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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트럼프: 여전히 문제는 자본주의

트럼프: 여전히 문제는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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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우파의 출현

 

도널드 트럼프의 45대 미국 대통령 계층에 대한 저항의 쇄도는 현대에서 유례없는 것이다. 그는 증오와 혐오를 팔고 다니는 반동적이며, 인종주의적, 성차별주의적 불량배이다. 그는 모든 비판에 대해 이를 전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반응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한때 변호사를 하면서, 그리고 “폭도”, 로이 콘(Roy Cohn)에 대한 상담역을 하면서 배운 “기술”이다. 그는 이미 미국의 일부, 그 사법부, 비밀 정보국, 그리고 주류 언론, “인민의 적들”에게 그의 결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세계에서 외톨이가 아니다. 전 세계에서 명목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증가해 왔다. 푸틴, 두테르테, 에르도안, 오르반, 그리고 카진스키는 모두 다원주의에 대한 합의나 소수자의 권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권위주의 정권을 통제한다. 무엇이 모든 권위주의자들(그리고 르 펜에서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네덜란드의 빌더르스(Wilders) 등 권력을 갖길 희망하는 이들까지)로 하여금 지금 이 시점에 권력을 잡도록 하였는가?

 

자본주의의 오랜 침체

 

그 뿌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났다. 그 후 세계의 자본주의의 지도자들은 엎치락뒤치락 과거의 성장률을 회복시키는 방법을 찾으려 해 왔다. 1970년대 케인즈주의의 실패 이후, 그들은 “신자유주의”, 탈규제, 그리고 세계화로 돌아섰다. 자본은 이제 노동력이 가장 저렴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는 보다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을 황폐화시켰다. 주로 값싼 서비스 직종이 제조업 일자리를 대체하면서, 자본이 부유한 국가에서 노동자들의 수입은 오늘날 1979년에 비해 실질적으로 감소했다. 노동자들의 연대는 공동체가 파괴되어 감에 따라 침식되었다. 국가들은 보다 더 큰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예를 들어 면세 기간 등) 바닥으로의 경쟁을 심화시켜왔다. 그러나 경제 위기는 없어지지 않았고, 자본주의 체제는 금융 영역의 탈규제에 눈을 돌려, 투기로 가는 길을 열었다. 빚이 갑자기 “자산”이 되었다. 금융자본가들은 그들의 빚의 네트워크에 편입되기 위해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와 같은 방법들을 통해 끌어냈다. 결과는 2008년과 2008년에 터진 대규모의 어마어마한 버블(거품)이었다.

 

어디서든 국가는 은행들을 보석으로 보내고 노동계급에는 긴축재정을 부과했다. 영국의 작은 마을,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서는 세계화의 의심스런 이득을 공유하지 못했던 노동자층은 이제 더한 비참함에 만족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다수는 오직 “세계화”가 저지른 피해에 반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투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반세계화가 좌파의 운동, “세계화 반대(no-global)”, 점거 운동(Occupy Movements)으로 시작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TTIP와 같은 무역 블록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2011년에 경고한 것처럼,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반대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유행(세계화)이 아니라, 전체 착취의 시스템이다. 만약 당신이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세계화의 반대는 민족의 방어가 된다. 급진적 우파는 오늘날의 독성 혼합물로 만들기 위해 반세계화에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더하기만 하면 됐다. 만약 있다면 이민자들 가운데서는 고립된 곳에 있는 소수와, 대다수의 사람들은 만약 일자리를 훔쳐간 것이 이민자가 아니라면, 일자리는 해외의 외국인들에게 간 것이 틀림없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위기(1)의 사회적인 결과는 트럼프로 하여금 티파티(Tea Party)와 같은 반거대 정부 유형, 선교적 기독교인들부터 네오나치의 대안우익(Alt-Right of neo-Nazis)에 이르는 공화당을 둘러싼 모든 우익 그룹들을 연합하는 것이 가능토록 했다. 이에 노동자들의 투표가 더해졌는데, 이들은 세계화에 뒤떨어진 주요 주에서 “그들”(외국인들, 이민자들, 그리고 “워싱턴의 기득권자들”)에 반대하는 트럼프의 공격적인 발언을 믿었다.

 

악어에게 “늪”을 넘기다

 

트럼프가 “대안적 사실”에 강한 편벽이 있음은 잘 알려졌지만, 그의 가장 속 보이는 거짓말은 그가 워싱턴에 가서 “늪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게리 콘(Garry Cohn, 국가 경제 위원회의 수장)과 스티븐 므누신(Steven Mnuchin, 클린턴이 그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비난한 직후에!(2))과 같은 골드만삭스 은행가들을 가득 임명했다. 그의 내각은 적어도 세 명의 백만장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인은 그중에서 가장 부자이다. 이들은 많은 사업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행정부보다 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회가 회사들이 해외의 권력자들(국무장관 틸러슨(Tilerson)의 이전 회사인 엑손 모빌(Exxon Mobil)과 같은)에게 제공한 자금을 공개하도록 강요하는 법을 이미 철폐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또는 트럼프가 다우케미칼(주)(Dow Chemical Co.), 록히드마틴, US 스틸(US Steel)을 포함한 미국의 주요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 앞에서 사업에 부과된 “규제들”을 제거하는 “규제 개혁” 태스크포스팀을 연방에 만드는 행정명령에 사인하더라도 말이다. 환경보호에 관한 규제에서부터 투기를 금지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 규제가 산산조각날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지(2월 22일 자)의 데이비드 필링(David Pilling)이 지적하였듯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늪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악어에게 늪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프에게 투표한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돌아올 것이라는 쓸쓸한 희망으로 살고 있다. 비록 몇몇의 일자리는 돌아올지 몰라도, 노동자들은 예전에 그들이 받았던 것만큼 받지 못하거나, 예전에 그들이 고용된 만큼 고용되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 공장에 투자를 포기한다는 포드의 명백한 입장은 그들의 기운을 북돋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멕시코 공장이 3,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대신 지어지는 로봇화된 미국의 공장은 오직 몇백 개의 일자리만을 제공할 것이다(3). 만약 트럼프가 중국 수입에 대해 45%의 관세를 부과한다는 위협을 실행한다면, 이것은 대규모 수입 대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노동 계급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며 사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노동자들은 지난 40년 동안 그랬던 것과 똑같이 위기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트럼프에 반대할 것인가, 그를 키워주는 시스템에 반대할 것인가?

 

트럼프의 첫 번째 목표가 이민 노동자들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벽을 쌓고 이민자들을 내쫓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빌 클린턴은 벽 건설을 시작했다. 오바마는 이를 지속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작년, 25만의 이민자들을 조용히 쫓아냈다. 새로운 것은 트럼프가 큰 목소리로 멕시코인들과 무슬림을 겨냥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광범위한 공포와 극도의 혐오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이를 교묘히 조장하고 있다. 미국에는 현재 4천만이 넘는 이민자들이 있으며 이 중 오직 1/4만이 불법 이민자들이다. 백인이 아닌 이민자들은 이제 공무원들과 인종주의자들 모두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 외에 기대할 것이 없다. 트럼프는 미국의 민족주의를 이러한 “타인”과 적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트럼프는 에르도안이나 푸틴과 닮았다. 오직 국내 소비만을 위해 기획되었다는 해외 문제에 대한 그들의 선언과 그들이 실제로 하는 짓은 그들의 무가치한 허풍과는 종종 차이를 보인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가 이전에 비해 새로운 대재앙에 우리 모두를 포함해 몰아넣은 것 같다고 이야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의 수사는 보다 공격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의 정책은 이전에 해 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의 존재와 같은 “가짜 뉴스”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트럼프는 이라크를 존재하지도 않는 증거를 근거로 침략하지도 않았고, 관타나모를 지음으로써 인권을 유린하지도 않았다. 그는 지저분한 드론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미국의 핵무기 개량을 위해 3조를 기부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은 부시와 오바마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오바마의 사무실에서의 마지막 행동은 관타나모만을 영구적인 강제수용소로 만들고 이미 거대한 국방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같은 점이 많지만, 점점 더 위험한 세계에 있다는 점이 다르다(4).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으로 가는 추동을 막는 것은 노동계급이 너무 수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생활수준에 대한 공격과 싸우지 않음으로써, 지배 계급의 압력의 일부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훨씬 더 공격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최근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역사는 머물러 있지 않다.

 

세계 노동계급은 너무 오랫동안 체제가 내던진 모든 것의 수동적인 피해자였다. 이제 우리가 맞서 싸울 때가 되었다. 문제는 어떻게? 트럼프가 너무 싫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여 자본주의 좌파(모든 종류의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의미하지만, 특히 민주당)의 즉자주의적 선전을 지지하려는 유혹이 있을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 좌파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논리를 수용하였으며, 생활 수준의 하락에 연루되어있다. 그들의 응급처방은 사회적 평화를 사기 위해 보다 많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투기적 거품의 끝과 함께 무너졌다. 그들은 “파시즘”이라는 이야기로 주의를 돌리고 오도하는데, 그들은 대안이 더 나쁘다는 근거로, 노동 계급이 체제를 지지하게 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분열과 재건의 시대 이후, 풀뿌리 수준, 작업장과 공동체에서 노동자 저항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작은 징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길고 오랜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조직해야 한다. 혁명가들은 체제 안에 투쟁을 가두려는 이들의 통제를 넘어서는 모든 투쟁을 독려함으로써 이러한 부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노동자에 의해 통제되는, 체제가 용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에 순응하게 하는 자본주의 좌파에 의해 조종될 수 없는 자율적인 단체들을 위한 선동을 해야 한다. 이에 더해 혁명가들은 자본주의 착취, 환경 파괴,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안을 향한 “행렬”을 안내하기 위해 통일된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구해야 할, 그리고 쟁취해야 할 세계가 있다.

 

<주>

 

(1) 이 주제에 대한 보다 확장된 논의는 leftcom.org를 보라. 트럼프(레이건식으로)는 감세를 통해 노동자들의 지지를 사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위 0.1%가 (1년에 3백7십만 달러 이상을 버는 이들) 1백1십만 달러 감세 혜택을 받는 동안 최하 5분위 계층에서 1년에 110달러 또는 수입의 0.8%의 감세 혜택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FTWealth, 42호, 2017년 3월, 8페이지)

 

(2) 사실 지난 수십 년간 모든 미국 행정부에는 골드만삭스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하에서 그들은 “가버만삭스(Government Sachs)”라고 알려졌으며 빌 클린턴의 경제 자문은 민주당 아젠다에 영향을 주는 부르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e)에 기반을 둔 소위 해밀턴 프로젝트(Hamilton Project)라는 우익 씽크탱크를 세운 로버트 루빈(Robert Rubin)이었다. 오바마 아래에서는 11명의 골드만삭스 인물들이 정부의 여러 수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똑같이 오래된 늪이다. 이에 대해 prof77.wordpress.com을 보라. 트럼프와 클린턴의 지난 수십 년 간의 사회적, 정치적 거래는 잘 알려져 있다(지금 미국 민주당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고 해도!)

 

(3) 이는 멕시코로 이전하기보다 1,000개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인디애나 주에 머물기로 결정했던, 그러나 결국 수백 명의 외주화와 로봇으로의 대체로 이어졌던 과거 트럼프와 Carrier 회사와의 유명한 거래와 똑같다.

 

(4) 트럼프의 당선 전후 제국주의적 관계에 대해서는 더하다. leftcom.org를 보라.

 

Friday, March 10, 2017

국제코뮤니스트경향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7-03-10/trump-the-problem-is-still-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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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대통령 트럼프 :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

대통령 트럼프 :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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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시대가 기울어갈 무렵 로마 황제들의 광기는 예외적이 아니라 흔한 현상이었다. 그것이 로마가 노쇠해지고 있다는 징후였음을 역사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무시무시한 광대 하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왕(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쇠퇴에서 더 진전된 단계(새로운 사회)에 도달했다는 징후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체제의 진원지에서 포퓰리즘의 쇄도는 단기간에 연이어 브렉시트와 도날드 트럼프의 승리를 초래했는데, 이 사실은 지배계급이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자본주의의 내재적 붕괴 경향을 억제하는 데 활용해 온 정치기구에 대한 장악력을 잃고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지금 사회질서의 급속한 해체로 인해 지배계급이 인류에게 어떠한 미래의 전망도 제시할 수 없는 완전한 무능함과 그로 인한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또한 피착취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초래한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기력한 분노와 공포, 소수자들에 대한 희생양 만들기, 그리고 실제로 결코 실존한 적이 없는 과거에 대한 허상에 바탕을 둔 반동에 말려 들어갈 심각한 위험이 있다.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서의 포퓰리즘의 근원들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포퓰리즘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더 깊이 전개되어 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 글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틀을 브렉시트 결과와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트럼프에 대한 초기 우리의 좀 더 구체적인 대응,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와 함께 검토할 것을 권한다. 이 두 글은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7호에 실려 있다.

 

우리는 또한 '트럼프 대 클린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나쁜 선택일 뿐'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10월 초에 작성된 이 기사는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부르주아지의 좀 더 '책임감 있는' 분파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거의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것을 살펴보았다.1) 이러한 노력은 명백히 실패했는데 이 실패를 초래한 더 즉각적인 요소 중의 하나로는, 클린턴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연방수사국의 국장, 제임스 코메이(Comey)가 어이없게 개입한 것을 들 수 있다. 미국 정보기구의 심장인 FBI는 클린턴이 국가안보의 기본적인 법규들에 어긋나게 사적인 이메일 서버를 사용한 점을 더 조사한 뒤 그녀가 이후에 형사소송에 관여될지도 모른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의 당선 기회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 일주일 정도 뒤 코메이(Comey)는 FBI가 점검한 모든 자료에서 그 어떤 불리한 점도 없었다고 선언함으로써 후퇴를 시도했다. 그러나 피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그녀를 감옥에'라고 집회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해 온 트럼프 캠페인에 FBI는 주요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FBI의 그 기념비적인 실수는 국가기구가 중심에서 정치적 통제력을 점점 더 잃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상징이었다.

 

코뮤니스트들은 차악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기사는 역사의 현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선거는 노동자계급에 어떤 선택도 제공하지 않는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그것들에 대한 코뮤니스트의 견해를 선명하게 재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은 아마도 이번 선거에서 가장 심했던 것 같은데, 이는 명백하게 인종차별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사안을 가진 오만한 쇼맨 트럼프와 지난 30년 동안 국가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형식인 '신자유주의'를 체화한 클린턴 사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두 가지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유권자들의 상당 부분은 미국선거에서 늘 그렇듯이 아예 투표하지 않았다. 초기의 추정투표율은 57% 이하로서, 투표하러 가라는 그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2012년의 투표율보다 낮았다. 동시에 두 진영 모두에 비판적이지만 특히 트럼프에 비판적인 많은 이들은 결국 차악으로서의 클린턴에 투표했다. 우리는 부르주아가 제공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깨짐으로 인해 부르주아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기껏해야 (또 다른 사회조직방식을 위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비록 노동자계급이 계급으로서 행동하지 않을 때 극도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자본주의 국가의 해체를 관통하게 될 또 다른 사회조직방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본질적이다. 그리고 선거 이후의 시기에, 기존의 정치사회질서를 이렇게 거부하는 것, 부르주아 국가라는 감옥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이 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투쟁할 필요성을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적절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단순한 트럼프 반대주의, 일종의 개편된 반파시즘2) 쪽으로 이끌려가게 될 것이고 이것은 다시 부르주아의 좀 더 '민주적인' 분파들, 가장 그럴듯하게는 민주당 대선후보지명전에서 버니 샌더스3)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언어를 말하는 그런 분파들의 견해를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의 사회적 기초

 

이글은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들의 동기와 사회적 구성을 자세하게 분석하는 자리가 아니다. 트럼프 캠페인에 그렇게 결정적인 여성반대 수사법(레토릭), 여성혐오주의는 자체의 역할을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점은 특히 지난 몇십 년 동안 성별 관계에 나타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변화들에 대항한 훨씬 더 세계적인 '남성의 반격'의 일부이기에 그 자체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중심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이 불길하게 성장해 왔고 이점은 트럼프 캠페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의 인종차별주의에는 이해할 필요가 있는 그 특유한 요소들이 또한 존재한다. 즉, 단기적으로는, 오바마의 대통령직과 미국판 '이민자 위기'에 대한 반응,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노예제와 차별의 유산 전체가 그러한 요소들이다. 초기의 통계로 볼 때, 대략 88%의 흑인 유권자들이 클린턴진영을 선택했지만 친트럼프 표는 압도적으로 백인들(비록 상당수의 '히스패닉'들을 동원하긴 했지만)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국 인종 분리의 긴 역사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 작성될 기사들에서 이 문제들을 다시 다룰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관한 우리의 기사에서 주장하듯이 트럼프의 승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다수를 희생하여 특히 오래된 제조 및 채굴산업의 노동자계급을 희생하여 작은 소수만을 부유하게 하는 거시경제적인 과정들인 경제세계화와 금융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한 분노였다고 생각된다. '세계화(Globalisation)'는 자동차와 철강 같은 산업들이 대대적으로 분해되어 노동력이 더 값싸고 이윤이 훨씬 더 높은 중국과 같은 나라들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의미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에 있어 '빈곤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의 이주를 통해 노동력을 값싸게 만드는 또 다른 수단이었다. 금융화는 대다수에게는 경제생활을 점점 더 신비스런 시장의 법칙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다수의 소액투자자와 주택소유자들을 파산하게 하였던 2008년의 대폭락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좀 더 자세한 통계적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트럼프 캠페인의 핵심적 강점은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들로부터, 특히 소위 '대도시의 자유주의 엘리트' 안에 체화된 기존의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저항의 하나로 트럼프에게 투표한 새로운 산업 황무지들인 '러스트 벨트(사양화된 공업지대)'의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노동자들이나 이 지역들의 다수는 이전의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투표했고 몇몇은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들의 표는 무엇보다도 부의 점점 더 커지는 불평등에 대항한, 그들 자신과 자식들에서 어떤 미래도 보장받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그 체제에 대항한 그러한 반대의 표였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계급 운동의 완전한 부재라는 틀 안에 결국 이러한 반대는 엘리트가 외국 투자자들에게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순진한' 노동자계급을 대가로 이민자와 난민들과 소수자들에게, 남성노동자들을 대가로 여성노동자들에게 특별한 이권들을 준다고 비난하는 포퓰리즘적 세계관에 자양분을 제공했다. 트럼프주의의 인종차별적 여성 혐오적인 요소들은 '엘리트'에 대한 수사적인 공격과 연관되어 있다.

