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가두시위와 계급권력

                                         D.Valerian 6/7/2013
                                         Tuesday, July 9, 2013

 

 


5월 말 터키에서 발생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건,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의 대중 시위, 그리고 또 다시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대로 가득한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사(the current events)는 우리가 여전히, '아랍의 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2013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분신자살한 한 청년으로부터 촉발되었던 사건에 의해 좌우되었던,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5월 말, 쇼핑센터 개발과 이스탄불 중심에 있는 공원의 철거에 반대하는 시위는 터키의 81개 주(州) 가운데 79개 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운동으로 폭발했다. 그 당시, 세계의 이목이 브라질의 컨페더레이션 컵 국제 축구 대회로 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파울루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는 (신문의) 일면을 차지하고 축구 대회를 옆면으로 밀어내면서 빠르게 브라질 전역으로 퍼졌다. 이집트에서 무함마드 모르시(Mohammed Morsi) 대통령의 타도를 요구하고 있는 시위는 이집트 전역에서 2년 전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게다가 언론에는 덜 보도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휘발유 가격 44%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하여 뒤흔들렸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랍의 뿌리(Arab roots)와는 거리가 있고 또한, 적어도 피상적인 수준에서, 현재 영향을 받는 국가들이 모두 민주  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독재자'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촉구하는 시위를 넘어서는 것을 '운동'으로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운동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지역적 세부사항들 보다 더 중요한, 이러한 운동을 특징지을 수 있다.

 st1.jpg


시위의 인구통계

 

이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청년들이 운동의 방향을 쥐고 있다. 아카니스트 매체(anarchist media)는 탁심에서 경찰에게 새총을 쏘고 있는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 줄지 모르지만 그러한 예외는 한낱 규칙의 증명에 불과하다. 물론, 청년들이 어떠한 사회투쟁에서 돌격대를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투쟁은 압도적으로 청년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 인구의 43.3%는 24세이거나 그 미만이다.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상대적 수치는 각각 40.7%, 41.5%, 그리고 44.1% 이다. 이러한 수치를 '서방(West)'국가들의 통계 자료와 비교를 할 때, 차이점은 매우 극명하다.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의 수치는 24.1%, 30.3%, 33.8%, 그리고 23.3%이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국가들은 전(全)세계적으로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적 추세를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추세는 인구 내에서 청년들의 더욱 높은 비율에 의해 증폭되기도 한다. 대학 교육의 확산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보기를 들어 터키에서 대학 졸업자의 수는 1995년 이래 매년 5%씩 증가해 왔다. 서구 국가들처럼 대학에서 배출되고 있는 졸업자의 수는 증가하고 있고 그들의 부모 세대와 비교하여 그들이 일자리를 얻을 자격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최근 2008년 이후 국제적인 경제위기 발생의 영향에 의해 훨씬 악화되어 왔다. 좌파노동조합인 DISK에 따르면 실업률은 17%에 육박하고 있다. 분명히 이것은 단지 대학생뿐만 아니라 공부, 시험, 그리고 학원(cramming schools)이라는 동일한 역학을 따라가는 모든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동력을 공급하고 있는 사회적 동력인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외에" 청년들에게 미래를 내놓을 수 있냐는 측면에서 어떠한 약속도 이행하지 못하는 교육제도에 휩쓸린 압도적인 청년 대중이다.

 

 

계급 구성

 

시위자들이 전반적으로 청년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이한 분석은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이러한 운동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대한 윤곽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터키에서 국가 빈민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던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엘리트의 하나로서 운동을 대표하는 에드로안의 지지자들에서 터키 좌파까지 이르며, 이것은 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놀랍지 않다. 이 국가들에서 다수의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계급이며, 그리고 효과적인 정치운동 - 그것이 공산주의, 파시스트, 종교 혹은 민족주의 정치든지 - 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존재할 수 없다. 분명히 타이이프 에드로안의 AKP(Alengaden Kunjuvareed Poulose : 정의개발당)에 의해 조직된 정부를 지지하는 집회의 구성 또한 노동계급이었으며, 그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도 있다.

 

이 운동에 대한 계급의 본질을 밝혀내려 하기 이전에 물어봐야 할 문제는 무엇이 운동 일반에서 계급의 본질을 결정하는가이다. 운동의 사회학적 구성 하나만으로는 계급의 본질을 판단하기 충분치 않다. 1960년대 영국의 파월(Powell) 파업과 1974년 얼스터(Ulster) 노동자 평의회에서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판단을 내리기 충분한 노동계급의 방법이 아닌, 복고운동(reactionary movements)의 배후로 전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점은 운동의 목표, 요구, 그리고 방향이다. 운동에 관해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모든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운동을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려할 때, 분명히 노동계급의 일정한 집단은 그들 내에서 두드러진다. 사전에 명시한 것처럼, 이것은 어느 운동에서나 당연하다. 대규모 시위, 총회, 그리고 심지어 일부 파업을 활용하는 방법은 노동계급의 방법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노동계급 운동의 중요한 부분인 작업장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부족하다.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파업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던 터키에서 조차, 다수의 노동조합원은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운동의 요구와 목표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오합지졸이었다. 분명히 브라질에서의 대중교통 요금 인상,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과 관련되어 있는 요구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개입과 쿠데타(coup)를 성공시키기 위해 군대를 요청하고 있었던 이집트의 시위대와 같은 비(非)계급적 요구가 있었다. 만약 터키 군대가 AKP 정부에 의해 지난 10년 동안 역사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다면, 시위대의 일부분이 그 곳에서 유사한 요구를 제기한다는 것을 들었다 해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운동의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를 작성하려고 할 때에, 생산, 혼합된 요구, 그리고 구성 시점에 활동의 부족은 계급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인구학적 기초를 형성하며, 그 운동은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임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 운동이 소규모의 계급교차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이다. 이 운동 안에는 그들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거의 마치 공장 내 파업의 물결이 그 자신의 이익을 강조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 운동'에 편승하고 있었던, 2011년의 이집트에서 매우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운동 안에는 또한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적인 요구를 지지하는 시위에서의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이 계급교차(cross-class) 운동이라고 해서 공산주의조직이 그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거부하면서 그것을 묵살하고 고압적으로 물러서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공산주의 조직은 항상 계급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고무시키기 위해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역으로, 일종의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으로 판단해서 흥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다양한 배후의 부르주아 분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것들은, 마치 그것이 어떤 종류의 운동인지, 그리고 그 운동 내부에 어떤 경향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모든 종류의 허튼수작을 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점거'와 총회

 

상당히 확실한 한 가지는 올 여름의 운동이 '아랍의 봄(ArabSpring)', 그리고 이란에서의 '녹색운동(Greenmovement)'과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거(Occupy)'운동은 이러한 운동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아랍의 봄' 이라는 운동의 매우 옅은 반영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이러한 운동이 사회를 동요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고, 정부를 뒤흔드는 진정으로 거대한 운동인 반면에, 점거 운동은 본질적으로 결코 활동가들의 운동을 넘어서지 못했다. 주류 및 좌파 언론 두 곳에서 상당량의 대중 매체의 주목을 받았던 점거 운동은 그것이 세계 대중 매체의 중심이며, 그리고 노동계급이 매우 미약하고 투쟁의 수준이 극도로 낮은 미국에서 일어난 것과 더욱 관련이 있다. 미국은 분명 중요한 국가이며,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그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해는 중요하다. 전 세계의 대중 매체를 좌우하는 미국의 이 사건에 대한 보도 분량, 그리고 간신히 다년간의 투쟁 이후 미국 좌파가 느꼈던 흥분은 이 운동의 규모를 판단하기 위한 충분한 자료가 되지 않는다. 물론 '점거'운동과 더욱이 위스콘신(Wisconsin)에서의 사건은 중요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미국에서의 잠재적인 부활의 출발점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지금은 만지 않지만, 그리고 그 자신만의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st2.jpg

많은 좌파가 자랑스럽게 알렸던 '점거'운동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운동을 작동시키기 위한 총회의 활용이었다. 이러한 총회의 종류는 또한 '아랍의 봄'의 다양한 국가에서, 그리고 터키, 그리고 오늘날의 브라질에서 목격되었다. 많은 좌파는 마치 그들이 소련의 일부분인 것처럼 이 운동을 칭송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이 개최했던 총회 사이에, 그리고 대중 집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누가 그것들을 대표하는가이다. 작업장에서의 대중 집회는 분명히 그 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총회는 작업장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대개, 노동계급 내에 그것의 일부가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계급 조직 보다는, 시위대 그들 자신만이 대표하며, 그것은 활동가들의 조직이다. 어떻게 시위대는 NGO와 좌파노동조합과 함께 주류 및 좌파 정당의 상의하달식(a top down) 연합인 '탁심연대(Taksim Solidarity)' 에서 '영적 위원회(spiritual commission)'의 보고서를 논의하는 한 서클에서 수십여 명의 히피족이었던 '점거'의 최악의 경우까지 다양한 것들을 대표하는가.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을 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도래하는 혁명의 조직 형태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시위에서 파업까지

 

이러한 총회의 본질이 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점거'운동 기간 동안 오클랜드(Oakland),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의 총파업을 선언하기 위한 시도는 노동대중을 끌어내는데 실패했으며, 그리고 노동자들 (오클랜드의 항만 노동자들, 그리고 교원들) 내에서 지지를 얻었던 곳에서조차 휴가, a personal day, 혹은 아프다는 전화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점은 활동가 위원회가 마음대로 노동계급에게 파업을 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노동자들 자신만이 이것을 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운동에서 다수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흔히 불안정한 직업으로 오늘날의 많은 청년들과 같이, 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규모 파업 운동을 지지하는 원동력은 이러한 종류의 작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운동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대규모 사업장에서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위대는 성공적인 대중파업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부분으로서 노동계급의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그에 반해서 30년 이상 전, 이러한 부류의 청년들이 공장 내의 대규모 사업장에 들어가거나, 혹은 정부부문에 들어간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에는 그러한 일자 리가 별로 없으며, 청년들은 대학교에 진학 할 가능성이 더욱 많으며, 그리고 그들이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러한 일자리에 취업할 가능성은 적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일자리가 여전히 많은 곳에서조차 그러한 일자리의 다수는 '축소'되고 있으며 신규 노동자를 채용하지 않고 있다. 2009~10년 겨울 동안 진행되었던 터키의 TEKEL (국가 독점) 투쟁에서, 젊은 노동자들은 지난 12년 동안 새로운 신규 노동자들을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던 그들의 부재를 주목했다. 브라질에서 시위대에 관한 통계는 시위대의 거의 3/4이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인구의 19%만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그리고 청년 중에서 대학 등록률(attendance rate)이 최근 몇 년간 거의 두 배인 국가에서, 이 3/4이란 수치는 노동계급은 차치하고서라도 총인구의 수준을 훨씬 웃돈다. 분명한 격차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연결하는가 이다.

 st3.jpg

물론, 이러한 격차를 연결시켰던 시기가 있었다. 이란에서의 '녹색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란의 가장 큰 공장인 코드로(Khodro)에서 노동자들이 국가 탄압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시위대와의 연대를 위해 나섰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아랍의 봄' 기간 동안 특히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터키에서 좌파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들의 참여했다. 브라질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연맹은 7월 11일에 '항의, 파업, 그리고 행진'의 날을 개최하려고 논의하고 있다.

앞서 봤던 터키의 좌파 노동조합에 의해 조직된 일일 '총파업'은, 이러한 파업이 노동자들의 참여 인원이라는 면에서 충분히 광범위 하지도 않았고, 국가에 실질적으로 도전하기 위한 그것의 한계점(limited duration)의 면에서도 충분히 길지 않았다는 것이 인식되는 듯하다. 유사한 상황이 그리스에서 긴축정책(austerity programmes)의 시행을 반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일일 파업을 조직한 시기 동안에도 있었다.

