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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글씨]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인터뷰

자본주의는  망해가고  있어!

 

노동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위한,  새로운 사회로 가야 해!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인터뷰

 

남궁원|국제코뮤니스트전망

 

 

 

 

김수행 선생은 한국 맑스주의 1세대를 대표한다.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맑스주의 운동과 이론의 대중화를 위해서 노력해 온 분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서 골똘히 생각한 문제가 있다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선생의 그 ‘원칙’이 무엇인가였다.
인터뷰는 크게 네 가지 틀로 진행했는데, 맑스주의 입문 동기, 현 세계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정세 인식, 새로운 사회와 과거 소련 사회 평가, 복지 담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인터뷰 내내 느낀 답은, 선생의 ‘맑스 원칙’과 ‘노동자 해방’이라는 굳건한 이론적 원칙이었다. 게다가 선생은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맑스의 정치경제학을 현학적인, 문헌학적 경향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설명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몸에 밴 탓이리라.
선생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는 분명 독재 정권의 암흑시대였다. 선생의 지속된 맑스주의 ‘이론 연구 투쟁’은, 한국 사회 「자본론」 완역으로 빛났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공산주의 유령은, 그래서, 이렇게 성큼 한국에 다가올 수 있었다.
선생과 인터뷰는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3시간 정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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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2008년 자본주의 공황 이후 유럽에서도 「공산당 선언」의 판매량이 급증하는 등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맑스주의 관련 서적들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맑스주의를 어떻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까?

 

내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들어간 게 1961년이야. 경제학이 너무 재미가 없어요. 무슨 소리인지, 현실적인 감각이 전혀 없더라고, 방법이 없느냐 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일본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1학년 때, 책 읽기 위해서 일본 말을 서너 달 배웠어. 그때 상과대학에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책이 많이 남아있어서 일본 책으로 이론에서, 경제사에서, 경제사상사에서, 맑스와 맑스의 위치를 공부했지.

 

독학으로 맑스주의 입문


0 선배들 권유가 아니라, 선생님은 독학하셨네요. 그러면서 신영복 선생님하고 남산에서 고초도 당하셨죠?

 

우리 때는 권유 그런 거 없었어. 독학을 했지.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으로 [금융자본에 관한 일 연구]를 썼는데, 힐퍼딩과 독점자본, 금융자본, 산업자본, 은행자본이 어떤 식으로 융합되느냐 하는 공부를 했지. 주로 일본 책 읽으면서,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경제학과 조교가 됐어. 신영복 선생님과 만나는 것은, 상과대 경제학과에 동아리가 있었는데, 경우(經友)회가 있었지. 내가 들어갔는데, 6기더라고, 신 선생은 2년 선배니까 4기지. 1년에 선후배 관계로 한 두 번씩 보는데, 신 선생하고 통일혁명당 사건에 걸린 것은, 내가 종암동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가까운데 신 선생이 살았어. 그때 신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하고 있었어, 내가 석사 논문을 쓰고 나서 하도 힘들어서, 재밌는 책이 없느냐고 했더니, 신 선생이 갖고 온 책이 레닌이 쓴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 [꽃 파는 처녀]로 기억해, 근데 보니까 한글로 돼 있더라고.

 

0 선생님 그러면, 북한판본이네요.

 

맞아, 북한에서 나온 책이야. 그때는 그런 책이 남한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 그걸 보고서, 어, “이거 어디서 난 거에요” 물었지. 그랬더니 신 선생이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읽고 나서 돌려줬지. 근데 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는데, 신문에 신 선생이 잡혀가고 청맥회가 거론됐지. 나는 68년 한여름에 잡혀 들어갔지. 상과대 경우회 사람들이 잡혀가고, 나한테도 올 것 같더라고. 부산에 도망가 있었는데, 내가 조교라서 학교에 전화했더니, 학교 선생님들이 “정보부 사람들이 교무실에 매일 와서 앉아 있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학교에 갔지, 바로 잡아가더라고. 근데 사건이 종결될 때가 된 거야. 나 같은 사람은 크게 가치가 없는 거야. 신 선생하고 걸린 게 별로 없어서,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 조사받으면서, 신 선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랬지. 그러다가 많이 맞았어. 정보부에서 사건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지, 신 선생이 진술한 내용을 내게 던져주더라고. 근데 보니까, 책 빌린 내용밖에 없잖아. 그 사람들이 “이걸 읽어보고 인정해” 그러잖아, 그래서 인정했지. 그 당시 내가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부 수사관들이 조교하고 조교수를 구분을 못 해서 신 선생이 나한테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거야. 나갈 때쯤 되니까, 정보부 수사관이 “당신은 기소 유예될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주더라고. 기소유예 받은 거지. 그러고 나서 학교 조교 사표를 냈고, 은행에 들어가서 영국에 갔지. 런던대학교 버크벡(Birkbeck) 대학인데, 거기에 영국 좌파들이 다 와 있었다고. 내 지도교수는 로렌스 해리스(Laurence Harris)라는 사람이고, 심사위원은 벤 파인(Ben Fine)이었어.

0선생님은 영국에서 공황 연구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책 [세계 대공황] 부제가 ‘자본주의 종말과 새로운 사회의 사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번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가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지금 자본주의 사회는 붕괴하고 있나요? 흔히 말할 때, 자본주의는 경쟁자본주의, 국가주도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 이런 식으로 발전해왔는데, 현재 신자유주의가 파국을 맞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2007년 미국 금융위기 시점부터 보시는 겁니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거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금융 주도적인 경제체제로 됐기 때문에, 고용이 늘지 않아. 금융이 주도하다 보니까, 선진국 산업 자본들은 중국에 투자하고 노동자를 착취해서 생산하여 자기 나라나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이런 경제형태가 된 거야.

 

0 선생님, 중국이 세계 공장화됐다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지. 신자유주의는 실제로 1979년 5월 영국의 대처가 수상이 되고, 1980년 11월 미국의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어 추진한 정책이야. 그전에는 1950~1970년대가 자본주의 복지국가 시기야. 이론적으로 케인즈주의가 영향을 줬지만, 복지국가 시대에는 실제로 노동조합하고 서민의 힘이 굉장히 강했다고, 복지수준, 생활수준도 높았지. 대처와 레이건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꺾기 시작해, 그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야. 1974년부터 경제가 내리막으로 가기 시작했는데, 이 친구들이 노동법을 개악하고, 레이건이 미국 항공 관제사 노조 파업을 탄압하고 해고를 했지, 그러면서 긴축 정책을 펴는 거야. 이게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인데, 그러니까 산업자본이 파괴되면서, 실업자도 많이 생기고, 경기가 불황에 빠졌는데, 그렇게 되니까 금융밖에 국제경제력이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금융자본을 지원하여 전 세계적으로 주식시장, 자본시장을 자유화하면서 경제를 살리려고 했단 말이야. 그런 사이에 산업자본은 갈 데가 없으니까, 중국에 투자하기 시작하는 거야. 세계적으로 중국이 세계 공장이 되고, 금융은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세계 경제가 구성됐어. 금융이 붕괴했다는 이야기는, 경제가 다 망가졌다고 보면 돼. 경제를 일으킬 방법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옛날과는 다르지. 산업자본의 우위 하에서 금융이 산업자본을 도왔는데, 금융자본이 주도했기 때문에, 산업자본이 기반을 확충하지 못했어. 경제가 전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그대로 증명이 되고 있잖아. 2007년, 2008년 전 세계적으로 공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니까. 미국은 자동차 산업 살린다고 수천억 달러를 넣은 것뿐이야. 실업을 해소하는 방법이 없는 거야. 금융자본은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 가지고, 금리가 제로잖아, 온갖 투기를 하는 거야. 손해 본 것을 보충하려고. 투기를 자꾸 한다는 얘기는 중산층에서 부를 뺏어갈 수밖에 없어. 중산층이 몰락하는 거야. 1%대 99% 사회로 가는 거야.

 

“자본주의 체제는 망해가고 있어”


0 바로 이어서 재정위기도 말씀해주세요

 

2010년쯤 그리스 재정위기가 터지는데, 공황이 오기 전에 그리스 은행들이 국제금융자본(외국계 은행이고 주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은행들)한테서 돈을 차입해서 온갖 투기(부동산, 주택담보 대출)를 해서 돈을 잃어버렸어. 만기가 되니까 채권은행한테 돈을 갚아야 하는데, 그리스 은행이 정부에 돈 좀 꿔달라고 구제 금융을 신청한다고.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려줬어. 근데 그리스 정부는 국채를 발행했으니까 만기에 국채를 갚아야 하는데 경제는 망해 가고 돈은 없어 갚을 수가 없게 된 거야. 그러니까 국제채권은행단이 트로이카(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에, 그리스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놓고 돈을 안 갚는다고 비판하면서 트로이카가 자기들의 채권을 추심해달라고 강요한 거야. 그래서 트로이카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자기의 자금(근데 이 자금은 각 회원국이 국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혈세, 세금이야)으로 국채를 대신 갚아주고, 그리스 정부에 예산에서 흑자를 내서 자기가 대신 갚아준 ‘구제금융’을 상환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판이야. “공무원 수를 줄여라”, “공무원 봉급을 줄여라”, “공무원 연금을 줄이고 퇴직 연령을 높여라”, “최저임금 수준을 더 낮추어라”, “국영기업들을 매각하라”, “공공요금을 인상하라” 등등, 국민들이 죽어나가는 거야. 불경기인데, 국제금융자본을 위한 긴축 내핍 정책을 쓰니까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하고. 만약에 산업자본을 살리라고 트로이카가 돈을 주었다면, 고용, 소득이라도 늘잖아. 이런 상태가 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자본주의는 망했다는 거야.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신뉴딜정책을 얘기하고,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운운하면서, 신뉴딜정책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신뉴딜정책으로 회복이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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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채무가 꽉 차있어. 국제금융자본들은 채무가 더 늘어나면, 자기가 갖고 있는 국채를 채무국들이 상환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빚낼 수도 없고, 각국의 신용등급을 계속 내리고 있잖아. 자금 조달도 힘들어. 미국도 마찬가지야. 전 세계적으로 고용이 늘 수가 없어.

0중국 경제도 하락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건설 붐이 일었는데, 아파트 200만 호가 텅 빈 상태로 있다고 합니다. 중국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의 가장 큰 시장이 미국이야.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 원자재를 사서 수출하잖아. 근데 중국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중국 노동자들도 파업하고 있잖아. 중국 자체도 산업자본이 제대로 성장이 안 되는 거야. 중국 같은 나라에서도 계급투쟁이 활발히 일어날 거야. 중국은 세계경제의 엔진이 될 수 없어. 세계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0 선생님은 현 자본주의가 역사적 경향으로 볼 때 붕괴경향으로 간다고 보시는 거죠. 그러면 자본주의가 번영기에서 팍 꺾이고 있는데, 봉건제보다 진보적 생산양식인 자본주의는 이제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맑스는 1825년부터 10년 주기로 자본주의의 경기 변동을 본 거야. 1847년의 「공산당 선언」에 보면,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시장을 만들어내고 생산력을 거대한 규모로 발전시켰는데,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격렬하게 폭발하는 ‘공황’이 자본주의에 치명적 타격을 준다고 보는 거야. 공황에서는 노동자나 기계가 남아돌지만, 이윤의 전망이 없기 때문에 자본가가 생산을 개시하지 않으며, 이리하여 노동자나 서민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것이지.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차지하면서 이것을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혼자의 이윤 획득에 사용하기 때문에, 인민 전체가 실업과 빈곤과 자살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야. 이것이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이잖아. 노동자들은 생산의 3대 요소(자본, 노동, 토지)는 남아도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못 사는가를 고민하면서, 자본가계급이 생산수단을 독차지하고 있는 ‘생산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생산수단을 노동하는 사람들이 차지하여 모든 사람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게 되면, 자본주의는 사라지면서 더욱 나은 새로운 사회가 오는 것이에요.

 

0 금본위제에서 달러 본위제로 갔는데, 미국이 발권 국가로서 달러를 계속 찍어내고, 군사력에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해서, 미국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런 면도 있겠지. 근데 1973년 10월 오펙이 기름 값을 4배나 올렸는데, 그때가 베트남 전쟁 때야. 미국이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내서, 세계시장에서 원자재 가격, 온갖 물가 폭등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펙이 기름 값을 올릴 수 있었어. 3차 양적 완화 정책을 쓴다고 하는데, 실제로 달러 값이 ‘상당히’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 다른 나라에서 세계화폐로서 달러를 안 가지려고 할 거라고. 안정적인 세계화폐가 없으면 국제간의 무역이나 자본거래가 크게 축소할 수밖에 없고, 세계경제는 1930년의 세계 대공황처럼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0 선생님, 유로화, 위안화가 세계화폐로 등장할 가능성은 없나요?

 

지금까지 미국 달러만큼, 다른 나라들이 그런 힘을 갖지 못해. 유럽이 경제통합은 했는데, 정치적으로 하나의 힘이 안 되잖아. 미국처럼 연방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고. 유로존이 애를 먹는 이유가, 각국의 재정이나 금융을 하나의 집단으로 유럽연합이나 유럽 중앙은행이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야. 유로존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야 유로화가 세계화폐로 가능한데, 지금 그럴 능력이 하나도 없잖아. 중국은 자기 나라 안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위안화가 세계화폐가 될 수가 없어. 아까 질문에서 얘기했듯이 미국이 군사력으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군사비 지출이 대폭 증가해야 할 것이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란 등지에서 온갖 일을 벌이고 있잖아. 금융자본은 미국의 재정적자와 국가채무의 증가를 싫어해서 군사력으로 세계헤게모니를 유지하는 것까지 반대할 거라고.

 

0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예를 들면 케인즈주의를 다시 부활시킨다든지?

 

케인즈주의 방법은 안 되고, 부르주아들이 뭘 하냐면, 돈을 찍어내어서 증권시장을 강화하고 있어. 이게 양적 완화 정책의 핵심이야. 돈이 산업자본으로 가서, 노동자의 실업을 해소하는 그런 정책이 안 나온다고. 은행들이 기업한테 대출을 안 해줘. 돈 떼일까 봐. 스스로 금이나 곡물 등에 대한 투기를 자꾸 하기 때문에, 돈이 인민을 살리는 방법으로 안 간다는 거야. 금융공황을 겪으면서 금융자본가들과 증권투기꾼들이 큰 손실을 보았는데, 그들은 언제 주식가격과 증권가격이 다시 폭등할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어. 양적 완화 정책으로 돈 푼다고 하는데, 산업자본가는 큰 이익을 얻을 수가 없어.