 

트럼프의 집권 : 평탄하지 않은 주행

 

우리는 트럼프의 대통령직이 어떨지 그가 어떤 정책들을 구현하려 할지 추측할 생각은 없다. 트럼프에게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이 바로 예측 불가능성이라서 그의 통치의 결과들을 예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아침밥도 먹기 전에 벌써 몇십 개의 모순적인 말들을 할 수 있지만, 이점이 선거 캠페인에서 그의 지지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있다. 하지만 캠페인에서 그랬다고 해서 재임 기간에도 그렇게 잘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트럼프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자신을 소개하고 미국 기업인들을 관료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또한 내륙 도시들에서의 인프라 구조를 회복하고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하며 환경 보호를 위한 개발 제한들의 폐지로 화석 연료산업을 다시 활성화하는 등 대대적인 프로그램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모두는 경제에 대한 중대한 국가자본주의적 개입을 뜻한다. 그는 수백만의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고 맹세하지만, 미국 경제의 많은 부분이 그들의 값싼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외교정책에서 그는 고립주의와 철수(나토에서의 미국의 참여 규모를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에서 보이듯이)의 언어를, 군비 예산증가를 약속하며 'IS에 폭탄을 퍼붓는 것' 같은 허세에서 개입주의 언어와 만난다.

 

확실해 보이는 것은 트럼프의 대통령직 특징이 지배계급 내부 그리고 국가와 사회 이 둘 모두에서 충돌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트럼프의 승리연설이 화해의 전형이었고 그는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트럼프를 백악관에서 맞이하기 전 오바마는 가능한 한 원만한 이행기를 보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만약 공화당 기존 세력의 트럼프에 대한 반감을 극복한다면 그는 더 선동적인 정책들을 미뤄 놓더라도 많은 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긴장과 충돌의 징후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나토에 관한 회의감을 유지한다면 또는 강력한 지도자로서 푸틴에 대한 그의 존경이 동유럽과 중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의 위험스런 재활에 맞서는 미국의 시도들이 약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군 위계질서의 일부는 그의 몇몇 대외정책에 아마도 매우 적대적일 것이다. 그의 몇몇 국내정책들에 대한 반대는 또한 정보기구, 연방 관료와 대자본관계자들의 내부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을 테고 이때 이들은 트럼프가 마구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한편, 아마도 민주당 내부에서는 '클린턴 왕조'의 정치적 소멸로 새로운 반대파들이 출현하고 심지어는 분열을 일으켜서, 버니 샌더스와 같은 이들 주변에 좌익이 출현해서 경제적 정치적인 기존 세력들에 대한 적대 기운을 이용하길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의 수준에서,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비교하자면,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 그룹들이 이제 그들의 폭력과 지배의 환상을 실현할 권한을 부여받은 듯이 느끼면서 '대중적인' 외국인 혐오증이 불길하게 꽃피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불법 체류자들'의 억류와 추방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시작한다면, 이 모든 발전은 지난 몇 년간 경찰에 의한 흑인살해 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거리에서의 저항들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실제로, 선거결과가 발표된 바로 그 날부터 미국 전역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매우 분노한 시위들이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이 시위들에는 트럼프가 이끄는 정부라는 전망에 역겨움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인 영향

 

국제수준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브렉시트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Brexit plus plus plus)'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서유럽의 우익 포퓰리즘적 정당들에, 특히 2017년 선거를 치르게 될 프랑스의 민족전선에 강력한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다국적인 무역 기구로부터 탈퇴를 원하고 경제 보호주의를 선호하는 정당들이다. 트럼프의 가장 공격적인 선언들은 중국의 경제적 경쟁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1930년대의 경우처럼 이미 포화한 세계 시장을 더 위축하게 될 무역 전쟁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지난 20년간 세계자본주의에 기여했지만 이제 그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각자 나 홀로' 경향을 지금까지는 그것이 더 단단히 억제되어 온 경제 영역으로 전파할 위험이 있다. 또한, 트럼프는 지구온난화가 단지 중국인들이 그들의 수출 추세를 지원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난이라고 선언했고, 기후변화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국제조약에서 철수하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약들이 이미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우리는 알지만,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우리를 산적한 세계적인 환경재앙들에 훨씬 더 깊이 빠뜨리는 것과 같다.

 

반복하자면, 트럼프는 사회운영에 대한 그 모든 전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부르주아지를 상징한다. 그 모든 허영과 자아도취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나 점점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 가는, 심지어 세계대전의 선택 여지마저 없어져 가는 체제의 광기를 그는 체화한다. 자본주의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은 자체의 정치적 군사적 기구들을 이용하여, 달리 말해서 한 계급으로서의 의식적 개입을 통해 완전한 통제 상실, 즉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카오스로의 충동이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거의 한 세기 동안 막아낼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통제의 한계들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적들이 새로운 일시적 수리를 통해 살아남는 능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계급의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그 모든 수준에서 부르주아지의 명백한 파산이, 아주 작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체제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대열에서 그릇된 분노와 해로운 분열들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래에 자본주의를 하나의 인류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나타낸다.

 

한편 자본주의의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세계대전이 오늘날 의제가 아닌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계급이 큰 전투에서 패배당하지 않고 여전히 마르지 않은 저항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2006년의 프랑스 학생투쟁과 2011년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Indignados) 저항들처럼 지난 십 년 동안 나타난 다양하고 대대적인 운동에서 그것을 목격해왔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저항의 전조들은 경찰에 의한 살해에 반대하는 항의시위와 트럼프에 반대해 이뤄지는 선거 후 시위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위들은 분명한 노동자계급 성격을 갖지는 않고, 좌익의 직업정치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포퓰리즘의 위협과 자본의 좌익이 제공하는 잘못된 대안 이 두 가지 모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 계급의 코뮤니스트 전통들과 다시 접촉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자립을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당장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만연한 연무(smog)를 특히 모든 가장된 형식들까지 관통해서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명료성을 위해 투쟁함으로써 그러한 발전을 준비하는 역할을 갖는다.

 

Amos 11.11.2016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주>

 

1)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의 반대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로, 그 당의 좌익의 일부로 여겨지기 어려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백지를 제출하겠다고 선언했다.

2) 지배계급의 한 부문에 대항해 다른 한 부문과 '반파시즘 '연합을 결정하는 정책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특히 이탈리아 공산주의좌파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이것은 반파시즘이 노동계급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수단임을 정확히 인식했다. 우리의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01호에 재간행된 빌랑(Bilan)지의 기사, '반파시즘: 혼돈을 위한 공식(Anti-fascism: a formula for confusion)'을 참조하기 바란다.

3) 샌더스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트럼프 대 클린턴(Trump v Clinton)' 기사를 참조 바란다.

 

<원문 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cconline/201611/14175/president-trump-symbol-dying-social-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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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TrumpBrexit3.jpg

     

    통제 불능에 이른 국민 투표

     

    우리는 30년 전에 "해체에 대한 테제(Theses on Decomposition)"1)를 통해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정치 기관 중심에서 바깥으로 해체되어 가는 원심력 경향을 더욱 통제하기 힘들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 투표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배계급으로부터 나온 파렴치한 정치적 모험가들은 두 경우 모두에서 지난 30년 동안 경제적 대변동에 고통받아왔던 이들의 포퓰리즘적 저항을 자신들만의 자기-확장에 이용해왔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은 포퓰리즘의 확장에 대해 인식하고 그 결과를 설명하는데 게을렀다. 이것이 우리가 왜 이제야 포퓰리즘에 대해 - 여전히 조직 내에서 토론이 진행되고 있지만2) - 전반적인 글을 출간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토론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영국과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빠르게 진화하는 국제 상황에서 완벽한 분석을 내놓으려는 의도는 없지만, 우리는 이 글이 새로운 사상과 토론 심화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

     

    지배계급이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 영국에서의 EU 국민투표와 그 이후의 일들로 나타난 전례 없는 혼잡과 무질서의 광경만큼 명백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때까지 영국의 자본가들은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통제를 놓쳐본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매우 중요한 이해관계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이나 나이젤 파라지(Nigel Farage)와 같은 모험가들 손에 좌지우지된 적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브렉시트 결과에 대한 준비의 실패는 영국 지배 계급 내부의 혼란을 보여준다.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주요한 탈퇴 운동가들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약속했던, 그리고 탈퇴 캠페인 버스의 모든 벽에 붙어있었던, 브렉시트 투표가 가져다줄 NHS3)를 위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 추가 자금은 본질적으로 '오타'였음을 설명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파라지는 UKIP4)대표 자리에서 사임했고, 모든 브렉시트 쓰레기더미를 그를 따르던 탈퇴 찬성자들의 무릎에 던져버렸다. 보리스 존슨은, 전임 의사소통 담당국장(director of communications) 구토 하리(Guto Harri)는 존슨의 "심장은 브렉시트 운동에 있지 않았다"며, 존슨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대의는 순수하게 기회주의적인 것이며,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에 도전하는 그의 리더십을 부흥시키기 위해 고안된 자위적 조작이라는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투표의 모든 기간 존슨의 선전부장이었으며, 존슨이 영국 총리가 되기 위한 운동을 운영할 예정이었던(그러나 반복적으로 그 일에 관심이 없음을 선언해왔던) 마이클 고브(Michael Gove)는 그의 오랜 친구 존슨이 총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근거로 후보자 등록 마감 고작 2시간 전에 스스로 총리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존슨의 등에 칼을 꽂았다. 앤드레아 리드섬(Andrea Leadsom)은 고작 3년 전에는 탈퇴가 영국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면서 토리당 대표 경선에 확고한 탈퇴 지지자로 입후보했다. 거짓말, 위선, 말 바꾸기들 - 이 모든 것들은 지배계급의 정치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지배계급이 어떤 의미에서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야망이나 사소한 맞수들의 비판 너머에 있는 압도적인 역사적, 국가적 이해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영국 지배계급의 역사에서 이와 비견할만한 사건을 찾아보자면, 우리는 쇠퇴하는 중세 질서에 대한 마지막 갈망을 보여준 장미 전쟁(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로 극화된)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탈퇴 의견이 승리한 것에 대해 금융과 산업의 사장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다. 결과에 대한 모든 징후가 "당신의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슬아슬한 승부"(만약 이를 인용해도 된다면, 워털루 전쟁 이후의 웰링턴 대공)5)임을 보여주는 상황이었는데에도. 20%, 그 이후 30%로 달러에 대한 파운드화(Sterling)가 즉각적으로 붕괴했던 것은 브렉시트가 기대한 결과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파운드화의 가치는 국민 투표 이전에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은행과 사업가들이 사무실을, 또는 사업체를 더블린이나 파리로 옮기는 것과 같이 탈출을 향해 질주하는 가감 없는 장관에 배가 부를 정도였다. 세계에서 해외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 FDI)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경제 상황에서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이 즉각적으로 법인세를 15%로 내리기로 한 것은 영국에 기업들을 잡아두기 위한 명백한 긴급 비상조치였다.

     

    제국의 반격

     

    영국의 지배계급은 아직 쓰러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분별력 있게 존속을 지지해왔던 확고하고 역량이 뛰어난 정치인인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캐머런의 즉각적인 후임 총리가 되었고(애초에 9월 이전에는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다), 언론과 토리당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그녀의 반대편인 앤드리아 리드섬과 마이클 고브가 직장을 잃은 것은 국가의 유력한 지배계급 일부에 대해 신속하고 통일된 반응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진정한 역량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이 상황은 세계 자본주의의 진화와 계급 사이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기라는 현 단계에서 통일된 부르주아 정책이 분해되어가는 전반적인 움직임의 산물이다. 포퓰리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너머의 추동력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포퓰리즘의 문제에 기여한 토론"에서 분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인 국제 현상은 특정 국가의 역사와 특징들의 영향 아래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그래서 토리당은 항상 그 EU에서 영국의 구성원 자격을 실제로 허락한 적이 없는, "유럽연합에 대해 회의적인" 한 측면을 담당해 왔고, 그 근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유럽의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영국의 - 그리고 그 전에는 잉글랜드의 - 지리학적 위치는 영국이 대륙의 국가들이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유럽의 경쟁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해 왔다.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 지주 권력의 부재 또한 프랑스가 19세기 이전, 또는 독일이 1870년 이후 그러했던 것처럼 유럽 지배를 바랄 수 없도록 했고, 오직 주요 강국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도록 하고, 그들 중 어느 나라와도 연루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생존의 이해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2. 영국의 섬으로서의 지리학적 위치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한 국가의 지위는 대항해시대, 세계 제국주의의 개막을 결정지었다. 적어도 17세기부터 영국의 지배계급들은 전 세계에 모양새를 갖추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유럽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하게 변했다. 영국의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지배적인 지위는 더는 유지 가능하지 않았고, 근대적 전쟁 기술들 - 공군,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 로 인해 유럽 정치로부터의 고립이 더는 선택사항이 아님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 중 하나가 윈스턴 처칠(Winston Curchill)이다. 그는 1946년 "유럽 연방국(United States of Europe)"을 만들자고 요구하였으나 보수당 내에서 그의 견해는 전적으로 승인되지 못했다. <편집자 주 : 처칠의 구상에서 유럽연방국에 영국이 포함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아 논쟁이 되고 있다.> 특히 소련(USSR)의 몰락과 1990년대 독일 통일이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독일의 권력을 증가시킴에 따라 EU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증가했다.6) 국민투표 운동 동안 보리스 존슨은 EU가 “히틀러” 독일 지배의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중상모략을 하였으나, 이러한 사건은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똑같은 언어로, 그와 똑같은 감수성들을 이미 1990년에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가, 그 이후에는 대처 정부의 총리가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전후 정치 기관 내에서 권위와 규율의 상실을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다만 리들리는 정부로부터 즉각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존슨의 반향은 새로운 내각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었다.

     

    영국이 세계의 가장 위대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한때 누렸던 지위. 그 지위의 상실은 영국 국민(노동계급을 포함하여)의 심리적, 문화적 현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국가적 집착은 - 영국이 마지막으로 독립적인 세계 강대국으로서 행동할 수 있었던 - 이를 완벽하게 묘사한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더 많은 소부르주아지는 영국이 오늘날 오직 2등급, 또는 3등급의 강대국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탈퇴 운동가들의 다수가 EU의 "족쇄"로부터 영국이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세계는 영국의 상품과 서비스를 사러 몰려들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 경제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 권력의 상실에 대해 바깥 세계로 향하는 분노와 적개심은 미국 국민이 자신들의 지위 일부를 잃었다고 인식한 결과(트럼프의 "다시 위대한 아메리카를 만들자"는 지속적인 테마)로서의 감성들, 그리고 냉전 시기 그들이 자신들의 법칙을 부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감성들에 견주어볼 만하다.

     

    포퓰리즘에 대한 양보로서의 국민투표

     

    보리스 존슨의 포퓰리즘 광대 짓은 더욱 극적이었고, 더욱 많은 미디어로부터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데이비드 캐머런의 낡은, 최상위 계급의 "책임감 있는" 페르소나가 발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캐머런은 지배 계급 내에서 얼마나 부패가 진행되었는지를 더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이용한 무대를 만든 것은 캐머런이었다. 바로 그 성격으로 인해 국민투표는 의회 선거보다 통제하기 훨씬 어렵고, 그러하기에 언제나 도박을 의미한다.7) 카지노에 중독된 것처럼, 캐머런은 반복하여 스스로 도박사임을 드러내었는데, 처음에는 아슬아슬하게 그가 승리했던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였고, 그다음이 브렉시트였다. 그의 보수당은 언제나 경제, 영국(연합 왕국)8), 그리고 국방의 최고의 보호자임을 자처해 왔는데 이번에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결과 조작이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 이해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지배계급에 있어서 대부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위험 요소이다. 의회 민주주의는 전통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쇠퇴기의 그릇된 형식에서도 그러한 문제에 관한 결정은 전체 대중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가들과 이해관계자 그룹들의 조언을 받은(로비를 받은)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내려지게 되어 있다. 부르주아지의 관점에 의하면, 이를테면 2004년 EU의 헌법 조약(Constitutional Treaty)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투표자들이 조약 문서를 읽으려고도 그리고 읽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다. 국민투표들에서 자주 “잘못된” 결과를 얻었던 지배계급이 이 조약을 연기시켰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프랑스, 네덜란드, 최초에는 아일랜드에 대해).9)

     

    오늘날 영국 부르주아 정당 내부에 메이 정부가 프랑스와 아일랜드 정부가 헌법 조약에 대한 국민투표를 망친 뒤 했던 것과 같은 속임수를 쓰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국민투표를 무시하거나 뒤집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단기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적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영국 부르주아지가 그 추종자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신뢰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대중의 의지”의 “민주주의적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 오직 포퓰리즘 사상에 신뢰를 부여하고 그들을 보다 위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테리사 메이의 전략은 EU로부터 탈퇴하게 된 영국을 조직할 책임을 떠맡은 채, 장관직에서 최대한 잘 해보려고 애쓰고, 가장 잘 알려진 탈퇴 찬성자 셋과 함께 브렉시트의 길을 멈추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광대인 존슨을 국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것 - 해외 인사들을 공포와 유쾌함과 불신이 뒤섞인 감정으로 환영하는 것 - 도 분명 이러한 폭넓은 전략의 일부이다. 존슨을 EU 탈퇴 협상이라는 논란이 많은 자리에 앉힘으로써, 메이는 탈퇴 운동가들의 주요한 발언들이 거의 확실하게 적대적인 언어로 가득할 대부분의 격렬한 비난 - 그리고 불신 - 에 직면할 것을, 그리고 이는 측면 저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을 확신했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갖는, 엘리트가 단순히 그들에게 불편한 결과를 무시하기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과정은 협잡이라는 인식은 지배계급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 효율성에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치에 대한 포퓰리즘 개념에서는 “사람들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기존의 정치 엘리트에 의한 선출된 대표자들의 부패를 피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독일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부정적 경험과 나치 독일이 국민투표를 이용했던 경험 이후 전후(post-war) 헌법에서 그러한 국민투표를 배제한 까닭이다.10)

     

    탈선한 선거

     

    만약 브렉시트가 통제에서 벗어난 국민투표였다면, 2016년 미 대선 후보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정도를 벗어난 선거이다. 트럼프가 후보가 되었다는 것이 처음 공언되었을 때에는 그 사실이 거의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선두는 부시 왕가, 공화국 귀족들의 선호하는 선택, 그리고 잠재적인 강력한 기금 조달자(언제나 미국 선거에서 결정적인 고려사항)는 젭 부시(Jeb Bush)였다. 그러나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트럼프는 초반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고, 그다음 주(state) 선거에서 계속 이겨나갔다. 부시는 ‘픽’ 소리를 내며 쓰러져 나갔고, 다른 후보들도 다르지 않았다. 공화당 대표자들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후보는 테드 크루즈(Ted Cruz)뿐이라는 불쾌한 전망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자기네 상원 의원들로부터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그리고 트럼프보다 아주 조금 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람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

     

