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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4/18
    노이로제
    나른
  2. 2008/04/16
    예민하다,
    나른
  3. 2008/04/16
    J를 만나다
    나른
  4. 2008/04/12
    음력 2월 25일
    나른
  5. 2008/04/12
    사용자에 대한 광위적 해석
    나른
  6. 2008/01/30
    장학금 받다
    나른
  7. 2008/01/14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쓸 수 있을까
    나른
  8. 2007/02/21
    언니들의 출사
    나른
  9. 2007/01/05
    2년의 시한부(1)
    나른
  10. 2006/10/12
    미친 시간(mad minutes)
    나른

노이로제

여학생휴게실 근로자는 2명이고, 일주일에 한번 빼놓고는 내가 모두 9시에 오픈을 한다.

저번에 한 번, 세미나 이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에 잠들어 내가 오픈하지 못하고 10시반에 오픈이 된 적이 한 번 있다. 11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학교로 왔고, 사과문을 쓰고, 징계를 달라 여위에 요청했다. 그리고 한시간 반은 자진해서 채우면서 일이 마무리 되었지만, 세미나의 여운?충격?을 혼자 해결하지 못한 것이 근로라는 것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용서가 안되서 위원장님을 만나니 감정이 폭발해 울어버렸다.

자책감 대략 200%

 

*

저번주 2개의 전공시험때문에 일요일 밤을 지새웠다. 월요일에 시험을 치고 수업이 끝나 7시쯤 집에 가서 바로 뻗었다. 알람을 맞춰놓았지만, 휴대폰이 진동으로 된 상태였다. 눈을 뜨니 1:46. 바로 위원장님에게 '오픈을 하지 못했다, 죄송하다, 어쩌면 좋냐'는 문자를 보내고 부리나케 일층으로(내 고시텔은 3층이고, 내 방에는 창문이 없다) 내려가니 깜깜하다. 시계를 다시 확인해보니 AM. 아 다행이다. 위원장님에게 시간을 착각했다, 미안하다, 나 요즘 미쳐가나 보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잤으나, 중간에 여러번 깨고 아침일찍 학교로 와 오픈.

 

**

어제 팀프로젝트가 11시에 끝나 이후 집으로 가 기절.

일어나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있고, 부재중 전화 수십통. 기절할 거 같다.

다시 일어났다. 아 꿈이구나. 현재시각 새벽 5:45

물 먹어 제 정신이 아닌 휴대폰에 다시 알람을 제대로 맞추고, 다시 누움. 6시쯤 다시 일어남

7시쯤 다시 일어남

8시 반 쯤 알람을 듣고 일어나 채비 하고 학교로 와 오픈.

 

 

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제길. 이러다 내 명에 못 죽겠다.

학생들 돈으로 운영되고 학우들과의 약속인데다 내가 오픈인 만큼, 그냥 알바와는 좀 다르다는 건 알지만, 오픈하지 못하는 꿈까지 꾸다니. 나른지못미.

노이로제 걸릴 거 같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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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하다,

수업이 끝나고 시험과 레포트에 관한 것으로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갔다. 팀플을 함께 하는 팀원 하나가 보고서를 냈는데, 오류로 인해 교수님은 받지 못하셨고, 벌써 2주가 지난 상황에서 그도, 교수님도 당황해 하셨다. 보낸 메일함에 저장도 되어 있지 않고, 파일도 집에 있다는 그의 말에 교수님은 난감해하며 일단 보내라고 하신 뒤 돌려보내셨다.

 

나는 시험에서 왜 점수가 깎였는지에 대해 듣고, 납득했다. 3점이 깎였지만, 다른 보고서와 레포트들은 거의 만점인데다 시험도 결국 A등급에 들었고, 내가 틀린 부분이 있었기에 납득했다. 그리고 친구와 내려와서 팀원의 보고서 평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중요한 보고서이니만큼 그가 한번 보내고 말 것이 아니라 이후라도 교수님의 수신을 확인했어야 하며, 인터넷이 오류가 많은 것은 컴공인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교수님이 여타 공지하지 않은 것은 문제지만 결국 학점이나 보고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만큼 그의 레포트 점수에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 게다가 보고서의 특성 상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면 더 많은 정보와 내용조직화를 이룰 수 있으므로 '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등의 입장이었고,

 

친구는 교수님이 인터넷의 오류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적 없다, 그의 잘못도 분명이 있지만 온전히 그의 잘못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게다가 난 그 사람의 평소의 성격 상 조작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너 점수때문에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라는 말을 했다.