 

0 이번 세계 대공황을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출발했다고 보시는데. 1929년 세계 대공황과 지금 세계 대공황의 차이는 어떻게 되나요?

 

1929년 공황이 일어났는데,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식이 미국에서는 루즈벨트가 뉴딜을 했지. 실업자와 빈민들이 데모하거나 굶어 죽으니까, 사회보장제도로 못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푼 거야. 그리고 댐, 도로, 주택을 정부가 건설해서 일자리를 만들어 준 거야. 독일에서는 나치가 등장하여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자원을 획득하고 ‘생활권’을 확대해야 독일이 번영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게르만 민족주의가 나오는 거야. 1930년대 공황은 전쟁을 계기로 회복되는 거지, 케인즈주의가 뭐한 게 아니야. 히틀러가 전쟁을 위해서 군수산업을 일으키니까, 딴 나라도 할 수 없이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거야. 전쟁이니까 정부가 개입해서 군수산업을 확대하면서 일자리가 생기고 경제가 회복된 거야.

 

0 선생님은 1930년대 대공황시기 무솔리니, 히틀러, 파시즘이 나온 것처럼, 지금도 노동자계급이 투쟁을 제대로 못 하면 민족주의나 파시즘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나 서민을 살릴 수 없으니까 이민자나 회교도를 박해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야. 이런 외국인 혐오주의를 강화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반발을 억제하려는 것이지. 각국에서 나치계통의 정당이 조금씩 세력을 얻는 것도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한 가지 전략이야. 이것은 결코 노동자나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 아니야.
 

0 그런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가 일본과 독도 분쟁하고 있는 거죠.

 

맞아.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등 온갖 나라들이 경제에 골치를 앓고 있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는 수밖에 없어. 이윤추구가 아니라, 같이 일해서 주민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해.

 

“구소련사회는 자본주의 사회”


0 자연스럽게 대안 사회 문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말하려면, 1917년 러시아 혁명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은 최근에 쓴 책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6장에서 “소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결국 소련 사회가 레닌의 정치혁명 시기나 스탈린의 공업화 시기에도 결국 자본-임금노동 관계가 지배적이었다고 보시나요?

 

그래요. 자꾸 생각하면 할수록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자체도 소련 경제를 어떻게 개발할 거냐 하는 문제에 집중된 것 같아. 혁명과정에서 적군이 백군을 진압한 뒤 ‘신경제정책’을 실시하거나 ‘국가자본주의’를 이야기하거나 농업 집단화나 중화학 공업화의 추진 등에서 새로운 사회의 특징인 ‘노동자의 해방’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력을 증강시킬 수 있는가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되요. 내가 자본주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맑스가 얘기할 때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거야, 임금노동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맑스대로 얘기하면 상품, 화폐, 임노동 관계가 소멸해야 돼. 근데 소련에서는 자꾸 경제개발 문제만 생각하는 거야.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계획경제로 보느냐, 아니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로 보느냐는 가장 핵심적 쟁점이거든. 그런데 특히 스탈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기본 문제라는 것이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무계획성이다, 계획적으로 운영하면, 자본주의적 공황도 없고 낭비도 없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개념이 빠지는 거야. 국유화의 의미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에게로 소유를 이전하는 것이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표지인데, 소련에서는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군수산업 등 각종 산업을 건설하는 이런 식으로 갔다고.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인간의 탈을 쓴 게 자본가라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국가, 당과 정부의 관료나 노멘클라투라가 자본가계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

 

0 선생님, 소련의 국영기업과 달리 예를 들면 콜호스, 소프호스는 소련의 집단 농장으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협동조합 형식에 의해서 농민이 집단 경영을 하고, 각자의 노동에 따라 수익을 분배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콜호스, 소프호스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라고 볼 수 있나요?

 

집단농장도 모두 정부가 통제했어요, 자발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지. 생산량 할당하고 임금도 위에서 다결정하고. 맑스에 따르면, 각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고, 다른 공장들과 연계해서 전국적 계획을 세워야 해. 그게 인민을 중심으로 한 계획경제지. 이리하여 직접 생산자들이 자꾸 협력하게 되고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연합)을 형성하는 거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국가’라는 것이야. 그런데 소련에서처럼 정부나 당의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계획을 세우면 노동자들이 일할 맛이 나겠어.
소련 사회가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넘어갈 때, 레닌이 그러잖아, 경제를 움직여야 하는데, 머리가 빨갛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없다고. 잘 모르는 사람이 공장 운영을 어떻게 해? 네프 도입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야.

 

0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난 1980~9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소련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스탈린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해야 된다고 봅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은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이나, 자본주의 전반적 위기론, 정치적으로는 진영테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경제학 비판을 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선생님은 과거 소련 사회 경험에서 본 것처럼, 국유화가 문제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 일부 운동진영에서도 국유화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다가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사회로 부르든, 공산주의 사회로 부르든)로 간다는 거야, 이거는 엥겔스 도식이야. 새로운 사회가 계획경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거야. 여기에 노동자가 어디에 있어? 없지. 엥겔스 도식을 스탈린이 받아들여서 계획경제의 실현을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제시했어. 진영테제는 이론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야.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나 강제수용소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얘기한 ‘자본주의’의 시초축적이야. 옛날 소련경제를 전형으로 하는 중앙지령형 통제경제에서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가 동원한 노동하는 개인들은, 사실상 국가에 노동력을 파는 임금노동자, 노예에 지나지 않아.
맑스가 생각한 노동자 해방, 해방된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으로 협동하는 그런 개념이 없어진 거야. 평의회나 이런 게 없어진 거야. 이런 게 문제점이라고 생각해. 혁명적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공권력을 장악한 노동자들의 연합이 공장을 접수하여 임금노동제도를 폐기하고 자본가계급을 ‘노동하는 개인들’로 전환시켜서 계급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
결국, 해방된 노동자가 주체가 돼야 하고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잔재를 부수어야 하는데, 새로운 계급인 당이나 정부의 관료가 하니까 안 돼. 정부 관료가 “금년 목표는 이거야” 노동자들한테 “따라와” 이렇게 하니까 말로만 계획경제야. 지금 새롭게 나오는 소련 문서를 보면, 국영기업들이 이윤율을 올릴수록 경영자와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인센티브(incentive),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전체적인 계획경제도 안되고, 거짓말 보고만 되는 거야. 자본주의의 임금노동자와 무엇이 달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이런 특수한 소련 자본주의를 시장에 다 맡겨 경쟁적 자본주의로 전환시켜야 비리가 없는 능률적 사회가 된다는 거야. 지배계급인 당과 정부의 관료가 국유재산을 모두 헐값으로 사들여 경쟁적 자본주의의 자본가계급으로 둔갑했는데, 소련의 역사 80여 년이 이런 식으로 쭉 연결된 거야.

 

0 선생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중국, 북한도 자본주의로 볼 수 있겠네요.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본주의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자본가계급에게 있기 때문에 국가 주도가 잘 안 돼. 박정희체제를 국가 주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재벌한테 모든 걸 맡긴 거야. 새로 탄생한 국영기업이 별로 없잖아? 정부가 재벌한테 금융혜택, 세제혜택 줬지. 외국 차관의 도입에 정부가 지급 보증을 했지. 재벌이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을 수탈하는 것을 박정희가 총칼로 보호한 거야.
흔히들 박정희체제에서는 정치권력이 경제력을 제압했다고 보면서 ‘국가주도’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킬 뿐이야. 독재적 정치권력은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해서 증권파동을 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재벌에 크게 의존했고, 미국 정부가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개발하라고 지침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독재 권력은 재벌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어. 따라서 ‘국가 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는 낡은 사회를 타파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혁명적 전환기’일 뿐이야. 실제로 해방된 노동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하여 공장을 접수하면서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야 한다고.

 

“새로운 사회로 가려면, 상품 화폐 자본을 없애야 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0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이행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에서 이행기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행기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행기 강령에 시장도 사라지고 화폐도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요. 일반 노동자들이 볼 때 쉽게 다가서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일반적인 좌파들, 트로츠키 이행기 강령보다도 더 센 이행기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세요.

 

자본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자본론]에서 상품부터 시작하잖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고, 상품교환에서 화폐가 생기며, 화폐를 가지고 더 많은 화폐를 얻기 위해서,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잖아. 상품, 화폐, 자본은 결국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귀결하게 돼 있어. 이 기본 요소들을 없애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계속 살아남게 돼 있어.
새로운 사회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는 노동하는 개인들이 모든 노동조건들에 대해 공동으로 자기의 것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기에 생산수단이든 소비수단이든 사회적 생산물을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처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없애야 해. 이래야만 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거나, 가치에 따라 교환되거나 하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와 시장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이행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고 모든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이행기의 초기에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니까 화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공장평의회에서, 지역평의회로, 전국평의회로 가면서) 노동자들의 연합이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계획적으로 이용하여 주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생산한 것을 각 가정에 ‘택배’로 배달하면 될 것이므로 생산물이 시장에서 팔릴 필요도 없고, 노동자들이 화폐를 갖고 물건을 살 필요도 없어. 화폐가 계속 사용된다면, 화폐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상품을 매점매석하여 물가를 폭등시켜 혁명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쿠바혁명에서도 체 게바라가 몇 번에 걸쳐 화폐개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0 최근 한국 사회에서 복지담론이 화두입니다. 한국 사회도 경제 성장 후퇴가 발생하고 있는데, 복지담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 대선 주자들이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IT산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복지국가가 성립하기도 전에, 복지국가를 타도하는 신자유주의가 1997년 말에 폭발한 금융․외환위기에 대한 IMF 처방으로 광범하게 도입됐잖아. 서방에서 복지국가를 해체하기 위해 채택된 신자유주의가 한국에서는 복지제도도 없는 상태에서 도입되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 즉 민중은 살기가 더욱 어렵게 된 거야. 대량 해고의 실시,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공기업의 민영화, 교육의 시장화, 부자 감세, 공공요금의 인상, 대외거래 자유화와 개방화, 긴축내핍정책 등이 대표적이지. 한국 사회는 깡패 자본주의 사회라고. 실업문제, 자살문제, 빈곤문제를 전부 개인의 문제로 돌리잖아. 사회 문제로 봐야 한다고, 그래야 복지가 문제로 될 수 있어. 빈곤․실업․불안․자살 등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고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복지정책’이 제대로 나올 수 있어.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은 전혀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도 이런 인식이 부족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사상이나 생각 면에서는 완전히 어린애 수준이야. 이런 상태니까, 복지에 대한 요구가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의 무상급식’이나 ‘반값 등록금’이라는 형태로 분출해서 나오는 거야. 이것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욕하든 말든, 무상급식을 ‘쟁취’했기 때문에 민중은 이제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고. 복지에 대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부자에 대한 공격, 부자를 위한 정당과 정부에 대한 반대가 강화될 것이고, 부자들은 ‘옛날 그 좋던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할 것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디지털 세상’이 되어 그런 폭력과 부정․부패가 지배할 수가 없어.
내가 요새 일정한 생활급 수준의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만 달러(2,000만 원)야. 한국 사회는 지난해에 써버린 원료와 기계를 보충하고 난 뒤, 어린애부터 100세 넘는 노인에게까지 한 사람마다 세금을 빼고 매년 2,000만 원(매월 167만 원)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경제력이 있다는 거야. 즉 4인 가족이 매월 667만 원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이야기야. 1%의 부자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99%의 서민은 빈곤에 시달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없애버리고, 매년 생산된 부를 나누어 가지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가 될 거라고.
대통령 후보들이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치 민주화가 정치면에서의 ‘1인 1표’라면 ‘경제 민주화’는 당연히 경제면에서의 ‘1인 1표’일 것이므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은 간단히 말해 공장과 회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공장과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야.

 

0 선생님의 앞으로 연구 계획은?

 

이제 마르크스경제학의 원론을 뛰어넘어 좀 더 구체적인 한국경제를 연구하고 싶어.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7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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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봄호(2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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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재능투쟁 승리와 노동자연대를 위한 문화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3/04/04 17:17
  • 수정일
    2013/04/04 17:1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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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투쟁 승리와 노동자연대를 위한 문화제]


일시 : 4월 6일(토) 오후 4시부터

 장소 : 재능지부 시청농성장 (시청광장 옆 재능사옥)

 

 

다시 철거당한 시청농성장!    거리농성  1934일!

 

시청농성장 사수와  노동자연대의 복원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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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1)

 


 

국제공산당 International Communist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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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1960-61년, 이탈리아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 기관지에 실렸으며, 이후에 팸플릿으로 출간한 당에 대한 작업(party work)을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것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국내 좌익 소아병으로 알려짐 : 역자 주)이 출판되고 40년이 지나, 전 세계의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노동계급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에 감히 레닌과 그의 저작들에 대해 찬양하면서, 그의 빛나는 유산과 프롤레타리아의 일상적인 예속 속에서의 싸움을 부르주아지의 뜻과 필요에 팔아먹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1960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 정당들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결의안'을 내놓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돼지들의 선언'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그 결의안은 우리의 글에서 자주 참고하는데,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회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맑스나 엥겔스, 이후에는 레닌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의 뛰어난 비판을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듯이, 기회주의의 새로움이란 그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상황> 에 대한 새로운 설명들(악명 높은 발견물들!)을 찾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잘못을 저지른 배신자들을 정당화하고, 새롭고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을 써서 노동자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새로운 주장이 거짓임을 밝힐 필요가 있어서도 아니고, 이미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의례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아니다. 레닌과 그의 저작들은 우리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생생하기 때문이다. 용병들과 변절자들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헛소문들로부터 당의 원칙과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 당의 변함없는 책무인 것처럼, 그러한 주제에 대해 정신을 쏟는 것이 차라리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변절자들이 우리들과 혁명적 맑스주의에 가까워질수록,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적의 편으로 돌아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비화 속에서 더욱 초라해질 것이다.

이 돼지들의 테제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글에서, 그리고 이후에 레닌의 글에서 좌익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주장은 불행히도 여전히 그들의 생각 속에 뿌리내리고 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국제 혁명 운동 속에 간교하게 침투한 일종의 변종, 거짓된 극단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글은 차이가 오직 전술적이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럽의 운동과 비교해 본다면, 그 차이가 러시아에서의 운동을 특징짓는 다른 시각뿐만 아니라 독특한 역사적 경험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국제적인 정당의 결정에 달려있었고, 역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그 시대에 그것이 정당했다고, 명백하고 최종적인 해답을 내렸다. 그러나 이 글은 1920년과 그 몇 년 전, 우리가 아직 레닌을 알기도 전에, 우리와 볼셰비키 사이에 있었던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통점도 보여준다. 규율되고 중앙 집중적인 맑스주의 당에 의해 지도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 혁명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 뒤이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아나키스트와 개량주의자라는 두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이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진짜 자본주의의 중심 권력을 공격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쓰러뜨려야 할 첫 번째 장애물임이 증명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담지자인 '극단주의자들'에 대항한 볼셰비키와 우리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들어가 있는 참호이다. 국제적인 정당을 정화하는 것은 완전히 이뤄질 수 없었고,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이다.