 

어떻게 이러한 파업을 넘어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는 반면에, 일일 파업을 선언하는 방법의 문제는 시위대에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운동에서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를 통하여 총파업을 요구해 왔다. 오클랜드에서와 같이 이것은 대체로 실패했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업이 이러한 종류의 운동을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적어도 보여준다. 브라질에서 총파업을 요구한 페이스북(Facebook)은 파업에 대한 지지의 수준이 있음을 보여준 50만 명 이상의 지지자들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히 보이는 접근법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인구학적 격차(demographic gap)는 컴퓨터 사용을 반영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젊은 대학교육을 받은 노동자들보다 컴퓨터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적으며,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곳에서 조차 그들은 소셜 미디어 사이트 활용을 덜 할 가능성이 있다. 페이스북(Facebook)과 트위터(Twitter)를 을 통한 총파업 요구는 그들이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는 많은 사람들과도 연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활용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다. 분명히 터키 정부는, 불시 단속을 벌여 트위팅(tweeting)이라는 죄로 체포된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된, 그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터키 정부는 분명히 그것의 잠재력을 인식하며, 그리고 좌파가 하는 것처럼  '키보드 혁명가들(keyboard revolutionaries)'을 저자세로 보지 않는다. 터키 정부는 그들을 가두었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시위를 위해 거리로 사람들을 끌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파업으로 동원하는 것은 덜 효과적이다. 이러한 대중 매체가 다수의 사람들을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작업 중 파업에 들어가는 것보다 시위로 나타는 것이 더 손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에 대한 첫 번째 근거는 시위에 가는 것은 개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물론 이러한 시위에 작업장, 학교 혹은 대학에서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례는 있지만 다수의 경험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력으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고 결정 한다. 그러나 당신은 자력으로 파업에 참여하기 위한 결정을 할 수 없으며, 그리고 그것은 시위에 나타나는 적보다 돈을 잃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결정하는 데 더욱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우리에게 경험의 부족, 자신감, 그리고 작업장 내의 의식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지난 10년 정도에 걸쳐 국제적인 규모로 작업장 내 투쟁의 부활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규모이다. 지난 10년이 1990년대처럼 지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난 10년이 얼마나 좋았는가 보다는 그 기간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더 많이 반영한다. 오늘날의 작업장 내 투쟁은 70년대는 고사하고 80년대에 있었던 수준에도 못 미친다. 그 시기와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작업장 내 투쟁이라는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은 이미 연금을 받고 있거나 기껏해야 퇴직할 때가 되어 가고 있다. 경험은 사라졌고, 신규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을 다시 배워야 한다는 것에 이르고 있다. 그들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정기적인 대중 집회를 열었던 작업장에서, 이러한 전통은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향후 예상에 대하여

 

이러한 종류의 운동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은 매우 분명하다. 국가는 내놓을 해결책이 없다. 이집트에서 모르시(Morsi) 대통령의 퇴진은 어떠한 새로운 정부도 직면하는 경제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의 배후 원인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세계 자본주의는 대학과 여타의 교육기관으로부터 대량생산되고 있는 청년들에게 제공할 보수가 좋고 안전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운동이 계속해서 폭발할지라도, 그들에게 작업장에서의 활동이 없이는 전진할 방법이 없다. 그 권력이 없이, 가두시위는 스스로를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시리아에서와 같이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자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는 충돌로 변질됨으로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군사 쿠데타에 따라 초래된 충돌인, 이집트에서 유사한 발전의 가능성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개인으로서 이러한 운동에 관련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로서 그들의 권위를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다.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그들이 향후 운동의 발생에서 스스로 주장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 특히 중동에서, 노동계급이 종파주의(sectarianism), 종교, 그리고 민족주의와 같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 때문에 서로를 죽일 가능성도 있다. 만약 이집트의 길이 내전을 초래한다면 이집트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 걸쳐서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발적 활동은 어떤 길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기 위한 제1보(the first step)이다. 이 자발적 활동(self-activity)은 대중 참여(mass participation)를 위한 적절한 조직 형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단지 정부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양산했던 전체 경제 및 정치 체제를 변화시키는 필요성을 표현하는, 정치 수단도 생기게 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공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대체 가능한 사회는 가능하다.


옮긴이|김명수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document_srl=176491&mid=cl_bd_0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민주당의 위기
[책 소개] 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국제공산주의흐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출판했기 때문에  「유니우스 팸플릿」이라고도 불리게 된 이 글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쓰인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세계대전이 일대 전환점을 나타내게 된, 자본주의의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틀을 제공한다.

 

세계대전의 시대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1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 같은 규모의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더불어 전대미문의 파괴기계가 작동되어 무수한 사람이 살육 당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2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차 대전 직후, 스페인 독감이라는 전염병이 다시 2천만 명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사람들의 목숨을 더 앗아갔다.


1914년 8월 그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과 국제주의에 대한 완전한 배신에 직면하여, 여전히 국제주의자로 남은 혁명가들은 신속히 스위스의 찜머발트에 함께 모였다. 그리고 그 전쟁의 원인과 귀결에 대한 규명을 모색했다.

rosa.jpg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글, “사회민주당의 위기(일명 유니우스 팸플릿)” 그리고 그녀가 또한 작성한 “국제 사회민주당의 임무에 관한 원칙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새로운 그 상황을 파악하고 혁명가들의 활동에 전망을 제시하려는 혁명가들의 그러한 국제적인 노력의 일부분이었다.


그 새로운 세계사적 상황 앞에서 그녀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오류로부터 배우는 것, 즉 철저한 자기비판이었다. 그리고 파악한다, 모든 것을 뿌리깊이 분석한다는 그 원칙을 통해서 그녀는 이 재앙의 엄청난 규모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대전- 이것은 야만으로의 퇴행이다. 제국주의의 승리는 문화의 절멸을 초래한다. 하나의 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은 간헐적으로, 하지만 이제 시작된 세계대전들의 시대가 계속된다면 결정적으로. 우리는 지금, 한 세대 이전, 즉 40년 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제국주의의 승리와 문화의 몰락이냐…. 아니면 사회주의의 승리, 즉 제국주의와 그것의 수단인 전쟁에 대항한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행동의 승리냐는 선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민족국가와 프롤레타리아트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그녀는 여러 장에 걸쳐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을, 어떻게 자본주의가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늘 새로운 지대를 영입해야만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해서 “뒤늦게 도착한 자들”이 “먼저 도착한 자들”의 정복물들을 무력으로, 즉 전쟁을 통해서 빼앗는 것 외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는지를 묘사한다. 제국주의의 출현에 관한 이장들은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전쟁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때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폭로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어느 한 나라 또는 몇몇 나라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자본주의발전에서 특정 성숙도의 산물이다, 국내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오직 그 모든 상호관계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개별 국가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국가의 방어전쟁도 더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민족국가방어전쟁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지도 일관되게 거부했던 혁명가들의 진영에 속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때 민족자결이라는 민족의 이해와 국제연대라는 계급이해 사이의 충돌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룩셈부르크는 “국제사회주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민족국가들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오직 국제사회주의만이 그러한 민족국가를 창조할 수 있고 민족들의 그러한 자결권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채 몇 달도 진행되지 않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지배계급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한목소리로 독일의 민족방어전쟁이라 주장한 그 전쟁의 새로운 성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전쟁은 “전체로 놓고 볼 때, 이미 완전히 꽃핀 자본주의가 세계지배를 놓고 벌이는, 자본주의화 되지 않은 세계지대의 마지막 나머지의 착취를 놓고 벌이는 경쟁투쟁”임을. 그리고 예상되는 결과로 그 이전의 어떤 전쟁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현상, 즉 “전쟁의 지속과 더불어 점점 더 많은 나라가 관련되고 점점 더 전쟁기간이 길어져서 군사적 승패 그 이전에 모든 관련국의 완전한 경제적 황폐화, 심지어는 공식적으로 비 관련국들의 점점 더 심해지는 경제적 폐허, 그에 뒤이어 모든 나라에서 열띤 군비경쟁, 군사주의와 반동세력의 득세,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세계대전 발발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끌어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교전국의 그 어느 하나의 승패를 무비판적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종결을 위해 총력을 다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법칙성과 모순들로부터 생겨나는 객관적 역사적 조건들과 질적으로 새로운 발전단계를 다루는 동시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 발발과 관련된 주관적 조건들을 강조했다. 그녀는 상황분석 끝에, 사회민주당의 배반이 없었다면, 노동조합들이 자본가들과 맺은 작업장에서의 당쟁중지(파업금지)가 없었다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들이 노동자계급을 전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당쟁중지와 계엄 상태를 받아들이고 조국의 방어를 호소하고, 그렇게 해서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을 자행했던 사회민주당과는 그녀는 사회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세계대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그 종결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전쟁을 없앨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제국주의는 인류에게 있어서 그 모든 재앙적인 모습에도 현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계급에는 역사적 필요성이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발전 가능성에 대한 조금의 환상과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녀는 자본주의가 존속하고 계속 학살을 자행할 수 있게 되면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의 생존 가능성도 의문시될 수 있는 위험성을 전쟁 발발 후 얼마지 않아 즉시 인식했다.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앞에 서 있다는 점을.

 

혁명가들의 임무와 유니우스 팸플릿

 

1차 대전발발 당시 혁명가들은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1914년 8월 그 전쟁을 지지했을 때, 그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하였을 때 처음으로 국제주의에 대한 그 정도의 배신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그네히트 등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결연한 국제주의자들은 당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았던 배신적인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당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그래서 당내에서 국제주의 역량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기초 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막 창립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 유니우스 팜플릿을 몇 가지 수정을 거쳐 그 지침으로서 받아들였다.


그 속에 혁명가들의 활동에서 우선순위들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강조되었다.

 

“10. 이러한 목적에 비추어 사회주의의 주요과제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살아있는 혁명 권력으로 모아내고, 이를 이해관계와 과제에서 통일된 견해를 가지며 평화 시에도 전쟁 시에도 통일된 전술 및 정치 행동능력을 갖는 하나의 강력한 국제조직을 통해서 정치생활의 결정적 요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로부터 소명 받은 역할이다.”    

   

“12. 선도적 국가들의 사회주의당들의 공식 대표들이 노동자계급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배반한 점을 놓고 볼 때,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로부터 부르주아-제국주의 정치로 전향한 것을 놓고 볼 때, 모든 나라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이끌고 한데 모아내는 일을 떠맡을 새로운 노동자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의 이해에 역사적 이론적 틀을 제공함과 동시에 혁명가들의 활동을 위한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 이 저작의 주요 축들, 즉 제국주의의 역사적 발전, 몰락상황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의 전망,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양자택일, 노동자계급운동에서 국제주의의 문제 그리고 혁명가들의 임무, 이 모두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참조점들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팸플릿의 이론적-역사적 기초에서 그녀 자신이 전쟁발발 직전 썼던 다른 저작, 자본축적론을 그 토대로 삼았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본주의의 추동력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을 묘사하고 왜 자본의 축적이 특정 발전지점부터는 불가피하게 전쟁과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했다.

 

유니우스 팸플릿의 출간은 전쟁 전 그녀의 책 “자본축적론”의 출간이 격렬한 논쟁을 유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일련의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센 항의를 받게 된다. 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결론, 즉,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제국주의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모든 국가의 악성종양으로 되어버렸고 그렇게 해서 “민족자결주의”를 향한 요구의 기초가 사라져버렸다는 결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진행 중이던 때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이점에 대해 심각한 논쟁이 불붙었는데, 여기서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때, 그 혁명가들은 공동의 국제주의적 입장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전망을 공동으로 옹호하면서 조직적으로 그 당시 가능한 한 국제적으로 한 목소리를 내었고, 다른 그룹들의 주저함에 대한 그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이라는 전망을 추구했음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류에 대한 이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한때 선도적 노동자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의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한 배신에 직면하여 상황을 그 뿌리까지 예리하게 분석하고 또 그러한 사건들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는 그녀의 능력을 통해서 혁명적 정신의 한 예를 제공했다. 이 정신은 불굴의 투쟁력, 결연함 그리고 광범위한 시각의 이론적-정치적 분석능력을 특징으로 했다.


세계대전동안의 로자 룩셈부르크

 

1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혁명가는 전대미문의 규모의 이러한 야만 그리고 선도적인 노동자당의 배신이 발생함으로 인해 처음에 진정충격과 패배감에 휩싸였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전쟁기간 동안 갇혀 있거나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도 전쟁기간 동안 대부분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인류에게 있어서 그러한 재앙과 사회민주당의 배신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대응은 학살의 한복판에서 공포에 대항해 그리고 그녀를 감금함으로써 그녀의 국제주의적 활동을 막으려는 시도에 대항해 그 무엇보다도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문전기 저자 네틀이 쓴 내용에 따르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잠깐의 “자유” 이후 1916년 7월 다시 갇혀있을 때 전쟁기간 동안 그녀 자신의 문학적 계획을 다음과 같이 윤곽 지었다: “1. 자본축적론이라는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완전한 글 – 원래의 저작과 부록,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반비판-으로 구성.” 그리고 2. “국민경제학 입문”(정치경제학에 대한 개요)이라는 집합적 제목으로 전적으로 대중적 일련의 에세이들. 그리고 3. “나는 코로렌코가 쓴 러시아 책, 내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다” (감옥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J. 디에츠에게 쓴 1916년 7월 28일자 편지에서).

 

그녀는 비록 감옥에 감금된 상태로 당연히 고통당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수감기간 동안 쓴 글과 편지들은 매우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감옥 속에서 그녀가 관심을 두었던 주제들의 다양함, 감옥 속에서 그녀가 작업했던 책 3권(저서 2권과 번역서 1권), 예술과 문학에 관한 수많은 편지는 불굴의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읽고 때로는 쓰기만 해요.” (로자 룩셈부르크가 클라라 제트킨에게 쓴 1916년 7월 1일자 편지)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을 앞에 놓고,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결연한 투쟁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절친한 사람들을 잃은 후에도 스스로의 힘을 추스리고 기상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론적인 노력들을 통해,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능력(그림을 그리고 식물학에 열광함)과 특히 외부로부터의 큰 지원망을 통해서 힘을 얻었다. 부분적으로 사식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위에 문제가 있어서 특별한 식이요법이 필요했음), 그녀의 글들은 항상 다시(교도관들의 묵인하에) 감옥으로부터 밖으로 유출될 수 있었다.


감옥 속에서도 그녀는 밖의 많은 동지들 및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었으며 수감상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지원했다. 그 어떤 두꺼운 벽으로 둘러 쌓인 감방도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고, 개별적으로는 자신의 동지들을 그리고 전체로서 계급을 그녀가 지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외부를 향한 그녀의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목소리는 언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녀가 출옥하던 날은 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감옥 문밖에서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동행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발전, 특히 아시아에서의 발전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 팸플릿에서 행한 분석을 확인시켜 준다. 이 저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그녀의 경고, 즉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양자택일, 전쟁이 전개하는 파괴기계와 잔혹화, 그리고 이는 다시 노동자계급을 물리적으로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계급의 정치적 기상적인 약화를 야기하게 된다는 점까지.


그녀는 시계의 째깍거림을 느꼈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될 것임을, 자본주의체계가 길게 생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인류에게, 지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래서 노동자계급에게 그만큼 더 커다란 위험임을 느꼈다.          
 
제국주의 역사속의 한국

 

1차 세계대전동안 아시아대륙은 전반적으로 전투행위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던 반면, 그 직후에는 군사주의 암종양이 아시아에서도 자라났다.


