)국가가 이스라엘과 나란히 창건될 것이다. 민중들은 이 유혈 충돌의 종결을 보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하는 반면, 우파는 노동자계급을 민족주의의 대열로 분열시키려고 과격한 배타주의와 해악한 민족주의를 퍼뜨리면서 번창한다. 유사-좌파는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될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반한 해법 밖에는 제시하지 않는다. 100년 이상의 유혈 충돌에 대해 진정한 대안 없이 민족주의는 번창하고 배타주의는 이스라엘 노동자들과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사이의 진정한 화해로의 그 어떤 변화도 좌절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 나라 해법(The one-state solution)

  

몇몇 좌파 써클 사이의 새로운 유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민족 단일 국가 개념인데, 이 국가는 그 두 민족에게 ‘자결(self-determination)’을 제공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 생각은 팔레스타인에 두 개의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전망에 대해 절망하는 과격파 진영에서 점점 더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자결’이라는 슬로건은 기만적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자결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 체제의 확립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의 시점에서 볼 때 부르주아 국가의 건설은 계급투쟁의 측면에서 궁지에 몰리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안에서 자결을 요구하는 것은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위험한 환상을 구성하고 노동자계급이 민족 부르주아계급과 구별되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 대열을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존재하고 혁명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에서의 혁명가들은 ‘자결’의 요구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한층 더,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이 권리가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상충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입장은 팔레스타인에서의 현실과 모순되는데, 부르주아지는 한 나라로 단일화된 자본주의 경제 상황에서 이득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는 그들이 계급 대열을 따라서 통합되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자결에 대한 반동적 요구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를 성취하는 것을 저지하길 원하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손에 쥔 무기이다. 이점에 우리는 제국주의의 시기에 자본주의는 민족 국가와 경제를 파괴하고 식민화 과정을 통해 세계시장을 건설하려 모색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진정으로 독립적인 민족 국가의 건설이 가능하던 시대로 회귀하려는 과격한 충동은 공상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질서 내에 하나의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요구는 사실상 부르주아지에게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라는 요구와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건설된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은 억압받고 자본주의 지배 계급에 대항해 자체의 권리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 그룹이 주를 이루는 극소수는 하나의 팔레스타인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즉, ‘억압받는’ 민중들,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성격을 지닌 민족 국가의 건설을 주창한다. 이렇게, ‘억압받는 자’와 ‘억압자’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권력 쟁취를 목표하는 혁명 기획에 모순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차이를 흐리게 만든다. 민중의 통합성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기반 위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이런저런 좌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파시즘에 의해 분쇄되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구해내기 위해서 다양한 정당 - 자유주의자, 개량주의자, 스탈린주의자 또는 트로츠키주의자 - 에 투표하라는 요구가 있다. 그런데, 이 요구는 제국주의 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적 체제이고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는 믿음을 반영한다. 민중은 민주주의를 보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파시스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잔재를 파괴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부르주아-민주주의/자유주의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 파시즘이 승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행위자로서 노동자계급의 힘을 위축시키는 정치적 전략이다. 파시즘은 민중들의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혁명적 행동을 통해 패배할 뿐이지 자본주의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자들에 의해서 패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치 체계 안에 존재하는 현재의 ‘좌파’정당은 자본주의 질서를 옹호하고 자본주의 내에서 민족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점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다른 정당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부패되어 가는 질서를 옹호한다, 그 죽음의 마지막 고통을 겪고 있는 질서를. 이러한 정당은 민중을 자신들 주위로 끌어모을 수 없는데,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의 지도력도 그들의 강령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 강령을 추진할 자신의 혁명당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량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에 의해 제안된 게임, 즉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하고 그래서 혁명이 허공에서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잘 못 된 것이고 기만적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신비화는 ‘시민권(citizenship)’과 같은 개념을 확고하게 믿는 자들이 행한 잘못된 분석에서 유래한다. 사실상, 계급 사회 안에서 유일한 진정한 민주주의,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혁명이 근접해 있거나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르주아 의회 안에서 활동한다는 환상을 가지고는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이 분석이 목표한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내의 노동자계급에게 그들의 투표용지를 망쳐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강령에 근거한 단일한 혁명 정당 안에 조직하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와 전쟁을 일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혁명을 통해서이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미래를 코뮤니스트 사회 안에 건설하기 위해 단결해야만 한다. 

  

DS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618/coming-elections-israel-class-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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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창설 100주년]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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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19년 3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 총회의 대표들

     

    •  

       우리가 기념해야 할 수많은 기념일 가운데 매체와 역사가들이 짧게 언급하고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기념일이 있다. 1919년 3월 열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하 코민테른)>의 창립대회가 그것이다.

       

      코민테른 창설의 기념은 계급투쟁이 오늘날 위기로 고통받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착취 받는 계급일 뿐 아니라 혁명계급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부르주아지 자체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을 현재의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1919년 국제적인 혁명 물결

       

       코민테른의 창설은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열광적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특히 그들에게는 국제적인 혁명 물결의 솟구치고 피할 수 없는 조류에 직면한 1차 세계대전 말의 공포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들의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바리아와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 사이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의 수상인 로이드 조지는 만일 그가 러시아 정복을 돕기 위해 천 명의 영국 군대를 파견한다면 그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영국의 군사점령이 볼셰비키에 맞서 이루어진다면 영국은 볼셰비키가 되고 런던에 소비에트가 건설될 것이라고 1919년 1월 선언했다. 그것은 러시아 노동자평의회 권력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경악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다.

       

      “유럽 전체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전쟁 조건에 반대하는 불만감뿐만 아니라 분노와 반항감이 깊이 쌓여 있다. 정치적·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해 유럽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인민대중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 H. 카의 「볼셰비키 혁명」 3권, 135쪽에서 인용)

       

       우리는 오늘날 코민테른의 창설이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중국)로, 그리고 캐나다(위니페그)와 미국(시애틀)의 ‘신’세계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1914년 전쟁이 꿀꺽 삼킨 제2 인터내셔널 사회민주주의의당들과 개별 투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그들이 혁명과 코민테른을 맞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코민테른은 각기 다른 나라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2천만 명을 희생시킨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 후 만들어졌다. ‘제국주의 전쟁을 기억하라’ 이 말은 코민테른이 모든 남성 노동자와 모든 여성 노동자에게 한 첫 번째 말이다. 그들이 어디에 살건 어떤 언어로 말하든지 그들에게 한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에 한 줌의 제국주의자들이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각기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이 서로의 목을 베도록 강제했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르주아지의 전쟁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가장 가공할 기근과 가장 소름 끼치는 참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는 이러한 강도 같은 전쟁의 반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함을 기억하라” (2차 대회에서 채택한 코민테른의 문건, 제인 데그라스, 「코민테른 1919-43: 문헌집」)

       

       

      2.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연속성

       

      (1) 제2 인터내셔널과 제국주의 전쟁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칼 맑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근본적 원칙 하나를 정립했다. 이 원칙은 노동자들이 민족 국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민족문제와 그들 역사적 투쟁 하나의 기능으로서 민족 전쟁 문제에 대해 노동자의 입장과 태도를 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는 제1 인터내셔널(1864~73)과 제2 인터내셔널(1889~1914)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특히 러시아 차르 체제와 같은 봉건적이고 군주적 반동에 맞서는 민족해방 전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두에 서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시기 변화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의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하는 전투로 이끈 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이었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러시아 1905년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킨 1907년 슈투트가르트의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러시아에서의 대대적파업과 전쟁(편집자)]에 대해서 우리가 위대한 러시아 혁명[1905년(편집자)]의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을 러시아와 폴란드 대표들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요청받았습니다. …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을 끝내려고 일어났습니다. 혁명이 없었다면 차르 체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전쟁을 지속시켰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BD 울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에서 인용)

       

      좌파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들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 인터내셔널의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맞서는 위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들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앞글)

       

      (2) 제2 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죽음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기회주의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열에 쓸려 제2 인터내셔널은 깨어져 부끄럽게 목숨을 다했다.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들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 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레닌, 「제2 인터내셔널의 몰락」)

       

       소수의 당만이 이러한 폭풍 속에서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와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으며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재건해야 했다.

       

      “제2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 인터내셔널 만세!” (레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1914. 1. 10)

       

      (3)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건설을 향한 발걸음

       

       1915년 9월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침머발트 대회'가 열렸다. 이어서 스위스의 키엔탈에서 1916년 4월 2차 대회가 열렸다. 전쟁과 억압이라는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침머발트 대회는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식했다. 대회의 다수파는 ‘거룩한 동맹’의 진영으로 넘어갔거나 그들과 분리되어 관망하는 사민당들의 기회주의 우파를 비난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중도주의 다수파는 '평화'라는 표어를 방어하는 평화주의자였다.

       

      볼셰비키 분파의 대표인 레닌과 지노비예프의 주도 아래 통일된 '침머발트 좌파'는 분립의 필요성과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주창했다. 평화주의에 맞서 그들은 "혁명적 행동 없는 평화 투쟁은 공허하고 기만적인 문구”(레닌)라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슬로건으로 중도주의를 반대했다. “이 슬로건은 구체적으로 슈투트가르트와 바젤대회의 결의문으로 나타난다.”(레닌)

       

      이들 대회를 통해 '좌파'는 힘을 얻었지만, 다른 대표들을 깨닫게 할 수 없어 소수파로 남았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 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4) 프롤레타리아트가 슈투트가르트와 바젤 대회의 결의문을 수행하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이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 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는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분리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5) 코민테른의 건설 : 제2 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원칙과의 연속성

       

       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미 죽은 제2 인터내셔널 당의 우파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기반으로 1919년 3월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그 공헌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에 생명을 다한 공식적 사회주의당의 냉담, 거짓 그리고 부패를 쓸어버리면서, 우리 코뮤니스트들은 제3 인터내셔널에서 하나가 되어 바베프로부터 칼 리프크네히트,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로 기다랗게 이어지는 혁명 세대들의 영웅적 노력과 순교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우리를 생각한다.

