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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alinist welcome to a Nazi intervention into a workers strike in Greece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2/23 12:27
  • 수정일
    2012/02/23 12:27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A Stalinist welcome to a Nazi intervention into a workers strike in Greece

 

 

http://www.leftcom.org/files/images/2011-12-07-helliniki-halyvourgia-struggle.preview.jpg

The workers of Elliniki Halivourgia (‘Greek Steelworks’) have been on strike for 111 days. Elliniki Halivourgia is a steel factory in Aspropyrgos, an industrial outskirt of Athens. The same firm has another factory in the city of Volos.

 

The management announced a plan to enforce a 5-hour working day with a subsequent pay cut of 40%. On October 30, 2011 the workers’ general assembly in the factory of Aspropyrgos unanimously rejected the cuts. On the other hand, the unionised factory of Volos accepted the proposals of the company. The management immediately announced the dismissal of 34 workers in Aspropyrgos. In response, the workers decided to go on an indefinite strike and picketed the factory gates . Their demands are for the rehiring of their fired co-workers and the cancellation of the cuts plan. After a month’s strike the company has decided to fire another 16.

 

The strike is under the control of the factory union but the final decisions are taken by the workers’ assembly. On December 6, 2011 a general 24-hours general strike took place in the local industrial area and on January 17 the General Confederation of Greek Workers (GSEE) called a 24-strike in Atiki (Athens, Piraeus).

The strike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in the last few years. However, it remains isolated and the trade union has already accepted the plan of the company and asks for the rehiring or the early retirement of the fired co-workers. Nevertheless, the employer remains adamant.

 

PAME, the trade union coalition of the Greek Communist Party (KKE) has played a key role, trying to promote their fighting prestige (‘make all Greece into Elliniki Halivourgia’) and using it as a weapon for their trade union and electoral tactics.

 

On Friday 17 February a group of the notorious fascist party ‘Xrisi Afgi’ (‘Golden Dawn’) visited the factory; they passed unmolested through the gate, took the microphone and made a speech to the strikers expressing their ‘solidarity’ in the presence of some members of the union. Then, the president of the factory trade union welcomed the fascists, saying that ‘all Greece is with us’.

 

See a full video below.

 

First you see the Nazis making a speech and then the president welcomes the Nazis. The union’s president, Giorgos Sifonios, is a member of PAME and he was a candidate of the KKE in the district elections in 1998. Until now PAME haven’t given any explanation, and they haven’t tried to dissociate themselves from that event. So, it is justified to assume that the president acted according to party policy. Otherwise, they would have expelled him immediately.

 

Doing this the Stalinist KKE have brought the fascists into the workers movement. For the time being I can not explain their stance. I suppose that this is due to the active intervention of anarchists in that strike. As a matter of fact, many anarchist groups energetically supported the strikers and expressed their solidarity with them through many actions. As supporters of spontaneity they may idealize such a strike. So, maybe it will be a great discouragement on their part after that event.

 

‘Golden Dawn’ is a well known fascist group. They started as pure ‘national socialists’ and later they mixed Nazism up with the traditions of the Greek far-right. But, anyway, they are famous as pro-nazi. They are responsible for many attacks against immigrants. Clearly, it is a ‘para state’ group and they have close connections with the police and army. They have a growing influence especially in popular and workers areas and they are expected to win a good percentage (about 3-4%) in the upcoming elections.

 

A. 201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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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1년후

후쿠시마 1년후

 

 
 
 
2011년 3월 11일 거대한 쓰나미가 일본 동부 해안을 휩쓸었다. 12- 15미터이상의 높은 파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초래했다. 2만명 이상이 그 쓰나미로 사망했고, 아직도 수천명의 실종자들이 보고되어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전세계적으로 상당 수의 인구가 해안가나 해안 부근에 정착해 있는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밀집해 살고 있으며, 돌이킬 수 없는 해수면 상승으로 점점 더 위협당하고 있다. 그 쓰나미의 높은 파도는 그렇게 해안선을 따라 밀집된 정착으로 야기되는 모든 위험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의 모든 예상과는 달리, 재앙적인 사건이 후쿠시마핵발전소에서 발생했다.  이번의 지진과 쓰나미는 해안선을 따라 이뤄진 정착으로 인해 기후변화시대에 야기되는 잠재적인 위험들과 지배계급의 원자력 취급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는 쓰나미의 파괴적 결과들을 무시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이 글에서는 핵노심용융의 결과들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 지배계급의 만연한 무력감과 부도덕

 

후쿠시마에서 대재앙적 사태가 발생한 후, 주민의 대피는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필요한 통행금지구역을 모두 포괄한 것도 아니었다. 구제대책과 대피가 쓰나미의 결과로 지연되고   방해받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발생된 위험들의 규모를 완전히 의식하고 싶지 않았고 또 그것들을 과소포장하길 원했기에 광범위한 대피를 피하고 싶어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의 책임자들(원전운영사 텝코와 국가)은 그러한 일을 전혀 예기치 않았으며 안전대비책들도 그러한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불충분했음이 갑자기 밝혀졌다. 계획된 구제대책들과 그 용도로 제공된 구제수단들은 하이테크국가 일본을 빈약하게 무장된 무력한 거인처럼 보이게 했다.

 

그 재앙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난 후, 경우에 따라서는 3천 5백만인구를 거느린 토쿄 광역권의 인구를  대피시켜야할 필요성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정부는 이 생각을 즉시 포기했다. 일단 그렇게 할 수단이 없었고 그러한 대피가 국가의 붕괴위험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 안과 그 주변에서는 방사능측정치가 치명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그 재난이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일본수상 칸은, “원자로내 압력을 수동으로 낮출 노동자들로 이뤄진 '자살부대'”를 요청했다. 그곳 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은 전적으로 충분한 보호장비 없이 그 재난에 대항해 싸워야만 했다. „종종 측정기과 허가된 적당한 보호장화가 부족했다. 노동자들은 대신에 플라스틱봉지를 신발 둘레에 테잎으로 붙혀 썼다고 보고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잠을 자야했고 납으로 된 덮개 외에는 아무것도 덮을 것이 없었다.  비상상태에 남성 핵발전소노동자의 한해동안의 피폭한계치는 3월 15일 100mSv에서 250mSv로 높게 책정되었다.  부분적으로는 그 노동자들은 원전에서 해체작업을 한지 몇 주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에야 건강검진을 받았다.

 

25년전 체르노빌의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당시 몰락의 길에 들어서 있던 소련체제는 기술적 수단의 부족으로, 대부분 강제동원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피해복구작업을 위해 그 지옥으로 파견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60만에서 80만명의 해체인력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지금까지 수십만명이 피폭의 결과로 사망하거나 암을 앓고 있다. 그에 대한 통계숫자는 정부측에서 지금까지 결코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25년이 지난 지금, 하이테크국가 일본은 무력하게 소방호스와 헬리콥터로 불을 끄고 그 설비를 냉각시키려 시도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기획된 구상들과는 반대로,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해수를 투입하고 이렇게 해서 방사능물질로 오염된 물을 다시 바다로 배출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정부가 25년전에 수백만명의 해체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던 반면, 일본의 경제적인 곤궁은 무수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텝코는, 예를 들어 오사카의 노동자구역인 카마가사키와 같은 곳에서 노숙자나 실직자를 대상으로 인력을 구했고, 그렇게 동원된 사람들에게는 투입지역이나 위험들에 대해서 종종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체인력들의 생명만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 지역의 아이들은 아무 대책없이 높은 방사능량에 노출되었다. 그 방사능방출이 지금까지의 모든 측정치를 넘어섰기 때문에, 정부는 후쿠시마지역 학생들의 한해 피폭한계치를 20mSv까지로 상향조정했다. 스탈린주의적인 소련의 권력자들만 체르노빌의 폭발에 대해 처음 몇일 간 완전히 침묵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정부도 후쿠시마의 경우에 진실을 말하지 않고 그 재앙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냉소주의와 생명경시에 있어서 일본의 책임자들은 스탈린주의 소련의 권력자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장기적인 결과를 오늘날 사실상 가늠해 보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노심용융이 일어난 것은 용융된 연료봉들이 엄청난 방사능을 지닌 덩어리로 뭉쳐져 압력용기를 관통해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투입된 냉각수 자체는 극도로 오염되어 있고, 계속해서 다시 냉각되어야 하며 그때마다 다시 엄청난 양의 오염된 해수가 발생한다. 물뿐만 아니라 보호되지 않은 원자로들은 세슘, 스트론튬과 플루토늄 동위원소들을 방출한다. 이 물질들은  핫 파티클스(뜨거운 입자들)”로 불리는데, 나중에 일본 전역에서, 그래서 토쿄에서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의 기술적 수단으로는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핵쓰레기의 처리는 불가능하다.  냉각하는 것만도 몇년이 걸릴 것이다. 체르노빌에서는 일종의 석관이 설치되었는데, 약 100년후헐어내고 다시 설치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해답의 전망도 없다. 그러는 동안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점점 더 쌓여가고, 그것을 어디에 버려야할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방사능은 냉각수를 통해서 후쿠시마를 빠져나가 곧장 바다로 들어가서 해류를 따라 곳곳으로 확산되기에, 태평양과 먹이사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들에게 미치게 될 결과는 예측할 수가 없다. 일본의 북동부 해안 앞의 극히 풍부한 어장이 타격을 입었고, 예를 들어 베링해역의 바다연어로 확산되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권에 놓여있다.” (1)

 

“그렇게 많은 양의 방사능물질의 해양으로의 방출은 지금까지 없었다.”

 

일본 이지역의 인구밀도가 우크라이나보다 15배나 높기때문에, 주민에 대한 영향은 지금 아직은 더 정확하게 가늠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심용융은 그러한 핵재앙의 결과들이 전적으로 통제불가능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책임자들은 페스트와 콜레라사이에서만 선택할 수 있는데, 즉 노심용융을 방치한 채 보고만 있거나 아니면 해수로 냉각을 시도해서 결국은 소방물질을 통해 방사능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하거나. 무력한 정부는 두번째의 경우, 즉 높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소방물질을 통한 해수의 오염을 선택했다.

 

 

오염제거: 문제의 해결 대신 불운의 악화

 

주변의 오염된 토양을 처리하려는 시도도 무력감과 부도덕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30만 인구의 도시 후쿠시마에서 8월초까지 334개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그 마당의 오염된 토양을 제거하는 정화작업이 이뤄졌다. 후쿠시마지방의 코리야마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을 어디로 처리할지 몰라서, 많은 부모들이 경악하게도... 학교주변에 묻었다. 그 외에도 일본의 48개의 지방들 중 17개 지방들이, 그중에는 토쿄도 속하는데, 방사능으로 오염된 진흙찌꺼기를 처리 못한 채 보유하고 있다고 전한다. 심지어 토쿄로부터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까지도 방사능으로 오염된 토양이 발견되었다. 한편 방사능입자들을 제거작업이 이뤄져야될 건물들이 수천개나 여전히 남아있다. 수목이 우거진 산 조차도 아마 오염제거작업이 이뤄져야만 될 것이다. 아마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야만 할 것이다.

  

일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수백만 톤의 물질들을 위한 임시보관장소를 찾고 있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된 폐기물은 일부분 소각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매연을 통해 방사능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될 것이다. 발생된 핵폐기물에 대한 이러한 속수무책은 방사능폐기물의 처리라는 풀릴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조명한다.

 

 

핵폐기물처리  파괴적인 유산 또는 우리를 뒤따를 대홍수

 

원자력 발전에서 특별한 점은, 그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다해 가동 종결된다 하더라도 그 방사능의 발산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가동중지와 동시에 핵분열과정이 종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사능물질과 접촉한 모든 것은 오염되는데,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된 폐기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원자력협회 제공 정보에 따르면, 매년 1만 2천톤의 고방사능 폐기물이 발생한다. 모두 합치면 전세계적으로 2010년 말까지 생겨난 고방사능폐기물은 이미 약 30만톤에 달한다. 몇몇 나라들에서 실행중이거나 계획중인 지리적인 저장, 즉 옛광산에 저장하는 것은 그 위험성에 대해 눈가림식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런식으로, 독일의 아세(Asse)에 저장된 12만 5천 통의 핵폐기물은 조만간 인접한 소금의 영향으로 침식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벌써 방사능으로 오염된 여과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독일의 임시저장소 고어레벤(Gorleben)에서 전문가들은 지반함몰 위험을 조사했다. 비슷한 위험들이 전세계 대부분의 저장소灯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이 이미 큰 위험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렇게 핵페기물의 처리는 전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지금의 책임자들은 이 모든 폐기물을 저장소나 임시보관소에 떠넘기는데, 이는 결국 문제의 해결을 무수한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원자력발전소의 아주 정상적인灯 운행도 결코,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깨끗하지灯 않다. 사실상 원자력을 이용한 전력생산시에는 연료봉의 냉각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요구된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는 주로 해변이나 강변에 건설된다. 14개월마다 원자로의 연료봉들을 교체하는데, 이 연료봉들은 아직 매우 뜨겁기때문에 계속해서 폐연료냉각수조 안에 저장되어  2-3년간 냉각되어야 한다. 강으로 유입된 냉각수는 물의 온도상의 오염을 가져와서 수초가 자라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 또한 화학물질들(특히 나트륨, 붕산, 암모니아등)이 핵발전소로부터 강으로 유입된다.

 

 

대재앙 이후 1: 권력자들은 어떤 결론을 냈는가?

 

권력자들, 책임자들은 원인규명에 관심이 있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사실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설계 전체가 지진에 제대로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밝혀진 바로는,  원전운영사 텝코는 그 이전에 많은 단순사고들을 얼버무렸고 지적된 안전결함들을 해결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 발전소는 40년간의 수명을 다해서 어차피 가동종결되었어야 했다.  하필이면, 자국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MITI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 경제에 깊이 개입하는 일본국가가 바로 그 원자력산업에 백지수표를 줘어 주었다.  조사보고서 조작이나 사고 얼버무리기의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났을 때 조차도 국가는 어떤 결정도 내지 않았다. 그 밖에도, 경쟁의 압력과 위기의 무게로 인해 감독과 유지에 점점 투자를 덜 하게 되고, 점점 덜 숙련된 인력을 투입하려는 경향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확산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불충분하게 양성된 인력에 의해 안전기준이 낮아지게 됨으로써 원자로의 안전을 더 위협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442개의 원자력발전소중 많은 발전소가 지진발생위험지역에 놓여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에서만도 50개 이상의 원전이 지진발생위험지역에 세워져있다. 미국에서는 12개 이상의 원전이 잠재적으로 비슷한 재앙발생에 노출되어 있다. 러시아에는 많은 원전들이 지진발생시 자동으로 작동되는 가동중지메커니즘 없이 가동되고 있다. 터어키에서는 아쿠유베이(Akkuyu Bay) 원자로가 활성  에세미스(Ecemis) 단층선 근처에 건설되었다. 한편 현재 27개의 새로운 원전을 건설중인 중국은 지진활동이 가장 왕성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더 많은 예들을 리스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위험을 고려하는 대신, 자본주의는 도처에 시한폭탄을 만들어냈다! 고도로 발전한 나라들에서 안전기준들이 이미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난 마당에, 이제서야 원전의 운전에 뛰어드는 나라들은 안전기준들과 사고처리경험을 조롱한다. 이 지역에 사고가 발생했을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조차도 없다....