이 현상은 먼저 중국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충분한 통일을 이뤄낼 수 없었고 무수한 군웅의 충돌로 그 나라는 항상 다시 황폐해졌다. 1930년대에 이미 일본과 중국 사이의 전쟁으로, 그런 다음 2차 세계대전 동안에 극동은 유럽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전쟁무대가 되었다. 전쟁결과 중공과 타이완으로 나뉘게 된 중국의 분할과 더불어 새롭고 지속적인 충돌 중심지가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전쟁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탐욕을 일련의 군사적 정복을 통해 충족시키려 시도했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무수한 화염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벌어진 싸움은 야만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는데,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의 원자탄투하가 새로이 출현한 경쟁자 러시아가 일본에 관여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양대 세계대전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의 무대가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주로 원자재와 폭탄 받이로서 인력자원을 주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새로이 출현한, 미국이 주도하는 블록과 중국 및 러시아 사이에 최초의 거대한 힘의“과시”에서 그 중심에 서있게 된다. 그 전쟁의 강도와 규모 및 지속기간, 서울과 평양이 거의 초토화되어버릴 만큼 엄청나게 심한 파괴 이 모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고를 잘 보여주었다. 한 동안 미국은 한국이 러시아(소련)-중국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 한국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로 정리된 지 반백 년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남북한 사이의 충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높이 군무장된 지역들에 속한다.


이제 동서블록들의 붕괴 이래 새로운 차원이 덧붙여졌다. 새로이 부상하려는 중국, 그 숙적인 일본과 약화되어가는 미국 모두는 이 지역에서 특히 남북한에 대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망들을 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긴장의 첨예화가 여기서도 놓여있다.


동시에, 신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연결점과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려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광적 노력들은 전대미문의 환경파괴를 초래했고 장기적으로는 이일대의 삶의 토대들을 위협하고 있다. 생산력의 향상, 백 년 전만 해도 경제적으로 난쟁이에 불과했던 새로운 경제적 경쟁자들의 출현이 평화로운 발전으로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적 그리고 결국 제국주의적 긴장을 더 불붙이게 됨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묘사했던 이론적-정치적 틀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이 책이 독일어로 처음 출판된 지 거의 100년이 흘렀다. 이 책의 한국어판 출판과 더불어, 한국의 독자들이 노동자운동의 세기적 저작들인 「자본축적론」과 「유니우스 팸플릿」 책을 곧 접하게 된다. 이 저작들은 또한 좌익공산주의 조직들이 근거하고 있는 제 2 및 제 3인터내셔널 내 좌파적 흐름의 전통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관지 편집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혁명적 코뮌  칼 코르쉬

 
 

 

 
 
 코르쉬.jpg
칼 코르쉬는 그람시, 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 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 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공산당 안에서 「공산당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 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공산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자리에서 코르쉬를 울트라 좌파 (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 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 공산당에서 축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 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공산주의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공산주의자, 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 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 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 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 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 즉 실제 혁명운동에서주어 진다. 예를 들어, 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 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 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적으로 정립되며, 부르주아 사회 제도, 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파리코뮌.jpg

코르쉬는 역사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추상적 이론에는 결코 매달리지 않았는데, 그는 맑스주의 혁명 이론을 재검토하며 파리코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독일 노동자 평의회에서 혁명 모델에 대한 역사적 탐구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코르쉬는 파리코뮌을 혁명적 실천 모델로서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회적·경제적 내용이지 정치적 형식이 아니라는 점을 논증한다. 파리코뮌에서 본보기가 되는 점은 인민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또한 정부 및 사회적 삶의 새로운 형태를 스스로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 글은 1929년 좌파 저널인「행동(Die Aktion」에 실렸다.

 

 * 출처: Douglas kellner, Karl Korsch: Revolutionary Theory, University of Texas Press, Austin & London, 1977
옮긴이|남궁 원

 

 

 
자본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 의제를 제기하는 역사적인 현 시기에, 계급의식적인 모든 노동자는 혁명적 코뮌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만 하는가? 더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완전히 계몽되고 따라서 자기 의식적인(self-conscious) 프롤레타리아트 부분은 혁명적 코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이,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적절한 몇몇 논평과 더불어 존재한다. 이는 1차 대전에 앞서 사회민주주의의 선전(propaganda)이 이루어진지 반세기만에, 또한 최근 15년간의 강력하고 새로운 경험 이후로 현재, 이미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세계사의 한 조각을 다루는 유파(schools)는 과거 카이저 제국의 군주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안에도 대체로 거의 없다. 나는 지금 영광스러운 파리코뮌의 역사와 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리코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붉은 깃발을 올렸고, 72일간 이 깃발을 휘날리며 잘 무장된 적대적인 세계의 공격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것이 1871년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다. 이에 대해 칼 맑스는 1871년 5월 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코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이 유산계급에 맞서 벌인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는 사실에 있다. 20년 후, 직접적인 국제적 대중행동의 첫 번째 형태로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고 프롤레타리아 메이데이 기념일이 제정되었던 그 때, 다시 한 번 유산계급이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라는 놀라운 말이 울려 퍼질 때마다 지독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깜짝 놀란 속물들 면전에 긍지에 찬 문장을 들이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독재는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습니까?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20년도 더 지난 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혁명적 정치가 레닌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술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 주요부에서 파리코뮌 및 기회주의자의 쇠퇴와 혼란에 맞선 투쟁의 경험을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과 관련지어 정확하고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1917년 2월, 민족 혁명이자 부르주아 혁명으로 시작되었던 러시아 혁명이 그 민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장벽을 돌파하고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갔다. 서구 유럽의 노동자 대중은 (그리고 전 세계 노동계급의 진보적 분파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더불어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이 새로운 정부 형태를 환영했으며, 파리 노동자들이 반세기 전 창조했던 “혁명적 코뮌”을 직접 계승하는 것으로서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공식 아래 혁명적인 모든 노동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그 이상은 불명확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4년간의 전쟁이라는 경제적·정치적 격변 이후 유럽 도처에 퍼져 있던 동요와 압력으로 인해 혁명적 시기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미 그 무렵 이러한 이상과 새로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전면화되었던 저 현실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있어 평의회에 대한 요구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지를 달성하고자 끓어오르는 긍정적인 발전 형식이었다. 당시 오직 시무룩한 속물들만이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모든 이상과 마찬가지로 평의회 개념은 모호하다고 개탄할 수 있었으며, 오직 무기력한 공론가들만이 도이미히(Däumig)와 리처드 뮐러(Richard Müller)의 악명 높은 “작은 상자들의 체계”처럼 인위적으로 설계된 “체계”를 통해 이러한 결점을 완화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다. 이즈음 프롤레타리아트는 1919년 헝가리와 바이에른에서 일시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 혁명적 계급독재를 확립하는 곳 어디에서나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혁명적 평의회 정부를 조직했다. 이는 유산계급에 맞선 생산계급의 투쟁의 결과였고, 이들의 결연한 목적은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당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좀 더 큰 산업국가 중 하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러니까 혹시 만일 1919년 봄 독일의 대규모 경제파업 중에, 또는 1920년 카프(Kapp) 반란을 저지하던 중에, 또는 1923년 루르(Ruhr) 점령 및 인플레이션의 기간 중 이른바 쿠노(Cunow) 파업 과정에서, 아니면 1920년 10월 이탈리아의 공장점거시기에 승리를 거뒀더라면,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은 평의회 공화국이라는 형식 속에서 확립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존재하던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과 함께 혁명적 평의회 공화국들의 세계연방 속에서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조건 하에서 평의회 개념은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는 소위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평의회 정부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1921년 세계적 경제위기가 극복되고 이와 관련하여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패배한 이후 ― 또한 영국의 1926년 총파업과 광산노동자 파업 등에서도 잇따라 프롤레타리아가 패배한 이후 ― 이러한 노동계급의 패배의 결과로 현재, 유럽 자본주의는 그 독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처럼 변화된 객관적 조건 하에서 우리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낡은 신념, 즉 평의회 개념이 혁명적 의의를 지니고 평의회 정부가 혁명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반세기 전에 “발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이 직접적으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 검증되지 않은 불변의 신념에 주관적으로 매달릴 수만은 없게 되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라는 명칭과 그 현실적 조건 사이에 오늘날 존재하는 명백한 모순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현재 러시아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원래의 “혁명적” 평의회 원칙을 “배신한” 것은 독일에서 샤이데만(Scheidemann)과 뮐러(Müller), 라이파르트(Leipart)가 전쟁 직전 자신들의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배신했던”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라고 말해버린다면, 이는 피상적이고 거짓된 만족일 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샤이데만과 뮐러, 라이파르트는 자신들의 사회주의적 원칙을 배신한 자들이다. 또한 현재 러시아에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정부-정당기구의 최고 정점에 무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제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비에트 러시아 전체 위에 군림하면서 이용하고 있는 “독재”는 ― 그 이름만으로는 여전히 “코뮤니즘”과 “볼셰비키”의 정당을 연상시키지만 ― 1917년과 1918년의 혁명적 평의회 개념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저 독재는 차라리 과거 이탈리아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무솔리니(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당 독재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배신”에 관해서는 설명되는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배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라는 과거의 혁명적 슬로건이 오늘날 소위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의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체제로 발전했다는 이 모순은 우리 계급의식적인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현실적 과제를 제기한다. 그 과제란 정확히 말해, 혁명적 자기비판이라는 과제이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점은 혁명의 변증법이 봉건적 과거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이념 및 제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이 지금까지 해방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지배적 국면마다 스스로 이미 들고 나왔던 모든 사유와 조직형태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 괴테(Goethe)가 <파우스트(Faust)>에서 했던 말처럼 ― 어제의 선한 행위가 오늘의 고통을 만드는 그러한 변증법이며, 또한 칼 맑스의 보다 명료하고 확실한 표현에 따르면, 역사적인 모든 형식은 그 발전의 특정 지점에서 혁명적 생산력과 혁명적 행동의 발전형식에서, 발전하는 의식이 발전형식의 족쇄로 전화된다는 그러한 변증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 발전의 변증법적 안티테제는 다른 모든 역사적 이념과 형성과정에도 적용되며, 이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의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서 철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산출하는 결과에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를 예증하는 것이 바로 약 60년 전 혁명적 코뮌의 모습을 띤 “마침내 발견된” 노동계급의 정부라는 정치 형식 한가운데 있었던 파리코뮌의 가담자들(communards)이다. 그에 뒤이은 투쟁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으로서, “혁명적 평의회 권력”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들고 나온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국제적 노동계급의 혁명적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다.

평의회 개념에 대한 “배신”과 평의회 권력의 “타락”을 비통해하는 대신, 우리는 환상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객관적인 역사적 관찰을 통해 이러한 운동 전체의 그 시작과 중간, 끝을 총체적인 역사의 파노라마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1871년 처음으로 혁명적 코뮌을 달성해냈으며, 비록 그 발전은 72일 만에 강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러나 다음에는 더욱 결정적으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달성해낸 ― 이러한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 이후에 ― 이 새로운 정치 형식의 정부가 갖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그 계급지향적 의미는 무엇인가?

혁명적 코뮌 및 그 발전태인 혁명적 평의회 체제의 역사적이고 계급지향적인 성격을 문제 삼을 때 오히려 필요한 것은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혁명가들 사이에는 의회를 그 기원과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적 기관으로 간주하여 이론적으로는 거부하고 실천적으로는 “파괴”하고자 하지만, 그러나 또한 동시에 소위 평의회 체제와 그 전신인 “혁명적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정부의 본질적 형식으로 바라보고 그 완전한 본질은 부르주아 국가의 본질과 양립 불가능한 대립관계에 있다고 여기는 그러한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점은 심지어 가장 날것 그대로의 역사적 비판에서조차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코뮌”은 거의 천 년에 걸친 그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의회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즉 부르주아 정부 형식으로서 출현했다. 11세기에 시작되어 1789년 및 1793년의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운동이 도달한 그 정점에 이르기까지, 코뮌은 대부분 순수하게 계급지향적인 투쟁의 표현으로서 형성되었다. 즉 코뮌은 이러한 역사적 시기 전체에 걸쳐 당시의 혁명적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봉건적 사회질서 전체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으로 형성되었다.

맑스가 ― 앞에서 그의 <프랑스 내전>을 인용한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 1871년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칭송했을 때, 동시에 그는 “코뮌”이 이러한 새로운 성격을 띨 수 있으려면 이전의 그 본성 전체가 ― 부르주아가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전해 내려온 그 전통적 형태가 ― 급진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이러한 “현대의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새로운 코뮌”을 “국가권력에 우선하고 또 그로부터 자신의 토대를 형성하는 중세적 코뮌의 부활”로 여기고자 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염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는 코뮌 체제라는 정치 형식 그 자체가 ― 확고하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적인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즉 그의 생각에 따르면 파리의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어떤 순간에 이러한 정치 형식을 채웠고, 투쟁을 통해 성취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 자기해방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 그러한 내용과 분리된 채로는 ―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위한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맑스가 볼 때 파리 노동자들이 “코뮌”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원래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결정했던 목표와는 완전히 대립하는 목적을 지닌 기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결정적 이유는 오히려 거꾸로, 코뮌이 상대적으로 미발달된 상태였고 비규정적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프랑스에서 특히 고전적인 형태로 발전했던 것처럼 충분히 형성된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즉, 현대의 중앙집권적 대의제 국가에서는) 국가의 최고권력이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문구에 따르면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업무를 전체 업무로서 관리하는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계급적 성격이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중세의 “자유로운 코뮌”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 국가 체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던 초기의 역사적 형식에서는 본질적으로 모든 국가에 따라붙는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계급적 성격이 상당히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다. 이후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성격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최고의 공공권력, 즉 계급지배 장치”(맑스)로서 점점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점점 더 순수하게 발전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러한 발전 초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계급 기구의 본래 규정된 목적이 중세의 봉건적 지배로 억압받던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해방투쟁 기관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중세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투쟁이 현재라는 역사적 시대의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과 공통점을 거의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투쟁은 아직 역사적인 계급투쟁으로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때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혁명적 투쟁의 필요에 따라 창조한 저 기구들은 특정한 범위에서 ― 그러나 단지 특정한 범위로만 ― 오늘날 또 다른 토대 위에서 또 다른 조건 아래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어가고 있는 혁명적 해방투쟁의 형성과 특정한 형식적 연관을 갖는다.

