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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23:12

* 참고로요. 이 글들은 모두 97년도 제 수첩에 있던 것들이랍니다. 이런 저런 사실도 다 그때 이야기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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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데다가 휴가철이라 차가 밀릴까싶어 집에서 14:40 출발.
16:00 이전에 가뿐히 김포공항 제2청사 도착.

친구와 16:00에 환전을 위해 만나기로 해서 다행이지.

 

그러나 16:15 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드는 나의 생각은 내가 서있는 곳이 1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왔다갔다하던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니나 달라
나는 2층에서 죽치고 기다렸던 것.

허겁지겁 내려가보니 친구는 이미 14:30에 도착했다던데.

그나마 여권이 없어 환전도 못하고... 또 기다림.

16:45쯤 나타난 여행사측은 17:00가 넘어서 여권을 줬고, 19:10 출발이던 비행기는 21:00로 연발.

장장 6시간을 공항에서 시간 잡아먹기중.

 

비행기에 탑승하자 드디어 여권을 사용한다는 기분이 조금씩 났다.



CHINA AIR. 우연인지 몰라도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의 비율이 같다.
직업의 기회가 균등하다는 사회주의 국가적 특성인가, 혹은 그 사회에서 인정되는 직업이기 때문일까?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북경 도착 22:00(한국시간으로 23:00. 이후 북경시간으로 표기)

원래는 버스 2대로 전원이 호텔에 직행하려 했으나, 공안국의 제재로 인해 도착비자를 가진 9명은 공안국에서 나온 차를 타고 뒤따랐다.


 

22:50 중국식당에서 식사.

이 시간에 웬 식사?

그러나 안주면 화내는 사람도 있다니 먹어야지.

공항내에서 요기, 기내에서 식사, 더이상 들어갈 배도 없지만 한점씩 먹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입맛에 맞다. 괜찮은걸.

그나저나 이번 여행은 희한하게도 **신문사라는 주최와 한민족 문화탐방이라는 껄끄러운 주제로 인해 공안국의 눈총을 받고 있나보다.

9명의 도착비자도 불허된 상태에서 다른 단체의 일행인 것처럼 가장하여 겨우 입국후 해결을 본 것이다. 우리가 여행 다닐때 공안국의 부장급 인사가 직접 따라붙는다던데... 와우! 흥미진진하겠는걸.

 

00:40 호텔 도착.

벌써 8/3(일). 배정된 방은 2인실. 들어가는 순간 와! 4星짜리 호텔(한국의 무궁화 4개의 의미와 같음)이지만 한국의 기준보다 떨어진다더니 그래도 너무 좋아. 샤워하면서 수첩 정리하고 있다.

 

 

아참! 버스안에 있는 동안 재중교포 3세인 최연희씨가 여러 이야기를 해줬다.

 

중국은 중국식 경제 개발을 하고 있다. 이제 사유재산도 가능하고 시장경제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점은 모든 토지는 국가의 것이라는 점. 만약 한 기업이 건물을 짓고 싶으면 정부로부터 토지를 임대받아야 한다. 만약 계약을 했다면 임대료는 일시불로 지불.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간판은 공항에 깔렸고, 한국의 포크레인은 쉴새없이 북경을 빌딩숲으로 만들고 있다.

 

또하나의 이야기. 최연희씨는 연길 사람인데, 연길만이 유일하게 2차, 3차가 존재한댄다.
조선족이 한국으로 취업 가서 안좋은 술버릇만 배워왔다는 소리. 연길 남자는 술과 마작에 찌들어 나이 40엔 이미 바보가 된단다.
반면 중국인들은 일찍 퇴근해 가족과 TV, Video 보거나 산책하는 것이 최고의 낙. 오후 5시에서 5시 반사이에 퇴근하면 6시 반에서 7시에 식사하고, 7시에 저녁뉴스를 본다.
맞벌이는 보통.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저녁 준비하는데 대체로 남편. 아내는 애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중국은 해산휴가가 1년반~2년으로, 유급 100%.

최연희씨는 다같이 가난하지만 모두 행복한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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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23:12 2004/12/28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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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13

. 1989년 천안문반란 -

88년까지의 경제위기로 대중불만 고조.

농촌에서의 곡물생산감소 예방을 위한 지배계급의 압박. 예산 적자 증가. 곡물수매가격의 하락. 비료 및 영농자금 공급이 수요에 못미침.

국가 기관에까지 시장심리가 미쳐(능력있는 지방관리가 수매를 많이 함) 수매액을 채우지 못함.

인플레, 사재기 성행. 시장심리와 이윤추구로 인해 사,국기업과 관리부패. 인플레의 해결로 임금인상을 했으나 일부 노동자에게만 혜택 돌아감.