 

게다가 오래된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이 연장된다. 미국에서는 60년으로, 러시아에서는 45년으로 연장되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엄격한 안전기준에 대한 저항이 그리고, 원자력산업에 대한 국가들의 허술한 통제를 넘어서는 국제감시기관의 개입에 대한 저항이 상당히 거세다. 국가의 독립성이 안전에 우선시되고 있다(3).

 

종합하자면, 후쿠시마사태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시한폭탄 위에 앉아있는데, 이 시한폭탄들은 곳곳에서 그리고 언제라도 지진이나 고장 또는 테러리즘 등에 의해 새로운 재앙으로 작용할 수 있다.    

           

 

원자력 전력  값싸고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는가?

사회를 댓가로 이윤

 

원자력산업의 옹호자들은 반복해서, 원자력 전력은 값싸고, 더 깨끗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사실은,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세우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고, 이는 전력회사들에 의해 충당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가의 보조, 즉 세금을 통해 지원된다.  핵페기물의 처리비용의 주요부분도 운영회사들에 의해 사회에 전가된다. 지금까지 핵페기물처리에 대한 어떤 해답도 없다는 점은 논외로 치더라도, 핵로비측의 계산 전체에 이러한 폐기물처리비용은 참작되어 있지 않다. 원전이 약 50년의 운전후에 가동중지되더라도, 지금까지 참작되지 않은 거대한 비용이 생겨난다.

 

단순사고이거나 대형사고이거나를 막론하고, 여기서도  그 비용은 사회에 전가된다. 후쿠시마에서는 그 규모가 지금으로선 현실적으로 산정되기 불가능한 결과비용들은 지금까지 2-3천억 유로로 추정된다. 이 금액은 텝코가 도저히 조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국가는 텝코노동자들이 희생한다는 조건하에 이미 원조灯를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연금이 삭감되고 임금이 인하되며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또한 일본의 전체 가정에 특별세도입이 계획되어 있다.

 

경제적 및 생태적인 측면에서 원전운행으로 발생하는 사실상의 비용과 폐기물처리라는 미해결 문제는 밑빠진 독과 같다. 원자력은 어떤 측면으로 보더라도 비합리적인 프로젝트이다. 원전사들은 전력생산으로 거대한 금액을 벌어들이지만 그 결과비용灯은 사회에 전가한다.  원자력발전소는 그래서 이윤추구 그리고 인류와 자연의 장기적 보호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대립을 체화하고 있다.

 

위기와 자연 남용

 

원자력이 환경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연 남용을 자행하고 있다. 전혀 보존에 대한 고민 없이 모든 자원을 강탈하고 환경을 창고처럼 취급한다.

그 사이에 점차 전 지역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는 곳이 늘어나고,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하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달불가능했던 자원들이 점점 더 정교화된 기술로 남김없이 약탈된다. 이때 투입되는 수단은 점점 더 폭력적이고 더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위험과 잠재적파괴력이 배가된다.  2010년 4월 멕시코만에서 원유시추선, 딮워터 호라이즌이 폭발했을 때, 진상조사위원회는 안전규정상의 명백한 결함들을 발견했다.  엄청난 경쟁의 압력때문이기도 하고 또 바로 그때문에, 시설의 건설, 감독 및 운영에 거대한 투자를 했어야할 그 대기업은 결국 엄격한 긴축정책을 펼수 밖에 없었고, 이는 안전비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최근의 예로는 브라질해안이 원유로 오염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과실들은 결코 기술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들에 국한될 수 없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고도로 발전된 나라들에서 믿을 수 없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인류 전체에 대한 위협

 

1970년대 말 미국에서 발생한 쓰리마일아일랜드(Three Mile Island)사태나 체르노빌의 경우와는 달리,  후쿠시마사태는 인구가 밀집된 대지대, 즉 3천 5백만의 인구를 거느린 토쿄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원자력은 2차 세계대전시에 전쟁무기로서 개발되었다. 일본의 두 도시에 투하된 원자탄과 더불어,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새로운 단계의 파괴가 도입되었다.  2차 대전후 군비경쟁은 체계적인 고도의 핵무장과 더불어 이러한 군사적인 파괴무기를 더욱 강화시켜서 오늘날에는 단 한번의 핵무기전투에 전 인류가 절멸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냉전 종결후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대략  20만개의 핵무기가 존재하고, 이는 인류를 몇십번이나 절멸시킬 수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쓰리마일아일랜드,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의 핵사고를 통해서, 인류가 군사상의 핵무기투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을 통해서도 위협받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일본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후쿠시마 다이이치 원전사고의 결과로 대기중에 방출된 세슘-137 동위원소의 양은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투하로 야기된 양의 대략 168배에 해당된다고 한다.(4)

 

후쿠시마사태 발생 이후 그 사태수습의 전반적인 전개양상을 볼 때, 책임자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그 사태의 규모를 과소포장하려 했으며 그 사태로부터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비용에 대한 어떤 통제도 상실했다.  오히려, 원자력 문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환경 전체의 보호에 있어서도 지배계급은 점점 더 가차없어진다. 환경파괴는 점점 더 위협적인 규모를 띠고 지배계급은 환경보호를 위해 책임있는 대책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그 무능함을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인류가 이윤의 제단 위에 희생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해에 더 첨예해진 세계경제위기로 인해,  자연유지를 위한 보호대책을 도입하기에는 지배계급의 재량권의 폭이 부가적으로 더 축소되었다.  자본주의는 위기를 통해서만, 기아, 빈곤, 전쟁등과 같은 위기의 재앙적인 결과들을 통해서만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파괴력을 통해 전체 생태계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들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시간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선두로 하여 이체제를 극복하느냐가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다양한 수준들(위기, 전쟁, 환경)에서 위협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원자력에 대항하는 것과 같이, 자본주의적 현실의 오직 한  측면에 대해서만 배타적으로 대항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모든 공포의 시나리오들과 자본주의 체제에 놓인 그 뿌리들 사이의 연관성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성행했던 소위 “1-쟁점-운동들”(반핵운동, 가택점거, NATO무장반대운동)에 투쟁을 내맡겨버리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다. 오늘날 그 어느때 보다도, 전세계적인 파산을, 체제가 그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음을 세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와 전쟁과 환경파괴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을 외면한다면, 어쩔 수 없이 개량주의라는 살얼음판 위에 도달하게 되고 이 체제에 의해 흡수되어버릴 위험에 빠지게 된다.  D. 2012년 1월 <국제공산주의흐름>

 

 

(1)     후쿠시마 북동쪽에서 2개의 해류들, 즉 큐로시오난류와 오야시오한류가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어장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일본의 어획은 일본에서 소비되는 생선제품의 반을 이룬다. 그렇게 해서 생선공급이 위태롭게 될수 있다.

 

(2)   Http://news.ippnw.de/index.php?id=72, 일본환경단체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후쿠시마지역으로부터의 오염된 토사들을 일본 전 지역으로 분배해서 소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환경성이 추산하기에, 이와테, 미야기 및 후쿠시마등 해안지대에서  3월의 재앙으로 인해 생겨난 건축폐기물은 대략 2천 3백 8십만톤에 달한다고 한다.  이미 이와테에서 토쿄로 대략 천톤의 폐기물의 첫운송이 지난 11월에 시행되었다고 마이니치신문은 보도했다. 이와테 지방정부가 추정하기에 이 폐기물은 133bq/kg의 방사능물질을 함유한다.  2011년 3월이전이라면 이것은 불법이었겠지만,  일본정부는 7월에 건축폐기물안전수준을 100bq/kg에서 8,000bq/kg으로,  10월에는 다시 10,000bq/kg으로 상향조정했다. 토쿄는 총합 500,000톤의 폐기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3)     후쿠시마이후, 2022년까지 원전으로부터 하차하겠다는 독일 자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세계혁명 168, 169호에 실린 우리의 기사를 참조.

 

마이니치신문, 2011년 8월 25일자 기사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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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kes and solidarity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2/13 12:13
  • 수정일
    2012/02/13 12:1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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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ikes and solidarity

 

If this year’s strikes are to have power, we must take our lead from the electricians, bypassing union attempts at defusion by offering each other solidarity in new ways and across artificial divides, writes Deb Harris.

Solidarity is illegal. Thatcher said so. She only permits us to strike if we have a specific and identifiable common complaint – we are not allowed to strike together in recognition of the general horror. In 2011, submissive as ever, the unions found the only thing that the public sector can legally unite around – pensions – and conveniently forgot that everyone is angry about a lot more than that. Their speeches, placards and leaflets were all about pensions. As if we had given up on anything but retirement.

 

As if pensions were isolatable from the stress and drudgery of work. And as if work was not stress and drudgery at all. As if it was something to be celebrated, defended. The TUC anthem for the strike, ‘Let’s Work Together’ shows a lot of happy public sector workers winking at each other while they dance through their jobs. The strike was in defence of work as it is. And it was bounded by work: it began when work began and was over when work ended. The strikers were meant to stay at the work door until the pre-planned marches through city centres. We were not meant to move beyond these boundaries, to strike out in other ways, with other people, in other places, and into the night.

 

As if pensions were isolatable from everything else – increasing rents, prices, repression. The unions try to separate the strikers from the broader causes of their anger, and from the rest of the population. The day, as we were reminded by a Unison rep on one picket line, was a focus on ‘her’ members. It wasn’t about anyone else, anything else, it was about pensions and the public sector’s patronised heroes. Those who don’t have a job, let alone a pension, who couldn’t strike legally even if they wanted to, should do nothing but go home and reflect on the ‘important work that the public sector do’.

 

Of course thousands rely on the welfare state in order to survive, but, as public sector workers know only too well, any real reflection on state-run services reveals their contradictions, reminds us what else they are important for. It is unlikely that many of those forced to use the state’s services – people claiming job seekers allowance, people on probation, school children – were weeping into their cornflakes over the temporary loss of the public sector, distraught at the thought of being able to go back to bed. It’s much more likely that they enjoyed the short taste of freedom, would like to strike out too.

 

It is no surprise that a call for solidarity from people who had no right to strike was ignored by local union leaders. A demonstration in Hackney which had used the rupture provided by the strike to block the bus depot and roads as it marched from picket line to picket line, which had met with support from strikers, bus drivers, car drivers, passers-by, was now being kettled by the police at the picket line outside the CLR James Library in Dalston. Two people had been violently arrested and more than thirty were about to be arrested. At the rally for the strike at Hackney Town Hall, a call was made to come to the library to support. The people listening were interested, asked questions.

 

But standing on the steps above, the local union leaders just blew their horns louder, made speeches more frantically, and told everyone to go to Homerton Hospital – where those who had been kettled would have gone if they hadn’t been stopped. There was no question that people might be offered other options. It was Homerton Hospital or home. ‘You have your tactics, we have ours’. ‘We don’t even know who you are.’ Solidarity is illegal.

 

Of course there were a few people who disobeyed the megaphone, a noisy crowd of ten who joined the passers-by who had gathered around the kettle. And later that evening, a demonstration outside Stoke Newington Police Station in support of those arrested was much larger: people from the local Kurdish community who earlier that week had been protesting in front of the same police station over the brutal arrests of some of their members; passers-by who had their own reasons to hate the police; and many more who had been striking that day, gathered together in support. Now the strike was over, everyone could show their solidarity as they wished, free from the dictates of the megaphone.

 

But we don’t need to wait until the union leaders have gone home – we can refuse them even while they stand over us: electricians have shown how this is done – defying legal strikes and dead-end marches with wildcat strikes, road blocks and occupations.  When things become more desperate, it will become increasingly clear that we need to break free from union control – that our anger can no longer be channelled into sectors and causes, damned up in slogans and negotiations, locked into laws and stewarded through marches.

 

As more and more people adopt and expand the tactics of the electricians, we will start to present a much greater threat to the way things are, and the police will be a much larger presence. We will be caught in many more unpredictable situations, in which we will need to fight together whether or not we know each other and whether or not we planned to. It is this sort of solidarity that will frighten the police. It is this, also, that frightens the union leaders.

 

 

<출처>  http://thecommune.co.uk/2012/02/03/strikes-and-solidarity/#more-7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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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cupy America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2/03 23:13
  • 수정일
    2012/02/03 23:1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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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cupy America / #Occupy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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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cupyAmerica // Have the Occupy Wall Street protests that sprung up across the country this fall already passed? Shot in NYC, Oakland, and Cincinnati, this short explores the state of the #OWS protests now that local governments have removed permanent encampments, and asks what the future will be for this still-young nationwide movement.

Produced and edited by Chase Whiteside (interviews), Erick Stoll (camera), and Liz Cambron.

Additional Camera:
Kasey Hosp
Jay Taylor (http://youtube.com/OccupyCincy)

Includes excerpt from "Monday Morning in Zuccotti Park,"
Directed by Steve Bognar (http://youtube.com/watch?v=XRonkn6L6u4)

Additional Oakland Footage:
Karl Baumann (http://vimeo.com/user1542672)
Raleigh Latham (http://vimeo.com/user193922)

Additional NYC Foo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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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kushima: one year after

Fukushima: one year after

 

 

In March 11th 2011 a gigantic tsunami flooded the Japanese east coast. Waves as high as 12-15 meters caused incredible damage. More than 20.000 were killed by the tsunami; thousands are still reported to be missing today; an uncountable number of people lost their home. On the whole planet a big part of the population has settled at the coasts or near coasts; most people live on a narrow space jammed together, more and more threatened by the irreversible rise of sea water levels. The flood waves of the tsunami showed all the dangers that flow from such dense settlement along the coasts.

 

But contrary to all expectations of the government, a disastrous accident occurred in the Fukushima nuclear power plant. The earthquake and the tsunami brought to the fore the potential dangers arising from both settlement along the coasts in times of climate change and the way the ruling classes deal with nuclear power. For reasons of space, we want to focus in this article on the consequences of the nuclear melt-down.

 

Chernobyl, Fukushima: helplessness and unscrupulousness of the ruling class everywhere

After the disastrous accident in Fukushima the evacuation of the population began too late and it did not cover the necessary no-go zone. Even though it may be objected that the rescue measures and the evacuation were delayed and made more difficult due to the consequences of the tsunami, the government wanted to avoid a large scale evacuation, because it did not want the population to become aware of the scope of the danger and wanted to downplay the whole situation. All of a sudden it became obvious that the responsible people in Japan (both the company which runs the nuclear plant, Tepco, and the government) had never expected such a scenario and that the safety measures in case of an earthquake and a tsunami of such a magnitude were totally insufficient. The planned emergency measures and the means of emergency intervention were quite inadequate and made hi-tech Japan look like a poorly equipped, helpless giant.

 

A few days after the disaster, when the possible need for an evacuation of the metropolitan area of Tokyo with its 35 million inhabitants was discussed in the government, this idea was immediately turned down because they simply did not have the means to implement it, and moreover it would have shown the state to be in danger of collapse.

