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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1

    - 토론을 위한 테제 -

     

     

    들어가며

     

    “딱히 심상정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정의당이요? 딱히 지지하지 않아요. 뭐랄까, 투표라는 행위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선택하는 거잖아요. 일상적인 지지와는 다르죠. 그럼에도 심상정을 찍은 이유는, 촛불 정국 이후 마치 문재인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 경계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번 대선은 대중적 성취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달랐잖아요. 만약 문재인의 당선으로만 수렴이 되면 과거 대선과는 큰 차이가 없어지는 거죠. 누가 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정치세력이 지지 받는지도 중요하다고 봤어요. 진보정당이자 소수정당인 정의당이 존재를 좀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30대. 남) [워커스 31호])

     

    그렇다. 부르주아 선거는 정당(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지지와 참여가 아니라 제한적인 선택을 강요한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와 지배체제를 유지해주는 근간이다. 선거 메커니즘은 부르주아 정치와 적대적이어야 할 노동자 투쟁마저 포섭한 지 오래다.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이 부르주아 선거 지형을 바꾸어 독자적 노동자 정치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투쟁’은 선거 결과로 수렴되어야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이 투쟁을 교란하고 후퇴시키고 있다.

     

    위의 면담자(interviewee)는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판단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세력의 성격을 계급적으로 판단한다. 정의당을 계급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아닌 자본의 진영에 포함된 부르주아 정치 세력으로,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유주의가 혼합한 개량주의 세력으로 규정한다. 대선이 끝나고 선거 결과를 분석하고 노동자계급의 의식 흐름을 판단해야 하는 시점이다. 굳이 정의당을 먼저 언급한 것은 선거 거부-기권을 택한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의 의식적 노동자와 이른바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이번 대선에서 차악인 정의당 후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심상정이 얻은 200만 표 중에 민주노총 조합원의 표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도 10%대의 득표를 한 것은 정의당과 민주노총 모두 서로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정의당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선택과는 별개로 자신의 계급적 성격에 맞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촛불 투쟁에 임했다.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다른 부르주아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득표게임에 뛰어들었다. 정권교체와 권력분점 사이에서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한편의 부르주아 정치 쇼를 흥행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양적으로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적인 행동과 자기 권력을 위한 투쟁이 없었기에 이른바 촛불 혁명과 정권교체의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촛불 투쟁에서‘시민’이 되어 계급을 잊었고, 대선에서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의‘국민’이 되어 계급을 상실했다. 민주노총은 우여곡절 끝에 대선 방침으로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조합원들의 진보정치? 에 대한 지지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를 실현하거나 대변할 노동자 정치가 부재하자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정권교체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과 그 성과물인 조기 대선에서 노동자들에게‘계급’과 ‘권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계급성을 드러내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그들에게는 국회를 포함한 부르주아 정치 공간뿐 아니라 촛불 광장(태극기 광장), 언론(여론), SNS, 모든 사적-공적 조직들(풀뿌리 조직 포함) 모든 곳이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은커녕 계급마저 잊은 채 수동적으로 촛불 집회에 수차례 또는 수십 차례 나가는 동안,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손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계급적’으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촛불 투쟁과 대선의 결과인 정권교체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선거와 권력투쟁에서 ‘계급적’이라는 것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그것을 반영한 정치가 적대적으로 분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그 반대이다. 계급 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적대적인 정치를 감추고 정당(정치세력) 간의 경쟁으로 돌리는 것이 ‘계급적’정치인 것이다. 그들은 소수의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벌개혁이나 노동 기본권 보장 등은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 부합하지만, 자본가 계급에도 적대적인 정책은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없었던 홍준표와 한국당 세력은 반노동조합, 반공, 친자본 이미지를 부각시켰지만, 그것은 내부 결속을 위한 목적이었다. 실제 노동자들의 ‘계급적’ 행동을 억제시킨 것은 정권교체 세력이었다. 결국, 촛불 투쟁과 대선에서 ‘계급적’이지 못했던 민주노총과 노동자 정치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주었다. 선거 이후에도 노동자 운동의 전망은 일부 낙관론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매우 어둡다고 본다.

     

    이른바 자본주의 체제 정상화? 인 ‘적폐청산’을 내걸고 ‘노동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이전 정권과 같이 ‘노동(운동) 적대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기대 속에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다. 적폐청산에는 재벌개혁이 중요시되고 있지만, 노동에 대한 (자본주의적) 개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보진영이 금기처럼 여겨 온 노동시장의 문제, 임금개혁의 문제 해결에 나서야한다."

    문재인 정부 대통령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2년 전 한 좌담회에서 강조했던 말이다. 옆에 있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문제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셔야 한다."고 거들었다.1) (2017. 5. 26일자 기사, [내일신문]

     

    촛불 투쟁과 대선 기간 나타난 정권교체 환상은 단순히 반박근혜 정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적폐청산이라는 촛불 광장의 요구가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는 재벌개혁, 노동존중 등 추상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인 비정규직 문제, 일자리 문제까지 파고들어 정권교체 열망으로 수렴된 것이다. 이렇듯 다양하고 구체적인 정권교체 환상이 걷히지 않는 한 당분간 노동자 운동은 선거기간에 포섭된 것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정부의 품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것을 제어할 ‘계급’과 ‘권력투쟁’이 없었기에 전면적인 내부 투쟁을 벌이지 않는다면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혁명의 기억마저 거의 잊혀 진 이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선언적인 정권과의 대립각 주장이나 이미 정권에 포섭된 노동자 운동 배신세력에게 남 탓하듯 비난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낡은 운동은 이미 민낯을 드러내다 못해 태생적 본질마저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소수의 발본적, 혁명 운동 세력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계급 운동의 위기에 직면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 더 혹독하고 길었던 반혁명의 암흑기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파시즘 아래에서도 소규모의 혁명가들은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으로 후퇴하지 않고 “미래는 코뮤니스트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실천을 벌여나갔다. 그들에게는 혁명(전통)에 대한 ‘기억’과 투쟁과 실천에서의 ‘인내’와 자기조직화에 대한 ‘전망’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오늘날 ‘혁명의 가능성’과 무너진 ‘계급성의 복원’과 그것을 위해 우리가 ‘꾸준히 해나가야 할 실천’에 대한 토론을 위한 제안이다.

     

     

    1. 촛불 투쟁에서 대선까지의 노동자계급

     

    촛불 투쟁은 수많은 기록과 역사를 남기며 문재인 정권의 탄생과 함께 막을 내렸다. 촛불 투쟁이 이렇게 사상 초유의 규모로 분출한 계기는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민낯이 밝혀지면서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1,000만 비정규직,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 급증하는 실업, 몰락하는 자영업, 생존권 위기에 몰린 빈민과 노인, 철저한 계급사회임을 증명하는 구조화된 빈부 격차,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분노가 촛불 투쟁의 배경이었다.

     

    연인원 1,700만 명의 촛불 집회 참가가 다수는 조직적 참가자가 아닌 개별 단위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이다. 촛불 집회는 ‘퇴진행동’이 주최하고 조직노동자(민주노총)가 일부 역할을 했지만, 수십만 명을 넘는 인원이 지속해서 참가한 것은 단체의 조직력보다 자발적인 참가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촛불 투쟁의 확산은 자본주의 위기 아래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사회와 일상에서의 기득권세력, 지배계급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표출할 ‘광장’이 필요했고, ‘촛불 집회’가 일부 실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직노동자들은 예상치 않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 자극받고 고무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투쟁에서 그래왔듯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 물결에 자신들이 가진 노동자 고유의 무기로 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형식적으로 대응했다. 책임과 희생이 따르는 ‘계급적 투쟁’보다는 편하고 이익이 되는 ‘조직적 집회 참가자’의 길을 택했다. 조직노동자들은 대대적인 촛불 투쟁을 만나 박근혜 정권의 공범인 ‘재벌(대자본)에 맞선 직접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촛불이 100배로 커지는 동안 자신들의 동료인 ‘투쟁사업장 현안 해결을 위한 연대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은 박근혜 정권의 반대편에서 정치 권력을 나누며 정파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던 국회를 압박해 탄핵소추를 이끌어냈다. 선출되지 않은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촛불 투쟁이 만든 박근혜 파면 정세는 선거법에 따라 대선으로 이어졌다. 촛불 투쟁의 성과도 정권교체 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민심은 촛불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과 열망의 온전한 표현이 아니라 촛불 투쟁의 한계가 만들어 낸 불가피한 결과였다.

     

    박근혜 파면 이후 “탄핵은 끝이 아니라 촛불 혁명의 시작이어야 하고, 대통령 교체를 넘어 세상을 바꾸는 촛불로 타올라야 한다.”며 투쟁을 지속하자고 했던 민주노총은 대선 시기 “세상을 바꾸는 대선, 노동존중 평등사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후보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민주노총과 산하 조직들은 대선 시기 대통령 후보와 그들의 정당에 ‘정책 협약’이라는 부탁 또는 압력을 통해 약속을 받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들은 사회연대노동포럼과 같이 문재인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을 강하게 비난하면서도 부르주아 대선의 본질과 정권교체의 환상에 대해 정확하게 비판하지 않았다. 선거로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어려워도 ‘선거가 아닌 투쟁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내자’고 호소하지 않았다.