이어 긴축경제정책 취함. 예금인출 제한이 한 방법. 결과 경기 후퇴.

도시거주 농촌노동자가 대거 해고. 고향의 농촌산업의 대부분도 원자재, 자본 부족으로 파산.

1989년초 대다수 주민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빠짐. 정부는 긴축경제의 손실을 노동자에게 떠넘김(노동해고).

경제, 정치 위기는 저항의 불씨를 남김.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4월 16일 호요방의 국상에서 인민대중이 천안문에 집결. 호요방 찬양에서 정부에 대한 정치적 요구(민주선거, 언론자유, 집회자유, 관료부패척결, 족벌주의종식등). 학생군중은 등소평에 충성하기위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를 <굶주림에 포로된 자 일어나라! 이땅의 버림받은 자 일어나라! 정의가 해방을 몰고 오도록, 더 나은 세상이 태어나도록>으로 바꿔 부름.

이 시위에 노동자 실업자가 가담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 언론인 참여. 지배층은 유혈학살 승인. 시위지배층내 분열조짐. 5월 4일 정부의 운동해체공작과 내부균열과 잠시 와해.  5월 13일 고르바쵸프의 방문사이에 전열을 다듬어 이붕 파면, 등소평 퇴진 요구 시위 재발발.

지방시위자 가담. 철도노동자, 교사대표단 가담후 노동자 대거 가담. 단식투쟁방식 취함. 5월 18일 부패척결, 정권퇴진을 요구한 시위대에 계엄령 선포. 혁명으로 발발. 바리케이트로 무장봉기. 운동시작후 천안문내에서는 성차별, 인종차별은 찾아볼 수 없었음. 6월 3일 발포. 노동자와 학생간의 논쟁(무기를 들어야 한다는 노동자의 요청에 학생지도부가 불응. 시위 군중 완전 해체. 패조가 짙어지면서 학생들은 노동자에게 파업을 호소.

그러나 총파업 이루어지지않음. (노동자가 혁명 주체로 서지 못하고 감상적 평화주의 소부르주아계급인 학생이 주도였다는 한계).

 

이를 계기로 강택민이 공산당 총서기에 오름. 학생지도부가 서구로 망명하려했으나 서구에 의해 거부당함. '서구민주주의'의 (학생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허실을 증명. 학살이후 북경라디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방송.



로자룩셈부르크 -

50년마다 '질서'수호자들의 보도가 세계사적 투쟁의 한 중심에서 다른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기쁨에 찬 승리자는 유혈학살극에 의해 일시적으로만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질서'라는 것이 그들의 파멸로 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천안문 소요로 대중의 역량이 확인. 사회변화의 잠재력과 위기 폭발의 불씨로 여전히 남아있음.

 

이상의 상황을 겪으며 중국은 '일국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세계 경쟁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가 자본주의를 통해 완전히 경제에 대한 지령 권한을 거머쥐고 있다.

경제통제권은 북경 2,3백명의 최고 관리로부터 상당수의 하위관리와 공장경영자들에게 이전되었을 뿐. 경제의 후진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모택동의 파멸적 시도에 비판적 대안으로 내세운 새로운 [세계화]전략은 세계경제의 불황에 따라 주민 대중에게 더 어려운 생활을 가져다 주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낮은(혹은 높은) 임금, 기업도산, 잠재적 실업, 노동자 해고, 가난의 대물림은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경제의 결과를 가져왔다. 빠르고 효율적 성장을 가져올 방식으로 국가와 시장 규제를 결합시킨 나라는 극히 소수, 주민의 빈곤을 피할 수 있는 나라는 더욱 극소수였다.

 

해방은 어떤 지배전략으로도 노동자계급(가장 선진적 계급)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 노동계급의 연대야말로 해방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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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13 2004/12/2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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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4/12/28 00:08

. 시장자본주의의 시작 -

4대 현대화 : 토지는 국유. 경영은 각 농가. 농민이 자금을 상호출자하는 향진기업이 사료생산, 식료품 가공업에 등장(1985년 이들이 농업생산의 반이상 차지. 그러나 경쟁력있는 가호연합체 성격. 농촌 불평등 조장). 이로 생산은 늘었으나 일손이 달리는 소규모 농민들 낙후. 국가 생산력도 증가.


시장자본주의 합리화 주장 : 지금까지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평등강조. 자본주의 불평등을 고치는 게 사회주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거지와 부랑자에게 주택과 옷을 줌. 그러나 11억 국민을 먹여살리려면 평등 분배전에 생산 늘려야 함. 4대 현대화는 생산을 늘리는 것. 이를 위해 자유경쟁을 받아들이는 것. 외자본 도입. 자영업 인정. 실적없는 기업 파산. 주식회사제도 도입.
평등보다 자유를, 그러나 누를 위한 자유인가?