 

In and around the nuclear plant the recorded radiation reached fatal heights. Shorty after the disaster Prime Minister Kan “demanded the formation of a suicide team of workers who would have to attempt the task of easing the pressure in the plant”. The workers who intervened on the site were totally ill equipped. “For some time there was a lack of dosimeters, and a lack of appropriate and admitted safety boots. One worker reported that the workers had to bind plastic bags with cellotape around their shoes instead. Very often it was impossible for the workers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or with the control centres. Many of the workers had to sleep on the premises of the site, they could only cover themselves with lead blankets. The critical values for male power plant workers in emergency situations was increased on March 15th from 100 to 250 mSv per year”. In several cases workers could only undergo a health check weeks or months later.  

 

25 years ago, at the time of Chernobyl, the collapsing Russian Stalinist regime, due to a lack of other resources, found nothing else to do but send a gigantic army of forced recruits to fight the disaster on the spot. According to the WHO some 600,000 to 800,000 liquidators were sent, of whom hundreds of thousands died or became ill because of the impact of radiation or cancer. The government never published any official reliable figures.

 

Now, 25 years later, hi-tech Japan tried desperately to extinguish the fire and cool the site amongst others with fire hoses and by spraying water from helicopters. In contradiction to all previous planning Tepco was forced to use large masses of sea water for cooling the plant and to dump the polluted water into the Pacific Ocean. And while the Russian Stalinist regime 25 years ago forcibly recruited hundreds of thousands of liquidators, economic misery forced thousands of workers in Japan to risk their lives. Tepco recruited in particular among homeless and unemployed workers in the poorest area of Osaka, Kamagasaki. In many cases they were not told where they had to work, and they were often not informed about the risks.

 

But not only were the lives of the liquidators put at risk; the civilian population was also put at risk. In particular children in the radiated area were exposed to high doses. Since the emissions superseded any previously recorded value, the government decided to consider the exposure of children in the Fukushima area to a radiation level of 20 millisievert as “not dangerous”.

 

During the first days the rulers in Stalinist Russia tried to stay altogether silent about the nuclear disaster at Chernobyl; the government of democratic Japan was equally determined to hide the full scope of the catastrophe. The people in charge in Japan showed no less cynicism and contempt for life than the Stalinist regime in power at the time of Chernobyl.

 

It is impossible today to assess the long-term consequences of the disaster in a realistic manner. The melt-down means that the melted fuel rods have formed a gigantic radioactive clot, which has penetrated through the pressure container. The cooling water has become extremely contaminated. It needs permanent cooling, and new gigantic masses of contaminated water accumulate all the time. Not only the water but also the “unprotected” reactors emit caesium, strontium, and plutonium isotopes. These are called ‘hot particles’, which can be found all over Japan, including Tokyo. So far there are no technical means available to dispose of the nuclear waste piled up in Fukushima. The cooling process itself takes years. In Chernobyl it was necessary to construct a sarcophagus which will have to be torn down at the latest in one hundred years time to be replaced by another one. There is not yet any solution in sight for Fukushima. However, in the meantime contaminated water accumulates and the authorities in charge do not know where to dispose of it. A large part of the cooling water is directly poured into the ocean, where the currents spread it across the Pacific, and its consequences for the food chain and for human beings cannot yet be measured. The Japanese northeast coast which counts as one of the richest fisheries will be affected, even the Bering Strait with its salmon resources may be hit[1].

 

Because the population density in this region of Japan is 15 times higher than in Ukraine the consequences for the population cannot yet be assessed.

 

The meltdown thus reveals that the consequences of such a nuclear disaster are totally out of control. The authorities in charge had the choice between plague and cholera. Either let the melt-down happen without any means of intervention or attempt to cool the site with sea water, thus accepting a further spread of radioactivity through the dissemination of the extinguishing devices. The helpless government opted for the contamination of sea water through highly radioactive fire fighting water.

 

Decontamination: instead of solving the problems, everything becomes worse  

The attempts to dispose of the contaminated soil in the surrounding area displayed a terrible lack of responsibility and lack of scruple. Up until August 2011 in the town of Fukushima some 334 school yards and nurseries were cleaned. But the authorities do not really know where to dispose of the contaminated soil. For example in Koriyama in the Fukushima prefecture, it was just buried in the soil on the school yards themselves. 17 out of 48 prefectures of Japan, amongst them Tokyo, reported that there were contaminated slicks, but the prefectures do not where and how to get rid of them. Even as close as 20 km to Tokyo radiated soil was recorded. Thousands of buildings still need to be scrubbed of radioactive particles.  Even forested mountains will probably need to be decontaminated, which might necessitate clear-cutting and literally scraping them clean. Japanese media have reported that the government is planning an intermediary deposit for millions of tons of radioactively contaminated waste. Since there is no solution some of the radioactively contaminated garbage has been burnt[2]. This is a way of spreading radioactivity even further via the smoke. This helplessness vis a vis the piles of nuclear waste casts a light on the impossibility of decontaminating the radioactive waste. 

 

Nuclear decontamination – the disastrous legacy, or shitting on the future…

The specificity of the production of electricity through nuclear energy is that the radiation does not stop once the nuclear power plants at the end of their operation time are switched off. The process of nuclear fission is not terminated once the nuclear power plant has been switched off. 

 

What is to be done with the nuclear waste, because any material which has come into contact with radioactive material is contaminated?

 

According to the World Nuclear Association, every year some 12,000 tons of highly radioactive waste accumulates. Until the end of 2010 some 300,000 tons of highly radioactive waste had been piled up in the world as a whole, out of which some 70.000 tons can be found in the USA. In 2008 in Russia some 700,000 tons of radioactive waste were stored, out of which 140,000 tons came from European nuclear sites. At the Hanford Site in the USA some 200,000 cubic meters of radioactive material need to be disposed of. In France more than one million cubic meters of contaminated soil is stored (‘Nucléaire, c’est où la sortie’, Le Canard Enchainé, p74), The geological storage which has been practiced or planned in several countries, for example in old mines, is nothing but a temporary makeshift, the dangers of which the defenders of nuclear energy stay more or less silent about. For example in Germany 125,000 barrels of nuclear waste are deposited in an old mine in Asse; these barrels are eroding due to the influence of salt; contaminated lye is already escaping from the barrels. In the German case intermediate storage experts Gorleben found out about the danger of landslides. Similar risks have been diagnosed in most of the dumpsites. This means that while the “normal running” of a nuclear plant is full of dangers, the disposal of nuclear waste is a totally unsolved question. The people in charge have been placing all the nuclear waste into dumpsites, leaving behind a pile of nuclear waste which an endless number of generations will have to cope with.

 

And the “normal” running of a nuclear plant is not as “clean” as always claimed by the defenders of nuclear industry. In reality enormous masses of water are necessary for the cooling of the fuel rods. Nuclear plants have to be constructed at rivers or shores[3]. Every 14 months in each reactor one quarter of the fuel rods need to be renewed. However, since they are extremely hot, after their replacement they have to be placed into the spent fuel pit, where they need to be cooled for a period of 2-3 years. The cooling water, which is pumped into rivers, leads to a thermal pollution. Algae develop, fish perish. Moreover, chemicals are emitted into rivers (e.g. hydrochloric acid, sodium, boric acid, detergents) In addition water is also polluted with radioactivity, even though only in small doses. 

 

Almost one year after the disaster – what conclusions have the people in charge drawn?

Are the holders of power, the people in charge, interested in clarifying the root of the problem? Obviously not! As a matter of fact the entire construction plan of the power plant in Fukushima was not adapted to the danger of earthquakes and tsunamis. By now, it has become known that the operating company Tepco covered up many nuclear incidents; important safety deficiencies were camouflaged; widely criticised faults in the safety system were not eliminated, partly because the plant was to be closed after 40 years of operating time. The Japanese state, which usually intervenes heavily in the industry and is known for its intervention through the MITI in the economy, in order to strengthen the competitiveness of Japanese capital, almost issued a blank cheque to the nuclear industry. Even when the manipulation of inquiry reports or the trivialisation of nuclear incidents came to the fore, the state did not intervene more strictly. At any rate, under the weight of competition and the worsening crisis, there is a worldwide trend for less and less money to be invested in maintenance and fewer and fewer qualified staff to be employed in maintenance and repairs. The capitalist crisis makes the nuclear plants even less safe, as safety standards are lowered by employing less qualified staff.

 

But above all it has become clear that of the 442 operating power plants worldwide many of them were built in earthquake-prone areas. In Japan alone more than 50 power plants were constructed in such areas. In the USA more than a dozen nuclear plants with a similar risk were constructed. In Russia there are many nuclear power plants without an automatic mechanism for shutting down in case of nuclear incidents. In many Russian nuclear power plants cracks and surface subsidence were reported. Chernobyl was probably no exception: such a disaster can occur at any time again. (Le Monde p49).  In Turkey the reactor Akkuyu Bay was built near the Ecemi fault. India and China are planning to build the most new nuclear power plants. Yet China with its 27 new nuclear power plants under construction is one of the most seismologically active countries[4].

 

Saudi Arabia is planning to construct 16 power plants, not least to be better armed against Iran.

 

In Pakistan a new reactor is to be opened near Lahore, where there is a moderate to high risk of earthquakes. Taiwan has 6 reactors although the country is in one of the most endangered seismological zones. Instead of considering the dangers of nature capitalism has constructed global time bombs. And while safety standards in the most highly developed countries have turned out to be insufficient, the safety philosophy is even weaker in those countries which are starting to draw on nuclear energy. They have even less experience in dealing with incidents and accidents. Hard to imagine what might happen in case of a nuclear disaster…

 

Moreover the operating time of old nuclear power plants which were to be shut down are now to be prolonged. In the USA their operating time has been prolonged to 60 years, in Russia to 45 years.

 

While the control mechanisms over nuclear industry by states on a national scale have proven to be incomplete and insufficient, on an international scale the states are opposed to restrictive safety standards or too much intervention by international monitoring organisations. National sovereignty takes precedence over safety.

 

In Germany the government decided in the summer 2011 to abandon nuclear energy by 2022. As an immediate measure, some nuclear power plants were switched off shortly after the Fukushima explosion.  Does German capital act in a more responsible manner? Not at all! Because only a few months before the same government had prolonged the operating time of several nuclear power plants, i.e. before Fukushima it had planned to maintain nuclear energy. If, however, it has decided to abandon nuclear energy now, this corresponds on the one hand to a tactical political move, because the government hopes to improve its chances of being re-elected; and on the other hand there was an economic calculation, because German industry is very competitive with its alternative energy production know-how. German industry now hopes for very profitable markets. Moreover the whole problem of getting rid of the nuclear waste remains unsolved…

 

To sum up: with or without Fukushima humanity is still faced with these nuclear time bombs ticking away. In many places they can ignite a new disaster because of earthquakes or other weak points.

 

Nuclear power generated electricity – cheap, clean and without any alternative? Profits at the expense of society and nature

Time and again we hear the arguments put forward by nuclear energy’s defenders that nuclear power generated electricity is cheaper, cleaner, and without any alternative. It is a fact that the construction of a power plant costs gigantic sums, which – thanks to the help of state subsidies – are shouldered by the electricity supply companies. But the bulk of the costs of the disposal of nuclear waste is pushed onto society by the operating companies. Furthermore the whole economic calculation put forward by the nuclear lobby does not take into consideration the cost of disposing of the waste. And once the nuclear plants which are more than 50 years old have to be dismantled, there are tremendous costs in tearing them down. In the UK it was estimated that the cost of demolishing the existing nuclear power plants would amount to 100 billion euros, some 3 billion euros per nuclear plant. In the USA they want to make it even cheaper – only 104 million dollars are to be spent for the 104 operating nuclear power plants. In France the demolition of Superphénix will cost 2.1 billion euros (Le Monde, p. 68). And again, the remaining nuclear waste cannot be disposed of in any way.

 

And if there is a nuclear incident or accident, normally the state has to intervene and come to the rescue. In Fukushima the follow-up cost, the size of which is yet unknown, are estimated to amount to 200-300 billion euros. Tepco could not raise this money. The Japanese state has promised its “help”, provided that the Tepco employees make sacrifices – their pensions are to be cut, wages lowered, thousands of jobs to be axed. Special tax charges are scheduled in the Japanese budget. Having drawn the lessons from previous accidents the operating companies in France have limited their liability to 700 million euros in case of accidents: this is peanuts in comparison to the possible economic costs of a nuclear disaster.

 

From an economic and ecological view the real costs of the running of the plants and the unsolved question of nuclear waste are a bottomless pit. In every respect nuclear power is an irrational project. The nuclear power companies receive massive amounts of money for energy production, but they shove the follow-up costs onto society. The nuclear power plants embody the insurmountable contradiction between the search for profit and the long-term protection of man and nature.

 

Crisis and depletion of nature

Nuclear power is not the only danger for the environment. Capitalism practises a permanent depletion of nature. It constantly plunders all resources without any concern for sustainability, for harmony with nature. It treats nature like a garbage landfill.

 

By now entire stretches of the Earth have become uninhabitable, whole areas of the sea have become poisoned. The system has embarked upon an irrational course, where more and more new technological means are developed to deplete natural resources, while at the same time the investment into this exploitation becomes more and more costly and immense and the risks and potential of destruction increase. When in 2010 at the shores of the leading industrial power USA the oil platform Deepwater Horizon exploded, the investigation into the accident unmasked striking deficiencies in the safety regulations. 

 

The pressure flowing from competition forces all the rivals, who have to invest large sums of money in the construction and the maintenance of production sites and their operation, to try to save money and to undermine safety standards. The most recent example is the oil pollution off the Atlantic shores of Brazil. All this negligence does not just crop up in technologically backward countries. In fact it takes on the most unbelievable proportions precisely in the most highly developed countries, because there competition is often even fiercer.

 

The whole humanity is threatened

In comparison to Three Mile Island and Chernobyl, Fukushima meant that for the first time a metropolitan area such as Tokyo with its 35 million inhabitants was directly threatened.

 

Nuclear energy was developed during World War Two as an instrument of warfare. The nuclear bombing of two Japanese cities inaugurated a new level of destruction in this decadent system. The arms race during the ‘cold war’ after WW2, with its systematic deployment of nuclear weapons, pushed the military capacity for destruction to the point where humanity could be wiped out in one stroke. Today more than two decades after the end of the ‘cold war’ there are still some 20,000 nuclear war heads which can still annihilate us many times over.

 

With the nuclear disasters in Three Mile Island, Chernobyl and Fukushima it has become obvious that humanity is not only threatened with annihilation through the military use of nuclear power. Its “civilian” use for the production of energy can also cause the destruction of humanity.

 

The Japanese government estimated that due to the nuclear disaster at Fukushima the radioactive level of Caesium-137 was 168 times higher than the one provoked by the nuclear bomb of Hiroshima in 1945 (Shimbun, 25/8/2011). The amount of Caesium-137 was estimated to have reached 15.000 Terabecquerel, while the effect of the American atomic bomb Little Boy on Hiroshima was ‘only’ 89 Terabecquerel.