      제1 인터내셔널이 발전의 미래 경로를 미리 비추고 그 도정을 가리켰다면, 그리고 제2 인터내셔널이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모으고 조직했다면, 제3 인터내셔널은 열린 대중행동의 인터내셔널이고 혁명적 실현의 인터내셔널이며, 행위[실천]의 인터내셔널이다.” (코민테른의 선언)

       

      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1차 대전 이전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시킨 제2 인터내셔널이라는 역사적 대열로부터 선발해 재편한 그룹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음을 우리의 경험은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그룹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선진적 강령을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빌랑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이론지], 1936년 8월, 34호, 1128쪽)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침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침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침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침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침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침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우리는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우리가 계통적 측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코민테른은 느닷없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강령과 정치적 원칙도 마찬가지다.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역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나키스트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코민테른을 단지 노동자 대중의 혁명운동 산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속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코민테른이 왜 그리고 어떻게 제2 인터내셔널과 결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슈투트가르트 결의에 표현된 두 인터내셔널 사이의 연속성이 있지만, 두 인터내셔널 사이에는 단절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속에, 그 정치적 입장에, 그리고 '세계 코뮤니스트당'으로서의 조직적이고 전투적인 실천 속에 구체화되었다. 사실 단절은 물리적인 유혈 탄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성원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참여한 케렌스키 정부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볼셰비키를 억압하고, 독일에서는 노스케-샤히드만 사민주의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당을 억압해서 단절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속성 속의 단절'을 인식하지 않으면, 1920년대의 코민테른의 퇴행, 그리고 그 내부의 투쟁, 그리고 1930년대 ‘이탈리아’, ‘독일’ 및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좌파의 외부투쟁 및 그들 세력의 배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과 그들이 방어하는 입장은 이런 좌파들이 코뮤니스트 원칙을 지키고, 코민테른 및 1917~23년의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했던 그들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유산인 제2 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인식하지 않으면, 코민테른의 기반, 오늘날까지 중요한 몇몇 기반의 타당성,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의 공헌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오늘날 혁명적 입장을 지속해서,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방어할 수 없음을 뜻한다.

       

       

      3. 코민테른의 제2 인터내셔널과의 단절

       

      (1)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

       

       1919년 1월 말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창립대회의 초대장을 썼다. 그 대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채택할 정치 강령의 원칙을 결정했다. 사실 이 편지는 제안된 ‘코민테른 강령’이고 그를 잘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주요 코뮤니스트당의 강령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의견으로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여기서 강령으로 제시했고, 독일 스파르타쿠스 동맹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의 강령에 기초해서 구성된 다음의 제안에 기초해야만 한다.” (데그라스, 앞글)

       

       사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8년 12월 29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 창설된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끔찍한 탄압기 동안에, 사민주의 세력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 독일 코뮤니스트당은 두 명의 주요 지도자를 잃었다. 이처럼 바로 창립 순간에 코민테른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첫 번째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창립 두 달 전 코민테른은 그의 명성, 힘 그리고 이론적 능력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필적할 두 명의 지도자를 잃었다. 지난 세기말 자신의 저작에서 코민테른의 정치 강령의 기초가 될 핵심을 가장 많이 발전시킨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2)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1914년 전쟁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기를 열어 놓았다는 점이 명백했다. 제국주의 살육 이후 이러한 입장은 더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 혼돈 속에서 멸망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에서 구원을 발견하느냐” (독일 코뮤니스트당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한 연설)

       

      이러한 입장은 코민테른에서 강력하게 재확인되었다.

       

      “1. 현시대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닌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유럽 문명의 전체를 끌어내릴, 전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몰락과 해체의 시대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앞글)

       

      “새로운 시대가 태어난다! 자본주의 소멸과 내부 해체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혁명의 시대가!” (코민테른 강령, 앞글)

       

      (3) 자본주의 쇠퇴 시대의 정치적 함의

       

       코민테른의 지형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본주의의 쇠퇴는 삶의 조건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기를 들어 카우츠키와 같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의 사상과는 반대로 전쟁의 끝은 전쟁 전 시기의 삶과 강령으로 회귀하는 걸 의미할 수 없었다. 이는 죽은 제2 인터내셔널과 코민테른 사이의 단절의 한 지점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계대전은 세상의 전환점이다. (…) 우리의 투쟁을 위한 조건과 우리 자신은 세계대전으로 발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룩셈부르크, 「유니우스 팜플렛」으로 알려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1915)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가 열렸다는 것은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삶과 투쟁의 새로운 조건을 의미했다. 1905년 러시아 대대적파업, 그리고 노동대중 단일 조직의 새로운 형태인 소비에트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자본주의 쇠퇴기의 개막을 예고했다. 룩셈부르크(「대대적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 1906)와 트로츠키(1905년 그의 책)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본질적 교훈을 끌어냈다. 룩셈부르크와 함께 모든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대대적파업에 대한 논쟁을 이끌었으며 노동조합과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이고 점진적 진화라는 그들의 전망에 맞서서 정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사민주의적 실천과 결별하면서 코민테른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기본적인 투쟁방법은 자본의 정치 권력에 맞서 공개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행동이다” (「초청장」, 데그라스, 윗글)

       

      (4)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대중의 행동은 부르주아 국가와의 충돌로 나아간다. 코민테른의 가장 소중한 공헌은 국가에 대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사민주의의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파리코뮨과 1905년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평의회로 권력을 행사한 1917년 10월 혁명의 역사적 경험의 교훈과 맑스주의 방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코민테른은 스스로 명쾌하게 그리고 어떠한 모호함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 노동자평의회 안에 조직된 노동대중의 독재를 선언했다.

       

      “2.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지금 즉각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의 파괴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의 조직을 의미한다.

       

      3. 이러한 새로운 권력 기구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구현해야 하고 몇몇 곳에서는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트, 빈민의 독재를 구현해야 한다. (…) 소비에트 및 그와 비슷한 기구의 권력을 통해 그 구체적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자본의 즉각적 전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와 국가 재산으로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여야 한다.” (윗글)

       

      이 문제는 레닌이 제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던 창립대회에서 본질적인 문제였다.

       

      (5)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테제

       

       이 테제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그릇된 대립을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어떤 문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추상 속의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만 있을 뿐이다” (윗글)

       

      파리코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독재적 성격을 드러냈다. 자본주의에서 ‘순수한’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사실 기껏해야 자본의 독재의 형식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의 자유나 출판의 자유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인가?

       

      “‘출판의 자유’는 ‘순수 민주주의’의 또 다른 대표적 슬로건이다. 여기에서도 또 가장 좋은 인쇄소와 막대한 종이 더미를 자본가가 장악하고 있는 한, 또 자본이 신문·잡지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리고 이 권력은 세계에서, 예를 들어 미국처럼 민주주의와 공화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 명확하게, 더 첨예하게, 더 냉소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이 자유가 기만이라는 것을 … 노동자는 알고 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참된 평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문필가를 고용하거나 출판소를 사들이거나 신문을 매수할 가능성을 자본으로부터 박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의 멍에를 뒤집어버리고, 착취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반항을 분쇄할 필요가 있다.” (「테제」, 윗글)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후 카우츠키주의자들이 한 것처럼 순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는 범죄라고 「테제」는 계속 말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제국주의와 소수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에 수백만의 인민이 참호에서 학살당했고 ‘부르주아지의 군사독재’는 민주적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나라에 세워졌다. 사민주의 정부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고 투옥한 것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들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태 아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착취자를 압도하고, 그들의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완전히 정당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켰고 지금도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에 대한 유일한 방위수단으로서 노동대중 전체에게 절대로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계급의 독재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 이를 포함한다. 즉 (…)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는 착취자 즉 주민 중에서 극소수인 대지주와 자본가의 반항을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

       

      사실, 이미 실제로 창출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여러 형태, 즉 러시아 소비에트 권력, 독일의 노동자평의회, 직장위원회, 이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소비에트적 제도, 이 모두는 다름 아닌 노동계급, 즉 주민 대다수에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조차 전혀 보장할 수 없었던 또 그와 유사한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민주적 권리와 자유가 실제로 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윗글)

       

       오직 세계적 차원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계급을 폐지하며 코뮤니즘으로 가는 길을 보증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폐지는 맑스를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달성될 수 없다. 그러나 오직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만이 실제로 이 목표로 나아가게 한다. 왜냐하면 노동인민의 대중조직을 국가행정에 지속적이고 제한 없이 참여하게 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국가도 완전히 소멸시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글)

       

      국가의 문제는 혁명적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내전을 벌일 때, 그리고 자본과 노동,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감이 극에 달할 때 중요한 문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혁명의 확장, 즉 소비에트 권력을 유럽에 국제적으로 확장할 필요성은 혁명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와 혁명적 물결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그에 맞설 것인가의 문제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편에 선다는 것’은 코민테른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와는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맞선다는 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방어하고 결정적으로 반혁명 진영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둘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중도주의 흐름에게는 그것이 단절과 소멸을 뜻했다. 혁명 시기는 ‘중도 기반’의 멍청한 정책을 가질 어떤 틈도 남겨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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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1차 총회에서의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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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오늘과 내일 : 코민테른의 과업을 지속하기

       

       1914~18년 전쟁이 결정적으로 보여준 시기 변화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단절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를 국가의 문제에서 살펴보았다. 자본주의의 쇠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투쟁 조건에 미친 결과는 일련의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즉, 아직도 선거 참여와 의회의 활용이 가능한가, 노동자평의회가 출현했는데도, 자본가들과 ‘성스러운 동맹’에 참여했던 노동조합이 아직도 노동계급의 조직인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민족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가 그런 문제들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새로운 문제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에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들 때문에 코민테른은 기회주의의 성장에 저항할 수 없었다. 반대로 코민테른은 죽었다.

       

       

       코민테른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고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실질적 퇴행 때문에 그것을 부르주아 조직으로만 보려는 사람은 그걸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낼 수도 없다. 트로츠키주의는 초기 4차 대회를 계승해야 한다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한다. 창립대회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했던 지점에서, 그 후속 대회는 퇴행했다는 점을 그들은 결코 보지 못했다. 1차 대회는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했다. 그런데 3차 대회는 그에 반대해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와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식한 후인데도, 코민테른은 3차 대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부활시켰다. 사민주의당과의 동맹정책은 19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가 ‘입당주의’ 정책을 채택하게 했다. 입당주의란 곧 코민테른 1차 대회의 원칙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 사민주의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레닌이 말한 것처럼 이러한 동맹 또는 항복의 정책은 스페인 내전에서 부르주아 공화 정부를 지지하고, 침머발트와 인터내셔널을 배신하고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반혁명으로 트로츠키 흐름을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1920년대에 코민테른 내부에서 이러한 퇴행에 맞서 투쟁하려는 새로운 좌파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특히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좌파였다. 1920년대 동안 배제된 이러한 좌익 분파들은 코민테른과 혁명적 물결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죽어가는 코민테른과 ‘미래의 당’ 사이에서 연속성을 보증할 정치투쟁을 지속했다. 1930년대에 코뮤니스트 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잡지가 「빌랑(Bilan)」('평가')이었다는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원칙과 연속성을 갖고, 이들 그룹은 제2 인터내셔널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타난 약점을 비판했다. 1930년대 동안의 반혁명과 2차 제국주의 전쟁의 암흑기 속에서 그들이 펼쳤던 이름 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코뮤니스트 그룹이 부활해서 존재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조직적 연속성을 지니지 않지만, 정치적 연속성은 지니고 있다. 이들 그룹이 만들어내고 방어한 입장들은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를 맞아 코민테른 안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답을 주고 있다.