    선거를 넘어 투쟁으로 정세를 돌파하자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것은 가장 어렵고 끈질기게 싸워 온 소수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l 이형로

     

    <계속>

     

    <주>

     

    1) 기사원문 :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238653

     

    * 이 글은 <러시아혁명 100주년 혁명운동 평가와 전망을 위한 1차 토론회> 발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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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2

    •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2

       

       

      3. 한국 혁명운동의 현실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가능성

       

      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혁명적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들이 여전히 극소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평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과제를 남겨주었다. 낡은 운동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운동을 지배하고 있다. 낡은 것뿐 아니라 오히려 운동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면서도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한다. 한국 혁명운동의 내일은 현재의 운동을 넘어서는 일이자, 모든 가능성을 최대한 현실로 바꾸는 일이다.

       

      이에 한국 혁명운동의 현재와 가능성을 살펴보고, 과거의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을 넘어선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8)과 그 실천을 제안한다.

       

      1) 한국 혁명운동의 현재

       

      한국 혁명운동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암담하다.

       

      첫째, 한국 사회에 수세대에 걸쳐 강요되고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오해와 반감은 기성세대 스스로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대중의식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주의와 스탈린주의 모두에 경도되지 않은 새로운 주체가 대중의식을 주도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

       

      둘째, 혁명운동과 적대하는 민족주의(김일성주의)와 사민주의 세력의 장기적인 운동지배는 대중운동 전반을 타락시키는 것을 넘어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단결과 계급의식의 발전을 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이들의 분열적이고 반혁명적인 영향력은 현실에서는 어용세력, 조합주의, 개량주의, 의회주의 흐름 등으로 뒤섞여 대중운동을 갉아먹고 있다. 혁명운동 세력과 전투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과 투쟁하면서도 이들과의 투쟁을 동시에 해나가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이 처해 있다. 게다가 이들의 반동적 영향력으로부터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칭 사회주의 조직 일부는 이들과 단호하게 내부투쟁을 벌여가기는커녕 ‘대세를 추종’하며 이들을 묵인하거나 연대나 공동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야합까지 하고 있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위와 같은 낡은 운동(어용세력, 조합주의, 의회주의 등)이 이제는 기존의 노동자 운동(민주노조 운동)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스템(조직질서)으로 굳어져 버렸다. 이것은 새로운 운동이 내부에서 생겨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새로운 운동과 주체가 외부에서 진입하기도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넷째, 작업장, 고용형태, 업종, 지역, 국가 등 각종 울타리에 갇힌 조직노동자 운동은 배타적 노동자 정서와 자본의 계급 분리 정책의 결합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촉진했다. 이미 굳어진 계급의 분열은 코뮤니스트 운동의 현재와 미래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것은 혁명조직과 각성한 노동자들의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

       

      2) 코뮤니스트 운동의 가능성

       

      한국에서의 혁명운동은 장기간의 경험 단절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새로운 주체가 형성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첫째, 자본주의 쇠퇴기의 파국적 상황과 계급운동의 퇴조가 동시에 나타나는 시기, 새로운 주체에게는 낡은 운동을 넘어선 혁명적 운동과 자본주의를 넘어선 근본적인 대안을 동시에 제시하는 코뮤니스트 운동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둘째, 맑스주의 연속성과 혁명적 전통을 계승한 코뮤니스트 운동의 사상적 명료함과 풍부함만이 현실의 다양한 계급운동과 만나 이를 혁명 강령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여러 운동을 부차화하지 않고 총체적인 운동으로 상승시켜 정치적인 최종목표로 모아나갈 수 있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역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국제적 수준의 혁명운동이라서, 이러한 혁명적 흐름과의 실질적인 연대와 공동행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하며,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다.

       

      넷째, 그동안 코뮤니스트 운동은 권위적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아래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와 수평적 소통을 기반으로 조직운영, 토론문화 등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새로운 주체의 창출과 확산에 가장 적합하다.

       

      다섯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일상과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뿐 아니라 당-평의회, 계급의식에 관한 총체적 인식에 기반을 둔 운동이다. 또한, 고용형태, 업종, 성별, 정치, 세대별로 분리되고 분열된 노동자계급이 자기 권력과 자기해방으로 향하도록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고 투쟁 속에서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4.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에 대하여

       

      그렇다면 위와 같은 현실과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의 기본은 무엇인가?

       

      첫째, 새로운 코뮤니스트 운동은 총체적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치사상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여러 운동과 다양한 대중행동과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더욱 창조적이고 풍부하게 발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운동은 정치뿐만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문화와 심리 등 인류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영역으로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자본주의 가치법칙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있는 총체적 운동이어야 한다.

       

      둘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개별 활동의 연합이 아니라 ‘집단적 활동’, ‘지속성’, ‘실현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혁명 강령과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집단적 존재가 이를 가능케 해주며, 이것은 코뮤니스트 조직의 생존 기반이자 물질적 힘이다.

       

      셋째, 코뮤니스트 운동은 조직에서도 코뮤니즘 원리가 실현되어야 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가 기여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코뮤니스트조직은 과거 왜곡된 전위당 노선이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과 같이 일방적 지도체제와 획일적 성원 규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식의 균질화’에 기반을 두고 성원들의 자발성, 다양성, 창조성을 극대화하는 조직체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조직 운영은 총회에 책임을 지는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내부 소통에서는 이론과 지식, 정보에 대한 정직한 표현과 전달, 그리고 토론에서 상호 존중과 모욕금지, 차별금지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위와 같이 코뮤니스트 운동의 기본을 갖추는 것과 동시에 국제적 수준의 운동을 창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롭게 분출될 계급투쟁에 능동적이고 장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위해 코뮤니스트 운동은 노조와 대중운동의 배후정치가 아니라 대중(운동)과 만나 직접 코뮤니스트 정치를 펼쳐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코뮤니스트 혁명을 염원하고 그 운동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작업장,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을 뛰어넘어 기존의 현장조직과는 질적으로 다른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은 현장에서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블라인드 협상, 이면 합의, 어용 행위 등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직접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둘째, 특정 혁명 그룹의 확장이나 몇몇 써클의 정치적 연합이 혁명당 건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코뮤니스트들은 '혁명 운동의 확산'이라는 대의에 맞게 열린 자세로 '혁명당 건설의 주체(세계혁명당의 국제적 분파)'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먼저 그동안의 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해 평가, 반성하고, 새로운 조건에서의 코뮤니스트(노동자)당 건설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주체형성과 혁명 강령 건설에 다시 나서야 한다. 새롭게 건설될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은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건설에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은 현재로써는 국제적 수준의 연대와 교류를 실현할 수 있는 찜머발트 좌파9)의 정치적 원칙과 실천을 계승하는 흐름이 중심이 되어 혁명 강령 건설10)과 혁명세력의 재조직화, 새로운 주체의 창출을 위한 준비와 노력을 동시에 기울여야 할 때다.

       

      셋째, 국제적인 수준에서 코뮤니스트, 국제주의 세력과의 교류와 연대를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정기적으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코뮤니스트 국제대회와 포럼을 개최해야 한다. 아시아 코뮤니스트11) 공동 정치 입장을 발표하고, 제국주의와 전쟁, 핵 문제, 계급투쟁에 대한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12)하고 국경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공동행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국제연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의 매체를 여러 언어로 발간하고, 아시아 지역 수준에서 국제적인 계급투쟁 개입을 실현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들은 노동자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계급투쟁은 다시 한 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분출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 그리고 깊은 연대의식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공인파업, 점령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국제적인 계급투쟁 경험의 공유는 새로운 노동자 행동의 창출을 촉진할 것이다.

       

      넷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내외부의 적들과 전면전인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이는 것과 동시에, 장기적이고 계급의식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혁명의 주체가 물리적 힘을 갖기 위해서는 새로운 주체의 ‘계급의식’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주체가 노동자 계급 고유의 계급의식인 전투성(직접 행동), 단결의식(투쟁의 확장), 창조성(자기 조직화와 자기 권력 창조)’을 갖게 되는 계기와 과정을 밝히고, 그것을 촉진하는 일을 혁명조직이 수행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분열되었을 뿐 해체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 된 상황에서 새로운 주체를 창출하는 것과 전체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향하는 데 있어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 발전에 기반을 둔 계급 중심성(지도력)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다섯째, 그동안 계급운동을 왜곡하고 새로운 운동과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운동사회 내부 모순과의 단호하고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피억압 계급은 생산과 생존의 현장에서만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억압구조 아래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은 적대적인 계급사회뿐 아니라 운동사회 내부로까지 스며들어 운동을 왜곡하고 주체를 분열시키며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역할을 해왔다. 권위주의/관료주의, 반여성주의, 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인종과 이주민·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이 그것이다. 운동 사회 내부에 이러한 차별과 억압구조를 용인하거나 조직보위 등을 위해 방어하는 모든 세력13)과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 새로운 주체와 운동은 바로 이러한 내부투쟁을 통해 내부모순을 극복하면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미조직, 비정규직, 실업노동자 중심의 평의회적 운동의 창출이고 하나는 조직노동자 운동에서 어용-조합주의 세력과 맞서는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용세력과의 비타협적 투쟁뿐 아니라 그들이 장악한 노동조합 조직 질서 자체를 넘어서려는 급진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본과 협력-상생해가는 조합주의의 한계를 넘어 계급적으로 투쟁하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이러한 두 축이 공동으로 행동하는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일곱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투쟁 시기에는 대중(조합원)총회, 일상 시기에는 노동자 광장(캠프)을 자주 열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직간접으로 경험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하고,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강력한 계급의 무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토론문화와 직접민주주의의 발전이 직접행동을 촉발하고 확산시킬 것이며, 노동자 운동에 깊게 뿌리박힌 부르주아 민주주의 악습과 조합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현재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 진영과 전투적 노동자들 안에서 작게나마 형성되고 있는 흐름이 바로 위와 같은 운동과 실천의 공유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 투쟁에서의 어용/조합주의 반대와 아래로부터의 공동행동, 운동 내부에서의 성폭력 사건 공동해결과 가해세력과의 투쟁, 찜머발트 좌파 수준의 정치적 공동행동과 토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제주의 노선 고수가 그것이다. 이 흐름이 중심이 되어 더 많은 투쟁과 실천의 원칙을 공유하고 조직적으로 집중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나갈 때 한국 운동은 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나오며