 

The whole development since the beginning of the disaster shows that the authorities and Tepco lost control, that the scope of the disaster was trivialised, that the costs of the rescue operation were skyrocketing and that the people in charge had not drawn the necessary conclusions. On the contrary. Not only concerning the question of nuclear power, but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environment as a whole, the ruling class is becoming more and more ruthless – as the results of the recent Durban summit show. The destruction of the environment has been reaching higher levels, and the ruling class is totally unable to change the course of events and to take appropriate measures. The planet is sacrificed for the sake of profit.

 

Moreover the worsening economic crisis, which sharpened even more in 2011, leaves the ruling class with less room for manoeuvre for protecting nature. Thus capitalism pushes humanity towards the abyss through the effects of the crisis such as hunger, pauperisation and trade wars, shooting wars etc., while its power of destruction threatens the whole of civilisation. The nuclear power plants are only the tip of the iceberg.

 

A race against time has begun. Either capitalism destroys the entire planet or the exploited and oppressed – with the working class at their head – succeed in overthrowing the system. Because capitalism poses a threat to humanity on different levels (crisis, war, environment) it is insufficient to struggle only against one aspect of capitalist reality, e.g. against nuclear energy. We have to highlight the link between these different threats and their roots in the capitalist system. During the 1980s and 1990s there were many “single issue” movements (such as the struggle against nuclear energy, against militarism, against the housing shortage etc.), which reduced their focus only to one aspect. Today more than ever it is necessary to show the bankruptcy of the entire system, to demonstrate that the system cannot take humanity out of this impasse. It is true that the connections between the different elements are not easy to understand, but if we do not take the link between crisis, war and ecological destruction into account our struggle will end up in the dead-end of thinking that things could be reformed within the system.

Di 1/12

 

 


[1] Northeast of Fukushima the two currents, the warm Kuoshio and the cold Oyashio, merge. This is one of the most abundant areas of the earth for fishing. And in this area Japanese fishing boats catch roughly half the amount of fish consumed in Japan. Thus fish supplies in Japan could be endangered. “Such a high emission of radioactivity into the sea has never been measured.” hpnw.de/commonFiles/pdfs/Atomenergie/Zu_den_Auswirkungen_der_Reaktorkatastrophe_von_Fukushima_auf_den_Pazifik_und_die_Nahrungsketten.pdfttp://www.ip

 

 

[2] According to information from Japanese environmental organisations, the government is planning to spread contaminated debris from the Fukushima area across the whole country and to burn it. The Japanese ministry for the environment estimates the amount of building rubble at around 23.8 million tons. As the Mainichi Daily News reported a first shipment of 1000 tons of debris from Iwate to Tokyo took place in early November 2011. The Iwate authorities estimate that this debris contains 133 bq/kg of radioactive material. Before March 2011 this would have been illegal, but the Japanese government lowered the norms in July from 100 bq/kg to 8000 bq/kg, and in October to 10.000 bq/kg. The city of Tokyo announced that it would receive some 500.000 tons of radioactive rubble. http://news.ippnw.de/index.php?id=72,

 

[3]In France, where more than 44 reactors are located at rivers, more than 57% of the water taken from the sea and rivers is used for the production of electricity. A French nuclear plant, Graveline, which needs 300 cubic meter of water per second, returns the water 12° warmer to the river. And if during dry seasons there is not sufficient water available, some nuclear plants have to be cooled by helicopter. (Les dossiers du Canard Enchainé, ‘Nucléaire, c’est par où la sortie?, le grand débat après Fukushima’, p80)

 

[4] How much safety is valued by Chinese capital can be seen through the training of qualified workers. China would need each year at least 6000 nuclear experts for the planned new nuclear power plants, but presently only 600 are trained every year. In China some 500,000 dollars are spent every year on safety; in the USA 7 million dollars are spent per year (Le Monde,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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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투표가 아니다 (1%를 위한 투표일 뿐이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1/26 12:02
  • 수정일
    2012/01/27 15:1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우리를 위한 투표가 아니다 (1%를 위한 투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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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가 끝나면 >

 

아무도 선거때 약속한 공약들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선출한 사람들의 직접통제(상시적인 소환)를 받지 않는 한, 그를 선출해준 사람들을 위해  국가나 권력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엔 그들이 소속된 국회와 그들이 수호할 부르주아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아무도 당신들의 근심걱정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눈과 귀는 이미 새로운 인맥과,  당신들보다 잘 조직되고 이해관계가 명확한 집단의 로비스트들과, 화려한 보좌진들과, 전문적인 정책 자료들과, 법질서 체계와 복잡하고 미묘한 부르주아 의회제도 안에 갇히게 될테니까)

 

아무도 가난과 실업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자본주의는 이미 치명적인 불치병에 걸려서,  빚을 내어 가난을 해결할 수도, 이윤과 착취를 줄이는 대신 실업을 해결할 수도 없는,   부르주아 국가간.기업간.지역간의 물고 뜯기는 목숨을 건 경쟁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끊임없이 위기를 전가하면서 생명을 유지할수 밖에 없는,  모든것이 고장난  쇠락의 끝자락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즉,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도, 파괴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아무도 당신을 돌봐주지 않을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 더욱더 국가권력은 소외된 당신을  돌보아주기는 커녕 적대적으로 멀어져갈 것이다)

 

 

 


< 이번 선거에서는 >

 

우리손으로 아무도 뽑지 않는것이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든 뽑아준다면 우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에 뛰어드는 순간 아무도 이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자신들에 대한 지지가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지라 착각하는,  그 이름이 노동자정당이던 사회주의 정당이던 공산주의자 조직이던 혁명조직이던, 그들이 힘든 투쟁 대신  쉽게 대중을 전취할수있다고 생각하는 선거를 중요시하는 한...혁명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그토록 싫어하는 의회주의, 사민주의는 사실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짐으로써 약화되는게 아니라 투표율 자체가 낮아질수록(투표거부자가 많은수록)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투표가 나쁜것은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투표도 있다.  하지만 죽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그들의 지배방식인 의회주의를 공공히 해주는 투표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모두에게 독약이다."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선거에 대한 장미빛 환상이 아니라,  혁명의 현실성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해  진실되게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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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대신 투쟁을!    집권이 아닌 혁명을!   

 

노동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다수의 인민들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모든 제국주의, 부르주아 전쟁이 아닌  다수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한줌 안되는 부르주아계급을 그들이 독점한 물리력(군대, 경찰, 경비, 생산수단, 법적보호 등)으로부터 무장해제시키는 계급전쟁을!

 

 1%가 독점하던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 모두가 모든 곳에서 (작업장에서 거리에서 평의회에서 지역에서 가정에서)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 쇠퇴의 국면이 깊어지고 계급투쟁의 부활이 현실화 된 2012년 오늘,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행동을  직접 조직하는 운동,  노동자를 대리하지 않고 노동자계급을 역사와 혁명의 주체로 세우는 운동만이,  진정으로 노동자권력을 향한 노동해방을 위한  운동이다.
 

 

 

 

Occupied Barcelona: The Spanish Election Rejection

 바르셀로나 아큐파이 : 스페인 선거거부 흐름은  현재의 기권과  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혁명적 분출로 다시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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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의해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1/15 20:28
  • 수정일
    2012/01/15 20:3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의해 살해당한 노동자들을 추모하며,

혁명을 희망하며...

 

 

Rosa Luxemburg - then and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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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월15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가 사민당의 개머리판에 의해 살해당하다.


2003년 ~ 2007년 친서민 개혁을 표방한 노무현정권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살해당하다.


2008년 ~ 2012년 노골적인 부르주아 프렌들리를 표방하던 엠비정권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빈민들이 공개적으로 학살당하다.

 

그리고 2011년 말 살해당하고 학살당한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대표한다던 민노당과 노동조합 관료 다수파가, 독일의 사민당보다 못한  자신들을 살해한 세력과 손을잡다.

 

그리고 93년이 지난 오늘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과 노동자들의 죽음은 여전이 진행중이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그녀는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의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 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그녀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서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모자랐으며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가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가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이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의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이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의 일환이 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이다." (로테 파네 1919.1.14 )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는 만하임가의 은신해 있던 집에서 체포되어 에덴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 으로 리프크네히트을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상태의 그는 차속에 실려져 틸가르텐 호수근처에서 차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최후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 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칼과 로자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차지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사회민주당이 독일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되는 운명을 겪었던 것이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녀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중이며 현재진행형일 뿐이다.

 

 

 

 

 

[2012년 분노하는 겨울, 노동자시인이 격렬한 희망을 노래하다]

 

 

격렬한 희망

 

  임 성 용

 

"희망이란 어찌 이리 격렬한가!" - 아폴리네르

 

 

폭력의 힘에 맞서는 수단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의 전부가 오로지 비폭력적 희망으로 존재한다면

희망이라는 힘이여!

우리에게도 격렬한 희망을 다오

격렬을 뛰어넘어, 망각과 평화와 저항마저도 뛰어넘어

희망에게도 폭력적인 희망이 존재할 수 있게 해다오

희망의 이름이 적대성을 잃어버린 분노 대신에

제발, 장미꽃처럼 건네주는 사랑의 약속이 아니기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던 맹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발, 가차없이 버려진 노동의 식은 밥이 아니기를

얼음덩어리로 굳어진 배반의 시간이여!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희망의 밥통이여!

죽어도 썩지 않을 슬픔이 일천 오백 일을 노숙하는 동안

그럼에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이 겨울을 그만 용서하기를

그럼에도 이런 일들을 너무나 달게 받으라는 특권층이 아닌

이런 일이 내 일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동조자들에게

격렬한 희망의 눈동자가 한 번이라도 반짝 빛나게하기를

철장 속에 꽁꽁 갇혀버린 시여!

어눌하게 혼자 추방당한 시인이여!

이 겨울을 마치 '동지 섣달 꽃본듯이' 반겨맞으시라

희망을 빼앗고 절망조차 넘겨받은 힘없는 희망들이

이제 곧 격렬한 희망으로 길바닥 나뒹구는 돌맹이가 되리니...

 

 

 

 

 

분노하라, 이 겨울을

 

 -  임 성 용

 

겨울이다

혹한의 칼바람 살을 에는 겨울이다

이 겨울, 깡깡 얼어붙은 얼음나무들이 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떨고있는 사람들

뼛속까지 드러난 투명한 핏줄들이

저 높은 철탑과 크레인 위에

맵찬 바람 하늘끝 고공의 둥지 위에

아스팔트에, 보도블럭에, 펄럭이는 비닐막 찢어진 천막에

나뒹구는 침낭 속 싸늘한 숨결로 있다

뜬눈으로 역류하는 잠들지 못하는 잠, 꿈같은 생시로  있다

 

 

지금, 지상에서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인간과 자연이 지닌 모든 것들을 도륙해버리는

이 악마와도 같은 자본주의,

생산과 노동의 소중함은 단 한시라도 안식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었다

경제를 살리고 4대강도 살리고 무엇이든 살리고 살리고

이른바 죽은 좃도 살린다는 MB노믹스,

인간이 누려야할 최소한 삶의 가치를 송두리째 뽑아내고

포클레인과 덤프트럭과 재개발과 홀딱 벗고 드러누운 싹쓸이 개방과

그리고, 입만 열면 새빨갛게 덧칠하는 거짓말, 거짓말!

 

 

아, 우리는 하나님을 본 게 아니었다

궁상스런 궁민(窮民) 모두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악령의 힘을 보았다

악마에게는 사랑을 말할 수가 없다

악마에게는 우리가 지켜야할 가족과 피맺힌 노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악마와 그 악마의 집단에게 우리는, 우리들의 쉴 시간을 허락해달라고

어찌 하소연하고 매달릴 수 있겠는가

21세기 대명천지, 고도의 문명과 순도 높은 행복이 넘쳐나는 시대에

과연 이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과연 전세계 어느 선진국, 어느 미개한 국가에서

일년이면 수십명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하고

숯덩어리 불길로 타죽는 나라가 있단 말인가

 

 

여기, 섬뜩하게도 그런 나라가 있다

그것은 세계10대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오로지 서민들 걱정에 잠이 안 온다고 하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

돌이켜보라, 그는 중세 이후 너무나 야만적인 형벌이라고 해서 금지된

잔학무도한 화형제도를 버젓이 부활시켰다

갈 곳 없이 내쫒겨 망루에 올라간 용산철거민들을

하루 아침에 복날 개잡듯 불에 태워죽이지 않았던가

그들의 불에 구운 영혼이 구천을 떠돌아도

공장에서 쫒겨난 노동자들이 무려 열아홉 명이나 죽어나가도

이래도, 이래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통령!

이래도, 이래도 이 정권의 수명이 다하도록 유지시켜 주는 국민들!

이게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란 말이더냐

이게 진정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나 또다시 이런 더러운 국민이 되란 말이냐

 

 

아니라면, 이것만은 결단코 아니라고 한다면

노동자여, 전민중이여! 이 얼어붙은 겨울을 분노하라

얼음장밑 강물처럼 차디찬 분노를 흐르게 하라

탐욕에 대한, 배반에 대한, 절망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저항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로 분노의 도가니로 뛰어드는 일이다

보아라, 간악한 적들은 사람들을 1%와 99%로 나누었다

99%를 다시 집주인과 세입자로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만만한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었다

비정규직을 다시 용역, 파견, 시간제로 나누고 또 나누었다

적들의 끊임없는 분열 앞에, 노동자여!

한솥의 용광로에서 들끓는 노동의 쇳물결이여!

그 어떤 세월이 와도 우리는 결코 길들여지지 말자

노동계급의 유전자는 절대로 분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자본이여!

너희가 년간 70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해서

메머드급 경쟁력으로 아무리 우리를 묶으려고 해도

우리는 결코 묶일 수 없다

너희가 14조원의 돈다발을 투자해 세계적 글로벌기업으로

아무리 우리를 가두려고 해도 우리는 갇힐 수 없다

현대차 / 비정규직노동자 / 상경 투쟁 / 승리를 위하여/

절절하게 떨리는 생의 목숨으로 다짐하나니

승리의 날은 멀지 않았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2012. 1. 14.  현대차 양재사옥 앞, 투쟁문화제 연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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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강령으로 출발한 노혁추, 노동자계급의 무기로 거듭나야 한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2/01/02 20:10
  • 수정일
    2012/01/02 20:1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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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강령으로 출발한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노동자계급의 무기로 거듭나야 한다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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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29일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이하 노혁추)이 공식출범했다. 작지만 뜨거웠던 이날의 출범식이 역사적이었던 까닭은 자본주의의 끝 모를 위기 속에서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혁명’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공산주의 강령과 노동자혁명당 건설이라는 목표에 담아 공개적이고 공세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이며, 자본주의 체제를 일소하는 공산주의 노동자혁명을 통해서만 노동해방이 가능하다’는 공산주의 강령을 채택하며 출발한 노혁추는 앞으로 자본가계급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혁명 강령과 혁명당이라는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이다.

