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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 시설관리 지부 입찰 선전전 및 항의집회


 

어제(1일) 청주대에 정 국장 동지랑 동행했다.

어제는 지난 2주전에 입찰 설명회 후, 입찰 용역업체 선정 발표하는 날이다.

 

청주대는 매년 6월달에 청소용역업체를 입찰 공고해서 선정한다. 그런데 웃긴것은 '최저낙찰제' 제도이다. 단 1원을 입찰해도 가능한 제도이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노동하는 청소용역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청주대학교는 그것을 시행한다.  그래서 어제 입찰 마감시간까지 청소용역 노동자들은 농성을 전개했다.

한 아주머니는 "난,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가 일한 만큼 댓가는 줘야지" 하고 말하신다.

 

오후 2시. 입찰 업체 선정 시간이 다가왔다. 20여분이 지난후에 결과가 발표되었고, 올해와 같은 업체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조합원들을 열받게 만든 일이 생겼으니, 학교설계가는 5억 5천을 책정했는데, 낙찰된 업체가 제시한 금액은 4억 2백이란다. 2등은 4억 5백만원이고. 학교당국은 전적으로 낮게 제시한 용역회사에 탓을 돌린다.

어처구니 없는 저단가로 올해도 용역에 넘어갔다. 문제는 요구하는 임금인상이란 없게된다는 것이다.

 

청주대 시설관리 조합원들은 한 달 식비로 20,000원을 받는다고 한다. 계산해보면 라면 사먹을 돈도 안된다. 그런데 저단가 입찰제로 낙찰된 업체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조합원들은 용역업체와 대화를 시도했으나 금새 어디론가 도망갔다. 적어도 자신들이 고용한 직원을 얼굴이라도 봐야 하는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더 조합원들을 열받게 만든것은, 이러한 낙찰제도를 폐지하고 고용조건을 원만히 하자고 사무처장의 면담을 요청했는데, 사무처장은 이미 도망갔고, 한 학교관계자는 '싫으면 나가면 되지' 하고 툭하고 던진 것이다.

 

조합원들은 서로 보이지 않게 눈물을 흘렸다. 하루종일 꼬박 노동해도 결과는 늘 이 모양이다. 늘 매년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외쳐도 답이 없는 현실. 이게 그들의 처지고, 이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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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지 않는 노동절

어제는 제 116주년 노동절이었다.

작년에 이어서 대전은 올해도 청주 하이닉스 정문으로 향했다.

작년보다 왠지 적은 인원수가 온 듯한 생각이 들었지만, 결의 높은 결의대회를 벌였다.

그리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공장에 돌아가자'는 구호속에 정문앞으로 집결했다.

 

정문 경비실 옥상에 진을 치고 있던 구사대를 하이닉스 동지들은 사다리를 타고 재빨리 올라가 모두 끄집어 아래로 쫓아냈다. 경찰은 즉각 물대포로 응사했고, 무차별적으로 무대포를 참가대오에 발사했다.

 

▲ 정문 경비실 옥상에 올라간 하이닉스 동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물대로 쏘는 경찰들 (사진출처:참세상)

 

그러나 참가한 노동자들은 밧줄을 정문에 묶고 당겼으며, 그동안 열리지 않던 정문은 끝내 열렸고, 안에 수놓은 철조망도 제거했다. 그 순간 양쪽에 전경들이 몰아쳐서 몸싸움도 일어났다. 그렇게 얼마간 공방전을 벌이다가 집회대오는 정문 앞 싸움을 그만두고 거리행진을 나섰다. 그리고 한나랑당과 한국노총 앞에서 약식집회를 벌이고, 작년 공방전을 벌였던 공단 5거리에서 마무리 집회를 하고 노동절 집회를 마쳤다.

 

 경찰들의 물대포에도 아랑곳않고, 참석한 노동자들은 끝내 굳게 닫힌 하이닉스 정문을 열어 제쳤다. 우리의 투쟁은 결코 한순간에 머물지 않고 계속 싸울것이다. 정문이 열어진것처럼 반드시 비정규직을 이땅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사진출처:참세상)

 

 

마무리 집회 도중, 한 동지에게서 온 문자. '서울은 조용해요. 청주는 싸웠다면서요'.