       

      따라서 ‘코뮤니스트 좌파 분파들’이 이루어낸 비판적 재평가의 기초 위에서 코민테른은 오늘날 살아 있고, 미래의 <세계코뮤니스트당>에서 살아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점증하는 착취와 가난에 직면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음과 같은 <침머발트 좌파>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경제 전쟁에서 부르주아지와는 어떠한 신성한 동맹도 없다!

      민족 경제를 구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반대한다!

      계급투쟁 만세!

      경제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경제적 파국, 사회적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전망에 직면해 1919년처럼 오늘날도 역사적 대안은 똑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파괴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인가 아니면 인간성의 파괴인가,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다.

       

      미래는 코뮤니즘의 것이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RL (IR57 2nd quarter 1989로부터 재발행)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 100주년을 맞은 2019년 3월 재발행

       

    • <원문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3066/1919-foundation-communist-international

       

      번역┃오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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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Communist International was formed in order to provide a clear political orientation to this massive upsurge of the class struggle, to point the way to the world-wide conquest of power by the working class. At this point in history, it was a very different organisation from what it later became with the isolation, degeneration and defeat of the revolution in Russia – a simple agency for the foreign policy of a Russian state in the process of integrating itself into the global imperialist system. Revolutionaries today must therefore recognise that the history of the CI is a vital part of their own history. But we are also faced with the task of understanding the weaknesses and failures of the International in order to construct the future world party on the clearest possible programmatic and organisational princi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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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 세력의 망언에 대한 경고

  • 반혁명 세력의 망언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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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당의 5.18 망언과 스탈린주의자의 반공주의 망언이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와 레닌은 단 한 번도 주관적 ㅇㅇ주의자를 자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운동이 유일신을 강요하는 종교로 변질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노동자계급을 지속해서 공격하고 혁명적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반공주의(반코뮤니즘)입니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코뮤니즘으로 바꾸는 혁명은 경제의 '자주 관리'나 '국유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임노동, 상품생산, 국가의 의식적인 폐지가 필수적입니다. 이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인간 필요의 충분한 만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 건설의 과정임을 의미합니다. 이와 무관한 일국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코뮤니즘입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황당무계한 음모론과 맑스레닌주의 참칭 만행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만, 여전히 이들을 용인하거나 함께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의 정치원칙을 가진 '노동전선' 등 노동 정치단체는 공공연한 스탈린주의자를 집행부에 선임한 이유를 밝히고, 본인들도 스탈린주의자인지, 스탈린주의를 용인하는지 밝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 교육을 담당하는 여러 단위도 그들이 반동적, 반혁명적 가짜 사회주의, 가짜 노동해방 사상을 맑스 레닌주의를 참칭해 퍼트리는 현실을 피교육생들에게 객관적으로 알릴 조건을 만들지 않는다면, 스탈린주의자들의 지적 능력을 이용하는 것을 재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토론이 필요합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투쟁이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스탈린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독재)에 탄압받지만, 그들 역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탄압한 반혁명 동전의 양면입니다. 제국주의 대립 체제에서 단지 강한 제국주의 세력의 반대편에 서 있는 다는 이유로 (자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독재자를 방어하는 세력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2018년 2월 23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망언 기사>

     

    "조선일보, 조갑제, 극우 목사 김홍도, 심지어는 한국의 오세철 교수 같은 자칭 ‘좌익 공산주의자’들도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김정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1억 명이나 되는 인민들을 학살했다고 고발하고 있다.

    짧은 글로 제국주의의 반쏘 반공주의 선전의 실체를 다 드러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반스탈린주의는 반쏘주의, 반공주의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필자 백철현은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에서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노동자정치신문>과 <노동자의 사상>을 발행하고 있다. 4.27시대연구원 철학사상분과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6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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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제국주의 특집 : 미국 권력과 전쟁으로의 새로운 경로

  • 미국 권력과 전쟁으로의 새로운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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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에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길어진 기대수명, 기술 진보, 그리고 그 옹호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유발한 기후변화 등 환경 파괴와 같은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이윤 창출에 방해가 되고 있다. 단기적 편의주의는 장기적 재앙이 된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존재 자체를 보다 노골적인 방식으로 위협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60건의 분쟁이 발생했다. 그중 다수는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수백만이 죽었고, 그동안 다른 수백만은 이러한 전쟁에 무기를 공급한 해당 선진국으로 탈출 시도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생존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노동계급의 삶을 ‘방어’한다고 선동하는 인종차별주의 운동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영국의 실질 임금은 1979년 이후 정체했거나 감소해왔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의 결핍은 이 고통을 더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실 위기에 처한 사회 체제가 장기적으로 천천히 부패해 가는 것이다. ‘혼돈’, 이보다 더한 ‘해체’는 최근의 사건들을 묘사하는 마음에 와닿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묘사에 그친다. 필요한 것은, 최근의 구체적인 환경에 대해 폭로하고 그 뒤에 있는 세력들을 이해하기 위한 유물론적 분석이다. 우리가 이를 해낸다면, 역사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최근의 상황에서 모든 모순과 혼란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헛된 짓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국가들의 정치 영역에서의 격동이 하루하루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새로운 미국 정책에 직면한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상 어떤 사건이든 자본주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책은 대규모 제국주의 전쟁밖에 없다는 장기적 관점의 맥락 속에 이러한 사건을 위치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시리아 전쟁에서의 제국주의적 대결 – 미국으로부터 백지 수표를 받은 이스라엘

     

    간단하게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이후 그의 해외 정책 선언은 일관성이나 심지어 정보를 기반으로 한 신중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4월, 그는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였으나 1주일 후, 시리아의 공군 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다. 이러한 180도 전환은 아사드 정권이 포위된 두마의 시민들에게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으로 촉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공군 또한 이 공격에 가담했으며 미국 대통령은 이를 칭찬하였다. 영국의 참가에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는 헤드라인에 “영국은 제3차 세계대전에 말려들었는가?”라고 썼다. 텔레그래프는 이 일을 언급한 유일한 언론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이 공격 이후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으며, 푸틴 대통령은 이 공격을 ‘국제 관계 전체 시스템에 파괴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격적 행동’이라 명명했다.[1]

     

    일견 이러한 경고는 성급해 보인다. 2018년 4월 14일의 공격은, 어쨌든 정확히 1년 전 미군이 행한 유사한 공격의 반복에 불과했다. 그것은 과장된 의례적 몸동작(작년 탈레반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며 아프간 산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재래식 폭탄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을 좋아하는 미 대통령의 전형적 단발적인 행위로 보였다. 더욱이, 4월 공격에서는 러시아와 이란의 군 시설은 모두 포함되지 않았고, 심지어 러시아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비밀리에 경고를 받았었다(그리고 한 알자지라(Al Jazeera)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은 그 후 시리아인들에게 은밀하게 정보를 귀띔해 주었으며, 시리아인들은 위협당한 기지로부터 탈출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파괴적인 군사적 공격이라기보다 경고에 가깝다.[2]

     

    그리고 지금, 언제나 그렇듯 트럼프의 백악관에는 혼란이 있다. 공격이 있었던 밤, 트럼프는 미국이 “시리아 정권이 금지된 화학 무기 사용을 금지할 때까지 미국은 이 대응을 유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후 곧,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국방장관은 이를 부정했다. “지금, 이것은 단발성이며, 시리아 전쟁 기계의 화학 무기 생산 능력을 후퇴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시리아에 대한 공격이 있었던 다음날에는 이보다 더 지리멸렬했다. 그 당시 니키 해일리(Nikki Haley) 미 대사는 UN에서 시리아의 화학 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한 러시아에 대해 경제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그녀는 트럼프가 마음을 바꾸었음을 깨달았다. 짐작하건대, 푸틴과 적대하지 않기 위했음이리라(푸틴과는 7월 헬싱키에서 만날 예정이었으나, 그 회합은 곧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의 진짜 방향에 대한 더 큰 혼란만 드러내었다).

     

    이 모든 혼란,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분쟁은 진정될 기미도 없이 오히려 무한대로 확대되고, 더욱 넓은 중동 지역과 그 너머까지 집어삼키는 더 위험한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터키, 이란,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카타르는 모두 어느 정도는 연관되어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란과 헤즈볼라 건설에 반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감시하고 개입하고 있다. 사우디와 카타르는 지하드 그룹을 여전히 지지하지만, 시리아의 남아 있는 보다 더 유의미한 권력은 현지에 발을 딛고 있거나(또는 동시에) 그들의 대리인을 위한 대공 엄호를 제공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 정책 중 한 가지 지속적이고 위험한 것은 이 지역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반대이다.