 

졸업이 다가오고 1학년의 학고 때문에 학점은 나에게 '성실도'를 평가하는 항목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수업은 절대평가인데다 그 사람의 학점을 깎는다고 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며 사실 이 부분은 교수님이 내릴 결정이라는 것, 교수님의 성격 상 어느 정도의 불이익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학생들과의 '공평성(또는 형평성)'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지, 그 사람의 '성격(인품)'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정말 안면 없는 누군가가 똑같은 상황이었다손 치더라도 난 똑같이 반응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친구는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는 문제다.

사람의 성품이나 품행이라는 것에 어떻게 '신뢰도'를 측정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

'평소 그 사람을 봐, 그렇게 바르게 사는 사람이 그럴리가 없어.'

'저 사람은 평소에도 저러는데, 어떻게 믿어?'

등등등

 

게다가 이 많은 토론을 단순히 내가 시험에 대해 "예민"해져서 보인 반응이라 치부하다니, 이거 너무 억울했다. 뒤늦게 다시 문자를 보내서 예민하다는 말을 듣는 건 좀 억울하다 했다. 이래저래 이야기가 오가고 자신은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귀찮았다는 답을 듣고보니 참 허무하다.

참, 이런 토론같지도 않은 토론을 하느라 힘 빼고 점수때문에 예민하다 말 들으니 참 치사스럽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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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를 만나다

2007년 중순, 나는 그때 약간은 강박적으로 연애를 시작했고, 학교의 일을 습관처럼 또 놓아버리고 있었고,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꼬이고 있었다.

 

J를 만난건 2006년. 우리가 친해지게 된 계기는 J의 짝사랑의 대상이 나의 주변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2007년 5월? 난 술을 잔뜩 마신 상태에서 J에게 독설을 퍼부었다-그러나 앞 부분만 기억날 뿐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도통 지금까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J와 어느 정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기에 난 그저 아무일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당시의 여러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기만 했던 그 순간들 속에 J와의 일은 여전히 정지되어 해결되지 않은 찝찝한 그 무언가로 남아 있었다.

 

그저께, 학생회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화장실로 가는 J를 보았다. 순간 사무실로 뛰쳐들어갔다. 아, 왜 숨었지? 그치만 심장이 콩닥콩닥 거렸다. 지금 마주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도통 모르겠다. 망설이다 이어폰을 꼽고 있는 J를 뛰어가 잡았다. 어색한 인사, "오랜만이다."

 

10분 정도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너가 나와 이야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들었다, 그래서 연락할 수 없었다, 너의 소식이 궁금했다, 앞으로 만나든 만나지 않든 한번쯤 정식으로 사과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쩌구 저쩌구..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내 예상보다도 J는 나에 대한 감정이 많이 없어진 듯 했다. 

 

나는 왜 J와의 연결고리를 다시 이으려고 하는 것일까, J가 마음에 두었던 상대의 연애관계를 보면서 어쩌면 J도 그 낚시질을 덥썩 문 아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내가 J와 나누었던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를 찍고 하고 싶어하던 시절, 난 J를 대상으로 하려고 했고, 인터뷰(혹은 수다)를 통해 몰랐던 J의 여러 부분을 발견하고 공감했었다. 피겨를 하는 J의 몸-다이어트에 대한 강박, 체육계의 여러 문화나 관습, 여타 J의 개인적인 부분들.

 

그러나 여전히 한구석이 불편한 것은, 나만 온전히 가해자로 몰리고 있는 것같은 기분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J의 어투에는 비난뉘앙스가 섞여 있다. 일방적으로 쏟아낸 것, J와의 관계를 단순화시켜 상처입힌 것 등 나의 잘못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뭐랄까, 나 혼자 옴팡 뒤집어쓰는 기분이랄까. 정작 분노의 대상이나 함께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그 원망의 몫을 내가 여전히 학교에 남아 존재한다는 이유로 다 받아야 하는 건 어쩐지 좀 억울하다.

 

아아 머리가 복잡해.

그치만 역시 J와 만난 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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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25일

최근 미니홈피의 다이어리를 정리하다 저번에 '엄마의 집'을 읽고 쓴 글이 있다.

세미나에서 읽었던 책인데, 어떤 멤버는 재미없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난 감정이입하고 봤다.

 

설에 '엄마집'에 갔다.

- 전경린 '엄마의 집'을 보고 나서가 아니라 난 원래 부산에 갈때면 자연스레 '엄마집'에 간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로 거금을 좀 쥐고 있던 내가 선물을 하겠다고 하자

엄마는 또 거절이다. 화장품이라도 사주마라고 하니 그제서야

"그럼 내려와서 엄마 가방 사도. 엄마가 고르께." 한다.