집에 돌아와서 전남 순천은 전쟁을 치뤘다는 뉴스보도를 보았다.

그러나 청주와 순천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던 노동절 집회는 정말로 조용했다.

언제부터인가 조용한 노동절.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보수언론에서 조차 떠드는 사회양극화. 그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문제. 아직도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화 하려는 개악안이 국회에 표류중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노동절을 맞이한 것은 아닌지...

1년이 적다하게 장기간 투쟁하는 사업장이 도처에 깔렸고, 생계에 허덕이는 비정규직이 850만이 육박했다는 현재.

언제까지 우리는 조용하게 '평화롭게' 노동절을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의 분노와 투쟁은 언제 펼칠 것인가...

 

답이 없는 하이닉스 동지들의 문제를 함께 나누면서 안쓰러운 하루를 보낸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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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노동자대회

아침 일찍 철도 대창 비정규 선전전을 마치고, 지역 동지들(4인)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오늘은 비정규직 개악안 처리저지를 위한 노동자대회가 있던 날.

노동자대회 이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대회가 열려서 그 곳에 참석하고자 부랴부랴 올라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대회는 역시(?)나 그다지 많은 동지들이 모이지 못한채 열렸다.

(비정규직 철폐! 하자면서 정작 비정규직 집회에 적은 인원의 참석이라...)

집회에서는 여러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나왔다. (충남일반노조 위원장 말대로 맨날 뻔한 이야기이지만...)

중간중간에 동지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정작 정부나 어용노총이나 민주노총이나 지금의 비정규직안의 내용들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모르는 것이 걱정이다.

 

긴(?) 노동자대회를 마치고 거리행진을 했다. 몇몇 지역동지들과 이야기 하지만 정말 힘빠진다. 연기되었다가 다시 강행처리한다. 그리고 올라와라. 뭐해라...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긴 집회대오가 행진해서 교보문고 앞에 다다랐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해산했다.


▲ 많은 닭장차로 거리를 막아버린 경찰로 인하여 더 이상의 행진은 없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도 없었다. 오늘은 물대포도 없었다. (참세상에서 사진 펌)  

 

 

닭장차에 막힌 집회대오는 몇차례 차를 밀어보고, 물대포 꼭지를 내리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다지 싸울 의지가 주최측에 없었던 것 같다)

이번 국회에서 비정규직안이 상정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12일 오전 10시에 법안소위를 다시 연다고 한다.

또 한달가량, 서울을 오가며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을 움직일 동력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정말이지 너무 힘든 투쟁이다. 젠장... 더러운 자본가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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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민중대회

1일에 이어서 어제도 서울로 올라갔다. 지역동지들 몇명과 함께 올라가면서, 추운날씨에 과연 많이 모일까 걱정도 했다. 잠시 휴게소에 머물렀을때, 투쟁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꽤 보이길래 그래도 오늘 많이 모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후는 현장에 많이 모인 동지들을 보면서 더욱 사라졌다.

정말 날씨가 추웠다. 거기다가 바람까지... 집회를 마치고 행진이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주위에 병력은 없었다. 탑골공원을 지나서 광화문 근처에 다 다다랐을 때까지도 말이다. 방송차의 지시(?)에 대오는 뛰었고, 한국일보(맞나?)앞에서 우리는 병력에 막혔다. 대오에 있던 동지들이 앞으로 나가면서 병력을 밀쳐내기를 시도했다. 얼마후 이내 병력은 시위대에 공격을 퍼부었다.

 

▲ 민중대회 참가자에게 방패와 소화기로 공격해오는 경찰 병력들... (출처:참세상)

 

그러나 참가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서 추운날 물대포를 쏟아부었다. 차가운 날씨에 맞은 물대포는 이내 얼어버렸다. 딱딱해지고 모두 젖은 몸을 이끌고 경찰병력과 맞붙었다. 진압도 열받는데, 이 차가운 날씨에 물대포라니... 정말 생각이 있는놈들인지...

