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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평의회 공산주의-한계, 평의회주의-오류, 그리고 공산주의좌파?

 

 

한국에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Left Communism)가 소개된 것은 80년대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였다. 공산주의좌파 진영에서 레닌 '최악의 저작'으로 혹평 하는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가 그것인데, 이에 대한 재평가와 비판은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기관지  '코뮤니스트'에 연재 중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이 팸플릿의 권위는 90년 넘는 역사와 혁명적 전통을 가진 '공산주의좌파'를 '좌익소아병' 한 단어로 매도하며 오랜기간 세계 공산주의 운동뿐 아니라, 한국운동사회도 지배해왔으며, 계급투쟁의 중요한 시기마다 기회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 도구로 전락해왔다. 한국에 공산주의좌파가 공산주의자 자신에 의해 체계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2000년대 중반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공산주의(혁명적 맑스주의)를 받아들인  이후 무려 20년 넘는 기간 공산주의좌파는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에서도 제외되었고, 구체적인 이론적 쟁점에 대한 논쟁도 없는 상태에서 이상주의적인 '극좌파' 또는'초 좌익'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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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산주의좌파에 기원을 두면서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이론, 즉 1920~30년대 볼셰비키와의 논쟁과 유럽 혁명의 실패로부터 자신을 정립한 '평의회 공산주의(Council Communism)'와, 그것에서 시작하여 '당(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간 '평의회주의(Councilism)'를 '공산주의좌파'와 혼동하는 운동세력이 이곳에서는 아직 다수이다.


이러한 무지와 혼란이 사회주의자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혁명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쉽게 해소할 수 있도록 세 가지 사상노선에 대해 역사적인 기원을 설명하고, 공산주의좌파 입장에서 평가하고자 한다.

 


1. 기원과 구분


1) 공산주의좌파


공산주의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연속성에 있는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일부이다.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좌파를 형성했는데, 러시아의 레닌과 함께했었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의 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1), 이탈리아의 아마데오 보르디가(Amadeo Bordiga)2)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회주의 세력이 인터내셔널 전역으로 확산되자 자신들의 정당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볼셰비키, 네덜란드의 트리뷴그룹 등 국제적으로도 조직된 정파로서 활동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전망을 확인하게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운동 내부의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마르크스, 엥겔스에 기원을 두었다는 조직들이 서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예전의 개량주의자들이 장악한 사회민주주의 당들은 과거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먹이며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동원의 앞잡이이자,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반면에 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여들게 한 것도, 전쟁 발발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좌파 흐름이었다. 또한, 1919년 창설된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이하 코민테른)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좌파 흐름이었다. 이들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던 1919년, 코민테른 창설 총회에서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라는 새로운 시기에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들,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등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그간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발전되고 혁명적인 입장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시인이자 공산주의좌파였던 헤르만 호르터(Herman Gorter)3)는'국제 프롤레타리아 선두의 전위 투사'로서 당시의 레닌을 환영했고,"세계 노동계급은 혁명과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 자신의 조직화, 집중화, 형태 그리고 표현을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에서 발견한다." 라면서 소비에트를 찬양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악명 높은 팸플릿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통해 호르터와 그의 동료 판네쿡을 '소아병'에 걸린 극좌파로 혹평한다.


그러나 1917년 두 사람은 국제 혁명운동 내에서 주요한 인물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회민주주의 당들과 노동조합의 참전은 이들에게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도덕적 비열함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지도자들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킨 조직형태의 파탄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러한 낡은 노동조합에 맞서,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대치시켰다. 또한, 사회민주주의 당 형태에 맞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의 발전에만 집중된 정치적 전위의 '새로운 형태'를 옹호했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 특히 독일에서 그러한 관점은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1919년 말에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를 이유로 공산당으로부터 축출된 독일 공산주의좌파들은 새로운 당인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결성했다. 이 당은 짧았지만, 독일 노동자계급 내에서, 특히 루르 지방과 브레멘에서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1920년 초 우익들의 카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산주의좌파 활동가들은 루르 지방을 단시간에 점령한 적군 안에서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코민테른 지도부에 의해 '유아적'이고 '무정부 노동조합 지상주의적'이라고 비판되었을지라도, 낡은 의회주의 및 노동조합 전술에 대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거부는, 자본주의 쇠퇴에 관한 심오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는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전술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고 계급조직의 새로운 형태, 즉 공장위원회와 노동자평의회를 요구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은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전술로의 회귀에 대항한 이러한 성과물에 대한 그들의 비타협적인 옹호를 통해, 특히 그 혁명운동이 판네쿡과 호르터의 작업을 통해 독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네덜란드 및 여러 나라에서 표현된 하나의 국제적인 흐름에서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 물결의 퇴조와 러시아혁명의 고립은 코민테른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권력 내부를 변질시켰다. 볼셰비키 당은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권력이었던 소비에트에 비해 반비례로 성장한 관료적 국가 기구들과 점점 더 융합되었고,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감소해가는 대중 행동의 시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들이 기회주의적인 해결책들로 제시되었다. 의회 및 노동조합 내부 활동의 강조, 동양인들에게 제국주의에 대항해 봉기할 것을 호소, 그리고 애국적 민족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정책 등이 그것이었다. 이때 공산주의좌파들은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자들과 투쟁했듯이,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했다. 의회주의와 낡은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 민족해방에 대한 국제주의적 입장, 프롤레타리아 독립성을 훼손하는 통일전선의 거부 등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공산주의좌파들은 코민테른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최고의 옹호자들로서 활동했다. 독일­네덜란드의 판네쿡과 호르터,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러시아의 오신스키, 스미르노프, 영국의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4) 등 공산주의좌파(코민테른에서의 공산주의 좌파 흐름)는 본질에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이었고, 불가리아에서 영국까지 그리고 미국에서 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


<요약과 현재>


공산주의좌파는 19세기 말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914년 제국주의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제주의를 방어했고,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수호했으며, 1919년 코민테른 창설에 공헌했고, 1920년대 코민테른 내부의 기회주의 흐름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하나의 국제적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주로 활약했다. 즉, 공산주의좌파는 1920~30년대에 타락해가는 코민테른에서 분리해 나왔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 특히 독일, 네덜란드 및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좌파 분파들의 연속적인 공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반혁명과 파시즘 아래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남았고, 68혁명 이후 고무되어 1970~80년대 국제적인 혁명조직을 건설했고, 현재에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볼셰비키와의 논쟁, 그리고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에는 독일과 네덜란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사회민주주의 좌파에 속했던 공산주의좌파였다. 이들은 오랜 기간 개량주의에 맞선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타났으며, 네덜란드의 판네쿡과 독일의 칼 스로더(Karl Schroder), 오토 륄레(Otto Rühle)5)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 후 폴 매틱(Paul Mattick)6)이 중요한 이론가가 되었다.


판네쿡은 190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독일에서 활동했는데, 브레멘에 있는 동안, 항만 노동자의 아주 중요한 비공인파업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계급투쟁에 대한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을 아주 이른 시기에 거부하게 된다.


오토 륄레도 판네쿡처럼 1920년대 볼셰비즘을 거부하는데,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며, 그 결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완전히 다른 조직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정립한 최초의 인물 중의 하나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욱 세밀하게 정립 되어갔고, 그 경향들은 평의회 공산주의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의 경험과 독일혁명의 실패를 겪은 이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평의회 민주주의'의 방어와 '당 권력'의 거부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20년대 독일과 러시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처음에는 레닌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후에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볼셰비즘과 구분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10월 혁명이 짜리즘(tsarism)을 붕괴시켰고 봉건 관계를 끝장냈지만, 러시아 경제가 임노동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사회주의와 상관없다'는 것에 근거해, 러시아에서의 생산이 계급사회인 사적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가치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스크바를 언급하면서, 러시아가 더는 공산주의가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1930년대에, 수많은 잡지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논쟁과 토론을 위한 공개토론장을 제공했는데, 당시 공산주의좌파들은 자신들을'평의회공산주의자'라고 칭했었다. 잡지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폴 매틱의 '국제 평의회 통신(후에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가 됨)'이었는데, 평의회 공산주의 주요 이론가들인 판네쿡, 오토 륄레, 칼 코르쉬(Karl Korsch)7)가 기고했었다. 이러한 잡지들 속에서 발전한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분석은 높은 수준이었지만, 반혁명의 기나긴 어둠은 이들을 오랜 기간 고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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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0~70년대의 급진적 정치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레닌주의 그룹에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결코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평의회 공산주의는 1968년 이후의 리버테리안(자유의지주의)경향 좌파의 생각에 주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때 평의회 공산주의는 초기에 레닌주의와 결별한 그룹과 사상가들인 '상황주의자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 '존슨-포레스트' 경향들과 접촉했고, 몇몇 경우에는 가족 역사 내의 우연성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노암 촘스키는 뉴욕에 있는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삼촌에 의해 급진적 정치와 처음 만났다. 이후 현재까지 평의회 공산주의는 실천(조직)적 운동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반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으로 자리 잡아 여러 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안톤 판네쿡, 오토 륄레, 아펠(Jan Appel), 칸느 메이예르(Henk Canne-Meijer), 폴 매틱, 칼 코르쉬, 카요 브렌델(Cajo Brendel)8)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 공산주의는 1917년에서 1920년 초반에 이르는 유럽 혁명의 과정과 실패로부터 성장하였다. 주로 독일과 네덜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이들은 볼셰비키(레닌)와의 논쟁에서 자신들을 정립했는데, 볼셰비키 이론과 조직, 전략, 정책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한다. 당에 대한 권력의 거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의 분리, 노동조합과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자평의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10월 혁명의 결실을 제거한 일종의 반혁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스탈린을 볼셰비즘과 볼셰비키 혁명의 계승자로 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좌파와 유사한 기원을 두지만, 국제적인 분파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들은 반혁명시기 이후 오랜 기간 고립되었다가 1960~70년대부터 재발견되어 이론화되었으나 실천적 운동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러시아혁명, 독일혁명의 경험 속에서 '반의회주의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공산주의 운동'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정립했지만, 여전히 평의회 공산주의 사상은 도식적인 완결된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3) 평의회주의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1930년대에 이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의 성격,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 당에 대한 규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관리'사회주의로 이론화시켰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1926~7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테제에 맞서 모든 공산주의좌파들은 반혁명과 코민테른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평의회주의자들은 '자율'과 '자주관리'에 기반을 둔 '한 지역(국가)'에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 후 평의회주의자들은 특히 1930년대 공개적으로 '지방적 및 민족적' 사회주의 건설의 테제를 이론화했다.


또한, 평의회주의자들은 당이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평의회(소비에트)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이는 계급투쟁의 퇴조기(계급의식의 하강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자체의 몰락을 가져온다. 당시 네덜란드 좌파는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자본주의 쇠퇴기에서 노동자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관한, 자본주의의 위기의 물질적 근원들에 관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에 관한 이해를 계속해서 심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계급투쟁에 특히 실업자운동에 지속해서 중요하게 개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좌파는 러시아혁명의 패배로 충격을 받은 채, 정치조직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조직의 어떤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도 평의회주의적 거부로 점점 더 빠져들었다. 거기에는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적'이었던 것으로 비판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한 것도 결합하여 있었다. 이러한 이론화들은 미래의 그것의 죽음의 씨앗들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의 일종이라 판단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조치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실현 즉,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해방구'로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을 주장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권력' 장악과 '세계혁명'의 완수라는 국제주의적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니라,'경제적 조치' 즉,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실시, 임금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통해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을 전진시킨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르주아지는 '민주적 통제', '자주 관리'의 이름으로 평의회주의가 주장했던 미시적 개혁을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평의회주의의 위험은 바로 계급이 역사적 관점을 상실하고 하나의 공장, 하나의 지역(국가)에 갇혀 패배한다는 점이다.


결국, 평의회주의는 평의회 공산주의에서 훨씬 벗어나 마르크스주의를 속물화시키는 주장을 하게 되었고, 무정부주의, 경제주의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은 아나코생디칼리즘(anarcho syndicalisme)과 혁명적 생디칼리즘(syndicalism)으로 이어졌으며, 1917~23년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론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학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평의회주의 이론가들은 다음과 같다. 오토 륄레,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as),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헨리 시몽(Henri Simon) 등.


(요약과 현재)


평의회주의는 1930년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발생한 당과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오류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였고, 세계혁명이 아닌 '자주 관리'사회주의를 주장했다. 특히 평의회가 아닌 정치 조직의 모든 형태는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며, 당 조직 자체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는 1920년대부터 시작된 반혁명의 조류에 저항하는 데 방해되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혁명의 퇴조기에 생존해야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파편화라는 재앙을 겪게 했다.

이들은 반혁명의 암흑기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가 68혁명 이후 '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재해석 되어 나타났지만, 운동이 성숙함에 따라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을 거부하는 편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평의회주의는 현재에는 독자적인 사상이나 노선을 가진 운동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평의회 공산주의를 리버테리안적으로 해석한 일부 그룹에 의해 '노동자 자주관리'와 '평의회 민주주의' 강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2. 평의회 공산주의 이론과 한계


1) 레닌과 소련사회 비판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소련사회를 처음으로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했는데,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혁명적 노동자계급 운동의 기본 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주의 노선과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근거로 하여 의회주의와 노동조합 형식의 조직체계를 비판하였다. 그들의 출발점은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국가주의와 지도자 중심의 정책을 일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즉,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 관료에 의한 계획경제를 의미하는 소련의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의미하며,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자평의회에 의하여 일하는 대중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생산에 있다는 것이다.


판네쿡은 1938년 레닌의 철학에 대해 분석한 팸플릿(Lenin as Philosopher)을 출판했다. 여기서 판네쿡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러시아에서 짜리즘에 반대한 투쟁은, 오래전 유럽에서 봉건제에 반대한 투쟁과 닮아 있었다. 러시아의 교회와 종교는 현존권력을 도왔다. 그런 이유로 종교에 반대한 투쟁은 사회적 필연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레닌은 역사유물론을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유물론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사고했다. 유물론이란 교회와 종교에 반대한 영혼의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혁명 전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와 혁명적 프랑스의 사회적 관계의 유사성도 사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그의 당 구성원들이 자신을 자코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18년 3월 볼셰비즘은 이미 최소화된 권력이었던 소비에트를 야만적으로 공격하는데, 그것은 10월 혁명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평의회 공산주의가 말하고자 했던 공산주의는 그러한 시스템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당 독재는 임노동의 철폐와 노동착취의 절멸에 적합한 것이 아니다. 생산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생산자의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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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 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전적으로 볼셰비키 당 때문이었다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지라도, 당이 평의회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는 내전 동안에 급감하는데,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출은 평의회를 약화시켰고, 1921년 3월 권력의 실제 중심에서 그들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때 볼셰비키 당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속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할 것이다.


2) 노동자평의회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조직인 노동자평의회는 과거의 조직들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직들의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판네쿡은 평의회 조직체계에서는 일반 대중 위에 군림하던 전문적인 지도자를 없앰으로써 지도자와 대중들 간의 갈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평의회가 사회주의 변혁과 건설과정에서 중심적인 조직의 역할이 부여되지만, 평의회는 기계적으로 선언되거나 일부 임의적인 혁명적 집단에 의하여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였다.


평의회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분석에서 판네쿡은, 평의회는 일하는 대중들의 실천으로부터 자발적이고 유기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도부의 승인 없이 이루어지는 비공인파업이나 공장점거 투쟁 등과 같은 실천적 활동에서 태생적인 형태로 이미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노동자들의 입장을 조정하기 위하여 조직되는 파업위원회에 평의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계급공동체'의 요소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두 개의 실천이 국가 차원으로 확장된다면 자본주의 국가 자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한데, 바로 이때 노동자평의회가 모습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할 때까지 평의회 역할은 확장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평의회에 대한 판네쿡의 이론은 특정한 경험을 지나치게 일반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불안정노동과 미조직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산(대공장)' 중심의 투쟁형식은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로의 투쟁 확산에 약점이 있고, 투쟁이 전면화되지 않는 한 광장에서의 평의회 민주주의 실현은 지속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상시기에도 평의회 형식의 조직은 노조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역, 업종, 고용형태 까지 넘어서서 가장 넓게 계급을 포괄하는 아래로부터의 계급조직이어야 하고, 내용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평의회민주주의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에는 다수의 비정규노동자나 미조직프롤레타리아까지 포괄한 새로운 '평의회 운동'의 경험과 전형이 필요하다.


3) 자발성과 대중행동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실질적인 혁명은 반자본주의적 힘이 친자본주의적 힘보다 더 성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즉, 자본주의적 관계 아래에서의 그러한 힘은 반자본주의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다고 이해했다. 그래서 그것은 불만을 가진 대중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자신의 반란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모든 필요한 결정사항이 '노동자의 직접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 개념에서는 노동자와 운동가 사이의 분할에 기초해서는 공산주의가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계급에 행동을 호소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노동자 계급의 구성원의 일부로 사고한다. 그들은 계급과 함께하면서 자본주의 흥망성쇠를 향한 발전경향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현재 활동과 그들의 목적을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선전그룹이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노동자에게 필요한 행동의 과정을 제안할 뿐이라 주장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스스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 미래의 전망 즉, 공산주의 혁명의 최종목표를 밝히는 것이며, 노동자들이 현재 필요한 것을 완전히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이라 말한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게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행동이 일어나는 어디든 참여하며, 모든 경우에 '자기주도권'과 '자기 행동'이 분리된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그러한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모든 결정에서 자신들의 직접 참여가 증대될 때 운동이 발전하고 혁명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한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의 주체'문제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에 대한 고찰은 이른바 '당 중심(주의)' 운동에 많은 문제의식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투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그러한 투쟁 속에서 자기 주도권과 자기 행동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계급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계급 스스로 성숙을 통해 운동을 발전시키고 역사적 역할을 할 때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연결하고, 계급적 단결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며 계급의식을 질적으로 도약하는 데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인 혁명조직(당)의 더욱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4) 한계와 전망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노선에는 많은 한계가 있고, 오늘날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과 논란이 뒤따른다. 특히 자본과 그들의 방어자들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자발성을 방어하려는 노력은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큰 공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계급구성에 대한 고정된 이해로 비쳐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행동, 그리고 인종과 여성, 소수자 문제에 있어 '계급중심(환원)'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노동자 운동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계급정치의 중핵'으로서 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에 대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평의회 조직'들은 1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렬한 사회적 갈등의 순간마다 출현해왔다. 러시아와 독일에서 시작하여, 헝가리로부터 칠레까지, 폴란드로부터 이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다시 유럽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수천 번의 비공인파업과 광장점거에서의 대중총회를 통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3. 평의회주의 오류와 변형


1) 당에 대한 거부


평의회 공산주의자였던 오토 륄레는 1924년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하나의 당이 프롤레타리아적(的)이라는 단어 상의 의미만으로 당이 혁명적 성격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당의 혁명적 성격은 부르주아적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단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변할 때 말이다."