       

      쇠퇴하는 자본주의 끝 모를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에 일방적으로 전가된 고통, 끊임없는 제국주의 전쟁위협, 그리고 민주주의 후퇴와 대형 참사라는 재앙 속에서도 아직 전면적인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대중들과 후퇴와 추락을 반복하는 한국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작년 말 자발적으로 타오른 촛불 투쟁은 연인원 1,500만 명을 넘어 대대적으로 분출하면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촛불 투쟁에서 노동자 계급과 혁명운동 세력은 여전히 중심에 서지 못한 채 박근혜의 파면 이후 대선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이보다 더 혹독하고 길었던 반혁명과 암흑의 시대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반혁명 시대에도 코뮤니스트의 가장 명료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가졌던 혁명가들은 소규모지만 고립된 상황을 고통스럽게 인내하면서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 위해 투쟁했고, 그 덕분에 기나긴 암흑기에도 생존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반혁명의 안개가 걷히면서 새로운 혁명세대의 출현 속에서 이러한 입장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그들은 혁명당의 기반이 되었다. 파시즘 아래에서도 그들은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으로 후퇴하지 않고 “미래는 코뮤니스트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코뮤니스트 혁명을 위한 실천을 벌여나갔다.

       

      한국의 코뮤니스트들이 과거를 반성하면서 새롭게 시도해야 할 노력도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코뮤니스트 운동의 기본과 혁명적 원칙을 지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주체와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수준의 운동 창출은 국제 조직의 한국지부 건설이나 이러저러한 해외 운동조류의 복제물 이식이 아니다. 그것은 소규모, 소수파 운동에 머물고 있지만 현재의 고립된 상황과 퇴보하는 정세를 인내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려는 고된 노력의 결과물로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혁명운동은 늦게 시작한 만큼 기초를 튼튼히 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국제적 수준의 운동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조직적 개인적 성숙이 필요하다.

       

      지금의 암울한 상황이 자본주의 타도와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향하는 길에 우회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야만의 자본주의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유일한 목표가 코뮤니스트 혁명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공개적으로, 공세적으로 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나가야 할 때이다. “미래는 야만이 아니라 코뮤니즘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동지들, 우리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맑스로 되돌아왔으며, 그의 깃발 아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강령에서 선언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사회주의를 진실로, 사실로 만들며, 자본주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파괴하는 것 외에 더욱 긴급한 일은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조건 아래서 살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계급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거나,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면 소멸한다는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강령과 정치적인 상황’, 로자룩셈부르크, KPD(LS) 창립대회, 1918)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형로

     
     
    <주>
     
    8) 현재의 세계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 세력은 자신들을 스탈린주의자(공산당)들과 구분하기 위해 국제주의(자)-공산주의자라고 표기한다. 한국에서는 스탈린주의 경향의 조직들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혁명운동을 ‘공산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이라고 표기했다.
     
    9) “1차 대전이 발발한 후,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 세력들이 애국주의의 광풍에 휩쓸려가고 있을 때, 제2인터내셔널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전반적으로 파산하고 붕괴하는 시기에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좌익들 ― 즉,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지지자들과 좌익 공산주의자들,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트로츠키주의자 등 ― 이 시대의 유행에 반해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고자 침머발트에 결집했다. 이 운동은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건설로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혁명적인 좌익은 모두 침머발트 좌파로부터 시작했다.” [붉은글씨] 창간호 발간사 중 -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기반을 이룬 흐름, 분파, 전통 그리고 입장은 바로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인 침머발트 좌파가 발전시키고 방어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침머발트 좌파의 교훈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근본 원칙이 위선적인 선언들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든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들과 봉기들을 주도한 것도 모두 침머발트 좌파와 같은 흐름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핵심을 제공한 것도 이들 동일한 흐름들이었다.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립총회에서 발표한 입장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역사상 가장 진보된 입장이었다.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전적인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이러한 강령적 명확성은 혁명 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 그것은 이미 기회주의 정당들 내부의 좌파들이 정치적 이론적으로 준비했던 것이었다. [붉은글씨] 4호 발간사 중 -
     
    10) 혁명 강령을 국제적 혁명 운동의 수준에서 건설하기 위해 강령에 필수적으로 들어갈 조항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위기와 쇠퇴의 문제 규명,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와 소련과 중국, 북한 등 사회 성격 규명,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이행기에 대한 원칙,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에 대한 입장, 의회주의와 선거에 대한 원칙, 제국주의 문제와 국제주의 원칙, 인민전선, 공동전선에 대한 입장, 혁명가 조직(당)과 계급의식에 대한 원칙, 노동자 자치경영과 복지에 관한 입장, 장애인 소수자 이주노동자에 대한 연대와 계급적 입장, 여성해방, 성해방애 대한 공산주의 원칙,  계급 투쟁(전쟁)과 공산주의 혁명의 경로 등이 그것이다.
     
    11) 아시아에서 침머발트 좌파, 공산주의 좌파 입장을 가진 국제주의 공산주의 세력은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상호 교류도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국제조직의 아시아 지역 지부나 소규모 혁명그룹으로 존재하는데 한국, 일본, 필리핀, 홍콩, 인도와 중동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12) 2006년 10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자(공산주의자) 국제대회가 열렸다. 이때도 2016년 초와 비슷하게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전쟁위협이 고조되던 때였다. 당시 국제대회 기간 중 긴급하게 북핵문제에 대한 국제주의자 선언이 제안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요하고 진지한 토론을 거쳐 선언서가 채택되었고, 이때 참가한 국제주의 조직들은 전원 기꺼이 선언에 서명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자? 일부는 북한체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민족,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국제주의 입장을 갖고 있지 못했었고 이러저한 이유로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 선언>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회합을 갖고 있는 우리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의 손 안에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2. 자본주의 국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전쟁으로 향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전적으로 비난한다. 이때 북한은 자신이 노동자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함을 그리고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쇠퇴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 그들의 적 북한에 대항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위선적인 캠페인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한 캠페인은, 오늘의 이라크에서와 같이 노동자인민이 결국은 그 주요 희생자가 될 선제공격들의 개시 – 그들이 이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를 위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준비에 불가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민간인을 절멸했을때의 그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세력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4. 중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갱스터들의 비호 아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이른바 평화발의 “peace initiative“들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옹호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어떤 ”평화적인 의도들“도 믿을 수 없다.
     
    5. 국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명아래 남한 부르주아계급이, 국제주의적 원칙을 방어하는 노동자계급에 또는 그 활동가들에 대항하여 억압적 조치들을 취하려는 모든 시도들 가차없이 비난한다.
     