     

    그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또는 이란 핵 협정)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철수하고, 미 대사관을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것은 미국이 더는 이스라엘을 ‘제약하는’ 척하기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자지구에서 수천의 시위자들을 향해 발포(그들 중 13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한 이스라엘을 미국이 옹호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정책의 출발을 강조해 줄 뿐이었다.[3]

     

    그리고 중동 아시아의 위험 신호는 계속 강해졌다. 4월 9일,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미사일 공격 며칠 전, 이스라엘은 티야스 근처의 T4 공군기지를 공격했다. 이란 혁명 방어군(Iranian Revolutionary Guards)은 이를 이용했다. 시리아의 이란 드론 작전의 사령관을 비롯한 7명의 이란인이 살해되었다. 지난 2월 드론이 이스라엘에 들어간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이스라엘 고참 장교는 뉴욕 타임즈에서 이스라엘이 기지를 공격했음을 확인했으며, "살아있는 이란인을 목표로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이 군사 기지든 사람이든"이라고 덧붙임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4]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가로막혔으나) 그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시리아의 드론 침입이 두 번 더 있었고,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시리아군, 그리고 시리아 내 이란 기지에 대해 공격을 수행했다. 이는 T4 공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포함했는데, 7월 8일 러시아가 이를 이용했다. 위에서 인용한 이스라엘 총리는 상황을 명확하게 했다. 그는 뉴욕 타임즈를 통해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고, 다음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다. 국방장관 아비그도르 리버만(Avigdor Lieberman)은 이에 더해 “우리는 시리아에서의 이란 통합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2018년 5월 2일, 크네세트(Knesset, 이스라엘 국회)는 수상(네타냐후)과 국방장관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누구와도 협의할 필요 없이 전쟁을 승인할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이란과의 전쟁을 위한 준비 일부분이지만, 이란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우리의 자매 그룹, 국제코뮤니스트당(Il 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a))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텔아비브(Tel Aviv)는 시리아에서의 이란의 영향력에 대해 역공하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모스크바가 방해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장관 스스로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테러리스트’를 자금으로 지원한다며 공개적으로 테헤란 정부를 고발했고, 이는 그들이 돈과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중동의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시리아 습격 전후 몇 번, 이스라엘 당국은 이란 병사들의 ‘그’ 북부 국경(골란 고원)에서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싶다고 공표했다. 텔아비브의 안보 위원회 전임 수장인 야코프 아미도(Yaakov Amidor)는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후퇴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이란의 수상 바흐람 카세미(Bahram Qassemi)의 예상 반응을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로하니 대통령의 이름으로 위협적으로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곧 대가를 치를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만약 시리아의 이란 군에 대한 공격이 계속된다면, ‘올바른’ 반응이 나오고, 그리고 텔아비브의 상황은 보복당하지 않은 채 있을 순 없을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공격이 “이스라엘이 그 지역의 무슬림 민간인들에게 취했던 적대적인 정책에서 뿌리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소규모 접전과 인종-종교적 문제는 차치하고서도, 이스라엘은 테헤란에서 아야톨라의 정치적인 통제 아래에 있는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를 지나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이르는 시아파의 포위 상태를 매우 두려워한다. 이는 골란 고원의 전략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을 위협한다. 다른 한 편, 모든 이슬람을 그 적,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보호하는 투사로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의 일부로,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한 시아파의 투쟁 깃발을 든 것이다.[5]

     

    사우디아라비아 – 살라프파의 국제적 지원자에서 지역의 막후 실세까지

     

    이스라엘이 중동지역 미 제국주의의 한 기둥임이 명백하다면, 다른 한 기둥은 사우디아라비아이다. 미국에게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는, 때때로 모호하긴 했으나, 1945년부터 그들의 중동 전략의 핵심 요소였다.[6] 이란을 끌어내리는 데 광적일 정도의 결단을 보이는 트럼프는 이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역 대적자를 상대하도록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또다시, 광범위한 미국의 안보 이해관계에 대한 그의 무지는 때때로 그 자신의 관료들을 당혹하게 했고, 그가 노린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하나의 예는 그가 (사우디아라비아에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하는 협상을 마무리한 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카타르의 정치적 독립을 파괴하려는 시도에 대해 열정적인 지지를 보낸 작년, 리야드를 방문한 것이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연합국, 바레인, 그리고 이집트가 카타르에 대해 ‘테러 지원국’ 딱지를 붙이며 가한 제재를 지지했다. 그는 카타르 알 웨이드(공군 기지)에 약 1만 명이 주둔하는, 미군 중앙 사령부의 전진 본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트럼프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모하메드 빈 살만의 계획에 휘말린 것이었다. 왕세자는 탈레반, 체첸, 보스니아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무슬림 저항 그룹을 비밀리에 자금 지원한 그의 전임자들의 의심스럽고 은밀한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이제 중동지역 강대국으로서, 특히 이란에 적대하는 사우디의 지배를 주장할 방법을 찾는다. 이것이 사우디가 예멘에서 유혈 낭자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벌이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시리아의 전투적인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하고, 레바논의 수상이 사임토록 시도하고, 이집트 모르시(Morsi)의 선출된 무슬림 형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집트 관리들의 쿠데타에 자금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이유이다. 카타르는 이 모든 움직임에 반대했다. 사우디 동맹의 구성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아랍에미리트는 군주국이었던 반면, 이집트의 알시시 권위주의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들은 카타르 지지에 반대했는데,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전 세계적으로 살라프파(보수적 수니파)에 대해 지원한 바와 같이 지하드 그룹을 지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 같은 대중 운동 때문이기도 했다.

     

    카타르와의 관계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실수에 대해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매티스(Mattis), 그리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노력이 모두 필요했다. 거의 1년 후, 2018년 4월 10일, 카타르 왕족 타민 빈 하마드 알 다니와의 공공연한 거래로, 트럼프는 뻔뻔스럽게도 방향을 돌렸으며, 심지어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를 이슬람 극단 무장 투쟁을 지원하는 공모자로 부각시키기까지 했다.

     

    ... 타민과 나는 몇 년째 함께 일해왔다. 사실, 심지어 테러리즘 이전부터 말이다. 그리고 테러리즘에 대한 자금 지원과 실제로 관련된 – 왜냐하면 내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나라들에서 이제는 그것이 중단되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나라는 테러리즘에 대한 자금 지원을 멈추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바로 그들이다.[7]

     

    사우디 연합이 카타르를 고립시키려 한 시도는 역풍을 맞았고, 그것은 사우디의 탓만은 아니었다. 카타르는 터키(터키는 무슬림 형제단과 시리아의 그룹 일부를 또한 지원한다)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앙카라는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미 제국주의로서는 보다 중요하게도, 카타르 고립 시도는 걸프 협력 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 1979년 이란 혁명에 반대하여 1981년 창설된 동맹)를 무너뜨렸다. 오만은 카타르와 평범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바레인이 (사우디의 명령에 따라) 카타르가 걸프(Gulf)의 항공로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함에 따라, 카타르는 이란의 항공 교통 통제 시설을 이용해야만 했다. 카타르 공군은 이제 이란의 하늘길을 이용하는 항로를 새로 만들었고, 카타르와 이란의 무역이 증가했다.

     

    이란 – 국가와 계급

     

    걸프에서의 사우디 주도권에 대한 트럼프의 지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는데, 그것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는 대신 모든 제재를 중단하도록 하는 포괄적 공동행동 계획에서의 탈퇴 결정과는 달랐다. 오바마의 이란 정책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와 마찬가지로, 트럼프가 원조를 중단하기로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란 지배계급 내의 분열이 더욱 뚜렷해진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글 “이란 노동자들이 ‘반-제국주의 슬로건’을 조롱하다”(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5-10/iran-class-war-against-imperialist-pretensions)

    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란의 노동자들은 이란 공화국에 반대해서 파업하고 시위를 할 뿐만 아니라 이라크와 시리아 정권의 모험을 조롱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은 여기에 낭비된 자원과 이란 자본가들의 임금체불을 대조시킨다. 이러한 국가에 대한 조롱은 유의미하다. 자신의 노동자들에 의해 풍자된 권위주의 정권은 위험한 기반 위에 서 있다. 절망에서부터 비롯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의 결여는 종종 진정한 계급 운동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학자들과 혁명 방위군(Revolutionary Guards)은 당연히 물리적으로(약 24명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배신자들’(모든 노동자 투쟁에서 그들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배신자들이다)이라 주장하며 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에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보다 더 큰 계급 대결을 위한 무대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핵협정 탈퇴 결정은 이미 지배계급을 재결합시켰고, 이제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더욱 단호한 공격에 직면할 것이었다. 세계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러하듯이, 저항을 계속하려는 노동자들에 대해 민족주의가 계속 반복해서, 반복해서 이용될 것이었다. 그곳에서 계급 전쟁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유일한 요인은 끔찍한 이란의 경제 상황이다. [8]

     

    이란 경제 위기의 대부분은 (혁명 방위군의 지도자 같은) 지배계급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이전 유럽과 미국의 제재는 이러한 비탄을 심화시켰다. 진보적인 것처럼 여겨졌던 로하니 대통령 주위의 세력은 경제 조건의 악화에 대한 변명이 바닥났다. 트럼프는 핵 협정을 끝내고 새로운 제재를 가하는 것(이 역시 이란과 거래하려는 계획이 있던 유럽 기업에 반하는 것이었다)이 정권을 끝장낼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위험한 이란 경제 조건이라면 계산대로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핵 협정에서 탈퇴한 이후 이란의 지배계급은 계속되는 외부의 적에 대항하여 더욱 뭉쳤고, 정권과 그 지지자들은 다시 한번 시위 구호로 ‘미국에게 죽음을’ 외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란 정권에서 본국의 문제는 (핵 프로그램을 재개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훨씬 모험주의적인 해외 문제의 결정체와도 같았다. 명백히 이란은 군사적으로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권은 만약 그들이 자신의 석유를 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호르무즈 해협(Straits of Hormuz) 21마일을 봉쇄해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세계 석유(사우디 수출을 포함하여)의 3분의 1과 모든 카타르의 액체 천연가스가 반드시 그 길고 빠른 물길을 지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잠재적인 화약고이다. 미 5함대가 바레인에 주둔하면서, 미국은 트럼프의 격렬한 트위터 논평을 실용적인 행위로 해석할 입장에 있다. 물론 이란의 내부에서는 이러한 대치가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감수성을 정권이 이용하도록 해 줄 것이다.

     

    제네바의 유엔 협상가들처럼 시리아의 교착상태를 빠져나올 수 있는 협상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이란을 포기하고 시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하도록 푸틴이 아사드를 설득하는 것이 큰 희망이다. 테헤란에서는 실제로 이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있다. 낙관론자들은 석유 생산을 제한하기로 한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최근 거래와, 푸틴과 네타냐후(이들은 2015년 러시아가 시리아 전쟁에 아사드를 구하기 위해 참전한 이후 몇 차례 만났다.) 사이에 존재하는 있을법한 좋은 관계 역시 지적한다. 그들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계속되고 있는 작은 전투들은 단지 경고사격이거나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입장을 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적어도 25건 이상 명백히 서로 상대방의 방어 역량을 시험해 오고 있었다(그리고 이스라엘은 여기서 대부분 승리했다).