    트럼프가 클린턴을 이길 가능성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그러나 벌써 트럼프 후보는 제국주의 동맹들의 모든 시스템을 통해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미국은 70년 동안 그 효과성이 상호 방어의 불가침 - 하나에 대한 공격은 모두에 대한 공격 - 에 의존하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의 보증국이었다. 트럼프가 만약 러시아가 발트 해 국가들을 공격했을 때 “그들이 대가를 치렀는지”에 대한 그의 판단에 미국의 반응이 달려있을 것이라고 선언한 방식으로, 미래의 미국 대통령이 NATO 동맹과 그 조약의 의무를 존중할 준비가 되었음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때가 온다는 것은, 푸틴의 마피아 국가에 직접 대면하고 있는 동유럽 지배계급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것이며, 중국이라는 용으로부터 보호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 대한민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군대는 없다는 트럼프의 최근의 발언(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크리미아(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 일부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완전히 모르는 것)을 보았을 때, 트럼프가 단순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가능성은 큰데 이것 역시 다른 이들에게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러시아 정보국의 민주당 IT 시스템 해킹을 환영하고 푸틴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트럼프에 조금이라도 얼마나 피해를 줬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공화당이 극단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격렬하게 반러시아적이었으며,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강력한 군대 조직과 세계 각지에 배치된 다수의 군대를 옹호하는 것(이것은 재정 적자 수준을 급등하게 한 레이건의 엄청난 군비 증강이었다)을 떠올려 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공화당이 그 후보를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취급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1964년, 프라이머리에서 종교적 우익과 “보수 연합”의 지지로 인해 승리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오늘날 “티 파티 운동”의 선구자였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일관적이었다. 연방 정부 예산, 특히 사회 안전망에 대한 예산의 대대적인 감축, 군비 증강, 소련에 대항하는 핵무기의 사용 준비 등. 그것은 전통적인 극우 정책이었으나,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의 필요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고, 골드워터는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했는데, 이는 공화당의 지배층이 그를 지원하는 데 실패한 것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골드워터 2.0 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차이는 유익하다. 골드워터 후보는 그 시기 “티 파티 운동”에 의해 대표되는, 골드워터의 패배 이후 몇 년 동안 물러서야 했던 - 보수당의 권력 장악을 대표한다. 최근의 10~20년 동안 이러한 경향이 돌아왔으며, 이 경향이 GOP11) 권력을 다소간 성공적으로 차지해 왔음은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 연합”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사회 변화(페미니즘,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의 시작, 전통적인 가치의 몰락)를 경험하는 미국 내에서 진정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대표했다. 비록 많은 티파티의 “원인”이 골드워터와 같을지라도, 맥락은 그렇지 않다. 그가 반대하는 사회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티파티는 보수의 연합이라기보다 신경증적인 반응의 동맹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자유 무역에만 관심이 있는 대(大)부르주아지의 어려움을 증가시켰다. 공화당 프라이머리에 나서는 자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되었다: 낙태(당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총기 규제(총기에 저항하기 위해), 재정적 보수주의와 낮은 세금, “오바마케어”(사회주의, 이는 철폐되어야 한다. 실제로 테드 크루즈의 신용 일부는 상원에서 오바마케어에 저항하는 대중 호소 필리버스터를 한 것에 바탕을 뒀다), 결혼(신성한), 민주당(만약 사탄이 당을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당일 것이다). 자, 짧은 몇 달의 기간 트럼프는 효과적으로 당의 핵심 골자를 빼버렸다. 우리는 그 스스로 낙태, 총기 규제, 결혼(그 스스로 세 번이나 했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인물, 과거 스스로 악마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던 인물이 후보가 되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최저 임금의 인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바마케어의 유지, 고립주의 해외 정책으로의 회귀, 재정 적자 폭의 증대, 그리고 미국 경제에 필수적인 저임금 노동을 제공해 온 천백만의 이민자들의 추방을 제안한다.

     

    브렉시트에서의 영국의 토리당처럼, 공화당과 잠재적인 미국의 모든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인 입장과 경제적 계급의 이해관계에 대해 완전히 불합리한 정책을 가진 말안장 위에 스스로 올라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의

     

    우리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후보 당선이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더욱 불안정한 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적 수준에서 유럽 국가들 - 우리는 이들이 세계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큰 단일 시장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은 이미 허약한 상황에 부닥쳐있다. 그들은 2007/8년의 금융 위기와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위협을 경험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영국은 주요 유럽 경제권에 남아있지만, EU와의 연결을 끊어내는 오랜 과정은 예측할 수 없게 파탄 날 것이며, 이는 적어도 금융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브렉시트가 유럽의 은행, 보험, 그리고 주식거래의 중심지인 런던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브렉시트의 성공은 유럽 대륙의 포퓰리즘 정당들만을 고취하고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내년 반유럽주의자이며 포퓰리스트인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있는 국민 전선이 프랑스 대선에서는 가장 큰 단독 정당이다. 유럽 강대국들의 정부는 영국의 유럽으로부터의 분리를 가능한 부드럽고 마찰 없이 이뤄내려는 열망과 영국에 대한 어떤 양보(이를테면 인구의 이동은 제한한 채 시장에의 접근은 허락하는)도 다른 이들에게 – 지적하자면 폴란드와 헝가리와 같은 국가들에 - 같은 생각을 하게 할 수 있다는 실질적 두려움 사이에서 갈가리 찢겼다.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유럽의 남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중단될 것이다. 터키 에르도안(Erdogan)의 쿠데타와 시리아 난민들을 공갈·협박의 비열한 게임의 말로써 쓰는 것에 대해 EU는 통일된 반응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비록 EU 그 자체가 제국주의 동맹이었던 적은 없으나 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NATO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럽의 단합을 약화시키는 어떤 것도 러시아가 동유럽의 측면, 우크라이나와 발트 해 국가들을 무너뜨리는 압력에 반격하는 NATO의 능력에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러시아가 가끔 프랑스의 국민 전선에 자금을 지원하고, 독일의 페기다(Pegida: Patriotische Europäer gegen die Islamisierung des Abendlandes, 서양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 운동에는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의 유일한, 가장 뚜렷한 승자는 사실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럼프 후보자는 이미 미국의 신뢰성에 한 방 펀치를 날렸다. 핵무기 버튼에 손가락을 얹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생각은, 반드시 말해둬야겠는데, 매우 두려운 전망이다.12) 그러나 우리가 수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날 불안정과 전쟁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 지배적인 제국주의적 지위를 모든 이민자에 저항하여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의 결의이며 이 상황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구에 대한 분노

     

    보리스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는 수다쟁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공유하고 있다. 둘 다 정치적 모험주의자이며 국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원칙이나 감성도 결여하고 있다. 둘 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왜곡시키든 바꾸든 그들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익살은 그것들이 터무니없어 보일 때까지 미디어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완전히 하찮은 것들이며 세계화의 패배자들의 울부짖는 분노, 절망, 그리고 부유한 엘리트와 자신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는 창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트럼프는 가장 무도하고 모순적인 발언을 대충 지껄여버린다. 그의 지지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듣길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슨과 트럼프가 똑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는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속한 지배계급의 차이와 관계가 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수 세기 동안 세계무대에서 중요한 지배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에 비해 미국의 거칠고 대담하며, 자기-몰입적인 국면은 제2차 세계대전에 진입하는, 루스벨트의 고립주의자들에 대한 승리와 더불어 끝났다. 미국 지배 계급의 중요한 분파는 여전히 바깥 세계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그들이 발달이 늦은 성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결과는 우리에게 노동 계급의 상황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지언정 절대 계급의식의 표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되었든 미국에서의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되었든, 프랑스의 국민 전선의 마린 르 펜이 되었든, 또는 독일의 포퓰리즘인 페기다와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이 되었든, 이러한 당과 운동이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곳에는 지난 40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 변화로부터 가장 고통받은 이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패배한 수년의 경험이 그들에게 지배 엘리트를 위협할 방법은 똑같은 엘리트에 대한 저주를 정책으로 하는 무책임한 정당을 향해 보란 듯이 투표하는 것일 뿐임을, 합리적으로 결론 내린 이들이 있는 곳임을 모든 투표 수치는 보여준다. 비극이라면, 이러한 노동자들이 정확히 1970년대 투쟁에 가장 대중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점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선전의 공통 주제는 “우리”는 “다시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실제로 통제해 본 적 없다. 보스턴 UK의 한 거주자가 “우리는 단지 모든 것들을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을 뿐입니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그때란, 일자리가 있었을 때, 그 일자리가 적절한 임금을 보장해 줄 때, 노동 계급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가 실업과 태만으로 무너지지 않았을 때, 변화가 뭔가 긍정적이고 조절 가능한 속도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때이다.

     

    브렉시트 투표가 영국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가 목조 뒤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더욱 자유롭다고 느끼는 새롭고 추악한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진실이다. 그러나 브렉시트 또는 트럼프에 이민을 멈추라고 투표한 많은 - 아마도 절대다수 - 이들은 그렇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그보다 그들은 외국인 혐오로부터 고통받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공포, 알려지지 않은 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그 자체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의 과정에서 실제의 사회관계를 마치 자연적인 힘으로, 요소로, 마치 날씨와 같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에 영향력은 훨씬 파괴적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본질적으로 신비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와 같은 과학적 발견의 시대, 사람들이 더는 궂은 날씨를 마녀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의 경제적인 비통함이 그들의 불행한 이민자 동료들에 의해 일어났다고 믿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매우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

     

    우리는 이 글을 “해체에 대한 테제”를 언급하면서 시작했다. 해체에 대한 테제는 거의 30년 전인 1990년에 썼다. 우리는 그 테제를 인용하며 결론을 짓고자 한다.

     

    “우리는 특히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그 역사적 책무의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이 해체될 위험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한다. (…) 노동계급의 힘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바로 이 이데올로기 해체의 다양한 측면들에 직면한다.”

     

    ● 연대와 집단적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 원자화에 직면한다.

    ● 조직의 필요는 모든 사회적 삶의 기반이 되는 관계의 파괴, 사회적 해체에 직면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미래에 대한 신뢰와 그 자신의 힘은 지속해서 사회에 만연한 절망과 허무주의로 활력을 잃는다. 의식, 명석함, 일관되며 통일된 생각, 이론의 달콤함은 환상, 마약, 분파주의, 신비주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 또는 파괴의 가운데로 곤두박질치는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다."

     

    그 위험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것들이다.

     

    포퓰리즘의 유행은 지배계급에 위험한데, 포퓰리즘이 지배계급의 정치 기관들을 통제할 능력을 위협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사회적 지배를 지탱하는 기둥인 민주주의의 신비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혼란에 대해 어떤 대안적 전망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허약함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유행을 가능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만이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유혹의 말 -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약속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과거로의 회귀라는 불가능한 약속에 자신을 맡긴다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16년 8월, Jens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주>

    1) International Review 107, 2001년 출판

    2) International Review의 이 주제를 보라.

    3) 국가 의료 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4) 영국 독립당(United Kingdom Independence Party): 1991년 세워진 포퓰리즘 정당. 그 선전은 본질적으로 EU 탈퇴와 이민 반대이다. 역설적으로 유럽 의회에서 가장 거대한 단독 영국 정당을 구성하는 22명의 MEPs 를 보유하고 있다.

    5) EU와 영국 재무부가 탈퇴 캠프가 승리할 경우 상황에 대한 계획에 대해 일정정도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준비가 부적절하며 - 아마도 보다 적절하게는 - 아무도 탈퇴파가 국민투표에서 승리할 것이라도 진실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은 탈퇴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다. 명백히, 파라지는 국민투표 날 잔류파의 승리를 인정했으나, 잔류파가 패배한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6) 1973년 보수당 정권 아래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그 구성원 자격은 1975년 노동당 정부의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었다.

    7) 대처가 의회 선거에서 40% 이상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8)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통합 왕국 연합이라고 이야기된다.

    9) 이러한 불편한 결과에 따르면, 유럽 정부들은 헌법 조약을 채택하지 않았고, 2009년 리스본 조약으로 기존의 협정을 단순히 수정함으로써 가장 본질적인 요인을 구했다.

    10) 스위스와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국민투표와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립된 정치적인 과정의 일부였다.

    11) “Grand Old Party”,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된 공화당의 구어식 표현이다.

    12) 골드워터 패배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전술적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존슨의 선전은 골드워터의 슬로건 “당신의 가슴 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음을 알고 있다”와 대비되게 “당신의 창자에서, 당신이 그가 괴짜임을 안다”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쳤다.

     

    <원문출처>

    http://en.internationalism.org/international-review/201608/14087/brexit-trump-setbacks-ruling-class-nothing-good-proleta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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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박근혜 정권의 탄생 직전에 창간한 『코뮤니스트』를 박근혜가 파면되어 구속된 시점에 발간한다. 지난 몇 년의 엄중한 정세에서 코뮤니스트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코뮤니스트를 제때 발행하지 못한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기에 독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마음으로 사과드린다. '코뮤니스트'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대중과 약속한 것은 혁명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데, 이행하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과 운동의 절박함을 담아 다시 약속드린다. 앞으로 코뮤니스트는 정기적으로 정세에 맞춰 발행할 것이다. 또한, 코뮤니스트 정치와 코뮤니스트(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알릴 것이다. 코뮤니스트가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혁명 조직 건설의 기초를 마련할 것이다. 코뮤니스트 지지자와 독자가 직접 참여하는 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번호는 장기간의 공백이 있었던 만큼 현 정세와 코뮤니스트 정치에 중심을 두었다.
<코뮤니스트 정치>에는 촛불 투쟁이 만들어 낸 조기 대선 정국에서 정권 교체와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촛불 투쟁이 향해야 할 길과 대대적 촛불 투쟁에 대한 분석 글을 실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교훈을 끌어내려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계획과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혁명 운동 평가와 전망 모임’에서 개최한 토론회 발제문을 실었다.
<문화예술>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관람기와 코뮤니스트 남궁원 동지 추모집을 코뮤니스트 추모문화 정립 의지를 담아 소개했다.
<국제정세>에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침체와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인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를 다룬 공산주의좌파 경향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들은 현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을 갖기 위해 작년 기사도 실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추적해 나갈 것이다.
이번 호부터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연속해서 소개할 예정이다. 우리의 정치 원칙이 코뮤니스트의 유일한 강령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열어놓고 토론할 생각이며, 내외부의 어떠한 논쟁과 검증과 공헌도 기꺼이 받아들여 함께 발전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코뮤니스트 혁명가>에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왜곡되어 잘못 알려진 혁명가의 명예회복과 혁명적 복원의 시작을 알리는 특별한 약속이다.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연재 번역 글은 이번이 4회 인데, 앞으로 속도를 높여 빠른 시일 안에 완료할 것이다. 코뮤니스트는 앞으로 한국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좌익공산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고 혁명적 공산주의 사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사상적 기반을 제공할 계획이다.
 
박근혜 정권의 탄생시기에 출범한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그동안 수많은 내외부의 걸림돌과 싸우면서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손실도 있었고, 반성도 있었고, 교훈도 얻었다. 우리는 이 과정이 코뮤니스트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코뮤니스트』를 재편하면서, 새롭게 창간한다는 각오로 5호를 발행한다. 우리의 생각과 태도는 코뮤니스트 창간 정신을 계속 발전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혁명운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평가와 그에 따른 원칙을 되새기려 한다. 인터내셔널의 관점으로 코뮤니스트 운동을 생성해 나가려는 주체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정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책을 사서 읽는 동지들을 단순한 구매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의 시대에 서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로 생각한다. 동지들의 적극적인 비판적 문제의식을 기대한다. 우리는 항상 열려있고, 동지들과 토론하기를 원한다.
애매모호한 진보 좌파, 노동 정치에 대한 허상을 깨고, 코뮤니스트의 이념과 원칙을 위해!“
 
- 2012년 10월 8일 『코뮤니스트』 창간사 중에서

 

박근혜 정권이 저물고 새로운 부르주아 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노동자의 삶과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4년과 촛불 투쟁의 경험은 오히려 야만의 자본주의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유일한 목표가 코뮤니스트 혁명임을 증명하고 있다. 촛불 투쟁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노동자계급의 현실이 암울하다고 자본주의 타도와 코뮤니스트 혁명으로 향하는 길에 우회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공개적으로, 공세적으로 주장하며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나가야 할 때이다.

 
“미래는 야만이 아니라 코뮤니즘이어야 한다.”

 
2017년 4월 10일
코뮤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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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5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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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2017 봄호_5호 목차

□ 코뮤니스트 5호를 내면서

□ 코뮤니스트 정치
‣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면적 투쟁으로!!
‣ 대대적 촛불 투쟁은 더 넓고 깊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 <노동자의 책> 이진영 동지에 대한 탄압을 규탄한다!
‣ 대대적 촛불 투쟁, 주체 그리고 자극(inspiration)   

□ 러시아 혁명 100주년 특집
‣ 1917년 러시아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억
‣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행기 그리고 코뮤니즘을 둘러싼 쟁점들
‣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 문화예술 
‣ 나, 다니엘 블레이크
‣ 남궁원이 부른다. ‘청계천8가’에서 ‘인터내셔널’까지

□ 국제 정세
‣ 트럼프: 여전히 문제는 자본주의
‣ 대통령 트럼프 : 사멸해가는 사회체제의 상징
‣ 브렉시트, 트럼프 : 프롤레타리아에게 좋을 것 전혀 없는 지배계급을 위한 후퇴
  
□ 코뮤니즘을 향하여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을 제안하며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소개 1 -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 코뮤니스트 혁명가
‣ 선거 – 실비아 팽크허스트
‣ 실비아 팽크허스트 : 혁명가들은 왜 노동당에 반대하는가?
‣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 팸플릿] 한국어판 서문

□ 연재 번역
‣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 : 배신자들의 비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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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안톤 판네쿡

 

 

들어가는 말

 

1920년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다. 레닌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 : 코민테른 제2차 대회를 앞두고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 an Infantile Disorder]를 출간했으며, 같은 해 안톤 판네쿡이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World Revolution and Communist Tactics]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서 100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다양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 그룹들은 그의 책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를 따라서 좌익공산주의를 [좌익소아병] 또는 [초좌익]으로 매도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좌익공산주의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10년이 채 안됐다. 이는 좌익공산주의를 제대로 소개하기도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좌익공산주의를 한 사람의 책 한권만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100년 전 러시아의 상황을 현재 한국의 상황과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리가 판네쿡의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을 번역 및 게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좌익공산주의를 왜곡한 것에 대한 반박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쇠퇴기 하에서 노동조합, 의회주의, 공동전선와 민족주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의 활성화 등을 위해서이다.

 

이 팸플릿은 총 9장으로 구성된 이유로 이번 호를 포함하여 총 3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안톤 판네쿡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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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판네쿡Anton Pannekoek


1873~1960은 혁명과 반혁명의 시기,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던 혁명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천문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판네쿡은, 1914년 이전까지는 네덜란드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좌익으로 활동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그는 독일 반수정주의 좌익세력의 주요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사회 민주주의의 정통성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그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성을 요구했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찜머발트 반전 운동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판네쿡은 레닌주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적인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레닌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으로 인하여, 좌익공산주의 내에서 레닌의 계속적인 적대감을 얻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자기 해방의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가장 일관되고 지속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해방세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선진 산업사회에서의 지배와 종속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일련의 인상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흥미롭고 독창적인 사상가로 남아 있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판네쿡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당대의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루카치, 코르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는데, 그 대부분은 판네쿡 사상의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대한 좌우의 수정주의와 권위주의 세력의 종파적 대응 때문이었다.

