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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1/05
    지리산(10)
    풀소리
  2. 2009/01/01
    2008 & 2009(4)
    풀소리

지리산

1. 산청 '봄이 오는 집' 지난 토요일(1월 3일) 산청에 있는 이준 선배네 집에 갔다. 이준 선배네 집은 간디학교가 있는 산청 둔철에 있다. '봄이 오는 집' 이준 선배네 집 이름이다. 거기엔 언제나 봄날씨처럼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준 선배네 '봄이 오는 집'/ 낮에 사진을 찍지 못해서 아쉬웠다. 우리는 오후 5시가 넘어 도착했다. 주인네는 우리가 온다고 통영까지 나가서 여러가지 횟감과 굴을 사왔고, 집에서 가꾼 겨울배추를 내왔다. 나는 허리띠를 끄르고 먹고, 또 먹고를 반복했다. 이준 선배네 집 처마에 마르고 있는 곶감/ 플레시 때문에 색깔이 다르게 나왔지만, 정말 예쁘고 맛있다. 2. 지리산 다음날(4일) 우리는 아침을 먹고 지리산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도인촌으로 유명한 청학동에 있는 삼신봉에 오르기로 했다. 원시림으로 변해가고 있는 지리산 깊은 계곡과 숲 삼신봉 정상 근처는 커다란 떡갈나무 듬성듬성 자라고 그 밑으로는 조릿대가 초원처럼 자리잡고 있다. 삼신봉은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가장 길게 뻗은 남부능선 중간 쯤에 있는 봉오리로 높이가 1,284m에 달했다. 지리산 남쪽에서는 지리산 능선이 모두 보이는 유일한 봉우리라고 한다. 삼신봉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세석평전 삼신봉에서 바라본 노고단과 반야봉/ 북사면에는 추운지방 나무인 구상나무들이 멋지게 자라고 있다. 오르는 산길 주변 숲은 울창했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모두 잿더미로 변했었겠지만, 이미 50년의 세월이 지났고, 그만큼 숲은 깊었다. 삼신봉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나무들은 듬성듬성하고, 그 밑으로 조릿대가 초원처럼 펼쳐져 있다. 세석평전까지 힘차게 뻗어 있는 남부능선/ 고사목 지대는 화재의 흔적이라고 한다. 삼신봉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연무에 번진 연봉이 아주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아주 전형적인(?) 기념사진 삼신봉에서는 아까 말한대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5.5km의 주 능선 봉우리가 모두 보인다. 돌아서서 동쪽과 남쪽을 보니 엷은 안개 넘어로 연봉이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3. 산천재 중산리, 내대 거림골을 모두 품고 있는 곳이 시천면이다.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에는 남명 조식의 유적이 많다. 무덤이 있고, 사당이 있고, 그를 추모해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이 있다. 그리고 그가 생전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던 '산천재'가 있다. 남명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산천재/ 고목이 된 매화나무가 잘 어울린다. 물론 지금 있는 산천재는 남명이 세운 그 건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여러번 다시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산천재 앞에 서 있는 낙락장송과 키 큰 배롱나무 이제는 스스로 지탱하기조차 힘든 고목이 되어버린 매화나무 등이 지키고 있어 남명의 뜻이 후학들을 통해 면면히 내려왔음을 느끼게 한다. 남명이 누구인가? 퇴계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이다. 퇴계가 부러워했던 건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참 처사의 삶을 살았던 이이기 때문이다. 남명은 어린 아들(명종)의 섭정으로 정치를 농단하던 문정왕후를 향해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통해 '일개 과부'라고 일갈하던 이다. 물론 다 아시겠지만, 그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써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다. 수제자였던 정인홍이 인정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죽지만 않았어도 남명학파는 퇴계학파 못지 않게 풍성했을 것이다. 산천재 앞 노송 옆으로 멀리 보이는 천왕봉/ 남명선생은 일부러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학당 터를 잡았다고 한다. 4. 남사마을 예담촌 덕산에서 원지로 나오다 보면 남사리 예담촌이 나온다. 말 그대로 고래등 같은 옛 기와집들이 동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양반마을 아니 정확하게는 지주마을이다. 어찌됐든 과거 잘 보존되어 있는 동네다. 높은 담이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배타적인 부(富)를 말해주고 있겠지만, 생각 없이 그냥 걷기에 좋은 동네이기도 하다. 남사 예담촌 골목길 최씨 고가 행랑채/ 매우 우람하게 지어져 있다. 최씨 고가 안채 ps 1 : 1박 2일 꿈같은 여행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봄날처럼 따뜻한 이준 선배네 부부로부터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고 잘 먹고, 잘 자고, 편안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좋은 여행을 함께 해준 이들에게 감사하다. 특히 이준 선배네 부부와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ps 2 : 3일(토) 밤 10시 넘어서 별똥별비(유성우)가 내린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 맞춰 밖으로 나갔다. 별이 참 많았다. 미리 소원도 준비해갔는데 별똥별이 도무지 안 보였다. 고개가 부러질 정도로 하늘을 응시했다. 드뎌 내 소원을 담은 별똥별 하나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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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 2009