    6. 발생하게 될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의, 중국의, 일본의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의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7. 자본주의 아래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의의, 제국주의 전쟁의, 그리고 핵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수호해야할 국가는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006년 10월26일
    국제공산주의흐름/사회주의정치연합/국제주의자전망/SJ(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MS(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LG/JT/JW(울산)/SC(울산)/BM
     
    13) 최근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운동사회 내부에 큰 파장을 일으킨 민주노총과 정치조직이 관련된 여러 성폭력 사건에서의 ‘조직보위’ 흐름은 한국의 정치조직과 운동사회가 얼마나 성폭력사건의 운동적 해결에 무능하고 성평등 실현을 위한 실천에 무관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문제의 운동적 해결과 성평등 실현 없이 노동자 운동과 혁명운동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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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1

  •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1

     

     

    들어가며

     

    “코민테른 내에서 ‘좌파’의 전투는 특히 노동자운동의 가장 끔찍한 시기, 1920년대 말에 시작한 반혁명의 시기 동안 싸웠기 때문에 특별하게 의미가 있다. 이러한 반혁명의 상황 속에서, 노동자 운동의 급속한 쇠퇴 속에서 코민테른의 좌파 혁명가는 잊지 못할 투쟁을 수행했다. 당과 코민테른을 바로 세우는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고 그들도 스탈린주의 철권으로부터 당과 코민테른을 구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는 이것을 실천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론적으로 풍부하게 했다. 제국주의 전쟁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코민테른의 입장은 계급을 배반하여 되돌릴 수 없게 했다. 조직의 반역이 분명하지 않고, 당이 적 진영에 무기와 짐을 건네주지 않는 한 진정한 혁명가의 역할은 프롤레타리아 진영 내에서 싸우고, 필사적으로 당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좌파가 거센 반혁명의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코민테른에서 했던 일이다.“(‘인터내셔널의 퇴행에 직면한 혁명가의 책임’, 국제코뮤니스트흐름, 1997)

     

    전대미문의 길고 깊은 반혁명기에도 코뮤니스트들이 혁명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냈기에 현재의 혁명 운동이 존재할 수 있었다. 현재의 암울한 상황은 반세기 전 혁명가들의 경험을 되살려 새롭게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풍미한 PDR과 NDR 등 스탈린주의 이론에 기초한 민주주의 혁명론을 받아들인 기존 운동과 단절하고 보다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계급 운동을 창출하려 했던 일군의 정치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이다.”1)

     

    ‘사회주의’와 ‘코뮤니스트'에 대한 엄밀한 구분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 용어 앞에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맑스주의 연속성과 혁명 전통을 벗어난 조류가 너무 많아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직 규모나 활동 성과와 관계없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의 주체)의 세계혁명(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국제권력 창출)을 통해 자본주의 착취체제(임금노동, 상품생산, 화폐)를 폐지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현실에서 투쟁하고 조직적으로 실천하는 운동‘을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스트(맑스에게 이 두 개념은 동의어였다)는 당이나 국가 수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이나 강령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 상품생산 및 가치법칙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 즉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의식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혁명운동이다. 그동안 존재했던 한국의 이른바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이하 혁명운동)‘ 조직들이 이론, 조직, 실천적으로 이 규정에 얼마만큼 부합하는지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필자는 한국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한 그간의 평가가 노선별, 시대별 평가에 머물렀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제적 시각으로 토론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한국 혁명운동을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운동 흐름과 비교하면서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한국의 혁명운동은 왜 취약한가?

     

    먼저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운동의 흐름에 비해 한국의 혁명운동은 왜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알아보겠다. 여기에는 과거 운동뿐 아니라 현재 상황도 포함된다.

     

    첫째,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40년 넘는 오랜 기간, 그리고 계급투쟁의 결정적인 시기에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운동, 혁명전통과의 단절이 있었다.

     

    현존하는 국제적인 혁명조직들은 맑스의 코뮤니스트 동맹(the Communist League)에서 시작하여 10월 혁명의 결과로서 창설된 제3인터내셔널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사상과 전통2)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혁명전통은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서 시작하여,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그 후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맞선 투쟁,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가 자본의 좌파로 자리 잡은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정당들과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 등 사회주의 참칭 세력과의 투쟁, 그리고 자본주의 방어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개량주의, 민족주의 세력과 오랜 투쟁을 해 온 혁명적 전통이다.

     

    이러한 혁명전통과 오랜 기간 단절되어 있던 한국 혁명운동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김일성주의)이 대중운동의 다수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기력했고, 내부적으로는 사상 이론적 취약성과 혁명운동의 경험부족으로 잦은 분열과 퇴행을 겪었다. 지금도 이 문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계급투쟁과 정치운동 전반이 퇴보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혁명운동 세력은 노동자운동 안의 조합주의조차 넘어서지 못한 채 노동자 계급 안에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둘째, 대부분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의 선전그룹으로 시작했더라도 서클운동에 머물지 않고 운동의 양적 질적 성장을 통해 장기적인 당(혁명조직)건설 기초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에 이르지 못하고 좌초되거나 완전히 실패했다. 여기에는 정파적 이해관계, 형식과 일정에 집착한 당 건설 경로도 문제였지만, 근본적으로는 혁명조직의 전제조건인 강령 건설(토론-실천-검증-통일)의 연속되는 과정이 없거나 부족했다.

     

    1930년대 이후 기나긴 반혁명의 암흑기에도 살아남은 세계의 혁명운동세력들은 68혁명 이후 분출한 계급투쟁의 물결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남미, 북미, 아시아 일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각개 약진하던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일련의 국제대회를 개최하여 국제그룹을 형성하고, 1977년에는 전 세계의 혁명적 코뮤니스트 그룹에 국제대회를 제안3)하여 이탈리아에서 제1차 대회를 하게 된다. 국제대회 참가 그룹들은 이미 내부강령을 갖고 있거나 여러 가지 쟁점들을 토론한 결과 국제적인 수준의 강령을 정립하게 된다. 국제대회 과정에서 10년 넘는 지난한 강령토론과 사상투쟁의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국제적 수준의 행동통일과 혁명적 코뮤니스트 세력의 국제적 재조직화 가능성, 그리고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건설의 전망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7~20011년 사노련-사노위 강령토론 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주제들 대부분은 사실은 이미 40년 전, 더 올라가 80~90년 전에 국제적으로 깊고 풍부하게 토론되었던 내용4)이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의 강령토론은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민주집중제 원리에 기초한 비합법 전위정당의 건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 인민전선 같은 상층연대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대중투쟁에 입각한 전술, 평의회 권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내세운 공통의 지반이었다.”5)

     

    한국 혁명운동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공통의 지반은 2000년대 초, 중반 비공개 그룹들의 공개 활동과 몇 차례의 연합운동 과정에서 차이와 공통점을 확인했음에도 ‘강령 건설’을 중심에 둔 장기적인 당 건설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조직형식, 전술문제, 써클주의 한계 등으로 좌절되었다. 당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강령 건설의 연속되는 과정’을 상정하고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국내외 여러 혁명세력과 열린 자세로 강령토론을 추진했어야 했다. 이러한 시도조차 없었기에 각 정파의 이론과 노선은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수 없었고, 대중운동으로부터 실천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도 없었다.

     

    지금도 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그룹이나 분파의 역할은 미래의 ‘당 노선’을 올바르게 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고, 그것의 결과로 계급투쟁이 복원될 때 당의 본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더디고 고통스럽더라도 이 과정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셋째, 한국 혁명운동의 가장 취약점은 조직과 운동 모두의 폐쇄성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세계적인 혁명운동 흐름과의 단절, 혁명조직 운동의 경험 부족, 혁명조직과의 교류 부재와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적인 혁명운동의 물결을 만들었던 대대적인 계급투쟁과 그와 결합한 혁명운동의 경험이 없었고, 더욱이 이러한 결핍을 채워줄 국제 혁명조직과의 직간접 교류도 부족했기 때문에, 위대한 계급투쟁의 경험은 대중적으로 전혀 공유되지 않았다. 이렇게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경험과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70~80년대 엘리트 운동가들 중심으로 이러저러한 맑스주의 이론이 비 맑스주의적인 것과 섞여 체계와 순서도 없이 수입6)되었다. 반공을 무기로 한 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 아래, 일부가 독점했던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은 전반적으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고, 특정 인물이나 정파가 조직과 운동을 오랜 기간 장악하는 폐해를 낳았다. 이는 90년대 중후반 이후에도 지속하였고, 현재에도 몇몇 그룹의 조직 운영 폐해 사례로 나타나고 있다.

     

    파시즘 아래서도 살아남아 혁명운동의 전통을 이어나갔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 68 이후 다양한 사상 운동적 조류 속에서도 혁명적 흐름을 재조직화하고 코뮤니스트 운동의 지평을 넓힌 국제주의-코뮤니스트들의 지난한 노력과 경험, 노조를 넘어선 수많은 비공인 파업과 파업위원회, 대중총회를 주도한 노동자 투사들의 노동자 민주주의의 경험, 수많은 국제대회와 포럼, 캠프를 통해 얻게 된 국제주의자 토론문화는 혁명 운동의 소중한 자산들이다. 이러한 운동 경험의 축적이 혁명 운동의 생존 시기와 확장 시기, 그리고 계급투쟁의 결정적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혁명운동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경험과 자산을 혁명 운동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공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조직/노선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척할 때 그 운동은 특정 국가, 지역, 정파에 갇히게 된다. 국제적인 수준의 토론과 검증 없이 국내에 갇힌 운동은 써클주의, 종파주의, 패권주의 등 운동의 여러 폐해와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조직(노선)의 창립자(수입자)나 이식자가 조직과 운동을 사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아래로부터의 자기혁신이나 운동의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왔다.

     

    안타깝지만 한국 혁명운동의 이러한 취약점은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혁명운동의 경험을 공유하고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흐름에 함께 하기 위한 공산주의자 국제대회 참가-개최, 국제주의적 공동행동 등의 노력은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고, 상시적이고 공개적인 강령토론도 중단된 상태이다.