     

    하지만 그러한 낙관론은 시리아에서 모스크바가 소련 붕괴 이후 고통스러워하는 패배의 조류를 뒤집고자 하는, 보다 넓은 제국주의 전략의 일부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시리아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그리고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행동은 이들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러시아는 라타키아와 타르투스 기지로 중동에서 마지막 남은 발판을 유지하려고 한다. 시리아 전쟁 중에 아사드 정권은 러시아에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고, 러시아의 승인 없이는 어떤 행동도 못 한다. 러시아는 아마도, 언젠가, 그들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면 시리아에서의 이란 철수를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언제 그러한 정책이 성공적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 시리아에서의 이란(그리고 헤즈볼라)군의 주둔은 이제 그 전투의 핵심이며, 러시아가 이후에 벌어질 일에 중재자가 될 수 있도록 해 준다. 소치와 아스타나에서의 이란과 터키와의 협상에서 쟁점은 시리아에서의 평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강대국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러시아 덕분에 아사드가 점점 시리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그리고 이제는 이슬람국가(IS)가 흩어진 상황에서, 미국은 로자바에서의 시리아 쿠르드족과 서부의 몇몇 지점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 YPG(인민 수호부대, 쿠르드족 민병대)/PYD(민주연합당, 쿠르드 정당),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다른 아랍 세력은 그들이 시리아 북부와 이라크의 이슬람국가 영역을 대부분 되찾음에 따라 미국이 대공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견고한 전투 세력이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NATO 동맹을 빈틈없는 러시아의 포용으로 추동해왔다는 점이다.

     

    터키, 그리고 러시아

     

    사실 그들 사이의 초기 적대에도 불구하고 (앞서 에르도안이 아사드의 전복을 요구하고 터키가 시리아를 지나는 러시아 전투기를 격추했을 때) 지금 러시아와 터키는 이해관계를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아사드가 전복되어서는 안 되며, 시리아의 파괴로부터 지키는데 아사드가 관계있음을 인정했고, 터키의 분리주의인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의 대리인처럼 YPG 쿠르드족이 터키의 국경에 있길 원하지 않았다. 터키는 YPG가 북동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에 대항하는 미국 캠페인의 척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공군으로부터 지원받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터키 국가의 ‘통합’에 위협이다. 그동안 2016년 쿠데타를 조직한 것으로 지목된 펫훌라흐 귈렌(Fethullah Gulen)의 인도를 미국이 계속 거부하자 두 ‘NATO 동맹들’ 사이에 씁쓸한 분쟁의 씨앗이 남았다.

     

    미국은 터키를 진정시키는 시도 속에서 아프린(Afrin)의 YPG/PYD에 대해 대공방어를 제공하지 않았고, 이들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친 터키 민병대에 의해 인종청소가 일어나도록 방치했다). 그러나 그 시기, 푸틴은 적어도 터키를 NATO의 구성원으로서 중립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러시아의 유리한 협상 카드이다. 터키의 또 다른 괴롭힘은 NATO가 터키의 요청에 따라 터키 지역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 또는 다른 NATO 강대국의 통제 아래에 있다. 터키는 종종 위협에 대처하기에 너무 늦다고 불평했다. 이에 푸틴은 터키에 명령권이 있고 통제할 수 있는 S-400 십수 개를 팔기 위해 오기도 했다. 동시에 둘은 오일 협정(터키 스트림 가스관에 대한)을 맺고, 러시아는 아나톨리아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9] 그것은 냉전 시기 미국이 핵미사일을 상당히 친-NATO 성격의 터키에 배치하여 직접 구소련의 심장을 노리도록 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냉전 시기에는 두 초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이들 간의, 또는 한 초강대국과 다른 쪽의 대리 간의 대리전쟁에 세계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강대국, 보다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와 미국의 보다 직접적인 대립이다. (시리아군에 군사적 자문역할을 하던) 러시아 쪽 인물은 이미 미국 공습으로 살해되었다. 비록 그것이 사고였다 할지라도 냉전 시기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직접적인 대립이다. 그리고 중동에는 시리아 분쟁을 둘러싸고 소용돌이치고 있는 모든 이해관계의 혼란스러운 만화경에도 불구하고, 이제 전선이 명확하게 그어졌다. 트럼프 정부는 다루기 어려운 중동 국가에 미국의 군사력을 강제할 방법을 찾는 조지 W 부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번에는 이란을 노리고 있다.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가자와 예멘에서 저지르는 잔학 행위를 미국이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이유이다. 가까운 미래의 행태는 이미 준비되었다. 그들의 대이란 동맹은 보다 광범위한 대재앙의 위험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프랑스나 영국처럼 이란 핵 협정을 지속하고자 하는 유럽 국가들조차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하고 있다.[10] 물론 지난 7년간 이로 인해 주로 고통받은 이들은 수백만의 죽은 이들, 불구가 된 사람들, 난민들 등 중동과 그 너머의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불확실성의 시대

     

    이미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간 것처럼 보이는 중동의 새로운 현실의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제국주의 강대국의 대결에 대한 모든 질문을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1945년,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러시아는 그보다는 상당히 약한 그러나 유일한 맞수가 되었다. 이러한 대결은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다기보다 소련이 동유럽에서 미국 무역과 전능한 달러를 배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 기반했다. 중국, 북한 등이 소련의 궤도에 편입되었을 때, 이는 이러한 대결을 강화할 뿐이었고, 둘의 군비 경쟁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사건에서 정점에 달했다. 냉전 동안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은 것은 종종 상호확증파괴(MAD) 이론 때문으로 여겨진다. 일부 그 영향이 있었을 수 있으나, 그 역할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미국도 총력전으로 얻을 이득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1945년의 ‘승자’였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상대 제국의 확장과 이 시기의 주요한 전쟁(한국,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이 전부였다. 동시에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자본에 대한 대규모 가치하락과 파괴는 새로운 축적의 사이클이 시작되도록 하여,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무한 전후 경기 붐으로 이어졌다. 이 또한 전쟁으로의 추동에 동반하는 경제적 필요를 제거했다.

     

    특히 미국은 만족할 수 있었다. 유럽과 소련과는 달리 본토에서 전쟁의 파괴로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지구상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경제로서 등장했다. 미국은 소련의 잠식으로부터 유럽의 반(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그리스. 마샬 계획으로)을 방어할만한 금융과 군사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또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설립된 모든 국제기구를 지배했다. UN(뉴욕에 기반한)과 같은 국제기구, IMF, 세계은행, 그리고 GATT(오늘날의 WTO)와 같은 그 산하기관들은 이러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소비에트 제국과 그 동맹이 아닌) 미국의 질서를 보장했다.

     

    아마도 이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1944년 브레튼 우즈에서 ‘자유 세계’가 달러를 전 세계 무역에서 새로운 금의 기준으로 삼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소련과의 대결 구도가 지속되는 물리적 기반 중 하나는 그 제국이 달러로 교환될 수 있는 통화를 보유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통제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른바 ‘코뮤니스트(공산주의)’ 국가들이 환전 가능한 통화를 사용했더라면, 미국의 경제 권력은 곧 지배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전후 경제 호황기 전체에 걸쳐 미국 제국주의 정책은 오직 ‘자유 세계’에서만 민주주의, 법의 지배,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열증적 또는 위선적이라고 특징지어질 수 있다. 동시에 과테말라(1954), 베트남(1962-75), 칠레(1973)와 같은 곳에서는 미국이 침공하거나, 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들의 지도자를 미국의 이해에 해가 되기에 전복시키려 할 때 이러한 조치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련의 ‘반공’ 독재자들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개자식일 수는 있지만, 그는 우리의 개자식”이기 때문이었다.[11] 냉전이 끝나자, 독재자들(특히 지금은 구소비에트 제국에서 찾을 수 있는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는데, 왜냐하면 미국은 이제 ‘코뮤니스트(공산주의) 독재’에 대해 승리했던 ‘법의 지배’에 기반한 그들의 시스템의 장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미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정권을 교체하기 위한 온갖 종류의 폭로 작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의 침략에 대한 일종의 변태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코뮤니즘(공산주의)의 붕괴’에 대한 맹신에도 불구하고 서방 자신은 고통스럽고 심화하는 경제 위기의 전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전후 경제 호황의 종료(국가별로 60년대 후반 또는 70년대 초반 즈음)는 미국 제국주의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 브레튼우즈에서 금 1온스를 35달러에 고정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에 썼듯이,

     

    금본위제도는 전후 경제 호황기 동안 미국에 유리하게 매우 잘 작동했다. 그러나 자본 축적의 법칙이 이윤율 하락의 형태로 가차 없이 전환되었을 때, 축적의 사이클은 쇠퇴의 단계에 돌입했다. 그 가장 명백한 징후는 미국이 1971년, 오직 세계적 예비금(global reserve)을 위한 국채만을 남겨둔 채 금 표준을 포기하고 달러를 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쟁력 약화와 이윤율 하락으로부터 비롯된 국제수지 적자 - 1970년대 즈음 미국의 무역은 수입이 많았다 - 는 달러를 해외로 유출했고, 해외 군비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중 일부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오일달러 또는 유로달러가 되었고, 나머지는 국채를 구매함으로써 미국으로 되돌려보내는 중앙은행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는 다시 미국의 지역 재정적자에 자금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는 미국 경제를 자금에 있어서 무임승차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다른 나라였다면 겪었을 인플레이션 위기 없이 겉보기에는 무한대로 적자에 대해 자금을 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따라서 국제수지 적자는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지역 재정 적자에 자금을 제공했다. 금본위제도 다음의 국제적인 금융 시스템은 오일달러 같은 것에 촉진되어 좋든 싫든 외국(중국 정부는 3.5조 달러에 이름)이 미국의 군사 지출에 자금을 지원하도록 강제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공짜’ 군대와 해군 기관을 오일 길의 치안을 유지하고, 오일 생산국이 계속 달러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데 사용한다. (“중국, 미국의 오랜 관점이 현실이 되다”, 혁명적 전망 11호 또는 우리의 사이트를 참고)

     

    자본주의 역사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경제 위기는 극적인 변화의 산파로 남아있다. 1980년대까지 제국주의 시대 경제적 이해와 국가 안보는 명백히 서로 연결된 것으로 가정되었다. 지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세계 부르주아지 전체의 이해를 증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직접적인 국유화나 보조금에서부터 정부 계약을 맺는 것까지 경제의 이른바 ‘커맨딩 하이츠’(Commanding Heights; 국가의 기간산업 등 전체 경제를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 위치)의 존재를 보장했다. 그것은 에너지, 조선, 철강 등의 전략 산업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윤율 위기 시기, 중공업의 손해를 막기 위해 국가 재정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사용되었다. 추가하자면, 이러한 산업은 대규모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어 인플레이션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파업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것이고, 계급 전쟁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 공장들은 결국 자본의 증발을 동반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유발했다. 계급의 저항을 잠식하는 효과를 가졌던 대량 실업은 1980년대 자본이 저임금 경제로 옮겨가면서 서방을 강타했다.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의 붕괴는 모든 국가가 ‘국가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의 모든 경제적 지렛대를 통제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제 주요 목표는 자국으로의 투자를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동시에 새롭게 금융화된 경제에서 더 큰 금융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만드는 회사에 실제로 투자하는 것보다 시카고 주식거래소에 투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이러한 투자는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저임금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주변부로 나아갔다. 대부분 이런 지역의 권위주의적 정부는 이를 촉진시키는 ‘경제특구’ 또는 마킬라도라(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외국계 공장)를 만들었다.

