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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3
    슬픔이 아로새겨진 소현세자 후손 묘역에서(13)
    풀소리
  2. 2010/01/21
    강매동 돌다리(2)
    풀소리
  3. 2010/01/13
    용산에서...(7)
    풀소리

슬픔이 아로새겨진 소현세자 후손 묘역에서

요즈음 드라마 '추노'가 뜨고 있다지요?

불행이도 저는 그 드라마를 못 봤습니다.

추노의 중심 인물들이 인조와 소현세자, 그리고 소현세자 후손들 이야기라지요?

오늘 소현세자 후손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왕손을 포함해서 소현세자 후손들의 무덤이 고양시에 있으니, 저에겐 더더욱이 우리에게 가까운 듯 느껴집니다.

 

 

1.

어제 고양동 중남미문화원에서 대자산 일원을 돌아봤습니다. 그곳으로 올레코스를 연결해볼까 해서요~

중남미문화원 바로 옆에 고양향교가 있고, 향교 옆길을 타고 올라가면 대자산 정상이 나옵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오른편 능선길이나 계곡길로 내려가면 최영장군 묘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경안군 묘가 있습니다.

 

 

경안군(왕손) 묘역/ 언덕 위에 있는 무덤이 경안군 묘/ 아래 작은 무덤 뒤에 가린 무덤이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의 묘입니다.

 

 

경안군(慶安君 회(檜) 1644-1665)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입니다.

1645년 소현세자는 만 8년의 볼모생활 끝에 청나라로부터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옵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귀국 후 불과 8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의 죽음은 물론 미궁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죽은 시신의 모습이나, 이후 인조가 소현세자 일족에게 행한 일들을 보면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이라는 강한 추축을 하게됩니다.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아들 3명이 있었습니다. (딸도 3명) 큰 아들 석철이 10세, 둘째 아들 석린이 6세, 셋째 아들 석견이 2세입니다.

조선의 국법으로 보면 소현세자가 죽은 뒤 왕위계승 1위는 인조의 장손인 석철이랍니다. 신하들은 당연히 국법에 따라 석철이 세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그러나 인조는 신하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후에 효종으로 즉위)을 세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소현세자빈(강씨)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립니다. 그때가 소현세자가 죽은 지 1년밖에 안 된 1666년입니다.

소현세자빈을 죽이고 나서 이제는 손자들 차례입니다. 인조는 자신의 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아들들인 석철(당시 12세), 석린(당시 8세), 석견(당시 4세)를 제주도로 귀양보냅니다. 그때가 소현세자빈이 죽은 다음 해인 1667년입니다. 참 잔인하죠?

 

이듬해 석철이 귀양온 지 8개월 만에 죽고, 둘째 석린도 3개월 뒤에 형의 뒤를 따릅니다.

석철이 죽자 인조는 석철을 아버지인 소현세자 곁에 장사지내라고 명령합니다. (소현세자 무덤은 서삼릉에 있음)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뒤 아버지 묻혀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일을 두고 사관은 이럴게 실록에 썼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풍토병이 있는 제주도에 귀양 보내 결국 죽게 만들었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 묘 곁에 장사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슬픈 일이다.”

 

 

 소현세자와 그 일가의 주요 일지

 

 

- 1637년 병자호란 - 청나라 볼모로 감

- 1645년 귀국

- 1645년 귀국 8개월 만에 사망(34세)

- 1646년 세자빈 강씨 사사

- 1647년 세 아들 제주도로 귀양(장남 석철 : 12세, 둘째 석린 : 8세, 셋째 석견 : 4세)

- 1648년 큰아들 석철 13세로 귀양지에서 사망, 둘째 아들 석린 9세로 귀양지에서 사망

- 1649년 셋째 아들 석견 제주에서 남해로 귀양지 옮김

- 1649년 5월 효종(소현세자 동생, 봉림대군) 즉위

- 1656년 석견 석방

- 1659년 5월 현종 즉위

- 1665년 석견(경안군) 22세로 사망

- 1674년 8월 숙종 즉위

- 1679년 경안군의 두 아들(장남 임창군(臨昌君) 혼(焜 1663-1729), 차남 임성군(臨城君) 엽(熀 1665-1690) ) 및 경안군 부인 허씨 역모로 연루되 제주로 귀양감

- 1684년 임창군, 임성군, 경안군 부인 허씨 석방. 경안군 부인 허씨 사망

- 1720년 6월 경종(장희빈 아들) 즉위

- 1724년 8월 영조 즉위

- 1728년(영조 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발생. 이인좌가 임창군의 큰아들 밀풍군(密豊君) 탄(坦 1698-1729)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음.

- 1728년 밀풍군 왕명에 의해 자결

- 1864년(고종 1년) 밀풍군 복권

 

 

2.

석견은 삼촌인 효종(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한참 뒤인  1656년에 석방됩니다.

9년간의 귀양살이를 한 석견. 요즘으로 말하면 장기수인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3세입니다. 슬프지요?

 

석견은 귀양지에서 돌아와 경안군이라는 봉작을 받고 청나라를 오고가는 사신으로 활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겨우 22세 때 사망하고 맙니다. 경안군의 죽음에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다 때늦은 일인 걸...

 

이들 가계에 또 다시 비운이 닥칩니다.

경안군은 두 아들을 둡니다. 장남 임창군(臨昌君) 혼(焜 1663-1729), 차남 임성군(臨城君) 엽(熀 1665-1690, 석철(경선군, 慶善君)의 양자)입니다.