 

 

 

 


세계혁명과 공산주의자 전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두 가지 힘에 의해 일어나는데, 하나는 물질적 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힘이며, 후자는 전자에 그 근원을 둔다. 경제의 물질적 발전은 의식을 만들어 내고 의식은 혁명 의지를 활성화시킨다.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향의 기능으로서 발달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과학(Marxist science)은 먼저 사회주의당 이론과 그다음 공산당 이론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과학은 혁명운동에 엄청나고 건강한 지적 통일을 부여한다. 이 이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한 부분에 서서히 인식되고 있는 동안에, 대중들 자신의 경험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증대하는 정도로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과 급격한 경제 붕괴는 대중들이 공산주의를 지적으로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혁명을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모순은 혁명을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만드는 모순, 망설임 그리고 좌절의 근원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 그 자체는 새로운 추진력을 발휘하고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정들은 갑자기 너무나 거대하게 발생하는 봉기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방해받는다.

 

서유럽에 관한 한, 혁명의 발전은 주로 두 가지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 경제 붕괴와 소비에트 러시아(Soviet Russia)의 사례. 프롤레타리아트가 러시아에서 그렇게 빨리 그리고 상대적으로 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를 - 부르주아지의 나약함, 소농과의 동맹, 혁명이 전시에 발생했다는 사실 - 여기서 상술할 필요는 없다. 노동자가 지배자라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공산주의 건설에 참여했던 국가라는 사례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엄청난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자극하는 데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자신의 물질적 환경의 결과에 가장 강하게 좌우된다. 만약 자본주의가 그 낡은 힘을 완전히 유지했다면, 저 멀리 러시아로부터의 소식은 인상을 거의 주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그러나 소부르주아처럼 소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용기도 없이, 러시아와 인류 전체는 행동을 취했다." 이것이 러트거스(Rutgers)1)가 러시아에서 서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대중들에게 느낀 충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서유럽의 모든 사람은 급격한 경제 호전을 기대했고 혼란과 야만의 장소로써 러시아를 수동압착기(lying press)로 묘사했다. 이내 대중들은 그들의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때부터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 혼란은 전통적인 문명의 발상지에서 확산된 반면에, 러시아에서의 신질서(new order)는 증대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그 대중들이 이곳에서도 동요하고 있다.

 

경제 붕괴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경제적으로 이미 완전히 산산조각 났으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멈출 수 없는 하락에 들어서 있다. 영국은 너무 심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재건에 대한 자국 정부의 활발한 시도가 붕괴를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하며 미국에서는 위기의 첫 번째 위협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각국에서, 대략 이와 같은 순서로, 대중들 내에서 불만은 커지고 있다. 대중들은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때리는 총파업운동(great strike-movement)으로 궁핍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다. 이 투쟁들은 서서히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신념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도, 대중들은 공산주의가 그들에게 보여준, 즉 현실의 필연성이 그들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길을 더욱더 뒤따르고 있다.

 

이 필연성과 분위기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들을 짊어졌던, 이를테면 공산주의자 전위(communist vanguard)는 이 국가들에서 발전해 왔다. 이 전위는 목표를 또렷하게 인식하며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 스스로 조직을 재편성한다. 이 발전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두드러진 점은, 이데올로기적 용어와 조직적 용어 두 가지에 있어서,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의 뚜렷한 구분이다. 이 구분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경제 위기에 빠졌던 – 부르주아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불가피했던 - 중유럽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중유럽에서의 위기가 너무나 엄청나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다수의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과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USP은, 그들이 아직도 광범위하게 낡은 사회민주주의의 방법, 전통, 구호 및 지도부를 고수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의 가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모든 사회민주주의당은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는 대중들 사이에 전투적인 혁명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생디칼리즘(syndicalism) 및 공산주의 관점의 이론적 혼합을 간과하도록 한다. 프랑스 공산주의 그룹들은 최근에 사회민주주의당과 노동조합운동에서 스스로 분리했으며 지금은 공산당 창당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국에서 낡고 익숙한 조건들에 대한 전쟁의 지대한 영향은 서로 다른 기원과 새로운 조직 형성의 아직 구성되지 않은 공산주의 운동을 발생시켜 왔다. 미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당이 모스크바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데 반하여 두 개의 공산당은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당에서 분리했다.

 

반동의 맹공격에 대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의외의 회복력은 협상하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서구의 노동당에게 새롭고 강력한 인상을 심어줬다. 제2인터내셔널은 파산하고 있다. 모스크바를 향한 중도파 그룹들의 전면적인 움직임은 대중들의 성장하는 혁명적 분위기의 강한 욕구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이 그룹들은 대단히 달랐던 그 그룹들의 이전 관점을 사용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름을 빌렸으며 낡은 사회민주주의 개념과 방법을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이전시키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 혁명을 위한 기회가 더욱 무르익었다는 징후로서, 바로 본래의 것과는 상반되는 현상이 이제 막 나타나고 있다. 그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입성 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원칙을 지지하는 선언과 같은 방향으로, 위에서 언급되었던 독일통일사회민주주의당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간의 뚜렷한 차이는 또다시 희미해지고 있다. 몇몇 원칙의 확고함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3인터내셔널 외부에서 그러한 당들을 공식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시도가 무엇일지라도, 그 당들은 새로운 구호로 입에 발린 말을 함으로서 전투적인 대중들에 대한 그 당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교묘히 각국 혁명운동 지도부의 환심을 산다. 이것이 모든 지배계급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대중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기보다는, 가능한 한 그 영향력으로 혁명을 끌어내리기 위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는 이처럼 우리에게 생기는 증대된 힘만을 보며 취약성의 증가는 보지 못한다.

 

공산주의와 러시아의 등장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평범하고 복잡하지 않은 방식을 얻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이제 맞닥뜨리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극도로 복잡하고 고된 과정으로 만드는 힘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강령과 전술에 대한 쟁점과 해법은 추상적인 원칙에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경험에 의해, 현실적인 삶의 실천에 의해 결정된다. 공산주의 목표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은 그들이 늘 해왔던 것처럼 이전의 혁명적 실천을 기반으로 정교해져야 한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이 지점까지 진행되었던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원동력, 조건 및 방식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보여준다.

 

러시아 혁명은 그 당시 서유럽 관찰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너무나 믿기 힘들 정도의 빠른 상승세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를 가져왔고, 그것에 대한 이유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 서유럽에서 경험하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더욱 놀랍게 보인다. 그것의 최초 결과는 예상한 대로 열광의 감격 도취였으며, 서유럽에서 혁명이 직면한 문제들은 과소평가되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눈앞에,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민주주의 양식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평의회 체제, 산업, 농업 및 교육의 재조직이라는 그 힘의 모든 광채와 순수성으로 새로운 질서의 원칙들을 밝혔다. 많은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대한 묘사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내용을 매우 간단하고 분명하며 포괄적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사례를 목가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음을 증명했고 독일에서 표면화되었던 힘들은 나머지 유럽을 통틀어 전반적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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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주의가 1918년 11월에 붕괴되었을 때, 노동자 계급은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4년간의 전쟁에 따른 마음과 정신의 황폐화와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의 휩쓸림은 전후 몇 주 내에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과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할 수 없게 했으며, 공권력이 약해졌을 때 공산주의 선전의 집중적이었지만 짧은 기간은 이 부족을 보충할 수 없었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훨씬 많이 배웠다. 노동자들의 각성 상태를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 빨갛게 몸치장을 하면서, 부르주아지는 즉시 자신의 권력 기구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노동자평의회는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당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었다. 군인으로서 무장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가 아닌 그들 스스로 무장 해제했다. 가장 활동적인 노동자 그룹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백군(white guards)에게 진압 당했고 부르주아지는 무장된 자경단civil militias을 만들었다. 노동조합 지도부의 묵인 아래,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들은 혁명 중에 쟁취했던 노동조건의 모든 개선을 서서히 강탈당했다.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길은 자본주의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공산주의를 혼란으로 더욱 깊이 침몰시키기 위해 철조망으로 차단당했다.

 

물론, 독일 혁명의 과정에서 쌓였던 경험들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혁명의 발전은 각국에서 다른 과정으로 전개될 것이다. 권력은 정치 및 군사적 붕괴의 결과로서 준비가 안 된 대중들의 수중으로 갑자기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할 것이고 이렇게 하여 승리했을 때 더 높은 정도의 성숙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독일에서 11월 혁명 이후 열풍의 속도로 발생했던 것은 이미 다른 국가에서 더욱 조용히 발생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러시아 혁명의 결과를 도출하고 있고, 내전을 위한 군사적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의 도움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정치적 기만을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일 혁명은 확실한 일반적 특징을 보여주며 일반적 의의에서 확실한 교훈을 제공한다.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더디고 고된 과정일 것이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이것에 원인이 있는 힘들을 드러내 보였다. 서유럽에서 혁명 발전의 더딘 속도는, 비록 상대적일지라도, 모순되는 전술적 경향의 충돌을 초래했다. 급격한 혁명 발전의 시기에, 전술적 차이가 즉시 행동으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의식적으로 되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원칙에 입각한 시위는 사람들의 생각을 명확하게 하고 동시에 대중들은 물밀 듯이 밀려들며 정치적 행동은 낡은 신념들을 뒤집는다. 그러나 외부적인 침체의 시기가 시작될 때, 반대 및 혁명적 구호를 방치하는 대중들이 더 이상 상상력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어려움이 늘어나고 적수가 각각의 교전으로 더욱 거대하게 부상하는 것처럼 보일 때, 공산당이 약세를 보이고 패배만을 경험할 때 - 관점은 갈리며, 새로운 행동 방침과 새로운 전술적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바로 그때 모든 지역 편차에 대하여 각국에서 인식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이 부상한다. 하나의 경향은 언행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명확하게 하려고 하며, 이것을 위하여 낡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신념들에 반대하여 가능한 가장 분명하게 새로운 원칙들을 제기하려고 한다. 다른 경향은 여전히 방관자로서의 대중들을 현실 활동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고 그래서 그들을 단념시킬지도 모를 그 무엇이든 가능한 한 방지하기 위해 차이점보다는 합의점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대중들 사이에 냉철하고 분명한 분리를 위한 노력이고 두 번째는 통합을 위한 노력이다. 전자는 급진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으며, 후자는 기회주의적 경향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는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러시아 혁명을 타도하기 위한 연합국들의 공력에 대한 러시아의 확고한 저항과 더불어, 서유럽의 현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지금껏 결정하지 못한 노동자 그룹들의 제3인터내셔널로의 보다 많은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회주의는 거의 틀림없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내에서 강력한 세력이 될 것이다.

 

기회주의(opportunism)는 순종적이고 회유적인 태도와 어휘뿐만 아니라 더욱 신랄한 방식으로서 발본주의(radicalism)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분명하고 원칙에 입각한 전술의 부족은 너무나 자주 공격적인 표현을 광신적으로 감춘다. 그리고 확실히, 혁명적 상황에서, 그 모든 기회주의의 희망으로 위대한 혁명적 행동에 급작스럽게 공격을 가하는 것이 기회주의의 특징이다. 기회주의의 본질은 앞으로의 문제는 고려하지 않고 항상 목전의 문제만을 감안하며, 심층에 기초한 결정요인을 인식하기보다 현상의 표면적인 측면을 주시한다. 힘이 즉각적으로 특정 목표의 달성에 충분히 않을 때, 그러한 힘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다른 방식 즉,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 목표를 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목표는 목전의 성공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미래의 영구적인 성공을 위한 조건들을 희생시킨다. 기회주의는 다른 '진보'그룹들과 동맹한다는 그리고 낡은 신념에 양보한다는 사실에 대한 정당성을 구하며, 그것은 흔히 권력을 잡을 수 있거나 하다못해, 자본가계급의 연합인, 적을 분열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하여 투쟁에 더욱 유리한 조건들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의 권력은 항상 환상으로 드러나며, 개인의 권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이 아니라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행사되었다. 이 모순은 그 경야經夜에 혼란, 부패 그리고 갈등을 유발할 뿐이다. 국가 권력의 헤게모니(hegemony) 행사를 위해 충분히 준비된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은 국가 권력의 장악은 다시 빼앗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잖이 힘이 빠진 반동 세력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계급 적대의 분열은 - 개량주의의 매우 과시된 구호 - 드러나지 않게 연합한 부르주아지의 통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기만하고 혼란시키며 약화시킨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산주의 전위가 정상적인 조건들이 충족되기 이전에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명확성, 통찰력, 연대 및 자율성 면에서 얻어진 것만이 공산주의를 향한 그 이상의 발전 토대로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다.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는 이러한 기회주의 정책 사례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사례들은 제3인터내셔널 내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非사회주의 노동자 그룹들 또는 다른 계급들의 도움을 구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부패했고 최종적으로 붕괴될 전술들을 초래했다. 지금 제3인터내셔널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선의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원칙에 입각한 정책과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미래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조용한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는 끝났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있다. 전 세계는 우리의 선전이 다수를 명료한 공산주의 통찰력으로 획득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대중들 자신과 전 세계가 재앙으로부터 모면하려면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개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할 때, 소규모 당은 원칙에 따라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장 폭넓은 대중들을 빨리 모으려는 노력으로 필연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기회주의가 아닌가?

 

혁명은 소규모 급진정당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이 거대 대중정당 또는 서로 다른 정당들의 연합에 의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 대중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당에 의해 선동된 행동은 간혹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으나 (간혹 있는 사건) 결정적인 힘은 대중들의 무의식 내 깊은 심리적 요인에 그리고 세계정치의 중요한 사건에 있다. 혁명당의 기능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스스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전체 대중들에게 사전에 냉철한 이해를 선전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혁명의 과정에서 당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대중들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강령, 구호 그리고 지시를 제고시켜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따라서 위대한 목적의 명료성에 이르는 데에 그 자신의 목표를 표현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은 투쟁에 앞서게 된다.

 

대중들이 계속해서 소극적이라면, 이것은 보람이 없는 전술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원칙의 명료성은 처음에는 혁명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포된 영향력을 미치고 혁명은 투쟁에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는 그 활동적인 힘을 드러낸다. 반면에 만약 원칙의 희석, 동맹의 결성 및 양보에 따라 거대정당에 모이려고 시도해 왔다면, 그때 이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불충분함을 꿰뚫어 보지 않고도 혁명의 시기에 분명치 않은 부류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한다. 전통적 관점에의 순응은 그렇게 되는 전제조건인 혁명이 없이 권력을 잡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결과는 혁명의 과정을 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패하도록 운명 지어졌는데 왜냐하면 가장 급진적인 생각이 대중들이 혁명에 참여하자마자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혁명이 완수되지 않는 한 적당함은 그들을 충족시킬 뿐이다. 혁명은 동시에 대중들의 사고에 엄청난 대격변을 수반한다. 그것은 혁명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며, 스스로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하여 혁명의 지도력은 분명한 원칙이라는 세계이행 권력 덕분에 공산당의 몫이 된다.

 

공산주의를 사회민주주의와 구별 짓는 평의회 체제와 독재라는 새로운 원칙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강조와는 대조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는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이어받은 투쟁의 방식에 최대한 의지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 의회 활동을 평의회 체제로 대체했고 공장을 기반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건설했으며, 서유럽에서 첫 번째 충격은 이 사례를 따르는 것이었다. 독일공산당(KPD)은 의회 선거를 거부했고 노동조합으로부터 즉각적이나 점진적인 조직 분리에 찬성하는 운동을 했다. 그러나 1919년 혁명이 느슨해지고 침체되었을 때, 독일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의회주의를 선택하는 데에 이르고 산업별 노동조합에 반대하여 낡은 노동조합연맹을 지지하는 데에 이르는 이전과는 다른 전술을 도입했다. 이 배후에 있는 주된 논거는 공산당은 계속해서 전적으로 의회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대중들에 대한, 선거운동과 의회 연설을 통해 최고에 도달하는 대중들에 대한, 그리고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함에 따라 700만 명까지 조합원을 증원시켰던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이 영국 사회주의당BSP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노동당이 제2인터내셔널에 속할지라도 다수의 노동조합주의자와의 관계 상실을 두려워하여 노동당과 단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들은 공산주의적 기회주의의 강령적 진술로서 간주될 수 있는「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 : 베를린 감옥에서 집필」의 저자인 우리의 친구 칼 라덱(Karl Radek)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진술되었고 결집되었다.2) 공산주의는 모든 선전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목표로서 노동자 평의회의 점진적인 도입과 함께 (부르주아) 의회 활동과 노동조합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무기로 남는다는 점을 통해서 여기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토대, 조건 및 어려움에 대한 검토는 이것이 어디까지 옳은지를 보여줄 것이다.

 


 

서유럽의 부르주아지가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서유럽에서의 혁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은 여러 차례 강조되었다. 이 힘의 기반을 분석해보자. 그 힘의 기반은 부르주아지의 수에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이 수적으로 훨씬 더 많다. 그 힘의 기반이 전체 경제생활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이것은 확실히 중요한 권력 요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며 중유럽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그렇다면 그 힘의 기반은 모든 강압 수단을 포함하여,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있는가? 분명히, 국가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틀 방해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의 정복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첫 번째 목표였다. 그러나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지의 힘이 없는 지배에서 빠져 나갔으며 국가의 강압 기구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대중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는 이 국가 권력을 다시 건설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한 번 더 지배하에 두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보였을 때, 그들의 헤게모니를 재건하기 위해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힘에 또 하나의 숨겨진 원천을 보유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숨겨진 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부르주아 사고방식에 완전히 지배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붕괴된 이후 그들 자신의 손으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부활시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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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험은 우리에게 서유럽에서의 혁명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낡은 부르주아 생산양식과 이와 함께 발전했던 수백 년간의 문명은 대중들의 사고와 감정에 그것들 자체를 강하게 새겨 넣었다. 이런 이유로, 서유럽 대중들의 사고방식과 내면은 부르주아 문화의 지배를 경험하지 못한 동유럽 대중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이것이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혁명이 발생했던 서로 다른 과정을 구별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중세 이래로 프티 부르주아지와 초기 자본주의 생산에 기초한 강력한 시민 계급(burgher class)이 있었다. 봉건주의가 쇠퇴하면서, 시골 지역에서도 똑같이 강력한 자영농 계급 - 각자는 또한 그 자신의 소규모 사업의 주인이었다 - 이 성장했다. 부르주아 감수성은 이 토대 위에서 단단한 민족 문화로 발전했는데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서 선두에 섰던 영국과 프랑스 두 해양국에서 그러했다. 19세기에, 전체 경제의 자본으로의 종속과 대부분의 외진 농장의 자본주의 세계무역 체제로의 편입은 이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고 개선시켰으며, 언론, 학교 및 교회의 심리적인 선전 활동은 민족 문화를, 자본이 프롤레타리아화시키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끌어 모은, 대중들의 뇌리에 확고히 주입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모국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형태일지라도, 유럽인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웠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그리고 그 당시까지 침체되었지만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파도가 낡고 낙후된 소농 경제 및 프티 부르주아 문화와 연결될 수 있었던 중유럽,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서도 해당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동유럽 국가로 압력을 가했을 때, 매우 상이한 물질적 조건과 전통에 직면했다.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에서 심지어 엘베 강 동부 독일에서도 정신적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자는 대규모 토지, 가부장적인 봉건주의 및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와 더불어 원시 농업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래서 이곳 대중들은 백지처럼 수용적으로 더욱 원시적이며 간단하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와 연관되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지한' 러시아인들은 노동의 새로운 세계의 전위로 주장할 수 있다고 흔히 조롱하면서 표현했다. 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관련하여, 암스테르담 공산주의 대회4)에서 영국의 한 대표는 차이점을 상당히 정확하게 강조했다. 러시아인들은 더 무지할지 모르지만, 영국 노동자들은 그들 사이에 공산주의 선전을 더욱 힘들게 하는 편견으로 가득 찼다. 이 '편견'은 영국, 서유럽 그리고 미국의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포화 상태로 만드는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측면일 뿐이다.