 

 

혁명 강령이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막다른 길목에서 마지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위기와 고통을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자본주의 근본모순은 공산주의혁명 이전에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은 한 억압받는 노동자계급의 저항과 투쟁의 물결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들이 자연적으로 혁명적인 투쟁과 노동자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바로 노동자 투쟁을 혁명의 길로 일관되게 이끌어갈 실천의 지침인 혁명 강령이 노동자계급 속으로 깊이 뿌리내릴 때에만 비로소 혁명을 향한 진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혁명 강령이란 노동자계급 투쟁의 궁극적 목표인 공산주의 혁명을 이론적으로 밝혀줄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자, 사회·경제·정치적 상황을 자본주의 물질적인 토대에 근거하여 철저하게 분석한 것이다. 또한 강령은 노동자 계급이 실현해야 할 공산주의라는 목표로부터 규정 받고, 이러한 목표의 일부를 이루는 전략전술들을 동시에 일관되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전술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나오는 실제 조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해야 하고, 강고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그 풍부함을 이끌어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지침이자, 노동자계급 전체의 실천의 결실인 것이다. 따라서 혁명 강령은 신비스런 기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변하지 않은 규칙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투쟁의 산물이며 투쟁의 무기다.

 

 

혁명 강령을 방어하는 혁명당의 역할

 

  그런데,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이 일상적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된 계급의식은 혁명적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지만, 투쟁의 시기가 지나면 다시 되돌아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에게는 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당이 필요하다. 따라서 혁명 강령 없는 혁명조직(당)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때 당은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 해야만 혁명적으로 유지될 수 있고,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항상 노동자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혁명당이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을 바꾸고 혁명으로 이끄는 일은 당이 제공하는 신비하고 마법 같은 묘책이나 환상에 있지 않다. 단지 혁명당의 명확한 정치적 지향이 명백하고 보편적인 용어로 노동자들의 실제 필요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러시아혁명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라.

 

“선원 코린은 그의 회고록에서, 스스로를 사회혁명당 당원들로 생각하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현실에서 볼셰비키의 강령을 방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어떻게 이러한 허약한 조직과 미미하게 배포된 당 출판물로, 볼셰비키의 생각과 슬로건이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는가?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 계급과 시대의 예리한 요구에 상응하는 이러한 슬로건들은 그들 자신을 향한 수천의 채널들을 만들어낸다.”

 

“붉게 달아오른 혁명적 매체는 사상의 뛰어난 전도체이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큰 소리로 읽혔고, 세세한 부분까지 읽혔다. 가장 중요한 기사는 외어졌고, 인용되고, 다시 복사 되었으며, 가능한 곳에선 어디든 다시 인쇄되었다. 볼셰비즘의 성공에 대한 일상의 설명은 대중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지는‘슬로건의 단순함’이란 표현으로 요약 설명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투쟁에서 그들의 요구와 필요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경험에 의해 인도되었다. 볼셰비즘은 대중의 독립적 경험에 대한 귀족주의적 냉소에 절대 오염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이러한 경험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것이 그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지점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 <<러시아혁명사>> 2권.

 

  러시아 혁명의 사례에서와 같이,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존재하는 요구와 필요를 명백하고 간단하게 표현했고, 투쟁의 경험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이고 역사적인 열망들을 감안하여 전체 운동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계급의 혁명적 경향들을 가속시킬 수 있었다. 계급의식을 바꾸고 혁명으로 향하게 하는 일, 이것은 신비스럽거나 불가사의한 이상이 아니다. 현재의 조직 상황이 허약하고 작더라도 명확한 정치적 지향이 있다면 즉시 가능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혁명적 이론과 노선을 실천의 무기로 만들어내야 할 의무가 혁명조직에게 있는 것이다.

 

 

혁명당 건설과 혁명 강령 채택의 의미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이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무기인 혁명당을 건설하기 위해, 아직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하지는 못하지만, 강고한 계급투쟁의 현실로부터 풍부함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현 상황에서 가장 원칙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이론적 성과들을 담아 강령초안을 마련하고 실천적 결의로 채택하면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혁명당과 혁명 강령 건설이 멀리 떨어져 있는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어야 함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건설할 혁명당은 반드시 전체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공산주의 강령을 방어하면서 건설되어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지배체제 하에서 당분간 노동자계급 내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공산주의 강령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이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우리가 건설하려는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은 단절되고 짧은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비록 혁명적 계급운동의 대대적인 출현 속에서 혁명당 건설을 전면화 시키면서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혁명당 건설을 위한 험난하면서도 거침없었던 고난과 각성의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 강령 건설과 강령에 입각한 정치활동을 분명한 목표로 삼았기에, 강령채택을 기반으로 혁명당 건설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 건설운동에서 질적인 전환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혁명적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가진 혁명세력들이 형성된 시점이 바로 즉각적인 혁명당 건설을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자 당 건설 운동의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인식했었기에, 각각의 정파와 써클 속에 갇혀 있던 정치적 지향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통일시키면서 강령에 입각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그리고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으로 이어지는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의 일부이자, 구체적 발현태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 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이때에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객관적 정세가 명확한 정치적 지향을 갖는 혁명당 건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에 부응하는 일이기도 했다.

 

 

노동자혁명당 강령의 원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노동자혁명당의 강령이 방어해야 할 혁명적 원칙들은 무엇인가? 이 원칙들은 노혁추가 채택한 강령 초안의 내용을 대부분 규정해 주고 있다.

 

  그것은 첫째,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체제인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모순을 밝혀내고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계급투쟁의 동학,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또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산력 발전을 위한 체제이기를 멈추고 이제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되는 시대, 즉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공산주의가  현실의 일정에 오르기 시작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끝 모를 위기의 본질과 자본주의 쇠퇴가 만들어 놓은 물질적 조건(생존권 위협과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 등)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의식과 조직의 상태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를 밝혀냄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 새롭게 창출되는 운동과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 다시 한 번 혁명적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계급의식을 자각케 하는 일이다.

 

  둘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노동자평의회로 조직된 전체로서의 노동자계급만이 모든 권력을 갖는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평의회 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에 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회의 모든 권력을 노동자계급이 집단적으로 행사하는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수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며, 노동자평의회가 모든 정치와 경제와 산업을 장악하고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에 걸쳐 모든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먼저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은 자본가 국가의 폭력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무장력과 무장봉기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자본가 국가를 타도하는 길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조직력과 무장력에 의존하며, 노동자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혁명정당을 건설해야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셋째,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라고 불리어 온 스탈린주의 체제들을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 억압 체제, 노동자혁명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단호히 지지하고, 그리고 혁명 패배의 교훈과 이로부터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의 조건을 찾아내고자 하는 후세대 혁명가들의 의무이자 과제인 것이다.

 

  넷째,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국제적이어야 한다. 세계혁명은 세계혁명당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세계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다시 규합하고 강령을 통일하여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을 반드시 건설해야 한다는, 세계혁명과 노동자국제주의에 대한 확고하고 구체적인 원칙을 강령에 담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 혁명당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세계혁명당 건설에 복무해야 하며, 세계적인 강령통일을 과제로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위의 원칙에 바탕을 둔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요구’를 실천 지침으로 제시하고 있다. 헤어날 수 없는 위기에 빠진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인 행동으로 혁명적으로 타도할 때만이 폐절시킬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12 항목의 이행요구는 바로 쇠퇴하는 반동적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계급이 현실에서 투쟁으로 즉각 쟁취해야 하는 요구들이자, 이 요구들을 전진시켜 권력 장악과 자본주의 철폐로 이어지게 하는 행동 강령이다.

 

 

결론

 

  일찍이 마르크스는 임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노동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른바 비인간적인, 자유가 없는, 소외된 노동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에서부터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 “삶에 대한 선언으로서의, 따라서 삶의 향유로서의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악이 존재하는 한 계속 살아남아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혁명적 가치를 계승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강령을 전면에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썩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고자 나섰다.

 

  노혁추 출범식에 축시를 낭송한 노동자시인의 시 구절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혁명이고, 용서할 수 없는 착취계급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다. 오랜 침체기를 지나오면서 고통과 절망이 지배했던 노동자계급의 현실 속에서 혁명의 가능성은 더 나은 세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부활하고, 세계적으로 새로운 계급투쟁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의 현실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과업이고, 노동자계급의 행동 중에 가장 의식적이고 총제적인 행동이므로 단순한 분노와 직접행동만으로는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다. 분노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좌절은 혁명에 대한 자신감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이 역사와 혁명의 주체로서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혁명의 현실성을 담은 것이 바로 공산주의 강령이다. 혁명의 성공은 노동자혁명당의 강령과 그것을 행동에 옮길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쇠락해가는 자본주의, 야만이냐 혁명이냐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는 혁명당 건설에 즉각 착수하자!
 

 

  노동자계급에겐 무기가 되고 자본가계급에겐 실질적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혁명 강령을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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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부채위기에 빠졌는가?

자본주의는 왜 부채위기에 빠졌는가?

 

 

세계경제가 심연에 빠진 듯 보인다. 대공황의 위기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1929년의 대공황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은행, 기초지방단체, 지방들, 심지어는 국가들도 오늘날 파산에 내몰리고 있다. 언론매체는 온통 “부채위기”에 대해 떠들어댄다.

 

부채 장벽에 부딪힌 자본주의

 

다음의 그래프는 1960년 이래 오늘까지 전 세계의 부채(1) 증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부채들은 전 세계 국민총생산 대비 백분율로 표현되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raph1

 

이 그래프를 통해, 1960년 부채비율은 전 세계 국민총생산의 100%에 해당했지만 2008년 이는 두 배 반으로(즉 250%)로 증가됨을 볼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1960년 이래 전 세계적으로 누적된 부채를 완전히 상환하자면 이는 전 세계에서 일 년 반 동안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총합에 상응한다. 

 

소위“ 선진국”의 이러한 극적인 경향은 또한 미국의 공채에 관한 다음의 그래프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raph 2

 

지난 몇 년 동안 거대한 공채더미가 생겨나서 그 증가가 거의 수직적으로 진행됨을 볼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부채 장벽”이라 부른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지금 이 부채 장벽에 맞부딪혔다.

 

부채,  자본주의 쇠퇴의 결과

 

세계경제가 이러한 부채 장벽을 향해 치닫고 있음은 분명했다. 왜 전 세계의 정부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극좌 극우를 막론하고, “자유방임” 지향 이건 “국가개입” 지향 이건을 막론하고 모두가 신용 조건들을 점점 더 느슨하게 만들었는가, 결손이 점점 더 증가하게 내버려두었는가, 모든 짓을 다하면서 국가와 기업과 가계의 부채더미가 지난 50년간 더 증대되도록 방치하였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정부들이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현재 빠져들고 있는 끔직한 침체가 이미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는 지난 몇 십 년 이래 신용의 도움으로 살고, 생존해 있다. 이 현상의 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맑스가 현대사회의 커다란 비밀이라고 나타냈던 것, 즉 잉여가치의 창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하게 이론적인 서술을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이 선천적 질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신체가 배설해낼 수 없는 많은 양의 독, 즉 과잉생산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시장이 수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한다.  왜? 설명을 위해 순전히 단순화된 예로서, 컨베이어 벨트 노동자나 pc작업을 하면서 매달 100만 원 정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생각해보자. 실상 그는 자신의 매달 임금총합에 해당하는 1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200만원 가치의 상품을 생산한다. 그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잉여노동)을 한 것이다. 즉, 잉여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가는 그 노동자로부터 훔친 (물론 그렇게 생산된 상품을 파는데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그 100만원으로 무엇을 하는가? 그 돈의 일부를 자본가는 자신의 사적인 소비에 충당한다. 이를 대략 25만원이라고 치자. 그 나머지 75만원을 그는 자본금으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한다, 대부분은 더 현대적인 새 기계를 구입하는 등등의 형태로. 그러나 왜 자본가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경제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에 기반 한 체제다. 모든 자본가는 자신들의 상품을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다른 자본가들에 비해서 더 싸게 팔아야 한다. 그래서 그 기업가는 생산비용, 즉 임금을 낮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부분의 미지불노동을 더 좋은 성능의 기계에 우선적으로 투자하는데,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사용해야 한다. 만약 그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현대화를 할 수 없고, 한편 이렇게 한 주의 깊고 활동적인 경쟁자는 결국 더 싸게 생산하고 시장을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모순이 특징적인데, 즉 노동자들이 사실상 생산한 것에 상응한 보상을 받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분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결코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모두를 합쳐도 생산된 그 모든 상품들을 소비할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품과잉을, 자신의 생산영역의 외부에 존재하는 아직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해 정복되지 않은 시장들에 팔아야 한다. 이는 자본주의 외부의 시장들이라 불린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면, 과잉생산위기가 초래된다. 이것이 바로 핵심에 있어서, '자본론'에서 맑스가 그리고 '자본축적론'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도달하게 된 결론들의 일부이다. 이를 좀 더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잉생산이론을  요점으로 요약해 보겠다.

 

  - 자본은 자신의 노동자들을 착취 한다 (달리 말해서,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실제 상품가치보다 더 낮다). 

 

   - 그렇게 해서 자본은 자신의 상품을 이윤과 함께, 임금과 잉여가치 그리고 생산수단의 비용들이 반영된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자본가들은 그 상품을 누구에게 팔 것인가? 이다.

 

   - 당연히 노동자들이 이 상품들을 구매한다...  그들에게 지불된 임금의 한도 내에서. 그래서 아직도 판매되어야할 일부분이 여분으로 남게 되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은 그 부분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오직 이 부분- 잉여가치- 만이 자본으로 하여금 이윤을 얻게 하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자본가들도 물론 마찬가지로 소비를 한다... 그리고 대부분 상당히 호화롭게 산다. 하지만 잉여노동을 통해 생산된 그 모든 상품을 그들 혼자서 다 구매할 수는 없다. 자본은 상품들을 스스로에게 판매함으로써는 이윤을 획득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왼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부유해질 수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 축적을 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은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 이외의 다른 구매자를 찾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반드시 자신의 체제의 외부에 있는 구매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에서 홍수를 이루는 판매될 수 없는 상품더미 위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과잉생산위기”가 초래된다.

 

이러한 “내적 모순”(내재된 과잉생산경향과 항상 외부의 시장을 찾아야한다는 강박)은 이 체제가 그 출현 이래 오늘날까지 갖고 있는 소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력을 이루는 뿌리들 중의 하나이다.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출현한 이래 자본주의는 주변에 놓인 모든 경제영역들과  통상을 해야만 했다 : 전 세계의 낡은 지배계급들과, 농부들과 수공업자들과. 18세기와 19세기에 자본주의 강대세력들은 세계의 정복을 놓고 경쟁에 돌입했다. 그들은 차츰차츰 지구를 식민지들로 분할했고, 그것을 서로 빼앗으며 진정한 제국을 건설했다. 가끔 두개의 세력들이 동일한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면 더 약한 자는 포기해야만 했고, 원주민에게 자신의 상품을 사도록 강제할 수 있을 지구의 다른 한 조각을 찾아보아야 했다. 이렇게 자연경제들은 변화되고 차츰 차츰 자본주의 속으로 강제 편입되었다. 식민지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그 모든 상품들을 수용하는데 점점 더 실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도 과잉생산이 발생했다.          