칼 맑스가 이미 초기에 지적한 바, ― 중세시대 혁명적 부르주아 코뮌 발전의 다양한 국면 속에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표현을 발견했던 ―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경험과 성취는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및 계급투쟁의 형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사실상 맑스가 이 점을 지적한 것은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건, 즉 그가 파리 노동자들의 이 새로운 혁명적 코뮌을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식이라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든 그 사건보다 훨씬 앞서서이다. 그는 중세 봉건국가에서 억압당하던 계급으로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발전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유사성을 논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투쟁의 중요성에 관한 그 고유한 변증법적 혁명이론의 주된 이론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 그중 어떤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맑시스트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게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는 현대 노동자들의 연대와 중세 부르주아지의 코뮌을 비교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 역시 마찬가지로 연대의 형성을 통해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투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미 프루동에 대한 반론에서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단계를 거쳤다. 봉건제와 전제군주제 하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를 구성해나갔던 단계가 그 하나이고, 이미 구성된 하나의 계급으로서 사회를 부르주아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봉건제와 군주제를 전복했던 단계가 다른 하나이다. 이중 첫 번째 단계는 좀 더 길었고, 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 단계 역시 봉건군주에 대항하는 부분적 연대를 통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가 코뮌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구성하게 되기까지 거쳐 간 여러 역사적 단계들을 추적하기 위해 수많은 탐구가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구가 파업이나 연대, 또는 우리 눈앞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계급으로 자신들을 조직하게 만드는 또 다른 형식들에 관한 정밀한 연구를 필요로 할 때, 일부는 현실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멸시를 드러낸다. (맑스,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 )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로 막 전환했던 1840년대 초기 맑스의 이 이론적 설명은, 몇 년 후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 및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하는 다양한 국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되었고, 또 20년 후에는 저 유명한 노동자 인터내셔널 대회 제네바 회의의 결의에서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다시 한 번 주장되었다. 즉 노동조합은 지금까지의 지배적 발전 과정에서 이미 “마치 중세의 자치체나 마을이 부르주아지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 노동계급 조직의 중심”이 되었다고 논증한 것이다. 이는 비록 노동조합 스스로는 자본의 과도한 요구에 맞서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방어하는 하루하루의 당면과제에 파묻힌 나머지 이를 넘어서는 자신의 중요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앞으로 노동조합은 노동계급 전체를 조직하는 그러한 중심으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만일 파리 노동자의 혁명적 코뮌이 갖는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후기 맑스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점으로서 현대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형태와 부르주아 계급투쟁 초기의 조직 형태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독창적인 구상을 이해해야 한다. 코뮌은 착취계급에 대항하는 생산계급의 투쟁으로부터 발생했으며, 혁명적 행동을 통해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했다. 맑스가 이 새로운 코뮌이 노동해방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형식이라고 칭송했을 때 그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것은, ― 이후 그의 추종자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 혁명적 코뮌이든 혁명적 평의회 체제든 어떤 확정된 형식의 정치 조직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에 독보적으로 적합한 잠재적 형식으로 지정되거나 지명되는 것이었다.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코뮌 및 코뮌 내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해석의 다양성”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이미 수립된 이 새로운 정부 형식의 성격을 “철저하게 발전 가능한 정치 형식”이라고 표현했다. 파리코뮌 가담자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창조해낸 새로운 형식의 정치권력이 지니는 바로 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코뮌을 “부르주아 정부의 고전적 발전”, 즉 현대 의회제 공화국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과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다. 맑스의 근본적인 전제는 노동계급의 현실적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때 이러한 형식이 결국 계급과 계급 지배, 국가라는 존재를 형성하는 경제적 토대를 전복시킬 지렛대로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적 코뮌 체제란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있는 발전 과정의 정치 형식이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이는 혁명적 행동의 정치 형식으로서, 이때 그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목표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형식을 지닌 국가지배를 유지하거나 또는 심지어 보다 새롭고 “보다 고차적인 국가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국가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이는 코뮌 체제는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맑스는 이 맥락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순이 남아 있다. 맑스가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을 노동계급이 경제적·사회적 자기해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침내 발견한 “정치 형식”으로 특징지으면서도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파리코뮌이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이유가 주로 형식이 없다는 점, 즉 비규정적이며 다양한 해석에 대해 개방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입장이 완전히 명료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단 한 군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그의 주장은 그동안 그가 부딪쳐 오면서 이 독창적인 정치적 구상에 통합해 낸 특정한 정치 이론들의 영향 아래 있었을 뿐, 적어도 파리코뮌이라는 엄청난 경험 자체의 실질적인 감동 속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1847년~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또 1864년 인터내셔널 노동자 대회 개회사에서도 늘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해 오긴 했지만, 이제 파리코뮌이라는 경험은 그에게 “노동계급은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그 자신의 그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이 문장은 특히 1917년 레닌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맑스의 이론을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저작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부활시키고 또 실천적으로는 그 집행자로서 10월 혁명을 완수하여 현실화시킨 이래, 맑스주의 정치이론 전체의 본질적인 주요 명제이자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단지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위해”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노동계급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이러한 소극적 규정만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혁명적 최고국가권력의 형식적 특성에 대하여 아직 그 어떤 것도 적극적으로 말해진 바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왜 하필 특히 “코뮌”이라는 규정된 형식이 노동계급을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이 되어야 하는가? 왜 맑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며, 또 왜 20년 후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3판 서문에서 다시 한 번 매우 상세하게 코뮌의 특징을 서술했는가? 맑스와 엥겔스는,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으로 실현된 혁명적 부르주아의 중앙집권화된 체제에 대한 저 열렬한 찬양자들은 도대체 왜, 정확히 “코뮌”이 부르주아 체제와 완전히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만 한다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정치 형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과학적 사회주의의 두 창립자인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바에 따르는 정치적 강령과 목표들을 좀 더 정확히 분석해 보면, 사실상 파리코뮌 반란 이전뿐 아니라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이 정치이론들과 1871년 파리코뮌으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형식이 어떤 특정한 의미에서 합치된다는 주장은 유지될 수가 없다. 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의 강력한 반대자였던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은 이 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가 소급적으로 파리코뮌을 추가한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코뮌주의 반란의 영향은 매우 강력해서 맑스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사상을 전부 잊어버리고 그에 경의를 표하도록 만들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그보다 더한 일도 했다. 즉, 모든 논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감정과는 반대로 이들은 코뮌 및 코뮌의 목표를 자신들의 강령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모두에게 거부당하거나 버려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열정은 그토록 강력했다.” (Cf. Brupbacher: Marx and Bakunin, pp.114-11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혁명적 이념 중 일부는 바쿠닌과 프루동의 연방주의적 강령으로부터, 또 일부는 블랑키주의 및 아주 약간의 맑스주의가 남아 있는 혁명적 자코뱅파의 사상적 조류에서 유래했다. 20년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주장에 따르면, 파리코뮌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블랑키주의자는 “새로운 혁명정부 수중의 모든 권력을 엄격한 독재로 집중시킨다”는 자신들의 강령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강령, 즉 파리코뮌과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이라는 강령을 선언했다는 사실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바로 이 주제에 관해서 동일한 모순이 지금까지 확인된 맑스 및 엥겔스의 정치이론과 이들이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 무조건 승인했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이론 사이에 발생한다. 이 오류는 레닌이 1917년의 저작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 국가이론의 전개에 대해 서술했을 때 생겨났다. 레닌은 마치 맑스가 1852년까지의 전환기에 이미 (1847~1848년에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과제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를 계획했고, 그 취지는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부르주아 국가의 최고권력을 “파괴”하고 “전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듯이 서술했다. 이에 반해 레닌의 테제는 맑스와 엥겔스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모두, 바로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최초로 “노동계급은 단순히 이미 주어진 국가장치를 전용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입증했다고 반복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즉 논리적 간극을 제공한 것은 레닌 자신이었다. 다른 곳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언급을 그렇게나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철학적으로 정밀하게 재생산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전개를 설명할 때는 이 지점에서 20년이라는 기간을 단숨에 건너뛰었던 것이다. 레닌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에서 곧장 <프랑스 내전>(1871)으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가운데 그가 간과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맑스가 <제1인터내셔널 개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정교한 한 문장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적 강령” 전체를 요약해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노동계급의 중대한 과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맑스가 파리코뮌의 경험에 근거하여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분쇄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 건설의 불가피한 필연성을 주장하던 1871년 이후 시기에도 아직, 그는 혁명적 파리코뮌을 모델로 한 정부형식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치형식으로서 선전하는 일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역사적인 한 순간 ― 승리한 반동세력에 맞선 코뮌의 영웅적 투사들 및 희생자들을 대표하여 맑스가 무조건 주저 없이 앞으로 나섰던 바로 그 순간 ― 그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했거나 또는 지지한 것처럼 보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그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국제조직을 대표하여 피와 열정으로 써내려 간, <프랑스 내전>에 대한 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 총평의회 연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파리코뮌의 혁명적 본질을 지키기 위하여, 맑스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역사에 출현한 이 특별한 형식을 이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를 자제했다. 만일 그가 이를 넘어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코뮌 체제라는 정치형식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형식”으로서 축하했다면, 그 이유는 더 이상 단지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부차적 목적에도 있게 된다.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연설을 쓰면서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영예로운 전투 및 그 패배 직후 맑스는 코뮌의 맑스주의를 추가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맑스주의에 코뮌을 추가하고자 했다. 만일 우리가 이 주목할 만한 문건의 의미와 중요성의 범위를 정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즉 이 문건을 그저 마치 영웅 서사시나 죽음의 애도처럼 보이는 고전적인 역사적 기록으로서만 이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건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저 모든 것을 넘어서서 이 문건은, 당시 이미 시작되어 이후 곧 제1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씁쓸한 투쟁 속에서 맑스가 그 가장 내부의 반대자들에 맞서 내놓은 단편적인 반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단편적이고 부차적인 목적은 맑스가 1870년 리옹과 마르세유 코뮌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1871년 파리 코뮌의 반란으로 절정에 달했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는 맑스가 혁명적 코뮌 체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식”으로서, 또한 중앙집권적인 정부로서 환영받았다고 ― 비록 이것이 그 실제 본질과는 반한다 하더라도 ―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스스로, 파리코뮌이 본질적으로 연방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혐의를 레닌보다도 더 부정한 바 있다. 만일 맑스가 파리코뮌으로 생겨난 프랑스 모든 코뮌 체제의 역사를 짧게 서술하면서 그 명백히 연방주의적인 양상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목적의식적으로 이러한 코뮌 체제를 통해 “국민의 동맹은 깨어지지 않았으며 반대로 조직되었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연방주의자들이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코뮌 체제 내에서 “중앙 정부”가 처리해야 할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작지만 중요한 기능들”을 강조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코뮌의 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기능들이 “― 일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처럼 ― 폐지될 수 없으며, 코뮌의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민 봉사자들에게 양도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기초로 이후 레닌은 코뮌의 사례에 대한 맑스의 저작에서 “연방주의의 흔적은 발견될 수 없다“며, ”맑스는 중앙집권주의자이고, 여기 인용된 그의 설명에서는 중앙집권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일탈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국가와 혁명>) 이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그러나 레닌은 이 지점에서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의 해설이 파리코뮌 가담자들의 열망으로 그 첫 시작에 실현되었던 이 혁명적 코뮌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특징짓는 것만은 제외시켰다는 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빠트려 버렸다.

파리코뮌의 연방적이고 반(反)중앙집권적 성격으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기 위하여 맑스 및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른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파괴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부정적 양상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혁명가들 사이에 어떠한 논란도 없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정확하게 강조했던 것은, 파리코뮌에 의해 공표된 정치적 최고권력의 형식이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 성격의 결정적 토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의 실현이라는 그 사회적 실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연방주의적인” 반대자들에게 분권화된 연방국가 형식은 그 자체로 현대 부르주아 국가의 중앙집권적 정부 형식과 다름없이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이라는 점을 매우 신랄하게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강력하게 대립했던 반대자들과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코뮌 체제의 “연방주의적” 성격에 집중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회주의나 그 밖의 부르주아 국가 체제의 지양된 형식으로부터 파리코뮌을 구별 짓는 다른 형식적 차이들을 (예를 들어, 시민군을 통한 상비군의 대체에 관하여, 집행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의 통합에 관하여, “코뮌” 공무원을 해임할 책임과 권리에 관하여) 지나치게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적지 않은 개념상의 혼란을 만들어냈으며, 이는 파리코뮌에 대한 맑스주의의 입장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후 혁명적 평의회 체제라는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 “연방” 형식으로 부르주아 국가를 극복한다는 프루동이나 바쿠닌에 동의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부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코뮌의 신봉자들이 혁명적 평의회 체제에 관하여 맑스와 엥겔스, 레닌의 그러한 잘못된 설명을 토대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위임에 매여 있는 단기적인 의회의 대표들이나 또는 평균 “임금”을 위해 사적인 계약으로 고용된 정부 공무원들은 선출된 의회정치가에 비해 보다 덜 부르주아적인 방식일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이 만약 어떤 “코뮌의” 체제 형식 또는 “평의회와 유사한” 체제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결국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통치하는 국가가 모든 국가에 달라붙어 있는 저 계급억압의 수단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완전히 틀렸다. 최종적으로 “코뮌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를 사멸 시킨다”는 이론, 즉 맑스와 엥겔스가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아 당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더욱 발전시킨 그 이론 전체가 그 혁명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레닌과 함께 더 이상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 그 자체라는 다수가 자신들의 억압자를 억압하는” 국가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그 순간, 또한 이때 참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자”로서의 능력을 갖는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이미 사멸 중인 국가이다.” (<국가와 혁명>)라고 선언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참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이론의 두 기초이론을, 1871년 파리코뮌 반란이나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과 같은 투쟁의 특정 국면에서 현실적 요구들에 일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결국 폐지될 위험에 이르렀던 그 이론들을, 다시 충분히 명료하게 정립할 때가 왔다.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본질적인 최종목적은 어떤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도, “코뮌” 국가도, 또는 심지어 “평의회와 유사한” 국가도, 그 어떤 국가도 아니다. 그 최종목적은 계급도 없고 국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이며, 그 종합적인 형식은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그러한 연합”(<공산당 선언>)이다.