 

이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전체 내용은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의 세계관과는 대조적으로 다변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간신히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고방식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 프티 부르주아와 소농의 노동 형태에 그 기원을 두고 점진적으로 공동체라는 그리고 인정되는 규율의 필연성이라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감각으로 대체될 뿐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이다. 이 특징은 아마 앵글로색슨(Anglo-Saxon) 국가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개인의 관점은 총체로서 포괄적인 사회 대신에 그의 작업장에 제한된다. 너무 절대적으로 분업의 원칙은, 정치 그 자체로, 전 사회의 통치 체제, 누구나의 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전문가들, 정치가들의 전문화된 분야인, 지배하는 계층의 독점으로서 보인다. 수세기에 걸친 물질적, 지적 무역과 더불어, 문학과 예술 즉 부르주아 문화는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에게 단단히 박혔고, 외면적인 무관심 또는 표면적인 국제주의보다 무의식에 훨씬 깊게 기반을 둔 민족단결의 감정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민족적 계급연대로 그 자신을 표현하며, 국제 행동을 적지 않게 저해한다.

 

부르주아 문화는 주로 사고(thought)의 전통적인 태도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내에 존재한다. 대중들은 실질(real terms)로 생각하기는커녕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따라갔다. 부르주아적 사고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와 전통은 통합적이지 않다. 이전 세기의 무수한 계급투쟁으로부터 남겨진 정신적인 반사 작용은 낡은 부르주아 세계를 구분 짓는 사고의 정치 및 종교 체제로서 존속하고, 이런 이유로 그것에서 기인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라 그룹, 교회, 분파, 정당으로 분열된다. 이와 같이 부르주아적 과거는 새로운 세계 창출을 위해 필수적인 계급통일을 방해하는 조직 전통으로서도 프롤레타리아트 내에서 존속한다. 이 낡은 조직에서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전위의 추종자와 지지자를 이룬다. 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지도자를 공급하는 것은 지식인계급(intelligentsia)이다. 지식인계급 - 성직자, 교원, 문인, 언론인, 예술가, 정치인 - 은 무수한 계급을 형성하며, 부르주아 문화를 조성, 발전 및 전파시키는 기능을 한다. 지식인계급은 부르주아 문화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며, 자본의 헤게모니와 대중들의 이익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본의 헤게모니는 대중들에 대한 이 그룹의 지적 지도력에 뿌리박고 있다. 억압당하는 대중들이 흔히 자본과 그 기구에 반대하여 투쟁할지라도, 그들은 지식인계급의 지도력 하에서 그렇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공동투쟁에서 쟁취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이 지도자들이 드러내 놓고 자본주의의 편으로 전향하자마자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강력한 버팀대임이 입증된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그들 투쟁의 표현으로서 살아있는 힘이 되었던 쇠퇴하는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문화투쟁(Kulturkampf)5) 이후 독일에서의 가톨릭교(Catholicism)와 마찬가지로, 흔히 국가를 강화했던 반동 체제로서 후에 그 가치를 입증했다. 그 이론적 기여라는 가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것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처럼, 낡은 이데올로기를 파괴하고 끝장내는 데에 있어 사회민주주의가 수행했던 역할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정신적으로 전문가로서 정치 및 다른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인 유형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 다루는 대신에 지도자들이 맡아 관리하도록 했다. 반세기의 극심한 계급투쟁에서 발전한 확고한 연대와 규율은 자본주의를 파묻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들에 대한 지도력과 통제력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4년 8월과 1918년 11월에 이는 대중들을 부르주아지와 제국주의 그리고 반동의 무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서유럽에서, 이를테면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과거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작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란 계급의 통일을 방해하도록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되는 그룹으로 나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이 계급 통일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순전히 정치 방침을 계급 정치로 대치하는 어느 정도의 그 기회주의적 전술로 인하여, 실패했다. 그것은 단지 그룹의 수를 증가시켰을 뿐이다.

 

위기시기에 대중들이 필사적이 되어 행동을 할 때, 대중들에 대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는, 1918년 11월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이 전통의 힘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다시 대두되며, 일시적인 승리를 패배로 만든다. 우리의 관점에서 부르주아 개념의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힘은 독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슬로건에 대한 존경, 이념과 강령의 오랜 습관의 힘. 요점은 의회의 지도자들과 사회주의 정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이다. 러시아에 대한 더러운 거짓말의 폭격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이 증거가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신감의 부족, 대중들의 그 자신의 힘에 대한 믿음의 부족,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십 년 동안 그들의 투쟁, 그들의 혁명적 목표, 그들의 이상의 화신이었던 당, 조직, 그리고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의 부족이 그것이다. 이 조직의 엄청난 정신적이고 도덕적이며 물질적 힘인 이 거대한 기계는 노동운동이 우세한 자본의 앞잡이였고, 지금은 다시 한 번 대중들 내에서 타오르는 모든 혁명적 경향을 짓밟았던 시기를 포함하는 투쟁 형태의 전통을 구현했던 대중들 자신의 수년간의 노력으로 공들여 만들어졌다.


이 사례는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빠른 붕괴와 정신의 미성숙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작동하는 부르주아지 전통의 힘으로 표현된다. 프롤레타리아가 헤게모니와 자유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신의 성숙을, 번영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획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모순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러한 모순은 오직 혁명적 발전의 과정에서, 자발적인 봉기와 권력 쟁취, 그리고 후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만 해결된다. 혁명이,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낡은 투쟁 수단뿐만 아니라 새로운 투쟁 수단을 사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랫동안 자본의 요새를 헛되이 공격한다는 과정을 취할 것이라는 점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라덱의 개요(schema)에서 제기되었던 장기간에 걸친 전술과 신중히 조작된 포위 작전은 이와 같이 불발로 끝난다. 만약 권력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전술적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권력을 가능한 한 빨리 획득하느냐가 아니다. 이것은 코뮤니스트에게는 너무 쉬운 선택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지속적인 계급 권력의 기반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이다. '단호한 소수파(resolute minority)'는 전체로서 계급의 행동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대중들이 그들의 머리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무관심을 발생시키기 위해 그러한 권력 장악을 받아들인다면, 진정으로 수동적인 대중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쟁취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반동의 적극적인 추종자로서 언제 어느 때나 혁명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그리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교수대와의 연합(coalition with the gallows on hand)'은 고작 이러한 종류의 옹호될 수 없는 당독재(party dictatorship)를 위장할 뿐이다.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가 부르주아지의 파산한 지배를 파괴하고, 공산당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냉철한 전위가 정치 지배를 장악할 때, 공산당은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나약함의 근원을 발본색원하기 위한 그리고 미래에 닥쳐올 혁명 투쟁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과업만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성공적으로 완수시킬 수 있기 때문에 대중들 스스로 그들에게 맡겨진 과업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것은 대중들 자신을 활동의 정점으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결단력(initiative)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자신감(self-confidence)을 상승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조직 형태의 지배와 낡은 지도부의 지배를 끝장내기 위해 불가피하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키고 대중들의 물질적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연립정부에 합류시켜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본주의 외면의 맹공격에 대비하여 생산과 방어의 재조직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반혁명을 방지하는 전제조건이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지가 계속해서 지배하는 그러한 권력은 정신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주성과 독립성의 결여에 의해 야기된다. 혁명 발전의 과정은 의존성과 과거의 전통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해방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투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가 이미 오랜 제도이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미 그것에 대항해 몇 세대 동안 투쟁하고 있는 곳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시기에 자본주의 발전의 당대의 단계에 상응하는 투쟁의 방법들, 형식들 그리고 지원들을 창조해 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곧 임시방편으로 여겨지기보다, 지속적이고 절대적이며, 그리고 완벽한 형식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은 결국 파괴되어야 하는, 발전의 족쇄가 되었다. 계급이 거듭되는 대격변과 급격한 발전에 휘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특정 국면의 대변인으로서 계속해서 특정 단계에 남아 있으며, 그들의 엄청난 영향력은 운동을 방해할 수 있다. 행동의 형태는 도그마(dogma)가 되고, 조직은 변화된 투쟁 조건에 다시 맞추고 재적응시키기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격상된다. 이것은 여전히 적용된다.

 

계급투쟁 발전의 모든 단계는 지금의 발전이 훨씬 빠른 페이스로 선행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만약 그 자신의 과업을 분명히 인식하고 과업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면 이전 단계의 전통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혁명은 내부 투쟁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저항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안에서부터 발전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공산주의를 향해 성숙해진다.

 


옮긴이 ❙ 성승욱
 

 

<주>

 

 

 

 

 

 

1)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 회원인 S. J. 러트거스는 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또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 참석했으며 암스테르담에 제3인터내셔널 서유럽 서기국 설립을 위해 1919년 말 귀국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따르면 갑자기 얼어붙게 만든 기초를 야기했던, 서기국 기관지의 독점적 발행에서 의회 전술과 노동조합 전술에 관해 좌파 지향의 글을 썼다.

 

2) 여기서 판네쿡은 라덱이 수감 중 작성한 두 개 글의 제목을 혼동하고 있다. 「독일 혁명의 발전과 공산당의 과업The Development of the German Revolution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Party」은 하이델베르크 회의 전 쓰였고「세계혁명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에서 공산당의 전술The Development of the World Revolution and the Tactics of the Communist Parties in the Struggle for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은 그 이후 쓰였다. 여기에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3) 다음에 나오는 단락은 호르터Herman Gorter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Open Letter to Comrade Lenin」에서 『촌락 공산주의village communism』를 인용했다.

 

 

 

4) 문제의 암스테르담 대회는 서기국을 설립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5) 1860년대 말 독일 루르 지방의 첫 노동조합은 가톨릭 사제들의 작품이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비스마르크Bismarck는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 대한 공동전선을 위해서 가톨릭교와 그 정치대표인 젠트럼Zentrum (독일기독교민주동맹Christian Democrat Union의 전신) 에 대한 그의 운동을 중단했다.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84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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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보위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출발하기를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2/08 08:11
  • 수정일
    2014/12/08 08:1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조직보위와 정치적 계산을 넘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출발하기를
- 기호 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과 노동자연대에 고한다

 

 

 

1.

지난 11월 29일 대책위는 기호 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이하 선본)의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를 만났다.

 

대책위는 선본이 면담까지 요청한 이상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면담에 응했다. 그러나 선본 대표로 면담 자리에 나온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가 보인 태도에 우리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이영주 후보는 사건 자체에 대한 사실관계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물론 이는 후보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바쁜 후보에게 결정을 미룬 선본 자체의 문제일 것이다. 이영주 후보는 이 사건을 원칙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 해결을 위한 출발점은 삼자대면이라고 말하며 기존 선본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영주 후보는 원 사건은 성폭력이 분명하며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개념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이 왜 다함께 사건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바로 다함께의 입장이며 사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사건이 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인 이유는 피해자가 사건을 공론화했을 때부터 운영위원과 학생팀 간부 등 지도부를 포함한 수십 명의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집단으로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과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 유포, 협박, 욕설 등 온갖 2차 가해를 저질렀고 노동자연대에선 이에 대한 제재나 징계, 사과 등의 조치가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연대는 단체 회원의 성폭력 사실을 인정한 지금에 와서까지 사건 해결(성폭력 재발방지 조치 및 피해자에 대한 사과)을 위한 노력은커녕 자신들에 대한 명예훼손을 중단하라고 피해자와 대책위, 심지어 피해자의 전 대리인에 대한 공격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책위는 이미 선본에 이에 대한 증거를 넘겼으며, 면담자리에서도 판결문을 비롯하여 이영주 후보에게 새로운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면담 이후에도 이영주 후보는 “2차 가해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양측의 자료가 달라 현재로써는 판단이 어렵다”며 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였다.

 

 

2.

노동자연대는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 자기 조직인 이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개인들의 문제일 뿐이고, 여기에 대해 자신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명예훼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 운영위원회 명의로 11월 20일 온라인에 도배된 「성폭력 대책위는 노동자연대 비방을 중단해야 한다」라는 문서는 이렇게 말한다.

 

“노연 운위는 처음에 소송을 반대했지만(정아무 대리인의 2013년 2월 22일 노동당 당원 게시판 글을 보라), 일단 소송이 제기된 이상 노연 운위는 송사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기초로 단체의 공식 기구인 ‘규율과분쟁조정위원회’(이하 분쟁위)가 평결을 할 것을 기대했다.”


“이런 일이 좌절된 뒤, 정아무가 형사소송을 취하한 것을 의심스럽게 여긴 노동자연대 분쟁위는 자체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정아무를 성희롱 방조로 징계 처분했다.(그는 징계 받고 단체를 탈퇴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 대책위가 입수하여 이영주 후보에게 직접 제출한 노동자연대의 내부 문건을 보자. 이 자료는 2014년 3월 1~2일에 열렸다는 노동자연대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에 실린 공식 문서들이다. 이 당시에는 가해자 B도 여전히 노동자연대 회원이었고 재판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두 가지 문서 중 하나는 운영위원인 최미* 씨가 쓴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도 2차 가해를 자행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회원 최창* 씨가 쓴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운영위원인 최미* 씨는 새롭게 학생팀 담당자가 되면서 이 사건도 대응하게 되었다고 되어 있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를 두 번 고소했다. 첫 번째는 2012년 12월의 형사소송이었다. 이 소송은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거짓말탐지기 조사 끝에 피해자의 말이 진실로 판명되자 가해자 측이 스스로 취하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12일 가해자 측은 다시 피해자에게 2500만원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노동자연대의 처음에 소송에 반대했다는 주장과 달리 최미* 씨는 스스로 가해자 B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당당히 고백한다.

 

“B가 진정 억울함을 풀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면 본인이 적극 명예훼손 소송에 임하고 일부 단체나 운동 내 개인의 성폭력 혐의 씌우기에 대해서도 적극 대응하면서 진실 규명 작업을 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이어 최미*씨는 가해자 B의 형사소송 취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B에게 행위 주체로서 분명히 의식하며 행동하라고 논쟁한 또 다른 이유는 B가 여러 차례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B가 정말 본인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면 자신을 변호할 마지막 수단인 소송을 포기하는 것은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송 포기는 곧 자신이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B는 나중에 결국 형사소송을 스스로 포기했다. 물론 민사소송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나는 이유가 무엇이었건 스스로 소송을 포기하는 행위는 앞으로 B에게 흠결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B의 형사 소송포기는 우리 단체가 B에 대해 한층 더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최미*, 같은 글)”

 

최창* 씨가 처음으로 소송이 논의되는 상황에 대해 쓴 대목을 보면 더욱 정황이 잘 드러난다.

 

“사건 직후 정병*는 B, 이현*(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와 만난 자리에서 B에게 법적대응을 권하며 변호사 선임을 하라고 권하였고, 이현*와 B가 변호사 수임에 따른 비용부담을 누가 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모금을 하던지 해야죠’라며 마치 단체에서 일정부분이라도 어떤 형식으로든 지원해 줄 것처럼 대답했다. 이 말을 믿고 이현*는 B가 학생임을 감안하여 수임료 500만 원을 개인 대출까지 해가며 감당했으나 이후 단체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이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므로, 이후 몇 차례 정@@ 동지에게 모금계획이 있는지 등을 물어봤으나 나중에 확인해주겠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최창*, 「“페미니즘에 대한 엘리트주의를 경계한다-성폭력추문을 돌아보며”에 더하여」,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정병* 씨는 사건 당시 다함께 학생조직 담당자였으며 최미* 씨 이전에 이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이현* 씨는 최근까지 가해자 B의 대리인을 자칭하며 피해자와 대책위에 가장 악질적인 2차 가해를 퍼붓던 페북명 “Duckling Hyeon”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이 글에서 최창* 씨는 이현*를 파트너라고 지칭하며 양인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최창* 씨의 말이 따르면 두 사람은 다함께 학생조직 담당자인 정병* 씨가 다함께가 소송비까지 대줄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소송을 권했기에 B에게 개인대출로 소송비를 대주었다는 것이다.

 

공식 입장과 달리 노동자연대는 이렇게 소송 배후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노동자연대가 동원하고 있는 각종 논리들은 조직원들이 저지른 성폭력을 은폐하고 방어하는 조직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이 문서들은 (유사한 짓을 저지른 다른 모든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물론 이현*는 당시 비회원(후원회원)이었고, 최미* 동지 입장에서 회원도 아닌 사람을 지도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현*는 이서* 동지의 글에도 있듯이 본 사건에 있어서 다함께와 공조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봤고, 따라서 그 자신 회원이 아님에도 사건의 추이 등을 꼬박꼬박 보고하며 우리 단체의 지시에 따르고 동시에 협조를 얻고자 했다. 비록 정병* 동지가 다소 무책임하게 처리한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이현*의 노력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며 협력적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한 측면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최미* 동지로 바뀐 뒤에는 이러한 협력적인 태도와 토론 대신에 일방적인 지시만 있었고, 이 때문에 이현*는 다함께가 부당하게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최창*, 같은 글)”

 

가해자 B와 그 대리인이 다함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2차 가해행위들이 다함께와 밀접한 공조 속에 이뤄졌다는 사실은 최미* 씨의 글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이서*의 글에서 이미 나와 있듯이, 민사재판 변호사 선임, 그 비용마련, 증거 수집, 증언 확보, 정당성 주장, A 지지모임의 온·오프라인 상의 음해에 대한 대처, 심지어 우리 단체에 하는 보고조차 B가 직접 하는 게 거의 없었다. 위의 행위는 압도적으로 대리인인 이현* 씨를 통해 이뤄졌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노동자연대는 가해자 B를 자체 징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체 징계가 사실이라면 피해자에게 공지하고 사과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그러나 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에 아무런 통고가 없었으며 노동자연대 회원은 이후에도 재판과정에 가해자 측 증인으로 협조했다. 올해 2월에 작성되었다는 최미* 씨의 글을 보아도 가해자 B에 대해 공식조사는 이뤄진 바 없고 최미* 씨가 가해자를 불러다 몇 가지 물어봤을 뿐이다. 여기 징계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다. 비슷한 시기에 노동자연대를 탈퇴한 변혁재장전 블로그 운영자들의 말에 따르면 B는 스스로 탈퇴했으며 B가 탈퇴하자 그제야 노동자연대는 B에 대한 사후 징계를 내렸다고 한다.

 

우리는 다함께에 단지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진지한 사과를 하라는 것,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마련하라는 것을 요구해왔다. 피해자 개인이 주변의 다함께 회원들에게 요청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론화를 한 것이었으며, 백번 양보하여 다함께 지도부가 주장하는 대로 공론화 전까지 공식라인으로 올라오지 않아 몰랐더라도 사건이 공론화된 시점부터 사건을 진지하게 접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함께가 한 짓은 조직보위를 위한 집단적 2차 가해였고, 이에 대해 대책위가 꾸려지고 대화를 수차례 촉구했음에도 다함께는 그동안 계속 무시로 일관하다가 선거가 닥치니 다시 피해자와 대책위에 대한 공격과 사실 왜곡을 하기 시작했다.