     

     

    2. 1992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간략한 평가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출범 문서를 통해 1992년 이후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92년부터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이거나 공개영역으로 나온 사회주의 서클들은 선거주의와 의회주의로 경도되면서 합법·개량주의로 나아갔다. 특히 1997년은 양날개론으로 표현되는 민주노총의 건설과 그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건설로 혁명적 사회주의의 비공개영역과 적대적으로 분리되었다. 2002년의 대선은 이러한 관계설정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의 힘」과 「사회당」은 선거전술에 집착하여 혁명정당 건설을 통한 혁명주의의 복원으로부터 이탈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서클과 함께 혁명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무산되었다.

     

    2003년 「사회주의 정치연합」은 중도주의와 선을 긋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와 단결을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노력의 하나로 2005년 7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의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자본주의의 표면적 사멸이라는 역사유물론에 근거하여 비 맑스주의의 역사적 오류를 비판·극복해야 한다는 점.

     

    둘째,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와 혁명적 주체의 변증법적 결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계급혁명을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인식했다는 점.

     

    셋째,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자본의 전략으로 모면할 수 없고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야만에의 회귀로 나아가, 결국 인류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

     

    넷째, 1920년대 초반의 세계 혁명의 실패, 스탈린주의의 등장은 반혁명의 역사적 반동으로 나아갔고, 이러한 역사적 퇴행에 도움을 주었던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유지·강화를 보완하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고, 혁명세력의 복원을 가로막았다는 점.

     

    다섯째, 지금까지의 인터내셔널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진정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목표로 한 각각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 건설의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권력기관인 노동자평의회와 변증법적 결합으로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 모임의 제안은 세계혁명을 향한 세계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세계 코뮤니스트 연대를 위한 것이며,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하면서, 우리의 혁명적 운동을 복원해내고 고립·분산되어 각개약진하고 고군분투해왔던 세력들이 새로운 각오로 힘차게 연대 전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취지였다. 2년간에 걸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기반으로 이 모임은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동의한 주체들을 중심으로 2008년 2월 출범하게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당 건설을 공개적으로,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 흐름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사에서 역사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혁명운동의 새로운 주체 창출이 아닌 운동의 몰락 속에서 발생한 단기적 연합운동이었기에 그 한계는 분명했다. 「사노련」은 서클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 인자들이 다시 한 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노위」 결성제안은 더욱 실험적인 시도였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노위」와 분화된 세력이 「노혁추」와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노련」의 잔존그룹은 「노건투」로 각각 실천하게 된 것은 혁명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전술 문제로, 「노혁추」에서 코뮤니스트좌파 세력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활동의 전망에 있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은 노동자독자후보에서 비판적 지지까지 늘 반복되는 선거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두 명의 노동자 후보, 민주노총의 무능, 저조한 득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등 최악의 선거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노동자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7)

     

    현재 더는 혁명조직 건설-확장을 통한(혁명 강령, 정치의식 균질화, 정치적 행동일치를 전제로 한) 당 건설 시도는 중단된 상태이다. 실패하고 타락한 당 건설 운동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주의 세력의 노선 투쟁을 통한 경쟁과 연대·단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동안 혁명세력이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각종 기회주의 세력과 대적 전선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해 온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노선으로 논쟁하고 계급으로부터 검증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선투쟁의 역사가 이미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세계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실현하려는 현 단계 한국의 혁명운동 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사상과 실천의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 원칙, 강령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인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원칙과 투쟁을 계승· 복원하고, 다른 혁명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하며 다시 연대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이형로

     

    <주>

     

    1)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붉은글씨 2호], 이태영|사회주의노동자신문

     

    2) 맑스와 엥겔스의 코뮤니스트연맹(1847-52), 3개의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연합 1864-72,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1889-1914, 및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1919-1928), 1920년대에 타락해가는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리해 나왔던 코뮤니스트좌파 분파들, 치머발트 좌파로부터 코민테른까지의 혁명가들은 로자, 레닌, 호르터, 판네쿡, 트로츠키, 팽크허스트, 보르디가 등이 있다.

     

    3) 국제대회 참가 제안 그룹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 Battaglia communista(제안자), 프랑스 : Révolution Internationale, Pour Une Intervention Communiste, Union Ouvrière, Combat Communiste, 영국 : CWO, W.R, 스페인 : Fomento Obrero Revolucionario, 미국 : Revolutionary Workers Group, 일본 :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연맹, “혁명적맑스주의분파”(Kakunaru-Ha), 스웨덴 : Forbundet Arbetamakt(Workers Power Leage), 포르투갈 : Combate

     

    4) 반혁명기였던 1930년대에 '빌랑(Bilan)' 주변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는데,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등이었다. 

    이때 이미 러시아혁명에 대한 평가와 소련 사회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이행기) 문제, 당과 평의회 관계,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원칙,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통일전선의 허구성, 의회주의 반대 등에 대한 깊고 풍부한 토론을 통해 강령 원칙을 정립했다.

    이후 프랑스 코뮤니스트 좌파(the Gauche Communiste de France)는 1930년대~1950년대까지 빌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들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태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및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수많은 진전을 이뤘는데,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이행기, 노동조합과 당에 대한 강령적 원칙의 진전을 이뤄냈다. 

     

    5)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붉은글씨 2호], 이태영|사회주의노동자신문

     

    6)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그람시 이론을 수입, 소개하면서 그가 이탈리아에 스탈린 정책을 이식시켰고,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혁명분파를 축출하고 당을 타락-변절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지 않았다.

     

    7)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코뮤니스트] 창간호,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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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실비아 팽크허스트 : 혁명가들은 왜 노동당에 반대하는가?

 

실비아 팽크허스트: 혁명가들은 왜 노동당에 반대하는가?
 
 
 1917~23년의 혁명 물결 속에서 공산주의좌파였던, 실비아 팽크허스트와 노동자전함(Workers’ Dreadnought)을 중심으로 한 소그룹이 영국 공산주의자당을 건설하는 투쟁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노동당이 노동자 혁명에 미치는 위험성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노동당은 1914년 초 약간 주저한 뒤 '사회 애국주의자'의 대열에 합류했고, 제1차 세계대전의 학살에서 영국 제국주의의 지지자가 되었다. 1920년 팽크허스트가 쓴 기사에서 발췌한 이글은 노동당을 여전히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 ‘개혁주의자’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반혁명적 역할을 강력하게 비난한 것은 매우 명백하다.

사회 애국주의 노동당의 계획에 반대하여 노동자전함 그룹은 자본주의 전복과 임금제도의 폐지와 공산주의를 향한 단계로 소비에트를 통해 행사하는 노동 계급 독재의 필요성을 방어했다.
 
 
"영국 노동당 같은 개혁적 사회 애국주의 정당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자본가를 지원하고 있다 : 세계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충격과 점증하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에 의해 자본주의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부르주아 사회 애국주의 정당들은 그들이 자신을 노동당이라고 부르던 사회주의자당이라고 부르든 간에 공산주의 혁명에 맞서 어디에서나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은 공격적인 자본가들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입하려고 하는 개혁이 자본주의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회 애국주의 개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그들은 노동 계급의 이상적 방법과 전술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강력한 결단력으로 노동자 혁명을 막기 위해 싸운다.

영국 노동당은 다른 나라의 사회 애국주의 조직처럼, 사회의 자연적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권력을 잡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 애국주의자들을 전복시킬 세력을 구축해야 하며, 우리는 이 나라에서 그 일을 지연시키거나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노동당에 힘에 보태어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 그들이 권력에 오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복할 공산주의 운동을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노동당은 곧 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혁명적 반대세력은 그들을 공격할 준비를 해야 한다."

- 1920년 2월 21일. '공산주의자당을 향하여', 노동자전함(Workers’ Dreadnought)에서 발췌.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10/13478/sylvia-pankhurst-why-revolutionaries-are-against-labour-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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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팽크허스트 / Sylvia Pankhurst
 
1882-1960
 
처음엔 전투적 여성 참정권운동가였지만, 다른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하는 것을 보고, 영국 좌익공산주의 경향의 ‘노동자전함(Dreadnought)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DP)에 관여했으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참석하여 논쟁한다. 특히 레닌과 논쟁하면서 영국 좌익공산주의, 반의회 노동자평의회운동의 선구가 된다.
 
-주요저서
 
1915: Force Feeding of a Suffragette
1917: An anti-Jewish pogrom in London
1919: The New War
1919: The British Workers and Soviet Russia
1920: The Communist Party: Provisional Resolutions towards a Programme
1921: The forgotten Keir Hardie
1921: On Entry into the Labour Party at the 2nd Congress of the Comintern
1921-3: Communism and its Tactics
1922: Communism versus Reform in Ireland
1923: The Future Society
1923: Soc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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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선거 – 실비아 팽크허스트|

선거 – 실비아 팽크허스트

                            1918년 영국 총선 당일 ‘노동자전함’에 발표한 반(反) 의회 기사
 
                  “아니, 투표하지 않을 거야.” “영국 정부는 당신의 심장에서 피를 뽑고 있어요.”
 