. 시장자본주의의 가속화 -

현대적 공장설비와 기술 수입. 수출지향적 산업 발전. 공업과 농업에서의 국가 중앙통제 대신 '시장관계 도입'. 자력갱생, 포위경제, 주의주의적 캠페인(대약진,문화혁명)을 통한 대중동원력을 내세운 모택동주의를 비판하고 국가 기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림. 20여 해안 도시에 경제 특구 제정. 모든 세금 감면. 토지와 건물 무료사용. 저임금제공. 이는 외국인 투자유치로 가능. 그러나 외국인 투자는 기대와는 다르게 하이테크 산업이 아니라 사무실, 호텔, 가공산업에 집중. 주로 홍콩자본이 다수. 소규모 프로젝트 투자. 외국인 투자는 위장 회사 투자가 많음. 중국상사는 외국인 합작회사로 변신, 현지 기업에게 주어지지 않는 이득 챙김. 문화 개방으로  수입 증가. 통제력 상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재편 투자. 생산 목표액에 대한 국가 통제 줄임이 빠른 경제 성장을 나음.


농업개혁은 공동 경작지가 개별 가족 경작지로 해체.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작물을 심어 정해진 세금을 내고 일정량을 국가에 팔고, 나머지는 자유시장. 초기 생산증가, 그러나 곡물의 구입가격 오름. 농민의 재투자 없음. 초기의 증가율 감소. 사회복지비 감소(국가투자 부재). 교육수준 하락(자녀를 노동시킴).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한아이갖기 운동. 이는 여성의 지위 하락. 사내아이만 낳으려함. 여영아 살해. 농업개혁이 처음에는 확실히 생산수준을 향상시켰으나 정부투자가 없어 농민이 더 고되게 일함. 인구밀도 높고 비옥한 곳은 생활수준 향상. 낙후지역은 불이익. 농촌불평등. 사적 임금노동이 농촌에서 대규모로 재등장(향진기업). 형식적으로는 국가 소유 토지이기에 이것이 지주제로의 복귀는 아니나 부유해진 농장관리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지주에와 같음. 지배층은 생산력 증가를 위해 이 불평등 증대를 환영. 증대된 생산과 시장의 성장 결과, 만성적 인플레 야기. 2배의 물가 증가. 곡물 수확량 하락. 이 하락을 완화하기 위해 더 높은 투자. 자유시장에 내다팔 곡물량이 정부투자로 증가하자 일부 농민은 자기 먹을 식량도 재배하지 않음. 농업정체야기.

 

공업도시개혁으로 공장 경영자는 기업이윤권을 거머쥐고 자체판단으로 이윤재투자 가능. 향진기업은 국가 통제에서의 제외. 공업경제의 무정부성. 경제범죄 등장,만연. 부정부패를 통해 국가 통제를 벗어나 이윤을 극대화. 국가가격 보조금과 사회적 임금의 지급중지는 노동자의 불만 초래.


. 인플레이션과 위기 -

물자부족(원료와 에너지 부족), 산업성장의 극심한 불균형으로 야기된 과잉생산품의 낭비, 수송능력부족등의 이유로 물가 폭등. 공급부족. 상품관리자의 이윤축적은 심각. 인플레를 더욱 부추김. 인플레의 고착은 금융, 은행업부문에도 영향 미쳐 자금비축을 위한 소비재 공급억제를 낳음. 국가투자 단절. 지배층은 이 현상에 대해 논쟁이 일어남. 보수파는 국가계획경제를 표방. 성장속도는 지배계급이 경제의 방향과 발전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고 주장. 등소평 분파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 중앙집권은 경쟁에서 뒤쳐지게 함. 분권화와 시장 확대만이 경제역동성을 보장. 경제 통제력 상실은 유감스러운 부작용이라고 주장. 지배계급의 공개적 분열과 지도의 부재. 무리한 경제 개발과 현실사이의 모순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큰 공간을 열어줌.

 

. 소수민족저항 -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항상 소수민족의 언어와 관습을 유지, 발전시키도록 장려. 현실에서는 온정주의에서 노골적 인종주의가 나타남. 이에 경제적 낙후성이 결합해 회교도, 티벳의 저항이 큼. 문화혁명기간동안 티벳문화가 거의 절멸. 그들에게는 잔학한 봉건지배계급이 사회주의로 잘 무장된 잔학한 지배계급의 대처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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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00:08 2004/12/2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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