륄레는 처음에 '혁명은 당의 과업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계급의 과업'이라며, 이전의 당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경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당(조직)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평의회(소비에트)가 아닌 모든 정치조직은 부르주아적이고 반혁명적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평의회주의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계급의 조직인 평의회(단일조직)를 제외한 별도의 정치조직을 거부하게 된다.


대중행동과 계급의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평의회와 당의 차이는 좁아진다. 이때 모든 노동자조직을 평의회로 통일시키는 것은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며 계급 중심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중행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계급의식이 퇴조할 때, 평의회는 소멸하며 대중은 자기방어를 위해 분화한다. 이때 계급의식을 방어할 정치조직을 거부한 평의회주의는 파편화되거나 타락한 대중운동에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평의회주의자들이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볼셰비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적대감을 표현한 결과이자 그에 대한 반대로 대중의 '자발성'과 '평의회 민주주의'를 절대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의회주자들은 '당과 계급, 계급의식'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부족했다.


2) 경제주의 오류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추진력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20세기 초 이미 세계시장의 형성을 완성했기 때문에 일국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그 지역은 자본주의 세계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기지로서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혁명의 교두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의회주의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에 매달리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정치수준에서 가로막혀'노동자계급의 조건에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착취의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철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정복을 진행할 수 있는 경제 권력을 옛 사회 내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궤적, 즉 세계 수준에서의 정치권력 획득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건설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의회주의는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성격'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기반이 경제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공산주의적 경제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일국에서의 공산주의적 경제조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노동자 착취를 전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요인의 비중이 압도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처음부터 높은 수준의 의식과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 계급투쟁의 마지막 결과이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성격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평의회주의자들은 간과했다.


이처럼 평의회주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투쟁을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관리'기획으로 바꾸었고, 그 안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찬양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좌파들은 공산주의는 관리가 아니며, 자본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서, 공산주의는 '자본의 완전한 파괴'라고 주장했다.


3) 평의회주의의 변형


당 조직에 대한 거부,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 평의회 민주주의의 극대화를 주장해온 평의회주의는 반혁명기를 거치면서 스스로 생존능력을 상실했으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난 여러 조류와 만나 변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는 무정부주의와 연결되었고, 노동자평의회의 경제적 실현은 '자주 관리', '노동자 통제'라는 경제주의 이론으로 정식화되었고,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의 주요 주장에도 평의회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좌익공산주의자, 평의회 공산주의자, 리버테리안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교류가 활발하고, '공산주의 최종 목표'와 '당과 계급의 역할, 계급의식의 관계'에 대한 열린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리버테리안,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내부에서 평의회주의의 정치조직 거부와 경제주의 논리는 약화 되었다.

 

 

4. 이탈리아 좌익분파와 평의회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좌파


1920~30년대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유럽혁명의 실패는 독일에서 공산주의좌파들을 파편화시켰다. 비록 몇몇 은밀한 혁명 활동이 히틀러 치하에서 여전히 수행되었을지라도, 나치 테러로 제압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혁명적 소수들은 추방과 억압과 증가하는 고립에 직면해야만 했다. 계급 전체가 사기저하와 부르주아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계급의 즉각적인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의 발휘를 바랄 수가 없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반혁명의 전면화와 '평의회주의' 흐름은 좌익세력을 더욱 분산시켰으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원칙적 기반 위에서 국제적 토론과 협동을 위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반혁명에 대해 줄기찬 투쟁을 했다. 이런 노력은 네덜란드 국제주의자들과 좌익반대파 망명그룹과 논쟁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개방적 정신은 망명분파에 의해 성취된 보편적 강령의 진전과 함께 빌랑(Bilan)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좌파는 반혁명과 계급투쟁의 퇴조 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정확히 정의했다. 그 임무는 첫째, 전쟁에 직면하여 '국제주의' 원칙을 고수할 것, 둘째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대조표'를 만들 것, 셋째, 미래에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즉, 독일-네덜란드 좌파가 러시아 혁명의 퇴행과 볼셰비키 당이 보인 반혁명적 역할에 대해 '10월 혁명과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당과 혁명을 모두 버리는 '평의회주의'로 경도된 반면, 이탈리아 좌파는 항상 명확하게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본질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에 대한 '평의회주의적' 관점을 가진 네덜란드 좌파와 '당이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하면서 투쟁했다.


전쟁 시기 수감 및 가택연금 속에서도 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9)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 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같은 해 프랑스 망명분파는 프랑스 공산주의좌파(Gauch Communiste de France, GCF)를 만들었다. 이때 프랑스 공산주의좌파는 빌랑의 정신에 따라 활동을 계속했고, 한편으로 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에의 개입에 대한 사명감에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이론적 규명작업에 총력을 집중하여, 많은 진전을, 특히 '국가자본주의의 문제', '이행기', '노동조합과 당'에 관해 수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이들은 이탈리아 좌파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에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훌륭한 공헌들을 통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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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총파업과 그에 이은 전 세계에 걸친 노동자 투쟁의 분출과 함께 역사의 무대 위에 재등장했다. 이러한 부활은 공산주의 입장 중에서 명료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탄생시켰고, 기존 혁명그룹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혁명의 시기인 1917~1920년대에서, 반혁명의 시기인 1930~ 1940년대를 거쳐, 계급투쟁의 부활기인 1968년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은 공산주의좌파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쇄신하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게 했다.


그때부터 현재까지 공산주의좌파들은 조직, 사상,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확대되고 심화하였다. 그것은 공산주의좌파들이 90여 년의 역사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왔고, 계급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서 수많은 장애물과 곤경을 만나면서도 혁명적 원칙을 지키면서 약점을 보완하고 계급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는 스탈린주의 반혁명과 각종 기회주의 세력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역할)을 거부하는 '평의회주의'의 극단적 오류와 경직된 강령주의로 공산주의 운동 단일화를 가로막은 '보르디가주의'와의 기나긴 투쟁10)을 통해 자신을 강화하고 확장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은 평의회주의의 오류와 평의회 공산주의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의 공산주의자이기도 한 우리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비록 평의회공산주의-평의회주의의  해결책은 오류이었을지라도,  그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과 혁명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일상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가?

●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부에서 경제적 요구와 사회개량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킬 혁명의식을 어떻게 획득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떻게 계급의식을 방어하고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실천운동이다.


~형로


2014년 4월

 

<주>


1. 안톤 판네쿡(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좌파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2. 아마데오 보르디가(1889~1970)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 이론에의 기여자였으며,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였다.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자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공산당의 주요 인물이었다.


3. 헤르만 호르터(1864~1927)는 네덜란드 시인이자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880년대 암스테르담에서 새로운 안내자(De Nieuwe Gids : The New Guide)를 공동작업 했던 네덜란드 작가들의 매우 영향력 있는 그룹인 '80년대인들(De Tachtigers)‘의 주요 회원이었다.


4.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0)는 영국의 공산주의좌파이자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e)였다.


5. 오토 륄레(1874-1943)는 전쟁공채에 반대하여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투표한 공산주의좌파이며 독일공산당 창립멤버였다.


6. 폴 매틱(1904-1981)은 독일 공산주의좌파이며, 이후 미국에서 살았다. “평의회 공산주의”의 주창자이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혁명사상의 반대자였다.


7.칼 코르쉬(1886-1961)는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서구마르크스주의(Western Marxism)”의 창립 문서 중 하나를 작성한 독일 공산주의좌파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말 사회주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 되었지만 후에 모택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8. 카요 브렌델(1915-2007)은 네덜란드 공산주의좌파였으며 제2세대 평의회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자 판네쿡의 동조자였다.


9. 오노라토 데이먼(1893~1979)는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처음으로 활동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 혁명가였다.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축출된 이후, 그는 조직된 이탈리아 좌파와 함께 활동했으며, 흔히 기관지 공산주의 투사(Battaglia Comunista)로 알려진, 국제공산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 PCint)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1945년에 창립된 국제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숫자상으로 가장 큰 공산주의좌파 조직이었다.

 

10. 보르디가주의와의 투쟁은 [코뮤니스트 4호]  "혁명조직(Revolutionary Organization)의 구조와 기능 2 :  당과 계급, 당의 중앙화에 대한 이탈리아 좌파의 논쟁을 중심으로 " 를 참고 바람.


11. 현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국제 공산주의(혁명) 조직은 다음과 같다.


ICC(국제공산주의흐름): http://en.internationalism.org

ICT(국제공산주의경향): http://www.leftcom.org

IP(국제주의자전망): http://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

ICG(국제공산주의그룹): http://gci-icg.org


공산주의좌파(좌익공산주의)의 국제적인 토론 그룹(포럼)은 다음과 같다.


Controversies (국제주의 공산주의좌파 포럼) :  http://leftcommunism.org

Internationalist Discussion Network (국제주의자 토론 네트워크) :  http://groups.yahoo.com/group/intsdiscnet


*세계 여러 곳에서 최근 10여 년간 생겨난 신생 공산주의좌파 그룹들과 공산주의좌파 친화적 그룹, 보르디가주의 경향의 조직은 다음 호부터 별도로 소개 예정이라서 제외했다.

 

 


<참고문헌>
 

1.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1920, V.레닌


 
2. [좌익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2008, 오세철
 


3. [좌파공산주의와 맑스주의의 연속성], 1998, 프롤레타리아 트리뷴(러시아)
 


4. [러시아 수수께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2004, International Review


 
5. [평의회 공산주의], 1939, 폴 매틱
 


6. [평의회 공산주의와 볼세비즘 비판], 1999, 카요 브렌델
 


7. [WHAT IS COUNCIL COMMUNISM?], 2000, Wage Slave X


 
8. [Council communism - an introduction], 2005, libcom
 


9. [혁명적 전통- 평의회 공산주의], 1995, 스티브 라이트


 
10. [노동자평의회], 2005, 빛나는 전망, 안톤 판네쿡


 
11. [안톤 판네쿡과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1873-1960], 1984, J. P. Geber


12. [The Dutch and German Communist Left (1900–68)], 1988 and 2008, Philippe Bourrinet


13. [The Italian Communist Left 1926-45], 1992,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14. [THE COUNCIL 'COMMUNISTS BETWEEN THE NEW DEAL AND FASCISM], 1976, Gabriella M. Bonacch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8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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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련공대위 및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 성명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08/22 13:40
  • 수정일
    2014/08/22 13:4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사노련공대위 및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 성명서]

 

사노련 사건 대법원 판결에 굴하지 않고,  정치사상의 자유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대법원 2부는 오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사건에 대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일부 집시법 위반 혐의만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을 뿐, 이번 재판의 핵심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이것은 1심, 2심 판결에 이어, 정치사상의 자유에 대해 또 한 번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다.


정부가 이미 해산한 사노련을 4년째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모두 실업, 가난, 해고, 비정규직 제도 등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참상을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정부들은 선령 제한을 풀고, 세월호의 설계변경을 허용하며, 과적과 안전시설 미비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 정부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재해들을 방치하고 있다. 오직 유병언을 비롯해 한 줌 회장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이 정부들은 노동자 민중에 대한 더욱 거센 탄압을 통해 한줌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려 발악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재갈을 물리려고 집회 시위, 파업, 정치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물론이요, 국정원을 동원해 대선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구 사노련은 이에 대해 전면적으로 반대해왔다. 경제파탄의 책임을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기지 말 것을, 오히려 투기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강화에 여념이 없는 자본가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했고,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했다. 유가폭등 물가폭등으로 신음하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4대 정유사를 비롯한 재벌 대기업들의 영업비밀 폐지, 국유화 조치를 주장했다. 탐욕에 사로잡혀 있을 뿐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자본가들이 아니라, 노동자가 직접 일터를 통제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정부라는 암초를 제거하지 않는 한 노동자 민중의 삶에 희망은 없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나아가서 몇몇 회장들의 천문학적 이윤을 보호하기 위한 비인간적 경제체제가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 민중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경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정당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 생명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병언 일족의 이윤이 아니라 승객들과 선원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면, 세월호는 선령 연장 없이, 설계변경 없이 진즉 해체돼 이미 고철이 되었을 것이다. 선원들과 고박 노동자들이 세월호를 통제 감독할 수 있었다면 과적은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세월호 대학살극은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들의 영업비밀이 폐지되고, 박근혜 정부가 물러났다면, 또한 모든 정부 기구의 정보들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면 세월호 학살의 책임자들은 모두 정의의 심판대에 올려졌을 것이다.


사노련의 주장은 오늘날 경제파탄과 세월호 학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전면적으로 대변한 것일 뿐이다. 대법원 판결은 현 정부는 민주주의와 정의,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과 절대 양립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사노련 피고인들과 사노련 공동대책위는 자본가들과 억압적 정부에 맞선 투쟁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국가보안법을 들이밀어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박근혜 정부의 몸부림은 가망 없는 애처로운 짓일 뿐이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라”는 요구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현 정부의 실체가 분명하다면, 고통 받는 노동자 민중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만이 진실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치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권리도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굳건히 연대하고, 이들과 함께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인간다운 공동체를 향해 전진할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우리를 조금도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노련 회원들에 대한 유죄판결, 즉각 철회하라!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정치·사상의 자유 보장하라!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자유 쟁취하자!

 


노동자투쟁에 대한 탄압 분쇄하자!

 


세월호 진상위에 기소권과 수사권 보장하라!

 


2014년 8월 20일

 


사노련탄압 분쇄와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사노련사건 피고인 일동(박준선, 양준석, 양효식, 오민규, 오세철, 정원현, 최영익, 고 남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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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도체소녀> 크라우드 펀딩에 함께 해주세요.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4/08/02 20:33
  • 수정일
    2014/08/02 20:3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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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월드컵을 넘어 코뮤니즘으로! 코뮤니스트 4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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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I.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의 두 운동: 개량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투쟁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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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


우리는 레닌의 정연한 저작들을 이해함으로써 현재 유일하게 맑스주의에 충실한 좌익 공산주의에 적대적으로 그것을 인용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그 저작의 첫 페이지를 읽었는지 의심할 것이다. 그 저작은 ‘긴급한’ 필요에 의한 2차 세계대회의 테제의 이론적 합의안의 전조가 되었으며, 2판 부제는 맑즈주의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대중 담론 에세이(이 ‘대중 담론’의 부제는 저자의 겸손함으로 인해 고전적 제국주의로 부쳐왔다)이다.
첫째 장은 스탈린주의 추행의 위대한 업적들을 파괴하는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결과는 1914년의 훨씬 더 불명예스런 사회-애국주의자들이 한 짓보다 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국사회주의라는 비열한 '이론'이다. 그동안 스탈린-후르시쵸프주의 신문과 볼셰비키 공산당 역사에 대해 ‘수정된’ 단기과정은 그 이론이 레닌에 기초한다고 여전히 계속 떠들어댄다!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완전한 날조까지 해 왔다. 다음은 '단결! (Unitā)'의 1960년 8월 31일에 실린 글이다.

 

좌익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오직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지원이 있을 때에만 방어할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세계 제국주의에 맞서는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의 혁명을 고무시키는 것이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책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좌익에 대한 첫 번째 날조다. 좌익은 러시아 바깥의 혁명을 인터내셔널의 코뮤니스트 활동을 통해 고무시키길 바랐지, 러시아 국가의 전쟁을 통한 방법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발상은 초기 '스탈린주의'를 특징지으며, 좀 더 근대적인 ‘스탈린주의’나 악명높은 후르시쵸프주의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거대한 날조가 레닌의 이름으로 이뤄진다!

 

'이 국제 혁명을 '고무시키는' 이론은 맑스주의 - 맑스주의에 따르면 혁명의 발전은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의 성숙에 달려 있다 - 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레닌이 증명했다'고 새로운 책자는 지적한다. '사실 이는 레닌주의의 '평화 공존' 개념의 가정 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책자는 트로츠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레닌을 죽이려 했다는 음모와 같은 날조와 상관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여전히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자를 따르는 이들에게 맑스-레닌주의는 혁명의 잠재기에 필요한 이론임에 틀림없다.
첫 번째 장이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다뤘음을 상기해보자. 러시아 혁명의 성격이 보편적이며 국제적으로 중요하다는 레닌의 명백한 정의를 다시 한 번 읽은 이라면, 후르시쵸프나 톨리아티(Togliatti)와 같은 오늘날 레닌주의자들의 공식적인 테제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20차 러시아 당 대회 이후, 이 작자들이 각 국가들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국가 나름의 길'이 있으며, 따라서 그 길은 상황에 따라 러시아의 길과 다소 다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조작된 주장에 따르면, 대체 다른 모든 혁명 속에서 러시아 혁명의 어떤 성격이, 레닌의 용어로, 본질적이지 않은가? 그들은 그것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소비에트 체계, 혁명적 테러리즘, 그리고 왜 아니겠는가, 봉기 폭력들이 모두 러시아만의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들이란다. 의회(제헌의회)의 파괴 자체가 러시아 혁명의 특색이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길 기다렸던, 그리고 진정한 레닌과 원칙적인 측면에서 함께 열광하고 이의 없이 동의하며 기뻐 날뛰었던,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의 첫 번째 성취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레닌을 읽자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난 처음의 몇 달 동안(1917년 10월 25일 - 11월 7일), 후진적 러시아와 서구의 선진국 사이의 거대한 차이는 서구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우리의 혁명과 거의 비슷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게 했을 수 있다.'

 

이것이 대중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한 번 더 지적할 필요는 있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세계 혁명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는 서유럽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1920년, 레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 누구나 둘 다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반대의 경향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레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 아시아나 미국에서 혁명을 그리 기대하고 있지 않았지만, 러시아와 대서양 사이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이 역사적으로 항복하지 않으려면, 그런 조건이어야만 했다.