 


▲ 민중대회 참가자들을 향해서 경찰은 엄청나게 물을 쏟아부었다. 차가운 날씨에 물을 맞은 사람들의 머리와 옷과 몸은 금새 얼음을 띄며 얼어붙었다. (출처:참세상)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는 광화문 사거리를 점령했다.

이는 노동자 전체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려고 하는, 농민을 죽여놓고는 오리발을 내미는 노무현정권에 향한 노동자민중의 몸부림이었다.



경찰의 방패와 소화기. 그리고 물대포를 견디며 경찰병력을 뒤로 밀어냈다. (솔직히 왠지 양보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경찰병력이 뒤로 퇴각할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다른 동지들은 나를 반동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뒤로 퇴각하는 경찰병력에 향한 민중대회 참가자들의 일부의 폭력은 과도한 것이라 생각한다.

척 보아도 지휘자가 사라져서 그런지 (그 지휘자 놈들도 자본가와 같다. 지 혼자 살려고... 어린 부하들을 놨두고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뭔가를 할지 모르는 어린 병력을 향해 물건등을 집어 던지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었다. 모 호텔 입구앞에서 보여준 참가자 일부의 경찰병력에 향한 폭력도 말이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쳐도 (물론, 추운날 물대포를 맞고, 비정규직과 쌀 개방 등의 자본의 지랄같은 모습에 분노가 찼겠지만) 그들이 또한 무슨 죄인인가 말인가!

 

돌아오는 길에 자꾸 그 친구들이 눈에 밟혔다. 우리도 그들에게 맞아서 피흘리고 아프지만, 그들도 그렇게 하게된 이유가 분명 있는데...

 

 

오늘도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어제 적들의 물대포에 흠뻑 젖고... 밤늦게 도착해서 오늘 아침 모 사업장 출투를 하고나니 몸이 쑤셔서 (송구스럽게도) 올라가지 못하고 이렇게 넋두리를 하고 있다.

 

내일은 다시 올라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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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텍 점거농성 투쟁이 끝났다.

21일. 오후 3시. 드디어 엔텍 본사점거 농성을 마치는 시간이었다.

조인식 소식에 조합원들은 흥에 겨워서 뛰었을 것이 눈에 선하다.

그날 저녁에 회계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눈물을 흘리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단다. 이해가 간다.

21일로 점거농성 49일차다. 낯선 타지에서 작은 사무실공간에서 49일 동안 있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뭐가 있겠는가? 머리속에는 하루에도 수십번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등을 때렸을 거다. 물론 어느정도 익숙할 무렵에는 주변 장기투쟁 사업장에 연대하러 다녔지만, 이 연대 활동 또한 쉬운 일이 아닐테고.

끝을 알 수 없는 이 농성 투쟁의 일단락을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22일 점심 즈음에는 여성부장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그 동안 뒤에서 알게 모르게 고생해주어서 고맙다고...

 

21일 저녁에 마지막(?)으로 투쟁소식을 제작했다. 49일차에 소식호는 24호다.

중간에 많이도 뛰엄뛰엄했다. 그건 분명 나의 게으름이다. 그래서 나는 박진우가 재수없다. 얼릉얼릉 조합원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으면 투쟁소식을 늦게 만들일은 없었을텐데...^^;;

 

24일부터 단협에 들어간다. 지회장 말대로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이들이 잘들 해 갈것이라 생각한다.

4월 5일 조합을 만들고, 지금까지 인정 받지 못하고 싸워왔던 이들이다. 5월 16일에 직장폐쇄를 당하고, 거리로 내 몰리고서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천막농성에 매일같이 거리행진을 영동시내에서 했다.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비오는 가운대에서, 회장집 앞에서 1인시위를 해왔던 이들이다.