원칙에 있어서 그러한 공통점은 좌익 공산주의의 입장과 실질적인 활동에 대해 숨은 동기 없이 연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이들에게는 명백했다. 그리고 이 공통점은 텔레파시나 신비스런 국제적 연결 때문이 아니라 두 운동이 맑스주의의 방대한 학설들을 참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도 볼셰비키도 그런 신비스런 연결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레닌 스스로 그 사실을 그의 저작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야 역사에서 우리의 학설의 틀 속에 이미 교훈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닌의 글은 스탈린이 레닌이라는 대가의 가르침을 속이고 배신하기 위해 만들어 낸 '레닌주의'의 창시자의 글로서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위대한 학자라는 관점에서 읽고, 그의 위대함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가 혁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이론적 작업 덕분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다. 10월 경험으로부터, 몇 십 년 전부터 이론적 무기를 강화하고 날카롭게 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왔던 진정한 맑스주의 정당이 지도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고,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어떤 더 대단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

레닌의 <‘좌익’공산주의>는 그 경험의 성취를 평가하고, 앞으로 다가올 혁명적 작업의 기반을 그의 방식에 따라 쌓고자 한 것이었다. 단결 이전에,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좌익의 입장은 질서정연했으며, 레닌은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배신자로 알려진 이들은 최근 노동계급의 구원자인 체하며, <'좌익' 공산주의>가 그들에 반대하여 작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왜 1960년, 모스크바에서 81인의 돼지들에 눈앞에서 던져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1984년 우리가 여전히 그 글이 우리의 것임을 전에 없이 더욱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지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24년 전의 글을 영어권의 프롤레타리아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이유다. 국제 노동자 운동의 역사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연구에서 이야기했던, 노동조합주의가 탄생한 영국에서 일찍이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들을 보여준다.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뛰어난 정치적 투쟁을 벌이는 동안 영국의 노동계급은 애국주의자, 협력주의자(collaborationists)라는 기회주의와 화려한 대영제국에 의한 부패의 덫에 빠져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혁명적 파도로 영국에서도 공산당의 창당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처음에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제3인터내셔널의 모든 정당들의 운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스탈린주의적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 노동계급은 영국 사회를 문제에 빠뜨렸던 경제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자랑할 수 있지만, 대륙의 대중들이 역사적 전환점이 된 몇몇 사건들 속에서 겪은 혁명적 투쟁의 전통들이 실질적으로 없다. 이러한 과거의 차이는 영국의 노동자 전위와 국제적 혁명당 사이의 역사적 연결에 언제나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은 미래에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 공산당이란 러시아,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공산당이라기보다 세계의 공산당이며, 그 기원을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계급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프롤레타리아의 모든 경험, 승리와 패배, 정복과 후퇴로부터 찾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국, 미국, 그리고 호주의 노동자들의 정당도 마찬가지이며, 또한 그들 투쟁의 산물이며 그들의 역사적 이해의 성과이다.

맑스주의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에서 성공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지칠 줄 모르고 방어되었으며, 맑스주의로 인해 멀지 않은 미래에 영국과 미국의 노동자 대중들이 자본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1장. 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레닌의 죽음 직후 공산주의 좌파의 발의로 로마의 카사 델 포폴레(Casa del Popolo)에서 그의 추도식이 열렸다. 추도식에서 한 연사는‘레닌의 것이라고 주장된 전술적 기회주의’를 발표한 후 고전 <국가와 혁명>의 초반 문장을 인용했다. “레닌은 혁명의 위대한 선구자들의 가짜가 넘쳐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맑스와 그의 위대한 추종자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렇다면, 레닌은 과연 그러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단연코 아니다!”

이러한 태평한 예측 이후 36년이 흘렀다. 좌익의 가차 없는 비판 아래 펼쳐진 그들의 성적표는, 기회주의자들이 레닌이라는 인물 위에 쌓아 올리려고 한 거짓된 허튼 소리가 맑스에게 쏟아진 것보다 적어도 10배는 메스껍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곡하는 이들의 기본 체계는 언제나 똑같다. 우선 위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방법과 강령을 형성시켰던 역사적 진실의 장소에서 전설을 만든다. 이 전설 속에서, 고전적인 문헌들을 형성시켰던 실제 투쟁의 조건들과 분리하여, 완전히 동떨어지고 이런저런 불순물이 섞인 인용구들을 골라낸다. 마지막으로, 혁명 계급이 어려운 조건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 의미를 노골적으로 완전히 바꿔버린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계급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에 몇 번씩이나 중고로 팔아 넘겨진 듯한 이론적 무기들로 무장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 계층이 그러하듯, 맑스주의자의 작업은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럽게 갖다 붙이는 아마추어리즘이나, 야비하고 타락하기 쉬운 출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맑스주의자의 작업은 ‘좌익 공산주의’의 모든 페이지와 모든 문장이 배신자들과 변절자들의 뻔뻔한 얼굴 위로 무자비한 채찍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수사나 선동을 읽고 실재의 역사적 사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당시 벌어진 사건들의 값싼 소문의 연대기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는 코볼트 (독일 도깨비: 역자 주)가 한 세기동안 부인하려 했던 독특하고 명백한 혁명적 교훈과 성취의 흔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920년 봄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온 지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17년에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파괴된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를 밝힘으로써, 1919년 3월 혁명 1년 전, 제3인터내셔널이 건설되었다.

볼셰비키당은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전 방위적인 저주와 승인, 맹렬한 악담과 정열적인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 당의 첫 번째 공헌은 데니킨(Denikin), 유데니치(Judenic), 브랑겔(Wrangel) 등이 이끄는 백군에 저항해 본격적인 내전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백군은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의 군사 원조를 등에 업고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정치적 의미에서 전선뿐 아니라 첨예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대립이 팽팽하던 시기로, 이런 조건 속에서 러시아의 혁명의 궤적을 다루고 있다. 모든 것은 승리를 위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들이 40년 동안 애써 묘사하려고 했던 것처럼 레닌이 진짜 기회주의자였더라면, 그는 지원과 전쟁 선포 사이에서 단 1분도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나운 적들에 포위당하고, 적색 독재의 테러에 격분한 모든 부르주아지가 똘똘 뭉쳐 흉포한 공격을 감행하는 국제 사회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모든 우군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그 대신, 2차 대회 준비를 선포하는 글을 쓰고 1920년 6월 대회를 소집했다. 그는 역사의 교훈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보여주고 있듯이, 당이 그 설립과 준비 과정에서 적과 아군을 가차 없이 구분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번째 걱정거리는 세계 혁명당이 강령과 조직 교의(Organizational Doctrine) 없이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러시아 외부의 수많은 지지자들을 거부하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그와 같은 선택은 부르주아 의회 정치를 빌려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익’으로부터의 위험도 이미 명백했고,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인물들이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침투해 가길 바람에 따라, 인터내셔널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우츠키주의와 중도주의가 그것이다. 레닌은 이미 그들을 맹렬하게 공격했었다. 그러나 ‘좌익’, 아나키스트,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s), 그리고 소위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라는 소렐 학파로부터 정치적 영역에서 지원들은 세심하게 검토되어야만 했다.

이들(좌익, 아나키스트, 자유의지론자, 소렐 학파)은 러시아의 사건을 계급투쟁에서 무장 폭력의 승인이라는 점에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멍청이들이 싸움이나 값싼 총질을 보고 흥분하는 것-이들은 대부분 인격적으로는 진정한 겁쟁이들이다-이 혁명적 입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레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인물들이 좌익주의자라고 잘못 불리며, 종종 프롤레타리아 태생이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그것이 도덕적인 면죄부를 나눠주는 문제가 아니라, 혁명적 세력을 조직하는 문제임을 잘 알았다. 그는 이러한 일탈자들을 향해, 우익 기회주의에게 한 것에 비하면 덜 거친 용어를 썼다. (물론 이 둘은 모두 노동자들을 잘못 이끌고, 스스로 지도자가 될 생각에 가득 찬 지식인이 되곤 하지만)

이런 거짓된 극단주의가 무척이나 위험한 까닭은 역사의 전 과정에 걸쳐 국가와 당이 모두 혁명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라는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인 교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의 교의와 조직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와 엥겔스가 제1인터내셔널의 논쟁과정에서 평가한 바 있다. 레닌이 말하길,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1870년에서 1880년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길을 잃었음을 증명해 보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혁명 이론으로서 아나키즘은 어리석은 것임이 드러났다.’소렐의 생디칼리스트들은 라틴계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레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 교의에 대한 비판은 전쟁 전까지 우익 맑스주의자들이 담당했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달랐는데, 개량주의 사회주의자 소렐의 생디칼리스트와 심지어 아나키스트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사회-애국주의(나치)에 빠져들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닌은 소렐 학파가 독일 공산당 스파르타쿠스 그룹의 이른바 ‘좌익’ 안에서, 호르터와 판네쿡의 트리뷴 네덜란드 그룹 안에서 어떡해든 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이 분파가, 10월 혁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감함에도 불구하고 레닌을 괴롭혔는가? 그것은 정확히 레닌이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이론적 엄격함을 방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와 프랑스의 거짓된 좌익주의자들을 거의 용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도 맑스주의 전통에 서 있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그의 명석함으로, 여전이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이들에 대해 더 신경을 썼다. 우리들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에 대해 그러하듯이. 레닌은 칼 오일러의 교훈적인 제목의 글, ‘당의 해산’으로부터 다음을 인용했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국가를 없앨 수 없다.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당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없앨 수 없다.’

여기서 레닌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명백하게 맑스주의자로 여기는 빈틈없는 독일인들이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라틴 국가들의 더 어리석은 생디칼리스트와 아나키스트들은 ‘만족’할지도 모른다.’(레닌, 선집, 1977년 판, 529쪽)

 

중요한 문제: 당의 독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단순히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무장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러한 구분은 불충분하다. 레닌이 그러한 그룹들에 대해 당연히 의심을 품었으나 우익에 대해서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1920년 4월) 9차 당 대회 때에도 “지도자의 독재”, “소수 독재” 등에 반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에서‘좌익 공산주의’의 ‘유아적 무질서’가 나타난 것은 놀랍거나, 새롭거나, 또는 끔찍한 일이 아니다. 그 병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병을 앓고 난 뒤 유기체는 더욱 건강해진다.” (위의 책, 531쪽)

이것이 유명한 레닌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중도파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우익’으로부터 다른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노년기적 무질서’였으며, 이것은 혁명 유기체를 죽음으로 몰고 가, 결과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파괴적인 재앙보다 훨씬 더 해로울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불러일으킨 비평의 파도 속에서, 우리를 비판하는 많은 이들과 중상모략자들-맑스-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이들-은, 우익 부르주아지에서부터 민주주의자,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했는데, ‘독재자들’또는 독재자 레닌에 대해 합창으로 비난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크롬웰에서부터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가리발디에 이르는 그들의 위대한 독재자들을 잊었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을 언급하며, 어리석게도 다음과 같이 썼다. 애도할 것인가, 축하할 것인가? 홀란드, 독일,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들의 좌익은‘독재’에 대해 이야기하길 망설였는데, 레닌은 올바르게도 그들의 그런 행위가 민주적이고 소부르주아적 정신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괘씸한 카우츠키의 중도파와 그 이후로 지금까지“사회주의는 단지 민주주의이며, 모두를 위한 자유이다!”라고 외치는 얼간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오늘날 레닌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미심쩍은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정한 좌익 맑스주의자 레닌은, 마치 우리들에 반대해서 쓴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 글에서, 그 이름에 걸맞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심지어 주어진 인물들의 독재의 구분에 대한 모든 망설임과 원칙들을 찢어놓는다.

그 다섯 번째 장은 “독일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그 지도자, 당, 계급, 대중”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레닌은 공허한 대안을 내놓고 있는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의 팸플릿에서 풍부한 인용을 한다. 우리가 원칙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공산당의 독재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인가?이들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들에 반대하여 내놓는데, 투쟁의 발발을 기대하는 당의 지도자는 위에서부터, 대중 정당은 아래에서부터행동한다는 식이다.

이 지점에서의 레닌의 비판은, 공산주의자들을 아연실색케 하는‘당 독재’를 우리가 거부한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혁명을 모두 거부해야 하고, 당이‘지도자’라는 단어가 무서워 지도자를 통해 움직이길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찬가지의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뤄진다. 우리의 당은 다른 모든 당과 다르고, 우리의 혁명적인 인간의 메커니즘은 다른 운동들이 떠들고 광고하는 메커니즘과 다르다.그리고 레닌은 이를 ‘비합법’ 조직의 필수 불가결성으로 연결할 것이다.

레닌은 그의 뛰어난 명쾌함으로 대중, 계급, 당, 지도자라는 ‘범주’들의 철학적 정의를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다급했고,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글은 당 독재와 극단적인 경우 특정 당 구성원들의 독재에 대해서도 그 필연성에 대한 모든 망설임을 제거한다. 이것은 그 이후 모든 정통의 사상가들-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네 지도자의 정상회담, 소위 네 거물들 앞에 엎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을 공포로 몰아넣어 왔다.

모든 것은 임시정부와 국민선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당의 독재인가 계급의 독재인가, 지도자의 독재 정당인가, 대중의 독재 정당인가?’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가망 없이 어리석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계급으로 나눠지는 것이 상식이다. 대중들은 계급과 대립하는데, 그것은 오직, 생산의 사회적 체계의 상태에 따른 구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광범위한 대중을, 생산의 사회 체계의 결정적인 상태에 대한 범주들과 대조할 때에만 그러하다. 대개, 적어도 현재 문명화된 국가들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계급들은 정치적 정당에 의해 이끌어진다. 정치적 정당이란,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구성원들로 구성된, 다소 안정적인 그룹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되며, 지도자라 불린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명확하고 단순하다.”(위의 책, 527-8쪽)

 

‘지도자’의 배신에 대한 올바른 진단

 

이런 명쾌한 문장은 엥겔스가 스페인 아나키스트에게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혁명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사건이다’

계급 혁명은 전쟁이며, 내전이다. 군대, 본부, 그리고 당은 필수적이며, 승리 이후의 국가, 정부, 권력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활동이 과거 완전히 합법적이었던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비합법적 상황이 되어버린 독일에서와 같이, 어떻게 비합법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도출되는지를 설명한다.