맑스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의 환상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무런 변화 없이 지양된 국가장치를 “장악”해내든, 또는 혁명적 맑스주의 이론에 따라 급진적으로 그 지양된 형식을 “분쇄”하고 또 자발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체”함으로써 그러한 형식을 전용하든,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 그렇게 될 때까지 어떤 경우가 됐든 이러한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코뮌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혁명적 기간을 거치면서 그 정치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계급적 성격 및 사회적 기능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와는 달라질 것이다. 혁명적 코뮌과 혁명적 평의회 체제, 또는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다른 모든 노동계급 정부의 “진짜 비밀”은 이러한 사회적 내용에 담겨 있을 뿐, 다른 어떤 인위적으로 고안된 정치형식이나 또는 일부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언젠가 한번 실현된 적이 있었던 그러한 특수한 제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다.

 

옮긴이|기관지 편집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  정현철

 

 


1. 노동조합의 한계

 

노동조합은 18~19세기에 노동계급이 자신을 방어하고 생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개선들을 자본주의 체제가 감당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은 한편으론 계급의 조직으로 발전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켰고, 한편으론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조건에 대한 협상자이자, 노동과 자본의 중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계급의 연대와 결합의 중심이 되었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혁명가들이 노동조합에 개입하여 ‘공산주의를 위한 학교’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민주의 정당들과 함께 제국주의적 학살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하는데 노동조합이 협력함으로써 노동조합의 반(反)계급적 역할이 처음 드러났다.1)

 

또한, 전쟁 이후의 혁명 물결 속에서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동자들의 시도들을 좌절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주요 제국주의 전쟁에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서도 생존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방어하기 위한 역할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자본을 위해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노동조합이 ‘계급투쟁의 학교’ ‘사회주의 훈련소’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에 해악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극소수의 정파활동가나 초보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고 공급받을 수는 있겠으나,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과 대중이 직접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이 정치조직과 노조운동의 잘못된 결합, 즉 정치조직의 노조운동 지도-피지도 관계에서 나타난 대리주의 경향은 계급행동의 수동성과 상층부의 관료주의를 양산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조직 전반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왔다.2)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상대로 공동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기구로서 노동조합은 의미가 있다. 헌법의 노동 3권과 관련한 하위법들은 노동조합의 활동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노동조합이 체제 내화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노동조합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 지역일반 노동조합운동, 산업별 노동조합건설 등-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진보정당의 양 날개 전략 속에서 진보정당의 몰락과 함께 내셔널센터(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 중앙 조직)로서의 위상마저 무너져 버렸다. 최근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둘러싼 희대의 촌극은 민주노총의 현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소수 해고자들이 이끌고 있다. 재능교육,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등 이른바 장기투쟁사업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역할과 권위의 상실은 내부 자정능력도 상실시켰다. 최근 10여 년간 민주노총 내부의 무수한 조직 갈등에서 민주노총은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한계는 말하지 않고 ‘개량주의’나 ‘관료주의’의 문제로 대체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좋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은 대개 노동조합의 ‘급진화’-좌익리더십 선출, 급진적인 요구안, 많은 임금 인상이나 정부 정책의 변화 촉구-로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핵심은 기본적인 노동조합의 형태를 방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재편, 강화, 혁신’ 등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전체 노동자의 90%가 노동조합의 밖에 존재한다.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투쟁하며 계급성을 고양시키는 기구라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2.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우리가 말하는 노동자평의회는 노동조합운동의 개조나 발전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없으며, 좌익적(전투적) 노동조합이나 평조합원 운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투쟁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혁명적 임무에 적합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평의회, 즉 노동자 총회에 의해서 통제당하는 대표들의 회의가 그것이었다.

 

소비에트나 평의회는 준 상설적인 총회에 의해서 선출된 대표들의 회의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전적으로 일반화된 계급투쟁에 의존한다. 계급이 모든 공장에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 모든 장소에 노동자들의 총회가 없다면, 노동자평의회는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평의회는 노동계급이 전면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을 이어나갈 때에만 상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 자체로 혁명적 시기를 뜻한다. 노동자평의회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특유의 기구이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은 일상시기이거나 계급의식의 고양기가 아닐 때 어떻게 그 자신을 조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난 50여 년 동안 진행된 수천 번의 비공인(와일드캣) 파업3) 의 경험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노동조합을 넘어선 파업은 특히 매우 단순한 조직 형태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항상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총회에서 선출되어 언제나 소환되며 총회에 책임을 지는 파업 총회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조직적 기초가 평의회의 형태로 이러한 파업 속에서 발견된다. 형식과 내용은 결합되어 있다. 그들의 형식이나 조직은 어떤 태동기에 그 형태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혁명 기관의 조직 형태인 노동자평의회이다.

 

파업참가자들의 총회에 의해 주도되고, 총회에 의해 선임되고 언제나 소환될 수 있는 대표들로 구성된 각종 평의회에 의해 협력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투쟁들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작업장,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부르주아 국가와의 정면대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의 확대와 급진화를 통해서만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국가에 대항한 방어적 투쟁에서 공개적이고 전면적인 공세적 투쟁으로 이행할 수 있다. 대중 파업, 급진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자기 조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 자신을 노동조합의 한계와 영역에서 넘어설 때 노동자 투쟁은 확장되고 막혀있는 모든 곳을 열어놓을 것이다.


 

3. 평의회의 특징과 직접민주주의

 

평의회는 아래와 같이 공통의 특성이 있다.
           
첫째, 평범한 노동자, 농민과 소시민, 군인, 저임금 노동자 포괄적으로 보면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고 다른 비중을 가지고 평의회의 주체로 활동했다. 이러한 계급 또는 계층은 사회적, 경제적(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오는 임금노동자), 정치적(법에 따른 선거권 제한)으로 권리를 억압받았었고, 박탈당하였으며, 최소한 어떤 특정한 계급에 종속되어 사회적으로 박해받는 위치에 있었다.

 

둘째, 평의회운동의 정치적 조직형태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력을 실행하는 직접적 영역이거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을 주는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법률적 조직과 제도들에 대항하면서, 급진적인 직접민주주의 조직형태를 지향했다. 이러한 정치적 조직을 통하여 평의회는 지금까지 박해받던 계급이 직접 사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여 이의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평의회의 첫 번째 조직원칙은 평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자들은 제외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항시적으로 고용하는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거나 생산수단을 임대한 모든 사람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셋째, 평의회 직접민주주의는 다음의 실천과 제도들이 특징이다.

1) 모든 지도적 위치는 선거를 통하여 결정된다.
2) 선거권자는 통일된 선거단위에서 행동하며, 자신들이 속한 기본단위(작업장, 분과, 위원회, 부대)와 대중집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형성한다. 
3) 선거권자는 필요한 결정을 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논의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며, 자신들이 뽑은 선출자에게 되도록 적은 사안에 대한 결정권한을 위임한다.
4) 당선된 선출자는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선거권자의 위임에 통제 받는다.
5) 당선된 선출자들은 선거권자의 지속적인 통제하에 있으며, 이들에게 규칙적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해명해야 하며, 과오가 있을 때 언제든지 소환되거나 대표성이 상실된다.
6) 피선거권자와 선거권자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같아야 한다.

 

이러한 형태의 조직원리가 확산되어 일반화되면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가’ 동일화되는, 즉 ‘대중의 직접지배’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평의회가 지향한 직접 민주주의의 골격을 이룬다.

 

평의회의 특징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무기는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내용으로서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직접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모임 참가자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한, 직접행동에 참가하는 그룹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움직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민주주의는 정치와 경제가 융합된 평의회 형태를 보일 때에만 가능하며, 평의회 안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고유의 단결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4)
     

 

4. 새로운 노동자운동에 대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 속에서 노동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고, 노동조합은 이제 노동자계급의 기본생활을 방어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있다. 자본의 공격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철저한 계급적 분리(분업)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희생5) 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전체 노동계급의 단결 없이는 막아낼 수 없다. 계급의 분업과 분리를 용인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을 통해서는 계급 전체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주의는 노동계급을 분리하고 눈을 가림으로써 무장 해제시킨다. 노동계급은 그 힘과 의식을 노동조합 안팎에서 노동조합주의와 때로는 노동조합 자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이미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급속도로 제도권으로 통합되고 관료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자본가의 수단으로 변질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점진적 개량과 의회주의에 몰입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운동을 넘어선 대안은 무엇인가?6)

 

그것은 비공인파업, 점거운동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대중총회, 파업위원회, 직접행동네트워크 등이 투쟁의 내용과 일치되는 조직형식이다. 하지만 최근의 점거운동은 국제적으로 활성화되었지만, 대중총회 형식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내용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 자본주의 개조 주장에 머물렀다. 지나친 정치조직의 지도의지, 느슨한 시민운동과의 결합이 운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프롤레타리아(프레카리아트) 자발적 행동과 의식적 투쟁이 지역평의회에서 만나 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평의회운동은 현실에서 노동조합을 넘어선 노동자 대중의 직접행동과 비공인파업 투쟁 형태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투쟁의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평의회적 조직인 파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통해 계급 안으로 확산해나갈 수 있다. 또한,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생존권 방어에 내몰린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빈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소수자들이 거리투쟁, 광장점거를 통해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중총회를 개최하고, 지역에서의 계급적 연대를 실현하는 지역(투쟁)평의회 건설을 통해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 형성될 수 있다.

피티민주주의.jpg

이러한 평의회운동 속에서 노동자 대중과 새로운 계급주체들이 작업장, 업종, 고용 여부, 성별, 조합원, 비조합원 장벽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평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광장점거와 파업투쟁을 하나로 묶어낼 것7)이며, 자본과 국가권력에 맞선 전 계급적 투쟁전선의 형성에 기여할 것이다.

 

여기서 정치조직은 노동조합 역할에 개입하거나 경제투쟁을 배후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운동에 나서는 것을 조력, 촉진하고, 대중총회, 파업위원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계급의식을 혁명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토론문화, 토론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상시기부터 준비와 단련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평의회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본에 의하여 분열 통치되는 노동자 대중의 의식을 ‘주체적 자각’에 의하여 자본주의 극복을 열망하는 ‘계급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조직형태가 ‘평의회’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새로운 계급주체들8)이 평의회운동, 코뮤니스트 정치와 만나지 못한다면 새로운 대중투쟁의 분출과 함께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주체,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모든 조직 형식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5. 평의회 운동의 지평 확대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

 

앞으로의 평의회운동은 이제 노동자권력을 지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주체형성,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 계급의식의 발전 기관으로 지평을 확대하여야 한다.

 

첫째, 새로운 주체형성과 새로운 계급투쟁의 창출은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불안정노동 계급의 지역적 연대투쟁과 이른바 프레카리아트 계급의 직접행동 분출로 현실화될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이 수평적으로 만나 지역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평의회로 발전할 때 계급의식 또한 급속도로 회복, 발전할 것이다.

 

오늘날의 평의회운동은 대공장 사업장의 노동조합(현장조직)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계급성과 연대를 회복하려면 이러한 지역평의회 체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들과 만나 기성 노동조합운동을 압박하고 포위해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버리거나 이용한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든 새로운 노동자 투쟁과 평의회적 조직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둘째,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중총회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정치토론 광장을 통해 노동자 토론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들의 토론능력(문화)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실현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선 계급의 무기9)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중총회와 정치광장이 확장되어 조합원, 비조합원 구분하지 않고, 실업자, 학생,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할 때 대리주의 노동자(진보)정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자신이 주체가 되는 직접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셋째, 광장에서의 토론은 직접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며, 내용과 형식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직접행동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로 확장되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중심에 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경험과 확장만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계급의식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다. 대중총회, 지역평의회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연대는 대중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여기 흔들리는 민주노조라는 노쇠한 나무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계급의 뿌리에서 자라난 나무는 풍성한 가지들을 번창하며 민주노조운동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관료주의, 노사협조주의, 노동조합주의라는 병에 걸렸고, 대부분 열매는 의회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세력이 가져갔다. 노동자에게 해악한 세력들은 여전히 건강한 가지들을 훼손하고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마저 자신들이 취하려 이전투구 중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몇 개 남지 않은 열매를 잘 보호해 결실을 얻을 것인가? 썩은 가지 쳐내고 쓸 만한 가지만을 되살릴 것인가? 아니면 뿌리부터 튼튼히 하여 새싹을 틔울 것인가?