(첫 상경 1인시위 1주일은 기억에 참 남는다. 사측 관리자들의 미행과 감시. 경찰의 출동. 회장의 지랄. 그리고 폭언과 협박)

그리고 10월 4일에 본사 회장, 사장, 기획경영실을 점거했다. 다른 힘든 투쟁을 해온 동지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지난 7개월이 대단한 시간이었다.

 

일단은 정리하고 나왔다. 이제는 현장에서 다시금 초심으로 싸워야한다.

그러나 그 동안의 투쟁이 이들에게는 힘이 될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들을...

그리고 그들도 지난 시간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것이 동지라는 것을...


 

 ▲ 농성장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은 엔텍지회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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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투쟁을 다녀와서...

1박 2일간의 외출이어서 그런지 오늘 하루 몸이 조금은 쑤셨다.

남들은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화 투쟁이라는 것에 부산을 향하는 마음은 설레였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신자유주의가 침투하는 상황속에서 말이다.

 

17일. 부산역에 내렸을때에는 사실 실망이었다. 전해들었던 것과는 달리 부산역은 조용했다. 전야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전야제 장소로 가면서 그제서야 조금은 실감하기도 했다. 쭉 늘어선 닭장차와 전경들...

나를 실망하게 만든 것이 또 있었으니, 생각보다 적은 전야제 참석자들이었다.

전야제를 준비한 동지들의 노고와는 달리 적은 참가자들을 보니 조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18일.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망미삼거리에서 진행된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

전날, 부산대 학생들이 노동자 민중들이 숙박을 하지 못하게 피켓시위며 대자보를 부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참... 대학도 이렇게 어용화가 되어가다니...)

전국노동자대회도 예상보다는 훨씬 못 미치는 것 같다. 대략 7~8천명 정도.

집회를 마치고 수영교로 이동하는 동안에, 농민대오와 민노당 그리고 학생, 노동단체 대오들이 노동자 대오와 결합하면서 그나마 거리를 꽉 메운듯 하다. 대략 3~4만명 정도...

 

▲ (나중에 알았지만) 수영 1교에 도착했을때에는 이미 경찰은 컨테이너 박스로 2단까지 쌓으며 벡스코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여기는 반대편 수영 3교.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본집회 장소인 수영교에 도착했을때에는 정말이지 경악스러울 뿐이었다. 컨테이너 박스를 2단으로 쌓아서 수영교와 벡스트를 차단한 경찰의 발상은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경찰은 살수를 쏟아부었다.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민중의 힘은 컸는지,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엄청난 물을 맞으며, 컨테이너에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는 힘껏 잡아 당겼다. 한 동안의 노력은 결국 컨테이너를 떨어뜨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을 지게차를 이용해서 또 2단을 쌓았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나중에 동영상을 통해서 뒷쪽에 대량의 컨테이너를 준비한 것을 알았다...)

그렇게 두어시간 투쟁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두워지고, 헬기로 살수한다는 경찰의 협박(?)에 대오를 지도하던 방송차는 뒷쪽 무대로 이동할 것을 방송한다.

 

 

  경찰들은 끊임없이 노동자 민중대오에게 물을 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컨테이너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호 동지와 나는 뒤로 퇴각(?)했다. 그리고 한라공조 동지들을 만났다.

(역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있던 곳은 수영 1교이고, 뒷쪽 수영 3교에서는 컨테이너를 무너뜨리고 경찰과 심한 싸움을 벌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나중에 대전에 올라오면서 알았으니... 오늘의 투쟁은 정말이지  엉터리였다.)

경찰의 침탈이 있다는 소식에 지도부(?)는 퇴각할 것을 명령(?)했고, 참석한 동지들은 모두 올라간다고 한다. 이동하던 나와 호 동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서로 헤어지기로 하고, 나는 대전본부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반세계화 투쟁이라는 것이 아직 우리에게는 이렇게도 낯선 투쟁인가?

그렇게도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서는 회의를 진행하는 자본가 앞잡이 들이 존경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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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만큼 이젠 연대로 보답해야죠!

