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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8/03/11 00:20

'세상은 수로 이루어졌다.'

이 문장을 접하는 이들은 대체로 두가지 정도의 생각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화 '매트릭스'.
수많은 코드, 결국 0과 1로 무엇이든 표현 가능한 그 세상은 인간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다.
그리고 자연을 두려워하여 자연과 맞서 성과 벽을 쌓았던 인간이 자연을 에너지로 소비해왔듯,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 에너지로 소비되어가는 신세가 현실일 뿐이었다.

 

하나 더 꼽자면,
수가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오만한 수학자들의 콧대.
그러나 그들은 0의 출현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무리수 등에 여지없이 설 근원을 잃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수로 바라볼만 했던 직간접의 경험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대체로 서늘하거나 수세적일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오만한 콧대의 수학자 한명을 책으로 접하게 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등장하는 박사는 30년전만해도 세상을 들썩이는 천재수학자였으나, 17년 전 교통사고 이후 기억력이 80분으로 한정지워져버렸다.
17년 전의 일은 어려운 공식도 남김없이 알고 있으나 정작 8시간 전의 오늘 일은 머리 속에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직업도 그렇고, 최근 17년간 바깥 출입도 없었으며, 기억조차 없는 그가 처한 기본적인 상황은 매우 무미건조하기 이를 때 없을 법 하다, 아니 없어야 했다...만...

 

그는 새로운 파출부의 생일과 자신의 기억 속 숫자 속에서 우애수를 발견하였고,
파출부의 아들이 모자를 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숫자도 꺼리지 않고 보듬는 관대한 '루트'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이후 박사와 파출부와 아들 '루트' 사이에는
완전수와 부족수, 과잉수, 소수, 삼각수 등이 채워지면서 점점 더 풍요로운 관계로 가꾸어졌다.

 

수학의 여왕인 정수의 관계를 연구하던 박사는 분명 세상의 진리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는 일종의 오만(?)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에게 수는 위대한 근원이고 세상의 전부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학자나 -나도 살짝 - 박사의 생각과 같길 바라지만,

현재의 수학이론계만 본다면 사실상 기대에 부응할만한 상태는 아닌가 보다.

 

그러나 박사를 통해 깨닫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수학에 조예가 깊었는지, 얼마나 믿음(ㅋㅋ)이 투철했는지가 아니다.

그는 수에 정체성을 담아 자기 완결적 세상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일관되게 살아갔다.

그 삶은 8시간짜리 기억력을 가지게 된 순간에도 결코 폐쇄적이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건 오로지 수에 대한 것 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정도, 관대함도, 풍성함과 부족함도, 완전함의 기쁨도,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과연 나는 그와 같이 관대하고 일관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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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1 00:20 2008/03/1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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