 

 

3.

우리는 기호 2번 선본에 진상조사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이 사건에 대한 입장표명과 가해 단체에 대한 연대활동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 와서 진상조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기에는 선본은 한시적인 기구이고, 상황 자체의 맥락에 대해서 증거자료는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최소한의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도 없이 대책위와 노동자연대의 얘기가 너무 다르니 삼자대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선본의 이런 태도에 한껏 고무받은 노동자연대는 이제 개인들에 대한 공격까지 서슴없이 나서고 있다. 노동자연대의 이러한 반여성적 입장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선본과 선본 내부의 일부 단체들의 방관자적인 태도이다.

 

예컨대 최미* 씨는 위의 글에서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상의 무책임한 논의가 다 진실이라고 믿는 일부 무분별한 개인들을 제외하면, 지금 운동 진영 내 책임 있는 누구도 이 사건을 들먹이며 공식적으로 우리를 매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주의료원 투쟁, 전교조 투쟁, 철도 파업, 올해 3·8 여성의 날 기획단 등 조직 노동계급의 운동 속에서 별 장애 없이 활동하고 있다. (최미*, 같은 글)”

 

사건 초기 운동진영 전반이 보인 방관자적인 태도들이 다함께-노동자연대 사건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우리가 위에 인용한 문서들은 성폭력 사건의 은폐와 2차 가해의 배후에 노동자연대가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이 사건 관련해서 페이스북에서 한 동지는 항상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간 있었던 진실을 알리고 또 이에 대한 피해자가 원하는 적절한 대처가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요구되기만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정보들에 대해 하등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고서 난 모르는 상태로밖에 있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건 명백히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건 자체에 관심 가져주시길 바라며 사과 부탁드립니다.”

 

피해자와 대책위 성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4.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우리는 중재가 아닌, 그리고 이미 모든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대책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공감에 기초한 판단과 입장을 원한다.

 

노동자연대가 이미 공개적으로 낸 입장만 봐도, 그리고 최미* 씨가 쓴 글을 볼 때 더욱 확실하게 노동자연대는 “성폭력예방 교육을 넘어서 여성주의에 기초한 전 조합원 교육”이라는 공약에 반대하는 것이 명확하다. 노동자연대의 “여성운동 개입 담당자”라는 최미*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반성폭력 문제를 가지고 필요한 때 내부 교육을 추가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조차 그 내용은 민주노동당 시절 모든 당원이 의무적으로 받던 반성폭력 교육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폭력 개념의 무한 확장 등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개념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반성폭력 의무 교육이 오히려 성폭력에 대한 토론을 가로막는 역효과를 낸다는 점 대문에 이런 교육을 해왔던 일부 단체도 더는 하지 않는 실정이다. (최미*, 「한 성추문 사건에 대한 이서* 동지의 글을 읽고」, <2014 노동자연대다함께 대의원 협의회 자료집>)”

 

그런데 어떻게 같은 선본에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사건 자체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면 선본은 이 부분에 대한 입장, 과연 노동자연대와 마찬가지로 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 같은 개념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명확히 밝혀주기를 바란다. 이미 선거가 시작되었지만 가해단체가 포함된 삼자대면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가 확보되는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여 이후라도 사건처리에 대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또한 이 선본에 참여 하고 있는 노동, 정치 단체들은 선본과 별개로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신의 명의로 발표할 것을 요청한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 현재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대응들이 어쩔 수 없는 노동운동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계속 그렇게 용인하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 선본에서 내 걸고 있는 영혼 없는 여성 공약을 철회하길 바란다.

 

2014년 12월 5일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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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사건을 말하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1/28 11:07
  • 수정일
    2014/11/28 11:0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노동자연대. 대학문화 성폭력사건을 말하다

 


이번 대책위의 글은 재판과정에서 일어났던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와 다함께(현 노동자연대)의 조직적인 가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서 다루고자 한다.

 
 

알다시피 현재 사법기구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지 않고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증인을 더 많이 불러왔는가가 관건이 된다. 심지어 그것이 가해자의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채택된다. 가해자들이 마치 자신들이 승소하고 면죄부를 얻은 것인 양 판결문을 왜곡한 것은, 가해자들과 노동자연대가 조직보위를 위해 자신들끼리 조직적으로 짜 맞춘 증거와 주장이 판결문의 일부로 인용된 데서 비롯되었다.

 

2년여 동안 지속 되었던 가해자 A와 노동자연대의 2차가해와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은 가해자 자신들의 성폭력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화시도였으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물타기였다. 재판 과정 대부분은 본건과 개연성이 전혀 없는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으로 피해자를 몰아붙이는 2차가해 그 자체였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법정 2차가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성폭력 피해자를 오히려 성추행 가해자로 둔갑시키다.

 

피해자 동지의 전애인이었으며 당시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학생팀 간부였던 C는 가해자A를 옹호하기 위해 피해자 동지가 ‘평소 A를 짝사랑 하였으며,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몸까지 이용하려고 했다.’는 허위의 진술서를 썼다. 또한, 당시 차에 동승하였던 다함께 회원 E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목격 했다고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을 했다.

 

C는 사건 당시 피해자 동지가 문제제기를 하자 “볼셰비키는 케렌스키도 방어했다. 운동을 위해서라면 성폭력범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 학내 우파들로부터 공격 받을 테니 함구하라.”고 했고, 공론화 되자 ‘연애결별의 앙갚음’이란 글을 올린 사람이다. 이 글을 토대로 다함께 운영위원 F와 2차가해자들을 비롯한 다함께 및 그 회원들은 피해자 동지를 평소에 문제가 많았던 성격 이상자, 조직을 음해하는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2013년 2월, 자신들이 제기했던 형사고발이 불기소 처분되자 (이후 민사소송에 불리할 것 같아), 소를 취하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 새로이 급조되고 기획된 것이었다.

 

E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2011년 7월 고려대 다함께 맑시즘 행사에서 피해자 동지가 A에게 “니가 뭔데... 내 맘도 몰라주면서...” 라고 술병을 집어 던졌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맑시즘 행사에 같이 참여하고 있던 또 다른 증인은 술병을 집어던지는 일과 소란스러운 소리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진술서를 썼다. 그러자, E는 법정 증언에서는 교묘하게 말을 바꿔 그때 피해자가 집어 던진 것은 술병이 아니라 종이컵 이었다고 진술했다. 당연히 차안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성추행 같은 일은 없었다.

 

A, C, E는 조직보위라는 공동의 목적 하에 허위진술과 허위증언을 했다. 이 재판은 다함께 지도부가 직접 재판을 권유하고 개입하였다. 이 사실은 얼마 전 당시 다함께 운영위원 이었던 사람이 블로그에 올린 고백 글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조직보위’를 위해 학생조직 책임자등 2차가해자들이 사생활에 관한 악소문등을 유포하여 2차 가해를 주도했으며 재판에 조직적으로 개입했기에 우리는 노동자연대를 가해조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M.T사건의 실상

 

대학문화 가해자인 B는 평소에도 성적인 농담을 자주 했고 상대방의 동의없이 애인과 성관계를 하는 것을 찍어 편집원들에게 보여주기도 했으며, 성에 관한 책을 사서 피해자 동지에게 읽으라고 강권하기도 했다. 그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을 정당화시키는 레퍼토리는 이것이었다.

 

피해자 동지가 어느 날 우연히 아르바이트 모집공고를 보고(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면접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키스방 업주라는 사실을 알고 거절하고 나왔다는 얘기를 A와 B에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동지의 말에 착안하여, B는 처음에는 성매매를 말리기 위해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하더니, 이후에는 성적으로 자유롭게 건전한 대화가 오고가는 과정에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말을 번복했다.

 

법정에서는 교묘히 이를 합쳐서 성매매를 말리면서 성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과정에서 동영상을 틀었다고 증언했다. A와 B의 증언은 서로 짜 맞춘 듯이 모든 것이 일치했다. A와 B는 성매매를 말리면서 성적인 대화가 오가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피해자 동지의 동의하에 동영상을 보았다고 주장하였고, A는 동영상을 본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날의 사실은 이러했다. 가해자들은 섹스파트너, 원나이트, 성적 취향 등에 관해 피해자가 거부를 하는데도 일방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B는 피해자 동지에게 "자위해본 적 있느냐?", "여자도 자위할 수 있다. 내가 여자가 자위하는 거 보여주겠다"라며 일본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틀고 피해자 동지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데도 억지로 그 동영상을 보게 했다. A도 “아오, 성포비아. 너도 이런 것에 대해 좀 알아야 돼.” 라며 동영상 보기를 종용했다. 동영상을 보면서 B는 “흥분된다.” 는 등의 말을 했다.

 

또한, “임신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는 B의 질문에 A도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며 대답을 강요했다. B가 성교하는 시늉을 내며 “3, 2, 1 발사.” 라는 농담을 하자 A도 B와 같이 박장대소를 하며 크게 웃었다. A측의 변호사 또한 재판과정에서 법적 공방내용과 상관없이 피해자 동지가 성매매를 했느냐 안했느냐 이것만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성매매를 말리기 위해서 일본여성이 자위하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과연 납득할 수 있는 말인가? A는 피해자가 눈을 감고 거부하는 것을 보았다고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말했으면서도 자신은 동영상을 본 적이 없다며 법정에서 모순된 증언을 했다.

 

민사재판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제출한 증거의 대부분은 법정의 주된 내용과 상관없는, 피해자 동지를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가는 일이었다.

 

민사소송 초기의 조정과정에서 그들은 피해자 지지모임 페이지 폐쇄와 앞으로 이 사건에 관해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으면 소를 취하하겠다고 했다. 이 말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재판 자체가 본 사건과는 사실상 하등에 관계없었고 진실폭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재판이었다.

 

 

피해자의 호소를 무시하고 2차 가해로 일관해 온 노동자연대

 

노동자연대는 판결 이후 더 이상 버틸 수 없자 이제 적극적으로 사실관계 날조에 나서고 있다. 애초부터 가해조직으로 단정되어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피해자 동지는 사건의 공론화를 결심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묵살 당했으며, 사건이 공론화 된 이후에도 피해자 동지와 지지모임은 그들을 가해조직이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진상조사와 사건해결을 촉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집단적인 2차 가해와 소송이었다.

 

우리는 지금껏 계속 노동자연대 측에 SNS상에서 2차 가해를 중지해 줄 것과 소를 취하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2012년12월 2일, 2012년 12월26일, 2013년 1월23일 세 차례에 걸쳐서 피해자 지지모임은 다함께 측(노동자연대 다함께, 노동자연대학생그룹)에 피해자동지의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라 SNS상의 상호비방 중지와 공동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제안과 책임자와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변은 늘 같았다. ‘본 단체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 법정 소송이 진행 중이니 당사자끼리 해결하라, 본 단체에 대한 명예훼손행위를 중단하라.’ 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지모임은 노동자연대에 공문을 보낼 때 어떠한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후 지지모임의 계속되는 공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단 한 차례도 소통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거짓말과 2차 가해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대화를 하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많은 강을 건너왔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행위, 가해자들 및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진정성 있는 공개사과와 반성과 반성폭력 내규의 지정 없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단호히 거부한다.

 

악조건 속에서도 피해자 동지는 용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대책위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왔다. 더 이상 제 2, 제 3의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고 이러한 자들과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운동의 중심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이 피해자 동지와 대책위의 일관된 생각이다.

 

노동자연대는 사실 날조 뿐 아니라, 이미 상식이 되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같은 개념까지 호도하고 있다. 그들이 비난해 마지않는 성폭력 개념의 확대, 2차 가해, 피해자중심주의와 같은 개념들은 그동안 피해자를 보호하고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은폐된 성적・인격적인 침해들을 폭로하는데 큰 기여를 해 왔다. 십 년 전만 해도 성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많은 사례들이 지금은 운동사회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성폭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이 사건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음란동영상을 보게 한 명백한 성폭력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건을 성희롱, 성추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노동자연대의 인식은 그 조직이 갖고 있는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성폭력 교육에 이른바 ‘분리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딱지를 붙여 거부해온 노동자연대의 태도가 바로 이번 사건과 같은 비극을 낳은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연대의 이러한 입장과 태도야말로 무엇이 문제의 원인인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맺으며

 

한국이라는 사회는 아직도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사회이며 도처에 성폭력이 만연되어 있다. 한국의 현실은 영화 ‘도가니’,‘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여군대위 자살사건’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합리화 시킨다. 반면에 성폭력 피해자는 억울하여 죽고 싶다는 충동을 수도 없이 느끼고 실제로 자살을 선택한 경우도 많았다.

 

겨우겨우 용기 내어 사실을 폭로해도 그 중의 일부밖에 얘기하지 못한다. 사실을 얘기해도 그것이 (그들에게!) 진실로 확인되기 전까지 피해자는 가해자조직의 보위나 가해자의 명예를 위해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몰리거나 2차가해.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갖은 가혹한 수모를 겪는다.

 

노동자연대가 “피해자절대주의”라고 폄하하고 있는 피해자중심주의와 2차 가해 같은 개념은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등장한 개념이다. 그리고 왜 피해자중심주의, 2차 가해 같은 개념이 필요한지는 피해자의 호소를 애초부터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2차 가해를 일삼았던 노동자연대 자신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피해자 동지는 노동자연대의 2차가해가 시작된 다음부터 식음을 전폐하며, 극도로 건강이 악화 되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수도 없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 수십 번이다. 이것은 그들이 재판에서 주장했던 대로 경미한 것으로 치부할 일이 결코 아니다.

 

반성폭력운동의 관점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진실만을 주장했다. 가해자 A의 대리인이라는 D가 있지도 않은 사실 - 어느 날인가 카페에서 (우리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친구를 2차가해자로 지목하여 시비를 걸었다거나 재판방청 후 우리 측이 하지도 않은 욕설을 했다거나 - 을 거론하고 피해자 중심주의를 질타하며 피해자동지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오히려 D 자신이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물타기를 하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것과 - 우리의 관점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의 본질을 밝히고 정당한 문제제기를 통해 성폭력문제에 둔감한 운동 내부가 조금이라도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사건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가해자들과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모든 시도에 대해 부단히 맞서 투쟁할 것이다.

 

2014년 11월 27일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6&document_srl=178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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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와 기호2번 선본과 주고받은 공문을 공개하며 우리의 요청에 대한 선본의 빠른 답변을 촉구합니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4/11/24 23:08
  • 수정일
    2014/11/24 23:0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지난 11월 7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는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참가하고 있는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과 선본에 참여하고 있는 각 단체들에게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와 연대를 재고하고 성폭력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답변 시한으로 제시한 11월 17일 자정을 30분 정도 남겨 놓고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에서 노동자연대의 선본 배제를 결정할 수 없으며 노동자연대와 선본, 대책위가 참가하는 3자 대면을 통해 대화하자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대책위는 이런 조치가 사건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않으려는 편의적인 답변이며 이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의 구체적인 진술과 요구를 바탕으로 사건을 접수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건을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현재 ‘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은 이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는 또 다시 대책위 입장서에 대한 악의적인 반박문을 작성해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책위는 그동안 기호2번 선본과 주고받은 공문 세 건을 모두 공개하며 우리의 요청에 대한 선본의 빠른 답변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기호2번 선본에 참여하고 있는 제 활동가단체 역시 선본 차원의 입장과 별도로 이 사건에 대한 조직의 입장을 빠른 시일 내에 밝혀주시기를 덧붙여 요청 드립니다.

 

 

2014년 11월 21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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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폭력 사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여 재고에 관한 협조의 건

수신: 가칭) 직선제 승리, 민주노총혁신, 총파업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선거대책모임

일자: 2014년 11월 7일

 

 

 

1. 귀 직선제 승리, 민주노총혁신, 총파업투쟁을 위한 민주노총 선거대책모임(가)(이하 선거대책모임)의 발전과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 귀 선거대책모임에 저희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성폭력사건의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연대조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이미 인지하다시피 노동자연대는 지난 3년간 다함께(현 노동자 연대).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을 방임하다 못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소송을 건 성폭력사건 재판에 해당 조직(노동자연대) 중앙 등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면서 위증을 했습니다. 또한, 본 사건을 운동 사회 내 양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라 운동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집단적으로 2차 가해를 한 사실과 정황들이 계속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3. 직선제 승리·민주노총 혁신·총파업을 위한 전국 활동가 승리 결의대회 자료집(2014.11.1)에서 귀 선거대책모임이 발표하신 <혁신6>에는

 

 

- 여성의제의 부차화 극복. 여성사업 대폭강화. 여성위원회 위상 제고.

- 개점휴업상태로 전락한 성평등 위원회 활성화를 통한 조직문화 쇄신.

- 성폭력예방 교육을 넘어서 여성주의에 기초한 전 조합원 교육.

 

 

이라는 여성정책공약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동안 노동자연대 측에 2차 가해 중단과 사과, 가해자 징계 및 부르주아 사법기구를 통한 고소. 고발 철회, 가해자들의 성폭력 교육 이수, 성폭력 내규 제정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자연대 측은 이를 계속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연대세력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귀 선거대책모임이 발표하신 여성정책공약과도 모순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 저희 또한, 이 상황에 대해 귀 선거대책모임에 좀 더 빨리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후 저희는 무려 3년이나 계속되었던 노동자연대 측의 2차 가해와 성폭력사건 재판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사실에 대해서 계속 진실을 폭로할 예정입니다.

 

 

혹여라도 노동자연대의 성폭력 사건이 귀 선거대책모임의 행보에 누가 되지 않을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거듭 심사숙고하시어 성폭력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가 귀 선거대책모임에 참여하는 것에 관해 재고해주실 것을 아래와 같이 요청합니다.

 

 

<요청사항>

 

 

하나, 성폭력 사건 가해 단체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가에 대한 선거대책모임 차원의 공식논의와 입장표명

 

 

둘, 선거대책모임의 여성정책(공약)에 근거한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처리에 대한 이후 계획

 

 

5. 저희 요청에 관해 귀 선거대책모임 동지들의 많은 관심과 진정성 있는 논의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6. 답신은 위 대책위 메일로 11월 17일까지 보내 주시기 바라며, 다른 사정이 있으면 진행 상황을 통보해 주십시오.

 

 

7. 본 사건 관련자료는 다음의 다함께. 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해결을 위한 포험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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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2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선본의 "귀 대책위원회의 공문에 대한 답변"

일자 : 2014년 11월 17일

 

 

 

 

1. 귀 대책위원회의 본 선대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2. 귀 대책위의 요청에 대한 기호 2번 선대본의 논의 결과를 보내드립니다.

 

 

가. 귀 대책위가 요청하신 노동자연대의 선대본 참가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입니다. 우선 본 선거대책본부의 조건과 사정은 귀 대책위가 제기하신 사안에 대한 전반적 파악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에서 본 선거대책본부는 귀 대책위가 요청하신 노동자연대의 선대본 참가배제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귀 대책위의 양해를 요청드립니다.