 

아직도 ‘노동조합이 더 폭넓은 단결 투쟁의 근거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조합운동을 과감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 전체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야 하지 않을까?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실업자, 퇴직자, 모든 장벽을 없애고 노동자계급으로 재탄생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평의회)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여 계급투쟁의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자!

 

 

<주>

1)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에, 사회민주주의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당보다 훨씬 더 기회주의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 내부의 많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했었고 독일사회민주당(SPD)에서는 3년 동안 전쟁찬성파와 전쟁반대파 사이의 투쟁이 벌어지다가 결국 전쟁찬성파가 승리하고 그 반대파는 당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그와는 달리 노동조합은 전쟁발발 이전에 이미 향토전선에의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기로 정부와 협정을 맺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노동조합은 전쟁경제와 공장에서의 전시법의 수행을 더 많이 넘겨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노동조합 측은 자본이 당을 정복할 때 추진력이었고, 독일에서 혁명의 실패에 있어서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요한 혁명가들의 살해에서도 그랬다. [필자]

 

2) 이른바 ‘민주집중제’로 표현되는 중앙 집중적 의사결정구조는 대의제 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와 결합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 총회 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집행부와 대의원 장악이 모든 것에 우선시 되었다. 노동조합 상층기구와 형식적 의사결정구조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과 노동자투쟁의 확산을 가로막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몰락과 회복불능을 가속화 시켰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민주노조재건’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이미 평조합원들이 절감하고 있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3) 직접행동은 노동조합 관료들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파업은 규칙들과 규제들에 따라 노동조합에 의해 선언되는 파업과는 대조적으로 와일드캣 파업(비합법적이거나 비공식적)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자생적인 파업들은 다른 중요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다른 개별 노동조합들로 분할되는 것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의 세계적 전통들은 노동자들을 종종 경쟁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는 회사들로 분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작업장에서 다른 노동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서로 간에 반목했다. 파업을 할 때도 그들은 종종 분리된 상태로 참여했다. 때문에 통일이라는 관념들에 접하기 어려웠고 행동의 조화와 타협은 유일하게 위원회와 관료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이제 직접행동에서 이러한 노동조합의 회원 차이는 어느 조합에도 속하지 않는 표시로써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자생적 투쟁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사이의 통일이 요구되었다. 즉 통일이 없이는 어떠한 투쟁도 불가능했다. 와일드 캣 파업들이 거대한 대중들을 결집하고, 전 산업 분야, 도시와 구역에서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 조직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 한다. 파업위원회들은 관료들의 노동조합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노동자 평의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

 

4) 프롤레타리아계급에 1910~1920년대의 혁명적 물결은 계급의식의 생성과 발전을 모두 보여주었다. 계급투쟁의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장소에서 노동자평의회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회가 나타났고, 그곳 모두에서 회합과 토론, 생각과 제안들의 교류가 발생했다. 이전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가 부과한 심각한 무지와 의식의 왜곡 속에서 침체되어 있었지만, 평의회 속에서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실천적인 지성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명료함과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상들을 교환하고 정보를 소통하면서 그들은 정치적 토론에 임했고,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들의 창의력과 능동성을 증명해 주었다. 정치적 환경은 열정적인 토론을 창출하고, 다른 프롤레타리아들과의 교류와 성찰을 위한 수많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때 계급의식은 집단적이고 실천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급의식과 혁명조직(당)의 역할에 대하여],이형로, 2012, 붉은글씨 창간호,

 

5) 비정규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의 경우 파업의 대부분을 불법으로 몰아가거나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대공장(대기업) 노조들의 생산(자본)에 타격을 가하지 않는 공식적 파업에 대해 묵인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자본의 지배방식(분업화)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필자]

 

6) 이 글에서 노동자운동 새로운 대안의 핵심 중 하나인 정치운동(혁명조직) 관련된 내용은 담아내지 못했다. 혁명조직의 역할, 혁명조직과 계급과의 관계, 혁명조직과 노동자평의회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지면상 다음 호로 넘긴다. [필자]

 

7)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8)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이정인, 2012, 붉은글씨 창간호

 

9) ‘노동자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토론하는 노동자의 발전하는 정치의식이다. 다수가 이러한 정치의식에 익숙해졌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노동자계급 의식이 된다. 노동자들의 의식적이고 민주적인 토론만이 어제든 나타날 수 있는 계급 내부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한 계급의식 발전 과정의 일부이며, 이러한 토대에서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창조성과 자발성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더욱 높고 깊은 계급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고, 토론의 결과가 행동으로 즉각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혁명의 승리는 고사하고 내부 분열이 반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겐 열린 토론을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부르주아 대의제도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만들어 간다면 무너진 폐허에 새로운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실제로 보일 것이다.  [노동자연대와 노동자 민주주의 복원을 위해], 정현철, 2013, 코뮤니스트 2호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7615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진보-민족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를 넘어,
완전한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와 지배계급의 폭압기구 해체 투쟁에 나서자!

 


1. 위협세력?! 눈엣가시?!
 
국가정보원에 의한 부정한 여론조작으로 얼룩진 대통령선거를 통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 ‘위협세력?! 눈엣가시?!’는 누구인가?


하나는 지금 대통령선거결과에 대한 무효와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이것은 2008년 광우병 파동,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중학생 사망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분노와 자발성으로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댄 광범위한 대중행동이라 하겠다.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한 설명이 더 필요 없는 휴전선 너머 60년 넘게 마주하고 있는 북한 정권과 한반도에서의 제국주의 군사적 충돌이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별도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 내 이른바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내부투쟁을 통해 ‘통합진보당’으로 외화 되었고, 그 외부에서는 그들에게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고 있다.

 

 

 

 

2. 국가정보원은 왜 'RO사건`을 통해 통합진보당을 공격했나?

.

 

 

부르주아 국가에 정보기관은 체제 유지에 필수요소다. 정보를 독점,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는 그들의 역할은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음지에서 자신들의 양지를 지켜주는 최고의 파수꾼들이다. 이러한 때 자신들의 보호막이 엄청난 정치적 수세로 몰리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정권의 안위를 위협할 정도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갱이 안보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대중투쟁의 확산이 박근혜 정권으로 향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자기방어 측면과 함께 박근혜 정권 내내 직면할 세계경제위기 상황과 한반도 긴장상태를 고려한 정권 초기 안정적 통치기반 마련과 장기적인 정국주도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 정권 대 대중행동으로 광범위하고 부담스럽게 확대되는 전선을 국가정보원 대 통합진보당으로 왜곡, 축소시킨 후 애국세력 대 종북세력으로 역(逆)확장하여 대중행동을 분열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반대세력을 뿌리까지 제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하게 통합진보당을 공격한 이유는 위에서 말한 딱지를 붙이고 공격하기에 통합진보당이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통합진보당은 그간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흐름에 함께 하면서 성장해 온 이유로 그들의 본래 계급적․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진보', ‘좌파’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계급적으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고, 동시에 북한지배권력과 정치 군사적 상당한 공통의 인식기반을 두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스탈린주의의 변종인 극단적 민족주의(김일성주의)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공산주의 혁명에서 분명히 적대 되는 세력이다.


한마디로 진보적이기는커녕 퇴행하는 반혁명 정치세력이다. 우리가 위에서 밝힌 ‘진보-민족주의 세력’이라는 표현은 사실 칭찬에 가깝다 하겠다.
 


4. 그럼에도 우리는 부르주아 폭압기구의 민족주의 세력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발언과 의지가 허무맹랑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탄압을 받는다면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꿈과 목표를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하는 데에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발언은 헌법에 위배되니 정신 차려야 하고, 박근혜 정권과 하수인 국가정보원은 이를 문제 삼아 공안정국 조성과 공안탄압을 중단하라’는 이율배반적인 회색주의자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지금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모든 세력들의 그 신념과 의지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그 어떠한 탄압도 거부하고 반대하며 방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5. 전망과 과제

.

 

 

국가정보원은 공안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공안사건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발맞춰 검찰과 경찰, 보수언론, 극우세력들 전체는 사회주의운동, 노동자운동 전반으로 공격을 확대할 것이 예상된다.

 

 

이때 의회주의자들과 기회주의 정치세력, 개량주의 노동자운동세력은 급격히 체제 내화 되어,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공안정국은 한국 프롤레타리아계급에게 그동안 운동을 퇴보와 패배로 이끈 낡은 진보-민족주의와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안탄압과 폭압기구 해체, 정치사상의 자유 쟁취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공세적 대중행동과 의식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가능하다.

 

 

이에 노동자계급과 혁명세력이 나서서 공안탄압, 공안정국에 굴하지 말고, 폭압기구 해체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보다 광범위하고 공세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

.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축되지 말고 노조관료나 의회주의자들에게 의탁하는 투쟁이 아니라 더욱 과감한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

.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투쟁과 혁명(코뮤니스트)정치의 결합만이 낡은 진보와 민족주의를 넘어 다수계급의 사회혁명 열망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

 

 

다가올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소수의 내란이나 테러리즘이 아니라, 다수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모두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 직접정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가장 이성적이고 창조적인 혁명이다.


2013년 9월 9일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여름호(3호)가 나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코뮤니스트 3호에 실린 글>

 

□ 故 남궁원 동지 추모 특집

 
-안녕! 남궁원!

 
-추모시   /임성용

 
-남궁원 동지를 추억하는 시인의 일기    /조성웅

 
-남궁원 동지가 걸어온 고집스럽던 그 길목에 한편의 이야기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
 

-덩치만큼이나 오지랖 넉넉 하고 푸근했던 사내    /이승찬

 
-사랑…
 


□ 故 남궁원 동지의 공산주의 출판 활동


-세계혁명- 당, 평의회, 노동조합
 

-좌익공산주의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
 

-다시 혁명을 말한다

 
-술, 학문, 예술, 혁명의 사중주

 
 

□ 특집 :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혁명조직의 구조

 
-노조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하여   /이형로.정현철

 
-혁명가조직 구조와 기능    /이형로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이정인

 


□ 정세와 계급투쟁


-재능지부 문제 : 새로운 의사 결정 구조를 위하여

 
-거리시위와 계급 권력     /김명수

 
-노동조합과 코뮤니스트      /성승욱.이형로

 
-만덕5지구와 개발동맹들     /윤웅태

 
-[인터뷰] 영상활동가 김수목 동지    /정현철

 


□ 기획번역 연재


-기획번역1. 파국의 시대      /오세철


-기획번역2.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배신자들의 비난(2)

 
-기획번역3. 민족주의는 계급투쟁의 치명적인 독이다.     /성승욱


 

□ 좌익공산주의 역사와 인물

 
-헤르만 호르터의 사망기사     /김명수


=======================================================
 

*정기구독 및 후원회원을 원하시면, 이메일로 연락주세요.

communistleft@gmail.com


*코뮤니스트 구독 및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735-860549 예금주 오세철    /  책값 10,000원


*홈페이지  http://communistleft.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코뮤니스트 혁명가 故 남궁원 동지 49재 및 추모사업 첫 준비모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붉은글씨] 공개토론회 :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실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3/07/03 11:52
  • 수정일
    2013/07/03 12:05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론지 [붉은글씨]  공개토론회

 

<주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와 실천

 

<발제>

 

-점거투쟁의 새로운 정치적 주체, 프레카리아트 운동에 대해 (사회주의노동자신문 독자회원 이정인)

 

-노동조합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제안하며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정현철)

 

*토론자 : 김혜진(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자 : 김운용(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일시 : 7월 12일(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경향신문사 별관 2층, 민주노총 사무연맹 회의실 (5호선 서대문역)


주최 : 붉은글씨를 만드는 사람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번주 토요일(15일) 부산반빈곤센터 후원주점합니다.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3/06/13 17:01
  • 수정일
    2013/06/13 17:0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이번주 토요일(15일) 부산반빈곤센터 후원주점합니다. 많은 관심과 후원부탁드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대선평가와 정치운동 전망]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 이형로

[대선평가와 정치운동 전망]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형로

 

 


들어가며

 

2012년 겨울,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국가적 행사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르주아 대선이 끝났다. 지금은 한편의 대형 정치쇼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통치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준비에는 늘 수많은 잡음과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슈들이 생산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부르주아 권력재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선거에서 패배한 쪽에는 정비기간을 주어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에 대한 환상을 지속하게 한다.

 

이번 대선에서 노동자 정치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나? 노동자독자후보에서 비판적 지지까지 늘 반복되는 선거전술의 재탕과 이합집산 속에서 두 명의 노동자후보, 민주노총의 무능, 저조한 득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등 최악의 선거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부르주아 선거 국면을 노동자정치로 돌파하기는커녕, 노동자운동 전체의 쇠락을 가속하는 역할을 했다.

 

선거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부르주아 선거의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다. 문재인은 1,000만 표 이상을 획득했음에도 승자만이 살아남는 정치쇼에서 어느새 잊힌 사람이 되었고, 이번 대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안철수의 화려한 복귀의 그 빛 역시 바래고 있다. 노동자투쟁의 기억은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어 계급투쟁에 도움이 되지만,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한 노동자 후보의 흔적은 금새 지워진다. 이미 부르주아 정치시스템에 편입된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자체 정비기간을 거쳐 의회활동, 보궐선거, 각종 사회적 이슈를 통해 자연스레 정치무대에 등장하겠지만, 노동자정치는 더욱 잊혀 가거나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계급 고유의 과제마저 넘겨줄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총 상층관료 상당수는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고, 조합원들은 압도적으로 부르주아 정치인을 지지했다. 이것이 2013년 한국 노동자계급의 현실이며, 노동자정치의 출발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진영 내부는 어떠한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은 있었는가, 내부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투쟁은 벌어지고 있는가? 이제야말로 낡은 운동과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모색할 때가 되지 않았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반성하지 않는 세력들의 기득권은 여전히 보호되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내부혁명이 가능하려면 기존세력이 기득권을 내려놓던가, 전면적인 내부투쟁으로 기득권을 몰수해야 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모든 단위에서 동등하게 의사결정기구 참여를 보장받아야 한다. 소수 혁명적 정치세력은 모든 대중조직에서 완전한 정치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 막강한 부르주아 정치권력에 맞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국유화)와 노동자통제를 주장하던 세력들이 왜 노동자계급 내부의 문제에는 소극적이거나 부르주아 방식에 머물고 있는가.