버스 안에서 가난한 여성이 말했다. 이 쓴소리 속에서 그녀는 의회 후보자들과 지지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리고 모든 신문을 채우는 다양한 경향의 현재 논점, 즉 공허한 정치적 헛소리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요약했다. 우리는 이 선거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자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구와 산물인 국회를 폐지하도록 촉구하고, 사회주의 공동체를 창설하고 유지하기 위한 집행 도구가 될 노동자 대표 평의회 설립을 촉구한다. 현재 선출된 의회는 임박한 크고 중요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연합은 반동 자본가 당이며, 자유당은 같은 것을 약하게 구현한 당이다. 노동당은 비록 모든 후보자가 모두 선출된다 해도, 그 숫자로 정부의 권력을 잡을지라도, 그것은 정말 중요한 모든 문제를 결정할 때, 자본주의 정책의 결과로 휩쓸리게 될 우유부단한 개혁주의 정부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없을 것이다. 노동당의 후보자 명단은 과거 자유주의자들, 전직 보수당, 좁은 전망의 맹목적 조합주의자들, 중산층 평화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의 작은 뿌리와 함께 이상한 잡동사니로 구성되어 있다. 정말 중요한 문제에 대해 그런 집단으로부터 결정적인 행동을 보장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
엉터리 개혁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게, 부자는 여전히 부자로 남겨 둘 것이다. (…)
웨브(Webb)와 집행부, 의회 후보자, 그리고 노동당의 저명한 인사 등 대다수는 계급과 참전 사이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철학에 맞서 싸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 볼셰비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리한 철학. 물론 단지 사회주의이다. 웨브는 12월 10일 데일리 뉴스에서 발했다.
 
“볼셰비키의 본질은 의회 기관에 대한 경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의 상실; 임금 노동자 자신의 ‘직접 행동’에 따라; 육체노동자 이외는 모두 제외된 노동자와 병사평의회에 의한 하원의 교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다.” 이것은 지금 유럽을 넘어 서쪽으로 퍼지고 있는 혁명적인 유행병이다. (…)”
 
정치적 세대에 웨브는 사회주의자로 불렸다. 그는 정말 젊은 시절에 사회주의자였을까? 그가 지금까지 사회주의 전망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사회주의 아래서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것이며, 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만 한다. 이행기에 타인을 고용하여 그 수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분명히 노동자에게 투표의 힘을 집중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명예는 노동자의 상징이며, 타인이 생산한 부로 기생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행기에 웨브뿐 아니라 노스클리프와 록펠러가 투표권을 박탈당한다면, 펜은 여전히 그들 영향력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회주의 흐름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힘을 불어넣으며, 유럽을 휩쓸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갈망하는 사회주의 사상의 물결이 이 나라에서 만나 상승하고 있다. 웨브와 노동당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무의식적인 하수인들은 본능적으로 그 체제의 붕괴를 두려워한다. 그들의 영혼에 사회주의 우애의 호소에 답할 정신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 노동자 전함 (Workers ' Dreadnought), 1918
 
 
<원문출처> http://www.freecommunism.org/the-election-sylvia-pankhu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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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영국 좌익공산주의의 선구(先驅) 실비아 팽크허스트

영국 좌익공산주의의 선구(先驅)
실비아 팽크허스트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한국 노동자들에겐 생소한 코뮤니스트 혁명가를 소개하려 한다. 그녀가 활동한 유럽에서조차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여성참정권 운동가, 급진적 페미니스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는 세력들의 의도된 왜곡이다.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페미니스트에서 출발했지만, 좌익공산주의자가 되어 영국에서 100년 전부터 이미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노동자평의회 설립을 촉구했고, 사회애국주의 개혁주의 세력인 노동당에 반대하여 자본주의 전복과 임금제도의 폐지와 공산주의를 향한 단계로 노동 계급 독재를 주장했다.
본지에서는 추후 코뮤니스트 실비아 팽크허스트에 대해 심층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며, 이번 호에는 선거 정세를 맞아 ‘선거’와 ‘노동당’을 반대하는 주장 글 두 개를 싣는다.
 
소개
 
2015년 영국에서는 주목받는 주류영화 서프러제트(여성참정권운동가)가 상영되었고,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새로운 전기가 발표되었다. 1980년대에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삶과 정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저작물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실비아 팽크허스트를 다뤘던 책들은 1914년부터 전쟁 초기까지 설명하지 못하는 큰 틈새를 남기려는 경향이 있었다. 즉, 실비아 팽크허스트에게는 여성참정권 운동과 휴식기가 있었고, 이후 전쟁에 대한 국제주의적 반대 입장을 가진 그녀는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를 열정적으로 지지하고 영국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삶과 정치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전기와 서적의 출판 물결이 있었다. 이때, 자유주의 좌파들은 실비아 팽크허스트를 세계 평화와 사회 정의에 대한 페미니스트, 급진주의자, 반란군, 반파시스트, 반식민주의자 운동가로 자리매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2007년 실비아 팽크허스트 페스티벌 기사에서 "부르주아에게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페미니스트 좌파 또는 자유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라고 썼다.
하지만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에, 급진적 여성참정권 정치를 포기하고 공산주의로 전향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동시에 계급투쟁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 정치를 깨고 공산주의자로 선언했다. 팽크허스트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노동계급 투사들(대부분 여성)의 확고한 결단 덕분에 이 나라에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미약하지만 확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들이 힘을 얻고 배울 수 있는 글을 남겼다. 이것이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진정한 유산이다. 이것이 오늘날 코뮤니스트들이 지키려는 유산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주아의 하수인인 자유주의자들과 좌파에게 말하는 이유이다. “실비아 팽크허스트에게서 손을 떼시오!” (실비아 팽크허스트 - 페미니즘에서 좌익공산주의로 - I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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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인류의 최후 희망이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에게는 2017년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라는 점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새해를 맞이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 또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를 상기할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다수는 이를 무시하거나, 단지 고대의 역사일 뿐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며 그 의미를 깎아내릴 것이다. 모든 것이 그때와는 변했다. 노동계급이 더는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세계화에 의해 학살된 구 산업화 시대의 것으로 ‘노동 계급 혁명’이라는 용어가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투표에 반대하는데 흡수되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폄하되는 상황에서 대체 노동계급 혁명을 이야기하는 핵심이 무엇인가?

     

    또는, 1917년 세계를 뒤흔든 봉기를 떠올린다면, 확고한 교훈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공포의 이야기로 채색되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하라! 당신이 더 나은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진 채 현재의 시스템에 대해 도전할 때 발생할 일이다. 당신은 더욱 나쁜 상황에 처한다. 당신은 테러를 당하고, 어디에나 있는 전체주의적 국가에서 강제노동수용소(Gulags)에 갇힌다. 그것은 1917년 10월 쿠데타로 신생 민주주의 국가 러시아를 살해한 레닌과 그의 광신적 무리인 볼셰비키와 함께 시작했고, 사회의 모든 것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바꿔버린 스탈린과 함께 끝났다. 그 후 모든 것이 무너졌고, 자본주의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근대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20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는 환상에 절대 사로잡혀있지 않다. 오늘날은 노동계급과 그들의 소수 그룹에게 무척이나 힘든 시기이다. 민족주의의 성장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 일조하는 인종주의에 따라, 오른편에는 대중주의의 선전으로 가득 차고 왼편에는 이러한 새로운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떠들썩한 호소로 가득한 증오에 따라, 절망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우리에게 우리의 정치적인 선배들(좌익 공산주의자)의 작업을 떠올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좌익 공산주의자 그룹들은 1917년 러시아에서의 사건으로 발생한 혁명적 운동의 끔찍한 패배에서 살아남았고, 혁명으로 향한 길을 이끌기 위해 형성되었던 바로 그 공산당들의 결과적인 변질과 죽음을 이해하려 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스트 형태의 반혁명의 공개적인 테러와 보다 은밀한 기만으로써의 민주주의의에 모두 저항하면서, 가장 명료한 좌익 공산주의자 흐름은 – 이를테면 1930년대 빌랑(reviews Bilan)과 40년대 국제주의(Internationalizme) 근처에 있었던 이들 – 혁명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모든 중상모략 자들에 반대하여,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본질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 다시 확인했다. 특히,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러시아” 혁명은 세계 혁명의 첫 번째 승리를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희망은 지구상의 나머지 부분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을 확장하는 데 있었다.

    - 부르주아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권력 기관(잘 알려진 것으로는 소비에트 또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을 창조하는 노동 계급의 역량을 확인했다.

    - 국제주의와 노동계급 자율의 원칙들을 방어하는 혁명적 정치 조직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1930년대와 40년대의 혁명가들은 또한 어떤 노동자들의 당도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한 볼셰비키가 저지른 값비싼 오류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분석을 시작했다. 특히,

     

    - 당이 스스로 소비에트를 대체하고, 당과 10월 혁명 이후의 국가를 일체화하려는 경향의 증가를 지적했는데, 이는 소비에트의 권력을 껍데기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새로운 국가에도 반대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를 방어하는 당의 역량 또한 약화하는 것이었다.

    - 반혁명의 백색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의 ‘적색 테러’에 의존한 것은 볼셰비키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조직 억압하는데 얽매이게 되었다.

