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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

임성용

 

 

 지난 4월 17일, 낮 열두 시 무렵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뒤편에 있는 추모비 앞에 3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봄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 붉은 담벼락이 높다랗게 둘러싼 언덕 아래에는 ‘조선의 혼그릇’이라고 이름 붙인 주발 형태의 철재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혼그릇을 이룬 쇳조각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은 항일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6·10만세 항쟁의 주역 권오설의 이름도 있었다. 그 추모비를 정면에 두고 한 장의 현수막이 걸렸다.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라고 적힌 것이었다. 현수막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에 담긴 얼굴 하나가 점차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수인복과 수형번호, 그리고 權五卨이라는 흰색 성명을 앞가슴에 달고 있는 강고한 인상의 사내였다. 수형자의 모습으로 찍은 당시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는 다름 아닌 조선의 젊은 볼셰비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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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볼셰비키 혁명가, 권오설

 

  6·10투쟁 지도특별위원장 권오설은 1928년 2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혔다.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기 전까지 일경은 예심 기간이라는 것을 두어 2년 동안이나 그를 심문했다. 결국, 혹독한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 병감에서 숨졌다. 1930년 4월 17일이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보통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은 ‘대한독립만세’를 떠올린다. 아니면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같은 무장투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권오설 역시도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권오설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뛰어넘는 사회운동가이자 혁명가였다. 그가 책임지고 투쟁을 주도한 6·10만세 항쟁의 혁명적 성격을 살펴보면 그것은 확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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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민이여 귀를 기울여라- 들려오지 않은가 노동자 농민을 전위로 한 인민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우렁찬 발소리- 이 강산을 진동시킨 「조선 독립 만세」의 고함- 이날이 바로 지난 21년 전 일제와 가장 용감히 싸운 조선공산당의 영도 아래 노동자 농민을 전위대로 한 학생 소시민 지식층 등 모든 조선 인민이 독사 같은 일제의 눈초리와 총칼 밑에서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조선 독립 만세」 「토지를 농민에게」 「애국자 혁명가를 석방하라」하고 과감히 궐기한 조선해방역사상 찬연히 빛나는 제21주년 6·10만세 운동 기념일이다. 일제에 항거하여 노동자가 일어섰다. 농민도 궐기하고 학생도 소시민도 지식층도 일본의 주구 이외의 조선 인민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제와 항쟁한 이 날. 전 인민의 무자비한 투쟁은 일제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만세 소리의 폭풍은 전선 방방곡곡을 휩쓸었다.’    - 《독립신보》 「민족의 자랑 6·10만세 기념일-조선공산당 영도 아래- 이조 최후 왕·국장일에 반제항쟁」이라는 제목의 기사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오설이 특별위원장을 맡았던 6·10만세 항쟁은 1919년에 전개되었던 3·1만세 운동과는 다르다. 6·10운동은 그 규모가 3·1운동보다는 작았지만, 조선공산당 중앙기구 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비서인 박민영, 조선공산당 조직원이며 공청 선전부원인 이지탁,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권오설 등이 주도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고 나서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6·10만세 항쟁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특히 권오설이 핵심을 맡은 사업이었다. 1926년 5월 3일, 고려공산청년회 간부 회의에서 6·10투쟁 총책임자로 권오설을 선임했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고려공산청년회, 조선노동총동맹을 주축으로 해서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권오설은 6월 7일, 사전에 투쟁계획이 발각되어 서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앙고보 학생이었던 이현상(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권오상, 이선호가 다시 선전문을 만들어 예정대로 6·10투쟁을 진행했다.

따라서 일부의 관점에서는 3·1운동보다 6·10투쟁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종교, 청년학생, 노동자와 농민, 좌우는 물론 조선의 모든 혁명 대중을 하나로 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3·1운동 때, 조선 민족 대표라는 33인들의 얼빠진 행적과는 달리 6·10투쟁은 조선공산당이라고 하는 ‘전위당’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을 기반으로 하여 인민대중들의 민족해방 의지를 끌어모으는 데 집중했다. 즉 6·10투쟁에는 ‘당’이 있고, 강철 같은 당에 목숨을 맡긴 ‘당원 동지들’이 있었다. 3·1운동 앞에 이름을 내세운 종교 지도자들,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인텔리들, 민족주의자들은 6·10투쟁이 일어나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천도교 신파에서 함께 참여한 것뿐이었다.

3·1운동 때의 ‘독립선언문’과 6·10투쟁 때의 ‘격고문’은 뚜렷이 다르다. 6·10투쟁의 격고문이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싸움에서 처음으로 맑스-레닌주의 운동의 혁명적 방법론을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의 직공은 총파업하라!’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보통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같은 투쟁 슬로건은 조선 혁명의 전환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혁명 정신은 조선공산당이 와해한 1928년 이후에도 경성 트로이카, 경성 콤그룹으로 끊임없는 재건작업을 시도했다. 격고문을 보자.

 

 ‘......현재 세계정세는 식민지 민중 대 제국주의 군벌의 투쟁과 무산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의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투쟁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대한 무산자계급의 투쟁은 계급적 경제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에 민족해방이 곧 계급해방이고 정치적 해방이 곧 경제적 해방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 민족이 총체적으로 무산자계급이며 제국주의가 곧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당면한 적인 침략국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모든 권리를 탈환하지 않으면 죽음의 땅을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형제여! 자매여! 눈물을 그치고 규탄하라!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춰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 1926년 6월 10일, 격고문 중에서

 

 그럼 이와 같은 민족해방-계급해방 정신을 바탕으로 6·10투쟁을 계획하고 준비한 권오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권오설은 경북 안동의 잔반가에서 태어났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가난한 형편에도 가숙인 남명학교에 들어가 동화학교에 편입, 졸업한다. 대구고등보통에 입학했으나 민족사상을 부추기다 퇴학당한다. 2년 뒤, 경성으로 올라가 중앙고보를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그만둔다. 그리고 전남도청에서 고용원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광주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된다. 그는 배후조종혐의로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다. 1920년부터 고향에서 ‘안동청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풍산학습강습회’ ‘풍산소작인조합’ 등의 농민조합과 청년회를 설립하고 농민,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는 불과 일이 년 만에 사회주의단체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한다.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화요회)’에 가입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4년 4월, 260여 개의 가입단체와 5만 3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조선 노동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된 그는 대동인쇄 동맹파업, 양말직공파업, 고무직공파업, 양화직공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준비회 조직 준비위원을 한 그는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아울러 그는 조공의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에 조선노동총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고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검거(신의주 사건)로 책임 비서 박헌영이 붙잡히자 김찬, 조봉암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게 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가 되었다. 즉 2차 조선공산당의 강력한 실력자가 권오설이었다. 그가 벌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6·10투쟁 이었다. 그는 만세시위에 나설 학생들을 규합하고 상해에 있던 김단야, 조봉암 등과 연락해서 격문전단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는 한편 국내에서 투쟁 슬로건이 담긴 격문을 십만 장이 넘게 인쇄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 날인 국장일에 맞춰 전민족적인 규모의 거사를 실행하려던 그는, 거사 사흘 전에 인쇄물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도중, 그는 일경을 고소하면서까지 고문에 맞서 대항하였으나 끝내 옥사하였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건 이후, 그해 11월 ‘신의주사건’ 1926년 6·10투쟁, 그리고 1928년 당 책임비서 차금봉이 피검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만에 열린 추도의 기념식

 

 

 권오설을 비롯한 조공 핵심 인물들의 망명과 검거, 구속, 옥사로 조공은 치명적인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재건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그대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31년 2월, ‘ML파’ 사회주의자그룹은 상해에서 기관지 『계급투쟁(階級鬪爭)』을 발행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결성하고, ‘화요파’ 출신인 김단야, 권오직 등은 1929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단야 등은 1931년 3월, 박헌영과 『콤뮤니스트』 창간호를 발간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1933년 8월, 서울에서는 이재유를 중심으로 경성 트로이카그룹이 결성되었다.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 193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경성준비그룹 등을 거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1939년 4월, 이관술과 김삼룡이 경성 콤그룹 지도부를 다시 구성했다. 특히 1930년대 들어와서는 혁명적 노동조합,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검거자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당 재건 방침에 따라 ‘아래로부터 위로의’ 전국적 조직건설을 통해 당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운동은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 등 과거 화요파가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재건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의 결렬과 조선정판사사건,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의 테러, 미소 간의 정세 변화에 따라 통합적 지도력 강화를 위해 남조선로동당으로 해소되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삼두마차를 필두로 하는 경성 트로이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유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사상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소에서 병사했고,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죽었고, 남로당 책임자였던 김삼룡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주하와 함께 총살당했다.

2018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을 진행한 주최자가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로 되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 프로젝트는 단체가 아니다.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가열 차게 했던 경성 트로이카 혁명가들의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몇몇 사람들의 모임이다. 마침 조선공산당 창립일과 권오설 사망일이 4월 17일로 같은 날짜였다. 그리하여 권오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죽었던, 이재유를 비롯한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들이 옥살이했던, 바로 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보다 의미 있는 행사를 추도식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였다. 공식적으로는 권오설 동무가 옥사한 지 88년 만에야 역사와 죽음의 현장에서 열린 ‘권오설 88주기 추도식’이었다. 그 이면에는 사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기도 했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는 시민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국가의 시설물이므로 조선공산당 기념식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공산당 창립 93주년 기념식’이라는 현수막을 만들어갔지만, 그것을 공공연하게 내걸지도 못했다. 권오설의 삶과 죽음이 조선공산당 투사들의 삶이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이었기에 그 모든 동무를 위해서 한 송이 하얀 국화꽃을 바치고 인터내셔널가를 제창하는 것으로 위로 삼았다. 차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여 조선공산당 창립 100주년 기념을 앞두고,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성원 넘치는 행사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 만세!’ 추도식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의 가슴 속엔 이 한 마디의 외침을 품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동지들이 분명한 결의와 각오로, 공부와 실천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선배 동지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한 사회실천연구소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를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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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오세철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권오설 선생 시대에, 1910년 20년대 초기부터 조선 공산주의운동 역사를 제대로 실천하신 동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경성 콤그룹 구성원들이 있지만, 우리가 공부하고 이해하기로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사에 특별히 맑스주의 원칙과 사상을 끝까지 올바르게 붙들고 실천한 사람들이 경성 콤그룹 포함해서 조선의 공산주의자 그룹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공부했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를 포함한, 또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 동지들은 도대체 어떻게 무얼 붙들어야 하는가? 세계사적으로 붙들기도 하지만 조선의 공산주의 역사에서 누굴 붙들어야 하느냐? 어떻게 운동을 붙들어야 하느냐? 이런 고민을 하거든요. 공부하면서 그래도 그 시대에, 그 운동을 앞장서서 하셨고 또 실천하셨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던 동지들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온 이유입니다. 역사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추도사가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어떤 생각으로 나왔냐 하면, 앞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이, 또는 앞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겠다는 젊은 동지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결의와 각오를 우리 권 선배님에게 전달하는 의미로 나왔어요. 추도사 아닙니다.

 

그래서 짧게 이야기할게요. 최근에, 작년이 19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었고, 올해가 맑스 탄생 200주년입니다. 내년이 코민테른 100주년이에요. 3년이 연속으로 이어져서, 이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서, 제가 3년 동안 행사를 하는 게 아니고 공부를 좀 합시다! 그랬어요. 동지들한테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그래서 작년엔 러시아혁명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하고, 러시아혁명이 무엇이 문제였는가? 그건 혁명 자체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지만 왜 변질되고 퇴화했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여전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한마디로 하면 그거는 그 원칙과 사상을 져버린, 우리가 보니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특별히 총칭으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하기로는...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로 안 봅니다. 우리는 백 개의 공산주의가 있고 백 개의 맑스주의가 있는데, 그러면 진짜가 뭐냐? 그것을 찾는 운동! 저는 그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금 특별히 권오설 선배 동지가 했던 그런 운동과 세력은 거기에(공산주의) 가장 가까웠다고 저는 공부한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뭘 해야 하는가? 그것을 세계운동 속에서 찾아야 하고, 우리 운동도 있었지만 이제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계속 토론을 하면서 그것을 찾자, 제발 스탈린주의 좀 버리자, 운동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게 우리가 작년에 공부했던 것이거든요. 올해 이제 맑스에요. 올해가 맑스 2백 주년인데, 맑스를 다시 찾아야 하는데, 다시 찾는 게 아니고 먼저 돌아가서 찾자. 다 떠났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시 제대로 된 사상으로 돌아가서, 그럼 지금 맑스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겠느냐, 아 그걸 계속 공부하자. 금년은 그 공부를 합시다. 맑스 2백 주년 맞아서 그 공부하고, 2년 공부한 다음에 내년 아니에요? 그럼 코민테른 백 주년이에요. 그런(공부) 다음 당이고 뭐고 전략은 그다음에 이야기하자, 내가 그랬어요. 아까 무슨 당 이야기도 하셨지만, 우리가 그런 당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공부 좀 하시고 그 토대 위에서 전략도 이야기합시다. 그때 뭐 세계 혁명당을 이야기하든지 그렇게 합시다. 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부하고 있어요.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고딩이 됐거든요. 고등학생... 무슨 말씀인지 모르죠? 제가 열여섯 살이 됐다는 겁니다. 60을 버리고 한 바퀴 돌았으니까, 이제 열여섯 살이 됐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래서 공부 좀 합시다, 제발!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이제 공부하는 것을 보여드릴게요. 공부만 하지 않고 한 다음 실천을 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면서...

오늘 추모제를 보면서, 각 공산주의자의 추모사업회가 따로 있어요. 제가 알기로 이일재 선생도 계시고 이수갑 선생도 있고 남궁원 동지도 있고, 아! 개인으로 제발 그러지 맙시다. 이제 개인추모사업회는 자기들끼리 하더라도 좀 다르게 합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코뮤니스트정신계승회의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실천하는 모임을 하자고, 모시는 것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전 여기 오면서 나중에 점심 드시면서도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운동을 그렇게 하자는 거죠. 추모하실 분들은 또 이렇게 하시고 실천으로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을 제대로 하는 그런 모범을 좀 보입시다. 또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이 결의로, 헌사로 권선생님에게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오세철 동지의 추도사

 

 

 

*웬 뜬금없는 조선공산당 추모식이고 기념식인가 하고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시 한편으로 답을 대신한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옆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사형장 밖에서 목 놓아 울며 그 미루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한다. 예전에 사형장을 지키고 섰던 미루나무는 언젠가 비바람에 쓰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서 있다고 한다. 새로 심은 미루나무가 푸르게 자라듯, 코뮤니즘 혁명을 향한 진군의 역사는 또다시 되살아올 것이리라 믿는다. 모든 사라진 것들은 돌아온다.

 

 조선공산당 창건 93주년에 부쳐.pdf

 

 

미루나무

 

임성용

 

미루나무는

비바람에 쓰러진 게 아니었다

가슴이 저미도록 사무친 것이 있다

 

어떤 통곡이 있다

어떤 기억이 있다

달그림자 드리워진 올가미가 있다

 

울며 울며 땅을 치더라는

울지도 못하고 하늘을 보더라는

목 놓아 부여잡던 손톱자국이 있다

 

검은 구멍 속으로

깊숙이 햇볕이 든다

시구통으로 질질 끌려나오는 사람이 있다

미루나무 혼자서 붉은 담벼락 언덕을 본다

 

피맺힌 것이 있다

잊혀진 것이 있다

무덤의 유골로도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라진 뼈에 사무친 것이 있다

 

외로운 목숨이 질 때

미루나무가 쓰러질 때

인간의 땅에 태어나 푸르른 미루나무가 있다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마지막 숨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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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기사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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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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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1917, 2017년, 그리고 코뮤니즘의 전망

     

    23. 1917년 10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주요 공격 중 하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2월 봉기의 민주주의적 희망과 볼셰비키에 의한 10월 “쿠데타”를 억지로 대비시키는 것이다. 볼셰비키의 10월 쿠데타가 러시아를 재앙과 폭정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선을 무너뜨릴 필요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며, 이 제국주의 전선은 “민주주의” 편을 포함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분파 때문에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선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응답이었으며, 이런 수준에서 1917년 10월은 잃어버린 시대의 폐허와는 거리가 먼, 인류의 미래의 이정표였다.

     

    오늘날, 세계 부르주아지로부터 받은 모든 반격 이후, 노동계급은 그 혁명적 프로젝트의 회복에서 거리가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코뮤니즘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곤경의 바로 그 핵심에 있다. 코뮤니즘이 부재함으로써 만들어진 공허함의 형태로 그것은 세계의 상황은 곧 지배한다.”(세계의 상황에 대한 보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대회). 20세기와 21세기의 수많은 야만,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에서 후쿠시마와 알레포까지, 그것은 수십 년 전 코뮤니스트 혁명의 실패로 인류가 치러야 했던 매우 값비싼 대가였다. 그리고 만약, 부르주아 문명 쇠퇴기의 이 늦은 시간에, 혁명적 변환의 희망이 결정적으로 사라진다면, 인간 사회의 생존의 전망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이러한 희망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진정한 가능성을 띠고 발견된다고 생각하고 확신한다.

     

    한 편에서 그들은 객관적인 가능성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들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첨예해지는 충돌에 내포되어 있다. 쇠퇴기 해체의 자본주의는 모든 불황의 시대를 견뎌왔던 이전의 계급 사회들과는 달리 지구적 확장을 멈추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세포에까지 침투하기 때문에,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져 왔다. 몇몇 수준에서 이를 관찰할 수 있다.

     

    - 현대 기술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실제 사용에 잠재적으로 내포된 모순. 정보 기술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고된 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 있지만, 한 편에서 그것은 일자리를 줄이고 다른 한 편에서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 자본주의 생산의 세계적이고 연합된 성격의 자본주의 생산과 그 사적 소유권 사이의 모순, 다시 말해 한 편에서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 참여하는데, 다른 한 편에서 손톱만 한 소수의 오만과 낭비 때문에 그 사회적 부가 전용된다는 모순은 삶의 수준을 정체시키고 대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노골적인 빈곤에 대한 모욕이 되고 있다. 노동의 연결 수준의 객관적인 세계적 성격은 최근 수십 년 동안 특히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화와 함께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종종 스스로 극단적으로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러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군대는 잠재적으로 국제 계급투쟁의 힘에 새로운 원천을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혁명적 대결을 향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열쇠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모순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과잉생산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특히 대규모 부채에 의존하는 등을 의미한다. 과잉생산은 자본주의 고유의 불합리함으로, 풍요의 가능성과 자본주의 아래 그러한 풍요로움을 달성할 수 없는 불가능을 동시에 가리킨다. 다시, 기술적 발전의 예시가 이러한 불합리함을 부각시킨다. 인터넷은 모든 종류의 무료 재화(음악, 책, 영화 등)를 분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이윤 시스템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무료 배포도 축소하거나 상품을 광고하는 광장으로만 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거대한 관료체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더욱이, 과잉생산의 위기는 노동계급의 삶의 수준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인류 대중의 빈곤으로 귀결된다.