“혁명과 내전의 폭풍과 같은 발전으로 인해 활동이 합법적인 것에서 비합법적인 것으로 빠르게 변화해가는 상황에서, 그 둘을 결합하고,‘불편하고’‘비민주적인’ 선택을 하거나 ‘그룹의 지도자’를 형성하거나 보호하는 것에 적응해가는 것이 가는 것이 관습적(customary)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될 때,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을 잃고, 완전한 난센스를 생각하기 시작한다.”(위의 책, 528쪽)

1914년, 사회주의자의 배신으로 손을 덴 많은 훌륭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들을, 그들이 누구였든 간에 불신하기 시작한다. 레닌은 우리에게 지도자들의 몰락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오래된, 그리고 명백한 사실이며 ‘지도자를 대중에 대립’시키는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나쁜 지도자와 좋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지도자와 대중 모두의 변질에 대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1852년과 1892년 영국의 예를 들어 이러한 일들의 주요한 원인을 여러 차례 설명했다. 지역의 배타적인 입장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반-또는 소-부르주아지, 기회주의 ‘노동 귀족’들이 출현한다. 이 노동 귀족의 지도자들은 지속해서 부르주아지로 나아가며, 직접적이든 간접적인 역할을 다한다. 맑스는 그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이러한 불명예스런 인물들의 증오를 유발하는 영예를 얻었다.’ (위의 책, 528-9쪽)

레닌은 같은 현상이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특정 유형의 배신자, 기회주의, 그리고 사회적-애국주의 지도자들이 양산되었는데, 이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것들과 노동 귀족정치 속 일부인 자신들의 이해를 지켰다. 기회주의자들의 당은 ‘대중들’, 다시 말해 노동 인민들의 광범위한 계층들, 그들의 다수, 저임금 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악’과 싸우지 않고서는, 그리고 기회주의자, 사회적 배신자 지도자의 정체를 밝히고, 의심하고, 추방하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이 제3인터내셔널이 취하고자 하는 정책이다.’(위의 책, 529쪽)

대체 어떤 맑스주의자가 이러한 역사적 입장을 자유의지론적 제안- 악은 당과 유명한 ‘지도자’들에게 있다 -과 혼동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조건적, 또는 더 나쁘게도, 지역적,민족적, 독일적전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칙과 강령에 대한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심지어 그 특수하고 계급적인 혁명적 교훈들을 참고했던 지도자들과 모든 정당들이 계급의 적들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이,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지도자들’과 당의 힘을 거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 교의는 처음부터 -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정당으로 조직하길 요구하는 공산주의선언에서부터 (제1 인터내셔널의 인물들에 따르면, ‘모든 다른 정당에 대한 거부’), 독일의 혁명과 반혁명에 대해 쓴 맑스와 엥겔스의 저술들 등에 이르기까지 - 그러한 거부를 논박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야기할 수 있다. 맑스와 레닌의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한 러시아와 같은 ‘국가’가, 외교적으로도(연합군), 국내 정치적으로도(자본주의적 경제, 사회적 조치) 적의 편으로 넘어가는 지점까지 타락하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기회주의가 지난날 맑스나 레닌에게 알려졌던 것에 비해 20배는 더욱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멍청한가를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짓거리들은 당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욕보일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첫 번째 언급에 대해서도 망신을 준다. 그러한 사실은 단순히 다음과 같은 ‘말함’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사람은 타락하기 쉬운 존재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타락하기 쉽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타락하기 쉽다. 당은 타락하기 쉽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가도 타락하기 쉽다. 진짜 역사적인 권력관계, 살덩어리의 나약함이나 다른 윤리적인 설명 때문에.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한다. 국가를 비난하자. 권력은더러운 것이며, 모든 이를 부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론적인 이단은 맑스와 레닌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그들은 이를 완전히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레닌은 독일의 좌익주의자들의 원칙들로부터 똑같은 잘못된 생각들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가 사람, 당, 그리고 국가 정부의 지도와 같은 모든 어려운 무기들을 다뤄야만 함을 확인했다. 우리의 정치적인 동지들, 우리의 혁명적 당, 우리의 국가 기구들은 과거가 생산해 내었던 것들- 슬프지만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것들을 포함하여 -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며, 그것들은 우리의 교의가 이론화되어 독자적인 형태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사적인 과정을 보여주는데 있었다.

레닌은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도 인간인지라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독일 좌익주의자들이 당의 형태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국가의 형태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들의 강령에 따르면, 맑스주의가 거리낌 없이 선언했던, 독재의 역사적인 형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더 이상 배신자들이 볼 수 없도록 당이 해산되어야 한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지가 ‘권력을 휘두르는 타락한 유혹’을 저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국가도 해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독재의 기간

 

그러므로, 레닌이 맞선 위험은 우리가 이후에 다룰 전술의 오류가 아니라, 근본적인 원칙의 잘못, 그러므로 당의 내부의 조직적 수단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오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순간, 대부분의 오류들은 절단과‘제명’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성원의 증가라는 유혹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재빨리 칼로 끊어냄으로써 피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세계의 공산당은 ‘어떤 구성원을 받아들일지’ 그 조직적 방법에 대한 문제다. 이 논증을 끝내기 전에, 독재가 짧은 기간이 아니라 꽤 긴 역사적인 단계에 걸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레닌의 비할 데 없이 박력 있는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속된 말로 ‘구급책’이 아니라, 우리의 이론과 우리의 전투를 생동감 살아있게 하는 산소와 같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당과 ‘부르주아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아무리 작은 오류라도 그것이 지속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그 논리적 결론에 가서는 엄청나게 거대해 질 것이라는 진실에서 납득할 수 있다.

당의 반대파는 결국 당의 원칙과 규율의 거부에 도달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부단한 노력과 단결, 그리고 조직적 행동이 불가능한 소부르주아지의 산만하게 흩어지는 성격과 불안정함은, 만약 그것이 장려된다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을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위의 책, 529쪽)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고전적이다. 그리고 현재 연구의 결론과, 우리가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탈리아 맑스주의 좌파의 테제와 일맥상통한다. 레닌은 죽어서 우리와 함께 있지 않지만, 그가 살아있었을 때조차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함께하는 우리의 이탈리아에서의 운동과 레닌의 비밀 협약(1920년,‘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가 포함되지 않은, 이탈리아 사회당의 공산주의 기권주의 분파의 대표가 모스크바로 갔을 때, 레닌이 개인적으로 맺은 협약)이 있기 전부터 우리는 그것을 주장해왔다. 여기서부터 강조는 레닌이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당의 원칙에 대한 거부는 (독일의) 자본주의의 붕괴 전야에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 또는 중간 단계로의 도약이 아니라 높은 단계로의 도약을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러시아에서(부르주아지의 전복 이후 3년차)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의 이행의 첫 단계를 밟고 있다. 계급은 여전히 남아 있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몇 년 동안(레닌의 강조)은 모든 곳에 여전히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소농이 없는(그러나 소부르주아지는 존재하는) 영국에서는 아마 이 기간이 좀 더 짧을 수 있다. 계급철폐는 지주나 자본가들의 단순한 추방(또는 죽음. 우리의 주석) -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를 쉽게 달성할 수 있다 - 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소-상품생산자를 없애는 것(레닌의 강조)이다. 우리는 그들을 추방할 수도 없고부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배워야 한다. 그들은 매우 장기적이고 느린, 그리고 주의 깊은 조직적 수단을 통해서만 변형되고 재교육될 수 있다(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스며들어 그들을 오염시키고, 지속적으로 나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개인주의적이고, 그리고 고양과 우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변덕으로 되돌아가게 하는원인이 되는 소부르주아지의 공기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둘러싼다. 이에 대항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그조직적 (그리고 주요한)역할을 올바르게, 성공적으로, 승리하도록 수행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정당내의 가장 엄격한중앙 집중화와 규율이 요구된다.’

(레닌의 마지막 강조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가 내전 동안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나 이후에 그들은 해산되고 분산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제 이를 강조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피가 흐르든 그렇지 않든, 폭력적이건 평화적이건, 군사적이든 경제적이든, 교육적이든 관리적이든 지속적인 투쟁이다. 수억의 습관의 힘은 가장 무시무시한 힘이다. 투쟁 속에서 다듬어진 철의 당이 없다면, 계급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의 신뢰를 누릴 수 있는 당이 없다면 (우리는 대중 속에서, 심지어 계급 안에서 건강하지 못한 잔여물들, 반혁명의 영향의 희생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그들이 교화될 수 없다면, 잔인하게 진압될 것이다) 대중의 분위기를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파악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당이 없다면, 그런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

똘똘 뭉친 거대한 부르주아지(독점자, 파시스트로 읽는다)를 무찌르는 것은 수천 수억의 작은 지배자들을‘없애는’것에 비하면 천 배는 쉽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이며 미세하고 교묘하며 사기를 꺾는 활동들을 통해,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필요로 하고, 복원(레닌의 강조)하고자 하는 바로 그 결과,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독재의 기간 동안) 프롤레타리아 당의 철의 규율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것이 누가 됐든, 그는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여 부르주아지를 도와주는 것이다.’(위의 책, 529-30쪽)

이러한 명백하고 단호한 공식화를 통해 레닌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공산당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좌익 공산주의가 혁명 투쟁 이전에 소비에트를 소집하는 것을 제안할 만큼 어리석은, 다른 생각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관이나 다름없는 소비에트의 기관은 부르주아지가 찬성표를 던지지 않음으로써,‘당을 해산할’권리를 부여받았다. 1919년 이후 이탈리아 좌파는 이후 2차 당 대회의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의 결의안을 비난하는, 그러한 반맑스주의적 테제와 싸워왔다. 이 테제로 돌아가 보는 것은 의미 있다.

 

인터내셔널의 전략과 전술

 

최근 기회주의 스탈린주의자들의 언론은 레닌의 <‘좌익’공산주의>가 40년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 무리들에게 이것은 그저 의례적인, 관습적으로 인사하는 날이나, 생일과 같은 무슨 무슨 날을 모아놓거나 농담 등으로 가득 찬 노트의 메모에 불과하다. 그들은 <‘좌익’ 공산주의> 문구에 대부분 찬양하면서도, 이탈리아 좌파에 반대하여 속임수를 쓰거나 인용하기 위해 수백 번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부터 우리가 이야기할, 이탈리아 지방의 국지적인 문제를 넘어선 국제적인 방법과 심지어 레닌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레닌이 상황적이거나 국가적인 전술 문제를 다룰 때,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구성적이고 역사적인 전략들을 고려하는 원칙의 명확한 지점들을 밝히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이란 오직 세계혁명과 세계공산당의 조직이라는 목표를 가진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중요한 작업 속에서 어떻게 이탈리아 좌파가 레닌을 지지했으며, 다른 누구보다도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짧게 이야기할 수 없는 우리들의 설명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그 당시 네덜란드-독일로 일반적으로 기인하는 전술적인 지점들이 보고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입장과 이탈리아의 입장이 흔히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독일 반대파는 실질적으로 두 지점에서 이탈리아 공산주의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독일 반대파는 공산주의자는 기회주의적 - 그 당시에는 반동이라고 불렸던 - 노동조합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점에서 독일 반대파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와 아무런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이탈리아에 아나키스트 경향과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이 독일에서 만들려고 했던 것과 같은 좌익 노동조합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과 분리를 지지한 적은 없으며, 그 지도자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바로 그 개량주의 일반노조, 이탈리아 노동총동맹(Confederazione Generale del Lavoro) 안에서 활동했고, 그것은 레닌이 선호한 바로 그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전술적 해결책은 원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혁명적 기능은 주요하게 당에 있는 것이지, 노동조합이나 공장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익 노동조합이나 다른 노동조합을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레닌이 명백하게 동의했던 것처럼, 정당을 쪼갬으로써 새로운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오히려 그 이후야말로 단일한 노동조합을 위한 투쟁의 시점이다.

독일 좌익의 두 번째 실수는 의회 선거를 보이콧한 것이었다. 보라, 실리주의자들이 기뻐 날뛰지 않는가! 레닌은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를 비난해야 했다. 그러나 그 경우 입장이 다름을 레닌은 알았고, 그것을 가르쳤다.

평범한 바보에게 혁명적 반란과 국가 속에서 공산당의 주요한 기능을 거부하고 다른 ‘즉자적인’프롤레타리아 기관인 노동조합, 위원회, 소비에트 등 (이것들은 우리의 주요한 적, 직접주의 경향이다)에 넘겨주고, 그러한 투쟁의 정치적인 측면에 대한 거부로부터 의회적인 측면에 대한 거부까지 이끌어내는 일이 실수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어진 역사적 단계에서 혁명적 정책에 반대하는 합법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동의에 이르진 못했지만 레닌과 논의한 바이다. 우리는 규율을 위해 그의 해결책을 받아들였다.

이 연구의 마지막, 또는 그 다음의 연구에서, 오늘날 배신자들이, 의회주의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레닌과 우리들과 반대에 입장에 선 반면, 이 경우 우리들이 실제로 레닌과 원칙적으로 함께했던, 그러나 전술적인 차원에선 불일치를 보였던 의회주의에 대해 보여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 될 것이다. 사실 2차 당 대회에서의 논의는 의회주의를 파괴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것이었고, 레닌과 다수는 그러한 파괴가 의회주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로부터 행해져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우리는 저기 있는 의회 속으로, 스스로 레닌주의자라고 맹세하면서 실제로는 의회를 지킬 준비가 된 광대들들 속으로 들어간다. 이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광대들을 따르는 한, 대중들은 그야말로 일탈하여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믿음을 갖고 투표소로 향한다.

 

레닌의 계획

 

맥락으로부터 분리된 문장만을 인용하는 이들(이러한 이유에서도 이들은 왜곡을 잘하는 스탈린주의자의 학생일 수밖에 없다)과 우리들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좌익’공산주의>에 대한 팸플릿의 모든 부분을 순서대로 검토하여 그 강령과 원칙을 모두 뽑아낼 것이다.