    - 국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 시기로 보는 경향과 심지어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그 시작에서부터 러시아 혁명과 1917년에서 23년까지의 국제적인 혁명적 흐름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시도해 왔다. 우리는 몇 년 동안 노동 계급의 역사에서 정말로 필수불가결한 시대를 다루는 기사와 팸플릿들을 모아 자료로 구축해왔다. 내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우리는 러시아 혁명과 국제적인 혁명적 흐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사 일체를 갱신함으로써, 우리의 독자들이 이러한 문서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매달, 혹은 일정한 간격으로 우리는 혁명적 과정의 연대기적 발전과 직접 관련되거나, 부르주아 선전의 공격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환경 내부와 주변을 둘러싼 토론들에서 제기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반응을 담고 있는 머리기사를 낼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달, 우리는 1997년 처음 작성된 2월 혁명에 대한 기사를 우리 웹사이트의 전면에 ‘올릴’ 예정이다. 그 후에는 레닌의 4월 테제, 7월의 날들, 10월 봉기에 관한 기사 등등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오랜 기간 계속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혁명과 반혁명의 드라마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이는 러시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상하이까지, 토리노에서 파타고니아까지, 클라이드사이드에서 시애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메아리쳐 울렸던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수집에 우리가 아직 깊이 검토하지는 않은 문제들 (그 시기 지배 계급이 혁명에 저항하여 저지른 맹공격, ‘적색 테러’의 문제...) 에 대해 다룬 새로운 글들을 추가하려 한다. 이 기사들은 노동 계급의 혁명적 기억에 반대를 목적으로 하는 최근의 자본주의 선전에 대한 대응이다. 이 기사들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조건들 – 러시아 혁명 시기와 무엇이 공통적인지, 그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난 100년간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는지... – 을 볼 것이다.

     

    이러한 모험적인 출판의 목적은 단순히 오랜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1917년에 그랬던 것보다 오늘날 훨씬 더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다는 관점을 방어하는 것이다.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공포에 직면하여 그 시기 혁명가들은 자본주의가 그 쇠퇴기에 진입하였음을 결론 내리고 인류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사이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한 첫 번째 시도의 패배에 이은 더욱더 큰 공포 –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 가 그들의 진단을 극명하게 확인시켜주었다. 한 세기 후, 여전히 살아남은 자본주의는 인류의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을 제기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독일 혁명의 전날 밤 썼던 글에서 볼셰비키의 오류, 특히 적색 테러 정책에 대한 그녀 자신의 매우 진지한 비판에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 당과 근본적인 연대를 표현하였다. 그녀의 글은 그녀 자신이 직면했던 미래에 대해서만큼, 우리들의 미래와도 연관되어 있다.

     

    - 지금 해야 할 것은, 볼셰비키 정책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 핵심과 우연적인 방해물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 세계에서 결정적인 마지막 투쟁에 직면하고 있을 때,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시간을 불태우는 문제들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하는 부차적인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실천의 역량, 행동의 힘, 사회주의의 권력을 향한 의지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본보기가 될, 앞으로 나아간 첫 번째 주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지금까지 후텐(Ulrich von Hutten) 과 함께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다.”내가 감히!“

     

    이것이 볼셰비키 당의 본질이며 앞으로도 유지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사회주의 실현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제기하였고, 그리고 전 세계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을 힘차게 해나갔다는, 불후의 역사적 업적을 해냈다. 러시아에서, 문제는 오직 제기될 수 있었을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전 세계의 미래는 ‘볼셰비즘’에 속해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702/14242/russia-1917-and-revolutionary-memory-working-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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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은 세계의 역사적 변화의 개막을 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분석의 글이다. 이 전쟁에서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인류가 학살되었다. 예를 들어 북프랑스와 플랑드르(벨기에)에서 독가스와 같은 신무기의 사용으로 단 몇 주 동안 수만 명의 병사가 살해되었다. 종전까지 사망자가 약 2천만 명에 달했고 종전 직후 지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던 사람들 2천만 명이 이후 '스페인 독감'이라 알려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사회민주당(SPD) 소속 제국 의회 의원들은 전쟁차관 승인에 찬성했다. 처음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부 중의 하나가 국제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원칙을 배반했다. 그 배반자들에 대항해 독일에서 몇몇 남지 않은 국제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거처에 모여서 국제주의의 옹호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국제주의자들 최초의 국제대회가 스위스의 침머발트1)에서 조직되었다. 전쟁의 발발과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에 대응해 혁명가들은 그 전쟁의 뿌리와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 「사회민주당의 위기」와 그녀가 초안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세우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부였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15년 4월 감옥 안에서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이 팸플릿을 썼다. 전쟁 상황 속에서 그 글은 즉시 출판될 수 없었고, 1916년 1월에야 독일 밖에서 출판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을 놓고 볼 때, 그녀의 슬로건은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 전쟁이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이었다. 가차 없고 대담한 자기비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근원을 찾아서

     

    그 팸플릿의 여러 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팽창하면서 어떻게 그리고 왜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해야만 하는지를 밝혔다. 그리고 “(너무) 뒤늦게 도착한” 나라들이 어떻게 해서 “먼저 도착한” 나라들로부터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정복 물들을 빼앗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의 상승을 다룬 이 장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전쟁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했고 이러한 발전은 어느 한 나라 만에 의해서 개시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했다. “(…) 제국주의 정치는 어떤 한 국가 또는 몇몇 국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부터도 국제적인 현상이자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고 그로부터 어떤 국가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다.” (본문 제7장)

     

    1890년대에 행한 분석에서 그녀는 폴란드는 더는 독립국이 될 수 없고 그래서 혁명가들은 더는 민족자결요구를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점은 1차 세계대전의 사건들로 확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진영 안에서 국가 방어 전쟁에 대한 그 어떤 지지도 거부한 선구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환경을 도외시하며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나라의 고립된 관점에 따라 좌우되는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이미 사상누각이다.”(본문 제7장)

     

    전쟁 발발 후 몇 달 만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참여국들의 경제적 폐허를 초래하는 이 전쟁의 새로운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과 이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분석한 후, 그녀는 전쟁의 발발에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의 결론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노동자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없었다면, 그리고 노동조합이 자본가들과 함께 서명한, 공장들에서의 당쟁중지(즉, 파업금지) 선언이 없었다면, 간단히 말해서, 독일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자계급과 인류에게 있어서의 귀결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조국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는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의 종결에 있어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체의 전쟁과 파괴충동을 제거할 것이라는 평화주의적 희망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한다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할 것이라는 위험을 인식했다. 인류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과 직면했다.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귀결들

     

    독일 사회민주당(SPD) 지도부의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등을 중심으로 한 결연한 독일 국제주의자들은, 당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지 않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모든 국제주의적 역량을 하나의 당으로 재조직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준비하기를 원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유니우스 팸플릿의 부록으로 출판된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대한 테제”를 초안했다. 이 초안은 몇몇 변경을 거쳐 새로이 창립된 스파르타쿠스연맹에 의해 그룹의 지침으로 채택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중요성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 팸플릿은 자본주의가 들어선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대한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혁명가들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그것의 주요한 견해들(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쇠퇴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노동자 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과 방법(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파고들어 그 원칙들을 규명하는 것, 가차 없는 자기비판, 혁명가들의 임무에 대한 장기 관점)은 모든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능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쓴 다른 저작, '자본의 축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들과 그 기본 모순들 그리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시기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를 초래하게 되는지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 출판이 이미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판도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열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는 크든 작든 간에 모든 국가의 암이 되었고 그래서 '민족자결' 요구는 더는 의제가 아니라는 로자의 결론은 큰 논쟁을 유발했다. 전쟁 중에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에서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이 공통된 국제주의의 입장,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유된 전망의 틀 안에서 이뤄졌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국주의 발전의 근원들 및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의 근원들에 관한 그리고 혁명의 전망에 관한 토론은, 억압과 추방 등 가장 어려운 조건들 아래에서도 그들이 같은 방향을 향해 줄을 당기는 것을, 즉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그녀를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감금의 의도였다면, 갇힌 후 그녀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녀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 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찾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 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녀의 의지와 사기를 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녀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일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2)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그녀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녀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녀는 감옥 밖에서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저작들은 반복해서 감옥 밖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녀는 많은 동지와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녀를 침묵시키고 그녀가 개인들에게, 그녀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녀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정치적 인간적인 목소리를 감옥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그녀의 수감 시기는 삶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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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뮌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그녀는 폴란드에서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들)을 수학했다. 1897년 그녀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녀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는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그녀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녀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녀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녀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3)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될 수가 없다. 비록 그녀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녀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갇혀있어야만 했다.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견해를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점 증가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러시아 자체에서 해결될 수는 없음이 그녀에게는 분명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 표적을 그녀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녀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KPD)의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녀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20세기와 21세기를 거치면서 점점 더 심각해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파악하고 착취당하는 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을 위한 전망을 발전시키는데 꼭 필요한 그녀의 대작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주>

     

    1. http://en.internationalism.org/wr/290_zimmerwald.htmlhttp://en.internationalism.org/node/3154

    2.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체트킨에게 보낸 1916년 7월 11일 자 편지