 

18세기와 19세기 자본의 이러한 활력, 과잉생산위기와 장기간의 복지와 확장시기의 반복 및 자본주의의 부단한 상승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서술되었다:

 

  “공황시기에는,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어불성설로 보였을 하나의 사회적 전염병이  돌발한다,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사회는 갑자기 순간적인 야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 기아와 전면적인 섬멸전이 사회로부터 모든 생활 수단들을 박탈해간 것처럼 보인다 ; 공업, 상업이 파괴된 듯이 보인다. 왜 그런가? 그것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 수단, 너무 많은 공업, 너무 많은 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공산당선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 칼 맑스 프리드리히엥겔스저작선집, 박종철 출판사, 1권 406쪽)

 

자본주의가 아직 확장기에 있었고 그 당시 아직도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수 있었기에, 매 위기마다 새로운 재회복기가 뒤따를 수 있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부단히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 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해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부르주아지의 상품의 싼 가격은, 부르주아지가 모든 만리장성을 쏘아 무너뜨리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강도 높은 증오심을 굴복시키는 중포(重砲)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 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 한다 ;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지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공산당선언, 같은 책, 403 - 404쪽) “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 맑스와 엥겔스는 주기적인 위기의 뒤편에 있는 무언가를, 항상 더 많은 번영을  만들어낼 것 같던 단순한 영원한 주기 그 이상의 무엇을 인식했다. 그들은 한층 더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더 심각한 모순들이 나타남을 그 속에서 보았다. “새로운 시장들의 정복”을 통해 부르주아지는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그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들을 감소시킨다.”(공산당선언, 같은 책, 406쪽).  또는: “그 공황들은 더욱더 빈번해지고 더욱더 격렬해지는데 그 까닭은 생산물들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확대된 시장들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것과 같은 정도로 세계시장은 축소되어 이용할 여지가 있는 새시장이 점점 더 적어진다.” (임금 노동과 자본, 1849년, 같은 책, 571쪽)”

 

그런데 단지 작고 둥글 뿐인 우리의 지구는. 20세기 초, 모든 지역들이 정복되었다, 자본주의 강대국가들이 지구를 분할해 가졌다. 그 이후 그들은 그 어떤 새로운 지역도 정복할 수 없었고, 오히려 경쟁자들로부터 지역들을 무력으로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아프리카나 아시아 또는 남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영향 및 권력지대의 방어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현안이었다. 그래서 제국주의적 경쟁자들로부터 무력으로 지역들을 빼앗으려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정 생존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주 소수의 식민지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대영제국의 선의에 의존적(독일 부르주아지에게는 견딜 수없는 상황) 이던 독일이 통상을 해나갈 수 있기 위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독일은 그 강제적 상황 때문에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 되고, 이 역할을 히틀러는 나중에 제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수출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400년간의 확장 후 자본주의는 쇠퇴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점에 대해 양대 세계대전의 악몽 그리고 1930년대의 대공황은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극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그 후 그때까지는 여전히 존재하던 자본주의 외부 시장들이 완전히 고갈되는 1950년대에도, 자본주의는 아직 치명적인 과잉생산위기에 빠져들지 않았다.

 

100년 이상 서서히 진행된 단말마적 고통 뒤에도 이 체제는 여전히 살아있다 : 발버둥 치면서, 비참한 상황에 놓여있긴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이 체제는 어떻게 생존해 있는가? 왜 이체제의 몸은 과잉생산이라는 독에 의해 아직도 완전히 마비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빚이라는 수단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는 점점 더 대대적으로 채무를 짐으로써 극적인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일종의 인위적인 시장이 창출될 수 있었다. 지난 40년은 침체와 신용 주입이라는 도움에 힘입은 재회복의 연속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적인 가계의 소비를 국가적인 도움으로 회복하려 시도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국가들 자체가 경쟁 국가들에 대한 경제 세계경쟁력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기간산업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은행들에 저금리로 돈을 대어주고 이 은행들은 다시 기업과 가계들에 돈을 대출함으로써...) 빚을 졌다. 신용의 수문들이 도처에서 활짝 열려 돈이 좔좔 흘렀고 야금야금 모든 경제영역들이 과잉채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빚을 갚기 위해 매일 새로운 빚을 얻어야만 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막다른 골목의 가장 낮은 지점에 빠져있다. “부채 장벽”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부채위기’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몰핀을 과다 투여하는것과 같다

 

비유를 하자면, 부채는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곧 죽을 사람에게 몰핀을 의미한다. 몰핀을 투여함으로써 병자의 위기는 잠시 경감된다. 병자는 안정을 얻고 달래질 수가 있다. 그러나 매일 의존성이 증가되고 점점 더 높은 용량의 몰핀이 투여된다. 처음에는 경감하는 작용을 했던 수단이 나중에는 해롭게 되고 결국에는 과다복용으로 작용하게 된다.

 

전 세계적인 부채더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쇠퇴의 한 증상이다. 세계경제는 1960년대 이래 신용에 매달려 있지만, 부채는 몸 도처에 스며들어있다. 몸의 모든 부위로 파고들어 그것을 장악해 버린다. 점점 더 많은 은행들, 회사들, 지방자치단체, 국가들이 지불불능이고, 또 그렇게 될 것이며 그들의 채무를 더 이상 상환할 수도 없고 이자를 더 이상 지불할 수도 없다.

 

2007년 여름, 제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 쇠퇴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점점 더 커다란 신용 투입에 의지하여 위기의 발전을 늦추려는 부르주아지의 능력은 끝이 났다. 이제 중간 중간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경제의 회복기도 없이 점점 더 많은 충격들이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위기에 대한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갑자기 무능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글에서 보여주려 시도했던 것처럼,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체제 전체가 파산상태이다. 

-Pawel  26/11/11

 

 

(1) 전 세계의 총부채, 즉. 모든 나라들의 가계, 기업 및 국가들의 부채를 의미한다.

 

<번역 :  국제공산주의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Why is capitalism drowning in debt?

 

The global economy seems to be on the brink of the abyss. The threat of a major depression, worse than that of 1929, looms ever larger. Banks, businesses, municipalities, regions and even states are staring bankruptcy in the face. And one thing the media don’t talk about any more is what they call the “debt crisis”.

 

When capitalism comes up against the wall of debt

 

The chart below shows the change in global debt from 1960 to present day. (This refers to total world debt, namely the debts of households, businesses and the States of all countries). This debt is expressed as a percentage of world GDP.

 

[Graph 1]

 

According to this chart, in 1960 the debt was equal to the world GDP (i.e. 100%). In 2008, it was 2.5 times greater (250%). In other words, a full repayment of the debts built up today would swallow up all the wealth produced in two and a half years by the global economy.

 

This change is dramatic in the so-called “developed countries” as shown in the following graph which represents the public debt of the United States.

 

[Graph 2]


In recent years, the accumulation of public debt is such that the curve on the previous graph, showing its change, is now vertical! This is what economists call the “wall of debt.” And it is this wall that capitalism has just crashed into.

 

Debt, a product of capitalism’s decline

 

It was easy to see that the world economy was going to hit this wall eventually; it was inevitable. So why have all the governments of the world, whether left or right, extreme left or extreme right, supposedly “liberal” or “statist”, only extended credit facilities, run bigger deficits, actively favoured increasing the debts of states, firms and households for over half a century? The answer is simple: they had no choice. If they had not done so, the terrible recession we are entering now would have begun in the 1960s. In truth, capitalism has been living, or rather surviving, on credit for decades. To understand the origin of this phenomenon we must penetrate what Marx called “the great secret of modern society: the production of surplus value”. For this we must make a small theoretical detour.

 

Capitalism has always carried within it a kind of congenital disease: it produces a toxin in abundance that its organism cannot eliminate: overproduction. It produces more commodities than the market can absorb. Why? Let’s take a simple example: a worker working on an assembly line or behind a computer and is paid £800 at the end of the month. In fact, he did not produce the equivalent of the £800, which he receives, but the value of £1600. He carried out unpaid work or, in other words, produced surplus value. What does the capitalist do with the £800 he has stolen from the worker (assuming he has managed to sell all the commodities)? He has allocated a part to personal consumption, say £150. The remaining £650, he reinvests in the capital of the company, most often in buying more modern machines, etc.. But why does the capitalist behave in this way? Because he is economically forced to do so. Capitalism is a competitive system and he must sell his products more cheaply than his neighbour who makes the same type of products. As a result, the employer must not only reduce his production costs, that is to say wages, but also increase the worker’s unpaid labour to re-invest primarily in more efficient machinery to increase productivity. If he does not, he cannot modernise, and, sooner or later his competitor, who in turn will do it, and will sell more cheaply, will conquer the market. The capitalist system is affected by a contradictory phenomenon: it does not pay workers the equivalent of what they have actually produced as work, and by forcing employers to give up consuming a large share of the profit thus extorted, the system produces more value than it can deliver. Neither the workers, nor the capitalists and workers combined can therefore absorb all the commodities produced. Therefore capitalism must sell the surplus commodities outside the sphere of its production to markets not yet conquered by capitalist relations of production, the so-called extra-capitalist markets. If this doesn’t succeed, there is a crisis of overproduction.

 

This is a summary in a few lines of some of the conclusions arrived at in the work of Karl Marx in Capital and Rosa Luxemburg in The Accumulation of Capital. To be even more succinct, here is a short summary of the theory of overproduction:

* Capital exploits its workers (i.e. their wages are less significant than the real value they create through their work).

 

* Capital can thus sell its commodities at a profit, at a price which, greater than the wage of the worker and the surplus value, will also include the depreciation of means of production. But the question is: to whom?

 

* Obviously, the workers buy commodities ... using their entire wages. That still leaves a lot for sale. Its value is equivalent to that of the unpaid labour. It alone has the magic power to generate a profit for capital.

 

* The capitalists also consume ... and they are also generally not too unhappy about doing so. But they cannot alone buy all the commodities bearing surplus value. Neither would it make any sense. Capital cannot buy its own commodities for profit from itself; it would be like taking money from its left pocket and putting it in its right pocket. No one is any better off that way, as the poor will testify.

 

* To accumulate and develop, capital must find buyers other than workers and capitalists. In other words, it is imperative to find markets outside its system, otherwise it is left with unsalable commodities on its hands that clog up the capitalist market; this is then the “crisis of overproduction”!

 

This “internal contradiction” (the natural tendency to overproduce and the necessity to constantly seek out external markets) is one of the roots of the incredible driving force of the system in the early stages of its existence. Since its birth in the 16th century, capitalism had to establish commercial links with all economic spheres that surrounded it: the old ruling classes, the farmers and artisans throughout the worl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e major capitalist powers were engaged in a race to conquer the world. They gradually divided the planet into colonies and created real empires. Occasionally, they found themselves coveting the same territory. The less powerful had to retreat and go and find another territory where they could force people to buy their commodities. Thus the outmoded economies were gradually transformed and integrated into capitalism. Not only the economies of the colonies become less and less capable of providing markets for commodities from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but they, in turn, generate the same overproduction.

 

This dynamic of capital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this alternation of crises of overproduction and long periods of prosperity and expansion and the inexorable progression of capitalism towards its decline, was described masterfully by Marx and Engels in The Communist Manifesto:


 “In these crises, there breaks out an epidemic that, in all earlier epochs, would have seemed an absurdity, the epidemic of overproduction. Society suddenly finds itself put back into a state of momentary barbarism; it appears as if a famine, a universal war of devastation had cut off the supply of every means of subsistence; industry and commerce seem to be destroyed; and why? Because there is too much civilisation, too much means of subsistence, too much industry, too much commerce.”

 

At this time, because capitalism was still expanding and could still conquer new territories, each crisis led subsequently to a new period of prosperity. “The need of a constantly expanding market for its products chases the bourgeoisie over the whole surface of the globe. It must nestle everywhere, settle everywhere, establishes connections everywhere ... The cheap prices of its commodities are the heavy artillery with which it batters down all Chinese walls, with which it forces the barbarians’ intensively obstinate hatred of foreigners to capitulate. It compels all nations, on pain of extinction, to adopt the bourgeois mode of production; it compels them to introduce what is calls civilisation into their midst, i.e., to become bourgeois themselves. In one word, it creates a world after its own image ...”(ibid)

 

But already at that time, Marx and Engels saw in these periodic crises something more than an endless cycle that always gave way to prosperity. They saw the expression! of profound contradictions that were undermining capitalism. By “the conquest of new markets”, the bourgeoisie is “paving the way for more extensive and more destructive crises, and by diminishing the means by which crises are prevented.”(ibid) Or: “as the mass of products and consequently the need for extended markets, grows, the world market becomes more and more contracted; fewer and fewer new markets remain available for exploitation, since every preceding crisis has subjected to world trade a market hitherto unconquered or only superficially exploited” (Wage Labour and Capital)

 

But our planet is a small round ball. By the early 20th century, all lands were conquered and the great historic nations of capitalism had divided up the globe. From now on, there is no question of making new discoveries but only seizing the areas dominated by competing nations by armed force. There is no longer a race in Africa, Asia or America, but only a ruthless war to defend their areas of influence and capturing, by military force, those of their imperialist rivals. It is a genuine issue of survival for capitalist nations. So it’s not by chance that Germany, having only very few colonies and being dependent on the goodwill of the British Empire to trade in its lands (a dependency unacceptable for a national bourgeoisie with global ambitions), started the First World War in 1914. Germany appeared to be the most aggressive because of the necessity, made explicit later on by Hitler in the march towards World War II, to “Export or die”. From this point, capitalism, after four centuries of expansion, became a decadent system. The horror of two world wars and the Great Depression of the 1930s would be dramatic and irrefutable proof of this. Yet even after exhausting the extra-capitalist markets that still existed in the 1950s, capitalism had still not fallen into a mortal crisis of overproduction. After more than one hundred years of a slow death, this system is still standing: staggering, ailing, but still standing. How does it survive? Why is this organism not yet totally paralysed by the toxin of overproduction? This is where the resort to debt comes into play. The world economy has managed to avoid a shattering collapse by using more and more massive amounts of debt. It has thus created an artificial market. The last forty years can be summed up as a series of recessions and recoveries financed by doses of credit. And it’s not only there to support the consumption of households through state spending ... No, nation states are also indebted to artificially maintain the competitiveness of their economies with other nations (by directly funding infra-structural investment, by lending to banks at rates as low as possible so they in turn can lend to businesses and households...). The gates of credit having been opened wide, money flowed freely and, little by little, all sectors of the economy ended up in a classic situation of over-indebtedness: every day more and more new debt had to be issued... to repay yesterday’s debts. This dynamic led inevitably to an impasse. Global capitalism is rooted in this impasse, face to face with the “wall of debt.”

 

The ‘debt crisis’ is to capitalism what an overdose of morphine is to the dying

 

By analogy, debt is to capitalism what morphine is to a fatal illness. By resorting to it, the crisis is temporarily overcome, the sufferer is calmed and soothed. But bit by bit, dependency on daily doses increases. The product, initially a saviour, starts to becomes harmful ... up until the overdose!


World debt is a symptom of the historical decline of capitalism. The world economy has survived on life supporting credit since the 1960s, but now the debts are all over the body, they saturate the least organ, the least cell of the system. More and more banks, businesses, municipalities, and states are and will become insolvent, unable to make repayments on their loans.