추가적으로 역사적으로 자세한 부분들을 제시하고, 요약을 해 보자.‘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주요한 책무에 대한’ 2차 당 대회의 테제는 당과 노동계급과 몇몇 대중 운동의 관계에 대한 개념들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독일 공산주의 노동당(Communist Workers Party of Germany), 헝가리 잡지 공산주의(Kommunismus) (그들이 아무리 러시아 혁명에서 아름다운 투쟁을 펼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관념적 유형인 교의의 오류를 숨기지는 못한다), 영국 사회주의 노동 연합, 미국 세계산업노동자(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스코틀랜드 직장 위원(공장 위원회)가 그러한 운동들이다. 여기서는 노동조합과 의회 보이콧을 모두 비난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우리가 여전히 오늘날까지, 심지어 반스탈린주의 그룹 안에서도 싸우고 있는, ‘직접주의’라는 이름의 경향에 반대하는 하는 정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점인데, 레닌그라드에서 있었던 대회 전 모임에서 그러한 운동들을 대회의 한 부문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참관자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심지어 러시아인들도 깜짝 놀랐던 것은, 이탈리아 대표가 그러한 운동들을 배제하자고 제안했으며, 이 대회는 오직 공산당만이 가입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의 정당 대회라는 데까지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이후에 21개 항의‘가입 조건(conditions of admission)’에서 명확해진다.

이제 레닌의“‘좌익’공산주의”를 살펴보자. 이것은, 읽고 읽을 수 있는 문제이다.(It is a matter of reading it, and of being able to read it). 우리는 이미 역사적인 윤곽을 제시했다.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인 중요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2. 볼셰비키 성공의 본질적인 조건

3. 볼셰비즘의 역사에서 주요한 단계

4. 노동계급 운동 내의 적들에 대한 투쟁은 볼셰비즘이 발전하고 힘을 얻으며, 강철로 다듬어지는데 도움이 된다.

5. 독일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지도자, 당, 계급, 대중

6.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해야 하는가?

7. 우리는 부르주아 정당에 들어야 하는가?

8. 타협은 없는가?

9. 영국에서의 ‘좌익’ 공산주의

10. 결론들

부록

1. 독일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분리

2. 독일의 공산주의자와 무소속

3. 이탈리아의 투라티

4. 올바른 전제로부터의 그릇된 결론

우리는 레닌이 이 글을 쓸 결심을 했을 때의 역사적인 순간에 대해 이미 언급했다. 이 글의 테제는 매우 중요하며, 언제나 타당성을 갖고 있지만, 공식적인, 자칭 레닌주의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계속 짓밟혀져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섹션5의 주제를 강조하며, 레닌의 주요한 걱정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당의 주요한 기능에 대한 과소평가의 위험뿐만 아니라 당 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가진 위험이었다. 진부한 직접주의자와 너무 열심히 일하는 반-정치주의자의 진정하고 고전적인 비난은 언제나 고전적인 맑스주의자들이 부숴왔다.

그 후에 우리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의회주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레닌의 주장은 보이콧과 참여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다룰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 정당의 역사와, 부르주아 아벤티노(Aventino)와 함께 한 어리석은 후퇴의 단계를 다시 끄집어 낼 것이다. 아벤티도는 좌파가 당을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는 위치에서 귀환을 강제했지만 중도파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레닌이 기권주의자들이 1919년 10월, 볼로냐에서 투라티와 함께 선거를 원한 압도적인 다수로부터 분리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구를 인용할 것이다.

타협의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는 1918년 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조약의 거부를 언급할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는 러시아와 연결되어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멸에 이를 혁명적 전쟁을 선택하지 않고, 독일의 도적들과의 조약을 조인한 레닌의 입장을 공유한다.2)

인터내셔널이 싸우고 있었던 주제,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대해서는, 그 정통성이 언제나 의심스러운 그람시의 오르디누보 (신질서 운동)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쉬울 것이다.

레닌이나 맑스의 저작들을 읽는 방식이 매우 고된 일이라는 것은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미쳐 날뛰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의 유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유일한 길이다.

선정적인 효과를 좋아하고 진부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기만적으로 사형을 회피한 이들은 누구나 하수구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번역: 편집부)

 

 

<주>

 

1) 출처: http://www.sinistra.net/lib/upt/comlef/ren/renegadebe.html

이 글은 공산주의 좌파 인터내셔널 도서관 (www.sinistra.net) 에 실린 문서로, 출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 계열의 국제공산당이 발간한 4호 <공산주의 좌파의 텍스트>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문건은 I.1920년 역사적 드라마의 배경 II. 러시아, 또는 인류의 역사 III. 볼셰비즘의 토대 : 중앙 집중화와 규율 IV. 볼셰비즘의 역사적 궤적 V. 반-볼셰비즘 두 운동에 대한 투쟁: 개량주의와 아나키즘 VI. 레닌이 한 것으로 주장되는 '타협안에 대한 승인'의 핵심 VII. 이탈리아의 문제에 대한 부록 총 7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서문과 1장을 번역한 것이다. 이후 기획번역으로 완역할 예정이다. (편집자) 

 

2) 우리의 Storia della Sinistra Comunista, Milano, Ed. 「Il Programma Comunista」, 1964를 보라. 특히 342쪽 기사, 전진(Avanti)의 ‘결정적인 국면의 러시아 혁명의 방향’, 1918년 5월 25일.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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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CAT STRIKE - save the whisky for the bootboys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3/03/06 11:07
  • 수정일
    2013/03/06 11:0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WILDCAT STRIKE - save the whisky for the bootboys

 

save the whisky for the bootboys.  save the whisky for the bootboys.  save the whisky for the bootboys!   when the revolutions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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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운동의 교훈 - 그람시와 보르디가를 넘어 세계혁명당을 향해

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운동의 교훈

- 그람시와 보르디가를 넘어 세계혁명당을 향해

-이형로

 

 

 

이탈리아 사회당과 혁명적 분파의 형성

 

1892년 Genoa에 의해 창건된 이탈리아사회당(PSI)은 개량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존재했으나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는 진정한 좌파 세력은 1917년 전까지도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로마대회 이후에야 비로소 비타협적 혁명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혁명분파는 아직 소수였지만 “전쟁 이후 평화적인 삶”이라는 당내 개량주의 다수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우기 위해 모든 나라에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몰수를 통해 모든 부르주아 기구에 대한 투쟁을…….”이라는 강령을 방어했다. 당시 보르디가가 주도했던 혁명분파는 당의 분리까지는 원하지 않았는데, 위의 혁명적 강령으로 당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 3월 토리노에서 10일간의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주류 법적 노조의 지원을 받던 이탈리아사회당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1919년 5월 1일 그람시, 톨리아티, 타스카 그룹은 신질서(L'Ordine Nuovo)를 창간했고, 이때 그람시는 레닌과 De Leon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섞어 “노동조합주의가 공장평의회와 소비에트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한편, 당시 파업이 일어난 지역인 이탈리아사회당의 토리노그룹은 보르디가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그람시와 다르게 핵심문제를 혁명당의 부재라고 보았다. 보르디가도 물론 평의회를 지지했지만, 평의회가 “공산당 지역단위”의 기반 위에서 형성될 때 비로소 혁명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질서와 논쟁했다.

 

그런데 정작 보르디가가 신질서와 논쟁한 중요한 이유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신질서 그룹이 개량주의자, 중앙파와 선을 긋고 스스로 혁명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당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배신하거나, 당 내부가 혁명적 강령을 관철하고 실천할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혁명적 원칙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당내 기반과 일부 건강한 인자들을 포기하더라도 그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는 것이 혁명분파의 원칙이자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의 신질서 그룹은 혁명분파의 역할과 혁명 강령의 실천적 의미를 소홀히 인식한 결과 개량주자들과의 단절을 주저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도 말로는 사회주의나 혁명그룹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 그늘에 놓여 있는 수많은 기회주의자와 투쟁하고 있다.

 

코민테른 지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

 

결국,1920년대 말 신질서 그룹은 보르디가 분파로 움직이게 된다. 9월의 공장점거투쟁 실패가 “경제관리”와 “노동자 통제” 이론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결정적으로 보르디가가 강조했던 “공장점거 투쟁이라는 혁명적 사건이 그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할 공산당이 부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그해 11월 밀라노에서 “통일공산주의분파”가 형성되었고, 1921년 드디어 리보르노에서 코민테른의 지부인 이탈리아공산당(PCI)이 창건된다. 각 분파는 해소하여 신당에 결합했고, 당 대회의 안건에는 “혁명 중에 일어난 평의회는 그의 다수가 공산당에 의해 획득되었을 때 혁명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혁명투쟁에 대한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했다.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 사이의 문제는 결국 당과 계급의 문제였고, 이후 보르디가주의와 좌익공산주의 경향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그람시는 혁명분파 구성에 주저하긴 했지만,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일정 정도 기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모스크바와 빈에서 코민테른을 위해 활동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하는가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공산당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1920년대와 30년대에 코민테른의 변질에 대한 혁명적 반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맑스와 레닌의 방법론적 전제의 변질 비판에 기초하고 있었다. 1921년 리보르노(libomo)에서의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성원과 코민테른 내에서 노동자와 혁명가들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싸웠던 혁명적 전투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공산당 내에서 다수를 대표하고 있었고 당이 볼셰비키화 되어감에도, 당에서 좌파를 축출하는 것에 반대한 혁명가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코민테른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그람시는 1924년 이탈리아 의회에 선출되어 돌아와서 당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 창당 초기의 분파주의 경향으로부터 대중운동에 뿌리박은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당 노선을 두고 보르디가 경향과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미 파시스트운동의 발전이 당 운동의 행동적 제약을 가져왔고, 모든 투쟁은 방어적 수준에 머물렀고 대중들의 경제투쟁조차 광범위하게 줄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대중정당 노선은 보르디가에게는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느끼면서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타락하는 코민테른과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

 

당시 코민테른과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사회당과 이탈리아공산당이 통합하여 대중정당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보르디가는 무솔리니와 “평화협정”을 맺는 “중립주의” 정책을 채택한 이탈리아사회당과는 결코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강령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투쟁 노선을 갖고 있지 않거나 사실상 폐기해버린 정치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결국,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당시의 코민테른 3차 대회는 모든 나라에 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명령했는데, 이탈리아공산당 4차 대회에서 오히려 이것에 반대하는 선언을 한다. 1924년 5월 Como에서의 당 대회에서 보르디가 등이 제안한 테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장투쟁 노선(프롤레타리아독재냐 부르주아지독재냐)을 절대다수로 수용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25년은 본격적으로 보르디가 경향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의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해이다. 또한, 1925년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러시아공산당 및 코민테른이 대립한 시기였다. 1925년 3월~4월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는 이탈리아공산당 3차 대회의 의제에 대한 보르디가 경향을 강제로 삭제·제거했고,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 ‘트로츠키 문제’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때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이탈리아공산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면서 당 중앙을 장악해나갔는데, 좌파를 축출하기 위해 당 중앙테제 찬성투표, 좌파(보르디가)의 테제 반대투표라는 공작을 펼쳤다. 이런 공작은 당 기관지인 Unita에 1925년~1926년에 걸쳐 보르디가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방하면서 악의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의 스탈린 정책을 이탈리아공산당에 이식시키기 위해 그람시는 혁명적 좌파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다수의 당원과 분리하려 했고, 코민테른 안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던 강압적 관료주의(스탈린주의)를 이용하여 혁명분파들을 차례로 축출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참혹한 스탈린주의의 잉태였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혁명적 좌파들은, 그해 4월 보르디가의 동료이자 훗날 보르디가 경향을 극복하고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 데이먼 등을 통해 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람시는 “조직화한 분파”라고 위원회를 비난하면서 격렬하게 공격했고, 그를 추종하는 다수의 맹목적 조직보존주의자들의 축출 위협 아래 위원회는 결국 해산해야 했다. 그것은 다수파로서의 이탈리아 좌파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 후 당을 장악한 그람시의 대중정당 노선 아래 당은 12.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신규 당원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지 않은 젊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수였고, 낮은 수준의 강령으로 정치의식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치적 미숙함과 무능력은 당을 급속도로 변질시켰다. 정치의식이 균질화되지 않은 미성숙한 다수에게 조직보존주의, 양적 팽창주의 노선을 강제하는 것과 사상투쟁의 자유마저 제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상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다수를 획득해나가고자 하는 혁명적 좌파들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직보존주의와 양적팽창주의 당 노선은 혁명분파의 역할을 축소하면서 개량주의적 당 노선으로 자리 잡아 현재에도 혁명분파의 탄생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재조직 화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1926년 주위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밖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탈리아공산당대회에서 그람시는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보르디가 경향은 완전히 제거된다.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보르디가는1926년2월~3월 6차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에 마지막으로 참여했는데 트로츠키와 장시간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참여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탈리아 좌파의 연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보르디가는 극단적 개입의 형태로 가장 맹렬하게 스탈린을 공격했다. 그는 당시를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다.”라고 회상했다. 이것이 코민테른 내에서의 이탈리아 좌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그 이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 그리고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과 살해의 역사였다. 1927년 12월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축출했다. 또한, 혁명과 관계된 모든 사진과 기록들에서 트로츠키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수많은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추방하고 살해했다.

 

1926년 이탈리아 좌파는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며 싸웠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의회주의 발상에 대한 문제 제기’, ‘공동전선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한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당을 만드는 것을 지시한 코민테른에 대한 반대’,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코민테른이 차츰 국제주의 입장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대’, ‘공산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에 대한 투쟁’

 

그러나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 혁명 퇴행의 모든 교훈을 끌어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코민테른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으로 되돌아갔다.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투쟁 사이의 낡은 분리를 또다시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러시아혁명과 20년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과업을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수행할 수 없다. 이탈리아도 노동자계급의 퇴보에 직면하여 당의 역할이 이를 대신할 수 없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좌익분파의 결성

 

1926년 파시스트 정부의 정당금지령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은 해산 당했고, 그해 11월 그람시는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혁명적 좌파와 결별한 당은 이미 혁명성과 전투력을 모두 잃은 채 파시스트의 탄압 하에 조직적 활동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귀국한 톨리아티의 대중정당형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스탈린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혼재된 다원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톨리아티의 사후에는 러시아파와 이탈리아파로 양분, 유로코뮤니즘과 민족 공산주의 노선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련 붕괴 후 완전한 사민주의 좌파 정당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과 통일전선의 반혁명적 성격을 명확히 하지 못해 파시스트에게 길을 열어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혁명노선을 굳건히 하지 못해 전투성을 잃어 변절한 이탈리아공산당의 비극이었고, 그람시가 주도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실패였다.