     

    따라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자유 시장 경제로부터 일종의 자연스러운 유기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선도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국가 정책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 정부는 코뮤니스트(공산주의)의 확산에 반격하기 위해 자본주의 지역 경제를 건설하려는 전략 일부로, 북동아시아 경제가 거대한 미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보장했다. 그리고 수출 장려는 다양한 산업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적 수입 보호가 동반되었다.[12]

     

    간단히 말해, 세계화는 미국과 중국 정부 모두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된 것이다. 미국의 재정이 ‘해외’ 생산 명목으로 아시아(와 다른 곳 등지)로 쏟아졌고, 중국을 비롯한 지역의 값싼 노동을 이용,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이득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값싼 중국산 수입은 1979년 이후 전통적인 자본주의의 중심에서의 임금의 감소, 또는 적어도 정체를 감추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1980년 후반 이후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금융화(financialisation)가 일어났다. 투자를 막고 폭락을 회피하기 위해 월 스트리트 폭락(Wall St Crash) 이후 도입된 글래스-스티걸법(1933-99)과 같은 다양한 규제들은 폐기되거나 조정되었다. 그러한 금융의 탈규제는 1930년대처럼 전쟁 전의 상황을 만들지 않고서도 1970년대의 위기를 잠재운 것 같은 외양을 띠게 했다. 그러나 금융의 탈규제 지속은 금융 주체가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훨씬 창의적인 방법(신용 파생상품과 부담보 대출 조항 등과 같은)을 만들도록 했고, 결국 새로운 형태의 투기를 조장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그 실체가 없는 것에 부(wealth)라는 환상을 부여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그러한 가상의 자본을 만드는 것이 언젠가 금융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해왔다. 우리가 유일하게 놀란 것은 그것이 이만큼 오래 걸렸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2007-8년의 붕괴는 그 시기 일어난 어떤 것보다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전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은행을 구제하는 해결책은 오직 완화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낮은 이윤율이라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자본은 새로운 축적의 사이클을 시작함으로써 오직 이 문제를 교정할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오직 이미 존재하는 자본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는 20세기 역사상 두 번 발생했는데, 1, 2차 세계대전으로 대규모 자본의 파괴와 평가절하가 발생했고, 이것이 체제가 다시 한번 새로운 가치 기반에서 축적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다른 경제적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이상 여기가, 비록 느린 속도라고는 해도 세계가 표류하고 있는 장소이다. 그것이 느린 이유는 자본가들이 세계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세계 분쟁의 야만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는 또 다른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일반적인 가치의 평가절하가 기업에는 나쁠 수 있어도, 경쟁자 자본의 평가절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1945년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새롭게 집중된 자본의 신 중심지로 부상하게 해 줄 수 있다. 따라서 총력전은 자본주의 국가라도 가볍게 돌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경쟁이 목구멍을 위협하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모든 경쟁자에 맞서 자신의 경제적 전략적 이해를 방어할 필요로 인해 국가들이 그러한 총력전으로 떠밀린다. 그러나 총을 쏘는 전쟁 이전에 무역 전쟁이 벌어진다. 관세가 오르고 곳곳에서 무역 장벽이 세워졌던 1930년대, 자유 무역에 끝을 고하고 강대국 간의 긴장이 보다 심화하는 것을 세계는 보았다.

     

    오늘날 ‘경제적 민족주의’가 다시 의제로 떠올랐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특히 중국, 한국, 그리고 유럽의 생산국에 대한) 부과 발표에서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그 이유로 들었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희생자들이 경험한 수십 년간의 정체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권력을 끌어모았다. 구 산업으로부터 한때 높은 임금을 받았던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황폐해진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트럼프의 ‘미국 먼저’ 슬로건은 1920년대 워렌 T 하딩(Warren T Harding)에게서 빌려왔는지도 모르나,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6월 캐나다에서의 G7 회의에서 세계를 향한 무역 전쟁 발표로, 우리는 적어도 이제는 ‘미국 먼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것은 동맹으로 여겨졌든, 적이라 맹세했든 관계없이 다른 모든 이들은 뒷전이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계화로 인해 매우 복잡한 공급 사슬이 형성되었고 따라서 무역 전쟁은 통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것이 허풍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트럼프는 그 모습 그대로 부동산 깡패처럼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힘을 바탕으로 협상하고 보다 앞으로 유리한 거래를 하기 위해 판돈을 올리고 있다. 그에게 주어진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권력이라는 모든 카드를 사용하는 것을 트럼프가 뽐내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떤 이들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자신의 경제적, 그리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우월성을 사용해 누가 뭐라든 미국의 이해관계를 주장해야 한다는 이들(대부분 공화당 우익)과 미국이 명목상 내세우는 가치로 작동하는, 1945년 이후 지금까지는 미국에 이득이 되었던 그런 협력적인 세계를 기대하는 이들(이전 대통령과 같은) 사이의 늘 있는 미국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드잡이질의 일부라는 것이다.

     

    구세계 질서가 산산이 조각나는가?

     

    무역 전쟁과 미국이 작업하는 방식은 이제 이보다 더 심각해진다.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지배를 표현한 규칙과 기구를 만든 것이 미국이었다. 이후 그것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반이었다. 뉴욕에 위치한 UN 조직들, 워싱턴의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1947년 설립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후신), 가장 중요한 NATO를 비롯한 다양한 군사 동맹들, G7 경제 회의는 모두 ‘자유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 도구이었다.

     

    트럼프는 그의 선전 기간 동안 이러한 기관 대부분에 경멸을 퍼부었으며 그의 어조는 그 이후 더더욱 불쾌해질 뿐이었다. 세계무역기구는 지난 20년 동안 ‘신흥국’의 보호관세를 막아왔던 바로 그 도구였는데, 이제는 트럼프에 의해 ‘대실패’라는 딱지가 붙었다. 최근 몬타나에서 그는 어떻게 유럽- 특히 독일 -이 무역과 국방에서 미국에 이득을 취해왔는지 - 그가 좋아하는 바로 그 주제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돈을 대는 얼간이다”라는 그의 언급을 머리글로 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유럽을 보호하기 위한 돈의 70에서 90%의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그것은 괜찮다. 물론, 그들은 우리를 무역에서 죽이고 있다” “그들은 무역에서 우리를 죽이고 있다. 그들은 다른 데에서도 우리를 죽인다. 그들은 유럽에서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그들의 메르세데스와 그들의 BMW를 우리에게 팔고 있다”[13]

     

    트럼프가 미국이 NATO 예산의 약 70%를 감당한다고 유럽을 공격했다면 보다 정확했을 것이다. 미국이 GDP의 4%(실제로 최근에는 3.2%)를 국방에 사용하며, NATO 파트너들은 적어도 2%를 쓴다는 그의 다른 주장은 더욱 정직하지 못하다. NATO는 고작 유럽을 방어하는 지역 동맹일 뿐이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다. 여기서 트럼프가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가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faux frais)이 너무 비싸며, 미국은 더는 유럽의 방어를 위해 그만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의 지난 동맹은 이제 미국의 군사력 뒤에 숨은 기생충들이고 그러므로 그들은 NATO 방어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든지, 그리고 “푸틴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의 지속적인 주장으로 인해 NATO의 전체 목적이 의문에 빠졌다(그러나 이는 비보르크에서 독일을 직접 연결하는 노드스트림의 가스관이 독일을 푸틴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라는 그의 비판과 모순된다!).

     

    놀랍지도 않게, UN 또한 공격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오랫동안 미국이 UN에 크게 기여하는 것에 대해 비판해 왔는데, 존 볼턴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할 때에는 미국 제국주의 정책의 뻔뻔한 일방주의를 지적했다. 볼턴은 항상 미국 편에서 UN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는데, 그것은 UN이 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2000년, 다음과 같이 제안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지금 안전보장이사회를 고친다면, 나는 상임이사국으로써 단 하나만을 갖도록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계의 권력 배분을 진정으로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4]

     

    이것은 미국 먼저가 아니라 미국 홀로이다. 그러므로 UN의 인본주의적 기관에 대한 미국의 투자금은 삭감될 지경에 이르렀으며, UN의 인권위원회에서 탈퇴할 것이다(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지속해서 이주지구를 건설하는 것을 감시하므로 UN이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근거에서).

     

    트럼프가 미국의 과거의 모든 기관과 동맹에 대해 중상모략하는 것과 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은 유의미하다. 지금의 세계 질서를 대부분 만들어낸 국가가 그것이 더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폐기하길 원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더욱 위험한 시대에 진정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는 기저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증상일 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위기의 시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앞서 보여준 바와 같이 달러화의 표류는 금융 탈규제로의 길을 열었고, 일련의 전개는 2007-8년 폭발한 투기 거품을 만든 세계화로 나아갔다. 세계는 아직 그 위기로부터 진정으로 회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기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기묘할 정도로 낙관적인 경제학자들은 있으나, 문제는 남아있다.

     

    빚은 없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증가했다. 미국만으로도 서브프라임 위기에 미 국고의 10조 달러가 구제금융으로 사용되었고, 전체 신용 시스템(따라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붕괴로부터 구하기 위한 소위 ‘양적 완화’에 12조 달러의 비용이 더 들어갔다. 이 22조는 연간 이자 비용으로 최소 5천억 달러가 지급되어야 하는 연방 정부의 부채만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부분 파산 위기에 있는 미국의 많은 주의 부채까지 3조 5천억 달러를 더할 수 있다. 만약 학생 대출, 자동차 대여, 신용 카드 부채, 그리고 회사 부채까지 모두 더하면 그 총액수는 GDP의 350%를 가뿐히 넘긴다.