Summer of 2007 opened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the capitalist decadence that began in 1914 with the First World War. The ability of the bourgeoisie to slow the development of the crisis by resorting to more and more massive credit has ended. Now, the tremors are going to follow one after the other without any respite in between and no real recovery. The bourgeoisie will not find a real and lasting solution to this crisis, not because it will suddenly become incompetent but because it is a problem that has no solution. The crisis of capitalism cannot be solved by capitalism. For, as we have just tried to show, the problem is capitalism, the capitalist system as a whole. And today this system is bankrupt.


Pawel 2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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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 분류
    잡기장
  • 등록일
    2011/12/21 20:48
  • 수정일
    2011/12/21 20:4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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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3>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 오세철

 

 

  이 연재 글을 꿰뚫는 문제의식은 세계혁명의 실패가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의 불충분한 축적뿐만 아니라 혁명지도자들과 혁명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적 조건의 불충분성에도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계급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객관적 조건이 자본주의의 가치법칙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억압의 역사적 구조로서의 계급무의식에도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연재1>은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총체적 점검을 통하여 압축적으로 정리하였고, <연재2>는 독일 파시즘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 대중의 억압 구조와 그 결과물로서 반동적 파시즘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연재3>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혁명인 스탈린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나는 「붉은 파시즘」으로 부르기로 한다. <연재4>는 마오주의를, <연재5>는 제3세계 민중주의를, <연재6>은 김일성주의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연재7>이후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반혁명 구조를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물질적 필요성으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반혁명으로 전복된 역사를 올바로 규명하지 않고서는 세계혁명의 미래는 암담하기 때문이다.

 

 

1. 볼셰비즘과 계급의식, 그리고 붉은 파시즘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는 데는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 내에 큰 이견이 없다. 물론 평의회공산주의 내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기는 하다. 소련은 무엇이었는가의 객관적 분석에서는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이나 관료적 집산주의론보다는 우세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로의 반혁명이 왜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의 연속성을 파헤치는 논거는 적다. 이는 뜨거운 감자, 아킬레스 힘줄이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1년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록한 빅토르 세르쥬는 “모든 스탈린주의 세균은 처음부터 볼셰비즘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기반이 약해지는 과정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소비에트 정부의 생존을 위해 헌신했고, 그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계속 옹호했다. 그것이 러시아 노동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이룬 수천 명의 볼셰비키 핵심활동가들이 보여준 맑스주의 시각과 혁명적 단호함이라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붉은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토 륄레가 나치를 「갈색 파시즘」이라 칭한 것을 대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개념은 라이히도 사용했고 특히 스탈린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의 심리구조 문제가 아니라 혁명 이후 몇 년 사이의 역사적 과정에서 반혁명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였다. 보기를 들면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당-국가의 폭력, 제국주의 국가와의 조약(라팔로 조약), 사적자본과 해외자본에의 러시아 경제 개방, 적색 테러 등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반혁명적 사건을 언급하기 전에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1917년 11월 10일 신분제 폐지, 12월 11일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12월 16일 군대 계급 폐지, 12월 17일 1,886개 전략회사 몰수, 12월 18일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실시, 12월 19일 낙태법 제정, 12월 21일 러시아어 철자 간소화, 12월 29일 이자 지급과 채권 배당 지급 중단, 12월 31일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1월 3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법적, 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계급은 소비에트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였는가? 제국주의에의 포위, 독일 혁명의 실패 같은 외적 조건이나 내전과 같은 내부적 조건 때문이었다는 불가피론이 아닌 노동계급의 소외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성찰이 있었는가에 대해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자들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무엘 파버는 레닌과 볼셰비키당 주류 누구도 사회주의 성취전략을 위해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그리고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와 그들 각각의 이론 정립에 대해 시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레닌의 유사 쟈코뱅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혼란과 경제의 관료화를 피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자발적 주도권에 대한 초기의 강조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레닌과 대다수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본질과 그 가능한 내적 모순과 문제에 대해 고도의 도식적 견해를 가졌다고 평가하면서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국가에 반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어하는 독립 노조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노동이 모든 시민의 사회적 의무라는 초기 개념과는 반대로 강제 노동이 벌어졌다. 이를 볼셰비키 좌파인 오신스키는 생산성 증진에 대해 레닌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레닌이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를 혼동하는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면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는 무엇이었나? 당과 노동계급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대외적 군사투쟁, 사유재산 몰수운동 및 과거 유산자층에 대한 계급적인 배척운동에서는 일치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해석과 권력 집중, 노동 군사화 정책, 강제 노동, 임금차별, 식량 문제, 지역 간의 차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호불신과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헝가리 역사학자 자무엘리(Szamuely)는 전시공산주의의 대원칙이 전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국유화, 노동의 의무, 중앙집권적 생산관계, 계급간의 평등 분배의 원칙, 화폐와 시장경제의 소멸 등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국유화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피상적인 결과, 즉 소유와 분배 면에서의 불평등을 형식적으로 없앴으나 생산에서의 경쟁과 물신숭배의 원리를 고수했다고 보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온건하게 동조하거나 중립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비율이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비율보다 훨씬 컸다. 1917년 36.4%에서 1920년 4월 3차 노동자대회 때 84%로 늘어났다.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자율성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영합하는 당 간부들은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거나 할당된 물자의 징발이나 생산에 관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몰두하는 요원들로서 매우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생산 개입을 옹호하거나 노조의 선거제를 주장하던 과거의 지하운동가나 투사들처럼 저항적이거나 반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강제노동은 내전에서 불리한 시기에 실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가 확실시 되는 순간에 더욱 강화되었다. 볼셰비키의 투쟁 대상이 반혁명 세력이 아니라 노동이탈자나 소극적인 노동대중에게로 옮겨졌다. 노동 군사화 정책이 시행된 후 노동자들 사이에 혁명의식은 더욱 퇴조하고 당원수도 격감하였다. 이에 볼셰비키 정부는 불안해져서 인위적으로 백군의 위협을 더욱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사기업의 몰수와 강제적 국유화, 일반 노동자・농민층의 희생, 배급제와 교환경제의 혼용, ‘노동자 통제’의 억압과 중앙집권적 국가관리의 채택, 곡물의 강제적 징수와 차등 임금제의 시행, 그리고 기계화와 기술자 우대 등 복합적 양상을 띠었다. 이 때문에 말레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들은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산에 근거한 억압적인 국가주의적 정책이라고 보았다.
 

  혁명 이후 격동적 이행기에서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은 점점 배제되었고 대상화되었으며, 생산과 권력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소멸되어 갔다. 노동자 반대파의 쉴라쁘니고프는 1919년 당 계획의 기초에 따라 ‘노동자 통제’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자 반대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자들이다. 노동조합내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혁명의 선봉대로서 아직도 소비에트 국가 기구 속으로 통합되지 않은 노동자들이다. 또 이들은 아직도 인민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의식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다. ・・・ 당은 예전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지도하고 반성하였으나 이제는 대중을 불신하고 있으며, 복종과 권위, 차별의식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의식에 젖어있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기술자들을 기용함으로써 경영과 조직 면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차단하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적 실천이 아니다.”


  소비에트 권력의 두 가지 기반은 노동자의 능동적이고 대대적인 참여와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노동자 대중이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4월까지가 소비에트가 부상하는 시기였다면, 1918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소비에트 권력이 위기를 맞고 쇠퇴하는 시기였다. 1918년 5월 소비에트 정책에 대한 비판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1918년 공장위원회가 사라졌으며 소비에트 조직의 끊임없는 재생도 자취를 감추었다. 1918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기반한 799개 주요 기업 중 265개가 사라지고 노동자 절반의 일자리가 없어졌으며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식량을 구하고자 도시에서 농촌으로 빠져 나갔다.
 

  물론 노동자평의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활력소는 세계혁명이었지만 내전과 기근, 그리고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볼셰비키의 노동 정책이 더욱 숨통을 틀어막았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영・불・미・일 등 제국주의 열강과 동맹을 맺은 백군은 러시아를 초토화시키면서 6백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소비에트를 억압하면서 그 구성원을 학살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적군과 첵카가 창설되었으나 소비에트 집행위의 토론 없이 결정되었다. 적군은 지원제였고 주로 노동자였기 때문에 노동자평의회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적군과 첵카가 소비에트를 통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따라서 1921년 초 크론슈타트 반란은 광범위하게 벌어진 노동자들의 파업만큼 중요하다. 페트로그라드 20마일 서쪽에 있는 크론슈타트는 5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반은 시민, 반은 군인이었다. 당 고위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지역부대는 공산주의자가 다수였고 크론슈타트 강령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권력이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 가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들 강령의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의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 요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와 모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선언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2. 노조와 농민조직에게 집회의 자유를 허용할 것
 

  7. 지역별로 공산주의적 첵카를 설치하는 규정을 취소할 것
 

  9.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식량 배급권을 줄 것
 

  혁명과 혁명 후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 대상화, 그리고 그들의 소외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이는 적색 테러와 관련된 문제이다. 백색 테러는 죄악시하면서 적색 테러는 정당화되는가? 그것은 부르주아지나 반혁명 세력에 한정된 것인가, 노동자계급에도 해당되는 것인가? 이 문제 역시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만 문제되는가? 소련 붕괴 이후 비공개 문서고가 열리면서 수많은 문건들이 연구 자료가 되고 그것에 근거한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중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은『공산주의 흑서: 범죄, 테러, 억압』(1999년)이다.
 

  서론에서 이 책은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사망 인원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소련(2천만), 중국(6천5백만), 베트남(100만), 북한(200만), 동유럽(110만), 라틴아메리카(150만), 아프리카(170만), 아프가니스탄(150만) 등이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① 1918-1922년: 재판 없이 수만 명의 포로와 죄수의 처형, ② 1922년의 기근: 5백만 명의 죽음, ③ 1920년: 코사크족의 몰살과 추방, ④ 1918-1930년: 수용소에서 9만 명 살해, ⑤ 1937-38년: 대숙청에서 69만 명 처형, ⑥ 1930-32년: 쿨락 2백만 명 추방, ⑦ 1932-33년: 인위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400만 명과 기타 2백만 명의 죽음 ⑧ 1939-41년과 1944-45년: 수만 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몰도비아인, 베사라비아인의 추방, ⑨ 1941년: 볼가 지역 독일인 추방, ⑩ 1943년: 타타르인의 대대적 추방, ⑪ 1944년: 체첸인의 대대적 추방, ⑫ 1944년: 잉구시(Ingush) (러시아 지방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수니파의 민족) 대대적 추방 등이다.
 

  소련을 분석한 Werth는 볼셰비키 당과 모든 자발적 사회구조(공장위원회, 노조, 사회주의 정당, 주민조직, 적위대, 소비에트)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으며 몇 주 사이에 이러한 자발적 사회조직은 볼셰비키 당에 종속되었거나 억압당했다고 보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소비에트 위에 있는 볼셰비키 당의 권력을 숨기는 용어였으며, “노동자 통제”는 기업과 작업장 위에 있는 노동자의 이름이 국가통제의 목적으로 옆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몇 주 사이에 볼셰비키는 1917년 동안 노동자로부터 조심스럽게 형성시켜온 신뢰를 대부분 상실했다고 평가한다.


  1918년 9월 3일 공식적인 적색 테러 시기가 시작되기 전인 8월에 볼셰비키 지도자들, 특히 레닌과 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어떠한 봉기 기도도 막기 위해 “예비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하면서 지역 첵카와 당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전보를 보냈다. 이러한 조치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부르주아지에게 부과된 예외적 세금에 대해 만든 리스트에 근거하여 부르주아지 중에서 볼모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에 모든 볼모와 혐의자를 체포하고 감금하는 것이다” 등이 있다. 그리고 8월 23일 제르진스키의 협력자인 마틴 라트시스는 “내전에는 성문법이 없다 ・・・내전에서는 적에 대해 법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투쟁이다. 당신이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을 것이다. 죽기 싫으면 죽여라”라고 『이즈베스티야』(Izvestiya)지에 썼다. 노동수용소와 집단수용소에 수감된 인원은 1919년 5월 1만 6천명에서 1921년 9월 7만 명까지 늘었다.
 

  스탈린 체제가 들어선 뒤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추방되었고, 6백만이 굶어죽었다. 스탈린 시대 테러의 결정적 단계는 농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1929년 12월 27일 스탈린은 “모든 쿨락 경향의 박멸과 계급으로서의 쿨락의 제거”였다. 1936년-38년 사이의 대테러 시기는 이른바 ‘예조프 치하’(The Reign of Ezhov) 시기로서 억압이 당 서기국으로부터, 거리에서 체포된 단순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소련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수십 년간 대테러의 비극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서방은 세 번의 공개재판 (1936년 8월, 1937년 1월, 1938년 3월)만 알고 있었다. 레닌의 동지들이었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크레틴스키, 리코프, 피야타코프, 라데크, 부하린이 트로츠키와 함께 소련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테러 중심부를 조직한 것을 인정하고 숙청됨으로써 스탈린주의 테미도르 관료층 대 혁명적 약속에 충실했던 레닌주의 고참 사이의 권력투쟁이 막을 내린다. 지금 접근 가능한 모든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이 예조프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책은 소련에서의 폭력과 억압의 싸이클을 네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1917년부터 1922년 말까지로 레닌이 권력 장악과 함께 폭력과 억압을 내전의 필요한 부분으로 본 시기이다. 자발적 사회폭력이 공식적 구조를 가지면서 농민에 대한 정교한 공격이 1918년 봄에 일어났는데 이는 적군과 백군 사이의 군사적 충돌보다 더욱 수십 년의 테러의 모델이 되었다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앞으로 올 사건의 명백한 신호였고 이 첫 번째 싸이클은 백군의 패배나 NEP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농민 저항을 진압한 1922년 기근으로 끝났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의 짧은 유지기를 지나 두 번째 싸이클에서는 농민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집단적 공격이 일어나고 폭력은 일상화된다. 집산화는 농민에 대한 군사적, 봉건적 착취이며 1933년 대기근에서는 스탈린 체제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다.
 

  대테러(1936-38년)시기인 세 번째 싸이클에서는 스탈린 시대 사형선고의 85% 이상이 이루어졌고 1941년 이후 네 번째 싸이클에서는 새로운 지역에서의 소비에트화를 통한 “위대한 애국전쟁”의 시기로 조선인 추방 같은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난다.
 맑스가 ‘역사에서의 폭력의 역할’을 강조하고 방어했지만,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체계적 계획보다는 일반적 전제로서 보았다. 물론 맑스의 저작에도 모호함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2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은 파리 코뮨과 유혈억압의 결과에 대한 재앙적 경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 반대하는 제1차 인터내셔널의 논쟁 동안 맑스가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사회주의와 노동자운동 내의 테러적 폭력에 대한 논쟁은 거의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1872년 맑스는 혁명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서 평화적 형태를 띨 것이라고 바랐다. 이러한 견해는 1895년 출간된 맑스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2판에 엥겔스가 쓴「서문」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유럽의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러시아의 혁명적 토지 운동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동안 이러한 혁명 운동의 한 부분이 폭력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운동에서 폭력의 가장 급진적인 주창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혁명가의 모델로 삼은 세르게이 네카에프였다. 1887년 3월 1일 알렉산더 3세 암살에 실패했지만 체포된 사람 가운데 레닌의 형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있었다. 체제에 대한 레닌의 증오는 당 서기국의 인지 없이 1918년 로마노프 일가의 살해를 결정하고 조직하게 하는 데 깊은 뿌리가 되었다. 이는 1789년부터 1871년까지의 서구의 혁명적 전통이 제공한 초기의 폭력의 정당화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러시아 볼셰비즘의 특성을 만든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대중봉기라는 민중주의적 전략과 위로부터의 엘리트 테러와의 결합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러한 결합으로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킨 구체적 배경을 쿠르토아는 『공산주의 흑서』의 결론에서 몇 가지 덧붙이고 있다.
 

