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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회 포항시 여성 문화제

그렇다! 백일장에 도전했다

연습이다(그냥 연습이 될지 정말 기회가 될지 내일 되면 안다)

글제는 반짇고리, 친정, 유품 중에서 택 1.

시간은 두 시간이 주어졌는데  한 시간은 선아맘과 커피 한 잔 하고 잠깐

구상한다 어쩐다 하다가 지나갔다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글제는 친정으로 낙찰! 원고지로 7매.

 

제목은 " 친정, 그 영원한 동병상련"

 

-인간의 삶은 어디까지나 자기경험적인 것이다. 부모, 자식간이라 할지라도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하고, 보고싶은대로만 본다. 살을 나눈 부부간이라도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아는 것만 믿는 게 인간이다.-

 

 6월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어느 주말이었다. 시댁에 제사가 있어 영동고속도로

를  달리다,  중간에 어느 휴게소에 들렀는데 눈깜짝할 새 작은 사건이 터졌다. 아이가 급하게 화장실에 간다고 하여 황급히 차에서 내리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내 오른손이 미처 못나온 왼손을 못보고 차문을 꽝 닫았다. 순간, 아얏! 하며 나는 비명을 내질렀고, 왼쪽 새끼 손가락에 열이 확 나는 것을 느끼며,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구에게 맞아서도 아니고 혼자 그러한 실수로 다쳤으니, 그저 창피하고 황당할 밖에.

 

그 날 이후, 다친 새끼 손가락 탓에 왼손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다친 순간의 아픔은 잠시였지만, 매일 잔일치레가 많은 살림을 해야했기에,작은 상처일지라도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열흘이 지나서야 피고름이 나오는 것을 보며 뒤늦게 병원엘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너무 늦게 왔다는 작은 핀잔을 주셨지만, 내 조그만 아픔으로 쉽게 병원으로 발걸음이 닿아지지 않는 게  보통 아줌마인 나의 마음이었다. 하찮게 생각했던 이 상처는 붕대를 감고 병원으로 통원치료하며 약먹기를 열흘정도 하고 나서야 눌러도 아프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오래간만의 친정엄마와의 통화.

 "엄마, 잘 계시죠?"

 "그럼, 별 일 없지. 너희들도?"

 "네,엄마...근데.. 아빠는 나 뱃속에 있을 때, 손 다치시고 많이 힘드셨겠다.."

 "뜬금없이, 얘는.. 그렇게 살아오신게 어디 한 두 해냐. 아빠 울며불며 피투성이 손으로

   오시고 한 손마저 잘라버리겠다고 난리칠 땐 나도 그만 같이 죽고 싶었다 야. 뱃속에 너  땜에  겨우 정신차렸지.."

 "그런데 왜 갑자기 물어? 옛날얘기는?"

 "어? 아냐..그냥.."

 

 그랬다. 9살에 이북서 홀홀단신 피난 내려와 부모형제도 없고, 배운 것도 없이 어렵게 살아오신 아버지는 나이 서른에 공장에서 왼손 전체를 잃으셨고, 그 참담함을 고스란히 오른손에   짊어진 채 니어카 과일 행상을 하시며 나와 두 남동생을 대학공부시키셨다. 철없는 딸은 어린 시절 하나밖에 없는 아빠의 그 손을 창피해했었는데..

 

그러나 지금이라고 그 상처를 감히 내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지금의 아버지 나이가 되어서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픔을 같이 겪어는 왔으되, 아버지는 늘 내 앞에서 달리고 계실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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