     

    트럼프의 감세, 국방비 증액, 그리고 다른 연방 프로그램은 이러한 적자를 심화시킬 것이고, 따라서 빚은 증가할 것이다. 포춘지(Fortune)의 션 툴리(Shawn Tully)는 이대로라면 2019년 정부 적자는 1조 달러로 증가할 것이며 10년 안에 미국 지출의 3달러 중 1달러는 대출에 의한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이는 매년 3% 성장에 의해 지불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다른 주요 경제 기관은 고작해야 2% 성장을 예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산은 무역 전쟁의 충격과 고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생산 성장에 기여하는 젊은 이민자에 대한 미 국경 폐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현실은 트럼프의 환상과 정반대이다. ‘약탈당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부채라는 짐의 대부분을 지고 있는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다. 툴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미국이 현재의 과정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가 있는데, 그것은 나머지 세계로부터 쾌활하게 계속 빌리는 것이다. 미국은 외국의 채권자들이 우리 정부와 기업의 부채에 엄청난 기호를 보여왔다. 그들은 이제 공식적으로 국고가 갖고 있는 15.5조 달러 중 6조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빌릴 수 있는 자신이 한정된 상황에서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대부분 국가에 그러한 엄청난 대출은 이자율을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미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다른 해외 투자자로부터 세계적인 저축 과잉은 우리의 이자율을 억제해왔다. 미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다각화된 투자가 이루어진, 그리고 기업가적 경제이며, 국제적 긴장의 시기에 돈이 몰려드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이다. 대공황은 이 테제를 증명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금융 위기를 세계의 나머지로 수출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돈을 보내준다.” UC 버클리 경제학자 알란 아우어바흐의 말이다.[15]

     

    세계의 나머지가 이 짓을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가 이제는 문제이다. 트럼프의 경제적 민족주의는 중국이 너무 강력해져서 공격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공격과 같다. 우리가 앞선 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16], 중국은 미국 주도권의 잠재적인 맞수로 여겨져 왔고, 미국 전략 계획(Strategic Plan, 2017년 12월)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둘 다 ‘미국의 가치와 이해에 대한 안티테제’ 국가로서 표적이 되었다. 전 세계에 대한 미군의 지배가 의심할 여지가 없고, 그 경제력이 여전히 강력한데, 미국이 이제 중국과의 무역 전쟁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균형을 재조정하고자 희망할 수 있다. 그는 중국 경제가 더 진화하여 (특히 AI와 다른 첨단 기술 영역에서) 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전에 중국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뜯어내길 희망한다. 무역 전쟁이 미국이 2008년 이후 지금까지 간신히 피해 왔던 다음 금융 붕괴의 경제적 조건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위험한 도박이다. 이번에는 재앙을 피하려면 양적 완화보다 더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전 글에서 우리가 주장하였듯이, 중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걸친 무역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일대일로 전략으로 유라시아의 경제적 지배를 예상하면서 장기적인 준비를 해 왔다(혁명적 전망 11호를 보라). 그 과정에서 (미얀마, 말레이시아와 같은) 몇몇 실패가 있었으나, 3조 달러의 ‘군자금용 외환 보유고’로 인해 벌어진 무역 전쟁의 폭풍을 극복할 수 있다. 무역 전쟁의 경우에는, 수출 위주의 경제를 자국 시장의 성장에 기여하는 경제로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핵심적인 약점이 있는데, 중국은 반도체의 95%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고, 생산 역량이 적다는 점이다. 심지어 중국은 마이크로칩을 생산할 시설도 부족하다. 중국은 석유를 수입하는 것보다 실리콘을 수입하는데 더 많은 비용을 들인다.[17] 미국의 기술을 사려는 시도는 매번 미국 정부에 의해 가로막혔고, 이것이 정보기술에서의 주도권을 위협한다. 중국은 절박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을 뿐이다.

    환태평양 파트너십에서 발을 빼겠다는 트럼프의 결정에 대해서는 보다 성공적이었다. 중국은 이로 인해 아시아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은 또한 유럽 정부들이 이란 협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가 썼듯이, EU와 중국의 새로운 무역 회담은 진행 중이다. 중국은 통화의 극적인 붕괴, 그리고 긴축 정책 위주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에 의존해야 하는 아르헨티나와 같은 신흥 시장에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대출을 제안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의 위협과 호령에 대비되는 ‘부드러운 권력’의 승리를 목표로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심지어 2049년(마오쩌둥의 국민당에 대한 승리 100주년이 되는 해)이 중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쥐는 해라는 선전도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장기적 계산, 또는 실제 미국의 계산은 또 다른 금융 붕괴가 있을 경우 의미가 없어진다. 많은 나라는 다음 붕괴가 왔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더 줄어들 것이다. 가상의 자본 손실을 위장하기 위한 양적 완화 대신, 자본, 투자, 일자리에서의 실질적인 손실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역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모든 계산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며, 인류를 거대한 사회의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다. 다시 한번, 지난 세기 자주 제기되었던 질문이 또다시 떠오를 것이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 순간, 세계 노동계급의 상대적인 고요라는 조건 속에서 사회주의에 손을 들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 내에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위해 싸우는 것을 우리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유일한 전쟁은 잔인함과 비참함을 더할 뿐인 이 체제를 끝내는 계급 전쟁뿐이다.

     

    Jock

    2018년 7월 21일

     

     

    <주>

     

    [1] https://www.cnbc.com/2018/04/13/russia-warns-of-consequences-for-us-led-strike-on-syria.html

     

    [2] 이 시기의 공급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다음을 보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4-16/syria-the-real-significance-of-the-us-bombardment

     

    [3] 보다 구체적인 분석은 다음을 보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6-24/palestinian-workers-continue-to-die-for-a-capitalist-state

     

    [4] https://www.middleeasteye.net/news/syria-says-israeli-strikes-targeted-t4-air-base-homs-99433299

     

    [5] 이것은 프로메테오 19호(Prometeo 19)의 “Siria. L’attacco americano è arrivato puntuale come al solito appoggiato da Francia ed Inghilterra”(시리아, 프랑스와 영국이 지원하는 미국의 공격은 평소처럼 정각에 있었다) 이탈리아 원문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 우리 웹사이트에서 이용할 수 없다.

     

    [6]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래를 보라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5-02-05/oil-and-the-shifting-sands-of-imperialism

     

    [7] https://www.whitehouse.gov/briefings-statements/remarks-president-trump-amir-tamim-bin-hamad-al-thani-state-qatar-bilateral-meeting/

     

    [8] 우리는 최근 이란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우리 웹사이트에 게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제재에 더불어 해가 갈수록 나빠지는 심각한 물 부족(가뭄이 이 나라의 40%에 영향을 미침)에 이란은 직면해 있다. 후제스탄(이란 서부)에서는 7월, 조악한 수질로 인해 폭동이 발생했다. aljazeera.com 참고.

     

    [9]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5-08-31/turkey-isis-gas-and-the-shifting-imperialist-balance

     

    [10] 프랑스는 사우디아라비아에 160억 달러치의 무기를 팔았으며, 영국은 600억 달러의 무역 협정을 대가로 예멘에 맞서기 위한 48기의 유로파이터를 팔았다.

     

    [11] 그 말은 한때 FD 루즈벨트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소모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는 그 출처가 불명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워싱턴의 공모 또는 워싱턴이 시대의 가장 잔인한 정권에 대해 눈 감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2] 로버트 H 웨이트, 런던정경대(LSE) 국제정치학 교수, 파이낸셜 타임즈 기고, 2018년 4월 26일

     

    [13] theatlantic.com

     

    [14] “지도자에서 고독한 감시원까지”, 파이낸셜타임즈, 2018년 5월 12/13일에서 인용

     

    [15] 션 툴리(Shawn Tully), http://fortune.com/2018/03/15/us-national-debt-trump-tax-cuts/

     

    [16] “중국 : 미국의 오랜 공포가 현실이 되는가?”, 혁명적 전망 11호(몇몇 사본이 있음) 또는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2-13/china-long-held-us-fears-becoming-reality 참고.

     

    [17] 루이스 루카스(Louise Lucas), “미-중 무역 마찰은 대학살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 2018년 5월 9일을 보라

     

     

    혁명적 전망 12호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09-17/us-power-and-the-new-course-towards-war

     

    번역 ┃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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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코뮤니스트 혁명가 : 막스 횔츠(Max Hoelz)

  • 독일혁명의 실패는 러시아혁명이 세계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좌절시켰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악의 반혁명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배계급을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독일혁명 100주년(1918~1923)을 맞이하여 '무장투쟁'으로 지배계급을 떨게 만든 코뮤니스트 혁명 투사 <막스 횔츠>를 다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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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혁명가 : 막스 횔츠(Max Hoelz)

     

    비공인 파업과 직접행동을 주장하는 와일드캣의 팸플릿 서문에서는 막스 횔츠를 ‘무장투쟁을 이끈 코뮤니스트 투사’로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을 1920년 초 독일의 계급 내전 시기, 무장 투쟁단을 조직한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KAPD)의 투사, 막스 횔츠(Max Hoelz) 동지에게 바친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무장 투쟁단은 비공인 파업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투쟁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어용)노조 사무실을 부수고 들어가 금고에 쌓아둔 노조자금을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노조 밖에서 노조에 맞서, 와일드캣)

     

    노동자 투쟁에서 직접행동과 정당방위대, 파업 사수대 등이 사라진 지금 이렇게 위험하고 과감한 투사와 투쟁을 소개하는 이유는 그들의 투쟁이 영웅적이어서가 아니다. 끊임없이 퇴보하고 추락하는 노동자운동을 바로 세우고, 위기에 처한 노동자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이러한 직접행동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노동자 자신과 동료를 지키는 것, 아래로부터 노동자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 점거한 공장을 노동자가 직접 통제하는 것, 이 모든 것의 기반은 바로 노동자계급 직접행동과 물리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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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년에서 1933년까지. 막스 횔츠(Max Hoelz)의 전기

     

    이 글은 부자들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노동자와 실직자에게 나누어 준 용감한 행동으로 '붉은 로빈 후드'로 불린 독일 코뮤니스트 막스 횔츠의 간략한 전기이다.

     

    독일 모리츠 바이 라이자(Moritz bei Riesa)에서 1889년 10월 14일 출생.