 

 

나. 그럼에도 귀 대책위가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본 선거대책본부는 심사숙고 하였습니다. 이에 본 선거대책본부는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귀 대책모임과 노동자연대 그리고 본 선거대책본부의 이영주 사무총장 후보가 참여하는 3자 연석회의를 제안합니다.


이 연석회의를 통하여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였으면 합니다.

 

 

다. 귀 대책위원회가 위 나 항을 수용한다면 3자 연석회의에 참석할 귀 대책위의 대표 또는 대리인을 선임하여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그 대표 또는 대리인과 곧바로 3자 연석회의의 개최 일정과 의제에 대하여 협의하였으면 합니다. 귀 대책위원회의 적극적인 검토를 기대합니다.

 

 

기호 2번 한상균, 최종진, 이영주 선거대책본부 드림
연락담당: 사무총장 후보 이영주 (전화: 010-820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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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위의 "귀 선대본의 11월 17일자 답변에 대한 대책위의 입장"
일자: 2014년 11월 19일

 

 


1. 먼저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 선거로 바쁘신 와중에도 본 대책위의 11월 7일 자 공문(성폭력 사건 가해조직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여 재고에 관한 협조의 건)에 대한 답변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2. 귀 선대본의 답변에 대한 우리 대책위의 입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하나, ‘성폭력 사건 가해 단체인 노동자연대의 선거대책모임 참가에 대한 입장표명’ 요청에 대해 귀 선대본에서는 ‘선대본의 조건과 사정이 대책위에서 제기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전반적 파악이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이라는 답변을 해오셨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대책위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데 있어 ‘피해자 권리’를 고려하지 않은 귀 선대본의 태도에 강력한 유감을 표합니다.

 

 

앞선 11월 7일 자 공문에서 밝혔듯이 우리 대책위에서는 이 사건을 ‘운동 사회 내 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라 운동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 피해자의 권리를 확보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하려 노력하는 것은 운동적 해결의 기본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해자(가해 단체)의 경우 공식적인 활동과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 피해자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귀 선대본에서는 ‘물리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회피했을 뿐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대책위는 귀 선대본이 무엇보다 먼저 본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대책위의 구체적인 진술과 요구를 바탕으로 사건을 접수하고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사건을 처리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또한,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당하지 않도록 가해 단체의 귀 선대본 활동을 즉각 중단시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둘, 귀 선대본이 제안한 가해 단체가 포함된 ‘3자 연석회의’는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 하는데 있어 매우 부적절합니다. 장기간 진전이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가해 단체가 피해자와 대책위의 정당한 주장과 요구를 무시해왔을 뿐 아니라 2차 가해를 저질러 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근거로 ‘노동자연대(구 다함께)’를 가해 단체로 규정했고, 귀 선대본에 운동 사회 내 성평등, 반성폭력 규약 일반 원칙에 따른 가해 단체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던 것이지, 가해 단체와 피해자 측이 동등한 자격으로 테이블에 앉아 귀 선대본의 중재를 받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가해 단체가 포함된 3자 연석회의는 사건을 당사자 간의 문제로 협소화시키고 가해 단체에게 처음부터 면죄부를 주는 제안이라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대책위에서는 귀 선대본의 결정사항에 큰 실망을 느끼며, 운동적 해결을 위한 재논의와 진정성 있는 답변을 다시 요청합니다.

 

 

지금이라도 귀 선대본에서 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운동적 해결을 원하신다면, 원칙에 따라 사건을 접수하시고, 사건 해결을 위한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여 정당한 처리절차를 밟아주시기 바랍니다. 귀 선대본에서 가해 단체를 배제하고 정당한 처리절차를 진행하신다면, 대책위는 귀 선대본과 직접 만나는 것을 포함하여 귀측에서 요청하는 모든 과정에 적극 참여, 협조할 것이며, 결과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책임지겠습니다.

 

 

2014년 11월 19일


노동자연대·대학문화성폭력사건대책위원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6&document_srl=178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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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좌파 이론 연재 1] 제1부 공산주의좌파 역사 (1) 독일 공산주의좌파 역사

<출처>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178693

 

[공산주의좌파 이론 연재 1]

 


제1부 공산주의좌파 역사

 


(1) 독일 공산주의좌파 역사

 


혁명의 해 : 판네쿡과 유럽 공산주의의 형성, 1917-1919 1)

 

 
맑스주의를 위한 투쟁 : 판네쿡과 러시아 혁명

 

 
1917~1919년 사이 판네쿡의 활동은 극적인 세계적 사건의 배경과 대비해야 한다. 1914년 전 유럽에서의 혁명은 결단한 소수집단의 헌신적인 교리와 꿈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까지 혁명적 분위기는 전 유럽을 휩쓸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1918년 독일 혁명은 판네쿡이 그의 생애의 과거 20년을 헌신했던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다른 대부분의 혁명적 좌파와 같이 판네쿡은 볼셰비즘과 러시아 혁명의 열광적 지지자였다. 1917년 2월 혁명의 시작으로부터 판네쿡은 혁명과정의 뉴스를 따라 추적하고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위한 그 의미를 분석했다. 차르가 무너지고 며칠 후 판네쿡은 2월 혁명이 “계급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온 최초의 위대한 민중운동”이라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의 주요관심은 초기 시기에도 혁명의 중요한 역할을 한 프롤레타리아 평의회 체계, 즉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년 이전에 판네쿡과 혁명적 좌파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실현하는 기구형식을 모호하고 일반화된 용어로 설명했었다. 트로츠키도 1905년 혁명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토론했지만,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판네쿡은 2월 혁명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혁명발전을 위한 새로운 평의회기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의회는 공격적 혁명과정의 전술적 도구일 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맹아라고 보았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기간 판네쿡은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전적인 연대를 표시했다. 미래 혁명의 경로에 대한 예후에서 판네쿡은 종전의 입장을 뒤집고 러시아가 “유사-맑스주의 교조주의의 형태로 사회주의를 위하여 무르익지 않았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난했다. 룩셈부르크 같은 볼셰비즘에 대해 다른 비판자와 달리,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당 조직에 대한 레닌의 실제적 견해에 동조하였다. 볼셰비키에 대한 판네쿡의 확신은 그들이 혁명적 계급투쟁을 수행함에 비타협적 헌신을 하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힘은 조직구조에 있지 않고, 공격적 전투력과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라고 계속해서 강조했다. 굶주림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강력한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끌어올린 그들의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위한 “성숙”은 “투쟁과 권력을 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숙”에 의해 상당 정도 결정된다는 것을 볼셰비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보았다
 
판네쿡에게 볼셰비키의 투쟁은 유럽 전역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본질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판네쿡의 관심은 세계혁명이라는 더 넓은 과정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트 재조직화의 모델을 나타내는 것에 주로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시기에도 판네쿡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서구에서 투쟁하는 조건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에서의 핵심요인이 차르에 대한 부르주아의 반대와 농민의 불만이었다면, 독일과 기타 서유럽의 경우는 혁명이 완전한 프롤레타리아 성격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민주의로부터 정신적으로 스스로 해방되고, 의회와 노조투쟁의 기나긴 유산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 브레멘 좌파와 독일 혁명

 

 
1917년은 전쟁의 피로가 최고조에 오르자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도 격정의 해였다. 민중적 불만이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고조된 독일만큼 위기에 처한 나라는 없었다. 브레멘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발발이 혁명적 좌파의 상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혁명이 나자, 브레멘 경찰은 보고서에서 “행동파 혁명적 좌파 소집단은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과 잠재적 혁명의 위험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혁명 영향의 가장 최초의 직접적인 표현은 1917년 3월 31일 나타났는데, 수천 명의 브레멘 부두 조선 노동자가 러시아 혁명과의 연대와 전쟁 지속에 항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손을 놓고 시 중앙으로 행진한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1917년 봄 동안 미래에 채택할 조직형식에 관한 브레멘 좌파들 내부의 토론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 SPD(독일사민당)로부터 좌파의 축출은 이 문제를 더 시급하게 만들었다. 판네쿡의 관점에서 브레멘 좌파의 당과 노조 조직의 옛 형식은 새롭고 직접적인 계급도구가 기대되는 혁명적 투쟁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들이 그린 새로운 조직 형식의 모델은 미국의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2)에 대부분 영감을 얻었다.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와 친숙하게 된 것은 첫째, 전쟁 전까지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를 편집한 함부르크 혁명적 좌파 지도자가 Fritz Wolffheim(후리츠 울프하임) 이었고, 두 번째는 함부르크 항에 독일어판 문헌을 배포한 미국 IWW(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선원의 활동 때문이었다.

 

 
1917년 3월 Wolffheim(울프하임)은 당과 노조의 기능을 통합하는 새로운 “단일 조직”의 설립을 「Arbeiterpolitik」에 제청했다. 자본주의의 집중화되고 카르텔화되는 경향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방법은 자발적인 공장수준의 조직적 그물망 주위에 구조화된 지역적인 계급 운동밖에 없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견해는 그와 토론하기 위해 함부르크로 여행 온 Knief3)에 의해 즉각 채택되었다.

 

 
새로운 조직구조에 대한 브레멘 좌파의 추구는 1917년 4월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자발적 파업과 일치했고 그로부터 더욱 강화되었다. 파업은 생활조건의 악화에 대한 반응이었지만 혁명적 기질은 여러 곳에서 보이게 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파업을 조정하기 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구성됐는데 이는 독일에서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평의회였다. 파업투쟁은 주로 현장 활동가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점차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참여로 나아갔다. 노조지도부의 파업에 대한 간섭을 막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개별공장과 산업지역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들의 조정망을 형성하여 옛 노조지도부를 대체하였다. 옛날 지도자 대신 노동자들은 노동자위원회에서 현장대표를 선출했다. 이러한 위원회로부터 그다음 해 독일 전역에 걸쳐 일어난 노동자평의회의 맹아적 구조가 생겨났다.


브레멘에서는 이러한 운동의 정치적 성격이 주로 좌파에 의해 결정되었다. 10여 년 넘는 정치투쟁기간 동안 좌파는 1917~1919년의 투쟁에서 중추적 임무를 수행한 대규모 산업공장에서의 현장 전투파 조직을 발전시켰다.

 

 
4월 파업으로 고무받고 ‘단일’ 조직형식의 기초를 희망하면서, 브레멘 좌파는 1917년 6월, 7월 또 다른 파업과 시위를 일으키는 데 역할을 하였다. 좌파에 대한 정부의 물리력이 동원되자 Knief는 체포를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판네쿡과 협력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베를린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새로운 혁명적 좌파 조직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7월까지 새로운 조직 결성을 제안하기 위하여 전 독일의 수많은 좌파집단으로부터 실행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러한 소집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대한 판네쿡과 브레멘 좌파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는데, “새로운 지도자당”이 아니고 “정치적 삶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가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건설의 필요성이었다.

 

 
이러한 소집요구에 1917년 8월 26일 13명의 대표가 비밀리에 베를린에 모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창립대회를 한다. 여기서 “국제”라는 말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발전될 제3인터”와 현존하는 찌머발트 좌파의 회원임을 밝히는 의미였다. 내부구조로 보면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단일조직”이며 자발적인 지방공장, 지역 및 업종의 분권화된 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혁명투쟁에 대한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믿음은 두 번째 자주적 파업이 1918년 1월에 일어나자 더욱 강화되었다. 이 사건은 1월 28일 베를린에서 40만 명의 금속노동자가 거리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즉각 공장 대표가 선출되고 400명의 노동자평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는 요구가 ‘평화협상에서의 노동자 참여’였다. 며칠 사이에 파업은 백만이 넘는 노동자를 포괄했으며 그 시기까지 독일에서의 민중적 불만이 표현된 것 중 가장 큰 것이었다. 브레멘에서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수천 조선노동자의 파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파업은 부두에서 2주간의 군대점거로 진압되었다.

 

 
이러한 파업은 분명히 독일노동계급 사이에 급진적 반전경향이 자리 잡고 전쟁 전 정치적 통일의 분위기는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노동계급 행동의 심각한 반발 없이 8개월이 지나갔지만, 경제조건과 군사상황은 꾸준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9월 초와 10월 초의 주요 패배를 뒤이은 군사상황의 악화는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국가의 분위기는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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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1918년 11월 4일 Kiel(키일)에서의 해군반란으로 시작되었고 독일 전역으로 눈사태처럼 번져 나갔다. 이 사건의 초기 과정은 판네쿡과 독일 좌파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혁명의 형식은 거의 그들의 예측과 같았다. 주로 자발적 성격을 띤 대중행동과 대중파업이었고, 기구 형식도 노동자평의회와 병사평의회였다. 11월 초 며칠 동안 1만 개 넘는 평의회가 모든 작업장과 부대에서 선출되었고 권력은 잠정적으로 그들 손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서의 평의회(소비에트)가 조직 형식으로 평의회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난 2년 동안 독일노동자의 경험보다는 덜 중요한 것이었다. 평의회와 정부에서의 주요세력이 된 SPD(독일사민당) 역할 때문에, 옛 국가의 몰락과 노동자평의회 체제의 발전 모두 러시아보다 독일에서는 덜 급진적 과정이었다.

 

 
브레멘에서는 혁명이 수천 명 부두 및 조선노동자들의 파업으로 1918년 11월 4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Kiel(키일)의 혁명적 선원들은 지역 군대의 무장해제를 도착한 이틀 후 완수하였다. 같은 날 도시 노동자평의회를 위한 선거가 부두와 공장에서 있었다. 평의회는 180명 노동자와 병사로 구성되었는데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회원이었다.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지부장인 Henke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평의회의 첫 번째 행동은 기존 시를 해산하고 시청에 붉은 기를 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가 주요 세력이 된 공장과 부두에 지역 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 자체에는 제한된 역할만 수행했지만, 당은 결정적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의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와 공장 전투파 사이의 통제를 통하여,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혁명적 주도권을 장악할 위치에 있었다. 혁명 초기 동안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전략적 입장을 요약하는 두 가지 주요 표어를 채택했다. “모든 권력을 평의회로!”, “부르주아지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가 그것이다. 이 주제는 판네쿡에 의한 이론적 초점이 되었다.

 

 
독일 혁명의 직접적 참여자는 아니지만, 판네쿡은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전략적 관점을 정교화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1월, 12월의 중요한 시기 동안 판네쿡의 상황에 대한 이론적 분석은 Arbeiter Politik에 정기적으로 실렸으며 사실 Knief를 포함한 다른 기고자들보다 더 많았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판네쿡의 평가는 11월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권력의 옛 기구가 그대로 온존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목적을 수행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 그 임무의 조그만 부분만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판네쿡은 스스로 자랑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은 전체로서의 계급을 일으키는 평의회 틀 내에서 행동하는 노동계급의 적극적 소수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판네쿡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기구가 아니라는 근거로 평의회에 비판 없이 의존하는 것을 경계했다. 주요임무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면적 서곡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명확화와 의식의 도구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적 행동계획의 추적을 시도하면서 판네쿡은 전쟁기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진정한 형식을 건설하는 첫 번째 단계로 전쟁 전 사회주의운동의 정치와 완전한 단절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보기에 SPD(독일사민당)는 전쟁기간에 더욱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의 적”이 되었다. SPD(독일사민당)에 대해서는 덜 적대적이었지만, 판네쿡은 그것도 사회주의 변혁의 도구로서 거부했다. 판네쿡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열망 속에 있는 국가사회주의 유형은 “노예의 가장 최악의 형태”를 표현한다고 경고했다.

 

 
혁명을 급진화하려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의 시도는 혁명 때문에 자유로운 몸이 된 후 11월 18일 브레멘으로 돌아온(뮤니히에서 1월 활동 때문에 체포된) Knief에 의해 고무되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 예기치 않게 극적으로 나타난 그는 브레멘 좌파의 공격적 전투성을 사로잡는 말로 시작했다. “이 순간 중요한 문제는 권력의 전복이다.” 그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가 혁명적 기관이 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 주도의 시위 파업과 함께 11월 27일 시작되었다. 이틀 후 Knief는 중앙 노동자평의회 모임에서 일련의 요구를 제시하는 2만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다. 그 요구는 ①평의회 체제에 기반을 둔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확립 ②모든 비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제거 (사회애국주의를 포함한) ③노동자의 즉각적 무장과 부르주아지의 무장해제 ④Bürgerzeitung의 통제를 중앙 평의회로의 이전이었다.

 

 
공격적 혁명에 대한 헌신과 함께 ISD(독일국제사회주의자)는 그 이름을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로 11월 23일 바꿨다. 이론사업에 Arbeiter Politik을 보완하기 위하여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폭넓은 전국, 지역 배포망을 갖게 된 그리고 독일 전역에 걸쳐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견해를 전파할 수 있는 일간 선동지 Der Kommunist(코뮤니스트)를 창간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혁명 후 처음 몇 주는 브레멘에서 급진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중앙 노동자평의회도 독일의 다른 시 정부가 당면한 문제에 부딪혔고 혼란스런 정치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시간 벌기에 급급했다. 옛 시 행정구조는 중앙 노동자평의회의 감독하에 기능하기 시작했다. 관리들은 병사평의회로부터 축출됐지만, 군대의 저항은 적군의 구성을 방해했다. 평의회는 일상 업무에 능동적이고 목적의식적이었지만 혁명 초기 몇 주간 독일 곳곳에서 일어난 평의회와 달리 행동보다는 분위기에 의존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브레멘 노동계급을 동원하는데 추동력을 강화함으로써 11월의 질서정연한 혁명과정을 12월에는 평의회 역할의 보다 급진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12월 12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는 하루 후에 풀어주려고 부르주아 인질을 체포했다. 12월 21일 평의회는 Bürgerzeitung을 접수하고 그를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넘겼다. 12월 24일 평의회는 국회의원 선거를 지지하지 않고 평의회체제 지지를 재확인했다. 5일 후에는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성원에게 무기를 지급했다. 힘겨루기의 첫 번째 시험은 이틀 후 75보병연대가 브레멘에 돌아올 때였다. Freikorps(자유군단)4)가 형성된다는 두려움으로 무장 노동자와 혁명군은 보병연대를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브레멘에서 일어났지만, 독일 혁명은 점차 두 적대 진영으로 양극화되었다. 상반되는 표어, 즉 의회냐 평의회체계인가라는 상징 표현의 이러한 갈등은 독일 혁명에 대한 근본적 해석의 차이에 기반을 둔 투쟁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직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SPD(독일사민당) 주도의 임시정부는 옛 정권의 기구와 동맹을 맺고 평의회 권력을 침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으며 혁명을 좌파에게 몰아가길 바랐던 세력을 분산시켰다. 이러한 세력의 연합은 노동조합주의를 정당화하고 평의회를 격하시키는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Stinnes-Legien 협약5)(11월 15일)으로 제도화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독일 관료들의 권위를 보장한 Ebert-Groener 협정6)(11월 10일)이었다. 혁명의 미래 진로는 임시정부가 국가의 최종 정치형태를 결정하기 위하여 제헌의회에 개입할 준비를 했을 때 명확해졌다. 이것이 정부의 구조를 비프롤레타리아 사회계급의 수중에 들어가게 한다는 걸 깨달은 좌파는 평의회체제에만 기반을 둔 정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2월 16일 노동자 및 병사평의회의 전국대회까지, 평의회 권력이 이름뿐 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25만 노동자와 병사가 평의회체제를 찬성하면서 베를린 거리에서 시위했지만, 대회를 주도한 SPD(독일사민당)는 그 결과가 예견된 결론임을 확신했다. 12월 19일 중요한 투표가 있었을 때, 대표들은 평의회 권력은 과도기적이고 따라서 미래 의회에 넘길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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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혼란스런 처음 몇 주간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7) 사이의 단결 부족은 좌파를 무겁게 짓눌렀고 혁명으로 나아가는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 시기 동안 판네쿡은 특히 좌파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통을 겪었다. 사건의 속도가 순간순간 달라지고 반혁명적 경향이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2월 5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어떠한 행동을 하여도 그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6일 스파르타쿠스그룹이 좌파를 통일시키는 의식적 단계로 간주한 룩셈부르크의 제안을 발간했다. 이 시기 동안 칼 라덱은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중재하는 시도를 하기 위해 볼셰비키의 파견자로 모스크바로부터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공식적 통합과정은 새로운 공산당의 창립대회를 여는 12월 24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의 전국대회에 스파르타쿠스그룹이 개입하는 제안이었다. 통합의 마지막 걸림돌은 스파르타쿠스 그룹이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로부터 철수할 의사를 천명하는 12월 29일에 제거되었다.