왜 서유럽 혁명의 발전이 러시아의 것과 다른 것처럼 보이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러시아는 후진적이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그러했으며, 그것은 봉건적 전제정치로부터 겨우 몇 달 전에 벗어났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그 혁명은 전제정치나 봉건주의를 몇 세기 전에 전복한, 프랑스나 영국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실제 차이와 함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국가들의 혁명이 더 명확하고, 단호하며, 압도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비교하여 보다 덜 화려하고, 더욱 불확실하고, 망설여지게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레닌 저작의 중심 가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당의 '남아있는 노동 인민'에 대한 헤게모니는 산업화된 서유럽에서 더욱 쉽고 완벽하리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역겨운 정도로는 제3인터내셔널의 시체로부터 일어난 것들 정도에만 비교되는 제2인터내셔널의 몇몇 속물들만이 그러한 우스꽝스런 일이 일어난 후에 프롤레타리아 테러, 독재, 의회의 파괴가 유럽적인 것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성격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의 기회주의자들은 붉은 러시아를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했고, 오늘날 더욱 역겨운 이들이 그들이 격찬하는 방식대로 모든 이들이 믿는 체하며 이를 반복한다.
만일 러시아 혁명이 진실된 선거 시스템의 설립 몇 달 후에 의회를 없앴다면, 한 세기동안 의회가 있었던 나라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오늘날 배신자들은 호색한의 얼굴을 하고 이러한 국가에서는 의회가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고,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은 재미로, 부주의하게, 또는 위대한 블라디미르가 보드카에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모든 혁명의 특징들

볼셰비키 혁명은 시작될 때에는 사회적 상황과 역사적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다양할 수 있지만, 그 본질적인 과정은 모든 지역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밝히기 위해 레닌은 글을 썼다. 그 과정이란 무엇인가? 이 저작 뿐만 아니라 가짜가 아닌 맑스-레닌주의적 저작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우리는 그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포기한 이들과 함께, 누구든 40년 동안의 사건들이 역사가 거꾸로 흘렀다고 믿는 이는 그럴 것이라고 이해된다. 1920년,

 

'우리는 이제 충분한 국제적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성격이 지역적이지도 않고, 특히 민족적이지도 않으며, 러시아만의 것이 아니라 국제적이라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앞의 책, p.512)

여기서 저자는 오해를 피하고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국제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혁명의 몇몇 특징 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한 특징과 부차적인 특징이 모든 나라들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의미에서 국제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국제적인 타당성‘(이 단어는 '가치'라는 말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혁명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혁명의 어떤 근본적인 특징들이 그런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앞의 책, 512쪽)

 

확실히 그렇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정확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좌익의 테제였다. 레닌은 그것을 직후에 설명한다. 하지만 왜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사건들이 세계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몇몇이 그러한지, 맑스주의 혁명 강령이 되는지(또는 그렇게 승인되는지) 지적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제국 황실의 숙청은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하며, 여전히 그에 대한 소음이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어디서든 불가피하게 반복되는' 특징이 아니다. 황실이 없는 나라들에서 그것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짜르의 후손들은 왕조의 계승권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런 계승권이 없는 곳에서 살해는 무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바깥의 모든 혁명에서 엄밀한 의미에서 유의미한 특징들은 전부가 아니라 오직 몇몇이 될 것이다. 어떤 것들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것들이 그러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세심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가장 중요한 구절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진실을 과장하고, 우리 혁명의 특정 근본적인 특징들을 넘어서까지 과장하는 것은 당연히 엄청난 오류일 것이다. 선진국 중 적어도 한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 직후 뚜렷한 변화, 즉 러시아가 더 이상 혁명의 모델이길 멈추고 (사회주의적 '소비에트' 안에서) 다시 후진국이 될 것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놓치는 것 역시 오류가 될 것이다.‘(앞의 책, 512쪽)

 

혁명이 곧 유럽으로 전파될 것이다 : 이것이 레닌주의의 중심 사상이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의 승리 이후, 러시아는 경제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적 경로에서 독일식 구조가 저 뒤에 남겨놓은 후진국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레닌의 사상은 소비에트 독일, 또는 소비에트 유럽의 옆에서 사회주의 러시아가 낡은 경제로부터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그로부터 비록 국가의 형태를 띄더라도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아이디어로 완성된다.
그런 견해는 레닌 이후 분별없이 유행했던 개념, 한 나라가 모델이 되는, 주도적인 나라의 사회주의라는 공허한 개념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모방할 만한 모델이라는 이론과 러시아가 혁명의 후방에 있다는 이론 사이에는 사회주의를 향한 변질된 국가의 길과 위에서 언급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국제적인 규모로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반복된다'는 강한 주장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과 같은 모순이 있다 : 러시아 모델 이론이 바로 오늘날 모방적인 공존(emulative coexistence)이라는 미신의 첫 번째 토대였다.
1920년 러시아로 되돌아가 보면, 약속된 땅에 대한 묘사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프롤레타리아 주인들 앞에서, 우리는 위대한 레닌의 겸손한 학생들로서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길과 그것이 작동하는 바를 보았다는 믿음, 마치 그것이 아이들의 장난감이나 일종의 스푸트니크과 같이 발명되고, 만들어진 무언가인 것처럼 여기는 믿음과 단호하게 싸웠다.
사회주의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맑스주의자로서, 빛나는 인간의 메커니즘이 아직 그 구실을 하기 시작하기 전인 전세계와 러시아를 위해 사회주의가 어떤 길이 되어야 할지 알았고, 그것을 확신했다. 행진하는 혁명군은 흘륭했고, 굳건했으며 고통스러웠지만, 공산주의의 즐거움을 향한 길로 인정되었다. 모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는, 그 자신과 러시아의 혁명군에게 자리를 비켜줘야만 했고, 그들은 오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이 대륙의 모든 부르주아 국가들을 전복시킬 수만 있었다면.
오늘날의 사악한 공존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반맑스주의자와 반레닌주의자의 입장은 모델 이론에 입각해 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10월 혁명에 대해 언급할 때 그러한 엄청난 오류를 다음과 같이 의인화했다. : '자본'에 반대하는 혁명.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 만약 승리했다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하다. 경제적 결정주의와 유물론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대신 자발적 관념론이 진실이고 빛나는 것이다. 레닌은 역사를 창조하고,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모범이 되는 모델을 창조할 수 있었던, 따라서 대망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낸 신화의 영웅이 된다. 순례자들은 예언자의 망토 끝자락에 키스하는 수 밖에 없다. 모델을 심사숙고하고 그 모습과 비밀을 기다리고 있는 서구의 대중들에게 이야기해주면, 그들은 그것을 흉내낸다.
그러나 레닌은 메시아인 체 하지 않고 그 곳에 있다. 그래서 그가 더 겸손하며, 위대하다. 그는 맑스주의 유물론의 모든 측면에 대해 언급하고,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대해 그의 변증법으로 가르치며, 그 모델을 비웃는다. 가엽게도 그 모델이 구식이 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고, 그는 그리 되리란 것을 믿고 바란다.
레닌을 자본의 처형자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숙이고 빛을 향해 눈을 뜰 것이다. 그람시는 그의 초라한 육체적 힘이 그의 관점의 날카로움을 유지시켜 주는 한 실제로 그러했다.
오늘날 블라디미르의 푸르게 빛나는 두 눈은 죽었지만, 그의 전형적인, 가차없는 논쟁의 힘과 전 세계가 기적적인 모방 덕에 공산주의로 변할 것이라는 몰상식한 해설을 혼동하는 것으로 충분한 어리석은 모방모델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많은 것들 중에 우리가 남긴 것이다.

 

 

러시아가 가르쳐 준 것

 

그러므로 레닌주의의 견해에서 러시아 혁명은 세계에 사회주의의 구조를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다른, 더욱 위대한 국제적인 기능, 혼자만의 수단과 군대로 모든 곳에 있는 자본과 그 패거리들의 권력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능을 한다.
그러한 가르침은 교의의 중요한 행간에 이미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최초로 증명된 것이다.
비록 그 시기에는 오늘날보다 상업 자본주의와 그것을 모방하는 가증스런 서구의 진정한 낙인에 의한 오염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러시아식 뼈대의 사진을 찍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비유가 허용된다면, 혁명적 사건들을 영상으로 담아, 그로부터 소위 결정적인 순서로, 모든 유럽에 보편적으로 타당하도록 뽑아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시기의 압도적인 열정에 활기없는 것이 아닌, 역동적인 모델이 등장하는 것이다. 넌더리나는 조리법이 아니라, 사회적 부활의 분출하는 불꽃으로서.

그러므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지금, 모든(이것은 레닌의 강조다, 악당들아!) 나라에게 그들의 가까운, 피치못할 미래에 대한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밝히는 것은 러시아 모델이다'(앞의 책, 512쪽)

 

우리가 너무 긴 호흡으로 이야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모델은 현재의 재생산에 대한 현재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오히려 필연적인 미래에 봉사할 과거로부터의 교훈으로 의미를 가진다.
비록 인간은 순진하게 모방하는 동물이고, 1960년의 인간은 이에 대한 안타까운 증거이지만, 1920년,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도약하는 그러한 권력의 돌진 뿐만 아니라 위대한 혁명 이론의 무오류성에 대한 거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열정적이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대지의 선진 노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혁명적 계급 본능으로 이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파악해 왔다.'(앞의 책, 512쪽)

 

문화도 아니고, 부르주아 학파의 가르침을 따라하는 것도 아닌, 본능!

 

레닌은 우리에게 그의 뛰어난 연구의 과정에서 보편적인 혁명 전선의 다양한 필수불가결한 특징들에 대해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비에트 권력, 볼셰비키 이론과 전술의 근본적인 지점들의 국제적인 '중요성'이 있다.'(앞의 책 512쪽)'

 

여기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의 서론은 논쟁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소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시국적인 발언을 포함하여 가장 시급한 중요성을 살려 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단어들은 레닌이 약속한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우리는 이를 항상 유의미한, 이라고 이야기한다) 특징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화한 것을 주석으로 달 수 있도록 해 준다.
그것들은 '주요한' 것들이며, 레닌은 그것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볼셰비키의 이론과 전술이다.
국제적인 반향과 함께 영광스런 볼셰비키 공산당을 특징짓는 것은 그 교의에 있는 원칙의 체계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론이 원칙의 체계에 묶여있는 반면, 전술은 자유롭고, 불편부당하다고 이야기할 권리는 없다. 모스크바에서의 몇몇 대회에서 우리 좌익이 주장한 것은 레닌 그 자신이 섰던 입장 위에 있다 : 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칙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게다가 그 원칙들은 모든 나라에,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에 타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1922년 로마 테제가 그 증거다.
이 문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자 지도자들과 카우츠키, 바우어, 아들러 등의 중도파를 비난하는데, 그들은 저속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은 아니었을지라도, ‘반동으로 증명된 이들’과 배신자들에게 볼셰비키 당이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준 이론적이고 전술적인 원칙 체계들의 보편적인 타당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레닌은 가공의 민주주의, 평화롭고 유혈사태에 이르지 않는(우리는 여기에 '모방하는'을 덧붙일 권리가 있다) 세계 혁명의 특징들을 러시아 혁명의 특징들과 위선적으로 대비시키는 (바우어의) 팜플렛, 소위 '세계 혁명'의 현학, 야비함, 수치스러움에 뺨을 때린다. 사실 모든 혁명에 속한 것임에 틀림없는 그러한 특징과 모든 것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아는 1920년의 상황에서, 서유럽에서의 혁명 전투는 주어졌다.
레닌은 중도주의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 후, 카우츠키를 지적하며 오래 전 1902년 그가 맑스주의자였을 때 쓴 글 '슬라브 민족과 혁명'을 보여주고 싶었다. 거기서 카우츠키는 혁명의 중심이 19세기의 초반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 영국으로, 독일로 이동한 이후, 유럽 혁명의 지도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넘어갔을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의 머지않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저술했던 레닌은 카우츠키에게 외친다, '1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메아리 친다, 58년 전, 카우츠키는 얼마나 잘 썼던가!
슬라브 프롤레타리아의 엄청나게 기억할만한 착취 위에, 그런 얼음 비석 위로, 폐쇄된 얼음 껍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파시즘, 공존, 데탕트(detente),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길!
레닌이 국제 연맹을 자본의 요새라고 그 혐오스러움을 드러낸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레닌을 져버리고 국제연합의 그야말로 돈독이 오른 녹색 테이블 위에 그러한 비문을 쓴다.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불꽃을 후대에 넘겨주는 근대의 올림픽을 벌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 죽은 카우츠키와 언제나 빛나는 레닌은 영국이나 프랑스로부터 독일로, 러시아로 옮겨가는 불꽃을 보았다. 오늘날 러시아는 영광으로 빛나던 순간 이후 땅에 떨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불꽃이 다시 타오를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의 서두에 묘사했던 것처럼, 수치스러운 미국과 타락한 러시아 모두의 경쟁적인 억압에 맞서는 부활하는 서유럽을 생각한다. 양쪽 모두의 악의적인 외교관들이 포악한 독일의 문제를 외설스럽게 조작할 동안, (비록 장기적으로라고 할지라도) 그런 나라들을 통해 그 역사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저항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든 적이 되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백인이 힘을 잃고, 그들의 황인 흑인 형제들이 포효하며 행진하는 과정에서 반세기는 회복할 것이다.

 

 

독재와 실리주의자들

 

우리는 레닌의 글을 소개하는 이 장에서 칼 카우츠키, 오토 바우어, 프리드리히 아들러 등에 대한 파괴적인 공격 속에, 레닌은 언제나 그런 인물들, 중도주의자, 독립주의자(independents), 제 2.5 인터내셔널 주의자들처럼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에 있는 이들에 반대하여 가장 강력한 일격을 날려왔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만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을 우익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또는 사회애국주의자들, 부르주아지의 공개된 동맹들(open allies)과 경찰들, 이름하여 샤이데만, 노스케, 밴데발트, 맥도널드, 등등보다 전쟁과, 전후에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들로 훨씬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사실 카우츠키는 독일에서 사회-사이비 애국주의 의회의 주류에 저항하는 반대파를 만든 첫 번째 인물이었다. (우리는 의회주의의 쟁점에 대해, 그것을 다뤄야 할 때, 칼 리프크네히트 스스로 1914년 8월 14일 당의 규율에 고개를 숙인 것을 다룰 것이다. 그것은 의회 그룹의 규율에 따라, 슬프게도 카이저 정부의 전쟁 공채에 찬성하는 투표를 조용히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바우어와 과거의 맑스주의자 빅터의 아들 프리츠 아들러가 소위 오스트리아-맑스주의(마치 민족적 맑스주의가 있는 것처럼!)의 지도자들이었다. 빈에서 프리츠는 용감하게도 전쟁에 반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이론가로서 - 이런 평판의 대부분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는데 - 맑스주의와 독재는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볼셰비즘과 레닌주의를 건전한 사회주의의 위반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에 따르면, 맑스주의자는 자유, 민주적 합의, 대중의 지지, 다수 '시민'의 자유 민주주의적 의견의 자유라는 규칙을 깨지 않을 의무가 있다. 그런 그들이야말로 맑스에 대한 가장 수치스러운 왜곡을 만든 이들이다.
레닌은 불과 칼로 그들에게 덤벼들며, 우리는 생사를 건 역사적 전투의 목격자이자 투사로서, 그러한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날 그런 진정한,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 우리의 영원한 적대자들이 파라부르주아(parabourgeois)라고 형용사 '구체적인'을 붙여 부를 - 행동은, 그 스타일과 교훈이라는 점 모두에서, 그리고 탁월한 레닌의 논쟁이 기록된 형식 그 자체가 의미심장하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역사 앞에서의 그의 엄청난 책임 때문에, 이 극단적으로 비학자적인 대중의 지도자는, 이제 막 최근의 반제정 혁명으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에 직면하여, 변절자들이 칠칠지못한 비난을 자신에게 하도록 두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의 미성숙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레닌은 쓰고 있다. : 우리는 국민투표와 숫자로 표현된 합의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부르주아 시대의 노예제와 노예근성의 병리적 잔여물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젊은 이들은, 그리고 어떤 오염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은 (테제나 이론서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도) 규범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정치적으로 말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을 흉포하게 공격하라! 그렇게 하면 너는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 편에서 우리는 레닌을, 다시말해 수백만의 인물들과 함께 실제 전투 속에 있었던 그 시절의 혁명가들의 보기로 들 수 있고, 다른 한 편에서 멍청이들, 레닌의 저작과 활동에 대해 파렴치한 왜곡을 이용했던 바보들의 가련하고 비참한 종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블록 안에, 전선에, 가공의 적의 오른편에서 고립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배신자들이 했던 짓의 반복일 뿐인 반대의 규범을 따랐다. 기회주의 역병의 세 번째 역사적 파동의 승리자는 우익, 중도 사회주의자와 함께 연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전시를 훨씬 넘어서서 평화의 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카톨릭와 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사회적 입장에서, 오염된 프롤레타리아와의 연합 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와의 연합, 나아가 중간 계급과의 공공연한 협력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론적 질문은 실질적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레닌은 그들이 맑스를 잘못 해석한 교수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에 단지 기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있다. 이 악당들은 서쪽의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는 군대가 볼셰비키 권력과 혁명 전부를 유혈낭자하게 소탕하려고 돌진해 올 때, 백군과 연대하여 영광스런 레닌주의 전위에 의해 저질러진 '독재'와 '테러'의 범죄를 벌하는, 그들의 승리를 바랐다. 우리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승리가 오직 역사의 '필연적인 것으로 예견할 수 있을' 방법으로 성취될 때, 그런 전선을 좋아하는 쓰레기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배신당한다는 것을 배웠다.
가장 호전적인 반볼셰비키, 카우츠키가, 러시아에서는 그 응답이 총살이었겠지만, 위와 같이 썼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배신자 카우츠키'를 썼고, 트로츠키는 경외로운 '트로츠키주의와 공산주의'를 썼다.
카우츠키와 그 동료들은 오늘날 – 다른 나라에서는 이제 용서된 - 독재와 테러가 '1917년 러시아의 독특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그들은 레닌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문장으로 발음했던 것처럼 자유주의-맑스주의자(liberal-marxists)들이고, 맑스주의자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몽땅 자유주의와 부르주아지로 간 이들이 아닌가?

 

 

중상모략은 언제나 똑같다

 

오늘날 바우어, 아들어의 이름은 그들의 볼셰비즘 비판을 기억하기 위해, 동시에 '독재와 테러 없는'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이론에 대해, 패배를 선언하기 위해 기록되고 있다(Rome의 1960년 9월 2일, ‘Messagero’를 보라) ; 실제로 그것은 옳다 (바로 옆에 앉아서 보는 것보다 반대편 극단에서 보면 더 잘 보이는 것처럼, 이런 표현을 해도 된다면, 의회의 여흥 정도의 가치가 있는, 언제나 똑같은 옛날 이야기다.)
폴란드인 도이(Deutcher)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이후의 러시아(Russia after Stalin)'란 제목으로 책을 썼다. 이 최신 저자의 견해는 현대 러시아는, 무엇이라 부르든, 자유주의적인, 또는 사회민주주의적인 형태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미국인, '러시아주의자인', 크론(Croan)은 도이의 테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토 바우어의 1931년 책, '세계 전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테제와 같은 것이라고 논쟁했다.
만약 40년이 지난 후에도 레닌이 영원히 제거하려 했던, 오토 바우어와 같은, 레닌주의의 자칭 문하생들과 더러운 위조자들이 우리의 길을 막는다면?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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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헤르만 호르터를 추모하며

H.칸느 메이예르

 

 

 

헤르만 호르터는 1927년 9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스위스로 갔다. 하지만 생의 최후가 가까워졌음을 느꼈고, 그래서 스위스에서 묵는 것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브뤼셀에서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호텔에서 같은 날 밤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삶처럼 용감하고 참되었다. 그는 10시간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무덤에 대고 말할 리 없는 미출판된 저작과 쟁점이 되는 엄격한 지침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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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고 이른바 '사회주의' 운동이 모든 국가에서 민족 부르주아지의 명령과 처분에 따랐을 때, 헤르만 호르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가 계급에게 굴복하게 했던 모든 '이론가'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리고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붕괴 원인을 분석했다.