     

    - 자본의 지구적 확장과 민족 국가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성 사이의 모순. 1980년대 시작된 지구화의 특정 단계는 맑스가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예언한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수 없는 지향으로서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본질에 의한 장벽에 직면한다. 이 본질은 발전의 특성 단계에서 스스로 보편성 경향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신의 극복으로 나아갈 것이다.”1) 1차 세계대전 시절의 혁명가들은 물론 이 모순을 인식했다. 왜냐하면, 전쟁 그 자체가 민족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여 자본이 실제로 그 너머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의 첫 번째 명백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의 이러한 극복이 – 사실 몰락이 – 순수하게 경제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막다른 길에 가까워질수록, 군사적 수단들을 통해 타자를 희생하면서 “생존”을 향한 추동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 푸틴 등등의 노골적인 민족 전쟁은 인류의 통합과는 먼 자본주의 지구화가 우리를 자기-파괴에 더욱 더 가깝게 몰고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심연으로의 몰락이 반드시 세계 전쟁이라는 형태가 아니라도 그러하다.

     

    - 자본주의 생산과 자본주의 시작에서부터 “공짜 선물”로 여겨지는(애덤 스미스) 본질 사이의 모순과 전례 없는 수준으로 해체의 단계에 도달한 것. 이는 기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대와 같은 노골적인 공공 파괴, 그들의 주적인 중국의 성장,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중국은 희생을 감수한 성장을 향한 열띤 사냥으로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는 대기의 도시들을 탄생시켰고, 이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을 크게 가중시켰다. 그리고 고대의 미신과 현대의 깡패 자본주의의 기묘한 결합은 아프리카의 모든 종의 파괴를 가속했으며, 다른 곳에서는 그들의 뿔과 가죽의 마법적인 힐링 효과를 찬양했다. 자본주의는 성장에 대한 열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나, 이는 인류가 살아 숨 쉬는 자연환경의 건강과는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자본주의의 영속화가 군사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교환 수준에서도 인간종의 존재를 위협한다.

     

    위에 언급한 더는 견딜 수 없이 첨예화된 모순은 어쨌든 하나의 해결방법을 가리킨다. 이윤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세계 생산의 연합, 인간 존재 간의 연합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과의 연합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전환이 주로 드러나는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부분,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비록 역사적 상황의 심각성을 점점 더 깨닫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이전 수십 년간 공유해 왔던 “미래가 없다는” 절망을 더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확신은 자신의 연합된 생산력에 대한 앎에 기반을 둔다. 이 앎이란 과학적, 기술적 진보로 표현되는 잠재성, 지식과 그에 접근하는 수단의 “축적”, 그리고 인류와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하고 결정적인 이해의 성장이다.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부분 – 2011년, “세계 혁명”의 깃발을 한껏 높였던 서유럽 운동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 은 오늘날 노동의 연합이 띠는 국제적 성격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투쟁의 국제적 통합의 가능성을 더 잘 움켜쥘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지구적 통합은 자본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회피해야 할 해결책이며, 그것이 교환을 위한 생산에 내재적 한계를 드러내는 방법일지라도 그러하다. 쇠퇴의 시기 국가 자본주의의 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제주의적 방식으로 사회 통합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다급한 탐색의 일종이며, 자신의 붕괴를 부추기는 체제의 “자연법칙”이 전개되는 시기에 지배계급이 경제적 삶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려는 시도이다.

     

    24. 자본주의가 코뮤니즘의 필연성을 마법으로 없앨 수 없는 이상, 이러한 새로운 생산 양식은 자동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혁명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하다. 오늘날 노동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극단적인 어려움 - 코뮤니즘의 “소유권”을 부활시킬 수 없는 명백한 무능력 - 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뮤니즘을 향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활, 재구성이 여전히 오늘날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몇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왜냐하면, 코뮤니즘의 객관적인 필요가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를 향한 주관적인 바람을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고, 연합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서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 낼지 이해하기 위한 탐색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10월의 기억, 실제로는 독일혁명과 세계규모의 혁명적 물결이 10월에 의해 활성화된 것을 포함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억압되었으나, 모든 억압된 기억은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노동계급 안에는 진짜 이야기와 그로부터의 교훈을 의식적인 수준에서 유지하고 정교화하며, 그 자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를 회복할 때 계급의 사고를 살찌워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가 항상 있다.

     

    계급은 실천적인 투쟁이라는 엄격한 학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규모로 이러한 수준의 의문에 도달할 수 없다. 자본의 공격이 심화하는데 대한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투쟁은 연합된 노동이라는 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확신과 구속되지 않는 연대의 발전을 위한 강고한 기반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순수하게 방어적인, 경제적 투쟁은 교착상태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한 편에서 이론적인 투쟁, “깊은” 과거와 그 가능성 있는 미래를 이해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제는 계급 운동이 지역과 민족 수준에서 보편적인 수준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그리고 경제적 수준에서 정치적 수준으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계급의 당면한 투쟁은 다소 자본주의의 삶 자체이지만, 이러한 다음 중요한 단계를 밟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보장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한계가 있고 혼란스러운 방법으로라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재 세대들의 투쟁, 무엇보다 전체 체제 – 시위자들이 그들의 깃발에 공공연히 써 놓았듯이, “구시대적” 체제 - 에 대한 진정한 분노의 표현이었던 스페인의 분노 운동(Indignados)과 같은 투쟁은 어떻게 이 체제가 작동하고 무엇이 이 체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 동시에 현존하는 질서라는 제도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조직적 수단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다. 그리고 보라, 그러한 수단은 본질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중 집회의 일반화, 위임된 대표의 선출은 1917년 소비에트 시절로부터의 명확한 메아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의 깊은 지하에서 활동한 “노련한 두더지(Old Mole: 1968년 9월부터 1970년 9월까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에서 발간된 지하신문 중심의 급진적 신좌파 그룹)”의 작업의 명백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정치-도덕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계급의 더욱 넓은 부문의 일부로서 현존하는 삶과 행동의 방식에 대한 고질적인 거부의 등장이다. 이러한 순간의 진화는 계급 영역에서의 대중 투쟁과 혁명적 관점의 준비와 성숙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동시에, 분노 운동이 진정한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러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초기 정치화와 경제적 투쟁, 노동 계급이 여전히 가장 뚜렷한 존재감을 가진 노동 현장에서의 운동이 연결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룩셈부르크의 「대대적 파업」에서 볼 수 있고, 주창되듯이, 혁명적 미래는 경제적 투쟁을 현대주의자의 선언인 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 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차원의 진정한 통합에 있다.

     

    25. 운동의 경제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연결을 볼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코뮤니스트 정치 조직은 수행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왜 부르주아지가 1917년 볼셰비키 당의 역할을 전력으로 부정하며 자기 자신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광신도와 지식인들의 음모론이라고 내세우며 의심하는지 그 이유이다. 코뮤니스트 소수의 책무는 투쟁을 유발하거나 앞서서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수단과 목표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 속에 있는 것이다.

     

    또한, 붉은 10월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스탈린주의가 붉은 10월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지 반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무는 스탈린주의의 붕괴가 코뮤니즘의 경제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이 코뮤니스트좌파와 자본의 좌익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정치적으로 탐색하는 소수들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심각하다. 1989년 이전에는 반대로 혼란스럽지만, 식별가능했던 반자본주의 생각들은, 보기를 들어 평의회주의자 또는 자율주의자(autonomist)와 같은 종류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그룹들 내에서 영향력 있었는데, 그 이후 실물 경제 또는 현존하는 “상품”의 영역의 보존과 확장에 대한, 지역 수준에서 상호 교환 네트워크의 형성에 기반을 둔 개념의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의 진전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트의 더욱 정치화된 계층들조차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미래의 혁명가 세대의 출현을 준비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오늘날 현존하는 혁명적 소수들이 가능한 가장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왜 오늘날 코뮤니즘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가능성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코뮤니스트좌파는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분산되어 있으며 정치적 명확성을 찾는 광범위한 요인들은 거대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늘날 작은 혁명운동에서 미래의 대중 계급 운동의 진정한 전위로 행동할 역량을 갖추는 것까지 나아가는 데에는 갈 길이 매우 먼 것이 명백하다. 혁명가들과 정치화된 소수들은 이런 상황의 순수하게 수동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혼란은 자신의 분열과 방향 상실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혁명적 소수의 약점은 계급 전체 약점의 표현이며, 이를 극복할 어떤 조직적 비법이나 활동가주의 슬로건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017년 4월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Notebook IV, the Chapter on Capital.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이전 글> 

    1부. 계급투쟁 100년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17

    2부. 해체의 충격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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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2부. 해체의 충격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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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해체의 충격

     

    11. 폴란드의 투쟁과 그 패배는 세계 계급 균형을 요약하여 보여주었다. 그 파업들은 동유럽 노동자들이 그들의 러시아 대군주를 대신하여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체제 위기 심화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실제로 폴란드 노동자들의 물리적 충돌은 그곳의 전 지역의 노동계급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정치적 결과를 일으켰다. 이들 노동계급은 스탈린주의 정권의 해체를 촉발시킨 정치적 격변 때에는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러시아,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내재하고 있는 사악한 민족주의 선전 파도에 취약해졌다. 잔혹한 억압 없이는 위기와 계급투쟁에 대처할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지배계급은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정치적 유연성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따라서 1980~81년의 상황은 이미 동쪽 블록의 전반적인 붕괴를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쇠퇴라는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 해체의 시기로 정의하는 이 단계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간의 교착상태에 그 기원이 있다. 1968년 이후 선진국들에서 터져 나왔던 계급운동은 반혁명의 끝을 고하는 것이었고, 노동 계급의 지속적인 저항은 경제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해결책”, 다시 말해 세계 전쟁으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이 시기는 “대규모 계급 적대를 향한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었고, 또한 저항하는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맞붙어 패배시키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단계에서는 계급투쟁의 수준과는 별개로 제국주의 블록 양쪽 모두의 해체가 세계 전쟁을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문제가 더는 동일한 용어로 제기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적대자를 극복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함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야만의 미래밖에 없음을 의미했으며, 이 야만적인 미래의 윤곽은 지역적, 국지적 전쟁, 생태계의 황폐화, 계획적 대량학살, 동족상잔의 사회 폭력이 결합된 지옥과도 같은 광경에서 이미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패배와 직접적인 물리력이 모두 필요한 세계전쟁과는 달리, 야만으로 떨어지는 이 “새로운” 하강은 더욱 느린 속도로, 노동계급을 집어삼키고 계급으로서 스스로 재구성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더욱 교활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상황은 더는 계급 간 세력 균형의 진화 정도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이를 측정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졌다.

     

    12. 1968년 이후 코뮤니스트 운동 부활의 초기 단계에는 자본주의 쇠퇴라는 주제가 수많은 지지자를 설득시켰고, 부활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강령적 기반을 제공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코뮤니즘을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여기는 새로운 이들의 다수는 쇠퇴라는 개념을 부정할만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는 해체라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다소 세계에서 동떨어져 나온 것처럼 여겨진다. 다른 그룹들은 모두에게 자유로운 제국주의 사이의 새로운 시기의 다음과 같은 주요 특성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무시무시한 민족주의와 같은 심각하게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의 귀환, 자연과 사람의 관계 위기 등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주요한 징후를 인정하는 다른 그룹들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급 간 세력 균형의 교착상태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주의 쇠퇴의 질적 변화의 표현이라거나, 이러한 모든 단계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반대는 종종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의 “세계종말론적” 성향에 대한 비판의 형태를 띠는데, 이는 우리가 해체의 시기를 자본주의 말기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우리가 해체 배후의 경제적 위기를 핵심 요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기 때문이지만,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요인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에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상 계급 사회의 마지막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 막다른 길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계급사회가 그 쇠퇴의 시기에 진입했을 때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그 내부에서 새롭고 보다 역동적인 생산 양식을 끌어낼 수 없으며, 사회적 삶의 보다 높은 형태로의 유일한 길은 경제적 법칙으로부터 비롯된 어떠한 자동화된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인류 다수의 의식적인 운동,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힘든 작업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다.

     

    13. 해체는 두 주요 계급의 전쟁 중 교착 상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1989년 이후 계급의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유효한 요인임이 드러났다. 지배 계급이 해체의 징후들을 착취 받는 이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러시아 블록의 몰락을 동반한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매우 잘 편집된 선전은 계급의 자신감과 역사적인 임무를 새로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더욱 침식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코뮤니즘, 맑스주의, 심지어 계급투쟁 그 자체는 끝났다고, 죽은 역사일 뿐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 전투성, 그리고 정체성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미친 1989년의 사건은 단순히 거대한 규모의 반공산주의 선전의 결과가 아니었다. 이 선전의 효과성은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1917년 이후 계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독특한 발전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을 적대한 전투적 반혁명의 실패와 더불어 동시에 세계 혁명의 패배와 함께 완전히 예측하지 못했던,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부에서 반혁명이, 소련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는 어떤 보다 높은 역사적 필연성의 표현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탈의 표현이었다. 반혁명 부르주아 국가 관료제가 운영하는 자본주의 경제는 완전히 자격이 없는 것이었고, 그러한 임무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비록 스탈린주의 명령 경제가 소련이 2차 세계대전의 시련을 견뎌내는 데 효과적임은 드러났을지라도, 장기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 자본을 형성시키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비록 스탈린주의 정권이 쇠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특히나 반동적 형태였을지라도, 봉건적이거나 전제적인 종류의 정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도 결코 아니었다. 비효율적인 회사가 제거됨으로써 처벌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해고되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는 부르주아지의 성공이 될 수 없다. 스탈린주의의 특수성을 반혁명의 예상치 못한 산물로 심각하게 이해한 덕분에,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은 1989년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파열에 의해 전복된 것이며, 이러한 동쪽의 붕괴는 유사한 서쪽의 붕괴를 미루는 조짐이 아니었다는 것 말이다. 그 붕괴는 지배계급에 마지막으로 큰 서비스를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코뮤니즘의 죽음에 대한 선전은 현실에서 입증된 듯하다. 적절히 기능하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차이는 매우 중대하고 광범위하여 실제로 사람들에게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가 아닌 것처럼 비쳤다. 스탈린주의가 존재했던 이전에는 그것이 마치 자본주의의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비록 바로 이 대안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라도 그 존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무기고에 잠재적인 상처를 남겼다. 1960년대 계급투쟁의 부활은 이러한 상처로부터 반자본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그리고 국가 관료제나 정당 국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혁명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많은 이들에게 세계 혁명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 “그림의 떡”이었다면, 그 이유는 지배계급의 거대한 권력, 또는 인류라는 종이 내재한 이기주의와 파괴적인 본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감은 대중 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서 평형추를 찾아낼 수 있고, 종종 실제로 그러했다.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1989년 이후 질적으로 새로운 요인이 부상했다.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현대 사회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의식과 계급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어적 경제 투쟁을 전개하기도 더 어렵다. 왜냐하면, 대안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라는 논리가 훨씬 더 큰 무게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급투쟁이 당장 직면한 상황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할 수 있는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이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자가 되거나, 코뮤니즘에 대해 명확한 전망을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반드시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계급이 자본주의가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14. 그러나 전반적인 해체의 진행은 더욱 은밀하게 작동하고, “그 자체로” 노동 계급, 그리고 계급 정체성과 계급의식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대 일어난 구조적 변화 때문에 “뒤에 남겨진” 장기 실업 계층과 부분적으로 고용된 계층들 사이에서 특히 뚜렷하다. 과거 실업 계층은 노동자 투쟁의 전위였으나, 이 시기 그들은 룸펜화, 조직폭력, 그리고 성전주의자(jihadism) 또는 네오파시즘과 같은 허무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매우 취약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 89년 사건의 직접적인 여파를 예견한 바와 같이, 계급은 장기간 후퇴의 시기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후퇴의 길이와 깊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것으로 드러났다. 2006년(프랑스의 반 CPE 운동), 그리고 2009년에서 2013년 사이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나라(튀니지,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미국, 스페인 등)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 세대의 중요한 운동, 그리고 코뮤니스트 사상에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모두 계급투쟁이 다시 한번 무대 중앙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혁명 운동 발전의 새로운 단계가 열렸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많은 발전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혁명적 전위가 얼마나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15. 2011년 전후의 투쟁들은 경제적 위기의 심화 영향에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경제적 위기란 보기를 들면 그 지지자들이 자주 언급하듯이, 고용의 불안정 그리고 심지어 몇 년간의 대학 교육을 이수한 젊은이들조차 기회가 부족한 점 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계급투쟁의 질적 발전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 연결도 없다. 그것이 이미 패배한 노동계급의 사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향을 보였던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오랜 동안의 패배와 방향 상실 이후 2007~8년의 금융 지진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굉장히 부정적인 충격을 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경제적 확장의 심장부에 있었으나 내재적 모순으로 이제 그 붕괴를 예고하고 있는 신용(credit) 시스템의 확장이 바로 중요한 요인이다. 이 “금융화”의 과정은 이제 거대한 금융 기관들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수백만 노동자들의 삶 수준에서도 작동했다. 이 수준에서 상황은 1920년대와 30년대의 것과 매우 다르다. 그 시절에는 노동자들을 제외한 이른바 중산 계급(적은 재산의 소유자, 자유주의적 전문가들 등)의 대부분에게 잃어버릴 저축이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보험이 있는 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간신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서 그러한 국가들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당장의 물질적 상황이 80~90년 전보다 덜 극적이라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확히 자신을 1930년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 놓여있음을 정확히 알 것이다. 그들은 종종 엄청난 규모의 채무자가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그리고 1945년 이전의 많은 부분 동안, 오직 채권자 노동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지역 술집이나 카페, 그리고 식품 소매점밖에 없었다. 어려울 때 그들은 오직 계급 연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주택과 건물 융자와 함께 큰 규모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의 신용대출은 최근 수십 년 동안의 대규모 소비자 부채의 전개와 함께 폭발했다. 노동 계급의 많은 부분에서의 이러한 신용 경제의 전례 없이 세련되고, 교활하고 불안정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부르주아지의 노동계급 수입의 전유는 감춰져 있으며, 그것이 저축의 평가절하, 은행 또는 보험 상품의 부도, 또는 시장에서의 주택 소유권 몰수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복지 국가”의 보장과 그들의 재정이 점점 불안정해짐으로 인해 이러한 공공 체계에 대해 지급할 수 있는 이들과, 그들만큼 지급할 수 없이 그저 이들 체계에 의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인 이들로의 노동자 사이의 구분이 더욱 쉬워진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빚의 늪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를 훈육하는 새롭고, 추가적인,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준다.