지난 4년간 가족과 상황과 공간이 급변하면서부터 엄마는 더더욱 나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밥먹었나, 잘 먹고 다녀라, 뭐 해 줄까, 돈 안 필요하니, 아프지 마라, 안 춥나, 안 덥나.

 

카네이션 말고는 처음으로 선물을 했다. 처음 하는 선물인데도 4만원짜리 가방 앞에서 비싸다며 망설이는 당신을 보며 짜증나고 답답하고 미안하고 안쓰럽다.

 

엄마는 4년 전부터 차츰차츰 변해서 지금도 변하고 있다.

가방을 사달라는, 화장을 하는, 머리에 신경을 쓰는, 일요일마다 데이트하러 나가는 당신이 너무 좋다. 점점 더 변했으면 좋겠다. 난 어느 정도 서운할 것이다. 내가 없어도 괜찮은 엄마가. 엄마에서 이순옥여사로 계속계속 행복하게 변하길 바란다.

+)

 

"딸 오늘 생일이제. 5만원 보낸다. 맛있는거 사먹어라."

벚꽃나무와 함께 도착한 메시지.

 

음력 2월 25일은 내 생일이다. 올해는 4월 1일이 그 날이었고, 사실 생일을 잘 챙기지 않아서(게다가 요즘 누가 음력생일을 ;;) 이여사(엄마)의 문자를 받고, 아 오늘이구나 했었다. 생일이고 자시고를 떠나서 현금 5만원이 생긴거이 무척이나 기쁜 날이었다. +ㅁ+

 

"엄마는 그 때 갈 데가 없는거라. 돈도 없고. 지금 이만큼 자리잡고 니가 올 때도 있고 하니까 좋긴한데, 돈 벌 수 있을 만큼 벌어서 집 같은거 하고 싶다. 집 나온 엄마들, 갈 데 없는 중고등학생들 데리고 있고 싶다. 연립주택같은거 사면 엄마는 방 한칸만 있으면 되니까. 나머지는 그런 사람들 올 수 있는데 만들고 싶다."

 

엄마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 생경했지만 너무 좋을 거 같다 이야기했다. 난 좁은 다락방이 좋으니 내 공간도 하나만 주면 안될까 하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크크. 다이어리를 보니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오늘에서야 엄마한테 낳아줘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여사님, 낳아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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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에 대한 광위적 해석

우리 과에서 유일한 여자 교수님의 '노사관계론'수업을 듣고 있다.

노동조합 설립 요건 중에서 소극적 요건(결격 요건)중 첫 번째가 '사용자가 참가해서는 안된다'이다. 그러나 이 사용자에 대한 광위적 해석을 요한다는데, 인적자원관리(HRM) 담당자들, 감독자들 등 사용자의 직간접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자또한 사용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거다. 노조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란다. 사실 잘 이해가 안됐다. 어디까지를 경영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어디까지를 노동자라 할 수 있을까, 어렵다.

학교에서 근로를 하는 나는 금토 저녁에만 호프집에서 5시간씩 일을 한다. 사실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우리를 관리하는 매니저님때문에 그냥 남아있게 되었다. 매니저님은 34살로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며, 이래저래 잘 챙겨주시는 분이다. 정도 많고 권위의식같은 것도 없는 분이라, 나도 한 달만에 정이 들어 결국 이 가게에 눌러 앉아 버렸고, 가끔씩 대타를 뛰어주거나 알바시간을 바꿔 주거나 한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언니중에 근처 K대에 다니는 중국인 직원언니가 있다. 언니와 매니저님은 사이가 매우 좋고, 암튼 그렇다. 방금 내가 퇴근하기 전, 가게 분위기가 쌀벌해졌다. 언니와 매니저님이 일 문제로 불꽃이 튄 것.

한국어 능력시험과 중간고사를 앞둔 언니가 알바로의 전환을 요구했고, 사장은 평소부터 언니를 못 마땅해 했기에 별로 반기지 않고, 매니저님이 중간에서 조율을 했다. 평일에는 알바로, 주말처럼 길게 일하는 시간은 직원의 급여로 받는 것이다. (참고로 직원의 급여가 시급 4000원인 알바보다 저임금이다) 언니는 불만을 토로했고, 주말에 알바로 전환해서 일찍 보내달라, 사정좀 봐 달라, 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매니저님의 반응. 그건 니 사정이다, 가게가 어떻게 니 사정까지 다 봐주냐, 주말까지 널 알바로 쓸 수는 없다, 이런 식이면 계속 일 못한다, 사장입장에서도 어떻겠냐, 가게 사정도 어려운데 너까지 왜 이러냐 어쩌구 저쩌구 저쩌구

 

아, 이거구나. 관리자라는 입장의 사람을 어째서 사용자로 해석해야 하는지.  평소에는 그리도 사람 좋은 당신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핏대를 세우고, 언니를 몰아부쳐댔는지. 내가 독감으로 편도가 부어 침을 삼키지 못하던 지경에서 연장알바를 했어도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고 결국 칼같이 분까지 계산해서 주시던 그 모습과 오늘의 그 모습에서 나는 사장을 보았습니다.