 

이에 우리는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의 창출을 위해, 부르주아 정치제도 자체에 적대하는 태도에서 대선을 평가하고 현실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려 한다. 아직 우리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역량과 운동의 방향에 대한 정답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므로 실천 속에서 모든 것을 열어 놓고 토론하고 검증받으면서 새로운 운동 조건을 창출해 나갈 것이다.

 


1. 부르주아 선거평가에 대한 코뮤니스트 관점

 

우리는 작년 부르주아 대선을 맞이하여 '사회주의의 정치의 실종'과 '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거부'를 주장했었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투쟁하며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함께 내세우고 있는가? 부르주아 정치판에 ‘진보’ 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들어 노동계급을 배신하고 부르주아의 한 분파로 행세했음을 반성하고 있는가? 일부에서 ‘노동자 민중후보’를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 후보전술을 쓸 때인가? 제발 좀 반성하자.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지 말자.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맞서자.


노동자 대중의 열망과 사회주의 정치의 무능력의 틈을 파고드는 것이 파시즘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의 진정한 복원만이 파시즘을 이기는 길이다."

-오세철,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11쪽
 

“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은 지배계급의 위기를 평화롭게 넘기는 것이며, 격화되는 대중 투쟁을 잠재우고 대중의 불만표출을 잠시 멈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선거에 휩쓸리지 말고 투쟁의 동력을 유지해 선거 이후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지배계급에 맞서야 한다.
선거는 짧다. 두 개의 노선은 대립하고 있다. 사민주의와 동거, 선거정치 몰입이냐, 계급적 대중행동 투쟁 촉구냐?
이제라도 부르주아 잔치판에서 뛰쳐나와 노동자계급의 자리에서 자본주의가 인류 참상의 원인이고, 이를 넘어서는 공산주의 사회만이 대안이라고 대중적・공개적으로 말하고 싸워야 한다. 고통당하고 억압받는 노동계급과 함께 투쟁하고 그들을 정치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11월
 

이 주장은 단순히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를 판단하고,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코뮤니스트 관점의 선거평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선거평가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모든 선거 평가는 표 분석(계층, 계급, 나이, 성별, 지역 등)과 표를 얻기 위한 선거운동 전반(후보자와 정책 포함)에 대한 사회학적, 통계적 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 자체가 부르주아 선거제도에 포함된 선거 메커니즘의 일부기 때문에, 계급의식 측면에서 노동자 정치의식에 대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선택지 안에서의 투표행위는 계급의식을 왜곡해서 반영하기 때문에 득표수를 근거로 노동자 정치의식을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계급의 불만을 체제 내로 흡수하고 지배 권력을 재편하는 것이 본질인 부르주아 선거를 지배계급 대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부르주아 선거가 모든 대립구도를 흡수하는 시스템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한 표 분석이 아닌 장기적으로 선거 이전과 선거 이후 계급의식변화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선거 국면에서 정치세력들이 계급의식에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일반화되어, 체제 위기극복의 필수요소가 된 지금이 바로 부르주아 정치 자체를 거부하는 관점에서 선거평가를 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코뮤니스트 관점에서 선거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선거 시기 부르주아 민주주의(선거) 환상에 대한 계급의식 수준을 분석해야 한다.

 

둘째, 선거 시기 노동자 대중의 열망이 어떻게 선거에 흡수되는지, 사회주의 정치 세력을 포함한 선거 참여가 대중투쟁과 정치운동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평가해야 한다.
 
셋째, 선거 이후 선거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과 새로운 계급투쟁 창출을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아쉽게도 이번 대선평가에서는 계급의식 분석에 대한 사전준비가 부족하여. 문제 제기 수준에서 머물렀다. 앞으로 계급의식에 관한 조사와 연구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진행될 것이며, 혁명 주체 문제를 푸는 단서를 제공할 것을 기대한다.

 


2.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정치노선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첫째, 부르주아 정치에 이미 편입되어 있거나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을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이라 부른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그들과 연합했던 다함께와 같은 정파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의 일부는 특별히 선거 국면에서는 부르주아 정파와 연합하거나 비판적 지지를 보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둘째, 의회주의, 수권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강령을 내걸고도 선거 시기에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했던 사노위, 노혁추 같은 세력을 사회주의 정치에서 후퇴한 기회주의 정치로 판단한다. 이들은 선거(연합)를 통해 대중투쟁 확산과 정치세력화를 주장했지만, 결국 계급투쟁과 무관하게 선거운동만 한 셈이 되었다.

 

셋째, 노동자(사회주의)후보를 세워 선거에 참여하려 했으나 현실 조건이 되지 않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이다. 이들은 본질에서 후보전술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 세력과 유사하다. 다만 현실에서는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보전술에 대해 제한적인지, 적극적인지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넷째, 부르주아 정치와 단절하거나 선거전술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치단체와 혁명적 사회주의자 개인들인데, 이번 선거에서 모두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했다.

 


3. 정치노선별 대선 참여와 거부의 이유

 

위의 정치노선들이 이번 대선에 참여하거나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부르주아 정치인 문재인을 지지하거나 비판적 지지한 세력은 제외한다.)

첫째, 변혁모임, 사노위, 노혁추 등은 대선 시기 정세개입(야권연대 반대)을 통해 대중투쟁을 촉진하고 이후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기조 하에 후보전술을 구사했다.

 

“‘대선기획단’의 “반자본주의 반신자유주의,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민중 독자후보, 당 건설 및 대선 대응 분리”라는 정치적 기조와 ‘변혁모임’의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대통령 독자 후보 출마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통해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제안에 따라, 이러한 정치적 기조에 동의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를 결성했다. 선투본은 논의를 거쳐 2012년 대선투쟁의 기조를 ‘투쟁하는 노동자 대통령 / 탐욕의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대선투쟁 / 야권연대가 아닌 노동자 계급정치 강화’로 결정하여 2012년 대선투쟁에 임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하지만 이러한 정세적인 당위성과는 다르게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노동자당(노동자혁명당) 건설 노선의 후퇴와 변경, 그리고 변혁모임으로 표현되는 전투적 노조운동의 위기 상황에서 정세개입과 당 건설 당위의 압박이 작용한 결과 무리한 선거전술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주체역량의 문제를 계급투쟁의 성과로 해결 하려하지 않고, 통진당 사태 이후 공백이 생긴 진보정당 영역을 선거의 매개로 차지하려 했던 것이 오류의 핵심이다.

 

둘째, 노건투, 해방연대, 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 등은 역량부족, 후보전술 절차와 선거 강령상의 문제, 그리고 진보신당 참여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며 노동자후보 캠프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변혁모임의 선거논의 과정에서 독자후보투쟁에 대한 반대 이유를 밝혔고 김소연 후보 선거투쟁에 함께 하지 않았다. 변혁모임은 아직 후보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정돈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정돈하지도 않고, 조직의 실력을 냉정히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선거에 뛰어드는 것은 선거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며 정치적 투기라고 판단했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노동자 후보를 내세워 대선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자 역시 선거로는 안 된다는 식의 반응, 대중운동이 바로서야 한다는 진지하지만 상투적인 반응 등 여러 이야기가 떠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것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역량부족 자체였고 그것 이상의 한계는 없다. 선거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선거투쟁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후보가 필요했고, 대중운동이 바로 서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제대로 서지 못해 대중운동이 지리멸렬한 탓이다.”

-김광수, 해방연대, 해방 75호, [낡은 것, 뒤쳐진 것과 단절하고 사회주의 정당 건설하자]
 

이들의 후보전술에 대한 비판은 일면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아쉽게도 부르주아 선거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부르주아 선거참여를 전술의 하나로 판단하는 낡은 사고를 보여주었다. 또한, 강령에 입각한 당 건설이라는 원칙과 낮은 차원의 공동전선 형태인 변혁모임 참여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후퇴하거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거전술' 문제는 일찍이 코민테른 시절부터 볼셰비키와 공산주의좌파 사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레닌과 호르터의 논쟁, 트로츠키와 보르디가의 '혁명적 의회전술' 과 '보이콧전술' 등으로 알려진 선거전술문제는, 흔히 알려진 대로 ‘부르주아 의회를 통한 혁명 전략의 부정’이나 ‘부르주아 의회(선거)의 이용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본질이 아니다.


이것의 본질은 러시아의 후진적 정치상황에 적합한 볼셰비키의 의회전술을 일반화하여 유럽 국가들에도 적용하려는 코민테른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일정수준 괘도에 올라 의회의 이용 자체가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된 유럽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의 반의회적 혁명 전략이 대립한 결과이다. 당시의 유럽은 이미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계급 일부가 되어 버렸고, 이들이 진출한 의회가 오히려 노동자계급을 학살하는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은 의회를 이용하기보다는 의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반의회적 노동자평의회 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현재에도 국제적 혁명조직들은 선거참여와 선거거부에 대한 선거원칙을 강령에 정확히 명시하고, 그에 복무하는 전술을 펼치고 있다. 즉, 부르주아 선거는 전략의 문제이고, 현실적으로는 '선거개입' 과 '선거거부'라는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조직은 '선거전술' 문제를 강령으로 정립해야 한다.

 

셋째,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부르주아 선거와 후보전술 자체를 반대하였다. 즉,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원칙을 강령수준으로 판단하여 “노동계급에게는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하는 투쟁만이 계급 간의 교착상태를 깨고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 수 있다. 선거가 아닌 대중의 직접행동으로, 대리인과 우상을 내세우지 말고 투쟁하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부르주아 정치를 거부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직접정치를 실현해 나가야 할 것” 임을 주장했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4쪽

 

마지막으로 대선에 참여한 70%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선거제도를 자신의 삶으로 완전히 받아 들였는가! 이다. 한국에도 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5년간 부르주아 선거제도가 확실히 정착되었다. 즉, 모든 정치가 선거를 통해 결과 맺으며 선거 메커니즘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었고, 대중들을 자연스럽게 투표소로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번 선거에 투표율이 높은 것은 계급의식 측면에서 계급적 열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면적으로 흡수된 결과이기도 하다.

 


4. 후보전술의 실패와 계급의식의 왜곡

 

지난 대선에서 노동자후보를 내세운 세력은 왜 실패하였는가?

 

한마디로 기획단계에서부터 모든 과정이 총체적으로 실패한 결과였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상관없는 자신들만의 후보선출과정에서부터 선거운동기간 동안 선거투쟁이라는 목적에 맞는 전술은 부재했다. 특히 짧은 준비기간은 후보등록 자체를 목표로 만들었고, 선거운동을 치를 역량조차 부족하여 처음부터 진보신당의 직간접적 도움이 필요했다. 말로는 ‘구속되는 후보’, ‘투쟁하는 노동자 집단후보군’을 내세웠지만, 현실에서는 철저히 선거법의 테두리 안에 갇힌 채 선거유세에 전념 해야 했다. 대중 집회, 광장 점거, 자본주의 상징 타격 등과 같은 투쟁은 벌이지 못했고, 이들이 공격적으로 무시해야 했던 선거법은 오히려 삼성, 현대차 등의 자본 측에서 무시하며 이들의 선거유세를 방해하는데 사용되었다.

 

“후보를 내세워 노동자투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조급성이 후보중심의 전술을 강제하고, 위로부터의 공동전선, 심지어 사민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을 허용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게 되어, 결국 선거개입은 항상 대리주의와 선거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더욱이 국가보안법의 탄압에도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10여 년 전으로 후퇴하여, 사민주의자들도 상당수 수용하는 경제 요구를 노동자계급의 행동강령이라고 내걸고, 사민주의 세력과도 기꺼이 연합하면서, 대중투쟁과 직접행동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개입이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이다.”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창간호, [코뮤니스트조직의 정치원칙을 세우며], 43쪽

 

lee1.jpg 
 이런 정치적 퇴행의 근본 원인은 사실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라는 당면과제가 난관에 봉착하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선거개입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로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여전히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 검증에 따른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의 재구성을 통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새로운 주체들과 공산주의 운동이 계급투쟁 속에서 직접 만나, 계급 안에서 혁명적 주체를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이루는 것을 통한 당 건설을 해 나가는 원칙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 없이 혁명당 건설은 불가능하다. 당 건설의 주체와 강령을 포기한 당 건설이야말로 주체의 조건이 아닌 진보 정당류와 노동조합과 같은 주변 변수에 흔들리는 당 건설 노선일 수밖에 없다.

 

김소연 선본은 선거 이후 다음과 같이 자체적인 선거평가를 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얼마 안 되는 좌파 정치 역량으로 2012년 대선을 치러낼 수 있을까 회의하고 우려하는 현실에서!
그래서 노동조합의 일부 상층 지도자들이 문재인과 안철수 등 자유주의진영에 투항해 버리고, 현장 활동가들이 좌절하여 노동조합‘만’으로 후퇴해 버리거나, 좌파 정치 활동가들이 역량 부재를 탓하며 서클정치에 안주해 버린 척박한 노동정치의 현실에서!
그 얼마 안 되는 역량을 가지고, 노동자대통령 선투본은 2012년 대선투쟁을 역동적으로 완주함으로써, 독자적 노동자계급정치의 가능성을, 그 꺼져 가는 불꽃을 다시 살려냈다.”