 

보르디가 또한,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추방되었다. 당시 국외로 망명한 이탈리아 좌파는 유럽에서 투쟁을 계속했지만, 보르디가는 점점 정치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혁명운동에서 멀어져 간다. 하지만 보르디가를 극복한 그의 동지 데이먼과 후배 혁명가들은 파시즘 하에서도 전쟁 중에도 수백 명이 분명하게 살아남아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목숨을 건 선전활동을 해나갔으며, 혁명적 분파활동의 원칙과 실천적 경험들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 전 독자적인 국제공산당(PCint)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수백으로 시작한 당원들이 수천으로 증가하는 데에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고, 이것은 대중적 노선이 아닌 혁명적 원칙과 혁명 강령을 전투적 노동자계급에 굳건히 뿌리내린 결과였다. 이들은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서도 탄압을 받았지만, 그들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그리고 외국으로의 망명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는 1928년 파리의 팡탱(Pantin)에서 이탈리아공산당(PCI)의 좌익분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도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에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이탈리아분파”로서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분파”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대회였다. 팡탱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결의안 중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반대파를 재통합하기 위하여 의장인 트로츠키와 함께 코민테른 6차 대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미 러시아 반대파와 10월 혁명의 영광스런 원칙의 수호 아래 연대했으나,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프로메테오(Prometeo)를 발행했는데, 프로메테오는 원래 이탈리아공산당 나폴리 지역의 보르디가 분파의 혁명적 잡지였다. 당시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반대했던 국제 좌익반대파에 동의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강령적 차이에 의해 1930년대부터 선을 긋게 되고, 특정경향의 국제적 분파를 거부하며 1933년 제4인터내셔널을 만들려는 트로츠키의 시도에 반대한다.

 

프로메테오는 첫째,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에 대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을 두고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에 대해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 사민당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파와 당 문제에 대해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모든 나라 좌익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한편,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는 이런 흐름이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933년 브뤼셀에서 좌익분파의 이론지인 빌랑을 발간한다. 빌랑 주변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는데,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등이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입장의 가장 큰 차이는 통일전선 문제였다. 트로츠키에게 통일전선은 코민테른의 가장 높은 성취의 표현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정치적 틀을 처음 네 번의 당 대회에 두었는데 반해 이탈리아 좌파는 처음 두 번의 대회에 두었다. 그들 사이에서 드러난 격차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 일부를 조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트로츠키의 시각으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공산주의 좌파는 이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반혁명세력을 프롤레타리아라 명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노동계급에 공산주의 원리를 명확하게 하려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와 트로츠키 사이의 틈새는 그래서 균열로 결론이 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타협적 투쟁과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세우는 임무를 가장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파시스트와 공산당의 이중 탄압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1943년 전쟁의 시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전쟁 중에 창설 한 국제공산당

 

전쟁 시기 감옥이나 가택연금 상태 속에서도 데이먼(Onorato Damen)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이때 망명 중인 프랑스 동지들의 대부분이 돌아왔고, ICC의 창설자인 Marc Chirik 주변의 프랑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파리에서 별도의 분파인 프랑스 좌파공산주의자(GCF)를 창설한다. 프랑스좌파공산주의 또한 강령적 기반은 빌랑과 좌익분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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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먼(Onorato Damen) : 1893~1979, 국제공산당(PCint)의 창설자>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류였던 보르디가는 스탈린주의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이식한 그람시에 의해 축출된 이래 파시스트 시절과 전쟁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었고, 당의 출판물 발행에만 협조했을 뿐 결코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단지 1945년 전쟁의 끝 무렵에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보르디가 주위에 모여 있던 수많은 동지가 당에 가입했을 뿐이다. 1948년 선거 참여를 두고 ‘혁명적 의회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데이먼 그룹과 보르디가 그룹은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소련 제국주의의 특징, 공산당의 성격, 노조개입, 당과 계급의 문제 등에서 대립하게 되고, 데이먼 그룹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보르디가의 노골적인 개입은 당내 반대 블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3년 후에 또 하나의 국제공산당을 분리하는데 성공한다.

 

보르디가는 1952년 자신의 조직을 설립하고 Il Programma Comunista를 발간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 후에 경직된 분파주의를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자신을 지구상의 가장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 당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분명히 반혁명의 대가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입장 주위에 불변하는 공식의 벽을 쌓음으로써 적대적 환경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되고 소그룹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정한 요구로부터 분리한 써클 정신을 강화시켰다.

 

1930~40년대 반혁명과 전쟁의 암흑 속에서도 진정한 이탈리아의 좌익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본질과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세우는데 공헌했고,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익분파는 단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제공산당은 파시스트와 반 파시스트에 대해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방어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게 한 유일한 당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빨치산으로부터 많은 전투 파를 얻었고 한동안 전후 이탈리아 투쟁에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대오에 가려지고, 1921년 좌익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 주류인 보르디가의 명성에 축소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야말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로부터 직접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의 과정을 비타협적 투쟁과 혁명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오고 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 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당시부터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분산은 코민테른과 반 혁명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지속하였는데, 68년의 파업투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부활하면서 수많은 그룹으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한 좌익공산주의 전통이 새롭게 조명되었는데, 옛 프랑스 좌익공산주의 분파의 공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좌익분파의 옛 그룹들을 고무시켰고, 1975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6개 그룹이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을 창설한다.

 

한편, 국제공산당도 이탈리아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좌익공산주의 그룹들에게 국제회의를 제안한다. 1차 대회는 1977년 밀란에서 열렸는데 이는 단순히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국제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분산을 극복하고 집중화와 재구성을 위한 국제공산당의 노력이었다. 대회에서는 1936년 그들의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정치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을 토론했다. 2차 대회는 6개 조직의 참여와 3개 조직의 동의 속에 1978년 파리에서 열렸는데, 대회 주제는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 사멸의 경제적 기초, 당의 역할이었고, 보르디가주의 전통의 많은 그룹에게 걸림돌이었던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3차 대회는 1980년 파리에서 있었는데 자본주의의 위기상황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전면적 반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노동자정당과 노조 영향의 제거를 합의했다. 1983년부터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이 참여함으로써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의 형성을 고무시켰다.

 

공산주의 국제대회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서기국의 결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1975년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륄레, 호르터, 판네쿡 등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계승하여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라는 조직이름이 증명해준다. 이 서기국의 형성과 함께, 당의 재건을 향한 과정의 새로운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경험의 교훈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

 

1984년에 작성된 서기국의 강령은 다른 나라의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들이 결합하는데 기본적으로 인정할만한 원칙적인 내용으로 작성되었고, 서기국의 입장을 다른 지역에 이식하기 위한 복제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룹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역할을 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할 때 이러한 그룹들이 지역의 조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겨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서기국에는 1984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캐나다와 남미의 그룹들이 가입하게 되고, 국제공산주의흐름과 함께 현재 최대의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ICT)은 1983년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으로 결성되었다가, 2009년 국제공산주의경향(ICT)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6개국(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에 지부를 두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의 정치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는데, 이는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다른 조직들과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특히 국제공산주의경향은 이탈리아 좌익의 주류였던 보르디가주의를 극복하고 독자적 좌익분파를 형성한 데이먼주의를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 문제 등에 있어서는 레닌주의와 보르디가주의 모두를 극복했다고 하는 데이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경제이론은 폴 매틱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런 점들이 국제공산주의경향을 좌익공산주의 경향 내에서의 레닌주의 경향으로 보이게도 한다. 물론 국제공산주의경향의 다른 한 축인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 출발이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양쪽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좌익공산주의 그룹 중 유일하게 노조문제에 대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자본의 기구화를 인정하면서도, 적극 노조를 이용(노조 자체의 이용이나 노조개조·장악은 반대함)하여 광범위하게 노동자계급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평가와 교훈

 

이탈리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우리는 코민테른의 퇴행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오늘날도 여전히 공산주의 운동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분파가 혁명이론과 미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초를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이탈리아공산당 운동은 혁명적 분파의 역사였고,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세력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둘째, 이탈리아공산당은 출발에서부터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인터내셔널 관점을 가졌으며, 코민테른의 타락에 맞서 형성된 좌익분파 또한 이탈리아 분파가 아닌 코민테른 내의 좌익분파로써 자신을 규정했다.

셋째, ‘신질서’와 ‘공장평의회 운동’, ‘옥중 수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람시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기여했으나,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좌파와 결별하고 스탈린주의 정책을 이탈리아에 이식시킨 핵심역할을 했다. 그람시 이후의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당, 사민주의 당, 부르주아좌파 당으로 몰락해갔으며, 맑스주의의 연속성과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넷째, 이탈리아 좌파의 선구자였던 보르디가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공헌했고 이후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투쟁했으나 한계 또한 명확했다. 프롤레타리아독재 강령, 통일전선, 의회주의, 반파시즘 문제에 대해 혁명적 원칙을 주장했으나 당 문제(당의 역할, 당과 계급과의 관계)에서 코민테른 초기의 입장으로 후퇴했고, 파시즘 이후 경직된 분파주의를 강화시켜 혁명세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따라서 그람시의 스탈린주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 보르디가의 전기, 후기사상에 대한 구분과 냉철한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르디가를 넘어섰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분파인 데이먼 그룹과 망명 중이던 빌랑주변의 공산주의 좌파들에 대한 온전한 복원과 1970년대 말 일련의 국제대회를 이끌면서 미래의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형성을 위해 노력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공헌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혁명세력의 재구성, 결합과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며 좌파 분열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의 다수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당의 좌익으로 기능하여 결국 부르주아 정치기구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험난한 역사적 상황에서 탄생하고 비타협적으로 살아남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제 계급투쟁의 새로운 주체와 혁명적 공산주의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 그들은 이미 계급의식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혁명적 진전을 위한 새로운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걸쳐 성장해나가는 전투적 노동자계급과 새로운 혁명가들이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서로 논쟁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대오로 모여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공고히 한다면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세계혁명의 전망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형성에 공헌할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자(혁명가)들의 세계적인 재조직화와 계급투쟁의 결합만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낡은 껍질을 벗기고 노동자투쟁의 명확한 전망을 밝히는 일을 앞당겨 줄 수 있다.

 

국제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을 더욱 명확히 철저하게,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의 무기로!

 

<출처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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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monds and Rust- Joan Baez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3/02/19 00:43
  • 수정일
    2013/02/22 09:25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Diamonds and Rust- Joan Baez

 

알림 아이콘
 

 

Well I'll be damned

Here comes your ghost again

But that's not unusual

It's just that the moon is full

And you happened to call

 

And here I sit

Hand on the telephone

Hearing a voice I'd known

A couple of light years ago

Heading straight for a fall

 

As I remember your eyes

Were bluer than robin's eggs

My poetry was lousy you said

 

 

Where are you calling from?

A booth in the midwest

Ten years ago

I bought you some cufflinks

You brought me something

 

 

We both know what memories can bring

They bring diamonds and rust

 

 

Well you burst on the scene

Already a legend

The unwashed phenomenon

The original vagabond

 

 

You strayed into my arms

And there you stayed

Temporarily lost at sea

The Madonna was yours for free

Yes the girl on the half-shell

Would keep you unharmed

 

 

Now I see you standing

With brown leaves falling around

And snow in your hair

Now you're smiling out the window

Of that crummy hotel

Over Washington Square

 

 

Our breath comes out white clouds

Mingles and hangs in the air

Speaking strictly for me

We both could have died then and there

 

 

Now you're telling me

You're not nostalgic

Then give me another word for it

You who are so good with words

And at keeping things vague

 

 

Because I need some

of that vagueness now

It's all come back too clearly

Yes I loved you dearly

And if you're offering me diamonds and rust

I've already paid


저런, 놀랍게도

여기 다시 당신의 유령이 오고있네요.

하지만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죠.

그저 달이 차 오르니

당신이 문득 전화를 한 거겠지요.

 

난 여기에 앉아서

전화를 받고 있어요.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2년전,

내게 친숙하던

 

그 목소리를 듣고 있네요.

 

나는 기억해요,

 

당신의 눈이 울새의 알보다 더 파랗던 것을.

내 시(詩)는 볼품없다고 당신이 그랬었죠.

 

어디서 전화하는 건가요?

중서부 어디쯤 공중전화 부스에선가요?

10년 전,

내가 당신에게 커프스 단추 몇개를 사줬지요.

당신도 내게 뭔가 갖다 주었구요

 

우린 모두 추억이 무얼 가져다 주는지 알고 있죠.

 

추억은 다이아몬드(행복)와 녹(상처)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갑자기 나타났어요,

 

이미 전설이 된 사람.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군요

원초적 방랑자....

 

당신은 길을 잃고 내 품으로 들어왔죠.

그리곤 잠시 머물렀던 거예요.

 

바다에서 잠시 길을 잃고서...

성모 마리아는 대가 없이 당신의 편이었죠.

 

그래요, 반쪽 조개껍질 위에 있는 그 소녀는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었죠

 

 

 

이제 난 갈색 나뭇잎을 흩날리는 가운데

 

당신이 서 있는 걸 보아요

머리칼은 희끗희끗해졌군요.

이제 초라한 그 호텔의 창가에서

 

당신은 미소를 보내고 있군요.

워싱턴 광장 너머로......

 

우리의 숨결은 공기중에서 한 데 섞여

 

하얀 입김을 내뱄고 있죠.

솔직히 말하면

우린 그때 그곳에서 죽을 수도 있었죠.

 

이제 당신은 내게 말하고 있어요.

 

당신은 지난날을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그럼 다른 말로 해봐요.

말솜씨가 너무도 능숙해

 

막연하게 돌려 말하는 당신.

 

나도 지금

 

당신처럼 모호한 말을 할 줄 알았음 좋겠어요.

모든 게 너무 명백해졌어요.

그래요, 난 당신을 끔찍히도 사랑했죠.

그리고 당신이 행복과 상처를 내게 준다고 해도

난 이미 그 대가를 다 지불한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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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과 국제주의자들의 어제와 오늘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3/02/13 10:06
  • 수정일
    2013/02/13 14:46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북한 핵실험과  국제주의자들의 어제와 오늘]

 

2006년 10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자(공산주의자) 국제대회가 열렸다. 현재의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토대가 된 두 흐름인 사회주의정치연합이 주최하고 노동자평의회 그룹 멤버들이 함께 했다. 해외의 국제주의 조직은 국제공산주의흐름(ICC)과 국제주의자전망(IP), 그리고 로렌골드너(현 반란자노트 그룹) 등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현재의 노건투와 노혁추, 사노위 활동을 하는 (구)당건투 동지들과 울산배움터 그리고 서울, 울산의 현장동지들이 참석, 참관했다.