헤르만 호르터는 저명한 네덜란드 문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1864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그는 고전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고 고등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그는 그의 시 '5월'로 문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시는 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언어로 자연을 찬미하는 시 였다. 그는 전통을 깨고 규칙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실제로 느꼈던 감정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썼다. 문단 보다 폭풍 같은 열정적인 충동과 시는 그러한 종류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 최상의 것으로 인정받았다. 호르터 주위에 한 무리의 젊은 시인들이 모여들었고 '80년대의 운동'으로 알려진 문학 혁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호르터는 곧 이 운동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으며 깊이도 부족했다. 그는 원인을 찾았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강력한 발전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고대문명을 다시 공부했다. 그 결과는 “ 80년대 운동의 비판” 이라는 수필로 표현되었다.


철학을 공부하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번역했으며, 그리고 칸트에 열중했다. 그런 다음 “자본”을 읽는다. 그는 원하는 것을 맑스에게서 발견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깊이 공부했다.

 

1890년에 호르터는 네덜란드에서 사회민주노동당(S.D.A.P)에 가입했다. 처음에 이 당은 그의 입당을 대단히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당의 비위를 맞추기에는 너무 유능하고 똑똑했다. 순식간에 유럽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스주의에 관해 가장 위대한 이론가 가운데 한 명으로, 그리고 네덜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가 중의 한 명으로 부각되었다. 사회민주노동당 조직의, Het Volk는 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멋진 꿈, 붙잡을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평했다. Het Volk는 호르터가 냉철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라고 인정했지만 그가 당에 지장을 준다고 덧붙였다. 이는 호르터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으로 부패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인, 출세 제일주의(careerism)라는 사회주의를 그가 반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의원에게 성스럽거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조합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대중을 기꺼이 살해할 의향이 있었다.

 

계급투쟁을 가라앉히는 경향, 그들을 개량주의자로 만드는 경향은 S·D·A·P에서 더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이해와 비판적 무기인 맑스주의로 무장한 호르터는 S·D·A·P의 자본주의적 타협 행위와 배신을 폭로했다. 투쟁은 날카롭고 격렬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영향력 있는 맑스주의 그룹이 S·D·A·P 내에 만들어졌다. 이 그룹의 대부분은 1909년에 축출되었고 사회민주당(S·D·P)이라는 이름으로 맑스주의 당을 결성했다. 호르터는 SDP에 가입했다.

 

그해 SDP는 호르터의 저작인 맑스주의와 수정주의를 발행했다. 이 저작은 모든 수정주의적 활동의 반(反)사회주의적 특징을 폭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SDP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하는 일을 훌륭하게 했다. 그런다음 지도부 권력에 대한 변화가 와서 원즌쿱과 라벤스테이즌은 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즉시 기회주의로 변질되었다. 조직화된 기구로서, 네덜란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은 “프로이센 주의”에 많이 경도 되었으며 “연합한”제국주의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노동자들이 투표장에서 투표하기를 원했던 Winjnkoop과 Ravensteijn은 의회에서 '연합한 이유'를 옹호했다. '제국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세계 전쟁'이라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을 저 버릴수 없다는 것이 호르터의 그 이유였다. 호르터는 제국주의 연합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에 대한 문제는 동일하게 남았다. 모든 제국주의는 투쟁해서 파괴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전쟁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제국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었다 : 그것은 세계 혁명이라는 방법 이었다. 노동자는 사회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도록 해야만 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호르터는 열렬한 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착실한 맑스주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이중적인 성격을 보지 못했다. 승리를 위해서 혁명은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퇴각하거나 없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세력들은 세계 혁명을 더 잘 실현시키기 위해서 힘을 쏟아 부었다.

 

친구이자 이제껏 등한시된 또 한 명의 저명한 네덜란드 맑스주의자인 안톤 판네쿡과 함께, 호르터는 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분석했다. 그들은 이 혁명이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즉, 자본주의적 혁명이었는 것을 보여준다. 농민들은 소규모 농지와 사유 재산 및 토지의 분배를 열망했다. 사회주의에 대해 동조하는 1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1억 명 이상의 농민들이 있었다. 만일 세계 혁명이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원하기 위해서 왔다면, 천 만명은 세계를 장악하고 해방시키는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혁명을 돕지 않는다면,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기가 시작된 러시아에서 존재하는 계급 조건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러시아가 세계 혁명의 중심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강력한 동맹국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 투쟁에 적대하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동맹을 맺을 것이다.

호르터는 비합법적으로 1921년 제3인터내셔널 제3차 회의에 K.A.P.D의 대의원이며 이러한 관점의 방어자로서 참석했다. 레닌은 이미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선택하였고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라는 저작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끝장 낼려고 하는 대회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되었으며, 그리고 자본주의 정치로의 가교는 통일전선이라는 슬로건에 기반을 두었다.

 

호르터는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통해 레닌의 소아병(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하여 날카롭게 반박했다. 거장다운 묘사로, 그는 레닌의 전술이 어떻게 하여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세계 투쟁을 붕괴시키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 그리고 세계 혁명에 대해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억압을 강요했음이 틀림없다. 레닌주의는 투쟁을 연장시키고 노동자들의 고통과 고난을 가중시켰다.

 

호르터는 레닌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존재를 표현! 하는 것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당의 선전으로서도 청산 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즉, 레닌의 자본주의 방식에 반대하는, 반의회주의, 전세계 의회와 노동조합주의의 후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공산당의 점진적인 감소와 제거가모든 지역에 '합법' 정당을 존재하게 한다는 레닌의 좌익 전술을 발전시켰다. 호르터는 좌익의 역사 유물론적 토대와 반(反)의회주의 전술의 개요를 서술했다. 그는 모든 계급 운동의 중심에 직장 위원회를 배치하는 전술은 이론가들에 의해 '발견' 혹은 '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매 시기는 일반 노동자들이 그 자신의 힘을 발전시키는 것에 따르는 그 자신의 법칙이 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의회와 노동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국가에서,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에 반대해서 건설하고 발전시켰던 이론 조직을 발견했다. 그래서 직장 위원회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그 통풍구를 발견했던 형태로 왔다. 좌익의 전술들은 프롤레타리아 그 자신에 의해 발전했다.

 

호르터는 이러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 방식의 원인을 분석하고 설명했으며, 그의 '공개서한' 에서 그것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필연적인 표현! 이라고 했다.


호르터는 레닌이 서구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서구 유럽의 노동자들에 대해 적용하려고 한 전술은 실수라고 생각했다. 서구 사회가 혼돈 상태에 빠지고 동구 사회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이 지점에서 하루-이틀 추측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제1, 제2, 그리고 제3 인터내서널은 끝났다. 제4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아나키즘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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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터와 판네쿡은 좌익의 이론적 서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유일한 세력이고, 계급의식과 집권의식을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활동을 변질 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계급사회의 안전판으로서 파괴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은 산업 분야에서 의회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좌익은 21개 조항을 제외하지 않았으나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호르터는 제3인터내셔널의 와해는 불가피하다고 보았으며, 그의 앞에서 러시아의 후퇴에 따라 야기되었던 재앙 이후, 마침내 부활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공산주의를 보았다.

 

호르터가 사회주의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이슈가 된 시집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닌 계급투쟁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그의 시 가운데 한 편에서 말하듯이, 그는 '자연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다음에 그는 팬이라 불리는 500여 페이지 분량의 위대한 시를 썼다. 그는 1907년부터 1916년까지 그 시를 쓰는데 9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은 노동운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서, 그는 경이로운 것으로서, 인류 정신의 압축, 세대의 성장, 혁명과 공공복지의 모체로서 공장을 본다.

 

호르터의 미 출판된 작품 가운데, 'Der Aredarraad'(소비에트 위원회)라는 한 편의 시가 있다. 호르터는 공산주의를 현재로 가져와서 혁명의 중심인 직장 위원회를 묘사한다. 그는 계급인 노동자들에 대해 모든 사랑을 담아서 이 시를 썼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배계급, 거짓된 문화의 세계는 어떻게 이 위대한 시가' 소비에트 위원회'라는 주제를 중심에 둘 수 있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반 의회주의자인 케네 메이에르에 의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쓰여진 기사로부터 기 알드레드가 요약하고 수정함)
알드레드에 이한 반-의회주의 개척자로 부터


옮긴이|김명수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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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상)

성승욱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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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우리는 작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출범하면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하며1)


“지난 수십 년간 사민주의(의회주의), 민족주의, 조합주의 등 노동자계급 내부의 장애물들은 노동자계급 고유의 무기인 단결력과 전투성, 그리고 계급투쟁에서의 창발성을 무력화시켰다. 자본의 공격은 강화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와 자본가,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들에 의해 여전히 여러 장벽에 막혀있다. (생략)

우리는 낡은 조합주의, 의회주의 세력 운동의 쇠락 속에서도 새롭게 소생하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전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분출을 촉진하는 아래로부터 실천을 제안한다."

1) 제도권 노조운동을 넘어서는 자립적 노동자운동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노조/현장운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만들어내고 관료화된 노조운동을 넘어서야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원. 비조합원을 구분치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 모두를 평의회적으로 포괄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투쟁과 실업자, 빈민, 청년, 소수자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제안한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조직형식은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에 기반해야 한다. 이것은 투쟁하는 주체들에 의해 직접 선출/소환 가능한 대중총회, 파업/투쟁위원회, 노동자평의회의 형식과 같아야 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과 노동자 국제주의에 기반한 직접행동만이 계급투쟁의 확산과 자기 조직화를 보장해줄 수 있다.

3) 현재의 자본주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분출하는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운동의 주체와 최종목표가 불분명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기해방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밝혀주는 공산주의를 전망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생략)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민주의, 조합주의, 중도주의 정치세력들이 아닌,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전망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직접행동이 만나야 한다. (생략)

코뮤니스트 정치조직과 계급조직(노동자평의회)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코뮤니스트 직접 정치운동을 실천하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핵심은 낡은 노동조합운동과 사민주의 정치를 넘어선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코뮤니스트 정치가 직접 만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경로와 입장을 통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과 실천을 주장해왔다. 이글은 노동조합 문제에 대한 보다 실천적인 접근을 위해 우리와 원칙에서 가장 근접해있는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의 입장을 소개, 평가하여 한국에서도 제대로 된 논쟁과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는데 기여하기 위함이다.

 

이글은 노동조합의 탄생에서부터 1914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조합의 변화, 68혁명 이후 현재까지 노동조합의 역할과 계급투쟁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실천적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에서는 노동조합의 탄생에서 68혁명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글의 결론 일부를 미리 밝히자면, 코뮤니스트들이 노동조합과 노동자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개입하는 원칙을 소개하고 정립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넘어선 운동, 즉 ‘반노동조합 노선’으로 표현할 수 있는 코뮤니스트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과거 코민테른의 노동조합 개입방식인 전달 벨트(노동조합이 당과 계급 사이의 전달 벨트 역할) 전술은 폐기되어야 하며,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을 지도장악할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장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직접 만나고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의 자기 조직화를 위해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운동에 개입한다.

 

코뮤니스트는 임금 투쟁이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어떠한 투쟁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무관하다며 기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코뮤니스트들은 어떻게 노동조합 기구가 항상 이 투쟁들을 궤도 이탈시키고 통제하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인정하는 범위를 넘어서 비공인 투쟁을 시도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생존조건의 지속적인 악화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조합의 외부 또는 노동조합에 대항한 비공인 파업의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투쟁은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서 선출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투쟁위원으로 구성된 파업(투쟁)위원회에 의해 유지 확장된다.

 

코뮤니스트는 계급투쟁과 노동자운동에 개입함에서 공장(작업장)뿐만이 아니라, 지역에서도 국제주의/코뮤니스트 노동자 그룹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동자 정치 그룹은 각각의 위치/ 장소/ 지역에서 코뮤니스트와 동조자로 구성된다.

 

현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외부에서 그들에 적대하여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코뮤니스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조직화를 위하여 반(反)노동조합 노선"을 고수해야 한다. 노동자총회, 투쟁위원회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정치적 틀을 항상 제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혁명적 상황의 성숙은, 반(反)자본주의적 투쟁 기구들의 프롤레타리아 권력기구들로 발전하는 능력과 함께, 노동자 평의회의 특징을 취하는 그러한 조직들의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에 따라 명확히 나타날 것이다. 반(反)자본주의와 혁명적 방향은 코뮤니스트노동자들의 활동적이고 조직화된 개입 없이 자발적으로 행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공세적 시기에 어떻게 투쟁 기구들의 개별적 경험들이 혁명 전략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노동조합의 국가(자본) 기구화 진행이 아직 온전하지 않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탄압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반(反)노동조합 노선은 노동조합 안의 노동자를 포기하거나, 반(反)노조정서에 역이용 당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는 노동조합을 개조하거나 장악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에 비하면 기우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아직 새로운 운동의 출현과 그 주체가 준비되어있지 않을 뿐이다.


1. 노동조합의 탄생과 성격의 변화

 

노동조합은 19세기, 일상생활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목적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심각한 갈등의 국면에서 탄생했으며, 조직과 계급의 이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 자본주의 최대의 번영 시기에, 노동 계급은 종종 격렬하고 처참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지속적인 조합조직을 건설했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이 기관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개혁과 투쟁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했다.”2)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노동조합은 중요한 투쟁을 해온 노동계급 조직이었고 그들의 계급에 충성을 다 하는 투사들로 구성되었다.”3)


비록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고 시도하지 않는 체제 내의 조직이었을지라도 계급의 진정한 기관이었다.

 

“여러모로, 이러한 노동조합은, 과도한 관료주의 없이 노동자에 의해 창출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달랐다. 비록 이러한 노동조합이 계급의 제한된 도구였다는 것 그리고 모든 혁명가들에 의해 이 부분(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방어하기 위한 단순한 조직이었다)이 인식되었을지라도 4)


“노동계급의 방어적인 조직으로써 처음 나타났던 노조들은 인간 이하의 노동환경에 직면했고, 오래된 친목단체나 회사의 확장으로서의 산업적 측면에서 그들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노조는 그들의 열망에 기초해서 개량주의 수준까지도 도달하지 않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이며 경제적인 분석을 이용하자면, 개량주의는 혁명적인 행동에 대한 요구 없이 법적인 발전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조합들에게는 발전이냐 혁명이냐에 대한 물음은 전혀 없었으며 더군다나 사회주의에 대한 물음조차 없었다. 노조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좀 더 참을만하고 덜 굴욕적인 노동환경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해왔듯이, 자본에 좀 더 적합한 노동환경을 얻으려는 시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노동조합들은, 혁명가가 아니라면, 적어도 노동계급의식을 가지며 오늘날 노동조합들의 왜곡된 계급의식, 타락과는 대비되는 건전한 구성을 가진 조직이었다.”5)


이러한 초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상승기’ 또는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라는 경제적 조건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현재의 노동조합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이 체제로부터 용인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마찬가지로 계급의 결합에서 하나의 중심이 되었고, 이 속에서 계급의 연대와 계급의식이 발전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것으로부터 "공산주의의 학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개입활동을 했다.”6)

 

“이러한 노동조합은 그것의 역사적인 시기가 오늘날의 노동조합과는 완전히 다르게 탄생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상승 국면 동안에 탄생했으며, “자유경쟁” 시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 두 가지 측면 - 상승과 자유경쟁의 단계 - 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1. 비록 자본가 계급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그 구조는 계급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그러한 개선(생활조건, 노동조건) 비용을 큰 어려움이 없이 흡수할 만큼의 충분한 이윤을 가졌다.

2.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이미 나타났으나 아직 제국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생산 및 금융 독점은 형성되지 않았다.

또 다른 본질적인 측면 : 이러한 역사적 국면 동안 부르주아지, 국가는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합법화시키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분명히 중재 조직이지만, 부르주아 국가는 이 중재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조합/노동자와 부르주아지 간의 충돌을 수반할 뿐이었다. 7)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또는 자본주의 쇠퇴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노동조합의 특징과 역할은 변했다.

 

“제국주의 시대인 20세기에 변한 것은 무엇이었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자본주의는 거대한 제조업 및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금융 센터를 형성하는, 제국주의 특징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국제경쟁이라는 맥락에서, 국가의 부르주아지는 노동조합을 합법적으로 인정(이 단계는 19세기 말에 시작했다.)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임금을 관리하기 위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중재자로서 노동조합을 인정했다 (국제적인 수준의 '국민 국가제도’에 대한 자본의 재평가와 경쟁의 요구에 따라). 수년간 노동조합은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발전은 피할 수 없는, 노동조합이라는 본질의 결과였다 : - 노동자와 자본가 - 라는 두 당사자 사이의 조정을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심지어 지배계급과 국가 양쪽에서 승인, 합법성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는 19세기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충돌은 주로 지역적이고 제한적인 특징을 띤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구조 변화 (자유경쟁의 소멸), 생산 및 금융 독점의 보급, 국제 경쟁은 민족국가의 수준으로 충돌의 규모를 상승시키고 국가고용주협회는 노동과 자본 간의 경제적 충돌에 점점 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수년간, 노동조합은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의 그들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만약 노동조합에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이 남아 있다면, 변화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방식이다.”8)


“20세기 초에 이르러 노동조합의 성격은 변화했다. 사회 전반으로 가치법칙이 확장되면서 노동조합과 다른 중요한 노동계급 조직들은 자본주의 관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자 대중정당들 역시 이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태의 예 중 하나는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노동조합이 지지를 보냈다는 것이다.”9)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진입하면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자계급에게 개혁 및 생존조건의 개선을 용인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노동조합이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 옹호라는 그것의 근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이후, 그리고 임금노동의 폐지와 그와 더불어 노동조합의 소멸이 주요 사안이 되어버린 하나의 역사적인 상황에 직면한 이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옹호자로,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대리자로 되어버렸다. 이것이 노동조합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새로운 쇠퇴기에 유일한 생존기회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전개는 쇠퇴기 이전의 노동조합의 관료주의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생활의 모든 구조들을 자신 속에 흡입해 버리려는 국가의 가차 없는 경향을 통해 조장되었다.”10)

 

2. 노동조합의 역사적 변화와 계급과의 대립

 

그렇다면 노동조합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경과하면서 어떻게 성격을 바꾸었으며, 노동자계급과 무엇으로 대립하게 되었는가?

 

노동조합주의

우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해당되는 노동조합주의는 오늘날 새로운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초기부터 존재했다. 노동조합주의는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활동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 양식으로 교체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에서의 좋은 생활 조건을 보장하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주의의 특징은 혁명성이 아니라 보수성이다.