 2005년 4월 15일 노동자의 힘 기관지 76호에 실린 글이다.

 

 

 

받은 만큼 이젠 연대로 보답해야죠! -투쟁에서 승리한 한라공조 사내하청지회
 현장 이야기

기관지노힘  제76호
 

"처음에는 노동조합에 관심조차 없었죠"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이에 축복하듯 벚꽃이 활짝 피어 벚꽃축제가 한참중인 4월. 그러나 부단히도 바쁜 하루를 보내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비정규직 노조를 설립한 한라공조 사내하청지회 동지들이다. 4월 6일과 7일 이틀 간 막바지 교섭이 있었다. 어제 교섭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오후 즈음에 한 동지와 함께 한라공조 사내하청 노동조합 사무실을 찾았다. 출입문을 들어설 때 문순호 사내하청지회 사무장 동지의 얼굴이 보였다. 늘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오늘은 더욱 환하게 보였다. 아마도 어제 진행된 교섭이 잘된 모양이다. 나랑 같이 동행한 한 동지가 "축하해요!" 라고 인사를 했다. 나만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 감사합니다" 라며 사무장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노조사무실에는 한상진 지회장이 혼자 있었다. 소감 한마디를 묻자, 첫 마디가 "일단 끝나서 속이 후련합니다" 란다.
"처음부터 노동조합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런데 사는게 힘들다보니 어쩌다가 노동조합 만들어서… 잘 되었습니다"


"사측이 제멋대로 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안들었죠"

한상진 지회장은 작년 8월말부터 노조결성을 준비해 왔었다고 한다. 노조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그가 노조를 구성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한라공조 사내하청인 (주)유진에 들어온 지 2년이 되어 가는데, 근무하고 있는 동안 회사가 자기 멋대로 임금을 삭감하고, 월차도 없고, 잔여금도 한푼 주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두 사람 만나 가면서 사측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 하다보니, 자연스레 노조결성의 의지를 다져왔다. 그런데 막상 노조를 만들고자 결심을 하고 나니, 그동안 회사측의 부당함에 억눌려 가슴속으로 혼자 '꿍'하고 있던 주변의 동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노동조합을 결성했단다. 물론 그 사이 고생도 많았다. 대표이사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물량은 빼겠다고 협박하고, 한마디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대표이사가 강하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단결은 큰 힘을 만들기 마련.
원·하청 동지들의 단결된 의지와 한번 해보겠다는 사내하청 동지들의 의지는 공장 내에서 원·하청 노동자 공동결의대회를 진행하였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중식집회를 계속 열어왔다. 결국 4월 6일과 7일까지 이틀 간 집중적인 교섭을 통해 단체협약 95개 전체조항 의견을 접근시켰다. 그 중에 가장 핵심조항은 '고용기간이 없는 정규직 채용'이다.
즉, 한라공조 사내하청 노동자 모두가 정규직이 된 것이다.


"이제는 연대로서 받은 만큼 돌려 드려야죠"

노동조합을 하면서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지회장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그런 것 없었습니다. 워낙 동지들이 집행부를 신뢰하고, 잘 따라줘서 솔직히 저희는 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워낙 잘 뭉쳐서 그런지 쉽게 성과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게 노동자의 힘 아닌가 쉽구요"라고 답한다.
4월 1일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 한라공조 사내하청 지회장, 부지회장, 사무장 등 동지들은 자신들의 노동조합 깃발을 들고 대전역에 나왔다. 지회장은 "그 날 무척 든든했습니다. 이 많은 동지들이 하나라는 것이 말이죠. 이 동지들이 모두 하이닉스 투쟁에 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는 연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지회장. "우리가 그동안 여러 동지들의 관심과 연대 속에서 교섭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만큼 우리도 이제는 다른 동지들에게 연대 해야죠. 아직 많은 곳에 찾아가 보지 못했지만, 호텔리베라 등의 사업장에 연대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간부회의를 통해서 연대투쟁에 대한 계획을 모색할 계획이다.