     

    붕괴의 결과가 그 순손익이 많은 이들에게는 궁핍함으로, 그리고 작은 소수에게는 파렴치한 부의 이전이 될지라도, 충돌의 전반적인 결과는 자본주의 체계의 노동에 대한 이해를 날카롭게 하거나 확장시켜주지 않는다. 불평등의 증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부패한 도시 엘리트”를 향했고, 이는 우익 포퓰리즘의 주요한 강조점이 되었다. 위기와 동반하는 부정에 대한 반응이 미국의 점거 운동(Occupy movement)과 같은 보다 프롤레타리아적 형태의 투쟁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이러한 운동조차 탐욕스러운 은행가, 심지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섬세하게 붕괴를 조장한 비밀 그룹에 대한 비판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다.

     

    16. 1917~23년의 혁명 물결은 1871년, 1905년의 봉기 운동과 같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점화되었고, 혁명가들이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매우 호의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실제로는 혁명 물결의 패배가 보여준 것은 전쟁이 계급 내 심각한 분열을 낳는다는 것이었고, ‘승리한’ 나라와 ‘패배한’ 나라의 노동자 간에 특히 그러했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이, 부르주아지는 1917년 일어난 일로부터 필수적인 교훈을 배웠고,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응 가능성을 제한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적군들과의 우애를 다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군사 기술 전략과 형태의 발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주의 블록의 몰락 이후 서쪽의 지배 계급의 약속과는 반대로, 그것이 열어젖힌 새로운 역사적 단계는 결코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군사적 혼란,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 유럽의 문마저 흔든, 점점 더 지루한 전쟁의 확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야만이 드러나는 동안,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이제는 예멘과 시리아의 사건은 이러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부르주아지들이 있는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포함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넓은 영역들에서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프롤레타리아 형식의 반대는 이러한 해체의 전쟁들 가운데 매우 드물었다. 직접 영향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노동 계급은 스스로 지역의 군사적 갱들과 그들의 제국주의 스폰서들에 반대하여 스스로 조직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이는 시리아에서의 최근 전쟁에서 가장 명백했다. 이 전쟁에서는 공중 폭격을 비롯한 다른 형태의 폭격과, 무엇보다도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선의 건설과 정권의 반대자들을 다양한 무장 갱으로 징용함으로써 발생한 최초의 사회적 불만들의 탈선이었다. 자본주의의 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소름 끼치는 시나리오는 주로 절망감과 무기력감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현재 체제에 대한 어떤 저항 시도도 오직 더 나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랍의 봄”의 우울한 운명은 혁명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새로운 논거로 쉽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과거 몇 년간의 유럽 주변부 모든 국가에 대한 야만적인 분할은 체제의 중앙에 있는 노동계급에까지 부메랑이 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한 편에서, 세계적 수준의,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 그 범위에 있어서 진정으로 지구적인, 난민 위기의 진행, 다른 한 편에서, 테러리즘의 발전이다.

     

    17. 유럽 난민 위기를 촉발시킨 순간은 2015년 여름 “발칸 루트”로부터 비롯된 난민에 대한 독일(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이었다. 메르켈 총리의 이러한 결정의 동기는 두 가지였다. 우선 독일의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상황(주요 산업에서 당장 질적으로 보증되고 “동기화된” 노동력의 부족해질 것이라는 전망). 두 번째로, 남동 유럽이 수백만의 난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법과 질서가 붕괴될 위험.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는 다른 세계, 특히 유럽의 다른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의 결과를 잘못 계산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난민들과 자본주의 비참함의 다른 희생자들은 유럽으로, 특히 독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셍겐(Schengen)”조약 또는 “더블린 난민 협정”과 같은 조약이 있어 독일의 문제를 EU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의 첫 번째 결과는, 그러므로, 아마도 지금까지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유럽 연합의 위기였다.

     

    유럽에 수많은 난민이 도착하자 처음에는 전체 사람들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동정의 물결 – 이탈리아 또는 독일과 같이 충동이 여전히 강한 나라들에서 - 이 일었다. 그러나 이 충동은 곧 유럽의 외국인 혐오 때문에 파묻혀 버렸다.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포퓰리스트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법과 질서의 비밀 군대와 전문적 수호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통제되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유입을 매우 경계했다. 그들이 사는 국가가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숫자의 무슬림 유입이 유럽 내에서 이민자들의 하부 공동체를 발달시키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테러리스트의 유입에 대한 공포를 동반했다. 이러한 공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에서의 테러 공격의 증가 때문에 강화되었다. 독일 하나만 보아도, 이민자들을 향한 우익 테러 공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전 옛 동독 일부에서는 실체적인 대학살의 분위기가 전개되었다.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경제 위기 이후 우익 포퓰리즘의 불길에 부채질하는 (근본주의자 테러 때문에 증가한) “난민 위기”가 두 번째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2008년 이후 경제 위기가 어떻게 세계 경제를 관리하는 것이 최선인가에 대한 부르주아지 내부의 심각한 분열의 길을 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5년 여름은 이민에 대한 합의의 종말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의 기반은 지금까지 반쯤 개방된(semi-permeable) 국경의 원칙이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쌓길 원한 멕시코 장벽은 이미 존재하며, (군사적 순찰선 또는 공항 감옥 등의 형태로) 유럽을 둘러싸고도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장벽의 목적은 이민의 속도를 늦추고 규제하는 것이지 막는 것이 아니다. 불법 이민은 그들을 범죄화하여 그들이 어떤 사회적 보상의 권리도 받을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조건 아래 적은 임금만을 위해 일하게 강요한다. 더욱이, 승인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국경 지역의 체제는 결국 가장 용감하고, 단호하며, 역동적인 이들만 선별하는 야만적인 선택 메커니즘의 한 종류가 되었다.

     

    2015년 여름은 사실 존재하는 이민 시스템 붕괴의 시작이었다. 이민하려는 이들은 계속 증가해 왔던 반면, 그들이 이민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독일의 경우는 다소 예외이다) 이 불균형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포풀리스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 반쯤 개방된 국경을, 그 어떤 수준의 폭력이 필요할지라도 폐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들의 제안은 부르주아지의 관점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전 국가 수준의 “폐쇄된 사유지(gated communities)” 논리의 적용에 불과하였다.

     

    여기서 다시, 이러한 상황이 노동계급의 의식에 미친 영향은, 당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동쪽 블록의 붕괴는 마치 서쪽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의 증거인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위기의 심화가 결국 자본주의가 최고의 현실적인 체제라는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기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난민들뿐만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로 목숨을 걸고 갈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오직 이러한 구역이 (적어도 비교적으로는) 천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대적으로 번영과 안정의 지역이라는 인상을 강제로 심어줄 뿐이다.

     

    세계 경제의 붕괴가 미국과 독일에 집중되었던 1930년대의 대공황 시절과는 달리 오늘날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관리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 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은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일하진 않지만)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포위된 요새와 같은 상황이 등장했다. 이 지역의 노동계급은, 심지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뒤에서 적극적으로 동원되지는 않더라도, 외부로부터의 공동 위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착취자들이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데(심리학적 용어를 빌자면, “침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러한 위험은 현실이다.

     

    18. 중동 전쟁에서의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은 최근의 난민 위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쌍둥이 빌딩 공격 뒤로 마드리드와 런던 교통 체계에 대한 더 극악무도한 테러는 이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뿌린 씨앗이 소용돌이가 되어 나타났으며 이를 거두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독일, 프랑스, 벨기에, 터키, 미국 등지에서의 살인의 급증은 IS(Islamic State) 탓이지만, 비록 미숙하고 심지어 변칙적인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받은 테러리스트 “군인”과 고립되고 불안한 개인들을 구분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 탓이기도 하며, 이것이 난민 위기와 함께 발생함으로써, 전체 주민들 가운데 의심과 편집증적 과대망상을 강화하였고, 이는 결국 형식이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IS와 그 모방자들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반-게토화된 거대한 서쪽 도시들 속에서 더는 미래가 없음을 인식하는 불만이 가득한 이민지 청년들에게 짧은 영광의 순간을 제공한다. 해체의 시대 테러리즘은 더욱더 국가와 준-국가 사이의 전쟁 수단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주의의 표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19. 그러므로 최근의 포퓰리스트의 등장은 이 모든 요인들 – 2008년의 경제적 붕괴, 전쟁의 충격, 테러리즘, 그리고 난민 위기 – 에 의해 성장했고, 체제 해체와, 사회의 두 주요한 계급들 모두 인류에게 미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농축된 표현으로 나타났다. 지배 계급의 관점에서는 70년대 개방 경제 위기의 출발에서부터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심지어 축적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신자유주의” 합의가 소진됨을, 그리고 특히 전후 호황을 지배했던 케인즈주의 정책이 소진됨을 의미했다. 2008년 붕괴는 이미 존재하던 매우 부유한 소수와 대다수 사이의 거대한 부의 격차를 보다 넓혔는데, 탈규제와 지구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에 의해 고안된 틀 내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 등은 부르주아지의 점점 더 많은 이들, 신자유주의와 신케인즈주의를 같은 선전 연설 중에 동시에 지지할 수 있는 이들 포퓰리스트 우익과 같은 이들 사이에서도 문제시되고 있었다. 포퓰리스트 정책의 본질은 부르주아 사회 불평등의 정치적, 행정적, 그리고 법적 공식화이다. 2008년 위기가 상황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이러한 공식적인 평등이 전에 없이 명확한 사회적 불평등의 진정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해결책 – 계급 없는 사회 - 을 내놓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포퓰리스트의 반동적 대책은 존재하는 위선적인 가짜 평등을 노골적이고 “솔직한” 불법적 차별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고문,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주창한 “보수적 혁명”의 핵심이다.

     

    “미국 먼저”(America First)와 같은 슬로건이 의미하는 바를 가리키는 첫 번째 징후는 국민 전선의 선거 강령, “프랑스 먼저”(France d’abord)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고용, 세금, 그리고 사회 복지의 모든 수준에서 유럽 연합의 다른 국적 사람들보다 프랑스 시민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하는데, 결국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 우선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쟁이 영국에서 있었는데, 브렉시트 이후 유럽 연합의 시민들이 영국 원주민과 외국인 중간 지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영국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주요 논지는 유럽 연합의 거래 정책에 대한 반대이거나, 대륙인 유럽을 향한 영국의 보호주의적 충동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민과 국내 노동 시장에 대한 “민족적 주권을 다시 획득”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였다. 이 주장은 장기적 민족 경제의 성장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직 다른 모든 이들을 차별함으로써만 원주민의 삶의 조건이 다소간 안정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20. 이른바 금융과 유로 위기는 1989년 이후 계급의식, 계급 정체성과 전투성의 장기간의 심각한 퇴조에 치료약이 되는 대신 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일반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에서의 연대 상실의 치명적인 효과는 심각하게 증대했다. 특히, 우리는 희생양 현상, 이 사회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세계의 모든 악이 투영된 사람을 비난하는 현상을 보고 있다. 그러한 생각은 대량학살로 가는 문을 연다. 오늘날 포퓰리즘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사회관계 속에 퍼져 있는 문제의 유일한 형식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일터에서, 그리고 삶에서 그것은 협력을 약화시키고, 원자화, 그리고 상호 의심과 약탈의 발전을 부추긴다.

     

    맑스주의 노동자 운동은 이러한 경향에 평형추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통찰을 오랜 시간 동안 방어해왔다. 두 가지 가장 본질적인 통찰은 1) 자본주의 아래에서 착취는 비인간적 성격이 된다. 왜냐하면, 시장의 “법칙”(가치법칙)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스스로 이러한 법칙에 복종한다. 2) 이러한 기계와 유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계급 간 사회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부르주아 국가 의지의 법칙(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창조와 강요)에 기반을 두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다. 계급투쟁은 사람과 싸우는 대신, 사회관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체제 – 체제를 체화하고 있는 계급 – 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통찰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의식적인 계급의 층위라고 해서 희생양에 대한 면역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회복탄성력을 준다. 이러한 통찰들은 심지어 반혁명의 가운데서도, 그리고 심지어 독일에서도,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반유대주의에 더욱 오랫동안 저항했는지 그 이유를 일부 설명해 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전통은 지속해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노동 계급은 계급 일부가 심각하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독의 확산에 유일하게 진정한 방패로 남아있다.

     

    21.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성격을 전반적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당장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유리하지 않다. 미국이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에서는 포퓰리스트가 현재 집권해 있는데, 거리의 대규모 저항은 어쨌든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와 그 “자유주의적” 규제들을 방어한다. 대중들을 동원하는 또 하나의 이슈는 브라질, 한국, 루마니아 또는 러시아에서와 같은 부패에 대한 투쟁이다. 이탈리아의 오성(Five Star) 운동도 주요하게는 같은 문제로 고무되었다. 부패는 자본주의의 풍토병으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시기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다. 국가 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 가운데에는 부패가 생산력과 경쟁력을 방해하는 한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저항에서 국기를 흔드는 대중들이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부르주아 선거 과정에서의 이해관계의 재편도 있다. 연대의 후퇴 영향 아래에서 노동계급 일부분은 포퓰리스트에 투표하는 희생자가 되거나 기존의 정치 계급에 반대하는 종류의 것에 빠진다. 오늘날 해방의 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노동자들이 포퓰리스트를 선택함으로써 지배 계급에게 충격을 주고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아마도 더 큰 위험은, 생산 과정의 핵심에 있는, 가장 현대화되고 지구화된 계급의 부문들이 혐오스러운 포퓰리스트의 배타주의에 분노하고, 이러한 정치적 흐름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안정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다소 명확한 이해를 함으로써,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정권의 군림을 방어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에 있다.

     

    22. 포퓰리즘의 등장, 그리고 반 포퓰리즘의 등장은 노동 계급이 악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사이에 붙잡혀 버렸던 1930년대와 어떤 유사함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1930년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 시기에는 소련과 독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반대뿐만 아니라 물리적 패배로 고통 받았다. 이와는 반대로, 오늘날은 반혁명의 상황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물리적 패배를 강요하는 모든 시도를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1930년대와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포퓰리즘 또는 반포퓰리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집착이 전혀 결정적이지 않다. 포퓰리즘 후보를 찍는 많은 노동자들은 어느 날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반포퓰리즘 시위에 사로잡혀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노동계급, 무엇보다 과거 자본주의의 중심부에 사는 이들은, 계급의 특정 부문에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국가의 이해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싸울 가능성 또한 잃지 않았다. 이러한 잠재력은 68년에서 89년 시기, 그리고 2006년과 2013년 사이의 투쟁보다 훨씬 더 분산되고 단기적인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속해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동시에 소수 프롤레타리아 가운데 어려움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와 성숙의 과정이 계속되며, 이것이 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더 넓은 계층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더욱 숨겨진 과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을 공포로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반생산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착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강점 중 하나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존하는 환상에 강하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막다른 길의 해체하는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의 객관적인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3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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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 1부. 계급투쟁 100년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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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이 글은 ICC(국제코뮤니스트흐름) 22차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이다.

     

     1. 예상치 못한 영국의 EU 국민투표 결과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불안과 공포의 파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세계 질서를 책임지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그런 일 – 자본가 계급의 ‘합리적’ 이해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 이 발생하도록 놔두었는가? 어떻게 도박꾼, 자기도취에 빠진 악당이자 사기꾼이 이제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의 수장인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도, 전 세계의 향방에 대해 이 사건이 이야기해주는 바가 무엇인가?

     

     

    1부. 계급투쟁 100년

     

     2. 우리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진정한 조건을 계급투쟁의 관점, 그리고 사회의 착취 받는 계급, 진실을 숨기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본주의 전복을 목표로 하여 자본주의의 모든 신비화를 간파할 수밖에 없는 투쟁을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관점에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현재 당장 지엽적인 사건들은 세계-역사적인 틀 속에 위치 지울 때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맑스주의 방법의 본질이다. 2017년, 이 해가 러시아 혁명의 100주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세계적 상황에서 최근 진전이 있는 역사적인 시대 – 자본주의 생산 양식 쇠퇴 또는 퇴락의 시대 - 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00년 그 이상을 되돌아보기를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은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대한 러시아 노동계급의 대응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이 확인하였듯이, 이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자 자본주의 상승기의 폐막을 나타냈다. 경쟁하는 국가들로 세계를 나누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자본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폭발 다시 말해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닥쳐온 것이었다.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해 계급을 지도할 수 있는 정치 정당과 함께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역량은 자본주의 야만을 교체한다는 약속이 역사적으로 가능하며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더욱이, 1917년 혁명 운동의 전위에 있었던 볼셰비키 당은 러시아에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의 권력 쟁취가 오직 세계 혁명의 발단으로서 첫 타격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와 똑같이, 독일 혁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10월 봉기가 제기한 도전에 반응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를 끝장내지 않는다면, 인류는 심화하는 야만의 시대, 인간의 문명을 위험에 빠뜨릴 전쟁과 파괴가 휘몰아치는 시대에 돌입할 것임을 이해했다.

     

    세계 혁명을 염두에 두고, 이제는 반혁명적인 사회민주당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에 따라 볼셰비키 당은 코민테른의 창설을 주도했고, 1919년 모스크바에서 첫 대회가 열렸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코뮤니스트당은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확장되는 선두에 있었다.

     

     3.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대적 파업과 봉기를 촉발해 실제로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강제했지만, 예외적으로 헝가리와 독일의 도시들에서의 일시적인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국제 노동계급은 다른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잠재적이지만 자신의 무덤을 팔 이들의 위협에 직면한 지배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응하여 숙원의 적과 연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봉쇄, 침략, 그리고 무장된 반혁명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을 고립시켰고,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에 충성을 보여준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을 이용하여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에 침투하거나 그것을 무력화하고, 그들이 새로운 ‘민주주의적’ 부르주아 정권에 순응하도록 우회시켰다. 그러나 패배는 이제는 반동적인 지배계급의 지배 역량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미성숙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노동계급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 갑작스러운 전환에 직면해 있었고, 여전히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는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사회적 이득을 양도해 자본주의 정권을 개선시킬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심각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계급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학살당한 전쟁, ‘승리한’ 노동자와 ‘패배한’ 국가의 깊은 분리를 일으킨 전쟁의 공포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당은 고립, 내전, 그리고 경제 붕괴에 직면해 있었고, 더욱이 소비에트 국가기관과의 복잡한 문제로 얽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당은 일련의 끔찍한 오류를 저질렀는데, 이러한 오류는 결국 노동계급과 폭력적인 대립을 앞당겼다. 특히 노동자의 반대와 정치조직에 대한 억압을 포함하는 ‘적색 테러’는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를 진압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는데, 이 봉기는 1917년에는 존재했던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 수준에서 코민테른 역시 세계 혁명의 필요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필요에 점점 더 기울었고 원래의 명료함을 훼손하는, 1922년에 채택한 통일전선전술(United Front Tactics) 같은 기회주의적 정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정당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좌익 반대파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당에서 이탈리아 분파가 결국 패배한 혁명의 교훈을 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밝혀낼 수 있었다.