 

이때가 지금과 비슷하게 북핵 문제가 터진 시기였고, 한반도의 전쟁위협이 고조되던 때라서, 국제대회 기간 중 긴급하게 북핵문제에 대한 국제주의자 선언이 제안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요하고 진지한 토론을 거쳐 선언서가 채택되었고, 이때 참가한 국제주의 조직들은 전원 기꺼이 선언에 서명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한국의 혁명적사회주의자들 일부는  북한을 포함한 민족문제,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 단호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 못했었다.  사회주의정치연합과 노동자평의회 그룹, 그리고 울산의 몇 동지 이외의 동지들은 이러저한 이유로 인해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핵과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원칙에 대해서는 사노위와 노혁추 강령토론에서도 여전히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다행히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의견통일이 이루어진 상태다. (적어도 북한을 모종의 노동자국가라고 판단하는 흐름은 이제 다수가 아닌 소수가 되었다)

 

벌써 국제주의 선언 이후 6년이 지났다.  북한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고, 한국은 무능하며 제국주의 세력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예전에도 지금도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대대적인 투쟁만이 전쟁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

 

동지들은 아직도 이 선언에 동의하지 못하는가? 아직도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보다 먼저 고려될 상황이라 생각하는가?

 

(이후 이 선언을 지지한 아시아지역 노동자와 국제주의자들을 기억하며 일본어, 영어 번역본도 함께 올린다)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 선언에 대한 ICC의 멘트>

 

 

2006년 10월말, 국제주의적 조직들, 그룹들 및 투쟁가들의 대회가 한국의 서울과 울산에서 사회주의정치연합(SPA)에 의해 개최되었다. 참가자의 수적인 면에서 소규모였지만, 사회주의정치연합은 극동아시아에 있어서 좌파공산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우리가 아는 한) 최초의 표현이었고, 이 대회는 확실히 이런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상 최초의 대회였다. 이렇게 이것은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며 ICC는 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진심으로 이 대회를 지지하였다.

 

그런데 대회 며칠 전 북한의 최초의 핵폭탄의 실험에 의해 그리고, 특히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측에서 이어진 기동연습에 의해 야기된 이 지역에서의 제국주의간 긴장의 극적 첨예화에 의해 이 대회의 목표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중요성이 그늘지워졌다. 그래서 이 문제는 대회에서 상세히 토론되었다. 그 결과로, 아래에 그 명단이 공개된 대회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위협에 대항하여 한국으로부터의 국제주의자 선언>

 

북한의 핵실험에 관한 소식에 이어, 서울과 울산에서 회합을 갖고 있는 우리들, 공산주의 국제주의자들은:

 

1. 또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의 손 안에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비난한다: 핵폭탄은 제국주의자들 간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무기이다. 그 유일한 기능은 일반 민간인의 특히 노동자계급의 대량학살이다.

 

2. 자본주의 국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전쟁으로 향한 이러한 새로운 단계를 전적으로 비난한다. 이때 북한은 자신이 노동자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함을 그리고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쇠퇴한 자본주의의 전반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판본에 지나지 않음을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3. 그들의 적 북한에 대항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위선적인 캠페인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그러한 캠페인은, 오늘의 이라크에서와 같이 노동자인민이 결국은 그 주요 희생자가 될 선제공격들의 개시 – 그들이 이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면 –를 위한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준비에 불가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민간인을 절멸했을때의 그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세력임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4. 중국과 같은 다른 제국주의 갱스터들의 비호 아래 출현할 수 밖에 없는 이른바 평화발의 “peace initiative“들을 가차없이 비난한다. 이것들은 이 지역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옹호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어떤 ”평화적인 의도들“도 믿을 수 없다.

 

5. 국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옹호라는 미명아래 남한 부르주아계급이, 국제주의적 원칙을 방어하는 노동자계급에 또는 그 활동가들에 대항하여 억압적 조치들을 취하려는 모든 시도들 가차없이 비난한다.

 

6. 발생하게 될 군사행동으로 인해 제일 먼저 고통당할, 남북한의, 중국의, 일본의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자들과의 우리의 전적인 연대를 선언한다.

 

7. 자본주의 아래의 인류를 엄습하는 야만주의의의, 제국주의 전쟁의, 그리고 핵파괴의 위협을 영원히 종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전세계적인 투쟁임을 선언한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수호해야할 국가는 없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2006년 10월26일

국제공산주의흐름/사회주의정치연합/국제주의자전망/SJ(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MS(노동자평의회 서울그룹)/LG/JT/JW(울산)/SC(울산)/BM

 


 

 

<戦争の脅威に対する、韓国からの国際主義者宣言>

 

 

 

北朝鮮における核実験に関する報道に続き、我々、ソウル市とウルサン市で結集した共産主義国際主義者は、以下の項目を宣言する:

 

1)さらなる別の資本主義国の手による、新たな核兵器能力の開発を糾弾する。

 

核爆弾は帝国主義国家間戦争における最終の武器であり、その唯一の機能は一般に民間人の大量殺戮であり、それはとりわけ労働者階級の殺戮を意味する。

 

2)北朝鮮の資本主義国家によって踏み出された戦争への新たな一歩を、断固として糾弾する。北朝鮮は、このようにして、自らが労働者階級や共産主義と全くかけ離れたものであることを再度新たに示し(それが必要であったとして)、実際は、軍国主義の野蛮へ向かう衰退的資本主義の一般的傾向の、単なる極端でグロテスクなバージョンであることを実証した。

 

3)米国およびその同盟国による偽善的キャンペーンを断固として糾弾する。

 

それらの目的は、解放の単なるイデオロギー的な準備以外の何物でもなく、今日のイラクにおける状況と同じく、その可能性があれさえすれば、労働者がそのまま主要な犠牲者にとなる、自分達の先制攻撃を仕掛けることにある。私たちは、米国が、広島と長崎の民間人を絶滅させた時、核兵器を戦争に使用した唯一の大国であったことを忘れてはいない。

 

4)いわゆる「和平工作」を断固として糾弾する。

 

中国等、他の帝国主義的暴力団の庇護下で現われ始めているこれらの工作は、平和などとは全く無関係な、その地域における自らの資本主義的利益に専心したものでしかない。労働者は、いかなる資本主義国の「平和的意図」にも、微小なりとも信頼を寄せることはできない。

 

5)韓国のブルジョワジーによるあらゆる試みを断固として糾弾する。

 

彼らの企ては、国家の自由、又は民主主義の擁護という口実の下、国際主義者の原則を守るために闘う労働者階級及び活動家に対する抑圧措置をとることにある。

 

6)北朝鮮、韓国、中国、日本およびロシアの労働者との完全なる連帯姿勢を断言する。軍事行動が発生した場合に最初に苦しむこととなるのは彼ら労働者達である。

 

7)世界的規模の労働者の闘いのみが、資本主義下の人類の上に降りかかる野蛮さ、帝国主義的戦争、および核による崩壊の脅威に対し、永久に終止符を打つことができると宣言する。

 

 

プロレタリアには防御する国家はない!

 

万国のプロレタリアよ、団結せよ!

 

 

この宣言は以下の組織およびグループによって署名された:

 

社会主義者政治同盟(Socialist Political Alliance)(韓国)、2006年10月26日のソウルのグループ会議国際共産主義潮流(CCI)国際主義者パースペクティヴ(internationalist Perspectives)

 

会議に出席した数名の同士は、さらに個人単位で上記宣言に署名した:

 

SJ(労働者協議会のためのソウル市グループ)MS(労働者協議会のためのソウル市グループ)LGJTJW(ウルサン市)SC(ウルサン市)BM

 

 


 

<Internationalist Declaration from Korea against the threat of war>

 

Following the news of the nuclear tests in North Korea, we, the communist internationalists meeting in Seoul and Ulsan:

 

1.Denounce the development of a new nuclear weapons capability in the hands of another capitalist state: the nuclear bomb is the ultimate weapon of inter-imperialist warfare, its only function being the mass extermination of the civilian population in general and the working class in particular.

2.Denounce unreservedly this new step towards war taken by the capitalist North Korean state which has thereby demonstrated once again (if that were necessary) that it has absolutely nothing to do with the working class or communism, and is nothing but a most extreme and grotesque version of decadent capitalism's general tendency towards militaristic barbarism.

3.Denounce unreservedly the hypocritical campaign by the United States and its allies against its North Korean enemy which is nothing but an ideological preparation for unleashing – when they have the capacity to do so – their own preemptive strikes of which the working population would be the principal victim, as it is today in Iraq. We have not forgotten that the United States is the only power to have used nuclear weapons in war, when it annihilated the civilian populations of Hiroshima and Nagasaki.

4.Denounce unreservedly the so-called "peace initiatives" which are bound to appear under the aegis of other imperialist gangsters such as China. These will be concerned not with peace, but with the protection of their own capitalist interests in the region. The workers can have no confidence whatever in the "peaceful intentions" of any capitalist state.

5.Denounce unreservedly any attempt by the South Korean bourgeoisie to take repressive measures against the workng class or against activists in their defense of internationalist principles under the pretext of protecting national freedom or democracy.

6.Declare our complete solidarity with the workers of North and South Korea, China, Japan, and Russia who will be the first to suffer in the event of military action breaking out.

7.Declare that only the world wide workers' struggle can put an end for ever to the constant threat of barbarism, imperialist war, and nuclear destruction that hangs over humanity under capitalism.

 

The workers have no country to defend!

Workers of all lands, unite!

 

This declaration was signed by the following organisations and groups: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Socialist Political Alliance (Korea), Seoul group meeting of 26th October 2006

Internationalist Perspectives

 

A number of comrades present at the Conference also signed the declaration on an individual basis:

SJ (Seoul Group for Workers’ Councils)/MS (Seoul Group for Workers’ Councils)

LG/JT/JW (Ulsan)/SC (Ulsan)/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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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 임성용

문학,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임성용

 

 

 

삶과 저항과 실천으로서의 문학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혁명시인이었던 김남주 시인은 그 스스로 삶과 예술에서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선도적인 투쟁과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치열한 시정신과 인간정신은 앞으로도 저항하는 민중과 민중의 역사에 뿌리 깊은 이념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한국 문학사에서도 그의 혁명을 향한 순결성과 문학에 대한 진정성은 끊임없이 채찍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김남주 시인에게 있어 시는, 혁명의 무기로 복무해야 하며 시는 그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모든 사회적 현실과 인간관계, 나아가 자연현상까지도 유물론과 계급적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고 시도 역시 그 철저함에 비례한다는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시인은 결국 혁명운동의 이념적 전위가 되어 동참해야 만이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시인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암흑의 시대에

시인의 일 그것은 무엇일까

침묵일까

관망일까

도피일까

밑모를 한의 바다 넋두리일까

 

무엇일까

박해의 시대에

시인의 일 그것은

짓눌린 삶으로부터

가위눌린 악몽으로부터

잠든 마을을 깨우는 일

첫닭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 김남주, ‘시인이여’ 첫 시집, 「진혼가」 (청사)

 진혼가.JPG

70년대의 민족문학과 민중문학도 외세의 억압과 정치적인 압제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저항시, 민중시, 그리고 특히 80년대의 노동시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리얼리즘문학의 도저한 흐름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바로 그 정점에 전두환 군부독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탈취한 폭압의 시대에 오히려 ‘노동’ 문학이 현실주의 기치를 내걸고 전면으로 등장했다. 그동안 소설가나 시인의 이름표를 단 작가 중심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급격하게 확산하는 노동운동과 더불어 노동계급 본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노동시)가 정치적 몰락에 이르게 된 90년대 중반까지 약 10여 년 넘게 노동문학의 발전과 중흥기가 지속하였다. 박노해, 백무산, 박영근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시는 리얼리즘의 문학적 변이와 계급주체의 민중미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찬사와 평가를 받을 만했다. 더구나 현장의 노동과 직접 결합한 그들의 시는, 수많은 노동자의 각성과 의식, 분노와 투쟁을 일깨워주는 ‘저항의 무기’로써 작용하는 역할을 했다. 이로 말미암아 한창 불붙기 시작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파업, 그리고 노동해방의 논리 속에는 어느새 문예운동을 뚜렷한 사상으로 삼고자 했고, 문예선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그 중심축으로 두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문학, 현장문학을 비롯한 잡지는 물론이거니와 녹두꽃, 사상문예운동, 이 밖의 이름을 전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문예지, 무크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사노맹의 선전매체는 ‘노동해방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발행되기도 했다. 문학이 그만큼 사회변혁과 계급운동의 주요 수단이요, 도구였던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이 시기도 십 년 남짓에 불과했다. 소비에트와 그동안 우리가 사회주의체제라 알고 있던 국가자본주의 스탈린주의 체제몰락 이후, 노동자계급 대신에 새롭게 등장한 ‘시민’과 더불어, 제도화된 민주화와 더불어, 이른바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그렇게 열렬하게 달아오른 잉걸불의 불꽃은 꺼지고 급기야 한 시대의 물결로 요동치던 노동문학의 닻이 내려졌다. 더욱이 IMF라는 경제식민지와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맞물리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의 고뇌는 한 겹 두 겹 지워지고 온갖 헛것과 헛꿈에 대한 기대와 망상을 갖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십 수년간의 성과를 결집하여 오로지 당 건설을 염원하던 민중의 바람대로 진보정당이 생겨났지만, 이는 곧 개별화된 형태의 운동과 집단화된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노동계급에서 한층 더 멀리 분리했고 계급의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은 비로소 진보라는 이름의 정치정당이 만들어준 밥그릇을 빛나게 닦으면서 매우 편리한 개량주의 방식으로, 혁명적 투쟁을 포기한 선거와 의회주의에 복무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문예운동도 이 무렵부터는 이른바 문화예술과 운동이 둘로 나누어지는 분할의 경계선 밖에 서성이게 되었다.

 

십 년간, 문학운동 주체들의 생산적 결합

 

십 년간의 의미는 남다르다. 노동자 계급의식에 기반을 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카프가 1925년에 조직되었다. 카프는 우리나라에서 계급문학을 조직적으로 추구한 유일한 사상문예운동의 결사체였다. 내부갈등과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카프는 1935년, 십 년 만에 해산하였다. 그로부터 전쟁과 분단으로 짓밟힌 이데올로기의 암흑기를 지나, 유신정권 하에서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은 부르주아 지배문학의 틀에서 벗어나 있던 문인들을 저항의 길로 이끌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모태가 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김지하, 고은, 송기원 등의 작가들은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실이나 민작은 카프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뜻있는 지식인들과 작가집단의 모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말에 이르러, 마침내 노동문학의 붐을 타고 구로공단을 위시한 영등포, 마산, 창원, 성남, 부천, 인천 등지의 십여 곳에서 지역노동자문학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동자, 노동조합, 파업, 현장교육, 문예선전은 노동자문학회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고 역사적으로 맥이 끊긴 노동문학이 다시금 성장할 수 있는 토대와 양분을 제공해주는 시기였다. 그러나 노동자문학회의 깃발도 십 여년 만에 내려지고 말았다. 구로노동자문학회를 필두로 90년대 말 즈음에 모든 지역노문이 문을 닫았다. 돌이켜 보건대 그 십 년간이 카프 이후, 전문 문학인이 아닌 현장노동자들이 실천적 문학운동을 펼친 한국노동문학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시기야말로 문학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전문 시인이나 작가들의 영역에 문학운동의 생산적 주체인 노동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문학의 권력을 나누고 그 경계를 과감하게 허물어뜨렸다.