 

“노동조합주의는 처음에 산업 자본주의가 최초로 발전한 영국에서 등장했다. 그것이 다른 나라들로 널리 퍼진 후에, 자본주의적 산업에 자연스럽게 경쟁자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특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 초기에 풍부한 미개척지는 마을에서 노동자 부족 현상과 상대적인 고임금 및 좋은 조건들을 만들었다. 미국 노동 총동맹은 나라에서 권력을 갖게 되었고, 점점 그 조합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생활 표준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다.

 

명백히 그러한 조건들하에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는 생각이 노동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날 리는 없다.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충분하고, 꽤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현재 존재하는 질서에 적대적인, 분할된 계급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가능한 모든 것들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대부분이 유럽에서 건너온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 공간이 있었다. 이런 급속한 농업 인구의 증가로 인해, 에너지와 행운이 함께한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기능공, 소상인, 심지어 부유한 자본가가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급속히 성장하는 산업이 필요했다. 거기에서 진정한 자본주의적 정신이 노동계급에게 널리 유포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경우가 발생했다. 여기서는 영국이 세계의 상업과 대산업을 독점했고, 외국 시장에서 경쟁자가 없었으며, 영국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준 부유한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본가들은 산업 평화를 위해 조합과 고임금을 허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정신에 물들게 되었다.”11)

현재 거의 모든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는 초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가치, 곧 조직화된 투쟁의 정신인 노동자 연대를 배우는 최초의 학교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된 힘의 최초 형태를 구현했다. 하지만 초기 영국과 미국의 노동조합들에서 이런 가치는 종종 잘못 적용되어, 결국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인 협소한 동업조합으로 전락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동조합주의의 형태는 자본주의의 발달 차이들로 인해,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같은 양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서서히 소멸해갈 때,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은 때때로 그것들을 변형시키거나, 새로운 조합주의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계급의식과 불안정 노동계급이 증가할수록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조합주의를 만들었고, 더욱 발전된 자본주의에 적응해 나갔다.

 

따라서 새로운 조합주의는 모든 조합주의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으며, 노동 계급과 노동조합주의 사이에는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게 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생디칼리즘(전투적 조합주의) 역시 그것의 전투성과 무관하게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주의이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의 개량으로 제한하는 데 반해, 노동자의 삶을 방어하면서도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으로까지 향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평의회이다. 부르주아 권력의 파괴와 직접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평의회의 정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다.

 

전쟁과 혁명의 시기, 노동조합의 본질

 

노동조합 형식은 자본주의 상승기인 19세기의 구조적 조건뿐만 아니라 국가-계급-노동조합 관계에서도 노동계급 투쟁의 실제 표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노동조합은 그러한 형태의 특성을 상실했는데, 이러저러한 노동조합 지도자의 실수 혹은 배신 때문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본질 때문에 ‘제도화된 노동조합’이 되었다.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세계 분할을 위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이다.

 

“사회주의당, 사회민주주의자, 개량주의자, 이들 모두 - 일부를 제외한 - 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주면서 그들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원하기 위하여 줄을 섰다. 사회민주주의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들은 그들 “자신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했다. 이것은 민족국가 체제”를 지키기 위한 입장에 있는 노동조합의 최초의 분명한 사례였다.” 12)

 

노동조합은 부르주아 국가인 조국의 방어자 역할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착취 구조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 역할을 하게 된다.

 

“노동조합의 수적인 증가와 사회적 힘은 1914년 이후 계속 증가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수적으로 줄어든 몇몇 나라에서도 그만큼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점차로 커져 왔다. 노동조합들에게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 참사는 그들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사건이었다고 이야기된다. 이것은 그때까지 자본주의가 노동조합을 파괴적인 힘으로 두려워했고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협력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지배(자주 관리가 아닌 노동조합의 노동자통제)”라는 수많은 경험은 자본가들이 만족할만한 효과에 의해 그들을 만족시켜왔다. “노동자들의 지배”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약화시켜왔고, 공장의 공정과정을 촉진시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특별히 자본주의적인 총체인) 조국의 방어자로서 뿐만 아니라 착취의 구조 그 자체 안에서 효과적인 부역자로서 눈에 띄었다.”13)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기인 1917년 러시아에서이다.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행동이 성공한 유일한 곳이다. 당시 노동조합은 볼셰비키 당에 지도되지 않았고, 혁명적 행동의 주역도 아니었다.

 

“지배계급(황제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의 정치권력이 빈농과의 동맹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되었고 볼셰비키 당에 의해 지도되었던 유일한 시기. 그런데 혁명은 볼셰비키가 기존의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는 일 없이 일어났다 (“전달 벨트”로서 노동조합을 활용하지 않고서). 혁명가에게 소비에트와 그전의 기본적인 단계인 공장위원회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조직이 있었다. 볼셰비키는 노동대중과 군인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이끌려고 했지만, 동시에 볼셰비키에 의해 지도되었던 노동조합은 단 한 곳도! 확실히, 없었다. 1917년 전후 러시아에서 노동조합에 의해 공개적으로 수행되었던 몇몇 반혁명적 활동보다 더 적었다. 예) 철도 노동조합은 반혁명적 구조위원회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군대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우편 및 전신 노동조합은 스몰리 협회와 교신하여 볼셰비키를 방해하였으며 은행 노동조합은 혁명 조직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파업을 선언하였다.”14)

세 번째는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과 대규모 공장점거가 잇따랐던 1919~20년의 “붉은 2년” 동안이다. 토리노와 밀라노 등지에서 타올랐던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 상황에서 이탈리아사회당은 손 놓고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노동총동맹 또한 이들과 함께 투쟁의 확산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혁명적 기회를 유실했고 뒤이어 반동적 공세를 초래했다. 붉은 2년에 이어 끔찍한 검은 2년이 뒤따랐고, 무솔리니 파시스트의 권력 장악으로 반동의 최고조에 달했다.

 

“최근의 사례는 “붉은 2년” 동안 이탈리아노동총동맹 [CGdL] 의 행동이었다. 공장점거가 한창일 때, 계급투쟁(적어도 단순한 요구의 영역에서라도)을 확대시키기 위한 노력 대신 이탈리아노동총동맹은 이탈리아사회당과 함께 확실한 반대를 했다. 그들은 공장에서의 시위를 고립시켰고 동시에 금속노동자의 쟁의에서 타협을 시도했다. 지올리티(Giolitti) 정부에 제출한 문서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이전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 산업의 정확한 상태, 그들의 재정 및 기술적인 작업에 대해서 가능한 한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규제의 실행에 기여하는 노동조합의 소산인 공장 대표자를 통해서, 직원에 대한 고용과 해고를 통제하고 따라서 필수적인 규율과 함께 작업장 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을 장려한다.”15)


이러한 노동조합 활동은 그들의 개량주의적 지도부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핵심은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개량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혁명적 관점에서 명백하게 혹은 잠재적으로 혁명기였던 1917년과 “붉은 2년”의 역사적이고 중요한 순간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1920년대 이후 코민테른이 반혁명의 도구로 전락하여 노동조합을 장악했지만, 이전의 혁명시기 노동조합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도되거나 공산주의 강령과 일치하는 혁명적 행동을 한 경우는 어떠한 곳에도 없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며,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의 관계 설정의 토대이다.

 

스탈린주의와 노동조합

 

1930년대 노동조합은 자본의 보조적 기관으로서 자신의 잠재적 특성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스탈린주의였다. 서구에서 노동조합의 반동적인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상황의 악화는 러시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스탈린주의 반혁명이 진행된 이래 예전의 모든 부르주아 세계는 그것으로부터 착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936년 이후로 서구에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를 약화시키면서도 실제로는 착취의 구체화를 강화하는 거의 모든 수단은 스탈린주의 러시아 안에서 그 모델을 찾았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노동계급 안에서 자본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면, 스탈린주의 반혁명은 노동조합에게 매우 강한 힘을 주면서도, 착취를 근본적으로 강화하여 자본가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 결국, 노동조합의 본질적 운명을 폭로하게 된 셈이다.

 

“정치적 권리와 공장 안팎에서 모임을 개최할 권리에 대한 완전한 억압; 고용주에 의해 강요된 초과노동이나 공식적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기본급; 고용주의 결정에 따른 징계수단이나 벌금, 고용주는 또한 공장 법규를 명령한다.; 시간동작연구와 무수히 많은 통제, 일한 분량에 따라 임금이 지급되는 노동, 기술적“자격”과 임금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내에서의 위계적 분화; 오직 자본에게만 이익이 되는 단체협약, 생산자들의 손해로 향하는 끝없는 생산성의 향상, 법에 따른 혹은 실제적인 파업금지 ; 짧게 말해, 서구에서 노조조직을 점점 더 부정적인 조직으로 이행하게 하는 모든 것은 1930년대 러시아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고, 전 세계적으로 자본과 노조에게 영향을 주었다.”16)


다른 어떤 부르주아지보다도 스탈린식 관료주의는 노동 주기의 가속화와 최대한의 직업분류로 프롤레타리아를 가르고 나누어 착취를 증대시켰다. 러시아에서 노동조합과 관료주의는 그들의 서구식 상대방을 제압했다.

 

“러시아에서 노동자 관리자는 노동하고 있는 그들의 동료에 대한 착취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은 노동자의 기본급을 능가하며 그들의 팀 안 노동자들의 숫자 비율에 따른 보너스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임금이 보통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부터 증대되는 것을 보며 이 착취를 증가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구의 관리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노동에서 그들의 동료들의 적으로 변한다.”17)

1939년 통과된 노동법은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의 임금을 특징화시키는 기본적 특징은 전문노동자와 비전문 노동자 사이의 임금에 서열화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보수로써 소부르주아의 서열화는 사회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수년 동안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는 그치지 않고 서열화와 싸웠다.

 

수년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맑스 사상의 충실한 표현으로써 임금노동을 통한 산업발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반대로 맑시즘은 임금노동의 폐지와 사회의 경제적 서열화의 폐지, 모든 개인적 요구의 무제한적 만족의 폐지, 개인적 집단적 만족에 필수불가결한 위대한 자유의 폐지를 확립했다. 우리가 만약 그것을 향하고 있지 않다면, 혁명적인 어떤 것도 현재의 역사적 고비에 실현될 수 없다.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안에서의 임금차이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직접시장관계에 의해 성립된 조건이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임금격차는 헌법에 따라, 원칙이라는 상태를 확보했으며 결국 이것에 대한 투쟁은 범죄가 된다.”18)

한편,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보다 파업할 권리와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서구에서 사실상 이러한 권리는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그들의 대표, 즉 노동조합이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 일어나는 파업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조나 국가와의 제휴를 맞이하게 된다. 종종 노동자들의 직접적 패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에게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렇다. 1936년의 프랑스의 혁명적 파업이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실패한 이후로, 거의 모든 나라는 파업이 노동조합에 의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19)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파업은 노동조합에게 위임되었다. 그뿐 아니라 계급투쟁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일상적 관계 안에서 노동조합은 둘 사이의 완충장치로서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노동자를 자본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을 돕는 앞잡이로서 나타나기도 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도 서구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주적 투쟁이 아닌 노동조합에 의해 독점되어 버린 자본에 대한 노동의 모든 투쟁의 표현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분명히 드러난다.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이윤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노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희생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해서, 곧 다음 말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들의 몫을 나누지 않는다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정부와 노동조합 사이, 심지어 직접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중재자와의 사이에서의 협상이 되었다. 문제는 결코 ‘희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나 분명히 ‘어떻게 희생의 도입을 조직하는가.’였다. 그리고 이 대본의 마지막 행동은, 수백 번 연기되었던 것으로, 언제나 똑같았다. 국가 자본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에 의한 새로운 희생이 그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승리했다며 외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기 없었더라면 더욱 나빴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3. 소결 : 68 이전 과거 노동조합의 특징

 

과거의 노동조합들은 많은 점에서 오늘날과는 달랐지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노동조합이 자본과 노동 사이의 중재 기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형식에서 필수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역할의 발전은 노동조합이 중재 기구의 역할을 했으며, '제도적' 노동조합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은 언제나 노동력에 대한 협상, 즉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중재, 기구로서 그것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실하지 않았다.

 

둘째, 노동조합은 대표단과 대의권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 노동조합의 초기 관료화의 과정은 단순했지만, 이것은 노동조합의 실제 활동의 중요하고 공식적인 반영이었다. 이것은 결국 공식적으로 노동조합-형태의 특징과 연관된다. 사실상 그것은 관료주의의 조건들을 창출하는 중재와 협상이라는 기능과 결합된 바로 대표단과 대의권이다. 노동조합이 파업과 투쟁을 독점하면서 대의권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노동자 직접행동의 분출과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개량주의의 온상이다. 노동조합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개량주의를 위한 공간일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형태의 본질과 관련 있다. 사실상 자본과 노동 간의 중재 기관으로서, 노동조합의 행동 지형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그것이다. 그래서 제3인터내셔널 시기에 노동조합이 혁명 조직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난날 경제 확장시기에 노동조합이 개량과 임금 상승을 얻어낸 것도 노동자들의 투쟁 때문이었지 중재의 결과가 아니었다. 자본의 공격과 자본주의 주기적인 축적 위기는 노동조합들을 더욱 개량주의로 고착화 시킨다.

 

“경제 위기의 강풍과 역풍 사이에서 노동계급의 노동 및 생활 조건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그 공격이 민족경제의, 자본주의 발전의, 시장 확장의 이해관계 방어를 위한 합의의 관행에 기초하기 때문에, 각각 이전의 “개선” 을 무효화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환상에 불과한 그러한 요구의 정식화를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악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축적의 위기에서, 노동조합은 자본의 경제적 한계를 받아들인다. 노동조합은 노동조합 그 자체가 매일의 계급투쟁에서 주된 장애물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부과한다.”21)


<다음 호에 계속>

 

 

 

<주>

 

1)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3)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5)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6)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7)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8) 위의 글

 

9) <원문> [Response to an Inquiry from Korea], 2007, 국제주의자전망(IP)
<번역>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 사회주의노동자신문

 

10) [국제공산주의흐름 강령], 1979, 국제공산주의흐름(ICC)

 

11) [노동조합주의], 1936, 판네쿡

 

12)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3)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4) [노동조합, 계급투쟁 그리고 코뮤니스트], 2011,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15) 위의 글

 

16) [혁명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1952, Grandizo Munis

17) 위의 글

18) 위의 글

19) 위의 글

 

20) [노동계급에 반대하는 노동조합], 2005, 국제공산주의흐름

21) [오늘날 코뮤니스트의 과업과 노동조합], 1997, 국제주의공산주의경향(ICT)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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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시대 - 국제공산주의흐름

파국의 시대1)


국제공산주의 흐름
 


오늘날 혁명가들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자본주의가 쇠퇴의 시기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지만, 이는 1차 세계대전에 반응해야 했던 사람들과 대전 이후 뒤따른 혁명적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이 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 비슷하게 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는 것이 그로부터 도출된 공산주의 강령과 전술을 다시 고무시키는데 필수불가결했다.


 「국제평론」에 실렸던 「자본주의의 쇠퇴」에 관련된 연재물에서 우리는 제국주의 확장에 깔려있는 기본적 과정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이 지구의 전(前) 자본주의의 지역으로부터 그 체제의 진정한 핵심인 부르주아 유럽에 이르기까지 밀어닥친 재난의 귀환을 예측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원제목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을 1915년 감옥에서 썼을 때, 1914년의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발발은 교전하는 양 진영의 노동계급에게 퍼부었던 파괴와 참상 때문에 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배신행위, 즉, 맑스주의 세계관에서 훈련된 국제주의의 전수된 봉홧불인 대다수 사회민주당의 결정이 그들의 지배계급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고, 1914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제2인터내셔널과 그를 구성하는 당의 수많은 회의에서 통과된 전쟁 반대 선언에서 울려 퍼진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로 학살하는 것을 재가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에 파국이었다.

 

 이는 지금은 서로 다른 국민정당으로 쪼개지고 그 다수가 지도정당으로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를 위한 강제 징병 관료로서 서명하게 한, 인터내셔널의 죽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의 노동조합을 배신행위로 끌고 간 “사회 쇼비니스트” 또는 “사회 애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끔찍한 와해 속에서 또 하나의 주요 분파인 “중도주의자들”은 온갖 혼란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평화 정책의 가능성이라는 어리석은 환상을 유포함으로써 사회 애국주의자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설 수 없었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우츠키의 경우에는, 인터내셔널이 전쟁의 도구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근거로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주 멀어졌다. 이와 같은 트라우마의 시대에 오직 소수만이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의 전쟁 노력을 인터내셔널이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계급투쟁을 유보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문서를 전쟁 전야에 채택한 인터내셔널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몰락을 앞당기는 수단으로서 전쟁이 가져다 준 사회위기를 사용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의 개전시기에 민족주의적 히스테리에 직면하자 룩셈부르크의 팸플릿에서 묘사된 “학살 분위기”는 혁명적 좌파의 훌륭한 투사들까지도 의문과 어려움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보기를 들자. 라이히스타그(Reichstag)에서의 전쟁 채권에 대한 당 투표를 발표한 「독일사민당」 신문인 「Vorẅarts」에서 보는 바와 같이 레닌은 이것이 정치 경찰과 함께 공모한 헛소문이라고 처음에 믿었다. 독일의회에서 반(反) 군사주의자 리브크네히트는 처음에는 당 규율을 벗어나 전쟁채권에 대한 투표에 참여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사회민주주의 내의 좌익반대파가 불완전한 개인들의 소수집단이었음을 그녀가 느낌 정도를 보이고 있다.