    러시아 고리키(Gorky)에서 1933년 9월 15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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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로빈 후드 막스 횔츠

     

    "막스 횔츠는 사민주의자들에게는 위험한 모험가로 비쳤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공산당에서는 무책임한 사람이자 반역자로, 좌익공산주의자로부터는 아나키스트로, 아나키스트는 그를 레닌주의자로 규정했다." – 아르항겔스크(Agrchangels) 파코 이냐시오 타이보 2세(Paco Ignacio Taibo Il) - 체 게바라의 전기작가

     

    막스 횔츠는 1889년 10월 14일, 모리츠 바이 라이자(Moritz bei Riesa)에서 태어났다. 소작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가족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노동을 시작해야 했다. 기초학교(초등학교) 이후인 1903년부터 여러 지주의 일터를 돌며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16세 되던 1906년, 막스 횔츠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다양한 비(非)기술직(미숙련직)으로 일했다. 그는 거기서 번 돈을 기술학교에서 기하학 야간 학습을 하는 데 사용했다. 이 공부는 그에게 철도 건설 및 측량 일을 준비할 수 있게 했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의 철도 기술자로, 드레스덴에서는 영화관의 영사기사로 일했다. 그리고 기술학교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육군 예비군 입대를 위한 검진에서, 결핵(TB) 진단을 받은 그는 삼림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포크트란트(Vogtalnd)의 팔켄스타인(Falkenstein)에서 대지 측량 기사로 임명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초입에 그는 색소니 왕의 경기병으로 자원하여,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1915년 횔츠는 팔켄스타인의 화물 운송 하청업자 딸, 클라라 부크하임(Klara Buchheim)과 결혼했다. 그는 이 전쟁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해 눈을 떴는데, 1917년의 러시아혁명과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bund : 1917년 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창설한 단체로 독일 코뮤니스트당의 전신이다.)의 사회주의자 조지 슈만과의 접촉으로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슈만은 1945년 나치에 처형당했다)

     

    횔츠는 육군 병원에서 머물다 1918년 11월 팔켄스타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장 먼저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 : 독일 사민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반전을 주장했다.)에 가입했고, 1919년에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에 가입하여, 플라우엔(Plauen : 독일 남부의 도시) 지부에서 활동했다. 2월에는 팔켄스타인의 코뮤니스트당 지역 단체를 설립했다. 휠츠는 실업자 노동자평의회 의장으로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식량과 연료를 시에 요청했다. 시장이 실업자들을 '일하기 싫어하는 기생충'이라고 비하하자, 횔츠는 이 도시에서 시장과 의원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몇 차례에 걸쳐 군부대가 시장을 인질로 잡은 폭도를 진압하기 위해 팔켄스타인을 점령했다. 횔츠는 군부대를 피해야 했고, 루넨버그(Lunenberg) 황야의 발스로드(Walsrode)에 있는 코뮤니스트당 학교에 가서 독일 중부와 바바리아(Bavaria)에서 당 활동을 하기로 한다.

    카프의 우익 쿠데타 이후, 1920년 횔츠는 포크트란트로 돌아와 적위대에 소속된 팔켄스타인과 욀스니츠(Oelsnitz)의 노동자들을 규합했다. 그는 경찰과 육군, 그리고 악랄한 극우 준군사조직인 자유군단(Freikorps)을 상대하는 매우 효과적이고 영웅적인 무장 투쟁단을 조직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KAPD : KPD에서 분리하여 나온 급진적이고 평의회적인 조직)은 무장 투쟁단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차량으로 무장한 이 특수부대(무장 투쟁단)는 60명에서 200명에 달했다. 전면에는 기관총이나 경장갑차로 무장한 정찰대를 배치했고, 배후에는 중무장 트럭이 뒤따랐다. 그 뒤에는 ‘부대장’이 ‘현금’을 소지한 그들의 ‘재무장관’과 승용차에 함께 탄다. 엄호는 다른 중무장 장갑 트럭이 맡았다. 그들은 모두 붉은 깃발로 장식했다. 한 지역(도시)에 그들이 도착하면 식량을 징발하고, 우체국과 저축은행을 샅샅이 뒤져 모든 자금을 접수했다. 무장 투쟁단은 총파업을 공표하고, 파업의 비용은 고용주에게 ‘세금’ 을 걷어 충당했다. 정육점 주인과 제빵업자에게는 판매하는 상품을 노동자들에게 30%에서 60% 저렴하게 팔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은 빠르고 단호하게 박살을 냈다.”

     

    무장 투쟁단은 색소니에서 매우 활발하게 무장활동을 했다. 그들의 무장활동은 횔츠와 코뮤니스트당 지역대표인 브랜들러(Brandler) 사이에 충돌을 일으켰다. 브랜들러는 당에서 횔츠를 켐니츠(Chemnitz) 지역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그러자 횔츠는 독일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에 입당했고, 그들이 무력으로 접수한 몇 가지 품목을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지도부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무장 투쟁단이 소속하기에 적합한 조직임을 깨달았다.

     

    막스 횔츠는 그가 이끄는 무장 세력의 독립성에 매달렸고, 그것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면 코뮤니스트당 혹은 다른 세력과도 협력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무력으로 빼앗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준’ 그의 행동으로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공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를 찾는 일이 매우 잦아졌다. 그는 보복 위협에도 고용주들에게 파업자금을 걷었다. 그는 죄수를 풀어주었고 죄수증명서와 경찰서, 그리고 법원 문서를 파기했다. 부자들과 대부호 저택을 불살랐다. 그는 또한 경찰 검거를 계속 벗어난 것으로도 역시 유명했다. 1919년 4월 막스 휠츠 머리 위에는 총 3만 개의 지명수배 표식이 붙었다. 그는 3월에 활동을 개시한 이후에도 붙잡히지 않았다.

     

    루르(Ruhr)에서 소요와 충돌이 있고 난 뒤, 무장 투쟁단은 포크트란트로 진군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위대했던 적위병은 결국 패배했다. 전투에서 붙잡히지 않거나 총에 맞지 않은 부대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너머로 대피했다. 하지만, 횔츠 본인은 체코슬로바키아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독일로 돌아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일간 코뮤니스트 노동자』는 막스 횔츠가 베를린 전승 기념탑을 파괴한 것을 응원했다. 이 사건은 3월 21일, 그가 간접적으로 개입한 공격이었다. 3월 22일과 23일, 경찰서 건물이나 경찰, 법률 체계에 대한 비슷한 공격이 팔켄슈타인, 드레스덴, 프라이베르크, 라이프치히, 플라우엔 등지에서 발생했다. 횔츠의 무장투쟁단과 코뮤니스트당, 그리고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전투부대가 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공격이 있었던 모든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노동자들이 행동한 지역은 루르와 베를린, 그리고 함부르크뿐이었다.

     

    베를린 투쟁 며칠 뒤에 다시 붙잡힌 막스 횔츠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에 대한 방어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조직했는데, 코뮤니스트 좌파가 코뮤니스트당에 의해 붕괴하면서 코뮤니스트당이 세운 위원회의 몇몇 좌파가 조직했다. (횔츠는 1921년 11월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을 떠나자마자 코뮤니스트당에 가입한다.) 그들은 횔츠의 석방을 위해 자신들의 선거인 명부에 유력한 후보자로 그를 출마시켰다. 그러나 국가는 그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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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x Hoelz with his wife TrautenéeLoebinger (1928)

     

    클라라와의 이혼 후, 그는 코뮤니스트당의 제안에 따라 당과 정기적인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트라우테뢰 빙허(TrauteLoebinger)와 결혼했다.

    1926년, 아나키스트 리쉬 뮈흐잠(Erich Muehsam)이 막스 횔츠를 위해 자신의 유명한 소식지 '정의'를 발간했다. 1927년, 토마스 만(소설가)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학자)을 포함하는 중립위원회는 막스 횔츠를 위해 그의 재심과 석방운동을 벌였다. 횔츠는 스스로 개인숭배에도 기여했는데, 그가 갇혀있는 시 우체국은 독일 각처에서 막스 횔츠에게 보내 온 편지에 묻힐 지경이었다.

     

    1928년 7월 라히슈타흐(Reichstag : 옛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는 정치 수감자 사면으로 그는 결국 석방되었다. 트라우테뢰 빙허와의 결혼도 끝났다. 횔츠는 독일 중심부에서 수많은 성명서를 낭독했다.

     

    1929년 횔츠는 자서전인 '하얀 십자가에서 붉은 깃발로‘를 집필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귀국 이후 그는 코뮤니스트당의 여러 행사에 연설자로 참여했다. 9월 보그트란트(Vogtland)의 바트엘스터(Bad Elster)에서 연설하던 중 그는 나치에게 공격을 받았다. 나치에게 몇 차례 살해 위협을 받은 후, 그는 당이 소련으로 떠나라는 조언을 들었다. 코뮤니스트당은 얼마 동안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며 여기저기에서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행동이 당에서 골칫거리가 되자 당은 그가 적들에게 총격을 당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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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에서의 막스 횔츠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 그라드의 국제 레닌학교 훈련과정에 참여했다.

     

    1931부터 1933년까지 그는 다양한 광산과 공장, 농업기업에서 일했다. 재혼한 그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2년, NKVD(공산당 비밀경찰의 다른 이름으로 체카의 연장선)가 그들의 루비앙카 본부(Lubianka HQ)에서 만나자고 그를 초청하자, 코민테른 숙소인 호텔 룩스의 객실에 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NKVD는 일시적으로는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정권에 대항하는 가상의 발렝베르크-횔츠(Wollenberg-Hoelz)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 음모는 NKVD의 편집증적 상상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발렝베르크는 바바리아 지역 노동자평의회의 군사령관이었다. 코뮤니스트당을 비판한 그는 1933년 당에서 제명되었다) GPU-NKVD의 음모에는 살해당한 아나키스트 무함(Mueham)의 부인인 젠슬(Zensl) 역시 이후에 연루되었다. 1933년 9월 15일 막스 횔츠는 "보트 사고"로 사망했다. 다시 말해 그는 니즈니노프고로트(Gorky) 근처에서 NKVD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코뮤니스트 노동자당의 「일간 코뮤니스트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막스 횔츠는 우리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징! 우리의 리더!"

     

    그는 깊은 사색가이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노동 현장의 노동자들과 실업자 모두를 보호하고자 직접적인 활동에 기꺼이 개입했다. 그러한 그의 의지와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도 러시아 정권을 비판한 그의 용기는 진정 훌륭하다.

     

    닉 히스(Nick Heath)

     

    정리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막스 횔츠 영상 : MAX HOELZ THE REVOLUTIONARY> 

     

    https://youtu.be/bd39boJb0cE

    https://youtu.be/FVt8LiJaR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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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혁명(1918-1923) 관련 글>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남궁원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09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역사 - 오세철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3847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3983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404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296538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04451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이형로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A Hundred Years On: Lessons of the German Revolution  - ICT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1-09/a-hundred-years-on-lessons-of-the-german-revolution

     

     

    100 YEARS AGO, THE PROLETARIAT MADE THE RULING CLASS TREMBLE - ICC

     

    http://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592/100-years-ago-proletariat-made-ruling-class-trem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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