     

     4. 따라서 세계 혁명 물결의 패배는 1917~18년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실패의 결과 – 야만의 시대로의 새로운 추락 - 에 대해 경고했던 것이 진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변질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독재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일국 사회주의’ 원칙을 내세운 스탈린주의 국가기관의 승리로 (비록 시작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을지라도) 확인한 과정이었다. 혁명의 위협을 끝내기 위해 삽입된 ‘평화’는 곧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29년 과잉 생산으로 인한 세계 위기의 발발로 가속화,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과잉 생산은 자본 확장이 그 내재적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신호였다. 체계의 심장부, 특히 미국과 독일의 노동계급은 경제적 불황의 충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으나, 이 계급은 비록 미국과 스페인에서 일부 진정한 계급 저항의 표현이 있었음에도 10년 전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근본적으로 패배한 계급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계 전쟁으로의 또 다른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

     

     5. 반혁명의 갈고리에는 세 개의 주요한 갈퀴가 있었다.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 각각은 노동계급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반혁명은 혁명의 불꽃이 가장 높게 타올랐던 국가들 – 러시아와 독일 - 에서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유령을 쫓아내야 할 필요,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위기에 적응할 필요, 그리고 전쟁 준비의 필요에 직면한 모든 곳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삶의 모든 모공에까지 침투했다. 스탈린주의 정권은 완전한 전쟁 경제, 모든 반대의 격멸, 무시무시한 착취율, 광범위한 강제 수용소 등의 기조를 세웠다. 그러나 수십 년 후의 삶과 죽음에서 스탈린주의의 가장 최악의 유산은 그들이 10월 혁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가면을 썼다는 것이다. 자본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이 사회주의인 것인 양, 제국주의 확장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인 양 세계에 팔려나갔다. 10월 혁명의 기억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는 많은 노동자가 이런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신화를 믿었지만, 스탈린주의 정권의 진정한 본질이 계속 폭로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이 혁명에 대한 모든 사상에 등을 돌렸다. 스탈린주의가 코뮤니즘(공산주의)의 전망, 노동계급 혁명이 높은 수준의 사회 조직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가한 피해는 막대하다. 스탈린주의가 구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제 계급 운동의 패배와 무엇보다도 정당을 타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된 1914년 사회민주주의당의 변절 이후, 20년이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노동계급이 힘차게 만들고 방어한 조직이 노동계급을 다시 한번 배신하고 가장 최악의 적이 된다.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신감, 사회적 삶을 더 높은 수준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가능성에 대한 확신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었을까?

     

    지배계급, 그리고 중간계급에 버림받은 이들,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운동의 변절자들로부터 출발한 운동인 파시즘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가장 강력한 분파가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의 필요 -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쇄하고 전쟁 동원을 완수하는 것 - 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 아래에 있는 비합리성의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근대적 기술 사용에 특화되어 있었다. 특히 나치즘은 독일에서 더욱더 파괴적인 패배의 산물이었는데, 중세적 대학살을 안정화, 산업화시키고, 결국 자기-파괴를 향한 광적인 행진으로 타락한 대중들을 끌고 가는 등 비합리성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노동계급은 전체적으로 파시즘에 대한 어떤 긍정적인 생각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나, 반대로 반파시즘의 유혹 - 다가올 전쟁에 대비해 뭉치자는 주요한 호소 - 에는 훨씬 취약했다. 그러나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전례 없는 공포는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 못지않게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 – 곧 코뮤니즘의 전망 – 에 대한 타격이었다.

     

    선진 산업화 국가에서 부르주아 지배의 주요한 형태인 민주주의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형태에 대해 적으로 자신을 포장했는데, 사실은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끝장낼 때, 스탈린주의 정권과 전쟁에서 연합하여 히틀러 독일을 상대할 때에는 파시즘 지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쟁 중에 무너져 버린 파시즘이나, (중국과 기괴한 북한 정권의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 위기의 압박과 자본주의 세계 시장과 - 이를 국가 조례 등으로 회피하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 경쟁할 수 없는 무능력함으로 무너져 버린 파시즘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고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적 전체주의의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체계의 위기에 대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힘을 왜곡시키는 국가와 신용의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질적, 전략적 약점으로 인해 동구 블록이 선택했던 하향식 중앙집중화라는 극단적인 형태를 선택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 경쟁자들에 비해 오래 살아남았고, 이제는 서구의 오랜 자본주의의 심장부에 남은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파시즘에 반대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할 필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자본주의의 정면 뒤에 지배계급의 독재가 있다는 주장은 음모론으로 기각된다. 이미 1920년대와 30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은 괴벨스가 부러워한 공식적인 선전 유포 모델을 제공했으며, 그동안 미국 자본주의의가 개척한, 여가와 가족의 삶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상품 관계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로 더욱 교묘한 경로를 제공했고, 이는 단순히 정보제공자와 노골적인 테러에 의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6. 30~40년대 동안 국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혁명적 소수는 매우 감소했는데,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종전(終戰)은 새로운 혁명의 등장을 일으키지 않았다. 반대로 1917년의 교훈을 학습하여 처칠을 전위로 한 부르주아지가 독일 도시들에 융단 폭격을 하는 한편, 1943년 북부 이탈리아의 대대적 파업에 대해 “이탈리아 스튜는 그들의 국물로 만들어라!”라는 정책을 통해 어떤 프롤레타리아 봉기도 가능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렸다. 그러므로 종전은 노동계급의 패배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또다시 혁명가들의 기대와 달리, 전후 경제는 더 심한 경제적 불황에 돌입하지 않았으며, 전쟁에 승리한 블록 간의 제국주의 적대가 인류의 목을 조이려 계속 위협하고 있음에도 세계 전쟁으로의 새로운 추동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전후 시기는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본주의의 진정한 확장기였으며, 세계 시장의 일부분(러시아 블록과 중국)이 서방 자본의 침투를 차단하려 했음에도 그러했다. 동구 블록의 긴축 재정과 억압이 계속되자 중요한 노동자들의 봉기(1953년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발생했으나, 서구에서는 1947년 프랑스의 파업과 같이 일부 전후 불만에 대한 표현이 있었으나, 계급투쟁은 점차 사그라들어 사회학자들이 소비주의의 확산과 복지국가 발전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중산계급화’한다는 이론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실제로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들은 중요하게 남아, 노동계급 자신을 혁명 세력으로 재조직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소비주의는 노동계급을 원자화했고, 모든 사람이 개인적 소유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전파했다. 복지주의는 좌익 정당이 종종 도입했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의 승리로 표현되지만, 사실 자본주의 통제의 훨씬 더 중요한 도구이다. 복지주의는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국가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대규모 이민의 단계에서 민족 국가의 복지 조직은 건강·의료, 주택, 그리고 다른 복리후생에의 접근의 문제에 있어서 이민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노동계급 내의 분리를 발생시키는 잠재 요인이 될 것이었다. 그동안 1950년대와 60년대 노동계급의 명백한 소멸과 더불어 혁명적 정치 운동은 역사상 가장 고립된 상태로 축소되었다.

     

     7. 이러한 암흑기에도 계속 활동한 혁명가 중 일부는 자본주의가 관료제 국가 관리 덕분에 맑스가 분석한 경제적 모순을 통제할 방법을 학습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국제주의 그룹(Internacialismo group)과 같은 더욱 선견지명이 있었던 이들은 오랜 문제들 – 시장의 한계, 이윤율의 하락 경향 – 이 사라질 수 없으며, 60년대 후반 경험한 재정적 어려움은 노골적인 경제 위기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세대가 계급투쟁을 다시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 반응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해 환호했는데, 이러한 예측은, 수십 년 동안의 반혁명이 끝을 맞이했으며, 세계 전쟁으로의 과정을 촉발하는 새로운 위기를 막아온 주요한 방해요인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 1968년 5월 프랑스의 엄청난 운동과 그 후의 국제적인 투쟁의 물결로 충분히 확인되었다.

     

     8.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프롤레타리아 봉기에 앞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폭넓은 계층 사이에서 정치 불안이 고조되었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분리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에서 더욱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데 관심을 표명한 독일 학생들 사이의 운동, 프랑스에서의 베트남 전쟁과 대학의 억압적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운동, 현명한 사회학자들이 진부하다고 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다시 주장한 전후 이탈리아 맑스주의 ‘오퍼라이스트(operaist)’ 또는 자율주의적 경향 등이 있었다. 모든 곳에서 전후 경제 번영의 감미로운 과실이라고 광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이 고조되었다. 프랑스와 다른 산업 국가들에서 전투적 투쟁의 증가로 동력을 얻은 소수는 의식적인 국제주의 정치 전위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소수의 일부가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좌파)의 기여를 재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9.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소수와 광범위한 계급 운동의 만남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가끔 발생했다. 이것은 불만을 품은 소부르주아지가 정치화된 소수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일부 기인한다. 특히 학생 운동은 자본주의 조직의 변화를 가져올, 다음 수십 년 넘게 존재할 강력한 프롤레타리아 핵심이 부족했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강력한 계급 운동 그리고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을 저지하느라 발생한 심각한 대결에도 계급투쟁의 다수는 방어적으로 남아있었다. 오직, 아주 가끔 직접 정치적 의문을 제기할 뿐이었다. 더욱이 노동계급은 동서 간 ‘철의 장막’ 그리고, 자본 중심에 있는 소위 ‘특권적’ 노동자와 이전 식민지 지역 빈곤한 대중들 사이의 분리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중요한 분리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전위의 성숙은 즉각적인 혁명의 전망에 따라 억제되었고, 소부르주아지 성급함의 전형인 활동가(activist) 관행들은 혁명적 작업과 정치화된 소수가 직면한 거대한 규모의 이론적 작업이 가지는 장기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활동가주의(activism)의 우세는 소수의 다수가 좌익주의(leftism)의 부활에, 또는 투쟁이 침체 되었을 때는 타락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좌익주의를 거부한 이들은 종종 조직 건설의 문제 전체를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적 주장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그러나 작은 소수는 이러한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고, 성장과 재그룹화 움직임 활동을 개시, 1970년대까지 지속하여 코뮤니스트좌파(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s)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 초 갑작스럽게 끝났다. 1968년 거리에서 그리고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동구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로 대체하는 문제에 싹을 틔우고 보다 진전된 정치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실패한 이 시기의 투쟁은 결국 뒤이은 시대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프롤레타리아 에너지의 거대한 폭발은 그 열기를 모두 잃지 않았고, 지배 계급은 이 에너지의 시선을 돌리고, 탈선시키고, 억압하기 위해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였다. 근본적으로 이는 정치적 수준에서 발생했는데, 여전히 노동계급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자본주의 좌파와 노동조합의 힘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좌파 정부를 선출할 것이라는 약속을 통해서든, 1968년 이후 20년 동안의 급진적 노동조합주의 발전과 함께하는 ‘좌익 반대파’ 전략을 통해서든, 노동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기관(역자 주: 노동조합)의 도구화는 계급투쟁 억압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세계 위기에 따른 모든 구조 변화를 가능한 전부 이용했다: 한 편에서는 항만, 자동차, 그리고 인쇄 같은 산업들에서 숙련, 비숙련 노동을 모두 대체하는 기술적 변화를 도입하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자본 중심지의 모든 산업 연결망을 파괴하고, 노동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이윤은 엄청나게 큰 주변 지역으로 생산을 옮겨가는 생산 과정의 ‘세계화’를 향한 운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심장부에서의 노동계급 구성의 변화는, 종종 70년대와 80년대 초반 투쟁 중심지에 있었던 영역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제는 계급 원자화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계급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데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0. 1968년 해방된 투쟁의 역동성은, 몇몇 일시중단에도 70년대에 걸쳐 지속하였다. 자기 조직화와 확장에 관한 프롤레타리아 역량의 성숙도는 1980년 폴란드 대중 파업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 절정은 동시에 쇠퇴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비록 폴란드 파업이 경제 요구와 정치 요구의 전통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 보여주었음에도 폴란드 노동자들은 어떤 지점에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파업은 자기 조직화가 아직 발달 단계였으나 사회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보다 급진적인 토론이 가능한 맥락을 제공했던 68운동보다 ‘낮은’ 수준에 있었다. 폴란드의 운동은 매우 제한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서유럽’, ‘민주주의 정부’, ‘독립적인 노동조합’ 등을 그들이 원하는 대안적 사회로 보았다. 서유럽에서는 폴란드의 파업에 대한 몇몇 연대 표현이 있었고, 1983년부터 경제적 위기가 급격하게 깊어짐에 따라 그들의 범위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적인 투쟁의 파도를 관찰했다. 많은 경우에서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사이의 대립이 증가했다. 그러나 전 세계적 투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적으로 투쟁에서 의식적인 국제주의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노동조합은 당연히 국가 일부인데, 이러한 노동조합과 충돌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 전복의 필연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운동의 정치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을뿐더러, 인류를 위한 전망을 제시할 만큼 역량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70년대보다 더욱, 선진국들에서 80년대의 투쟁은 부문적 요구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고, 이러한 의미에서 역시 급진화한 형태의 노동조합 방해 공작에 취약한 채로 남아있었다. 이 시기 두 블록 간의 제국주의 긴장 심화는 전쟁 위협을 주요한 관심사로 등장하도록 했으나, 평화 운동이 이러한 관심을 분산시켰는데, 평화 운동은 사실 경제적 저항과 전쟁 위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의식적 발전을 효과적으로 방해한 것이었다. 이 시기 조직 활동을 지속했던 혁명가들의 작은 그룹들은, 그들은 노동자들의 특정 제안에 더욱 직접 개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노동계급 내의 ‘정치’에 대한 지배적 의혹에 전체적으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과 그 정치적 소수의 커다란 격차 심화는 그것 자체로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전망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력에 기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2부로 이어짐>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711/14435/22nd-icc-congress-resolution-international-class-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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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3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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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자)

     

    판네쿡과 호르터가 발전시킨 전략적 목표는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에만 한정된 것 아니었다. 1920년 봄, 급속히 강화되던 레닌주의적 코뮤니즘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의 강력한 도전은 유럽 전역에서 부상했다. 좌익공산주의는 1920년 코민테른에 가장 위협적인 도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좌익공산주의가) 응집된 구성체는 아니었으며, 단지 분기된 다양한 입장들을 포괄하는 분파적 그룹/당/저널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들을 연계시켰던 것은 러시아 모델의 서유럽 적용에 대한 거부뿐만 아니라, 반-관료주의 추구, 비타협적 혁명적 행동주의에 있었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해체된 후, 좌익공산주의의 국제 센터는 비엔나 코민테른 사무국과 그 기관지 「Kommunismus」로 이동한다. 편집인이 루카치였던 「Kommunismus」는 좌익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주된 포럼 역할을 한다. 루카치도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이론가로서, 판네쿡의 영향을 받았다. 좌익공산주의의 다른 주요 센터는 이탈리아에서 형성되었는데,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가 주도하는 반-의회주의 코뮤니스트가 상당한 정치세력을 구축한다. 보르디가의 반 의회주의도 판네쿡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좌익공산주의의 조직화 이론은 거부한다. 그는 강고하고 규율이 선 레닌주의-형태의 정당을 강조했고, 평의회 및 공장조직을 생디칼리스트적 이탈로 비난한다. 좌익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론적 센터는 영국에서 나타났는데, 실비아 팽크허스크(Sylvia Pankhust)의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Socialist Workers' Federation)과 그 기관지였던 노동자 전함( Workers' Dreadnought)이었다. 좌익공산주의 경향은 또한 의회주의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코뮤니스트 당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관료적 프롤레타리아 조직화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창립은 좌익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간의 대립 단계를 가져온다.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존중해 창립 후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고.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한다. 이후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Wolffheim, Laufenberg, Rühle의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공산당(KPD)과의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2차대회에 참가할 것)을 담은 공개서한을 전한다. 대표단은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륄레(Otto Rühle)의 2차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륄레는 레닌, 코민테른 타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인 7월 18일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라는 극적인 성명을 발표한다.

     

    그렇게 2차 대회에 불참했지만, 대회에서는 주요 이슈로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해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대회 마지막은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권주의파를 대표하여 보르디가 동지가 작성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1. 의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정치적 대의제도의 형태이다. 의회제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비판한 결과는, 국가 대의기구 선거에서 모든 사회계급의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부여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의 모든 정부기관이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위원회가 되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투쟁 기관으로 자본주의 국가가 조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코뮤니스트는 노동자계급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을 부정한다. 무장투쟁만이 노동자계급을 그 목표에 데려다 줄 것이다. 코뮤니즘(공산주의) 경제 건설의 출발점이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은 민주주의 기구들을 폭력적으로 철저하게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구, 즉 노동자평의회로 그것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착취 계급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대의기구를 가진 정부 체제를 세운다. 의회제도의 폐지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적 과제가 된다.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 사회 형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소유보다도, 관료적 국가기구보다도 앞서 타도되어야 한다.

    (중략)

     

    5.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이 아직 까마득히 멀어서, 혁명을 직접 준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현하는 것이 아직 계급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 시기에, 선거와 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선전과 선동, 비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혁명이 이제 막 시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코뮤니스트들이 아직 형성 단계에 있는 대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종적인 승리에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위한 사태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6. 세계혁명의 종결과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조직에 끼친 결과,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사상을 처음으로 실현한 러시아 혁명과 사민주의 배신자들에 반대하여 건설한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더불어 시작한 현재의 역사적 시기에는 코뮤니스트의 혁명적 대의를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선전의 선명성을 위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최종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선거를 보이콧하도록 선전할 필요성이 있다.