    3. 「자본의 축적 II」( 로자 룩셈부르크; 황선길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에 실린 “비판에 대한 반비판, 자본의 축적, 또는 아류들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무엇을 만들었는가?”, 974쪽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100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대항해서 쓴 유니우스 팸플릿(Die Krise der Sozialdemokratie [Junius-Broschu're])이 최초로 한국어본으로 나오는데 기여했다. 새로운 한국어본을 위해 작성한 서문을 여기에 공개한다. 지배계급과 그 선동 기구들이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대학살에 대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상황에서 다른 한편의 혁명가들은 전쟁반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해 맞섰던 국제주의자들의 도덕적, 지적 용기를 자랑스럽게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7월 6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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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에는 억압계급의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고, 그들의 이론은 허위와 중상모략에 가득 찬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표독스러운 증오 그리고 가장 파렴치한 구호로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은 이후에는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되어 신성시되거나 결국에는 대부분 그들의 명성이 피억압계급을 회유하는 데 쓰이는 "위안"으로, 또는 후세에 기만하는 수단으로 숭배되는 등, 음모의 대상이 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혁명적 이론은 그 혁명적 본질을 빼앗기고, 혁명적 이론이 지니는 무기로서의 예리함은 무디어지고 통속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은 위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 군단(Freikorps)에 의해, 투쟁의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암살되었다. 이 병사들은 "사냥개가 필요하다면 내가 될 것이다"! 라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당원 노스케 장관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의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도,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암살한 것도 권력을 잡은 그 사회주의자 당(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끔찍한 살인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일련의 중상모략을 통해 오랫동안 준비되었다. "붉은 로자", "선동자 로자", "피의 로자", "차리즘의 첩자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거짓 비난이 그치지 않았고, 베를린에서 "피의 주간" 이었던 1918년 말 / 1919년 초에는 학살에 대한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나서 불과 몇 달 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운동의 기회주의자들은 그를 신성시하고, 그의 혁명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비하하고, 그리고 이 날카로운 혁명가를 무디게 하려고 그를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해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원래 모습이었던 전투적이고 모범적인 혁명가로 남아있어서는 안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평화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잘못 전해져, 두 번 살해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혁명을 위해 이 위대한 투사를 “명예 회복시키는”(즉,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근 몇 십 년간의 “기억”이라는 작업의 진정한 목적이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투쟁을 왜곡시키기 위한 꾸준한 캠페인

     

    1930년대 프랑스의 예를 들면, 루시앙 라우렛(Lucien Laurat) 주변에서 발전한 모든 흐름은 민주주의의 유혹에 점점 더 양보했고, 이윽고 “볼셰비키 혁명” 처음부터 혁명 계획의 “과실” 안에 “벌레” 레닌이 있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1936-39년의 스페인 전쟁에서 공화군을 위한 변명이 되었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이라는 구실로 제2차 세계 학살에 노동 계급을 용기병으로 참가하게 하는 변명이 되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POUM(스페인의 맑스주의 통합 노동자당 : 역주)과 그들, 민족 저항세력의 “영웅주의” 안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지지했다. 이 구역질이 나는 민주주의 선전은 스파르타쿠스 기관지 설립자인 르네 르페브레(Rene Lefeuvre)와 같은 인물들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작을 한다. 나중에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집[1]에서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머리말을 썼는데, 그것의 1946년 제목인 ‘독재에 반대하는 맑시즘’(로자 룩셈부르크는 절대 그 제목을 쓰지 않았다!)은 이 혁명을 위한 투사를 볼셰비즘에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역겨운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작집 서문에서 르페브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모든 위대한 맑스주의의 저명한 이론가들: 칼 카우츠키, 에밀 반데벨드, 루돌프 힐퍼딩, 칼 레너, 조지 플레하노프는 – 그리고 말하는 김에 우리 또한 –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레닌의 전체주의적 교조가 맑스주의의 원칙에 완전히 반대된다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박제화했으며 그의 사상을 끔찍한 교리로 왜곡했다. "피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성인이 되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빠르게 두 개의 새로운 타락하고 상호 보완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시켰다 : 한쪽은 매력적인 “룩셈부르크주의” 그리고 다른 쪽은 혐오스러운 "맑스-레닌주의". 정말 동전의 양면 또는 오히려 같은 결과를 가져올 함정으로 향하는 두 입구 :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를 거부하고 "평화주의자" 로자로 묘사되는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철창 안의 사자를 존경하는 것과 같다.

     

    1974년 서독(FRG)에서, 그들은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담은 우표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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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새로운 캠페인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이 사라진 후, 이 광대한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은 다시 발굴되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부르주아지가 열광적으로 선언한 이른바 “공산주의의 죽음”을 부양하기 위해 확대되었다. 여기에서 공식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가장 큰 거짓말로, 공산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사기를 목표로 했다. 그것은 지배 계급의 손에 있을 때 특히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무기이다. 왜냐하면, 199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하나의 사회적 세력으로 여기고 그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되어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어디서부터 왔는지 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스탈린주의라면, 결국 실패한 공포였다면, 왜 그것을 위해 투쟁할까? 결국, 스탈린주의의 재앙으로 귀결될 뿐이라면 왜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부르주아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논리이며 독이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 "스탈린의 정신적 아버지"인 레닌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비열한 선전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이 가짜 싸움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동계급에 반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 전역과 세계 도처에 걸쳐 서점 및 가판대와 블로그, 포럼에서는 전투적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미지를 다시 왜곡시키기 위해 새로운 구역질이 나는 선전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TV 프로그램에서부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다시 "여성"과 "평화"의 특성만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아주 유명하고 명성 있는 신문 르몽드는 2013년 9월, ESCP 유럽의 교수인 장-마크 다니엘(Jean-Marc Daniel)이 쓴 글을 다음과 같이 잘 연상되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자-평화주의자” “맑스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단어의 결합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 지배 계급에 대항한 “진짜 맑스주의자”가 봉기와 자본주의의 전복을 포기하고 계급 전쟁으로부터 이탈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을 포함하여 수많은 책이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시 볼셰비키와 “독재자” 레닌의 완고한 적으로 묘사하면서 출판되고 있다. 사회비판그룹의 “룩셈부르크주의자”인 민주적 역사학자들의 후원 아래 파리에서 있었던 것처럼, 회의와 토론들이 여기저기서 조직되었다. 예술계에서조차 2014 MAIF 상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획한 조각가 니콜라스 밀헤(Nicolas Milhe)가 수상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그녀가 혁명의 반대자로서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에 대한 투쟁에서 그녀의 동지에게 반대했다는 조건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천진스러운 우상"으로 그녀를 변환시키기 위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조명은 거대한 이데올로기 중독 사업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더욱더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의 가증스러운 선전 후에는 매우 진지하고 공식적으로 학교 프로그램에서 배운 볼셰비키의 적으로서 여기는 것이 이제부터는  룩셈부르크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부르주아지를 위한 이해관계는 민주적인 부르주아지를 방어하는 것 외에 다른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가장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구성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왜곡 배후에 불신과 혁명 조직을 악마화하는 또 하나의 말 하지 않는 목적과 함께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자들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조명하는 캠페인이 있다.

     

    2014년11월 7일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 “사회주의 조직의 문제”(1904), “대중과 지도자”(1903), “비판의 자유와 과학의 자유”(1899).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505/13055/rosa-luxemburg-belongs-proletarian-revolution-not-social-democr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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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복원을 위하여

  • 로자 룩셈부르크의 복원을 위하여

     

     

     

    올해는 러시아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고, 2년 뒤에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내부의 적들에게 살해된 지 100년이 된다.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주의자', '페미니스트 민주주의자'로 왜곡시켜 다시 한 번 살해한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들은 바로 부르주아와 노동자 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를 '민주주의의 성인'으로 둔갑시키는 더러운 선전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시도에 맞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시대에 싸웠던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단호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이며,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지지하며, 이 위대한 투사를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소개하는 작업에 동참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 작성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을 소개한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사회실천연구소의 '실천'에 처음 한국어 번역본을 실었고, 국제코뮤니스트흐름에서 독일어 원본을 번역하여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원래는 출판을 통해 이 팸플릿을 한국에 소개하려고 했으나 우리의 문제로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온라인에 먼저 공개하기로 했다. 이 번역본이 독자들의 참여와 교정 제안을 통해 원본의 느낌에 가깝게 개선되기를 바라며,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될 수 있도록 출판 작업을 서두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이듬해인 1915년 4월 옥중에서 쓴 이 글을 썼다. 그 후 이글은 국제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부록으로 하여 1916년 1월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이 번역의 원본은 베를린 디이츠 출판사가 1974년 펴낸 로자 룩셈부르크 저작선집 제4권(1914년 8월부터 1919년 1월까지), 51쪽부터 164쪽이다. 역자의 번역 의도는 되도록 많은 이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이 빛나는 이 글을 한국어로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흡한 점이 많은 상태지만 지금 이렇게 공개하게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어 원본의 맛이 완전히 전달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앞으로 독자들의 많은 충고와 교정제안을 통해 이 한국어 번역본이 차츰 더 다듬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메일: http://ko.internationalism.org/contact)

     

    이 글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단지 퍼갈 때는 가능하면 출처를 밝혀, 원한다면 모든 읽는 이들이 번역본의 개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또 개선된 번역본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사회민주당의 위기(유니우스팜플렛) - 로자 룩셈부르크, 역자 노트, 국제코뮤니스트흐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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