노동조합 활동은 그 어떤 특출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 또한 그 어떤 사람이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했을 때, 부당한 노동행위를 받았을 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 옆의 동료와 단결을 이룰 때, 이것이 투쟁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근간을 이루는 모습이 아닐런지. 이런 모습이 민주노조를 지키고 꽃피우는 것이 아닌지 사내하청 노동조합 사무실을 나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5-04-26 18: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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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2004년 7월 20일 노동자의 힘 기관지 57호 실린 글이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기관지노힘  제57호
이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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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2일 오후 1시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교육주권 매각음모 저지! 외국교육기관 특별법 전면 폐기!'를 위한 긴급 규탄대회를 진행했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교육의 공공성 쟁취!' 구호로서 진행된 집회는 예상과는 달리 많은 대오가 참석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많은 교육주체들과 사회단체들이 교육개방 반대 주장을 제시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지만 이것이 전체 민중에게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많은 의견들이 오고가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작년 노무현 정부는 교육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개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었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31일, WTO교육개방 양허안 제출 마감을 앞두고, "개방은 세계적 대세이기에 불가피하다"며 양허안을 제출했다. 당시 교육주체인 학생·교사·학부모들과 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초·중·고등학교는 개방하지 않고, 대학교육에 한해서만 개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교육개방 양허안을 제출한 국가가 4개국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주장이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정부는 나아가 경제자유구역법 통과 이후, 단 두 차례의 공청회만을 진행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국제 자유도시 및 경제자유구역 내 외국교육기관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하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을 작년 12월 26일 입법예고(교육인적자원부)한데 이어 지난 6월 15일 약간의 문구수정과 조항 위치가 바뀐 정도로 해서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켜 버렸다. 이제 국회 처리 과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현재 교육과 더불어 의료·문화·쌀 등의 삶에 있어서 기본적인 부분을 WTO 협상과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서 상품화시키려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정부가 6월 15일에 통과시킨 법안에 의하면 대학뿐만 아니라 유아·초등·중등교육까지 포함하여 개방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자본의 의도대로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이 처리된다면 한국 교육의 상품화·시장화의 가속화는 물론 교육 전반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파묻히고 말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교육개방을 위해 현재 빠른 속도로 페달을 밟고 있다. 정부가 6월 15일에 확정한 이 특별법은 우리 교육주권을 해외에 매각하는 행위이며, 교육을 시장화하고 상품화하여 자본의 이윤추구에 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아니 결코 상품이 될 수 없다. 교육은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여야 한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 교육을 상품으로 전략시키는 음모에 맞서 싸워야 한다.



 

2004-07-20 15: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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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쭉 펴고 편안히 누울 공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2003년 6월 5일 노동자의 힘 기관지 32호에 실린 글이다.

 

 

"다리 쭉 펴고 편안히 누울 공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상도 2동 철대위 김영재 위원장


기관지노힘  제32호
이강철 (한신대 민중연대위원회 연사국장)

상도동.jpg 상도동.jpg(52 KB)

 

4-5면// 사람사는 세상

"다리 쭉 펴고 편안히 누울 공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 상도 2동 철대위 김영재 위원장

이강철

지난 5월22일 한신대에서 전국철거민연합 연대주점이 열렸다. 풍동, 상도2동에서 철거민들이 참가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서울 남가좌동 철대위가 용역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 버렸다. '다음은 상도2동이겠군….' 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으로 전국철거민연합 연대주점이 끝났다.
연대주점 뒤, 27일 동작구 상도2동 173~159번지 일대 꼭대기에 있는 상도2동 철대위를 찾았다. 동네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주위의 집들은 온통 폐허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철거망루(골리앗)에서 소리가 들렸다.
"위원장님 만나러 왔는데요."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개가 쉴새없이 짖어댔다.