    (중략)

     

    10. 다수결에 의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가입을 결정한 당들에게 선거 캠페인에 계속 참여하게 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인자들을 걸러내는데 필요한 과정을 가로 막는다. 그들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의회와 기타 민주주의 기관에서 벌어지는 토론의 실제 성격은 반대당들이 비판으로부터 의회주의 원리에 반대하는 선전으로, 의회주의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선거과정의 공식 절차를 따르기를 거부할 경우 발언권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 제도의 기본 원리라는 공통의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 그 규칙의 미묘함을 이용하는 것에 의해서만 의회제도 내부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과 똑같이 점점 더 투표수와 의석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느냐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코뮤니스트당들이 의회주의적 실천에 완전히 다른 성격을 부여하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시지프스의 노고처럼 힘만 허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코뮤니스트 혁명의 대의는 바로 착취자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보르디가의 테제 낭독>>,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 8차 전체회의 (1920년 8월2일)

     

     

    코민테른과의 단절과 혁명운동의 퇴조

     

    코민테른과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판네쿡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 그 자체의 의미와 관련된 근본적인 쟁점에 관심을 둔다. 1920년에서 1921년 초까지 판네쿡과 호르터는 레닌에 대한 개인적 공격을 조심스럽게 피했고, 러시아는 새로운 코뮤니스트 사회를 낳았다는 신념을 확고히 유지했지만,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내에서는 륄레가 러시아 혁명에 대한 첫 번째 공개적 비판을 가한다. 러시아에서 1920년 6월 돌아오면서 그는 러시아 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허울일 뿐이며, 반-혁명적 당 독재가 권력을 쥐었다고 비판한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 사이에 러시아와 서유럽 상황은 급변하는데, 1920년 러시아는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러시아 지도자들은 서구에서 혁명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1921년 러시아는 여러 국가와 무역, 외교적인 유대를 마련했고,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임박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 같은 변화된 관점은 신경제정책으로 알려진 경제정책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 재평가 작업에 착수한다. 판네쿡의 분석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는 생각, 그리고 러시아는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크론슈타트 반란처럼)한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으므로,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판단하여 서구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비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이 축출된 이후 더 많이 표명된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20년 이후 혁명적 파고의 퇴조는 판네쿡에게 깊고 슬픈 환멸을 경험케 하였고, 정치적 관점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내용은 없었지만, 정치적 행동은 대개 개인적 만남에 한정된다. 정치적 혼란도 큰 이유였지만, 그가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천문학에 전업 경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 선전을 이유로 신분이 위태로워진 그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수학, 천문학 강사로 선임된다. 이후 20년간 그 연구원에서 그는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선구적 업적을 쌓는다. 혁명 운동의 의미에서 판네쿡의 적극적인 정치경력은 1921년 비-레닌주의 혁명적 좌파의 퇴조와 함께 종료된다. 이후 어떠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1921-27년간은 예외적인 휴지기였다) 그럼에도 그는 혁명적 이론가로서의 자기 소명을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중단 없는 저작활동을 한다. 좌익공산주의의 선구에서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로서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평의회공산주의는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경향으로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이 아니었으며, 장기간의 지적 탐구로부터 천천히 발전한 것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이론적 기초들은 아래 몇 가지 문제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발전시켰던 사상체계와 직접 맞닿아 있다. 하지만, 초기의 평의회공산주의가 좌익공산주의와 구분될 수 있었던 측면은 국제코뮤니스트운동과의 동일시 거부, 당이라는 조직 거부, 사회주의적 변형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을 발전시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었고, 이후 평의회주의1)라는 극단적 오류를 낳기도 한다. “비록 소규모였고 또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길 어떠한 능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적 분석은 훗날 ‘소비에트 레닌주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이데올로기적 도전”(McLellan, 1979)으로 평가받게 된다.

    <주>

    1)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이형로 (코뮤니스트 4호, 2014)

     

     

     

    독일혁명 연표

     

    1905년 러시아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룩셈부르크 <대대적 파업>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 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찜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등)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혁명 발생, 대대적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에서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독일사민당 진압 (로자 룩셈부르크 암살)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 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 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 창립, (공장조직의 연대) 오토 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 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로자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 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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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노동자평의회

     

    1920년 이후 판네쿡은 천문학의 연구에 집중했지만 평의회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에 이론적인 깊이와 이해를 제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판네쿡의 생각은 ‘노동자평의회’, ‘철학자로서의 레닌’ 그리고 출간되지 않은 ‘자유로의 노동자의 길’ 3권의 저서에서 발전된다.

    판네쿡의 『노동자 평의회』는 현재에도 노동자 자기해방 사상의 고전으로 남아, 수많은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읽고 있으며, 현실 운동의 무기로 등장하고 있다. 『노동자 평의회』가 낡은 표지를 벗고 다시 노동자들의 품에서 해방 사상으로 살아날 때, 노동자혁명의 불길은 다시 계급의 가장 아래로부터 타오를 것이다.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사상체계

     

    판네쿡은 사회주의 이행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요소로서 평의회 조직의 사상을 명백하게 하려고 했고, 평의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높은 단계에 있지만, 이전 조직을 단순하게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조직을 규정하던 근본적인 원칙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인 전문적인 지도체제를 제거함으로써 지도자와 추종 간의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고, 평의회에서는 지도력의 모든 기능이 사라지고 대중 모두가 적극적으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여 권력은 언제나 노동자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가 혁명조직에 의해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독단적으로 생성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조직은 단지 평의회의 사상과 필수성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평의회는 단지 노동자 계급이 공세를 취하는 혁명적 시기에만 적합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혁명을 완수할 능력이 없는 경우, 평의회는 유용한 사회적 기능을 더는 할 수 없으며,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전쟁의 수단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평의회가 단지 노동계급의 실천적 투쟁에서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생성될 수 있으며, 와일드캣 파업(비공인 파업)과 공장점거와 같은 활동에 태생적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를 노동자 평의회로 변형시키는 주요 요인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하는 파업위원회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파업위원회들은 평의회 조직의 기본적인 두 요소, 즉 직접 민주주의와 계급 공동체를 구체화시켰다고 보았다. 일단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 점거가 국가적이고 전체 계급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것들은 즉각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갈등으로 전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보다 높은 수준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판네쿡은 노동자 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바로 이때이며, 자본주의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는 혁명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했다.

     

    판네쿡은 부분적으로는 와일드캣 파업과 공장점거 전술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에 대항하는 불복종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그는, 선진 자본주의의 노동조합들은, 그들이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정체성의 흔적들을 잃어버렸고 또한 자본주의의 통합적인 메커니즘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조를 독점적 자본이 독점자본의 조건을 전체 노동계급에 부과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자본 합리성 원칙에 대한 노동조합의 헌신 때문에, 노동조합이 결코 ‘노동자들의 통제'라는 주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통제’는 노동조합 권력의 원천을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조합들은 지도자들에 의한 지배 원칙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충실한 재생산이고 어떤 혁명에서도 부르주아지의 굳건한 동맹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판네쿡의 생각에 노동자 운동의 부활은 이 옛날의 조직(노조)에 대항한 대중적 반역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판네쿡의 혁명적 변혁 모델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두 가지의 목적, 즉 투쟁의 직접적인 기구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특정 국면에서 혁명의 물질적, 정신적 기초이며, 새로운 사회의 하부구조와 조직적 채비를 구성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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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2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러시아혁명과 독일혁명 : 유럽 코뮤니스트의 형성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태도를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라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했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 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짜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독일사회민주당(SPD)으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 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조직 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 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 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 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 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할 제3 인터내셔널’과 현존하는 찜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 투쟁에 대한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발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 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1918년 11월 4일 키일(Kiel)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 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 주요세력이 된 독일사회민주당의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과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하게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 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 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독일사회민주당은 전쟁 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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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 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 협약으로 제도화되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독일국제사회주의자(ISD)는 그 이름을 독일국제코뮤니스트(IKD)로 바꿨다.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할 수 있는 일간지 코뮤니스트(Der Kommunist)를 창간했다. 혁명의 혼란스러운 처음 몇 주간 독일국제코뮤니스트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으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당시의 토론은 독일 코뮤니스트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 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 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 조직의 진정한 바탕은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 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독일공산당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 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은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독일공산당은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여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

     

    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독일공산당이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 구조는 대체로 문서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1월 25일 독일사회민주당의 내무장관인 노스케(Noske)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자유군단(Freikorps) 연대에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독일사회민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독일공산당과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으로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 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독일국제코뮤니스트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된다.

     

    코민테른과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설에 따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 그리고 브레멘 좌파는 코민테른의 가장 열성적 옹호자들이었는데, 러시아에서의 볼셰비키 승리로 코민테른은 러시아의 주도 아래 결성된다. 새로운 세계혁명운동의 성격에 대한 판네쿡과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네덜란드와 브레멘 좌파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코민테른 초기 러시아와 서유럽간의 소통을 위해 베를린에 서유럽 서기국(Secretariat)을, 암스테르담에 서유럽 사무국(Bureau)에 두도록 결정한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은 회의를 암스테르담에서 조직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면서 1920년 1월 활동 시작한다. 회의는 많은 사람에 코민테른 대회와 동급으로도 비추어진다. 1920년 2월 개최된 회의는 사무국 활동의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사실상 최초로 서유럽 인터내셔널로 복무하고자 했다. 회의에서는 네덜란드 대표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소한 12개국에서 참가하여 코민테른 창설 시보다 더 많은 대표가 참여한다. 회의는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고, 경찰에 일찍 해산되었지만, 그런데도 서유럽 공산주의 개념의 특수성을 최초로 확정했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은 의회주의, 노조주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조직화 원칙으로 노동자 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그것은 판네쿡이 초안한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였으며, 공개적으로 코민테른 정책에 도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판네쿡은 이때 즉각적으로 사무국의 “정신적 지도자”로 등장했고, 노조운동에 대한 테제에서도 같은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회주의, 노조운동에 대한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반감, 그리고 (코민테른에 소속된) 각 당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코민테른 지도력과 네덜란드 좌파 간 전망에서의 주된 차이를 보여주었다. 볼셰비키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심각한 차이점은 찜머발트 운동 시기까지 올라가지만, 양 당파의 차이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무마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처음에 볼셰비키, 코민테른 모두 의회주의 전술을 거부한다고 보고 그것을 당연시했다. 특히 그것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코민테른 초기 문건 등 몇몇 저작에 기인했다. 하지만 볼셰비키 이론과 실천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각성시키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을 공격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를 허물기 위해 의회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오랜 기간 강조해 왔다. 의회주의 전술에 대한 판네쿡의 반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로서의 평의회 체계에 대한 그의 지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판네쿡은 의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외관만 띨 뿐, 자본가 헤게모니의 주요 수단의 하나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와는 달리 노동자 평의회는 통합적인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 체계에 전체 노동계급을 통일시킬 것이며, 혁명전략, 사회주의적 사회 재조직화의 근본문제는 더는 전통적인 ‘지도력 정치’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사무국의 공격적인 전투성, 독립적 전망은 자체 하위 사무국으로 전미 임시 사무국을 조직화하려고 했을 때,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암스테르담 사무국이 자신을 코민테른의 도구가 아니라 미래 유럽 혁명을 위한 주 혁명 센터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국의 독립적인 혁명적 전망은 많은 부분 서유럽에 특수한 공산주의 개념화의 반영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암스테르담과 모스코바 간의 소통 부재에 의해 생긴 것이기도 했다. 사무국-모스크바 간에는 얼마간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없다가 소통수단을 갖추게 된 시점에 사무국의 정책과 활동이 모스크바에 알려지게 되었고, 코민테른 지도부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곤혹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분열점은 사무국이 새롭게 형성된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점이며, 코민테른 지도부의 반응은 신속했고 단호했다. 4월 30일 모스크바 방송은 사무국을 폐쇄하고 그 기능을 베를린 서기국으로 이관한다고 발표한다. 그 결정은 협의나 호소의 기회 없이 내려진 것이었다. 이 조치로 서구 코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코뮤니스트 센터를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를 잃게 된다.

     

    레닌 대 판네쿡-호르터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가 출간되기 전까지, 코뮤니스트 좌파(좌익공산주의)는 코민테른에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는 서구에서 레닌(주의)의 성격과 그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판네쿡과 사람들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은 세계혁명, 비타협적 계급투쟁, 전투적 반-의회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의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대를 예견했다 할지라도) 좌익공산주의가 세계혁명의 옹호자인 레닌과 확고한 제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속 확신했다. 판네쿡은 코민테른 전술에 영향을 미치려는 희망으로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이라는 제목을 단 문건을 작성했고, 그것은 즉각 좌익공산주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판네쿡은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맞는 혁명개념을 마련하기 위해 광범위한 이론, 경제, 사회, 역사적인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판네쿡은 혁명적 실천의 동유럽적 형태와 서유럽적 형태를 구분했다. 서유럽에서는 오랜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에 철저히 침투했는데, 독일 혁명에서 그것은 특히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보았다. 판네쿡은 서유럽에서 주된 전술적 문제는 혁명적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미성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공리처럼 여겼다. 그는 서유럽의 낮은 수준의 노동계급 의식, 늦은 혁명적 발전에 따라 2가지 갈등하는 전술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 의식에 대한 강조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의 대중정당, 러시아 볼셰비즘의 엘리트주의적 전위 양자를 모두 거부하게 한다. 판네쿡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 간의 차이는 깊고 실질적인 이데올로기적 분기를 말할 수 있지만, 그는 러시아 혁명이 갖는 세계-변형의 중요성을 믿었다.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 대중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발화시켰고,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유럽 혁명과 서구 자본에 대한 아시아의 대규모 반란을 가져오는 촉매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평가는 러시아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덜 강조하면서 민족해방운동으로서 그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판네쿡이 이 같은 주장을 발전시키고 있을 때, 레닌은 코민테른 2차 대회를 준비하면서 좌익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전략적 분석을 발전시킨다. 즉,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이것은 레닌 저작 중 아마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묘사되듯, 즉각 코뮤니스트 전략, 전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레닌은 서유럽에서 늦은 혁명 진척에 따라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을 향한 단축 시기가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장기적 싸움이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코뮤니스트는 가장 반동적 제도라 할지라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와 의회 속으로’는 좌익공산주의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레닌의 처방이었다.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지도자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레닌은 대중 조직에 침투하는 예외적인 수단들을 요구한다.

    레닌은 논쟁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 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하고, 특히 절대적 집중화와 강력한 규율이 부르주아를 이길 수 있는 근본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레닌은 신랄한 언어를 동원,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의 전술적 책략의 부재를 비난하는데, 특히 판네쿡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실한, 그리고 특별히 우둔한” 것으로 지적한다. 레닌은 당 조직화의 전위모델을 좌파가 부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 앞에 프롤레타리아를 완전히 무장 해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독일 입장은 불법이 불필요했던 국가에서 태어난 불행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말한 뒤, 그들은 ‘대중들의 정당이 아닌 동아리, 즉, 지식인주의의 가장 나쁜 측면을 닮은 지식인, 소수 노동자의 그룹’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으로 결론짓는다.

     

    이에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에 실은 짧은 후기를 통해 레닌의 주장과 비난에 대응한다. 그는 레닌 정식은 독창성,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것이 레닌이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과제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또 다른 주장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레닌 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통적인 의회주의, 노조운동 전술에 대한 레닌의 방어는 민족국가로서 러시아의 역할, 그리고 제3 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사명감 사이의 모순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그 모순을 분석하면서 경제 재개발에 대한 러시아의 절박했던 필요성을 지적한다. 판네쿡은 러시아의 정치적 요구가 서유럽에서 코뮤니스트 전술을 결정하는 데 핵심 요소로 되고, 코민테른은 서유럽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러시아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는 러시아가 잠재적으로 혁명에 대한 반동적 방해물이 되고, 반혁명의 승리를 가져올 힘들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판네쿡은 이처럼 러시아 혁명의 정체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첫 번째 코뮤니스트 이론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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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호르터, 1864~1927>

     

    레닌에 답변하는 주된 과업은 호르터에게 남겨진다. (그의 글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호르터는 네덜란드 코뮤니스트 중 레닌과 가장 긴밀한 관계라서 논쟁에 끼어들 것 같지 않았던 인물이다. (호르터는 「국가와 혁명」 등 레닌 저작을 번역, 자신의 저작 「세계혁명」을 레닌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판네쿡과 마찬가지로 호르터도 서유럽, 동유럽 코뮤니스트의 차이점을 축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당신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뛰어난 것이었고,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에는 무엇을 입증했는가?”) 그는 두 지역의 농업 부분의 차별성을 추적했는데, 동유럽 농민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반면, 서유럽 농민은 노동자를 계급의 적으로 인식하는 개별화된 소부르주아 기업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노동자들은 참호에 둘러싸인 부르주아에 홀로 맞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했다. 호르터는 서유럽 전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을 특징했던 같은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격하게 주장한다.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하여, 호르터는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자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호르터의 분석은 판네쿡과 유사하지만, 다른 몇 가지 점도 존재하는데, 판네쿡은 서유럽 혁명의 늦은 진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 때문이라고 보았고, 호르터는 프롤레타이아의 주요 걸림돌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리적 힘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관점에 따라 호르터는 (레닌, 코민테른 주장과는 다른 것이지만) 확고한 맑스주의 원칙, 당의 중앙집중화, “철의 규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3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이전 글>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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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6호]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1

  • 코뮤니스트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소개 

    - 노동자 자기해방을 향한 투쟁과 삶 -

     

    판네쿡과 네덜란드 사회주의 운동

     

     

     판네쿡(Pannekoek, Antonie - 독일식 표현으로는 Anton)은 1873년 1월 2일 네덜란드의 가난한 농업지역인 바젠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요한스 판네쿡과 빌헬미아 도로시아 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골에서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당시의 다른 맑스주의 지식인처럼 중하층 계급에서 상층지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힘든 노동과 독학을 통해 농사꾼에서 작은 주물공장의 경영인이 되었고, 자유사상가이자 자유당의 지지자였으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네덜란드 중간계급의 젊은이처럼 판네쿡도 특별히 반항적인 본성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의 청년기는 깊이 기억할만한 중요한 투쟁도 없었다.