  볼셰비키 지도부 누구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는 망명 중이었고 스탈린, 카메네프는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관료제 내에서 일하거나 대중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대부분 군대 경험이 없었고 전쟁을 보거나 전사자를 본 적도 없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그들이 안 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말의 전쟁이었다. 그들의 것은 죽음, 학살, 인간 재앙에 대한 순수한 추상적 전망이었다.
  또한 20세기 초 러시아 경제는 엄청난 성장의 시기였고, 사회는 점차 자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의한 민중과 생산수단에 부과된 예외적인 제약은 정치체제에 제약을 주어 상황을 헤쳐 나갈 에너지와 전망을 소진시켰다. 1917년 2월 혁명은 이러한 재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고전적 경로, 즉 노동자, 농민의 사회혁명과 함께하는 제헌의회의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길이었다.
 

  세계대전과 러시아에서의 폭력 전통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의 맥락을 이해하게 하지만 볼셰비키의 극단적 폭력 경향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 폭력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2월 혁명과 비교하면 처음부터 분명했고, 이는 당과 레닌에 의해 부과되었다.
 

  1914년 전의 맑스주의가 1917년 이후 레닌주의로 변화되었다. 레닌은 맑스주의 원칙인 계급투쟁, 역사에서 폭력의 필요성,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군사 규율의 지하조직과 연관된 직업혁명가로 구성된 혁명당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이 목적을 위해 독일, 영국,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주의 조직과 다른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켰다.
 

  제11차 당 대회에서 쉴리야프니코프는 직접 레닌에게 말한다. “일리치는 어제 맑스주의 의미에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도록 하는 동지에게 축하하게 해주게.”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상징 조작은 유럽과 제3세계뿐만 아니라 중국, 쿠바에서 공통적이다.
 

  1937-38년의 대숙청으로 나타난 광범위한 테러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전체로서의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당 기구까지 목표로 하는 제거 대상을 발견한다. 히틀러는 억압에서 개인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고, 히믈러 같은 부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반대로 스탈린은 스스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7-38년 사이 14개월 동안 180만 명이 42회에 걸친 거대하고 세세한 준비된 작전으로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69만 명이 살해되었다. “계급투쟁” 대신 “계급전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사실은 특정 반대자가 적 계급이 아니라 전체 사회였다. 스탈린 아래에서 처형자는 희생자가 되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처형한 부하린은 공개적으로 “그들이 개처럼 총살되어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개처럼 총살되었다.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흑서』의 저자들은 프랑스의 연구자들이고, 특히 소련 연구의 경우 스탈린 시대보다는 러시아 혁명 후 5년 정도의 시기(내전) 동안의 폭력과 테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스탈린주의보다는 그 원형으로서의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의 본질과 맑스주의에 대비되는 러시아 혁명운동의 특성에 착목하고 있다. 이 연구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의 반응과 평가는 폭넓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좌익공산주의 계열의『국제주의자 전망』이 내놓은 간략한 문제의식을 전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을 지적하는데, 첫째는 볼셰비키를 위한 모델로서 프랑스 혁명의 역할이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쟈코뱅(당통, 로베스피에르)이 1917년 볼셰비키의 모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보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쟈코뱅을 노동계급의 모델로 보는 것을 거부한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소렐을 언급하고 있다. 소렐은 쟈코뱅과 테러가 구체제의 가장 순수한 전통이라고 보았고, 폭력의 본질, 그것의 계급적 기원, 그리고 국가와 법체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했다고 본다. 두 번째는 볼셰비키 당내의 프락치키(Praktiki)의 역할로서 그들에게는 맑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권력만이 문제였고, 첵카의 지도부 같은 인자는 맑스주의 실천가로서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내전기간 동안 혁명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폭력에 레닌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4월 테제에 보인 레닌의 입장과는 다르며 레닌의 지지와 주도권 없이 프락치키가 책카에서 권력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세 번째는 당 지도자로서의 레닌의 역할인데, 여기서 볼셰비키가 규정한 적 개념에 혁명가, 굶는 농민, 파업하는 노동자까지 포함시키는 문제를 제기한다. 굶는 농민은 쿨락이 되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기생충이 되며, 무정부주의자와 사회혁명당 좌파는 벌레가 된다면, 이미 10월 혁명의 자궁 속에 붉은 파시즘이 자라고 있지 않았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련 연구자인 Werth가 붉은 파시즘에로의 길이 스탈린 집권 10년 전인가, 크론슈타트 반란 전인가, NEP 전인가, 라팔로 조약 전인가를 따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2. 대중, 지도자, 그리고 붉은 파시즘
 

 

   <연재1>에서 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결합이 혁명 이론의 정립과 실천에 열쇠임을 밝힌바 있다. 왜 정신분석이 사회주의에서만 미래를 가지는가?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부르주아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생활과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정책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복지”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는 지성과 성생활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바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히는 말한다.


 “소련에서 정신분석은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소련 지도자들이 성혁명과 문화혁명이 처해있는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어쨌든 아직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가 들은 것처럼 스탈린이 경제 계획과는 반대로 소련에서 인간 계획이 성공적이라고 묘사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모든 자료들과 발견들에 따르면 성적 재구조화가 없는 탓이라고 해야 한다”


  정신분석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지녔던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레닌과 클라라 체트킨 사이의 대담을 인용하는데 이 대담에서 레닌은 노동자 모임과 청년집단에서 일어나는 성에 대한 논의와 논쟁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라이히는 레닌의 관점에 동의하는데 이는 ‘성 논의’가 일반적으로 성 활동에 대한 대체물, 가장 흔한 지적 자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이 클라라 제트킨과 나눈 같은 대담 과정에서 우리가 두 번째 지적을 따온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즉각 이해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금욕주의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삶의 즐거움, 삶의 힘, 만족스러운 애정 생활은 공산주의를 실현하도록 도울 것이다’. 공산주의가 성생활의 즐거움을 가져올 수 있다면 확실히 이것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라이히는 1917년 이후 소련의 대중심리학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적 격변으로부터 출발한 문화가 타도된 차르 치하의 권위주의적 사회질서와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가 인간의 성격구조에 재생산될 것인가? 새로운 ‘소련인’은 자유롭고 권위주의적이 아니며 합리적이며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구조 속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된 자유는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지도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혹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국가가 소멸되는 것만큼 그로부터 자유로운 조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맑스가 가정하였듯이 그 조직에서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기본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소련에서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자유로운 자기 관리적 공동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세대의 조직’은 창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발생해야 하며, 이와 같은 과도기 상태에서 발전과 성숙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1930년과 1934년 사이에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국가 소멸’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시사해주는 구체적이며, 눈에 보이고, 길잡이가 될 만한 징후는 무엇이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는 소멸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목표를 위한 전제조건은 자연스러운 일-조직, 일-민주주의를 위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전제조건에 관한 지식인데,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생물학적 전제조건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사회적 전제조건은 자본주의적 사기업과 임금노동자 대중만이 존재했던 시기(1840년부터 1920년까지)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정치지향적인 중간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자본주의의 발전이 없었으며 국가사회주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반동적으로 함께 뭉친 대중들도 없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거짓된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인민들이 생산, 생산물의 분배, 사회적 규제, 인구 증가, 교육, 성 등을 활기차게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의회가 아닌 소비에트가 무엇을 어떻게 대표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형식주의적 국가행정조직으로 전락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달려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제거하는 기능에 충실한지의 여부, 둘째, 소비에트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협력자이며 집행기관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감독자로서 그리고 사회적 리더십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전환시키는 제도로서 스스로를 간주하는지의 여부, 셋째, 소비에트가 대중들의 대표자인 이상, 대중들 각 개개인이 소비에트의 기능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운용 중인 국가기구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수해야할 자신의 과업에 들어맞게 되는지의 여부이다.
 

  그런데 레닌은 ‘관료주의의 폐지’가 왜 유토피아적 열망이 아닌지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관료주의가 없는 또한 위로부터의 리더쉽이 없는 생활이 가능하고 필요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 과업인지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파시즘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관리’, ‘자치’, ‘비권위주의적 훈련’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은 단지 경멸에 가득한 너그러운 웃음만을 자아낼 뿐이며, 무정부주의자의 꿈이며 유토피아적 공상일 뿐이다. 이는 국가의 폐지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은 강화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지지하게 만든다. 1937년 이후의 소비에트 문헌들을 보면 다른 모든 노력보다 우선성을 갖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 권력의 약화가 아닌 강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헌들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가 궁극적으로 자치행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언급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질서’는 고안해내거나 생각해내거나 혹은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활에 대한 실천적이며 이론적인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유기적으로 생성된다.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휘어잡으려는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적 사상을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단지 시끄럽고 해로운 야단법석만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련의 붉은 파시즘은 스탈린 시대의 애국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몇 가지 보기를 들자.


 “우리 모두의 사랑, 우리의 충성심, 우리의 힘, 우리의 심장, 우리의 영웅심, 우리의 생활 –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모두 가져가십시오. 오 위대한 스탈린이여,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오 위대한 조국의 지도자시여, 당신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공기 속에서, 땅 밑에서, 물위에서, 성층권에서도 걸을 수 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줄 첫 단어는 바로 ‘스탈린’이 될 것입니다.”(레닌그라드 레드타임즈, 1935, 2월 4일 기사)


 “소비에트 애국심 – 끝없는 사랑의 불타오르는 감정이며, 조국에 대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조국의 운명과 조국 방위에 대한 심원한 책임감인 – 은 우리 인민의 깊은 심원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온다.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탄생하고 키워진 소비에트 러시아여! (프라우다, 1935, 3월 19일자)


   이에 대해 라이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정치의 정서적 전염병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조국에 대한 자연스런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에트 애국심’은 혁명적 열정이 사라져 버릴 것을 예상하여 나중에 「보오탄(Wotan) 애국심」(고대 독일 신화의 최고신,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을 말함. 파시스트 애국심)에 대한 투쟁을 위해 필요한 준비였으리라.”


  국가의 소멸 그리고 국가의 기능을 인간에게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은 다음과 같은 국가주의를 표현한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콜호즈와 수많은 강철 같은
  선동자를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다
  태평양에서 민스트까지, 아프리카에서 크리마아까지
  비옥한 땅이 트랙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가 너희들을 부른다.
  앞으로! 앞으로 모두 함께!
  대오를 갖추어 나가자!


  스타하노프주의로의 퇴보는 소련에서 인간의 성격구조 형성에 비참한 영향을 미쳤다. 지나치게 야심적이며 무지막지한 사람들만이 경쟁적인 성과급제도 아래에서 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아주 뒤떨어지거나 탈락하게 된다. 이러한 격차는 약한 노동자들에게는 질투와 야심을, 강한 노동자들에게는 무례함과 오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함께 소속되어 일한다는 집단의식은 생겨날 수 없고 정서적 전염병의 특징인 고발과 반발이 유행하게 된다. 소비에트 정신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칭찬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공장이 형편없는 기계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 모두에 대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훈련 받은 소수의 “에토스”는 항상 대다수 국민을 무능하게 만든다. 신화와 에토스는 영웅적일 수 있지만 항상 위험하고 비민주주의적이며 반동적인 방법이다.
  라이히는 그 당시 소련의 객관적 상황과 전쟁 이데올로기의 결합이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첫째, 1억 6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한 나라가 수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의 상태에 놓여있고, 또한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고취되어있다면 전쟁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인간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들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 삶의 이상으로 추켜세워진 사심 없는 헌신은 숙청, 처형, 모든 종류의 강압적 조치와 같은 독재적 과정의 수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중심리를 점진적으로 형성했다. 둘째, 호전적인 세력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가 수년 동안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군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려운 현안과업을 해결하는 와중에 자신의 과업을 잊어버린다면, 목적이 충족되어 이러한 분위기가 쓸모없게 된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들은 소외되고, 분리되고,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서 비합리적인 애국주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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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

 

1)  마르셀 반 데르 린덴, (황동하 옮김), 「종합: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실천』, 2011년 6월(통권55호)를 보면 1917년부터 2005년까지 소련을 분석한 입장들을 종합하고 있는데, 특히 1985년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또는 국가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절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2)  피터 세지윅, 「해설」, 빅토르 세르쥬 (황동하 옮김), 『러시아혁명의 진실』, 책갈피, 2011, 539쪽.
3)  Samuel Farber, Before Stalinism: The Rise and Fall of Soviet Democracy, Polity Press, 1990, 72쪽.
4) 윗 글, 75쪽.
5) 윗 글, 76쪽
6) 이정희, 「볼셰비키 사회주의와 ‘노동자 관리’(Workers’ Control) 운동, 1917-1921」, 서울대 박사논문, 1998, 8.
7) T. F. Remington, “Instintution Building in Bolshevik Russia: The case of State Control”, Slavic Review, 41, (Spring 1982), 99-101쪽.
8) Malle, S. The Economic Organization of War Communism, 1918-21, Cambridge, 1985, 495-505쪽.
9) A. Kollontai, The Workers’ Opposition in Russia, New York, 1921, 3-12쪽.
10) “What are Workers’ Councils?(iv)”, International Review, ICC, 4thQuarter, 2010,143호, 10-14쪽.
11) Avrich, P., Kronstadt in 1921, New York, 1970, 72-4쪽.
12) Stephane Courtois, Nicolas Werth et al., (translated by J. Murphy and M. Kramer)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858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은 소련, 유럽, 아시아, 제3세계에서의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범죄, 테러, 억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3) 윗 책, 9-10쪽
14) 윗 책, 제1부 인민에 맞선 국가: 소련에서의 폭력, 억압 그리고 테러(N. Werth), 52쪽
15) 윗 책, 73쪽.
16) 윗 책, 262-264쪽.
17) 윗 책, 731쪽.
18) 윗 책, 734-745쪽.
19) Mac Intosh, “The Bolsheviks, The Civil War, and Red Fascism”, Internationalist Perspective, 2003 (Spring/Summer), no.41, 18-20쪽.
20) 빌헬름 라이히, (윤수종 옮김), 『성정치』, 중원문화, 2011,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신분석”, 99쪽.
21)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6, 246쪽.
22) 윗 책, 264쪽.
23) 윗 책, 286쪽.
24) 윗 책, 323쪽.
25) 윗 책, 326쪽.
26) 윗 책 3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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