1. 2008년 마지막 순간을 보신각 앞 4거리에서 맞았다. 물론 2009년 첫 순간도 거기서 맞았다. 돌이켜보면 지난 한 해는 최소한 이곳 진보넷에 둥지를 튼 이들에겐 매우 힘든 한 해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올 해 뉴스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놈의 미친 MB와 그 일당의 노골적인 작태들은 보고 있다는 것마저 힘들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축제의 장인 보신각 타종식. 그러나 올 해는 분노의 공간이었고, 분노를 외면한 이들의 일방적인 놀이의 공간이었다. 6시가 안 되어 도착한 해저믄 보신각 앞 4거리에는 이미 진주한 경찰들이 바리게이트를 쌓고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바리게이트를 쌓음으로써 자신들이 반민중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음을 노골적으로 인정했고, 분노를 진압하기 위해 기꺼이 축제를 망치겠다고 선언했다. 어제 서울에 동원된 경찰 숫자가 3만이라는 얘기도 있다. 제길... 종로 보신각 앞 4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이명박 물러가라!'를 외쳤다. 본격적으로 모인 인파는 정권퇴진을 요구했다. 공연은 순전히 그들이 그렇게 장악하고자 애쓰는 공중파를 위한 것일 뿐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은 오히려 공연의 중단을 요구했다. 타종이 끝나고 나서 종로로 길게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하늘을 향해 한없이 한없이 폭죽을 쏴댔다. 마치 분노하고 절망한 팔레스타인 전사들이 하늘을 향해 하염없이 소총을 쏘아대듯이... 행주산성 해맞이 행사에 참석한 심상정 대표와 진보신당 당원들 2. 2009년 해맞이는 행주산성에서 심상정 대표를 포함한 진보신당 당원들과 함께 했다. 일부러 조금 늦게 행사장에 도착했는데, 행주산성 오르는 길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양시 사람들이 모두 왔나봐.'라는 어떤 이의 말이 저절로 수긍이 될 정도였다. 새로 떠오르는 해를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래도 굳이 인산인해의 사람들을 뚫고, 추운 새벽바람을 가르며 산 위로 올라갔다. 해는 사람들의 환성과 함께 떠 올랐다. 나는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아내의 소원을 포함해서, 내 소원을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소원이 들어질 지 아닐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니까 그 자체로 충분하다. 막 떠오르는 2009년 새해 3. 이번 주는 불과 3일 뿐이었지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보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남지 않은 날들을 착하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지난 한 해는 파란만장한 한 해였다. 세상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많은 고통이 있었다. 정말 많은 절망이 있었다. 상실감. 맞다 상실감으로 시작한 한 해였다. 촛불을 보면서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그런 절망감이나 상실감이 많았지만, 많은 즐거움도 있었고, 많은 행복도 있었고, 또 많은 미안함도 있었다. 일일이 만나서 마음을 전할 수는 없지만, 이 자리를 빌어 함께 있어 즐거웠고, 행복했던 이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내가 많이 미안하게 했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새해에는 희망이 있을까? 글쎄... 희망이 없어도, 우리 후배들, 우리 후손들이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뭔가를 해야겠지... 사실 도무지 엄두가 안 나는 새해다. 매년 만들었던 웹연하장도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아 못 만들었다. 그래도, 그래도... 모두 건강하시길... 용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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