     

     판네쿡이 정치의식 성숙에는 그가 자란 네덜란드라는 배경이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은 독립적이고, 대중에 기반을 두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중요한 노동계급 운동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상황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문화를 형성한 것은 네덜란드 자체의 경제적인 구조였는데, 노동집약적인 농업이 경제적인 주요한 영역으로 남아있었고, 서유럽 나머지 국가보다 산업화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성으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수동적이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산업화가 다가오고 있던 시기에, 경제적 법적 시스템의 낙후성은 광범위한 빈곤 계급을 형성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빈곤에 대하여 수동적인 온정주의의 수혜자가 되어가면서 네덜란드 노동계급은 그들의 비참함에 대해 산업자본주의 등장의 의미를 부여하기를 주저하였고, 혁명적 저항을 고무시킬지도 모르는 물질적 환경에 대해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판네쿡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1902년에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3년에 음악가이며, 문학교사였던 요한나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결혼했다. 1906년까지 그는 라이덴(Leiden) 천문대에 근무했고 그 이후에는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정치활동은 자유당과 학생토론그룹의 대표 활동이었다. 그는 학교 선생으로부터 좌파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대부분 자신의 지적인 모험과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적 확신에 도달한다. 맑스주의와의 첫 번째 만남은 1899년에 자유당 지역 클럽에서였는데, 에드워드 벨라미의 ‘평등’이라는 책을 접하고 그의 사상에 전반적인 전환을 맞는다. 1899년 그는 사회주의적 고전들을 소화해 내는데, 이론적 능력이 뛰어나 맑스주의 경제학 연구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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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수 누데바이어와 판네쿡, 1905년>

    그는 지적인 경로로 사회주의에 다가섰지만, 이론적 활동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1899년부터 1906년 독일로 오기까지 라이덴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몰입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사회민주주의의 일상생활에 개입하고 있는 다른 노동계급 전투파와 다르지 않았다. 천문학에 전념했지만, 네덜란드 사회민주노동당(SDAP)의 모든 활동에 참여했고 작은 라이덴 지부의 움직이는 힘이었다. 1900년 2월, 라이덴 사회민주노동당(SDAP)은 그가 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지역 노동계급을 정치, 경제, 사회적 세력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확대했다. 판네쿡의 강의는 지역 노동계급의 문화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당의 노력중의 하나였다. 그는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역문화센터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지역 노동계급을 급진하는 데는 실패했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 운동은 낭만주의에서 맑스주의로 발전하는데, 1880년대에 ‘타흐티허르(tachtigers)’ 그룹에서 시작된다. ‘타흐티허르’는 초기 낭만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해서 네덜란드 사회를 비판했지만, 1890년 이후 문학동아리에서 맑스주의 운동의 출현 기반을 닦는다. 1889년 맑시즘과 문학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고 논쟁은 사회주의, 개인주의의 장점에 대한 논쟁으로 변형되어 ‘타흐티허르’는 2개의 적대적 진영(개인주의·신비주의 대 맑스주의)으로 양분된다. 1890년대 초 젊은 맑스주의자 가운데 탁월한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와 롤랜드 홀스트(Henriette Roland Holst)가 등장한다. 호르터는 네덜란드 맑스주의의 발전에서 판네쿡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명은 서로 친밀한 보완관계를 형성한다. 홀스트도 호르터와 지적 친분이 있어 사회주의자가 되는데, 1897년 호르터와 홀스트가 먼저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판네쿡도 1899년 가입한다. 이들은 모두 당 이론지 ‘신시대(De Nieuwe Tijd. : 네덜란드판 신시대)’ 참가하여 활동한다. 초기 신시대 그룹은 독일 맑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고, 특히 카우츠키 저작에 의존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넘어가면서 독자적인 전망을 갖게 되는데, 판네쿡은 철학과 과학을 맡았다. 신시대는 곧 독일 카우츠키의 신시대(Die neue zeit)와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고, 그 영향도 네덜란드 이외 지역으로 확장된다.

     

     1908년 네덜란드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중파업이 일어난다. 1903년 이전의 사회민주노동당 내 분파투쟁은 특정한 정책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으나 1903년 대중파업 물결에 따라 혁명전략에 대한 논쟁으로 진입한다. 이는 판네쿡과 네덜란드 좌파가 정치적 사고를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며, 이때부터 판네쿡은 좌파 저항의 주 대변인이 된다. 이때 당내 분파투쟁의 전선은 당의 성격, 지도력, 전략, 혁명적 원칙에의 헌신 등으로 명확해진다. 1903년 대중파업의 실패 직후 그는 패배가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이 작동한 증거였다고 확신한다. 판네쿡은 맑스주의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문제는 특히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이념투쟁의 중요성에 있다고 느꼈다.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을 위한 이론적 작업과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독일로 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가 독일에 들어간 데에는 카우츠키와의 교류와 정치적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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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판네쿡 1908년>

     

    독일에서의 활동과 좌익반대파

     

     독일에 오래 머무는 동안(1906∼14년) 판네쿡은 ‘좌익반대파’의 이론가로서 빛나는 역할을 계속했고, 이 그룹의 경험은 판네쿡 사상의 본질적인 준거점이 된다. 그는 독일에 있는 동안에도 네덜란드 좌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파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함에 따라 1907년 10월 19일 트리뷴지(Tribune)를 창간한다. 1909년 2월 21일 드벤터(Deventer) 당 대회 일주일 후, 트리뷴지의 지지자 200명은 암스테르담에 모여 만장일치로 새로운 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한다. 1909년 2월 21일 창당대회를 연 것은 맑스가 사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고,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하여 혁명적 맑스주의 활동가 당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네덜란드 좌파가 서유럽의 다른 사회주의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계기이다.

     

     1910년까지 판네쿡의 정치적 입장은 카우츠키, 베벨, 플레하노프 같은 사상가들이 정의한 제2 인터네셔널의 맑스주의와 비교적 일치했다. 하지만, 1903, 1905, 1908년의 역사적 사건들과 국제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적 분화과정에 관한 지적 탐구와 이론적 성찰은 1910년 이후 그를 새로운 혁명 전술의 틀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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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네쿡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카우츠키 포함), 1907년>

     

    1910~1914년은 판네쿡에게 독일 사회민주주의 밑바닥에서 강력한 실천 활동을 한 특별한 시기이다. 즉, 1903년 이래 그의 사상에서 성숙해 왔던 새로운 통찰력을 확신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반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판네쿡은 당의 지도부나 관료에 한정되어 만났기에 점점 운동의 적극적 삶으로부터 고립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독일 사민주의의 지도력이 당의 핵심적인 부분과 완전히 동떨어진 ‘그들 자신의 이해 집단’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10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 사이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판네쿡은 이 논쟁의 주요 논객으로 참여했다. 카우츠키는 의회 전술로의 회귀를 방어했는데, 대중의 분노는 대중파업 같은 ‘극단적 경로’로서는 충분하지 않고 그 대신 ‘지구전 전략’을 주창했다. 그는 당의 진정한 과업은 2년 남은 의회선거에 대비하여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에서의 승리는 최종적인 ‘전복의 전략’의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승리를 위해 당은 미숙한 대중파업의 모든 시도를 방지하기 위해 조직을 활용하는‘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요청으로 1910년 4월, 논쟁에 참여하면서 판네쿡은 그녀의 입장을 방어하는 일련의 글을 썼다. 그는 운동이 직면한 현실 쟁점은 대중투쟁의 의지와 그 의지에 대한 지도부의 무능력 사이의 모순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카우츠키의  ‘지구전 전략’에 반대하는 판네쿡은 대중운동의 강화를 통한 자본가 국가의 기초를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공격적 전략의 필요성을 재강조했다.

     

     1910년 대중파업 논쟁이 마무리되면서 사회민주당(SPD)은 세 가지 경향으로 분화된다. 수정주의, 수정주의로 움직이는 이른바 맑스주의 중앙파, 그리고 판네쿡, 로자 룩셈부르크로 대표되는 새로운 ‘혁명 좌파’가 그것이다. 그 이전에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사이 분화가 추상적 이론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새로운 분화는 혁명 전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1910년 10월 대중행동에 대한 연설을 위해 슈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판네쿡의 새로운 주장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국가권력의 소유를 위한 자본가 계급과의 단순한 투쟁이 아니라 국가권력 그 자체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카우츠키는 신시대에 실린 연재 글 ‘대중에 의한 행동’에서 급진 좌파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판네쿡이 쓴 글 ‘대중행동과 혁명’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1912년 7월 다시 시작됐다. 판네쿡은 의회 활동을 넘어서는 대중행동은 거리의 군중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사실 그것은 ‘조직화한 노동자에 의한 구체적 개입의 새로운 형식’이라고 했다. 대중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솟아나는 힘의 지표이며 제국주의로 알려진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전략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공격적 성격이 전제될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자본주의의 권력 도구에 대한 직접적 공격으로만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레닌이「국가와 혁명」의 주요부분에 판네쿡과 카우츠키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그를 고무시켰다. 레닌은 <카우츠키와 판네쿡의 논쟁> 끝부분에 "우리는 기회주의자들과 단호히 결별할 것이며, 모든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 관계의 변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파괴를 위해, 코뮨형의 민주공화제나 노동자병사대의원 소비에트 공화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투쟁해나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의 공식적인 사회민주주의와의 결별은 1910년 봄 독일사회민주당 지방 학교에서의 조직과 교육을 위해 브레멘으로 옮기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베를린 시절과 대조적으로 판네쿡은 당에 삶을 몰입했다. 브레멘 사회민주주의 조직 내에서의 4년은 그의 사상을 갈고 닦는데 풍부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그의 경력에서 가장 성과를 남긴 시기였다. 브레멘 좌파가 ‘사회민주당 극좌파의 가장 훌륭하게 닻을 내린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판네쿡의 조직적, 이념적 작업의 결과였다. 1910년 봄 대중동원과 그들이 독일사회민주주의에서 불러일으킨 논쟁은 판네쿡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후 판네쿡은 이전의 저술에서 묵시적이었던 기본개념에 대해 명확한 형식을 부여했다. 대중의 창조적 혁명 에너지에 대한 믿음은 1910년 이후 그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의회에서 의회 밖 행동으로 투쟁 영역을 옮긴 판네쿡은 ‘대중행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모호한 표현을 전면적 표어와 통합된 혁명 전략으로 전환했다. 대중행동을 ‘대표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조직화한 노동계급의 의회 밖 정치행위’로 정의하면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투쟁 형식을 하나의 전술이나 일련의 전술로 보기보다는 계급, 권력 도구 그리고 정치 행동 사이의 새로운 상호작용에 기초 한 혁명 활동을 향한 총체적 지향성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요소들의 통일은 결정적인 권력투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축적된 반란의 욕구, 권력 의지, 그리고 경제적 불만을 가진 대중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개념의 주요가정은 ‘대중행동’으로 부르는 전투적 행위 복합체는 유럽자본주의 내의 새로운 발전의 산물이자 증상이라는 것이다. 판네쿡에 있어서 대중행동은 제국주의라는 지배계급 공격에 대응하는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방어적이며, 그것이 직접적 혁명투쟁의 기제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힘과 자신감의 표시하는 점에서 공세적이다. 생활수준의 저하,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권력투쟁에 위협받는 노동계급은 의회투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중간 매개체의 개입 없는 직접 경로로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찜머발트 좌파에서의 레닌과 판네쿡

     

     1914년 8월 이후 판네쿡의 정치활동은 국제사회주의운동 내의 좌파의 재조직화의 폭넓은 과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재조직화의 과정은 레닌과 볼셰비키로부터 주로 자극을 받았고 ‘찜머발트 운동’으로 알려진 조직적 기반을 갖게 된다. 좌파 재조직화에 대한 레닌의 첫 번째 시도는 1914년 9월 27일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린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주의자 회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 간의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간의 내전으로 돌리자는 9월 5일 테제를 제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영향을 미친 최초의 중요한 회의는 1915년 3월 26~28에 베른에서 열린 ‘전쟁반대 사회주의 여성대회’였고 2주일 후 사회주의 청년 대회가 뒤따랐다. 이 두 대회에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촉매로써 전쟁을 이용하자는 혁명가의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종식하자는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다.

     

     1915년 9월 5-8일에 스위스 찜머발트에서 열린 국제회의는 다수파와 소수파 사회주의자로 분리되었고, 반전 소수파 내에서도 독특한 좌파조류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 레닌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직접 혁명투쟁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결성을 주장했다. 레닌의 안건이 3분의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지만, 이것은 좌파에 의한 작은 승리로 간주하였다. 이를 계기로 향후 활동을 조정하기 위하여 베른에 <국제 사회주의자 위원회>를 설립했는데, 레닌은 이를 새로운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 보았다. 1915년 봄, 이 사무국은 라덱의 주도 아래 좌파의 국제 출판물을 내는 일을 하는데 판네쿡은 카우츠키의 「새시대」에 대항하는 이론지로서의 출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닌과 협의한 후 라덱은 독일어판을 네덜란드에서 출간하자고 판네쿡과 홀스트에게 10월에 제안했고 두 사람을 공동 편집인으로 추천했다. 최초 편집위원은 라덱, 판네쿡, 홀스트, 레닌, 트로츠키, 메링, 보카르트, 그림, 제트킨, 프라니아이였다. 레닌에게 판네쿡의 도움은 매우 중요했다. 판네쿡과 라덱이 생각하기에 그 출판물의 주요 초점은 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전략ㆍ전술 문제, 제2 인터내셔널 몰락의 원인,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

     

     새로운 출판물을 편집하는데 판네쿡이 기꺼이 나선 것은 그 스스로 혁명적 재조직화의 개념을 펼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모임에서 레닌과 밀접하게 동맹을 맺었지만, 그의 전략적 분석은 몇 가지 주요 지점에서 레닌과 달랐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그는 기존하는 사회주의운동의 분열과 전통적 전술보다는 정치의식과 대중행동에 근거한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적인 관심사라고 명확히 했다. 사회주의 좌파의 재조직화는 모든 국가의 지배계급에 대한 끊임없는 반대에 기초한 ‘행동의 국제주의’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운동의 시도는 ‘지도자의 인터내셔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1920년 레닌과의 논쟁의 핵심이 된다.

     

     국제이론지는 1916년 1월 「Vorbote」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판네쿡은 출간의 주요 목표를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이론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사회민주주의의 전면적 분리의 전제로서 ‘낡은 수정주의와 급진사회주의의 부적절성에 대한 냉혹한 분석’이 우선 포함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판네쿡의 서문이 나가자 레닌은 판네쿡이 이론지의 성격을 바꾸고 찜머발트 좌파 대표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비난하고 「Vorbote」지가 판네쿡과 홀스트의 개인적 기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레닌과 라덱 사이의 더 깊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당면한 쟁점은 레닌이 수용하고 라덱이 거부한 민족자결권이었다. 레닌은 판네쿡과 라덱이 카우츠키에 대한 투쟁의 접근방식이 부정확하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비판은 트로츠키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러시아와 네덜란드의 극단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또한 노동자를 조직하고 좌파의 폭넓은 운동을 세우기 위하여 출판물을 이용하는 것은 ‘순수한 레닌주의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트로츠키는 전쟁에 반대하는 찜머발트 선언을 썼지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를 요구하는 레닌의 국제주의자 입장을 지지하는 좌파에 함께하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Vorbote」는 2호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Vorbote」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찜머발트 좌파는 깨질 수 없는 계기를 마련했다. 1916년 4월 스위스 키엔탈에서 두 번째 회의가 열렸고 좌파가 무정형의 경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찜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찌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지노비예프가 1918년 3월에 말했듯이, 각기 다른 나라 좌파 사이의 회의와 그들 사이의 공동투쟁을 통해 ‘형성 중인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핵’을 만들 수 있었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안톤 판네쿡 같은 개인은 물론이고 볼셰비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 같은 사회민주당들의 그룹과 분파를 보더라도, 제2 인터내셔널과 찜머발트의 좌파와 제3 인터내셔널의 좌파 사이에는 정치적이고 유기적인 연속성이 있다. 코민테른의 첫 번째 대회는 제2 인터내셔널의 부분이었던 러시아 코뮤니스트당(볼셰비키)(이전의 러시아 노동자 사회민주주의당(볼셰비키))과 독일 코뮤니스트당(이전의 스파르타쿠스)의 주도로 소집되었다. 볼셰비키는 찜머발트 좌파의 주도 세력이었다. 찜머발트 좌파는 제2 인터내셔널과 제3 인터내셔널 사이의 진정한 유기적·정치적 연결고리였는데, 그들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익으로서 과거에 벌였던 투쟁을 평가하면서 그 시대의 요구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찜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제국주의 살육에 항의하기 위해, 결의가 있는 모든 프롤레타리아 세력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열린 매우 중요한 대회였다. (…) 찜머발트 그룹은 자기 전성기를 가졌다. 찜머발트에 모인 진실로 혁명적인 세력은 모두 더 전진해 코민테른에 합류한다.” (찜머발트 대회 참가자 선언)

     

    <2부로 이어짐>

     

     

    <참고문헌>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John Gerber (박사 학위 논문)

    <<좌익 급진주의에서 평의회공산주의로 : 안톤 판네쿡과 독일의 혁명적 맑스주의>>, John Gerber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2. 1988)

    <<네덜란드와 독일의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좌익공산주의>>, 오세철 (빛나는 전망, 2008)

    <<노동자평의회>>, 안톤 판네쿡 (빛나는 전망, 2005)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Pluto, London, 1978)

    <<국가와 혁명>>, 레닌 (돌베개, 1992)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헤르만 호르터 (Wildcat pamphlet, London, 1989)

    <<1919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창설>>,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 트로츠키주의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Communist Workers Organization) 

     

     

    [정리]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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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 독일 혁명과 코뮤니스트좌파

    남궁 원

     

     <편집자 주> 이 글은 독일혁명(1918-1923) 100주년 맞아 교훈을 얻고자 남궁원 동지가 [코뮤니스트 창간호]에 발표한 글을 보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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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식 - 세계혁명 분기점, 독일 혁명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혁명으로 발전하느냐는 서유럽, 특히 독일 혁명(1918-1923)에 달려있었다. 특히 레닌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수행하면서,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를 돕지 않는다면, 러시아의‘일국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 패배 이후 스탈린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은 ‘일국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밀어붙였다.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레닌과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심각한 대립을 빚고 있었다. 레닌은 1920년 코뮤니스트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소집에 맞춰,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 팸플릿을 작성하면서 독일 급진 좌파를 비판한 바 있다. 이 문건은 레닌이 각국의 노동운동 및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좌익 편향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레닌이 지칭한 좌익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공산당 내의 급진좌파였기 때문이다. 레닌이 볼 때 노조와 의회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오직 후진 노동자를 그들의 반동적 리더의 영향 아래 남겨두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레닌의 이 문건은 볼셰비키의 경험을 혁명의‘보편적 모델’로 일반화한 것이며, 즉각적으로 전 세계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략, 전술의 방침이 되었다.

     

    이에 독일 급진 좌파를 대표하는 안톤 판네쿡과 헤르만 호르터는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하면서, ‘러시아 혁명을 모방하고, 노조와 의회 활동’을 권고하는 레닌에 강력히 반대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고, 의회와 노조 참여를 통해 계급의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레닌의 강조에 반대한다. 이들은 평의회, 공장조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의식을 형성하는 좌익공산주의 전술을 거듭 주장한다. 또한,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일한 종류의 기회주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차르의 후진 러시아와 선진 서유럽 상황에서 혁명의 전략과 전술이 과연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또한, 독일 혁명을 둘러싸고, 좌익공산주의 정치조직 흐름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 Bund), 독일코뮤니스트당(KPD),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대립은 무엇이었고, 코뮤니스트좌파 계열은 어떠한 혁명관과 조직관을 갖고 활동했는가? 독일 혁명 과정에서 코민테른 지도부와 코뮤니스트좌파 사이의 논쟁은 무엇이었나? 이 글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흐름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로자 룩셈부르크,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 오토 룰레, 칼 코르쉬, 폴 매틱 등 독일-네덜란드 코뮤니스트좌파의 자세한 이론적 쟁점은 생략한다.