 “나는 (라이히스타그) 대표들의 활동에 맞서는 가장 활발한 행동을 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일관성 없는 인물들(집단)로부터 도움을 받기 어렵습니다. … 칼(리브크네히트)은 하늘의 구름처럼 떠돌아 붙잡을 수 없군요. 프란츠(메링)는 문자캠페인 말고는 관심도 없습니다. 클라라(제트킨)의 반응은 히스테리 같고 가장 어두운 절망인 것 같고요.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려 합니다.”2)


 아나키스트 중에는 역시 혼란과 철저한 배신이 있었다. 덕망 있는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은 독일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프랑스 문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그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나코-트렌치스트라고 불렸고, 프랑스의 생디칼리스트 CCTT의 경우에는 특히 애국주의의 매혹이 강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그 이질적 성격 때문에 “맑스주의 당”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뿌리부터 흔들리지는 않았다. 수많은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그들이 전에 지녔던 동일한 국제주의적 입장을 계속해서 방어했다.3)

 

 

제국주의: 쇠퇴하는 자본주의


 공공연하게, 재조직화와 재집단화의 작업은 민족주의적 열광과 국가억압에도 불구하고 선전과 선동의 기본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전의 사민주의 좌파 그룹들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전쟁이 오랫동안 운동을 붙들어 왔던 가정들을 어떻게 휩쓸어갔는가를 이해하는 투철한 노력, 이론적 재점검이었다. 국가 방어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조심스럽게 선택한, 맑스와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하면서, 반역자들이 그들의 애국주의를 위장한 “사회주의적” 포장을 찢어버리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일의 경우에는 러시아 짜리즘이 제기한 반동적 위협에 맞서는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맑스주의 경향의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이론적 탐구의 필요성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취리히 도서관에서 조용히 헤겔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 레닌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코뮨(The Commune)」에 최근 실린 논문에서 미국의 맑스주의-인본주의 위원회의 케빈 앤더슨(Kevin Anderson)은 레닌의 헤겔 연구는 그의 멘토인 플레하노프와 (확장해서 그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제2 인터내셔널의 대다수 맑스주의자들이 조야한 유물론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헤겔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역사의 진정한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고 주장한다.4)


 물론 헤겔의 기본적인 변증법적 원칙 중의 하나는 한 시대에서의 합리적인 것은 다른 시대에서는 비합리적이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특히 플레하노프 같은 사회 쇼비니스트들에 레닌이 응답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들은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사회 쇼비니스트들(플레하노프가 이끄는)은 1870년 전쟁에서의 맑스의 전술을 인용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연합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조국을 방어할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있다는 1891년 엥겔스의 성명에 대한 독일의 입장들(Lensch, David 등 집단의 유형)이 그렇다. … 이러한 모든 인용들은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자들 편에 서서 맑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무모하게 왜곡시키는 보기들이다. … 진보적인 부르주아지 시대의 전쟁에 대한 맑스의 태도를 인용하고,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는 맑스의 언명을 반동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언명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부끄럽게도 맑스를 왜곡하고 있으며, 부르주아 견해를 사회주의자의 견해로 대체하고 있다." 5)

 

 여기에 맑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가 반동적 체제가 되었다는 열쇠가 있다. 전쟁이 그것을 증명했으며 이는 운동의 낡은 전술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와 옛 시대의 위기에 있는 자본주의 특성, 그리고 계급투쟁이 맞닥뜨린 새로운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뜻했다. 좌익 분파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진화의 이러한 기본적 분석은 보편적이었다. 룩셈부르크의 「유니우스 팸플릿」은 전쟁으로 이끄는 시기의 제국주의 현상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기반으로, 인류가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엥겔스의 언명을 담아, 이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이 전쟁은 야만이다.”고하면서 당면한 현실이라고 선언했다. 이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억제되지 않은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서 특정한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낡은 전략은 모든 진보적 내용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고삐 풀린 시대에 민족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민족(국가)의 이해는 제국주의라는 필멸의 계급의 적의 지배아래 노동대중을 몰아넣는 구실로만 봉사할 뿐이다.”


 트로츠키는 「Nashe Slovo」에서 전쟁은 국민국가 스스로 인류진보를 진전시키는데 장애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룩셈부르크와 같은 방향으로 쓰고 있다.

“국민국가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틀로, 계급투쟁을 위한 기반으로, 그리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의 국가형식으로 스스로 성장했다."6)


 이보다 더 유명한 저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처럼 세계 강대국 사이의 유혈적 갈등은 이들 강대국들이 전 지구를 분할하고 제국주의적 먹이는 제국주의 도깨비들 사이의 폭력적인 숙원풀이를 통해 다시 분할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다.


 “검토하고 있는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는 지구의 마지막 분할이라는 점이다. 이 때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는 재분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재분할이 가능하고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이 지구상의 미점령지역의 장악을 완결지었다는 뜻이다. 처음으로 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어 미래에는 재분할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소유자로서 주인없는 지역을 넘기는 대신 하나의 ‘소유주’에서 다른 소유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임을 말한다.”7)

 

같은 책에서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의 단계”를 “기생과 쇠퇴” 또는 “소멸해가는 자본주의”로 특징지우고 있다. 기생적이라는 의미는 특히 영국의 경우 공업국이 지구적 부에 생산적으로 공헌한 경향이 점점 금융자본과 식민지로부터 빨아들인 초과이윤으로 대체되었음을 뜻한다(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비판받을 수 있지만, 오늘날 금융투기의 만개와 몇몇 강대국들의 탈공업화의 증거를 보면 직관의 요소를 담고 있다).  쇠퇴의 의미는 (레닌은 성장의 절대적 정체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자유경쟁으로부터 독점으로 기우는 자본주의의 경향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더 고도의 생산양식으로 그 자리를 양보할 필요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레닌의 「제국주의」라는 저술은 수많은 약점으로 고통받고 있다.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는 겉으로 드러난 징표들의 기술에 가깝다. (“(제국주의를8) ) 정의하는 다섯 가지 특징들”은 특정 국가와 블록이 제국주의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좌파들의 인용구이기도 하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정의했던 것처럼 축적 과정에서의 현상의 뿌리로 다가가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다. 식민지로부터의 초과이윤으로 기생하며 사는 선진 자본주의 중심국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제국주의 기획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 언저리의 “노동귀족”을 매수한다는 견해)는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지원 형식으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침투에 커다란 간극을 남기고 있다. 더구나 독점시기(거대 사적연합이라는 의미의)는 무엇보다 전쟁과정을 통해 이미 국가자본주의의 엄청난 성장이라는 자본주의 쇠퇴의 “고도의” 표현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이 마지막 지점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분명히 부하린이 했는데,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시대”에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삶의 총체가 무엇보다 경쟁하는 제국주의와의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기구에 의해 삼켜져버렸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인물 중 하나였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서 국가에 대한 총체적 대조를 해보면, 제국주의 국가는 그 기능의 복잡성의 엄청난 증가와 사회의 경제적 삶으로의 격렬한 침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것은 전반적인 생산영역과 전반적인 상품순환영역을 지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혼합기업의 중간유형은 순수한 국가규제로 대체되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중앙집중화 과정은 더욱 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모든 구성원,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을 위해 금융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지배계급의 상이한 하위집단을 제거하고 그들을 단일한 금융자본주의 집단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거대한 국가기업의 주주 또는 동업자가 되었다. 착취의 보존자와 방어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국가는 착취의 대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직접 맞부딪치는 단일한, 집중화된 착취조직으로 전환된다. 시장가격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는 노동력의 보존을 위해 충분한 일정한 배급량을 할당받는다.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관료주의는 그 중요성과 권력이 꾸준히 성장하는 군사당국의 입장과 전적으로 발맞추어 기능의 조직화를 완수한다. 국민경제는 군사적 방식으로 구성되고 거대하고 규율있는 육군과 해군을 가진 국가로 흡수된다. 노동자는 그들의 투쟁에서 이와 같은 괴물 같은 기구의 무소불위와 맞서야 하며 그들의 모든 진전은 직접적으로 국가에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경제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이라는 두 범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착취에 대항하는 반란은 부르주아지의 국가조직에 맞서는 직접적 반란의 의미를 지닌다.”9)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와 전쟁경제는 분명히 뒤이은 세기의 근본적 특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괴물의 전능한 존재를 전제로 하면서 부하린은 앞으로의 모든 중요한 노동자투쟁은 국가와 맞서는 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일한 깊은 부르주아지 국가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대체하는, 다시말해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모든 기구를 “폭발시키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결론짓는다. 이는 기존 국가를 평화적으로 정복하는데 대한 모든 가정들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뮨의 경험 이후까지도 이러한 가정들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고 이는 점차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적 입장이 되었다. 판네쿡은 1921년 부하린과 같은 입장을 취했고, 부하린은 레닌이 부하린을 아나키즘으로 넘어갔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레닌은 자신의 응답을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을 이해할 필요성 때문에 끊임없이 진화하는 변증법에 다시 빠져들었고, 판네쿡과 부하린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결론은 10월 혁명전야에 쓴 「국가와 혁명」에 정식화되었다.

 

 부하린의 「제국주의와 세계경제(1917)」에는 맑스가 확신한, 경제모순에서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향한 추동을 말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이윤율 저하에 의해 발생하는 압력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시장 확대의 필요성에 인식을 포함한다. 룩셈부르크와 레닌처럼 부하린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제국주의적 “지구화”의 과정이 통일된 세계경제를 창조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앞으로 쇠퇴의 길만이 남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전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적절한 임무는 적어도 큰 틀에서는 세계시장의 창조였다. 그리고 그 시장에 기반한 생산의 창조다.”10)

 

 이처럼 맑스주의를 호전적 진영의 어느 하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왜곡시키고, 현상유지로 되돌리기를 원했던 사회 쇼비니스트들과 중도주의자들에 맞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진보적 자본주의는 없고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 역사적 의제에 올랐음을 만장일치로 확인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


 역사적 시기의 똑같은 근본적 문제는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저항의 고양되는 국제적 물결의 절정의 지점인 1917년 러시아에서 다시 제기되었다. 소비에트로 조직된 러시아의 노동계급이 짜르의 제거가 그들의 근본적 문제의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발견했을 때, 사회민주주의의 우익과 중도파는 옛 짜르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2월을 합법적 혁명으로 주장한 모든 러시아 부르주아지와의 숙원을 풀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소비에트 대항권력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에 맞서 그들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여기서 그들은 사회주의가 충분하게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반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맑스의 저작물을 빠르게 훑어간 멘셰비키에 의해 이론적 지지를 받았다. 왜냐하면, 러시아가 너무나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적인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과 볼셰비키는 역사적인 등넘기 놀이를 하는 모험주의자들의 일당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이 내놓은 응답은 항상 역사의 운동을 총체성으로 강조한 헤겔에 대한 그의 독해와 일치했다. 동시에 그 응답은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헌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을 위한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성숙해야 하지만 새로운 역사적 시기의 출현은 이러저러한 국가만을 검토함으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다. 제국주의 이론이 보여준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구적 체제였으며 그 쇠퇴와 전복의 필요성 역시 지구적 규모에서 무르익는다.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이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었다. 고립된 러시아 혁명은 있을 수 없고 러시아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봉기는 국제혁명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었다. 이는 레닌이 망명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그를 환영하러 나온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한 폭탄같은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병사, 선원, 그리고 노동자 동지들. 동지들과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축하하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 동지들을 만나 행복합니다. …칼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법정소환에서 인민이 자본주의 착취자들에 맞서 그들의 무기를 들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 동지들의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 혁명 만세!”11)


 혁명적인 국제주의 좌파가 코민테른 1차 대회에 함께했을 때 10월 혁명에 의해 속박을 푼 혁명적 격정은 최고조에 있었다. 1월 베를린에서의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분쇄되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잔인하게 살해되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은 건설되었다. 그리고 유럽, 미국의 일부와 남미는 대중파업이 움켜쥐었다. 그 때의 혁명적 열정은 1차 대회가 채택한 기본 텍스트에 실려 있다. 「독일공산주의당(KPD)」의 창립대회에서의 로자의 연설과 나란히 새 시대의 새벽은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개혁을 위해 싸우기 위해 노동조합 활동과 의회에의 참여를 통해 자본주의 내부에서 조직하는 작업은 근본적 존재기반을 잃었다는 뜻이다. 제국주의 전쟁뿐만 아니라 그 흔적 속에 남겨진 경제적, 사회적 혼돈으로 나타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위기는 소비에트로 조직된 권력을 위한 직접 투쟁이 현실적이며 긴급을 요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강령은 식민지와 반(半)반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국가에서 유효했다. 더구나 이러한 새로운 최대 강령은 이전 시기동안 노동계급을 “대표”했지만 1914-17년 전쟁과 혁명의 검증이라는 역사적 검증이 적용되자마자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신한 조직과 완전히 분리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개혁주의자,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우익이 아닌 자본의 시종으로 규정되었다. 1차 대회에서의 논쟁은 초기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전투의 직접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가장 대담한 결론에도 열려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에서의 경험이 다소 다른 길을 걸었지만 볼셰비키는 노동조합이 더 이상 단순히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구의 톱니로써 직접적인 반혁명의 장애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공장과 거리에서 조직의 평의회 형식을 통해 밖에서 조직화되고 맞서게 되었음을 주장하는, 독일, 스위스, 핀란드, 미국, 영국과 기타 국가들의 대표들 증언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계급투쟁이 작업장과 거리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살아있는 중심부는 코민테른의 공식문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투쟁에 단순히 관련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평의회의 권력을 사보타주하는데 사용된 지배계급의 직접적 무기였던 도구인, 의회의 빈껍데기와는 날카롭게 대조되었다. 이는 1917년 러시아와 1918년 독일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비슷하게 코민테른의 “선언”은 민족투쟁이 과거 시대의 산물이고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는 경쟁하는 제국주의적 이해의 단순한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혁명적 결론은 새로운 시대의 새벽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다수를 따르게 한 것처럼 보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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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대회의 논쟁

  

1914년으로부터의 경우처럼 역사가 가속화할 때, 1-2년은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1921년 6월 코민테른 3차 대회 때까지 창립대회에서 보인 혁명으로의 즉각적 확장에 대한 희망은 가장 심각한 타격으로 고통 받았다. 러시아는 3년 동안의 내전으로 소진되었고 적군이 백군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지만, 정치적 희생은 극에 달했다. 소비에트가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상실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혁명”국가의 관료화가 심화되면서 가장 계급의식이 강한 노동자의 대다수는 목숨을 잃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엄격함과 적색 테러의 파괴적 과잉으로 마침내 노동계급의 공공연한 반란을 자극했다. 소비에트의 부흥과 노동자 군사화와 첵카의 억압적 행위의 종식을 요구한 크론슈타트 선원과 노동자들의 무장봉기에 뒤이어 3월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에 육화된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 운동을 백군의 반혁명 표현으로만 바라보았고 무자비하고 유혈적으로 그 운동을 억압했다. 이 모든 것은 러시아 기지의 고립 표현이었다. 패배는 패배를 낳았다. 헝가리와 바바리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위니펙과 시애틀의 총파업, 레드 클리데사이드(Red Clydeside), 이탈리아 공장점거, 독일의 루르 봉기, 그리고 기타 수많은 대중운동들의 패배가 그것이다.

 

점점 그들의 고립을 깨달으면서 러시아에서 권력에 매달리는 당과 그 밖의 기타 공산주의당들은 폴란드로의 적군의 진주, 1921년 3월 독일에서의 3월 행동 등 이 혁명을 확산시키는데 처절한 수단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노동계급 권력에 진정으로 필요한 계급의식과 조직의 대대적인 발전 없이 혁명의 속도를 강제하는 실패한 시도였다. 그 동안 전쟁으로 피를 흘리고 깊은 경제적 위기 징후를 보이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미국을 세계 산업 발전소와 채권자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하면서, 스스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

 

코민테른 내에서 1920년 2차 대회는 이미 이와 같은 연이은 패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대회에서 배포된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의 발간으로 상징화되었다.1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있는 경험을 드러내는 대신 볼셰비키의 경험, 또는 그 경험의 특정한 유형이 보편적 모형으로 제시되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이후 듀마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혁명적 의회주의”의 전술은 모든 곳에서 유효했고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은 최근에 형성되어 프롤레타리아 삶의 모든 징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 그러므로 모든 국가에서의 공산주의자들은 반동적 노동조합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고 부패한 관료로부터 노동조합을 정복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과 의회전술의 정식화와 함께, 이를 거부하는 좌익 공산주의의 경향에 확고한 반대를 밀고 나갔으며 독일의 「통합사회민주당(USPD)」과 이탈리아의 「사회주의당(PSI)」과 같은 당들을 통해 대중정당으로서 공산주의 당들을 설립하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1921년은 단기적 성공과 수적인 성장을 위해 원칙과 장기 목표를 희생하는 기회주의로 편향되는 증거를 더욱더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도구로서 사회민주주의당을 명백하게 비판하는 대신, “그들의 지도자들을 싸우도록 강제”하거나 그들의 노동계급 멤버쉽을 드러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궤변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러한 공작정치는 대중을 어떻게든 계급의식화되게 하려는 간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술은 “통일전선” 전술의 선포를 하게 만들었고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의회에서의 담합을 하는, “노동자 정부”의 무원칙적 슬로건으로까지 나아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배후에는 “소비에트” 국가가 세계 자본주의와 일시적 타협을 하여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버티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1917년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저주받은 비밀외교의 실행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을지라도 말이다. (1922년 “소비에트” 국가는 일 년 후 공산주의 노동자들을 살상하는 데 사용된 무기를 공급하는 비밀협정을 독일과 맺게 된다.) 이 모든 것은 혁명을 위한 투쟁으로부터 멀어지고,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승리로 귀결되는 퇴행으로의 길을 걷게 되는 자본주의의 현상유지로 통합되는 궤적의 가속화를 의미했다.

 

이는 역사적 시기에 대한 모든 명료함과 모든 심각한 논쟁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러한 기회주의적 경로에 대한 “좌익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응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다는 견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보다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1920년의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의 강령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만든 역사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14)

 

같은 해에 의회주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좌파의 주장은 의회 선거운동이 이전시기에서는 입증되었지만, 혁명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낡은 실천을 입증시키지 못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적” 목소리조차도 새로운 시대의 특정과 결과를 이해하는 진정한 시도를 했다. 
 