이들이 또 다시 역모에 휘말립니다. 숙종 6년인 1679년 이들은 역모에 휘말려 어머니 군부인 허씨와 함께 제주도로 귀양길에 오릅니다.

1684년 석방되지만 군부인 허씨가 숨집니다.

 

경안군의 둘째아들 임성군묘/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경선군)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서 형인 임창군의 둘째 아들 밀남군 (密南君) 감(堪1689~1750)을 양자로 맞이합니다.

 

 

어찌되었든 임창군은 청나라로 오고가는 사신으로 활약을 합니다. 그는 두 아들을 두는데, 큰 아들이 밀풍군(密豊君) 탄(坦 1698-1729)이고 둘째 아들이 밀남군 (密南君) 감(堪1689~1750)입니다. 밀남군 감은 임창군의 동생 임성군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어때요? 정신 없나요? 암튼 추노를 재밌게 보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시고 소설 읽듯 읽어보셔요~~

 

여기서 소현세자 가문에 또 다시 불행이 찾아옵니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발생합니다. 문제는 이인좌가 영조를 폐위시키고 밀풍군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결국 밀풍군은 영조 5년에 왕명에 의해 자결을 합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란?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후원을 받던 영조가 즉위하자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과 남인 강경파가 경종의 원한을 갚고, 노론을 제거하고자 봉기하였습니다.

결국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죽거나 축출되었으며, 영남 선비들의 중앙정계 진출이 막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밀풍군 탄의 무덤

 

 

밀풍군의 죽음으로 소현세자파는 괴멸적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물론 영조는 신하들의 끝없는 소청에도 불구하고 밀풍군의 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밀풍군의 후손들이 이인좌 난과 관련하여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3.

밀풍군이 왕으로 추대됐다는 건 그만큼 소현세자와 그 후손들이 정통성이 있었다는 증거이겠지요?

 

인조는 병자호란 이후에 소현세자 대신에 자신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갈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로 왕위를 바꿀까봐, 그리고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들의 아들로 왕위를 바꿀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러한 정신병적인 상태가 소현세자 일가를 불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탄압은 그 이후 당파싸움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조의 비인간적인 일련의 행위만 아니었으면 역사는 엄청 달라졌겠지요?

 

소현세자 시녀 굴씨 묘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경안군의 묘역에는 소현세자의 시녀 굴씨묘가 있습니다.

굴씨는 소현세자가 만주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할 때 청태종이 자신의 시녀 중에서 특별히 선발해서 소현세자를 모시도록 했답니다.

경안군 묘역 한편에 굴씨묘가 있습니다.

묘만 보면 작고 얌전합니다. 아마도 굴씨의 성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요?

 

굴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 -> http://cafe.daum.net/gyolle/G22U/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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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올레길 만드는 사람들/ http://cafe.daum.net/gyo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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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매동 돌다리

강매동 돌다리

 

 

어제 강매동 돌다리에 다녀왔다.

주변엔 여러 번 가보았지만, 다리를 발견한 건 처음이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가을 새벽처럼 짙은 안개가 사위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사람들 발길이 거의 없는 곳이다.

다리를 건너면 더 큰 냇물이 나온다.

이 정도 규모의 돌다리를 만드는 일은 당시에는 큰 일이었을 터인데,

이런 궁벽진 곳에 있다니 뜸금 없다.

 

그런데 예전엔 이곳 냇물 모양이 지금과 달랐고,

강물도 이곳까지 들어와 작은 배들이 정박하는 포구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양시 평야지대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였고...

그러니 다리는 있을 만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돌다리를 건너보았다.

 

 

돌다리 입구에는 '건너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서 있었다.

무시해도 될 만한 푯말이다.

 

다리 건너는 모래톱이다.

처음 이곳을 복구했을 땐 공원으로 조성하려 했는 듯 한데, 지금은 그저 잡풀이 자라나는 황무지다.

 

아래에서 본 강매동 돌다리

 

 

강매동 돌다리는 육중한 돌을 거칠게 다음어서 교각과 밑돌을 세우고 얹어 만들었다.

그 거친 다듬이 오히려 힘 있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강매동 돌다리는 강매동 창릉천에 있다.

현재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릉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행주산성 옆으로 흐르는 냇물이다.

 

- 사진 : 붉은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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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서...

 

 

용산...

가시는 길이라도 가 보고싶었다...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분노는 아닐지라도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

 

노조를 떠난지 1년이 넘었다.

노조를 떠나고자 결심한 지는 훨씬 전이다.

그래도 마음이야 어디 쉽게 떠날 수 있으랴...

 

하지만 활동하던 노조에 관련한 이런저런 심란한 소식이 들려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그저 돌아보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민주노총'에 대한 실망과 또 다른 '상실감'을 느꼈다...

 

조그마한 경험을 살려 지역에서 정당정치에 조금이라도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지역사회 정당및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2010지방선거 준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내 희망과 달리 난 기여하는 대신에, 남에게 힘이 되어주는 대신에

스스로도 힘을 잃었다...

 

...

 

식물처럼 눈과 귀를 없이하고

그져 살아있는 동안 목숨만 이어가겠다고 생각했었다...

 

...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참을 수 없는 현실을 눈과 귀를 없이하고 그져 홀로 견디기만 해도 되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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