 

 
공식적으로 KPD(독일공산당)의 창립대회는 12월 3일부터 1919년 1월 1일 사이에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벌어진 토론을 보면 독일 공산주의의 두 흐름 사이의 전망에 대한 근본적 차이가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주요 분화지점은 새로운 조직의 성격이었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은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요구하지만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새로운 당이 모든 공산주의 지향 집단의 느슨한 연맹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판네쿡의 관점에 따라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당 조직의 진정한 기반이 “내부 목적 통일과 결합한 개별집단의 외적 독립”이라는 공식으로 요약된 “정신적 통일” 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또한 지방조직은 당과 노조기능을 결합한 “단일조직”이라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공산주의자가 기존 노조연맹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노동자평의회 틀 내에서 생동하는 “단일조직”에 의해 노조기능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다수의 유능한 스파르타쿠스 지역 지도자의 지지를 받았다. 심각한 논쟁을 피하고자 룩셈부르크는 이 문제와 관련 문제를 특별위원회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는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 지도부를 대신하여 Paul Levi가 선동의 가능성을 근거로 참여를 정당화했다. 오토 륄레(Otto Ruhle)는 의회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진정한 임무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때 룩셈부르크나 리프크네히트 모두 성원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참여 반대 안이 65대 23이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통과되었다.

 

 
KPD(독일공산당)의 힘의 첫 번째 검증은 창설된 지 며칠 만에 왔다. 프러시아 정부가 경찰청장 자리에서 스파르타쿠스그룹에 동정적인 Emil Eichorn의 직위해제를 시도한 1919년 1월 4일 발생한 스파르타쿠스 봉기였다. 이에 대응하여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는 1월 5일 대중시위를 조직했는데 예기치 않게 70만 명이 참여했고 일련의 건물점거가 이어졌다. KPD(독일공산당)는 미성숙한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대규모 동원과 전투적 분위기에 지배당해 권력투쟁을 조정하는 혁명위원회 조직을 도왔다. 거리 투쟁에서는 집회에 참여한 소수만이 전투에 참가했고 일주일 시기에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되어 봉기는 분쇄되었다. 마지막 타격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잔인하게 살해된 1월 15일에 있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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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멘에서는 평의회공화국이 3주간 권력을 장악하는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베를린 사건이 2차 혁명의 시작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비극적 오해의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장악 배후에는 평의회와 공공모임에서 평의회 권력의 형식을 선언할 필요에 대하여 좌파에 의한 수 주간의 토론이 있었다. 맹장 수술에 이은 합병증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Knief가 권력 장악에 반대하는 충고를 했지만 처음 결정된 전기는 되돌릴 수는 없었다. 치밀하게 계획되지 못한 행동은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노조사무실 점거로 나아간, 단일 조직에 의한 노조 대체를 요구하는 KPD(독일공산당)가 조직한 시위였다. 이러한 행동은 브레멘 사회주의공화국을 극적으로 선포한 시청 앞에서 무장시위로 확대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는 이제 과거의 역사임을 선언한다. 이 시간부터 평의회가 지배한다.” 새로운 평의회공화국을 이끌기 위해 Henke를 의장으로 하는 KPD(독일공산당),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 그리고 병사평의회 대표로 구성된 인민위원회 평의회가 창설되었다. 그들의 행동이 사회주의혁명의 모델이라고 믿으면서, 평의회는 독일의 다른 지역에 혁명 활동을 조정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평의회공화국의 존재는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처음 3주간은 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시위와 사회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가 있었지만, 지역 조건은 사회경제적 개혁조치를 취하게 했고 새로운 정부구조는 대체로 문서 상의 체제에 불과했다. 첫 번째 대결은 1월 14일 SPD(독일사민당)의 강권으로 일부 군부대가 군 무장해제 시도에 항의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그들은 도시 주요지점을 장악하고 노동자들도 무장해제 시키려고 Weser 부두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 거리투쟁 이후 무기를 소지하는 타협안에 군인들이 동의하게 된다. 공화국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안전했지만 어려움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KPD(독일공산당)가 총파업을 벌였을 때 지방금융기관에 의한 신용보이콧이었다. 며칠 동안 간헐적 거리투쟁이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공화국은 만족할만한 출구를 찾기 위하여 선거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1월 25일 SPD(독일사민당)의 내무장관인 Noske(노스케)는 중앙정부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브레멘 봉기를 무력으로 분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틀 후 그는 Freikorps(자유군단) 연대에게 브레멘으로 행진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도시 탈환의 전투는 2월 3일 시작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그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마지막 타격은 좌파의 주요 거점인 Weser 부두가 2월 5일 점령됨으로써 끝났다. 유혈의 패배 이후 평의회는 해산되고 새로운 SPD(독일사민당) 지배의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패배와 사기 저하에도 불구하고 KPD(독일공산당)와 브레멘 노동계급은 4월 2주간의 총파업을 포함한 저항을 1919년 동안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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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좌파의 명백한 패배는 제2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판네쿡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했다. 1919년 1월 2일 비극적 사건을 놓고 판네쿡은 좌파의 패배가 혁명투쟁의 전 시기에서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판네쿡이 결단코 반대했던 1월 공격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11월 혁명에 의해 형성된 권력 지위를 위한 투쟁이라고 보았다. 판네쿡은 혁명이 새로운 권력지위의 정복으로 나가거나 11월 정복한 지위의 체면상실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판네쿡은 독일 부르주아지가 상당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힘의 전면적 검증을 하는 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판네쿡에게 중요한 것은 독일 노동계급 준비의 실재 상태였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는 투쟁할 준비와 기꺼움이 있지만, 위로부터의 요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옛 사민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그룹이 독립파에서 분리할 때 노동자들은 상황을 더 잘 이해했지만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사회애국주의자와 같이 동일한 전제에 근거한 통찰력과 이해”를 독립파가 가졌다는 사실에 의해, 혁명적 실천과 관련이 없는 “혁명적 애국주의”의 죄를 지었다고 비난했다. 판네쿡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악의 걸림돌”이 된 전쟁 전 그들의 교리였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판네쿡이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한 것은 왜 노동자가 옛 교리와 조직에 집착하고 새로운 사상으로 그들을 실천적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정확히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 가였다.

 

 
판네쿡의 실용주의적 생각은 프롤레타리아가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전술로만 공격성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판네쿡이 계속 강조한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평의회의 의식고양 능력을 통하여 모든 형태의 군사력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판네쿡은 당이 조정과 선전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보았지만, 미래의 전략과 행동에 대한 중요한 토론은 평의회 안에서 일어나야 하고 노동자는 혁명적 변혁에 필요한 “실천적 통찰력의 통일”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평의회의 새로운 요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위한 판네쿡의 공식은 본질에서 변하지 않았다. “독일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은 공산주의 사상의 성장, 권력획득의 의지, 그리고 혁명을 위한 준비의 성장이다.”

 

 
목적에서 패배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로 강화된 독일 좌파는 새로운 상황에서 그들의 입장을 새롭게 정립할 정치적 과제에 직면했다. KPD(독일공산당)와 브레멘 좌파에게 1919년은 무엇보다 자기규정의 해였다. 1월 공격이 노동계급을 급진화 시키고 사회혁명을 이룩하는데 무능력을 드러냈지만, 그들의 패배는 독일에서 시민의 투쟁을 종식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의 나머지는 위기일발의 분위기를 창출하는 기대상황과 생활조건의 악화에 의한 일반적인 불안과 산발적인 봉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뮈니히에서는 새로운 평의회 공화국이 선언되고 4월 3주간 권력을 장악했다.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군대가 함브르그, 라이프치히, 할레, 브룬스비크와 루르에 파견되었다. 베를린에서는 선원이 이끄는 총파업이 있었지만, 대량 처형으로 진압되었다. 1919년 동안 거의 5천 번의 파업이 독일 안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발전은 판네쿡이 주요 참여자였던 독일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전술논쟁의 시급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월, 2월 사건의 공동참여에도 불구하고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와 스파르타쿠스그룹 사이의 융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KPD(독일공산당) 창당대회에서 두 집단을 갈라놓은 차이는 베를린에서의 KPD(독일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6월)에서 다시 나타났다. 갈등의 첫 번째 그림자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사망 이후 KPD(독일공산당)의 지도자로 내정된 Paul Levi가 브레멘과 함브르그 조직의 규율부족을 공격할 때 드리워졌다. KPD(독일공산당)의 패배에 좌파가 책임이 있고 당의 첫 번째 과업은 중앙집권화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Levi는 보았다. 동시에 Levi는 KPD(독일공산당)가 고립을 벗어나는 길은 좌파를 버리고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의 80만 성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혁명의 사회주의 단계로의 이행은 제2인터의 정치와 완전히 절연하고 노동계급 조직의 새로운 형식에 근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판네쿡의 입장을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었다. 1919년 여름, 가을 동안 혁명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브레멘과 함브르그의 내부 당을 지배했다. 이 토론을 통하여 옛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는 당이 “단일조직”과 평의회체제를 선전하는데 헌신하는 분권화된 협의체가 되어야 함을 더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평의회체제가 확립되면 당은 스스로 해소할 책임이 있다는 가정과 직접 연결되었다. 이러한 주제는 Levi 와 그들의 차이를 개관한 판네쿡의 계획에 요약되었고 1919년 8월 KPD(독일공산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열띤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 당 대회 이후 레비는 좌익반대파에 대해 전면적 공격을 시작했다. 브레멘, 함브르그, 베를린에 강력한 거점이 있을 뿐 아니라 KPD(독일공산당) 지역 지부에 사실상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비는 그 당시 베를린 감옥에 있었지만 Zentrale의 입장의 이론적 정당화를 해온 칼 라덱의 도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라덱은 볼셰비키의 결단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중앙집권적인 당 조직의 지지자였다. 레비와 같이 라덱도 KPD(독일공산당)가 USPD(독일독립사회민주당)를 이기므로 그리고 기존하는 노조운동 내에 활동함으로써 고립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까지 10월 24일에 열릴 하이델베르그 당 대회가 힘겨루기의 결정적 검증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레비와 Zentrale는 반대파를 생디칼리스트로 비난하고 당 업무에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주의”를 요구하는 당 정책의 지침서를 준비했다. 이 지침서는 사실 최후통첩이었다. 왜냐하면, 이를 따르지 않으면 출당된다는 것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당 대회는 처음부터 레비에 의해 통제되었다. 대표 다수는 지명되었고 대회소집이 당규에 따른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절차도 토론이나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는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33대18로 지침서가 통과되자 레비는 반대표를 던진 대표를 출당시키려고 움직였다. 반대파의 주요 인물인 Wolftheim은 독일에 두 개의 공산주의당이 있다고 선언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축출과 함께 독일 공산주의 첫 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했다. 독일공산주의의 두 흐름 사이의 차이는 전술에 대한 단순한 차이보다 더 깊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공산주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노정 시켰다. 이러한 사건 이후 판네쿡은 다음 해 봄에 나타날 새로운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핵심역할을 할 독일 혁명의 실패를 이론적으로 성찰하기 시작했다.

 


<주>

 


1. Gerber의 박사 학위 논문 「Anton Pannekoek and The Socialism of Worker's Self-Emancipation, 1873-1960」의 제9장 “Years of Revolution : Pannekoek and The Formation of European Communism, 1917-1919"를 각주와 인용문을 빼고 번역하였음.

 


2. 1905년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 전 노동자의 산업별 조직화, 자본주의 제도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확립을 위하여 결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反戰) 활동으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았다. 

 


3. Johann Knief (1880-1919), teacher, member of the SPD from 1906, editor on the Bremer Bürgerzeitung from 1911 until 1916. He was a founding member of the ‘Linksradikale’, and later of the IKD(독일국제공산주의자), and edited Arbeiterpolitik, where he worked with Radek. Knief, alias Peter Unruh, was imprisoned by the government for revolutionary activity in January 1918.

 


4. 자유군단(Freikorps)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제대 군인 및 우익 장교들에 의해 독일에서 조직된 극우 의용병 단체로 주로 좌익 세력과 시가전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지휘관은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구스타프 노스케였다. 이들은 독일 공산당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좌익 혁명 단체인 스파르타쿠스단을 괴멸시켰다. 자유군단은 전쟁 당시 자신들이 입던 군복과 철모,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예비역 및 현역 장교들이 지휘하였다. 나치 돌격대의 초기 지휘관들과 에른스트 룀도 자유군단 출신이었다. 이들 자유군단 구성원들은 자유군단이 해체되면서 기존 우익계 정당의 폭력 조직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치 돌격대 역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5.‘슈틴네스-레기엔 협약’ - 자유노동총연맹의 의장 레기엔(Carl Legien)이 제철 기업가인 슈틴네스(Hugo Stinnes)와 협정을 체결, 하루 8시간 노동일 제도를 도입하고 ‘황색 노조’(어용노조)에 대한 기업가들의 지원을 중단하는 등의 내용.

 


6. 에베르트 당시 대통령과 육군 참모총장 빌헬름 그뢰너 장군 간에 맺어진 조약으로 군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지되도록 하되, SPD정권은 군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협정.

 


7.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혁명단체.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의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이 사회민주당을 탈당해 결성했다. 이들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고 전쟁 기간 중 계급 투쟁을 중지하려 한 사회민주당의 정책에 반대해 전쟁 반대와 사회주의 혁명의 수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이름은 1916년 1월부터 이들이 발행한 비합법 기관지 <스파르타쿠스브리페>(Spartakusbriefe•스파르타쿠스서신)에서 비롯됐다. 1917년 결성된 독립사회민주당에 참가해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려 했다. 1918년 12월 30일부터 1919년 1월 1일까지 전당 대회를 열어 독일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단원들은 12월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주동해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소위 스파르타쿠스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베를린 경찰과 연계돼 있던 자유군단(Freikorps)에게 체포되어 살해됐다.

 


8. 1918년 11/12월,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치”(독립사회민주당)냐 아니면 “의회주의”(독일사회민주당)냐 라는 대안을 놓고 진행된 논쟁이 노동자운동의 분열로 이어진다. 1919년 1월 5일 독립사회민주당은 독일사회민주당과의 공동행동에서 철수한다. 혁명 지도자들, 스파르타쿠스 연맹, 독립사회민주민당은 대중시위를 촉구한다.
같은 날 베를린에서는 무장 노동자들이 주요 신문사 건물을 점거한다. 이 중 하나가 독일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Vorwärts/전진) 및 독일사회민주당 제국정당 학교가 자리한 “린덴하우스”(Lindenhaus)다. “포어베르츠”는 유난히도 다수파 독일사회민주당이 완고하게 견지하던  “함구와 질서”(Ruhe-und-Ordnung)의 노선을 선전했다.
1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구스타브 노스케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반격의 장치를 마련하고, 이를 위해서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간 황제의 군부를 불러 원조를 구한다. 특히 “포르베르츠” 건물을 둘러싼 전투가 치열했다. 심한 폭격을 받은 점거 노동자들은 결국 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백기를 들게 해서 적군 사령관에게 보낸다. 대표단의 목적은 '안전한 철수'를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명 협상 대표단은 인근 용기병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한 명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와 함께 돌려보내고, 나머지 5명은 학대를 받고 총살된다. 나중에 이 자리(베를린 메링광장)에서 나치즘이 일어난 것은 옛 세력(황제)과 결탁하고 혁명을 죽인 독일사회민주당의 원죄에 있다.

 

 

 

*글 이해를 돕기 위한 간단 연표


1905년 러시아 혁명 발생 소비에트 출현. 로자 대중파업론 작성
1907년 레닌 [12년] 논문집 발표 1902년에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비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생 -> 제2인터내셔널, 제국주의 전쟁 찬성
1915년 찌머발트 좌파 결성 (레닌, 판네쿡)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발생
1918년 11월 독일 혁명 발생, 대중파업과 평의회(레떼) 운동 나타남.
1918년 12월 말 독일공산당 결성. [로자 룩셈부르크 스파르타쿠스 동맹+ 브레멘 좌파(판네쿡, 호르터, 륄레)]
1919년 1월 총선 독일 사민당 집권
1919년 1월 독일공산당 무장봉기(스파르타쿠스 봉기) -> 독일사민당 진압(룩셈부르크 암살당함)
1919년 10월 독일사민당 노동자평의회를 대신하는 제헌의회 제안, 노동자평의회를 합법적 공장평의회로 전화(독일판 노사정 위원회- > 이것이 발전해서 국제연맹 산하의 국제노동기구) -> 바이마르 헌법. 제헌의회 참여 독일공산당 내부 논쟁. 파울 레비가 -> 브레멘 좌파 축출
1919년 레닌 제3인터내셔널 창립, 2개의 독일 공산당이 코민테른 지부가 되는 격임.
1920년~1923년 독일 혁명 발발(독일경제 붕괴, 독일사민당과 그 기반인 노조 대중 신뢰 상실 -> 노동자평의회 재개)
1920년 4월 독일 공산주의노동자당 KAPD 창립(호르터 주도하에 창당) 공장조직과 Workers Union.
1920년 2월 독일 노동자총연합 AAUD 창립(공장조직의 연대) 오토륄레 주도.
1920년 6월 레닌 [좌익소아병 : 공산주의에서 유아적 무질서] 팸플릿 작성 -> 이 팸플릿을 계기로 코민테른 전 세계 지부 볼셰비키화.
1920년 12월 독일 공산당, 레닌과 코민테른 지원으로 독립사민당과 통합 -> 통일독일공산당 (VKAPD)
*독일사민당내 당내 분파가 독립사민당임 : 1917년 룩셈부르크 주도 독일사민당 좌파 + 카우츠키가 주도한 독일사민당 중앙파
1922년 카우츠키 독일 사민당 복당 -> 제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림
1926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운동 쇠락, KAPD와 AAUD-E 유명무실화됨
1927년 호르터 사망
1929년 세계 대공황
1933년 나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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