당신도 고용자이면서, 노동력의 수적 유연성을 추구하는 사장의 성향으로 미루어 당신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똑같은 고용자이면서, 어째서 임금이나 고용에 대해서는 그리도 사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 이건 단지 알바일 뿐이지만, 기업이나 사회로 더 나아가게 되면 결국 사용자에 대한 광위적 해석의 필요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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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 받다

저소득 가정을 위한 학과추천 장학금.

받게 됐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데,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이 기분은 도대체 먼가. 쩝

 

모든 대학들이 등록금을 인상하려고 한다. 등록금이 천만원인 시대라네.

내가 다니는 학교도 작년에 거의 10%가까이 올라 300을 육박하고, 이제 또 10%오른다고 가정하고, 학자금 대출이 7.65%니, 반액을 받아도 보증액까지 합하면 200가까이 든다. 게다가 이자만 한달에 6만원씩 내고 있는데 제길 또 오른다니 낭패다. 이제 거의 8만원정도를 매달 이자로 내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2008년도 알바와 함께 한 해를 보내겠구나.

 

등록금 좀 그만들 올려라. 허리휜다 허리 휘어. 4학기 다녔는데, 벌써 빚이 천만원이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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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쓸 수 있을까

기말고사를 이틀만에 치루고 다음날부터 계속 일만 했다

중간에 부득부득 주말에 쉬겠다 우겨 태안에 한번 다녀온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안.했.다.

 

더이상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주말에만 알바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오늘부터 백수로 전환했다

 

개강하기 전까지 죽어라 일만 하면-달리 딱히 할 일도 없고-

200여만원을 손에 쥘 수 있지만

백만번 곱씹어도 날 좀먹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1일 월급을 받았고, 지금 그 돈으로 산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어도

정승처럼 쓰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통장에 찍힌 숫자와 잔고를 보고 나니 기쁘지도 보람되지도 않고

그저 허망하다

허망하다

허무하다

 

고작 이 숫자를 위해서 하루 12,13시간씩 서서 일했었나

된장남 된장녀 복부인들에게 왜 그렇게 굽신댔었나

가게 마초들의 비위 상하는 발언에도 그렇게 자신없게 저항했었나

씨발

 

일하면서 는 거라고는 지랄같은 성격과 이중인격과 욕뿐인 것 같네

 

결론은 개처럼 벌면서 살 수 없다는 거다

 

 

*

12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작년에 오래 일했던 매장 직원의 부고를 받았다

연락을 받고 5초동안 멍 하다가 2명에게 전화를 했고

부고 사실을 확인하고 고인을 떠올리다가 우울했다가

 

다음날 평소처럼 출근해서 가게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젊음이 안타깝고 사람이 아쉽다

친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저 좋은 사람이었으니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 믿는 게 내가 취한 유일한 액션

 

 


**

역시 돈에 내 인생을 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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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출사

2월 19일

 

다섯명의 언니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모였다.

명절이 아직 다 지나가기 전,

 

숨막히는 친척집에서 떡국을 먹자마자 도피한 나,

집에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 노다메 칸타빌레에 빠진 언니,

이쁜이 카메라를 들고 온 명절을 싫어하는 언니,

일하느라 오랜만에 본 언니,

굶주린 우리를 위해 음식을 잔뜩 싸들고 온 언니.

 

햇빛이 나면서도 서늘한 날

아이들이 많은 어린이 대공원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는 명절음식은

우리에겐 행복, 그 자체였다.

 

물론 셔텨를 누르는 손이 어색하거나

노출을 걱정하거나

빨리 롤을 뽑아보고 싶다거나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찍고 싶은 것에만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 재잘재잘 수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은

빛바랜 예쁜 사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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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의 시한부

지난 2006년 12월 30일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됐다.

 

요즘 자주가는 알바*사이트에 가면 경악할 정도로 모든 직종이 파견이나 비정규직이다.

거기에는 "니가 열심히 한다면 계약직으로 전환될 수도 있어"라는 얄팍한 문구도 추가로 새겨져 있는 곳이 많다.