사실 오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왜냐면, 어제 부천 소사 철대위가 발대식을 하자마자 주공직원들과 경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여러 명이 연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내가 이렇게 상도2동 철대위 분들을 만나는 것이 민폐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철거망루에 들어가자 상도2동 철대위 분들은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밖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너무나 다정함이 있는 분위기였다.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눈가에 잔잔한 주름에 정말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다정하게 나를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나를 안내해 주신 분은 이 곳 상도2동 철대위 위원장 김영재(54세) 위원장이다. 잠시 후 따뜻한 커피가 나오고, 김영재 위원장님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위원장은 처음에는 학생들이 줄곧 하는 투쟁 같은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27년째 이곳에서 사신다는 김위원장님은 아현동에서 시계방을 운영하다가 도로확장 때문에 철거당하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지금의 철거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이 곳 상도2동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파출부나 청소부 및 일용직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달동네 마을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상도동 땅의 주인인 양녕대군 문중에서 땅을 경향건설에 팔아버렸고, 땅 주인이 된 경향건설은 어떠한 향후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강제철거의 위협을 가해왔다. 현재는 40여 세대가 이 철대위에 참가하여 싸우고 있는 중이다.
철대위는 작년 4월10일 결성되었다. 세입자의 권리가 무시되거나 합리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강제 철거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순환식 개발을 통한 가수용 시설 실현과 영구임대주택에 확실히 입주할 수 있도록 하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거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속에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로 집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민들이 주거의 권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집이 없는 이가 60%인데, 영구임대 주택들을 지어서 조금씩 그 비율을 줄여나가야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없는 것이 죄는 아닌데…. 이 세상에 제대로 돈 버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신의 땀 한 번 안 흘리고 버는 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리 쭉 펴고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공간만 마련되어도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김위원장은 정부의 정책이 '자본이 있는 자들의 정치'일 뿐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지금 노무현 정권은 이전의 김대중 정권보다도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있는 자들의 정치이지, 이게 어디 서민들을 위한 정치입니까? 가진자에 의한, 재개발·재건축 때문에 세입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채울려는 것에 의해서 쫓겨나가게 되고, 쫓겨나가게 된 사람들은 또 다시 싼 곳을 찾다가 겨우 살 자리를 마련하면 개발한다는 목적으로 쫓겨나는 이런 무차별적인 개발에 의해 철거민들은 계속 양산된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결코 꽁짜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가도 본인부담이 20%입니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영구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것조차 버겁다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위원장님은 1남 2녀의 자식을 둔 아버지이다. 자식들이 다 커서 회사를 다니고 돈도 적게 버는 편은 아니라 한다. 그래서 종종 자식들은 아버지가 이 싸움을 할 만큼 했으니 그만 두라고 한단다. 그러나 김위원장님은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닌데, 여기까지 와서 그만 둘 수는 없죠."라며 웃음을 보인다.
이 철거싸움을 끝내고 하실 계획에 대해서 묻자, "내가 이 싸움을 이기고 빈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말하면 그것은 가식적인 말 같고(웃음), 전에 하던 노동을 다시 하고 싶어요. 그리고 돈이 생기면 철거민투쟁 후원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철거투쟁에 뒷바라지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웃음)

집은 오늘의 고된 노동으로 지친 심신을 휴식하여 내일의 노동을 위해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서 주택은 고이윤을 발생시키는 상품으로 전락되었다. 각종 주택개발사업 지구 내에서 원거주민들에 대한 주거권은 폭력으로 강탈당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선대책·후철거, 순환식개발에 따른 가수용단지와 영구임대주택을 건립하는 것이다. 원거주민들의 실정에 맞는 영구임대주택이 건립되고, 영구임대주택 건립 전까지 임시 거주로 사용할 가수용단지가 건립되어야 한다. 이로써 기간의 주민들의 생활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정된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동지들의 연대투쟁이 저희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 배웅해주는 김위원장님. 돈벌이가 없어서 생활의 궁핍함과 아이들의 교육이 걱정된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 속에서 이들의 싸움이 결코 외롭거나 패배하지 않기를 바라며 상도동에서 발길을 옮겼다.

 

2003-06-05 23: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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