1921년 6월, 7월의 3차 대회에서의 트로츠키가 제출한 세계 정세에 대한 보고와 테제는 신용과 의제 자본으로 뛰어오른 새로운 시대에서 생존을 보증하기 위해 심대하게 몸살을 앓는 자본주의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명쾌한 분석을 내놓았다. 전후 회복의 첫 번째 징후를 분석하면서 트로츠키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새로운 임무”는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사실과 호황 자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첫째로 경제적 원인이 있다. 전쟁 후 국제적 연결망은 극히 단축된 형식이지만 시작되었고 모든 상품 유형에 대한 보편적 수요가 있었다. 둘째, 정치적, 금융적 원인이다. 유럽 정부들은 전쟁 이후 따라와야만 하는 위기에 대한 숙명적 두려움이 있었고 전쟁이 만든 가공적 호황을 동원해제의 기간 동안 유지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했다. 정부들은 계속해서 엄청난 화폐량을 유통시켰으며 새로운 공채를 발행하고 이윤, 임금, 그리고 빵 가격을 규제함으로써 동원이 해제된 노동자의 소득을 기본국가기금으로 지급했으며 국가의 가공적인 경제부흥을 괴했다. 이처럼 이러한 간격 사이에 의제 자본은 특히 산업이 침체에 바진 국가들에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 이후 자본주의의 전체 생명은 그 자신의 경제법칙을 어기면서 스스로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이와 같은 진단을 입증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없이 자본주의는 새롭고 더욱 파괴적인 전쟁을 분명히 풀어놓을 것이라는 이해를 심화시키려고 했다.(영국이라는 옛 권력과 미국이라는 떠오르는 권력 사이의 절박한 충돌이라는 연역이 충분한 근거 없이도 넓게 퍼졌을지라도) 그러나 이와 같은 문서에 담겨진 가장 중요한 명료한 사실은 새로운 시기의 도래가 쇠퇴, 공공연한 위기, 그리고 혁명이 동시적임을 의미하지 않았고 1919년에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다”는 원래의 정식화에서 보였던 모호함은 자본주의가 동시에 “마지막” 경제적 위기와 혁명적 갈등의 끊이지 않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진전된 이해는 1921년 6월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텍스트 “3차대회의 주요 교훈”에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계급은 생산에 뿌리박고 있다. 계급은 노동의 사회조직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 계급은 더 이상의 존재에 필요한 조건이 생산력의 향상, 다시 말해 경제의 더 나아간 발전과 모순될 때 그 기반을 잃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시기에 부르주아지가 발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살아있는 근거를 잃고 기생적이 된 하나의 계급이 즉각적 죽음으로 내모는 이유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가 계급규칙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각각의 계급은 국가 - 정치기구와 조직의 수단인 군대, 경찰, 당, 법원, 언론 등등의 수단에 의해 스스로 권력을 유지한다. 경제적 기초에 관련을 맺어 “상부구조”를 대표하는 이러한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 지배계급은 사회 발전에 대한 직접적 제동장치가 된 후 수년, 수십 년 동안 스스로 권력을 영속화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긴 시간을 견디지만 한물간 지배계급은 그가 지배하는 국가와 인민을 그들과 함께 끌어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쇠퇴한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순수한 기계적 개념은 몇몇 특정 그룹의 동지들이 핵심에서 오류를 범하는 이론, 즉, 영웅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수동성의 벽”을 흔드는 주도하는 소수라는 그릇된 이론을 만들게 한다. 투쟁의 ‘새로운 방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의해 수행되는 중단 없는 공격을 말하는 그릇된 이론, 무장봉기의 방법을 적용하며 수행되는 부분 전투를 말하는 그릇된 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론들이다. 이러한 경향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공산주의」라는 비엔나 저널이다. 이러한 종류의 전술 이론들은 맑스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명하다.”

 
이처럼 쇠퇴의 징후는 경제적 수준에서의 회복이나 프롤레타리아트의 후퇴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도 1919-21년의 패배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혁명의 임박한 순간이 아닌 혁명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할 뜨거운 문구가 있었다. 3차 대회가 채택한 별도의 텍스트인 “전술에 대한 테제”는 매우 정확하게 노동계급의 확신과 자기의식을 세우기 위해 공산주의당들이 방어적 투쟁에 참여할 필요성을 밀고 나갔으며, 쇠퇴와 혁명이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이러한 입장은 「3월 행동」의 반(半)반란의 접근방식을 대체로 정당화한 “공격의 이론”을 거부하는 필요성에 입각했다. 객관적 조건의 성숙이라는 전제 아래 공산주의당이 대중을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다소 영구적이고 봉기적 공격을 해야 한다는 이러한 이론은 벨라 쿤과 기타 혁명가에 의해 독일 「공산주의당」 내에서 좌파에 의해 견지되었으며, 이는 이 점에 대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과 그 주위의 세력이 항상 명확하지는 않았더라도 「공산주의 좌파」가 주장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15)

 

 이러한 면에서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선언의 개입은 매우 교훈적이다. 「전술에 대한 테제」에서 “종파적”이라는 딱지에 근거해 보면,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태도는 책임있는 소수파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그 시기에 그 개입이 곤혹스럽게 제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식라인의 지지자들로부터 방해와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KAPD는 모든 일정에서 스스로 충실한 부분이었으며 그 대표들은 그들이 참여한 곳에서 동의의 지점을 인식하는 데 기꺼이 노력했다. 그들은 종파적 태도의 본질인 스스로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6)

 

보기를 들어 세계정세에 대한 토론에서 다수의 KAPD 대표들은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재구성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통제를 다시 획득하고 있다는 트로츠키 분석의 많은 부분에 동의했다. 따라서 시맨은 특히 독일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제국주의 사이의 경쟁을 잠정적으로 제쳐두는 국제 부르주아지의 능력을 강조했다.

 

트로츠키의 보고와 세계정세에 대한 테제가 대체로 “공격성의 이론”의 편에선 세력에 대한 반박으로 정식화되어 있음을 전제했을 때, 여기서의 함의는 KAPD가 더 이상의 자본의 안정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투쟁이 어느 순간에도 공격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견해의 관점은 수많은 개입에서 명료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세계의 경제 정서에 대한 트로츠키의 발표에 대한 응답에서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어떻게 트로츠키 동지가 그리고 여기서 우리 모두가 그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작은 위기와 순환적이고 순간적인 소생이라는 짧은 시기 사이의 관계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대한 역사적 시기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의 부흥과 쇠퇴의 문제를 제시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전에 상승하고 있었던 큰 곡선이 지금은 저항할 수 없이 하강하고 있고, 이러한 넓은 곡선 내에서 일반적 하강 속에서 아직 동요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17)

 
이처럼 “죽음의 위기”에 대한 KAPD의 견해에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쇠퇴의 징후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생명의 급작스럽고 명백한 몰락을 의미했다.
 같은 의미로 코민테른의 전술에 대한 헴펠의 해석은 “종파주의적” KAPD가 방어적 투쟁을 거부하고 매순간의 공격적 투쟁을 요구했다는 비난을 명백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 행동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어떠한 부분적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개개 행동과 개개 전투를 말하는데 왜냐하면 행위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의 이러한 전투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없다. 전투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요구로부터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독일과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리고 40-50년 동안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효과에 종속되어 왔던 모든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투쟁에 익숙해왔다. 슬로건은 부분적 행동에 상응해야 한다. 보기를 들어보자. 한 기업에서 또는 다른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날 때, 그것은 특정한 지역에 한정된다. 슬로건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위한 투쟁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꼴사나울 것이다. 슬로건은 주어진 상황에서 기대될 수 있는 정도로, 힘의 균형에 적응해야 한다.”18)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개입의 뒤에는 코민테른이 자본주의 생명에서 새로운 시기와 그에 따른 계급투쟁이 시작됐다는 이해의 깊이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KAPD의 주장이 있었다. 일시적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에 동의하는 샤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테제에 표현되지 않았던 것은 총체성으로 보인 흥성하는 자본주의의 이전 시기와 비교되는 쇠퇴의 시기의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이었다.”19)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후로 생존할 것이라는 방식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본은 경제를 파괴함으로써 그 힘을 재구성한다.”20)


 이러한 전망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다음 세기에 체제로서 지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전술에 대한 토론에서 헴펠은 코뮤니스트가 특히 전술로서 노동조합과 의회문제를 밀고 나가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관련하여 새로운 시기의 의미를 도출한다. KAPD가 때대로 동질화되었던 아나키스트와 대조적으로, 헴펠은 의회와 노동조합의 활동은 이전시기에서 옳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옛 노동자 운동의 임무를 회고해 보면, 더 구체적으로 혁명의 발발시기 이전의 노동자 운동을 돌이켜보면, 한 편으로는 그 임무는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인 당 덕분에 부르주아지와 관료주의 노동계급의 대표에게 남겨놓은 의회와 기구에 대표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는 그 임무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이는 노동계급에게 이득이었고 옳았다. 그들 편에서 보면 노동계급의 경제 조직은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을 개선하는 과업이 있었고 투쟁을 밀고 나가 투쟁이 끝났을 때 협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쟁 전의 노동자 조직의 임무였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졌고 다른 임무가 조명을 받았다. 노동자 조직은 더 이상 임금 인상이나 개선을 위해 의회에서 노동 계급을 대변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한정되지 않았다.”21)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 머물렀던 모든 노동자 조직이 그들의 혁명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투쟁에서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경험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다."22)
 

그리고 이것은 노동계급이 왜 프롤레타리아 자기조직화의 필요성과 국가와 자본에 직접 대응할 필요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창출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것은 소규모 방어적 파업과 더 넓은 대중파업 모두에게 진실이었다. 베르히만은 노동조합을 국가의 부분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옛 노동조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근본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파괴를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용어의 최악의 의미대로 노동조합이 혁명을 억압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구가 되었음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23)
 

비슷한 맥락에서 샤크스는 대중 정당 개념으로의 퇴행과 사회민주주의 당에 대한 공개편지의 전술을 모두 비판했다. 이들은 한물간 사회민주주의 실천과 조직 형식으로의 퇴행이거나 더 나쁘게는 그들 자신을 적에게 넘겨준 사회민주주의 당으로의 퇴행이었다.

 

 역사는 일반적으로 승자에 의해서거나 적어도 승자로 나타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다. 3차 대회 이후 수년 동안 공식적인 공산주의당들은 수백만 노동자들을 명령할 수 있었던 대규모 조직으로 남았다. KAPD는 곧 수많은 요소로 분열되었고 그 중 소수가 1921년 모스크바에서의 대표들이 표현했던 명확성을 유지했다. 진정으로 종파적인 오류가 특히 KAPD의 호르터 주위의 에센 경향이 “제4인터내셔널” (KAI 혹은 「공산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세우려고 한 성급한 결정을 하면서 전면에 등장했다. 그때 혁명의 후퇴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코민테른의 퇴행에 맞서 싸우는 국제적 분파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민테른의 미성숙한 파괴는 10월 혁명의 본질을 점점 부르주아 혁명으로 거부하는 회귀를 수반했다. “죽음의 위기”의 시기에 임금 투쟁은 기회주의적이라는 KAI의 슈뢰더 경향 역시 종파주의적 견해였다. 다른 경향들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평의회주의”로 알려진 경향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혁명적 전위의 보다 일반적인 약화와 분열의 표현은 증가하는 패배와 반혁명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서의 공산주의당의 유지는 부르주아 반혁명의 산물이었지만 이러한 당들은 파시스트와 민주적 학살자와 함께 그들의 전위성을 등치시키는 끔찍한 특수성을 보였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쇠퇴이론에 뿌리를 내려 혁명의 최고점에 만들어진 산물인 KAPD와 이탈리아 좌파의 가장 명료한 입장은 소규모이지만 고통스럽게 고립된 혁명가 그룹들의 참을성 있는 노력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반혁명의 안개가 걷히면서 이러한 입장들은 새로운 혁명 세대의 출현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으며 그들은 다음 혁명당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 성과로 남아있다.

 

옮긴이|오세

 

 

<주>

1.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ICC), 「International Review」, 2010, 4th Quarter, 143, 15-21

2. 1914년 말 콘스탄틴 제트킨에게 보낸 편지, 피터 네틀 「로자 룩셈부르크」, OUP, 1969

3. 그러나 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 운동 내의 현재의 가능한 시도들을 더 탐구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4. “80년 후 레닌의 헤겔과의 조우: 비판적 평가”, http://thecommune.wordpress.com/ideas/lenins-encounter-with-hegel-after-eighty-years-a-

critical-assessment/

5.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1915, 전집, 21권

6. Nashe Slovo, 1916년 2월 4일

7. 레닌,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VI, “강대국 사이의 세계분할”, 전집, 22권

8. 역자 주

9. “제국주의 국가 이론에 대하여”, 1915

10.  맑스가 엥겔스에게, 1858년 10월 8일, 「전집」 40권, 347쪽, Lawrence and Wishart

11.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1권, “짜르의 전복”, 15장, “볼셰비키와 레닌”, 296쪽, Pathfinder, 1980 에서 인용

12. 1차 대회에서의 이러한 토론을 더 자세하게 보려면, 「국제평론」 123호 “역사    유물론의 핵심인 데카당스 이론” 제4부를 볼 것.
(http://en.internationalism.org/ir/123_decadence)

13. 우리는 이 텍스트가 호르터의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 대한 답변이나 비판없이 쓰여지지 않았음을 지적해야 한다.

14. “거대한 차원의 유전이라는 벼락맞은 인상을 준 엄청난 사회·경제적 효과와 함께, 세계 전쟁으로부터 빚어진 세계경제 위기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신들의 황혼]이 가깝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예고하고 있다. 오늘날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한 부문이었던 주기적 경제 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다. 예기치 못할 정도의 계급적대의 무서운 분출, 모든 계층의 인민의 일반적 참상이라는 사회적 유기체 전체의 격동적 경련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운명적 경고이다.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점증하는 적대감,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 이 전에 무관심했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더욱 퍼지는 의식이 해결될 수 없음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실패를 경험하고 있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의 나락으로 빠져버렸다. 견디기 힘든 연장은 야만으로의 퇴보인가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인가라는 역사적 대안 앞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내려놓는 혼동을 만들었다.”

15. 보기를 들면 앞의 각주에서 인용한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강령의 서문은 자본주의의 마지막이며 명백한 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반란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3월 행동」 동안의 몇몇 KAPD 활동가들은 분명히 이러한 범주에 속했다. 보기를 들면 총파업에 참가하도록 미고용노동자를 이용한, 「독일통합공산주의당(VKPD)」와의 무비판적 동맹이라든지, 막스 호엘츠와 기타가 이끄는 “독립” 무장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맺기를 들 수 있다. 또한 3차 대회에서의 헴펠의 개입을 보라(La Gauche Allemande, 41쪽). 여기서 「3월 행동」은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는 없었지만 일관성을 상실한 입장인, 정부의 전복이라는 슬로건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에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못한 어던 종류의 “노동자 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차 대회에서의 KAPD의 개입에 대한 영문 번역은 www.libcom.org, “interventions by the KAPD at the 3r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21), parts1-5“를 볼 것)

16.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에 대한 헴펠의 태도는 이러한 조류의 진정으로 혁명적 표현으로 함께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종파적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La Gauche Allemande, 44-45쪽을 볼 것)

17. 「La Gauche Allemande」, Invariance, 1973, 21쪽

18. 「La Gauche Allemande」, 40쪽

19. 윗 글, 21쪽

20. 윗 글, 22쪽

21. 윗 글, 33쪽

22. 윗 글, 34쪽

23. 윗 글, 56쪽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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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시위와 계급권력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D.Valerian 6/7/2013
                                         Tuesday, July 9, 2013

 

 


5월 말 터키에서 발생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의 대중 시위, 그리고 또 다시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로 가득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사(the current events)는 우리가 여전히, '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2013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분신자살한 한 청년으로부터 촉발되었던 사건에 의해 좌우되었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5월 말, 쇼핑센터 개발과 이스탄불 중심에 있는 공원의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는 터키의 81개 주(州) 가운데 79개 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운동으로 폭발했다. 그 당시, 세계의 이목이 브라질의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로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는 (신문의) 일면을 차지하고 축구 대회를 옆면으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모르시(Mohammed Morsi)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는 이집트 전역에서 2년 전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게다가 언론에는 덜 보도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휘발유 가격 44%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하여 뒤흔들렸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랍의 뿌리(Arab roots)와는 거리가 있고 또한, 적어도 피상적인 수준에서, 현재 영향을 받는 국가들이 모두 민주  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독재자'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촉구하는 시위를 넘어서는 것을 '운동'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운동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지역적 세부사항들 보다 더 중요한, 이러한 운동을 특징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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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의 인구통계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청년들이 운동의 방향을 쥐고 있다. 아카니스트 매체(anarchist media)는 탁심에서 경찰에게 새총을 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예외는 한낱 규칙의 증명에 불과하다. 물론, 청년들이 어떠한 사회투쟁에서 돌격대를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투쟁은 압도적으로 청년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 인구의 43.3%는 24세이거나 그 미만이다.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상대적 수치는 각각 40.7%, 41.5%, 그리고 44.1% 이다. 이러한 수치를 '서방(West)'국가들의 통계 자료와 비교를 할 때, 차이점은 매우 극명하다.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의 수치는 24.1%, 30.3%, 33.8%, 그리고 23.3%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은 전(全)세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인구 내에서 청년들의 더욱 높은 비율에 의해 증폭되기도 한다. 대학 교육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에서 대학 졸업자의 수는 1995년 이래 매년 5%씩 증가해 왔다. 서구 국가들처럼 대학에서 배출되고 있는 졸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부모 세대와 비교하여 그들이 일자리를 얻을 자격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최근 2008년 이후 국제적인 경제위기 발생의 영향에 의해 훨씬 악화되어 왔다. 좌파노동조합인 DISK에 따르면 실업률은 17%에 육박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단지 대학생뿐만 아니라 공부, 시험, 그리고 학원(cramming schools)이라는 동일한 역학을 따라가는 모든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는 사회적 동력인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를 내놓을 수 있냐는 측면에서 어떠한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는 교육제도에 휩쓸린 압도적인 청년 대중이다.