당시의 성과물들이 50여 권이 넘는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모두 노동시집들이다. 개인시집도 있고 동인시집도 있고 지역노동자문학회 문집도 있다. 이름을 들으면 금방 알만한 사람도 있고 생소한 사람이 낸 시집도 여럿 있다. 시를 계속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노동문학의 울타리에서 노동과 삶을 노래한 시집들의 면면은 생각보다 참으로 다채롭고 풍요롭다.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으므로 잠깐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생활과 문학/삶 글-구로노문, 하루살이의 노래-이규석, 노동의 새벽-박노해,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눈물은 푸르다-최종천, 패배는 나의 힘/철산동 우체국-황규관, 축제/무화과는 없다-김해자, 먼지가 부르는 차돌맹이의 노래-조영관,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이면우, 대열/취업 공고판 앞에서-박영근, 그곳에도 꽃은 피는가-객토 동인, 아직은 저항의 나이/저 많은 꽃등들-일과 시 동인, 더 깊이 뿌리내리기 위하여-부천노문, 광장에 아침 햇살이 떨어지기 전에-동부노문, 시금치 학교-서수찬, 기린울음-고영서, 하늘공장-임성용, 왜 딸려?-구노문 작품집, 어색한 휴식-김명환, 너를 만나고 싶다-전노문, 아름다운 파편-이명희, 인부수첩/우리들의 사랑가-김해화, 공친 날/슬픈 희망-김기홍, 반성하다 그만 둔 날-김사이, 그네-문동만, 낡은 기계/기름미인-조기조,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꿀잠-송경동, 저 겨울산 너머에는/기찬 날-표성배, 개미집-이상호, 지리한 장마-정은호, 물으면서 전진한다-조성웅, 아내에게 미안하다-서정홍, 검지에 핀 꽃-조혜영, 평화시장-이한주…….

 

 

 여기에 밝힌 시집 외에도 이보다 훨씬 많은 작품집과 시집들이 있다. 대부분이 현장노동자 출신인 이들은 그들이 몸담은 노동현장에서 한국의 노동시를 억세고 줄기차게 걸머지고 왔다. 혹시 급진적인 좌파 계열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은 혁명적인 시는 불요불굴의 전투적 계급성이 생명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시는 자신이 감내해온 사랑과 눈물,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그 흔적이 아로새겨진 민중의 정서를 아래로부터 위로 밀고 나아가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장에 삶의 뿌리를 박은 노동자들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확연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 부끄러움, 그리고 동료에 대한 애정과 연대,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므로 애초의 노동시들은 처음부터 붉은 피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성찰에서 나오는 절망과 눈물이었다.

 우습게도 허구한 날 품격 높은 사기와 능숙한 거짓말을 지껄여온 공갈 문학이 노동문학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시는 노동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고- 문화제, 노보, 투쟁이나 행사 등- 노동자들 역시 그다지 즐겨 읽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라는 문학 장르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문학적 수단을 노동자들 스스로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국노동자문학회가 10년을 넘기면서 양적으로 수많은 문예생산물이 쌓이고 하나둘씩 노동시집을 낸 사람들이 모두 20여 명이 넘게 나왔는데, 그 전환기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문학회의 해체와 맞아떨어졌다. 개인 창작이 본질인 문학과 집단적 현실문제의 괴리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그러니까 집단이 와해하여 가는 와중에 각자 개인의 약진이 이루어졌던 셈이었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집단의 단련이 만들어낸 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집단의 힘이란 문학에서 집단이 개인에게 의식적으로 발휘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말함이다. 

노동자문학회의 간판이 내려진 지금에야 돌이켜 보건대, 80년대에서 90년대의 노동운동과 그 궤적을 같이 해온 노동자문학은 한국노동문학사의 중대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현실에 가장 뿌리를 맞댄 계급문학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수백, 수천 명의 발길이 머물다간 자리, 그들의 배면에서 고맙게 아직도 오롯이 시를 쓰고 있는 그리 오래지 않은 벗이자 동지들이 있으니 이들에게는 굳이 시인이라는 꼬리표가 썩 달갑지가 않은 일이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부산의 한진 중공업 희망버스를 선도했던 송경동 시인은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했던 노동자였다. 그는 단순히 시를 쓰는데 그치지 않고 거리의 시인으로 불릴 만큼 투쟁사업장에서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노숙 농성을 하면서 시를 삶의 유일한 실천으로 행사했다. 언제부터인지 문화가 운동의 색다른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송경동의 시는 한 편의 시를 박차고 나와 대중들의 가슴팍을 향해 다가섰다. 그가 시를 통해서 내뱉는 목소리는 집회현장에서 무엇보다 강렬한 확성기가 되었고 노동자들을 움직이게 하였고 시민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이것은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문학의 열띤 희열이었으며 살아있는 시의 전망이었다. 문학의 역할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 그래서 문학은 근본적으로 당파에 갇히질 않는다. 사물화된 리얼리즘은 결국 관념의 형식에 지나지 않음으로 호사가들의 가벼운 말처럼 노동문학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설령 종말을 고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노동의 가치를 역사적 기반으로 한 노동문학은 언제라도 급진적 재구성이 반드시 필요한 때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래와 밤을 위하여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예술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생산하고 수용하는 집단들이 따로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고 그 특성을 재현한다. 그들의 예술은 삶의 실천을 단절시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를 작동하게 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이다. 예술이 삶의 실천과 통합되는 게 아니라 삶과 예술이 분리된다. 예술 따로, 인생 따로인 부르주아 예술가의 위선은 심각한 모순과 이중성에 빠져있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은 다름 아닌 삶으로부터 생겨난 예술을 다시 그 예술의 근원인 삶과 결합하고 밀착시키는 데 있다.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밤잠을 포기하고 신문을 만들고, 시와 노래를 짓고, 사회문제를 토론하는 것에 주목했다. 이 사례에서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나누는 경계(분할)를 넘어서고 있음을 강조한다.

- 고봉준, ‘문학과 정치’에서 ‘문학의 정치’로’ 「작가들」 2012, 가을호.

 

랑시에르가 주목한 것은 부르주아들이 구분해 놓은 예술의 경계를 프롤레타리아가 배제된 존재가 아닌 ‘말하는 존재’로 참여하고 입증하는 것, 그들의 분할 선을 뛰어넘는 것, 이 틈에 바로 ‘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든 문학이든 그 공간 속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뛰어드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굳이 노동시의 새로운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한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던 시의 정치성에 관하여, 진은영 시인은 “어떤 공간에서 시를 낭송하는 행위가 그 공간과 결합하고 그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평론가는 “시는 어떻게 쓰든, 이런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는 자기 견해를 밝히고, 정치적으로 발언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과 ‘시민’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만 삶과 예술의 동시적 실험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노동자들이 시를 쓸 때, 시라는 예술을 통해 삶을 바꾸려고 했던 노력과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현실은 확장되고 변하는 것이라고. 또 어떤 이들은 우려한다. 프롤레타리아라는 깃발 아래 예술가들이 똘똘 뭉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그렇다. 우리는 보고 있다.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하지만 그 속에서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가로놓여 있고 노동예술의 내용은 그 예술적 미학이나 형상화가 늘 낡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날로 버텨내기 힘겨운 강퍅한 삶 속에서,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놓은 공고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별빛처럼 찬란하다.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노래는 뜨겁다. 인류 문명과 문화예술이 낳은 생명이 노동이라면, 문학도 그 생명의 유기체로서 노동의 구성물질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1%와 99%, 부자와 가난뱅이들로 전 세계 민중과 노동자들의 삶이 철저하게 분할된 오늘의 시대를 살면서, 다시 한 번 선연한 프롤레타리아계급문학의 복원을 꿈꾸며, 카프의 맹원 중에 계급과 문학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한 어느 이름 없이 잊혀진 사람을 그려본다. 인민 속으로 들어가 인민의 문학을 이루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이동규라는 작가는 6. 25 전쟁 시에 이현상이 거느린 남부군의 문화지도 위원이었다. 그는 지리산에서 펜 대신에 총을 들고 빨치산으로 최후를 마쳤다.

 

52년 2월 남부군이 거림골 무기고 트라는 데 머물고 있을 때 화가 양지하가 연필로 이동규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이선생의 빨치산 모습’이라는 제목을 달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좋은 기념품이 생겼다면서 그것을 배낭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해 5월 내가 N수용소에 있을 때 205경찰연대의 정보과장이 환자 트에서 사살된 시체의 배낭 속에 들어있었다면서 보여준 그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죽은 그 빨치산은 동상으로 발이 거의 썩어 없어져 버렸다고 했다.

-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에서.

 

동상으로 썩어 없어진 발의 주검이 있었음에도……. 그의 시를 아는 이 없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스무 명이 넘게 죽어나가도 세상은 노동자를 외면하고 있다. 문학의 눈이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서글픈 역사이며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노동의 현실이다. 자본은 세계화되었고 자본의 지배는 총체적이다. 노동자들은 꼼짝달싹 없이 자본에 포위되었다. 지구촌 전체가 그들의 식민지다. 중세 이후, 너무나 잔학한 형벌이라고 해서 금지되었던 화형(火刑)을 이명박이 남일당에서 자행하지 않았던가? 기억하라, 우리도 똑같이 너희를 산 채로 불에 태우리라!

 

<출처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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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창간호를 내며] 진보, 좌파의 불안한 허상,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창간호를 내며]  진보, 좌파의 불안한 허상,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시대와 공간, 계급투쟁이 어울려 역사가 되지만, 역사가 또한 시대정신과 계급 주체를 불러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2008년 이후 자본주의는 폭발했고, 전 세계는 대공황이다. 역사적 시각에서 본다면,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수술대 위에 올랐다. 수술대 위에 오른 자본주의를 ‘집도’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달려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맑스의 언급을 기억하자.

 

미국 월가 점거 투쟁에 이어, 최근 유럽의 긴축 반대 투쟁은 그 기세가 맹렬하다. 계급투쟁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스스로 변화하면서, 자신의 계급의식을 획득한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역사는 지금 진행 중이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국내외 계급 관계, 세계 질서를 재편하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역사적 시기에, 대선을 앞두고 서구 사민주의 베끼기에 급급한 개혁주의 진보· 좌파 세력이 이합집산으로 모인다. 더구나 97년 국민승리21 종이정당처럼, 임시 선거용 ‘가설정당’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선거 중독 당’이다. 여기에 최소한 노동자계급정치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사실만 지적하자!

 

 

우리는 코뮤니스트(Communist) 정치 운동을 이제 시작한다.

 

<코뮤니스트> 창간호 특집 기획에서 오세철은 대통령 선거 정세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 92년 민중후보 사회주의 강령 ‘투쟁’ 취지를 언급하면서, 현 시기 사회주의 정치 실종을 말한다. 대중의 직접행동을 요구한다. 편집부 명의 글은 그간 사회주의 정치운동 평가와 전망, 코뮤니스트의 역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제안한다. 코뮤니스 정치원칙을 세우자는 이형로의 글은 역사적인 소련 사회의 경험,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타락을 분석하고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운동의 원칙을 주장한다. 특히 현 시기 쟁점이 되는 노동자정당, 공동전선을 비판하고, 혁명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독일 공산주의 좌파와 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교훈에서 남궁원과 이형로는 타락한 코민테른에 맞선 독일 좌파, 이탈리아 당 경험의 역사를 상세하게 다룬다. 국제공산주의경향 번역 글은 당과 계급의 분석을 위한 의식의 문제를 다뤘다.

 

 

계급투쟁 소식은 민주노총의 하반기 총파업이 소리 없이 사라진 가운데, 쌍용 자동차 등 투쟁사업장의 공동투쟁을 일지별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임경일은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는 형식적인 민노총 투쟁보다 ‘현장 투쟁의 목소리’를 값지게 대변한다. 성승욱은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은 장애인 예산 확보 및 확대를 위한 투쟁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안이며, 자본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장애의 계급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계기로 파악한다.

 

 

<코뮤니스트>는 세계 노동자 투쟁, 국제 정세와 기획 논쟁을 강화할 생각이다. 첫 시도로 유럽 긴축반대 투쟁의 핵심에 서 있는 스페인 문제를 다뤘다. 스페인 국민당 정부의 노동계급 생활 조건에 관한 무자비한 공격을 비판하고 투쟁을 진척시키고 제안하기 위한 국제공산주의흐름의 상황 분석을 실었다. 기획번역/논쟁으로 논문 형식의 글로, 북한 문제와 자본주의 쇠퇴,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배신자들의 비난>을 실었다. 특히 자본주의 쇠퇴 문제는 계속 연재할 번역할 생각이다.

 

문화 예술은 임성용 시인과 조성웅 시인의 기고 글을 받았다. 임성용은 부르주아들이 만들어놓은 공고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프롤레타리아 노동문학의 의의에 대해서, 조성웅은 계급 문학을 사수하는 노동자들의 공간인 해방글터 상황과 작지만 소중한 시도인 ‘시와 노래의 새로운 공동체 시간’ 글을 보내왔다.

 

 

서평은 자본주의 위기와 함께 극우 보수 민족주의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이때, 파시즘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골랐다. 비교해서 읽고 싶은 책이지만 선뜻 다가서기 힘든데, 현철민은 이념과 역사적 현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다.

 

좌익공산주의 역사와 인물은 한국 사회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공산주의 좌파 역사 문헌과 인물을 앞으로 계속 소개 번역할 생각이다. 남궁원은 세계혁명을 둘러싸고 레닌과 대립했던 유럽 좌익공산주의자인 호르터의 주장과 당시 인터내셔널 건설을 둘러싼 논쟁 글을 번역 소개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출범하면서, ‘코뮤니스트’ 창간호를 발간한다. 우리는 이 책을 사서 읽는 동지들을 단순한 구매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의 시대에 서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로 생각한다. 동지들의 적극적인 비판적 문제의식을 기대한다. 우리는 항상 열려있고, 동지들과 토론하기를 원한다.

애매모호한 진보 좌파에 대한 허상을 깨고,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위해!

2012년 10월8일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598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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