 -‘노동자대통령 선거투쟁본부’ 보고 및 평가(안), 2013년 1월 25일


이러한 평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왜곡과 자기 만족형 평가다. 김소연 선본 평가서에서 주장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하여 독자적 노동정치 자체를 포기해 버리려 한 현실”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의 위기에 절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민노당 시절부터 노동자 직접정치와 노동자 민주주의가 실종된 대리주의 정치무대를 떠난 상태였다. 과거 노동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한 것도 노동자정치 환상과 의회주의 환상이 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졌으나 ‘독자적 노동정치’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민노당은 처음부터 독자정치가 아닌 민족주의와 연합하여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하는 의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김소연 선본을 주도한 사노위 또한 8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고 있다.


“97년 이후 노동자정치세력화와 관련해 노동자·진보정치진영 내에서 형성된 양자택일적이고 왜곡된 대립구도인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노위 8차 총회 결과, 2013년 1월 12일


사노위에서 말하는 선거냐-대중투쟁이냐의 논쟁은 왜곡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운동진영의 미숙함. 즉 그 동안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근본적인 노선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한편, 현장투쟁, 현장복원 등을 시도하고 있는 사회주의 세력들은, 여전히 전투적 조합주의와 낡은 정치노선(공동전선, 행동강령)을 버리지 못해 계속된 운동의 축소와 한정된 현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예상된다.


“이러한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후보들의 선거투쟁은 자본가정당들에게는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조직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의 의지와 희망을 대변했다. 이 의지와 희망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소중한 거름이다.”

-이용덕, 노건투, 정세초점, [2012년 대선] 노동자후보투쟁이 남긴 것, 2012년 12월
 

특별히 대선을 지나면서 구사노련 주축 세력들이 혁명당 건설 시기 상조론과 노동자계급정당 흐름(변혁모임) 참여 결정으로 당 건설 운동 흐름을 사노련 이전으로 후퇴시킨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사회주의당 건설을 폐기한 세력에 파산을 선고하고 새로운 틀에서 혁명당 건설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후보전술과 무관하게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투표한 70%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계급의식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우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앞서 말한 대로 부르주아 선거 메커니즘에 의해 각자의 정치의식에 따라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하였다.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반정부 의식, 반자본주의 열망은 대중행동이나 선거거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투표소로 향하게 하였다. 선거 국면에서는 모든 열망이 정치적 요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투표행위라는 제한된 여과장치 속에서 모든 것은 가장 큰 이슈나 정권교체라는 목표로 흡수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열망을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야권연대로 왜곡시켰다면, 노자후보는 선거에 제한 당한 노동자정치로 왜곡시켰다. 노동자정치를 주장하면서도 부르주아 정치를 흉내 내는 세력들은 노동자정치를 노동자계급 고유의 영역인 투쟁의 장에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선거공간에서 할 수 있다면서 그 속에서 선전선동과 조직화를 꿈꾸며 선거운동을 선거투쟁으로 미화시켰다. 하지만 선출된 사람에 대한 통제권과 소환권을 갖지 않는 모든 선거는 부르주아 정치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선거는 정치와 일상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투쟁의 공간에서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고 자기 조직화를 통해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실패 속에서 계급이 단련되어 스스로 전망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투쟁에서의 자기 조직화와 직접정치는 더욱 어렵다. 따라서 정치조직은 정세에 따라 원칙을 바꾸면서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자체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의식 자체에 장기적으로 개입하여 계급 고유의 공간에서 직접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5.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거부 입장

 

그렇다면 부르주아 선거 자체를 거부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과 같은 세력은 왜 보이콧에 대한 행동을 기획, 실현하지 못했는가를 해명해야 한다.

 

“선거유세용 집회나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대중총회를 개최하자. 대중총회, 대중집회를 통해 노동자들이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수평적 노동자 직접행동’, ‘노동자 직접정치’를 실현하자!


선거 시기만큼이라도 모든 것에서 소외되었던 비정규 중소 영세노동자, 장애인, 소수자, 빈민, 실업자, 이주노동자 등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집중하자. 노동자투쟁과 미조직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직접행동이 결합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행동(연대)’을 실현하자!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1월

 

lee2.jpg


단순한 정책반대, 인물반대를 위한 보이콧이 아닌 계급투쟁과 연관된 선거거부는 대중의 불만과 욕구가 기존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표출되었을 때 가능하다. 여기에는 선거거부 투쟁의 경험과 장기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장기적 계급의식 관점에서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준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의 입장이 행동을 전제로 할 수 없었다. 대선에 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역량이 실제 부르주아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고, 선거거부라는 행동 자체가 아직 대중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선거거부 행동을 위해서는 선거 환상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 노동자 직접정치에 대한 열망, 노동자 민주주의의 숱한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선거거부를 구호로만 외치는 것은 정치에 대한 기권이 아니라 장기적인 개입조건 창출을 위한 선전활동, 정치원칙 정립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부르주아 선거 환상에 대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중행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만 다음의 선거 국면에서 정치 활동의 공간을 열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6. 선거 환상의 지속과 ‘노동중심’ 진보정당 건설의 허구성

 

앞서 우리가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이라고 부르는 전문적인 선거(의회)주의 세력은 선거 이후 왜 이합집산하고, 어떻게 선거 환상을 지속시키는가?

 

이들은 본질에서 ‘선거’가 모든 정치의 중심이기 때문에, 선거주기에 따라 발 빠르게 재편되는 속성이 있다. 더욱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한 정당이거나 소수 의석의 정당은 경쟁력 확보와 최대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위해 선거를 염두에 둔 이합집산이 필수적이다. 이들 모두는 선거에 지든 이기든 즉시 다음 선거를 위해 선거 환상을 지속시켜야 한다. 2012~13년 이른바 ‘노동중심 정치’가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은 본질에서 노동자정치 고유의 계급성과 전투력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진당 사태 이후 혼란에 빠진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를 다시 한 번 끌어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상층부 중심의 지지세력 확장으로 이어지던 아래로부터의 정치세력화로 이어지던 결국 의회주의와 조합주의의 결합이기 때문에 낡은 운동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한편, 지난해 11월 구성된 ‘노동정치연석회의’는 넉 달에 걸친 논의 끝에 노동포럼, 노동자정당추진회의, 노동자연대다함께, 혁신네트워크가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기존 노동자 정당들의 분열ㆍ분화로 말미암아 조직 노동계급 내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노동계급의 여러 정치 경향들이 연합해 이 공백을 메우자는 것이 ‘노동정치연석회의’의 취지였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이라는 구상은 통합진보당 분당 이후 발생한 스탈린주의와 개혁주의의 분화에서 개혁주의의 정치 공간을 메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양당이 제도권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한국 정치 맥락에서 이런 프로젝트는 여전히 필요하다.(그렇더라도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정당이므로 특정 쟁점을 놓고 사안별 연대를 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 또한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인 이른바 개혁주의 정치의 공간을 메우려는 사고만 있을 뿐, 파산한 낡은 진보정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계급정치를 실현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만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는 개혁주의자들의 본질은 노동자계급의 주변에서 현 자본주의 위기 상황을 일시적이거나 주기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 개혁과 보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노동정치, 진보정치로 포장되어 계급에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자본주의에 포섭된 세력이다.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법 제도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고칠 수 있다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조금 더 고통을 견뎌 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자본주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혁명을 통해 낡은 체제를 철폐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직접 사회를 운영하는 것만이 기나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러한 진실을 감추고 오히려 자본주의 회생의 가능성과 환상을 그럴듯하게 유포시키는 이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반드시 배신할 거라며 추상적이고 종파적으로 비난하는 자세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변화하는 노동계급의 의식과 운동에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좌파적 개혁주의 운동과 그것의 성공적 활동을 지지해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99호, 2013년 3월 4일, [분열을 넘어설 진보정치 재편,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주의 수호자들인 개혁주의자들을 노동자계급의 주변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빈자리에 조합주의와 선거주의를 결합한 낡은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앉히려는 행위야말로 기회주의의 전형이라 하겠다. 우리는 1920년대 제3인터내셔널 내부의 기회주의에 맞섰던 호르터의 경고를 오늘날 다시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른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에게 오늘날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황폐화 하고 노동자 계급을 오염시키는 기회주의야말로 우리가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만 배 나쁘다는 경고를!

 

“다시 공산주의자들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갈 것입니다.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은 선거에서의 투표를 위해 옹호될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위해 건설하는 당 대신, 관성적으로 정당들을 조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애국주의자들 및 부르주아 분자들과의 의회주의적 타협이 다시금 등장할 것이며, 그로 인해 결국 서유럽에서 모든 혁명은 점진적인 과정이 될 것입니다. 연설의 자유는 억압당할 것이고,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추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발생했던 모든 관행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기회주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 대열 외부에서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과 힘을 황폐화하는 기회주의가 다시 섞여 들어오는 것은 좌익이 너무 급진적으로 되는 것보다 수천 배 더 나쁠 것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920년 
 

 

결론

 

이상과 같은 대선평가는 참담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낡은 것뿐 아니라 운동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도 있다.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것과의 단절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시켜야 한다. 내부모순의 극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 이데올로기 투쟁의 전면화

 

계급의식의 발전은 노동자의식을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절대다수의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의식의 발전은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조건들에 반대하여, 즉 그들의 역사적 혁명적 과업을 생각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방해하고 끊임없이 파괴하는 조건들에 반대하여 이루어진다.”

-‘당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e) 38권, 1948년


낡은 운동과의 단절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이유는 첫째, 노동자운동이 전체적으로 퇴조하는 현상은 낡은 운동의 몰락과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운동 내부까지 침식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전면화된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식을 방어할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낡은 운동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사회주의 운동의 유산을 극복하고 과거 운동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면전인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서는 첫째, 계급투쟁의 열쇠인 계급의식의 중요성을 전면에 부각시켜, 장기적이고 총체적인 계급의식 발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모든 대중투쟁 공간에서 자유롭고 제한 없는 정치토론을 보장받고 확장시켜야 하며, 새로운 노동자토론문화와 토론 능력 발전을 위한 혁명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셋째, 혁명조직은 노동조합 등 모든 대중조직에서 선전활동과 정치활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 창출

 

“미국 즉 노동력의 88%가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않고, 20%가 실직상태이거나 혹은 할 일이 충분치 않아 매일매일 점점 더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며, 거의 노동조합원에 맞먹을 정도의 많은 프롤레타리아 혹은 후보 프롤레타리아가 감옥에 있는 국가에서, “노동조합을 혁명 전략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발상 즉 혁명을 위해서는 “노동조합을 차지한다”는 식의 오늘날 아직도 다양한 그리고 잡다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선전하는 발상들은 우스갯소리에 불과하다.”

-로렌 골드너.[Andy Stern 종말과 현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조합 문제], <반란자노트> 2호, 2010년 10월


로렌 골드너가 말한 미국의 상황이 한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기나긴 계급투쟁의 침체기를 지나 아큐파이 운동으로 대중투쟁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낡은 운동은 저물었고 새로운 운동이 소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낡은 노동조합, 진보정치를 붙잡고 새로운 운동 창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데올로기 투쟁과 함께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계급 스스로 창출해야 하지만, 낡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적 노력이 필요하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되고, 계급투쟁은 투쟁의 경험과 현재의 정세에서 창출된다. 낡은 노동조합을 넘어 보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 노동조합 자체를 넘어서려는 의식적인 투쟁만이 조합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직접행동을 제안하고, 실제 노동자 행동그룹이 출현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노동자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국제주의 관점에서 국제적 계급투쟁의 흐름과 새로운 운동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조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계급투쟁은 다시 한 번 혁명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분출되는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 그리고 깊은 연대의식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계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을 확산시키는 비공인파업, 점령운동 등 새로운 노동자연대의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셋째, 지역, 국경을 넘어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실현하는 국제적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모든 조직 형식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철저히 관철되고 수평적인 계급 연대에 기반을 둔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위원회, 대중총회, 지역 투쟁평의회와 같은 평의회 형식이어야 한다. 모든 노동자 대중조직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위계질서 없는 수평적 대중총회를 보장받아야 한다. 대중총회 결정에 따라 모든 간부를 즉시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총회는 지역으로 확장되어 비조합원, 실업자도 참여해야 한다.


셋,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적인 파산이 명백해졌고, 공산주의 사회의 전망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공산주의라는 대안 사회가 인류의 단순한 희망과 꿈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물질적 필요성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운동의 전면화를 위해 아래와 같은 실천을 해내 갈 것이다.

 

첫째, 사회주의 당(노동자혁명당) 건설 노선의 파산선언과 새로운 조건에서의 공산주의 노동자당 건설 노선 제시할 것이다. 새롭게 건설될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어야 한다.

 

둘째, 중단되었던 강령투쟁을 심화시켜 국제적 수준의 강령원칙을 정립하고,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세력을 재조직화할 것이다.

 

셋째, 국제적인 수준에서 코뮤니스트,국제주의 세력과 교류 연대를 활성화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고, 국제주의 행동의 전면화를 통해 국제적인 수준에서 계급투쟁 개입을 실현할 것이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신들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 분출과 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집합적 존재 여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낡은 운동과 단절하고 공산주의 정치와 노동자투쟁이 직접 만나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라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모든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하며, 그 목표에 이르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투쟁에 달렸다.

 

우리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 길이 먼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현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투쟁과 공산주의 전망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