 

 

계급 구성

 

시위자들이 전반적으로 청년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이한 분석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윤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터키에서 국가 빈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던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엘리트의 하나로서 운동을 대표하는 에드로안의 지지자들에서 터키 좌파까지 이르며, 이것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랍지 않다. 이 국가들에서 다수의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계급이며, 그리고 효과적인 정치운동 - 그것이 공산주의, 파시스트, 종교 혹은 민족주의 정치든지 - 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 없다. 분명히 타이이프 에드로안의 AKP(Alengaden Kunjuvareed Poulose : 정의개발당)에 의해 조직된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의 구성 또한 노동계급이었으며, 그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밝혀내려 하기 이전에 물어봐야 할 문제는 무엇이 운동 일반에서 계급의 본질을 결정하는가이다. 운동의 사회학적 구성 하나만으로는 계급의 본질을 판단하기 충분치 않다. 1960년대 영국의 파월(Powell) 파업과 1974년 얼스터(Ulster) 노동자 평의회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판단을 내리기 충분한 노동계급의 방법이 아닌, 복고운동(reactionary movements)의 배후로 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운동의 목표, 요구, 그리고 방향이다. 운동에 관해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모든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할 때, 분명히 노동계급의 일정한 집단은 그들 내에서 두드러진다. 사전에 명시한 것처럼, 이것은 어느 운동에서나 당연하다. 대규모 시위, 총회, 그리고 심지어 일부 파업을 활용하는 방법은 노동계급의 방법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노동계급 운동의 중요한 부분인 작업장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부족하다.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파업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터키에서 조차, 다수의 노동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운동의 요구와 목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분명히 브라질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관련되어 있는 요구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개입과 쿠데타(coup)를 성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요청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시위대와 같은 비(非)계급적 요구가 있었다. 만약 터키 군대가 AKP 정부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역사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시위대의 일부분이 그 곳에서 유사한 요구를 제기한다는 것을 들었다 해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운동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작성하려고 할 때에, 생산, 혼합된 요구, 그리고 구성 시점에 활동의 부족은 계급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인구학적 기초를 형성하며, 그 운동은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임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운동이 소규모의 계급교차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이 운동 안에는 그들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거의 마치 공장 내 파업의 물결이 그 자신의 이익을 강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 운동'에 편승하고 있었던, 2011년의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운동 안에는 또한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인 요구를 지지하는 시위에서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이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이라고 해서 공산주의조직이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거부하면서 그것을 묵살하고 고압적으로 물러서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공산주의 조직은 항상 계급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역으로, 일종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판단해서 흥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다양한 배후의 부르주아 분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것들은, 마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운동인지, 그리고 그 운동 내부에 어떤 경향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모든 종류의 허튼수작을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점거'와 총회

 

상당히 확실한 한 가지는 올 여름의 운동이 '아랍의 봄(ArabSpring)', 그리고 이란에서의 '녹색운동(Greenmovement)'과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거(Occupy)'운동은 이러한 운동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아랍의 봄' 이라는 운동의 매우 옅은 반영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러한 운동이 사회를 동요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고, 정부를 뒤흔드는 진정으로 거대한 운동인 반면에, 점거 운동은 본질적으로 결코 활동가들의 운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류 및 좌파 언론 두 곳에서 상당량의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점거 운동은 그것이 세계 대중 매체의 중심이며, 그리고 노동계급이 매우 미약하고 투쟁의 수준이 극도로 낮은 미국에서 일어난 것과 더욱 관련이 있다. 미국은 분명 중요한 국가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해는 중요하다. 전 세계의 대중 매체를 좌우하는 미국의 이 사건에 대한 보도 분량, 그리고 간신히 다년간의 투쟁 이후 미국 좌파가 느꼈던 흥분은 이 운동의 규모를 판단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점거'운동과 더욱이 위스콘신(Wisconsin)에서의 사건은 중요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미국에서의 잠재적인 부활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지금은 만지 않지만, 그리고 그 자신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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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좌파가 자랑스럽게 알렸던 '점거'운동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운동을 작동시키기 위한 총회의 활용이었다. 이러한 총회의 종류는 또한 '아랍의 봄'의 다양한 국가에서, 그리고 터키, 그리고 오늘날의 브라질에서 목격되었다. 많은 좌파는 마치 그들이 소련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 운동을 칭송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개최했던 총회 사이에, 그리고 대중 집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누가 그것들을 대표하는가이다. 작업장에서의 대중 집회는 분명히 그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총회는 작업장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대개, 노동계급 내에 그것의 일부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계급 조직 보다는, 시위대 그들 자신만이 대표하며, 그것은 활동가들의 조직이다. 어떻게 시위대는 NGO와 좌파노동조합과 함께 주류 및 좌파 정당의 상의하달식(a top down) 연합인 '탁심연대(Taksim Solidarity)' 에서 '영적 위원회(spiritual commission)'의 보고서를 논의하는 한 서클에서 수십여 명의 히피족이었던 '점거'의 최악의 경우까지 다양한 것들을 대표하는가.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도래하는 혁명의 조직 형태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시위에서 파업까지

 

이러한 총회의 본질이 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점거'운동 기간 동안 오클랜드(Oakland),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시도는 노동대중을 끌어내는데 실패했으며, 그리고 노동자들 (오클랜드의 항만 노동자들, 그리고 교원들) 내에서 지지를 얻었던 곳에서조차 휴가, a personal day, 혹은 아프다는 전화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점은 활동가 위원회가 마음대로 노동계급에게 파업을 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노동자들 자신만이 이것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흔히 불안정한 직업으로 오늘날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규모 파업 운동을 지지하는 원동력은 이러한 종류의 작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운동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규모 사업장에서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위대는 성공적인 대중파업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부분으로서 노동계급의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30년 이상 전, 이러한 부류의 청년들이 공장 내의 대규모 사업장에 들어가거나, 혹은 정부부문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그러한 일자 리가 별로 없으며, 청년들은 대학교에 진학 할 가능성이 더욱 많으며, 그리고 그들이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러한 일자리에 취업할 가능성은 적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일자리가 여전히 많은 곳에서조차 그러한 일자리의 다수는 '축소'되고 있으며 신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고 있다. 2009~10년 겨울 동안 진행되었던 터키의 TEKEL (국가 독점) 투쟁에서, 젊은 노동자들은 지난 12년 동안 새로운 신규 노동자들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던 그들의 부재를 주목했다. 브라질에서 시위대에 관한 통계는 시위대의 거의 3/4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인구의 19%만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그리고 청년 중에서 대학 등록률(attendance rate)이 최근 몇 년간 거의 두 배인 국가에서, 이 3/4이란 수치는 노동계급은 차치하고서라도 총인구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분명한 격차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연결하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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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러한 격차를 연결시켰던 시기가 있었다. 이란에서의 '녹색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란의 가장 큰 공장인 코드로(Khodro)에서 노동자들이 국가 탄압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시위대와의 연대를 위해 나섰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아랍의 봄' 기간 동안 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터키에서 좌파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의 참여했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연맹은 7월 11일에 '항의, 파업, 그리고 행진'의 날을 개최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앞서 봤던 터키의 좌파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된 일일 '총파업'은, 이러한 파업이 노동자들의 참여 인원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광범위 하지도 않았고, 국가에 실질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그것의 한계점(limited duration)의 면에서도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것이 인식되는 듯하다. 유사한 상황이 그리스에서 긴축정책(austerity programmes)의 시행을 반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일일 파업을 조직한 시기 동안에도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파업을 넘어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반면에, 일일 파업을 선언하는 방법의 문제는 시위대에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운동에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하여 총파업을 요구해 왔다. 오클랜드에서와 같이 이것은 대체로 실패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업이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적어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총파업을 요구한 페이스북(Facebook)은 파업에 대한 지지의 수준이 있음을 보여준 50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히 보이는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인구학적 격차(demographic gap)는 컴퓨터 사용을 반영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젊은 대학교육을 받은 노동자들보다 컴퓨터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적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에서 조차 그들은 소셜 미디어 사이트 활용을 덜 할 가능성이 있다.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를 을 통한 총파업 요구는 그들이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는 많은 사람들과도 연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활용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분명히 터키 정부는, 불시 단속을 벌여 트위팅(tweeting)이라는 죄로 체포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터키 정부는 분명히 그것의 잠재력을 인식하며, 그리고 좌파가 하는 것처럼  '키보드 혁명가들(keyboard revolutionaries)'을 저자세로 보지 않는다. 터키 정부는 그들을 가두었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파업으로 동원하는 것은 덜 효과적이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다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작업 중 파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시위로 나타는 것이 더 손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시위에 가는 것은 개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물론 이러한 시위에 작업장, 학교 혹은 대학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례는 있지만 다수의 경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결정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력으로 파업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시위에 나타나는 적보다 돈을 잃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결정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우리에게 경험의 부족, 자신감, 그리고 작업장 내의 의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난 10년 정도에 걸쳐 국제적인 규모로 작업장 내 투쟁의 부활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규모이다. 지난 10년이 1990년대처럼 지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10년이 얼마나 좋았는가 보다는 그 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더 많이 반영한다. 오늘날의 작업장 내 투쟁은 70년대는 고사하고 80년대에 있었던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 시기와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작업장 내 투쟁이라는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은 이미 연금을 받고 있거나 기껏해야 퇴직할 때가 되어 가고 있다. 경험은 사라졌고, 신규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던 작업장에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향후 예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가는 내놓을 해결책이 없다. 이집트에서 모르시(Morsi) 대통령의 퇴진은 어떠한 새로운 정부도 직면하는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의 배후 원인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세계 자본주의는 대학과 여타의 교육기관으로부터 대량생산되고 있는 청년들에게 제공할 보수가 좋고 안전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해서 폭발할지라도, 그들에게 작업장에서의 활동이 없이는 전진할 방법이 없다. 그 권력이 없이, 가두시위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와 같이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자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충돌로 변질됨으로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군사 쿠데타에 따라 초래된 충돌인, 이집트에서 유사한 발전의 가능성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개인으로서 이러한 운동에 관련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로서 그들의 권위를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다.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그들이 향후 운동의 발생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동에서, 노동계급이 종파주의(sectarianism), 종교, 그리고 민족주의와 같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집트의 길이 내전을 초래한다면 이집트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어떤 길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기 위한 제1보(the first step)이다. 이 자발적 활동(self-activity)은 대중 참여(mass participation)를 위한 적절한 조직 형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단지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양산했던 전체 경제 및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필요성을 표현하는, 정치 수단도 생기게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공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체 가능한 사회는 가능하다.


옮긴이|김명수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document_srl=176491&mid=cl_bd_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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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책 소개] 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국제공산주의흐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했기 때문에  「유니우스 팸플릿」이라고도 불리게 된 이 글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쓰인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세계대전이 일대 전환점을 나타내게 된, 자본주의의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세계대전의 시대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1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 같은 규모의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불어 전대미문의 파괴기계가 작동되어 무수한 사람이 살육 당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차 대전 직후, 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다시 2천만 명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사람들의 목숨을 더 앗아갔다.


1914년 8월 그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과 국제주의에 대한 완전한 배신에 직면하여, 여전히 국제주의자로 남은 혁명가들은 신속히 스위스의 찜머발트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원인과 귀결에 대한 규명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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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이글, “사회민주당의 위기(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그리고 그녀가 또한 작성한 “국제 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원칙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그 상황을 파악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제시하려는 혁명가들의 그러한 국제적인 노력의 일부분이었다.


그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 앞에서 그녀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오류로부터 배우는 것, 즉 철저한 자기비판이었다. 그리고 파악한다, 모든 것을 뿌리깊이 분석한다는 그 원칙을 통해서 그녀는 이 재앙의 엄청난 규모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대전- 이것은 야만으로의 퇴행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하나의 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은 간헐적으로, 하지만 이제 시작된 세계대전들의 시대가 계속된다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이전, 즉 40년 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승리와 문화의 몰락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의 승리냐는 선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러 장에 걸쳐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어떻게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늘 새로운 지대를 영입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서 “뒤늦게 도착한 자들”이 “먼저 도착한 자들”의 정복물들을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빼앗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는지를 묘사한다. 제국주의의 출현에 관한 이장들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전쟁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때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어느 한 나라 또는 몇몇 나라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국내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오직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개별 국가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국가의 방어전쟁도 더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민족국가방어전쟁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지도 일관되게 거부했던 혁명가들의 진영에 속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때 민족자결이라는 민족의 이해와 국제연대라는 계급이해 사이의 충돌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룩셈부르크는 “국제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오직 국제사회주의만이 그러한 민족국가를 창조할 수 있고 민족들의 그러한 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채 몇 달도 진행되지 않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한목소리로 독일의 민족방어전쟁이라 주장한 그 전쟁의 새로운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전쟁은 “전체로 놓고 볼 때, 이미 완전히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놓고 벌이는,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세계지대의 마지막 나머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투쟁”임을.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로 그 이전의 어떤 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현상, 즉 “전쟁의 지속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관련되고 점점 더 전쟁기간이 길어져서 군사적 승패 그 이전에 모든 관련국의 완전한 경제적 황폐화,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비 관련국들의 점점 더 심해지는 경제적 폐허, 그에 뒤이어 모든 나라에서 열띤 군비경쟁, 군사주의와 반동세력의 득세,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세계대전 발발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끌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전국의 그 어느 하나의 승패를 무비판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종결을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법칙성과 모순들로부터 생겨나는 객관적 역사적 조건들과 질적으로 새로운 발전단계를 다루는 동시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과 관련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는 상황분석 끝에, 사회민주당의 배반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이 자본가들과 맺은 작업장에서의 당쟁중지(파업금지)가 없었다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쟁중지와 계엄 상태를 받아들이고 조국의 방어를 호소하고, 그렇게 해서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을 자행했던 사회민주당과는 그녀는 사회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세계대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종결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는 인류에게 있어서 그 모든 재앙적인 모습에도 현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는 역사적 필요성이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발전 가능성에 대한 조금의 환상과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하고 계속 학살을 자행할 수 있게 되면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의 생존 가능성도 의문시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전쟁 발발 후 얼마지 않아 즉시 인식했다.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다는 점을.

 

혁명가들의 임무와 유니우스 팸플릿

 

1차 대전발발 당시 혁명가들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1914년 8월 그 전쟁을 지지했을 때, 그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하였을 때 처음으로 국제주의에 대한 그 정도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그네히트 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결연한 국제주의자들은 당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던 배신적인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래서 당내에서 국제주의 역량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막 창립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 유니우스 팜플릿을 몇 가지 수정을 거쳐 그 지침으로서 받아들였다.


그 속에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우선순위들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10.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사회주의의 주요과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살아있는 혁명 권력으로 모아내고, 이를 이해관계와 과제에서 통일된 견해를 가지며 평화 시에도 전쟁 시에도 통일된 전술 및 정치 행동능력을 갖는 하나의 강력한 국제조직을 통해서 정치생활의 결정적 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로부터 소명 받은 역할이다.”    

   

“12. 선도적 국가들의 사회주의당들의 공식 대표들이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배반한 점을 놓고 볼 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로부터 부르주아-제국주의 정치로 전향한 것을 놓고 볼 때,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이끌고 한데 모아내는 일을 떠맡을 새로운 노동자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의 이해에 역사적 이론적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 혁명가들의 활동을 위한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이 저작의 주요 축들, 즉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몰락상황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양자택일, 노동자계급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 이 모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참조점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초에서 그녀 자신이 전쟁발발 직전 썼던 다른 저작, 자본축적론을 그 토대로 삼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을 묘사하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발전지점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간은 전쟁 전 그녀의 책 “자본축적론”의 출간이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일련의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항의를 받게 된다. 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론, 즉,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모든 국가의 악성종양으로 되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민족자결주의”를 향한 요구의 기초가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진행 중이던 때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불붙었는데, 여기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 그 혁명가들은 공동의 국제주의적 입장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을 공동으로 옹호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당시 가능한 한 국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었고, 다른 그룹들의 주저함에 대한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이라는 전망을 추구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에 대한 이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한때 선도적 노동자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한 배신에 직면하여 상황을 그 뿌리까지 예리하게 분석하고 또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통해서 혁명적 정신의 한 예를 제공했다. 이 정신은 불굴의 투쟁력, 결연함 그리고 광범위한 시각의 이론적-정치적 분석능력을 특징으로 했다.


세계대전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혁명가는 전대미문의 규모의 이러한 야만 그리고 선도적인 노동자당의 배신이 발생함으로 인해 처음에 진정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전쟁기간 동안 갇혀 있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동안 대부분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한 재앙과 사회민주당의 배신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대응은 학살의 한복판에서 공포에 대항해 그리고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그녀의 국제주의적 활동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항해 그 무엇보다도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문전기 저자 네틀이 쓴 내용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잠깐의 “자유” 이후 1916년 7월 다시 갇혀있을 때 전쟁기간 동안 그녀 자신의 문학적 계획을 다음과 같이 윤곽 지었다: “1. 자본축적론이라는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완전한 글 – 원래의 저작과 부록,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반비판-으로 구성.” 그리고 2. “국민경제학 입문”(정치경제학에 대한 개요)이라는 집합적 제목으로 전적으로 대중적 일련의 에세이들. 그리고 3. “나는 코로렌코가 쓴 러시아 책,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다” (감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J. 디에츠에게 쓴 1916년 7월 28일자 편지에서).

 

그녀는 비록 감옥에 감금된 상태로 당연히 고통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수감기간 동안 쓴 글과 편지들은 매우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옥 속에서 그녀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들의 다양함, 감옥 속에서 그녀가 작업했던 책 3권(저서 2권과 번역서 1권), 예술과 문학에 관한 수많은 편지는 불굴의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읽고 때로는 쓰기만 해요.”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제트킨에게 쓴 1916년 7월 1일자 편지)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을 앞에 놓고,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결연한 투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절친한 사람들을 잃은 후에도 스스로의 힘을 추스리고 기상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론적인 노력들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능력(그림을 그리고 식물학에 열광함)과 특히 외부로부터의 큰 지원망을 통해서 힘을 얻었다. 부분적으로 사식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위에 문제가 있어서 특별한 식이요법이 필요했음), 그녀의 글들은 항상 다시(교도관들의 묵인하에) 감옥으로부터 밖으로 유출될 수 있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녀는 밖의 많은 동지들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며 수감상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지원했다. 그 어떤 두꺼운 벽으로 둘러 쌓인 감방도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고, 개별적으로는 자신의 동지들을 그리고 전체로서 계급을 그녀가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부를 향한 그녀의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출옥하던 날은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감옥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동행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발전, 특히 아시아에서의 발전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행한 분석을 확인시켜 준다.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그녀의 경고, 즉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전쟁이 전개하는 파괴기계와 잔혹화, 그리고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을 물리적으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의 정치적 기상적인 약화를 야기하게 된다는 점까지.


그녀는 시계의 째깍거림을 느꼈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될 것임을, 자본주의체계가 길게 생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류에게, 지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에게 그만큼 더 커다란 위험임을 느꼈다.          
 
제국주의 역사속의 한국

 

1차 세계대전동안 아시아대륙은 전반적으로 전투행위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던 반면, 그 직후에는 군사주의 암종양이 아시아에서도 자라났다.


이 현상은 먼저 중국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충분한 통일을 이뤄낼 수 없었고 무수한 군웅의 충돌로 그 나라는 항상 다시 황폐해졌다. 1930년대에 이미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쟁으로, 그런 다음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극동은 유럽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전쟁무대가 되었다. 전쟁결과 중공과 타이완으로 나뉘게 된 중국의 분할과 더불어 새롭고 지속적인 충돌 중심지가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전쟁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일련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충족시키려 시도했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무수한 화염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은 야만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의 원자탄투하가 새로이 출현한 경쟁자 러시아가 일본에 관여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양대 세계대전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의 무대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주로 원자재와 폭탄 받이로서 인력자원을 주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새로이 출현한,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중국 및 러시아 사이에 최초의 거대한 힘의“과시”에서 그 중심에 서있게 된다. 그 전쟁의 강도와 규모 및 지속기간, 서울과 평양이 거의 초토화되어버릴 만큼 엄청나게 심한 파괴 이 모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잘 보여주었다. 한 동안 미국은 한국이 러시아(소련)-중국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정리된 지 반백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군무장된 지역들에 속한다.


이제 동서블록들의 붕괴 이래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졌다. 새로이 부상하려는 중국, 그 숙적인 일본과 약화되어가는 미국 모두는 이 지역에서 특히 남북한에 대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긴장의 첨예화가 여기서도 놓여있다.


동시에, 신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연결점과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광적 노력들은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초래했고 장기적으로는 이일대의 삶의 토대들을 위협하고 있다. 생산력의 향상, 백 년 전만 해도 경제적으로 난쟁이에 불과했던 새로운 경제적 경쟁자들의 출현이 평화로운 발전으로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그리고 결국 제국주의적 긴장을 더 불붙이게 됨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묘사했던 이론적-정치적 틀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이 책이 독일어로 처음 출판된 지 거의 100년이 흘렀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과 더불어, 한국의 독자들이 노동자운동의 세기적 저작들인 「자본축적론」과 「유니우스 팸플릿」 책을 곧 접하게 된다. 이 저작들은 또한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 2 및 제 3인터내셔널 내 좌파적 흐름의 전통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관지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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