     

     

    평의회를 둘러싼 논쟁과 분화: 독일코뮤니스트당 창당

     

     당시 독일의 주요 정치세력은 사민당과 독립사민당, 스파르타쿠스단, 브레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의 연립정부 구성이란 안정 속에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국민의회 소집을 뜻한다. 여기서 레테(평의회)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혁명 발발 직후 카우츠키가 이끄는 독립사민당 지도부는 레테(평의회)체제냐 국민의회체제냐 사이에서, ‘국민의회와 레테체제’ 입장을 취한다. 국민의회 소집은 곧 부르주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1918년 12월에 열린 노동자병사 레테(평의회) 전국총회는 국민의회 결정을 내린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 내에서 패배하고 당을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데에 한계를 느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을 탈퇴한다. 현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평의회 활동을 전개한 IKD(독일국제코뮤니스트)그룹은 급진좌파의 통합을 요구받고 있었다. IKD그룹의 제안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적 노조그룹과 통합 대신에 IKD그룹과 함께 1918년 12월30일 독일코뮤니스트당을 창당한다.

     

    독일코뮤니스트의 강령은 노동계급의 규칙을 확립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련의 실천적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첫째, 경찰과 군 간부의 무장해제, 노동자평의회에 의한 모든 무기와 화약의 접수, 노동자 군대의 창설.

    둘째, 군대 통솔구조의 해소, 군사평의회의 일반화.

    셋째, 혁명 법정의 창설.

    넷째, 전국의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에 의해 선출된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 중앙의 회 설립, 모든 옛 시의회 및 국회의 해산.

    다섯째, 6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

    여섯째, 모든 인민의 의식주를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의 몰수.

    일곱째, 토지, 은행, 광산, 그리고 주요 산업 및 상점 기업의 몰수.

    여덟째, 공장과 기타 작업장의 관리를 과업으로 하는 기업평의회 건설이다.

     

    그러나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창당 직후 내부논쟁에 휩싸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국민의회 선거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말로만 투쟁하는 것은 아니라, 국민의회에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요지다. 이에 대해 급진좌파 대표로 나온 오토룰레(Otto Rühle)는 국민의회 연단 대신에 거리연단에서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혁명세력은 14일 이내에 곧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낙관적인 혁명 전략을 피력했다. 국민의회를 둘러싼 당 대회의 격렬한 논란 끝에 62:23으로 선거불참이 결정됐다. 이 결정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평의회에 대한 판단 차이가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회선거 참여를 주장한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한계가 나타난 것이다. 창당대회 당 조직 문제는 중앙집권적 방식이 아니라 연방제적 원칙을 결정했다.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은 베를린 1월 봉기, 루르 광산지역, 중부지역 노동자총파업과 사회화운동 등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다 정부군에 의해 무력진압 되었다.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당원은 20만 명이나 되었다. 1920년 초 우익의 카프반란이 시도되었을 때, 코뮤니스트좌파 활동가는 루르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사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1월 봉기 기간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되고, 이후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조직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당내 급진좌파를 겨냥한 내부투쟁에 돌입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은 2차 전당대회에 ‘코뮤니즘의 근본원칙과 전술에 관한 기본원칙’을 채택하면서 독일코뮤니스트당을 혁명투쟁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당의 볼셰비키적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결정한다. 이른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화’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의 활동방침을 지지한다. 독일코뮤니스트당과 노동조합은 의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노동운동의 조직형태로 자리매김 된다.

     

     

     

    코민테른 지도부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 대립 :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판네쿡뿐만 아니라 유럽 코뮤니스트 운동의 좌파들은 대부분 열렬한 레닌주의자였고,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원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볼셰비키의 강점을 조직구조에서 보지 않고 공격적 전투성과 맑스주의 원칙의 확고한 헌신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5년 찜머발트 좌파에서 드러난 레닌과 판네쿡의 차이는 한 마디로 국제주의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코민테른이 결성되고 서유럽의 공격적 맑스주의자들은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만든다. 판네쿡과 네덜란드, 브레멘(독일) 좌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열광적 주창자였지만,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승리로 인해 코민테른은 러시아 주도하에 결성되었다고 보았다.

     

    1920년 2월 3-6일 암스테르담 국제대회에서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서유럽 인터내셔널로서의 역할로 규정하고 의회주의,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조직으로서 노동자평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코민테른 지도부와 네덜란드 좌파 사이의 전망 차이의 첫 번째 표시였다. 암스테르담 서기국은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입장을 채택했고, 1920년 4월 30일 모스크바 지도부는 암스테르담 서기국을 폐쇄하고 베를린 서기에게 할당했다고 방송했다.

     

    1919년 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독일코뮤니스트당으로부터 축출된, 판네쿡, 호르터, 오토 룰레 등 독일‘코뮤니스트좌파는 (투쟁 정신과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관료적’ 경쟁자를 순식간에 넘어선) 새로운 당,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당시 당원은 4만 명이었다.

     

    KAPD 강령을 검토하면 맑스주의의 명료성을 볼 수 있다.

    첫째,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강령은 세계자본주의의 객관적인 역사적 환경에 기초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혁명과의 연대와 세계적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셋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에 대한 반대는 도덕주의와 형식에의 집착이 아니라 의회와 노조가 계급의식에 봉사하는 조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넷째, 공장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주창은 소수의 혁명가가 꿈꾸는 가공적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계급 운동의 구체적 조직적 표현이다.

    다섯째, 반(反)당의 입장과 달리, 코뮤니스트 투쟁의 핵으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여섯째, 강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방어하고 있다.

     

    1920년 4월 KAPD의 창립은 코뮤니스트좌파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 단계를 가져왔다. KAPD는 레닌주의 전술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3 인터내셔널의 존재이유에 대해 존중했으며, 창립 후 KAPD는 야펠(Appel)이 이끄는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코민테른에 당 가입을 협상하고자 했다. 5월 초 도착한 대표단을 레닌이 마중 나왔다. 대표단-코민테른 집행부의 회합 후, 지노비에프는 KAPD 구성원에게 코민테른 가입을 위한 4가지 조건을 담은 공개서한을 건넨다. (울프하임, 라우펜베르그, 오토 룰레 즉각 제명, 2차 대회 결정의 무조건적 복종,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위한 화해위원회 설치, KAPD가 2차 대회에 참가할 것). 야펠 대표단이 독일로 돌아갔지만, 오토 룰레의 2차 KAPD 대표단은 1차 대표단의 토론 내용과 지노비에프의 서한을 읽을 기회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며, 오토룰레는 레닌과 코민테른의 다른 지도자들과 오랜 토론 끝에, 2차 대회 개회 전날 밤 7월 18일 극적인 성명발표를 한다. KAPD는 회의에 불참할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

     

    KAPD가 2차 대회에 불참하였지만, 대회에서 코뮤니스트좌파가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대두되었다. 대표자들에게 논쟁의 배경 설명을 위해 판네쿡과 레닌의 글이 배포되었다. 이는 코민테른에 의해 외국 반대파의 저작이 배포되었던 마지막 경우였다. 가장 극적인 대립은 보르디가가 좌파의 반-의회주의 관점을 재확인하는 테제를 제시했을 때였다. 네덜란드와 독일 좌파와 마찬가지로 보르디가도 인터내셔널에 대한 점증하는 러시아의 지배에 대해 비판하고, 동구에서 볼셰비키의 경험은 서구에 기계적으로 이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마지막에 의회주의, 노조운동,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당 조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2차 대회 직후 KAPD내에는 제3 인터내셔널과의 장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오토 룰레가 취했던 소수 입장은 코민테른과의 어떠한 협력도 거부하는 것이었지만, 오토 룰레는 2차 대회에서 돌연한 이탈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받았다. KAPD 다수의 감정은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자신의 의도를 발표했던 호르터가 대변했다. 호르터는 코민테른 전략의 오류에 대해 레닌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면서, KAPD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집행부와 토론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레닌은 개인적으로 호르터를 만났지만, 그의 설득, 충고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렇지만 트로츠키는 보다 직선적으로, 서유럽 혁명개념에 대한 호르터의 방어에 대해 아이러니한 경멸을 가지고 반응했다. 이 같은 대화의 결과는, KAPD를 독일코뮤니스트당과 재통합을 추진한다는 조건 아래, 협의적인 지위를 갖는 “동조자 당”으로 KAPD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같은 조정이 많은 단서조항을 가지고 있었지만, KAPD는 제3 인터내셔널 내에 혁명적 반대파를 형성할 수 있다는 기대 하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KAPD는 1921년 5월 혁명적 반대파를 조직하기 위한 과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그것은 야펠(Appel), 슈바브(Schwab), 몌이에르(Meyer)로 구성된 또 다른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다가오는 3차 대회에 참가하는 대표단 가운데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 국가의 좌파경향의 대표단들과 대화를 나누었지만, KAPD는 대회에서 응집된 반대파 분파를 조직할 수 없었다. 이때 코민테른 집행부는 KAPD에 KPD와 통합, 아니면 제명이라는 양자택일의 최후통첩을 보냈고, KAPD는 즉각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9월 공식적으로 코민테른에서 방출된다.

    호르터는 독일노동자총연합(AAUD)과 함께 본격적인 노동자평의회운동을 전개한다. 호르터는 당의 주요 목표는“평의회 사고”를 선전하고, 평의회가 나타나면 당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르터가 러시아와 서유럽의 정치 경제적 차이를 강조한다면, 판네쿡은 러시아와 달리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사고에 미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영향이 크다고 판단한다. 반면 레닌이 쓴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무질서 (좌익소아병은 잘못된 번역)>에서는 이 부분(러시아와 유럽 차이에 대한 좌익공산주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보편성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 3월 판네쿡은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을 좌익공산주의의 교과서로 제출했다. 판네쿡은 여기서“의회의 활동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족으로 분할되고, 진정한 국제주의적 개입이 불가능해지며 국제자본에 대항하는 대중 행동에 있어서 민족분할로 나아간다. 제국주의 시대에 노동조합은 이전의 부르주아 국가와 같이 동일한 발전 경향을 갖는 거대한 단체가 되었다. 그들 속에는 관료 계급이 생기고, 그 관료주의는 자금, 언론, 경영 등 모든 조직의 자원을 통제한다. 혁명당의 기능은 앞장서서 명확한 이해를 선전하고 대중이 올바른 방식으로 인식하는 계획, 슬로건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네쿡은 또한 서유럽의 전술선택이 생디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차별화했다. 즉 생디칼리즘의 목적은 조합관료주의와 옛날 국가기구의 급진 부분에 기반을 둔 정부를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국가를 존속시키게 하며,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정신적 요소를 구별 못 하고 지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레닌의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라는 전술의 방어는 국민국가로서의 소련의 역할과 코민테른의 역사적 사명 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보고 결국 소련이 서유럽정치에 개입하는 도구로 코민테른을 전락시켰다고 비판한다.

     

    판네쿡과 호르터는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이념적 몰입, 공장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통제를 생산력 증진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도구로만 협소하게 이해한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을 국가 행정기구에 통합시킴으로써 혁명 후 혁명 사회의 기초기관으로 자리 잡아야 할 노동자통제는 당과 국가에 의해 억압되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량생산체제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레닌의 집착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로 파악했다.

     

    판네쿡은 1921년 5월부터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판네쿡은 처음 러시아 코뮤니즘이 구체적인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련은 소규모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조건은 (크론슈타트 반란처럼) 노동자-농민 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약하고 위축된 노동계급, 원자화된 농민 모두 그 스스로 권력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투쟁의 결과는 그들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관료주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만이 러시아 혁명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921년 7월 판네쿡은 두 달 전에 진단한 바가 현실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관료주의적 엘리트 지배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생산체제에 대한 자본가 지배에서 당 독재로 그 정부가 변화하였을 뿐 자본가는 노동자 통제에 의해 단지 제약되고 있을 뿐인 상태라는 것이다. 판네쿡은 이 같은 변화가 부분적으로는 러시아에 침투한 서유럽 자본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전 과정은 서유럽과의 화해를 향한 소비에트 대외 정책의 변모와 그 정책의 코민테른 전술로의 확장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유럽에서의 혁명적 공세는 소비에트 경제의 재구축을 위협할 수 있는 파괴, 경제적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코민테른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과거 운동의 통제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의 주요 임무가 그들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대신 자본주의 경제를 재형성하는 것을 도와 소련을 방어하는 것에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적대감은 코민테른으로부터 KAPD가 축출된 이후 보다 많이 나타났다. 1921년 11월 판네쿡은 소비에트 체제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예속 조건에 처하게 하는 억압적이고 반혁명적인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극적인 결론에 다다른다. 판네쿡은 러시아 코뮤니스트 독트린이 단지 관료주의의 점증하는 부르주아 기능을 감추기 위해 채택한 정당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상황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재복원의 첫 단계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제3 인터내셔널은 제2 인터내셔널의 기본 정책과 전술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코뮤니스트 슬로건은 객관적인 수렴을 위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코뮤니스트 양자 모두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사회에 통합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여 판네쿡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최근 배운 것을 잊어버려할 필요성이 지금처럼 컸던 적은 없었다.”

     

    한편, 러시아를 방문한 오토 룰레는 소련 사회가“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소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이후 “노동자평의회 외에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기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평의회주의자로 흘렀다.

     

    오토 룰레는 당과 독일노동자총연합의 단일조직을 주장하면서 독일노동자총연합-단일조직 (AAUD-E)를 창설한다. 오토 륄레는 일반노조로 재조직된 혁명적인 공장조직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며, 혁명적 평의회와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를 주장1)하였다.

    1920년 이후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이후 마침내 볼셰비키와 관계를 끊었다. 유럽 내에서, 1923년 이후 계급 갈등의 상대적 안정화는 코뮤니스트좌파 경향 추종자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고립되면서, 남은 독일 코뮤니스트좌파들은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천천히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정립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 역할 테제 (축약)

     

    KAPD(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 당 역할 테제는 1921년 7월에 작성됐으며, KAPD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안에서도 토론되었다.

     

    1.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지구적 부(富)처분을 노동 대중의 손에 넣게 하는 것이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따라서 독립된 착취, 지배계급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정치 권력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사회 경제의 자유로움을 포함하며,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제기하는 과제다.

     

    2.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종식하고, 이 생산을 인수해서 노동계급의 수중에 넣고, (부르주아) 정치 제도들을 분쇄하고, 계급 분할을 모두 없애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개별적 순간들을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이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역사적 과정에서 정치 폭력의 역할이 취하는 행동은 여전히 어떤 순간에서는 결정적이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동시에 정치 경제적 과정이다. 정치 경제적 과정도 아닌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풀 수도 있으나, 세계 코뮨 건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파괴할 때까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한 지역은, 가능한 반(反)혁명의 정치 폭력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여전히 정치폭력을 필요로 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한 부분을 위해서 정치 폭력의 필요성을 만드는 이러한 근거들은, 혁명의 내부 발달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 정치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확실히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경제적 과정에서 바라보는 혁명은 앞서 언급한 결정적 순간이 없고, 프롤레타리아트 일부분이 경제 방향을 떠맡고, 이윤 동기를 없애고, 필요의 경제로 대체하는 오랜 작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데, 이 기간에 부르주아지는 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을 방어할 목적으로 권력을 다시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발전된 민주적 이데올로기 국가들은 - 다시 말해, 발전된 산업 국가들- 민주적 슬로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잘못 이끌기 위한 방안을 찾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확고한 정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본질적인데, 이 기간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5. 혁명의 정치적 승리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 권력을 유지할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6. 정치적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권력과 행정부의 모든 형태를 수용하는 역사적 결정이다. 항상 노동자 평의회는 계급투쟁의 개별적 요소를 통과하면서 완벽한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7. 가장 의식적이고 준비된 프롤레타리아 투사로 함께 분류되는 역사적으로 확고한 조직 형태는 당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과제는 코뮤니즘이기 때문에, 이 당은 자신의 강령과 이데올로기로서만 코뮤니스트 당이 가능하다. 코뮤니스트 당은 강령적 기초를 철저하게 해결해야 하며, 통일된 의지로서, 전체적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혁명의 머리와 무기가 되어야 한다.

     

    8. 코뮤니스트 당의 주요 과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혼란과 변동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당은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 모든 상황들에서 대중에게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 권력 장악 이전 정치투쟁의 모든 이슈들에서, 개량과 혁명 사이에 차이들을 명확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적 개량주의 - 어떤 가면을 쓰고 선택하든지 - 는 오늘날 혁명에 큰 장애물이며, 지배계급의 마지막 희망이다.

     

    9. 따라서 코뮤니스트 당은 자신의 강령에서, 언론에서, 전술과 활동에서, 동일한 결정으로 개량주의와 기회주의 모든 현상에 가차 없이 반대해야 한다.

     

    10.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적 순간에서도 혁명은 변증법적 과정이다. 혁명 과정에서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동요를 겪는다. 가장 의식 있는 요소들로 구성된 조직인 코뮤니스트 당은 이러한 동요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한다. 자신들의 슬로건을 명확하고 원칙적인 본질을 통해서, 말과 행동의 통일, 투쟁의 책임자라는 위치에서, 예측의 올바름을 통해서, 코뮤니스트 당은 프롤레타리아가 각각의 동요를 빠르고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의 전체 활동을 통해서, 심지어 대중의 반대하는 순간적인 비용을 치르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을 발달시켜야 한다. 혁명적 투쟁 과정에서, 오직 이러한 의지를 가진 당이 대중의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광범위한 사람들의 혁명적 교육을 달성할 수 있다.

     

    11. 코뮤니스트 당은 대중과 접촉을 잃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칠 줄 모르는 선전의 명백한 의무는 제쳐놓더라도, 경제적 필요로 야기되는 노동자 운동의 개입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당은, 당이라는 이름하에 개량주의적 요구가 떠오르는 기회주의 정신을 강화해서는 안 된다.

     

    15. 혁명의 정치 승리 이후 당의 역할은 국제 상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발달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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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의 강령2) (*공장조직과 정치조직 부분)

     

    공장조직은 KAPD와 긴밀히 결합하여 그 임무를 수행한다.

     

    정치조직은 당 강령의 기초위에서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요소와 함께할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과 당의 관계는 공장조직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 조직 내에서 KAPD의 일은 투쟁의 기치를 밀고 나갈 뿐만 아니라 지치지 않는 선전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혁명 간부는 당의 움직이는 무기가 된다. 나아가 당은 항상 더욱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게 하고 밑으로부터의 독재에 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임무의 둘레가 더 커지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지원이 요구된다. 달성해야 하는 것은 승리(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권력 장악)가 계급독재로 끝나고 소수의 당 지도자나 정파의 독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장조직은 이의 보증자이다.

     

    ·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 권력 장악의 단계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가장 견결한 억압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총체를 행사하는 평의회조직을 만듦으로써 성취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공장조직은 공장을 통해 수행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요소가 된다. 이는 더 나아가 평의회 경제체제의 기초단위로 변혁되는 임무가 있다.