그것을 보면 왜 쓴웃음을 짓게 되는 것일까.

 

나 또한 알바로,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비정규직이나 파견노동자로 일할 수도 있다. 취업은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뿐더러 서울에 4년제 졸업생은 넘쳐난다. 또한 많은 일자리들이 1,2년 정도 "쓸 수 있는" 노동자를 원한다.

 

이제 7월 1일부터 3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비정규직법안을 적용해 2년 이상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 파견근로자에 대해 정규직화를 의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확대해갈 것이라고 한다.

높으신 님네들은 이걸로 비정규직 보호 될 거라고 믿나보다. 반대하는 사람들 제쳐놓고 재빠르게 의장봉 탕탕 내려치고는 흐뭇해 한다.

 

그런데 이게 왠걸.

벌써부터 역효과가 나타난다.

비정규직, 파견근로자, 각종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계약만료를 이유로 혹은 기타 이유로 해고조치 해버리는 것이다.

공적 기관인 법원에서조차 비정규직을 계약만료되는대로 내보내겠다는 데 일반기업이야 뭘 더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2년, 비정규직의 생명은 2년까지다.

고작 24개월.

짧고도 허무한 숫자다.

 

20대- 그것도 갓 대학을 졸업한-는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이며 가능성도 열려 있는 시기이다. 이 높은 생산성을 지닌 20대-특히 여성-를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파견직으로 1,2년 부려먹고는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하며 버리고 다시금 갓 졸업한 창창한 20대를 고용한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만,

남성에게만,

나이에 한해서만,

학력에 한해서만,

외모에 한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내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나에게도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졸업을 하고나서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고용에 안정감을 느끼고 일을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실상 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20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지, 일회용 근로자나 닳으면 교체할 수 있는 기계가 아니며, 2년이라는 그 고리에 얽매여 켁켁거리며 불안해 하고 싶지 않다.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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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시간(mad minutes)

미친 시간 (mad minutes)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병사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하여 2개월에 한 번 정도 2-3분의 시간을 주어 부대 안의 목표물을 제외한 어떠한 것에도 자유로이 총격을 가하도록 허용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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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을 잡는 다는 명목 하에 저질러진 수많은 학살과 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1966년 미국의 베트남 침공에 한국군은 외화와 차관과 무기를 받으며 지원에 나섰고, 그들은 월남군인으로 한국 경제를 부흥시켰다는 거창한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학살과 범죄가 드러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큰 파문이 되었었다.

 

요즘 전쟁이나 평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시점이고, 일본 군 위안부 문제는 꼭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있기에, 이 "미친 시간"은 참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같다.

 

한국인 누구나 일제와 전쟁의 피해에 치를 떨고 분노할 것이다. 일정 시대를 살고, 북한에서 6.25를 피해 월남한 할머니를 통해 전쟁과 일정시대는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다. 그리고, 할머니를 통해, 한국은 전쟁과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했었다. 적어도 몰랐을 때는.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던 베트남 전쟁과 라이따이한(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의 자녀로, 한국군은 대부분 이들을 현지에 두고 왔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대를 잇는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며,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고,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회피심리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월남군인들과 그 자손들 중에서도 고엽제나 각종 질병-정신병을 포함한-을 질병을 앓고 있는 피해자들이 많기에..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베트남전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한겨레에 의해 보도되곤 했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베트남 서민들에게 저지른 끔찍한 학살과 범죄에 대해서 말이다.

전쟁은 인간을 극도로 광기로 몰아넣으며 내면의 밑바닥까지 드러내게 만든다.

그것은 한국군도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

 

"미친 시간"에서는 베트남 전 양민 학살의 생존자들이 나와 학살 당시의 사건과 죽은 가족들과, 한국군과 미군이 저지른 일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 한다. 대부분은 빈곤하게 살고 있으며, 가족을 잃고, 몸을 다친 정신적 고통에 아직 힘들어 하고 있다-사실 이런 일을 잊을 수 있다는 일이 가능한 지 묻고 싶다-.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지만 이들은 학살 당시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이야기하며 한국인과 미국, 그리고 전쟁을 증오한다고 털어놓는다.

 

왜 아니랴.

하다못해 일제시대도 아니고, 독재시대의 세대도 아닌 내가 일제를 증오했고, 분노했으며, 독재시대의 탄압과 인권유린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비단 경험에 의해서만은 아니니까.

 

나는 미친시간을 보는 내내 부끄러웠다.

일제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당연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고, 넘겨버렸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뭐, 이야기가 잠시 샜지만.. 무튼 내가 바라는 건 진정한 평화다.

그리고 그 평화는 과거의 기억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학살과 범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보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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