     

    · 공장조직은 코뮤니스트 공동체(Gemeinwesen) 건설의 경제적 조건이다. 코뮤니스트 공동체조직의 정치형식은 평의회 체제이다. 공장조직이 개입함으로써 정치 권력은 평의회 지도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 이처럼 KAPD는 최대 혁명 강령의 실천을 위해 투쟁하고 다음에 포함된 구체적 요구를 위해 투쟁한다.

     

    정리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

     

    1) KAPD가 평의회를 선전하는 것은 내용 없고 선동적인 미사여구였다. 왜냐하면 KAPD는 당이었으며, 당은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코뮤니스트당(KPD)의 구호인 “ 정치적 노동자평의회를 선출하라!”는 구호 역시 선동적인 속임수이다.

    이 구호의 이면에는 난파한 당에서 사라지는 관료의 권력을 허구적인 평의회의 구명보트라는 안전지대로 옮겨, 관료제의 축복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한 시도 외에는 다른 것이 숨어 있지 않다.

    평의회는 공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당의 성격을 완전히 극복한 그리고 당에 대한 종속을 벗어던지고, 가능한 평의회 체제를 만들어나가면서 구체화하는 조직에 의해서만 준비될 수 있다.

    오늘 날에 이러한 조직은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공장조직, 노동자 총연맹이 그것이다. <평 의 회 - 오토룰레> 중에서

    2) 1920년 5월에 채택한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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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상수 동지 인터뷰

삼성공화국-최고 권력과 싸우는 투사들 :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상수 동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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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재용과 박근혜 재판 판결은 한국 사회가 "삼성 공화국"임을 증명했습니다. 삼성 권력이 사법 판결도 좌우하는데, 이렇게 거대한 권력에 맞서 직접 싸워오신 주체로써 느끼는 현실은 어떠신지요?

A. 법리적으로는 이재용을 집행유예로 풀어주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법률가들의 전망이 있기도 했지만, 전임 양승태 대법관이 퇴임 직전 급조한 항소심 재판부에 배당된 점, 항소심 재판부와 이재용 변호인과의 특수관계, 이재용을 옹호하는 언론의 총공세 등 선고가 다가올수록 불안한 상황이긴 했습니다. 무엇보다 촛불 항쟁의 열기가 거리에서는 사라진 상황이었고, 시민사회가 대응하는 힘도 조금 줄었었고요.

삼성은 정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많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작업환경측정결과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국민권익위원회, 산자부 등 국가기관과 언론을 총동원해서 보고서 공개를 막고 있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 싸움은 작은 성과들을 쌓아오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대 덕분입니다.

 

고황유미님의 아버지 황상기님이 싸움을 시작한 지 11년이 넘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고군부투하시던 당시 얘기를 지금도 아버님이 종종 얘기하시곤 하는데요. 그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러저러하게 인연이 닿아 도움을 주신 분들, 연대를 아끼지 않는 분들 덕분에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삼성의 거대한 권력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싸움을 시작할 때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힘과 끈기로 삼성과 잘 싸워왔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은 강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결국 변화는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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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폭로된 노조파괴 문건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다시 구속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는데, 막대한 권력을 가진 삼성이 노조파괴까지 하면서 반노동자적, 반인권적 경영을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삼성이 지금까지 성공해 온 이유, 발 딛고 서 있는 토대 자체가 불의와 불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 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과급 등으로 많이 부풀려져 있지만, 사실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전자업계는 임금수준과 복지, 과도한 노동 등의 노동조건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고, 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산업과는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사실, 엄청난 속도로 일본과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자리 잡는 과정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강도의 착취와 노동자 통제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소리소문없이 대규모 해고를 일상적으로 자행하기 때문에 삼성에 40대 중반 이후의 노동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불법파견으로 고용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노조가 없어서 이런 사실들은 다른 기업들에 비해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삼성전자가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전자산업계 전반에 무노조경영이 일반적이기도 합니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불법 비자금을 폭로했을 때 드러난 바 있듯이, 삼성이 총수 일가를 위해 저지르는 불법은 일상적이고 규모도 엄청납니다. 이런 불법적이고 불의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동조합 같은 내부감시자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삼성에게는 매우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삼성이 가진 거대한 권력 자체가 노동조합 같은 건강한 비판자, 감시자와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Q. 뇌물공여, 노조파괴, 산업재해 등 헤아릴 수 없는 삼성의 범죄행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절대권력을 가진 재벌의 잘못된 사회 지배, 노동자 통제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현재와 반대로 사회가 기업을 지배하고, 노동자가 일터를 통제해서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삼성이 가진 거대한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충기 문자가 얼핏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행정, 입법, 사법 권력뿐만 아니라, 언론과 학계까지 삼성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Q. 박근혜를 연인원 1,700만 명이 넘는 촛불 투쟁이 계기가 되어 끌어내렸듯이, 삼성도 전 사회적인 투쟁이 있어야 작은 승리라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싸워오셨습니다만, 앞으로도 긴 싸움이 계속될 것 같은데, 오랜 기간 싸우시면서 바뀐 상황(삼성, 정부, 주체)은 있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삼성의 사회적 책임보다는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싸움의 과정에서 삼성의 본질은 얼마나 폭로되었나요?

 

A. 지난 촛불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촛불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부분에서 방향을 바꾸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삼성직업병 문제에 한정하면, ‘사과, 보상, 예방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삼성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상식처럼 자리 잡았었는데, 촛불 이후에 ‘직업병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라는 진실이 우리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삼성을 포장해주는 기사들이 포털사이트를 도배하지만, 대부분의 댓글은 예전과 달리 불법세습, 삼성직업병, 노조탄압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성직업병 싸움 10년을 거치며 삼성 공장의 위험을 알리는 다양한 결과들이 쌓이고, 직업병 인정 사례도 늘어나고, 일부 기업의 전향적인 변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지난 촛불을 계기로 급격히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직업병 인정판결이 훨씬 더 많아져 이제 대법 판결까지 나왔고, 반도체 전자회사의 보상과 예방대책도 조금씩 진전되고 있습니다.

 

 

Q. 한국사회에서 삼성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삼성노동자의 문제는 전체 노동자의 문제이고, 삼성 작업장의 직업병 문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조합원을 비롯한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삼성 투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A. 최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도급을 중단하고 정규직화한다는 삼성과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삼성이 두 손 놓고 이제 마음껏 노조 활동하라고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만, 삼성의 ‘무노조경영’을 정말로 무너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상기 아버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삼성에 노조가 있었다면 삼성에서 이렇게 계속 노동자들이 병들고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많은 노동안전 활동가들도 얘기합니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안전규제를 만들고 감시해도, 회사 내부에 감시하는 눈이 없다면 한계가 뚜렷하다고요.

 

매년 2500명 가까이 산업재해로 죽는 나라, 병들고 다쳐도 눈치 보느라 산재신청도 못 하는 나라를 바꾸는데 노동조합이 할 일이 많습니다. 삼성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해서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일터를 만드는 데 함께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Q. 마지막으로 그동안 반올림 투쟁에 연대했던 분들께도 한마디 해주십시오.

 

A. 반올림은 사실 피해자 가족과 몇몇 활동가들, 연대단체들로 구성된 작은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라는 잘 보이지 않았던 문제를 드러내고 바꾸는 데에는 함께 연대해준 분들의 힘이 컸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삼성이라는 한국사회 최고권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 반올림 활동가의 인터뷰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2차 조정에 대한 합의 서명에 대한 반올림 입장글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의 첫 매듭이 만들어졌습니다”

 

1. 오늘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2. 2013년 2월 삼성으로부터 교섭제안을 받은 지, 5년 7개월이 지났습니다. 2015년 7월 조정위원회로부터 1차 권고안을 받은 지는, 꼭 3년 하루가 지났습니다. 2015년 10월 삼성전자의 거부로 그 권고안에 대해 논의 한번 해보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대화 재개를 기다린 지는, 1,022일째입니다. 

 

3. 이처럼 지난한 시간을 거쳤음에도 당사자들의 직접 대화가 아니라 중재라는 방식으로 마무리하게 된 점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조차 저 길고 힘든 시간들이 없었다면 결코 내딛지 못했을 소중한 한 걸음입니다.

 

4. 짧지 않은 시간,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주고 계시는 조정위원회에 감사합니다. 사실 아직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채 중재안에 사전 합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희는 조정위원회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겠다 하신 약속을 믿기로 했습니다. 이번 2차 조정 제안서에 담긴 말처럼 ‘우리 사회 공동체가 지향해 나가야 할 미래가치의 하나로 구현될 수 있도록’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을 잠재적 피해자와 향후 미래에 나타날 잠재적 피해자에게도 적절한 구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리적 방안’을 고민하겠다는 그 약속, 꼭 지켜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5. 중재합의는 삼성전자에게도 힘든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 어렵게 도달한 약속인만큼, 기업의 규모와 위상에 걸맞게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가라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와 바람이 삼성에게 가 닿았기를 희망합니다.

 

6. 변변한 바닥도 지붕도 없이 시작한 노숙농성장에 찾아와, 두 번의 겨울과 세 번의 여름이 지나는 동안 함께 혹한과 폭염, 비바람을 맞아 준 지킴이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별 다섯 개 호텔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7. 고통, 절망, 분노의 시간들을 홀로 견디면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은 피해 노동자와 가족 여러분, 당신들의 인내에 경의를 표합니다.

 

8. 오늘 서명한 합의에 따라 이제 저희는 내일 저녁 문화제를 끝으로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농성장을 닫으려 합니다. 2015년 10월 7일, 간절했던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시작한 농성이었습니다. 첫째는 삼성 직업병 문제가 끝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려야 했고, 둘째는 삼성에 의해 중단된 협상이 다시 열리도록 해야 했습니다. 길 위에서 천일을 버틴 끝에 결국 모두 이루어냈습니다. 응원하고 연대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일궈낸 소중한 승리입니다.

 

9. 이제 우리는 천일 넘는 노숙농성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합의를 통해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매듭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매듭이 단단하게 자리잡을 수 있도록, 중재안이 완성되고 실행될 때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지켜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18년 7월 24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http://cafe.daum.net/samsunglabor/MHzN/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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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성 공장에서 또 사람이 죽었습니다. 새로운 게 하나도 없는 너무나 ‘낯익은 비극’입니다” (반올림 활동가 이상수 씨)

9월 4일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이산화탄소 누출로 노동자 1명이 숨지고 2명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삼성전자 공장의 유해 화학물질 누출로 인한 노동자 사망사고는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

 

반올림, 청년전태일, 화성환경운동연합, 다산인권센터 등 시민단체들이 6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 앞에 모였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반복되는 화학물질 누출 사고로 하청업체 노동자가 사망함에도 이를 방치하며 ‘위험을 외주화’하는 삼성을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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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7호]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이 사회운동에 던지는 의미

     

     2월 1일, 알바노조 선거 중이었다. 위원장 후보로 출마한 이가현 조합원이 SNS에 올린 폭로가 삽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알바노조, 청년좌파, 평화캠프, 노동당 등 여러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소속된 ‘'언더'’라는 비공개 조직(이하 ‘'언더'’)이 존재하고, 이 조직의 비선을 통해 여러 단체 결정에 개입했다는 폭로였다. 비선이란 말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이들이 이른바 이석기가 통솔했다는 통진당의 RO나 최순실-박근혜로 비화된 비선 게이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으로 공개된 글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곧바로 기사화되었다. 연이어 수십 건의 폭로 글이 뒤를 이었다. '언더'의 존재를 바라보는 동료 시민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 동시에 진보라 하는 사회운동, 진보정당, 노동조합 어디 한군데 믿을 곳이 없고 상식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없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사회운동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더' 문제는 불신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불신의 결과로 심증을 확증으로 굳히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해당 조직 내부로 들어갔을 때 해결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알바노조와 노동당에서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어떤 경로를 거쳐 언제, 어떻게 해결될지 미지수다. 조직을 방어하려는 내부의 논리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법적/제도적 해결 과정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데 사회운동 단체의 문제해결 방식은 사법 기구와 달라 단순하게 유무죄를 결정하거나 징계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무수히 많은 조직 사건인 데다 형태를 파악하기 힘든 '언더'라는 조직 자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도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난해한 제도적 해법과 무관하게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더 밀도 높은 분석과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제도적 해법으로 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정치, 문화, 운동의 관점에서 성찰하고 바꿔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더'와 관련된 내부고발자들의 폭로는 충격적이었다. 단지 비공개로 조직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 수 있는 강력한 혁명가를 기른다는 명목으로 말도 되지 않는 요구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미행을 따돌리는 연습을 하며 비공개로 운영되는 안가에 모이면 첫 모임에서 혼전순결, 낙태금지를 포함한 문서를 읽힌다. 수시로 관련 단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임무를 부여하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비판을 받는다. 연애와 성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상생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하며 일상적으로 다른 멤버들과 비교, 평가한다.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도덕관, 가부장적인 조직구조, 전체주의와 비슷한 상향 피라미드식 조직구조 속에서 토론이나 이의제기는 혁명가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이 외에도 내부고발자들 글에 드러난 수많은 문제 제기는 읽는 이의 숨통을 조여 올 정도로 힘겨운 내용이 많다.

     

     어떤 이들은 그냥 단지 비공개 모임이었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 모임은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느냐고. 그냥 공부 모임일 수도 있다고. 한심한 이야기다. '언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피상적인 정보를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미 수없이 많은 내부고발이 나온 상황에서 '언더'가 어떤 작동원리를 갖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언더'는 도대체 왜 문제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이 지양해야 할 지점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지향해야 할 지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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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미더노동당>(https://www.facebook.com/showmethelaborparty/)이란 공개 프로그램을 통해 '언더' 조직의 문제점을 차별, 반민주주의, 재정, 노동 네 가지로 요약했다.

     '언더' 조직 내에서는 일상적인 차별이 횡행했다. 조직 자체가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었다. 일상적인 성차별과 언어 성폭력이 벌어졌고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았다. 이 외에도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어떤 내부고발 글에는 '언더' 조직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회원으로 받을지 말지 심각하게 토론했다는 내용도 있다. 한마디로 혁명을 지향하는 조직에서 이들의 존재는 대단히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여성은 지나치게 감성적인 존재라 혁명가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인식도 보인다. 이런 심각한 반여성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사고방식은 혁명을 위해 최고의 효율과 조건 없는 충성이 필요하다는 사고방식을 통해 정당화된다.

     이런 차별적인 조직에 몸담는 활동가들은 일상적인 자기분열에 시달린다. '언더'에서는 여성주의를 부정할 것을 요청받으며 동시에 공개된 공간에서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니 사람이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 모순된 상황을 견뎌 나간단 말인가. 낙태금지를 요구받으며 동시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에 동참한다. 이런 모순적 상황은 너무 자주 발생하고 이의제기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활동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숨 막히는 상황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게 된다. 내부고발자 글을 보면 정신과 치료를 포함해 일상적인 정신질환으로 파생되는 고통에 시달렸다는 내용이 거의 모든 글에 등장한다.

     

     이런 위기는 이견을 수용하지 않는 비민주적 구조 속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언더' 내부의 비민주적 구조는 구성원들이 활동하는 여러 사회단체로 이식된다. 오로지 지침을 관철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공개활동 영역에서도 좀처럼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이견은 방해요소로 파악한다. 건강한 조직은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고 민주주의는 형식적 다수결로 유명무실해진다.

    끝으로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언급해야만 한다. 아직 내부폭로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글을 통해 '언더'의 작동원리, 그 가운데 노동과 재정 문제를 어떻게 다뤘는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과 재정의 관점에서 이 문제가 사회운동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대부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내부고발에 따르면 '언더' 구성원들은 일상적으로 과도한 초과노동에 시달렸다. 단체활동은 직장 이전에 활동공간으로 규정되어 끊임없이 성과를 비교·평가당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고통의 늪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내부고발 글에서조차 이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계약서조차 쓰지 않는다. 돈은 현금으로 받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을 받기도 한다. 때에 따라 비'언더' 구성원과 차별된 액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소위 돈 많고 마음씨 좋은 후원자라고 알려진 '언더'의 지도부는 상근자 채용과정에도 일일이 개입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분열이 시작된다. 내부고발자 다수가 알바노조 조합원이었음을 상기해보자.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면서 말도 안 되는 노동윤리 속에서 살며 자신을 갉아먹는 존재들. 이 '언더'가 아주 악질인 것은 자본주의와 맞선다면서 자본의 통제 기술을 골고루 다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한때 '언더'에 있었다. 2003년 사회당을 탈당하기 전까지 그 조직과 함께하던 구성원이었다. 물경 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당사자들의 폭로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너무 아프고 서글프고 화가 난다. 사회를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선의를 가진, 열정적인 활동가들을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는 조직이 혁명을 운운하니 수십 년을 살아남아 사회운동을 망치고 있다니. 노동당 당원으로서 나는 '언더'를 넘어 진보정당을 혁신해야 하는 과제를 내 문제로 온전히 받아안기로 한다. '언더'는 단지 '언더'만의 문제가 아니라 단절해야 할 과거로 상징되는 운동 내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래로 한 발 더 나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하고픈 말이다. 우리가 극복하고픈 세상에 대해. 우리 삶 자체가 우리가 만들고픈 미래 사회 그 자체를 닮아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각자는 모두 중요한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닌가. 누구도 함부로 소모품처럼 쓰이거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는 이런 조직은 세상을 바꾸는데도 효율적이지 않다.

     

     끝으로 내부고발자들에게 애정 어린 연대의 마음을 담아 건네는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피해자 프레임 넘어서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 상식에 관한 문제다. 이를테면 MBC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국민을 향해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도 MBC 일부였기에 미안하고, 그래서 공영방송을 제대로 바꾸는 것으로 사죄하겠다고 했다. 제대로 바꾸기 위해 자신들을 꾸짖더라도 외면하지 말아달라 했다. 그렇게 해야 우리 모두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치유도 될 수 있다. 

     

     나는 노동당에서 싸울 것이다. 함께 노동당 안에 있을 때는 내부고발자들과 의견 차이로 대립할 때도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 탈당했다. 밖에서 함께 싸우자. 그런 한에서 우리는 그래도 동시대에 조금이라도 사회운동, 진보정당 운동의 한 걸음을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노동당 내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과 발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당사자들이 꼭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노동당 마포당협 사무국장 ┃ 나동혁

     

     

    <편집자 주>

    이 글은 노동당 비선/언더 사건에 대해 내부에서 투쟁을 벌이고 있는 동지의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과 다를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운동 사회에서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중요한 내부투쟁이기에 코뮤니스트에 실었으며, 이와 연관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의 입장은 코뮤니스트 7호에 실린 「다시 혁명조직을 말하다」, 「노동계급과 혁명조직」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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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노동당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756873

     

    [진조위] 알바노조 내 ‘언더조직’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2차

    http://alba.or.kr/xe/news/27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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