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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02
    어머니가 편찮다
    공돌
  2. 2007/06/20
    자살
    공돌
  3. 2007/06/18
    장고항 낚시
    공돌
  4. 2007/06/18
    양준혁
    공돌
  5. 2007/06/12
    알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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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06/12
    연구라는 것
    공돌
  7. 2007/05/28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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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05/28
    내고향 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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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05/28
    갑식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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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7/05/28
    천리포 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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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편찮다

이소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녹색병원에 계시단다.

날 찾으셨다는데, 오늘 이라도 당장 찾아가 뵈야겠다.

 

약 욕심 많은 어머니께, 약이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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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자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자살을 찬성하는 친구의 요지는 거두절미하고 "자기결정권"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선택"하에서 이뤄진 것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한 마디로 개소리다.

 

 

태어난 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한 죽음도 스스로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죽음 뿐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전개되거나 강요되고 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우리의 삶이나 생각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건 그저 "가정"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할 수만 있다면"같은 이야기란 말이다. 

 

세상에 선택할 것이 그리 많은데도 하필이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거니와 선택할 것이 없어 오직 죽음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열사의 죽음이라는 것도 사실 열사를 둘러싼, 이타적 죽음을 선택한 자의 가족을 생각할 때, 그 죽음이 한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죽음으로 항변하고, 죽음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외눈박이 집단인 사회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기형적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죽음으로가  아니라 집단적 저항으로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 개인이 초개같이 산화하는 것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수만개 실핏줄로 엮어 낳은, 자신과도 다를 바 없는 저 자식을 갖다버리는 일도 선택가능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의 논쟁도 "선택"과 "자기결정권"으로 설명은 가능하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면 뭐하는가. 나는 이런 자체가 상상력을 떠나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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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항 낚시

 

 

낚시를 했다. 그리고 갈매기를 가까이서 보았는데 눈이 너무 귀엽더라.

나는 모습이 너무 근사했고, 날개를 편 모양이 자유롭게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몇 마리의 우럭과 문어를 잡았고, 그것들은 '소주'와 함께 입으로 직행.

 

그러다 태국 속담이 갑자기 생각났다.

 

"땅에는 쌀이 있고, 물에는 물고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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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뭔가 끊임없이 갈구해야 한다. 요즘 후배들은 그런 면이 부족한 것 같다.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할까. 야구는 끝이 없다. 잘 하면 더 잘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양준혁의 말이다. 배울게 많다.

 

당대의 모든 바이올린 기술을 총망라했던 지고이네바이젠. 그 곡을 만든 '사라사테'도 마찬가지이다. 양준혁을 '천재'라고 부르는 것처럼 사라사테도 천재라고 불렸다.

 

그들 둘의 공동점은 '반복적 노력'이다.

 

사라사테도 자신에게 그의 천재성에 대해서 말하는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하루에 14시간씩, 30년간 지금까지 연습하면 천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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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함

내 속에 아직도 알량함들이 남아 있더라.

 

자기점검이 아직도 너무나 필요하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의 몇 마디 말씀이 귀에 꽂힌다.

 

- 한국의 젊은이들이 점차 보수화되어간다고 합니다. 사회과학서적을 읽는 학생들을 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 대학가의 서점도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 제기되어 온 '인문학의 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이들의 보수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것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지난날 치열하게 진보와 개혁을 위해서 싸웠던 우리들의 처지에서 보면, '젊은이들의 보수화'는 우리가 바라던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그처럼 자유분방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인간의 욕구와 창의력을 마음껏 발현하고, 심지어 '버릇이 없다'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우리가 과거 언제 해 봤나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과 관습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의 보수화가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가운데에서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한국사회의 도덕적 파탄에 대해서는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검소한 생활, 고귀한 사고(Simple life, high thinking)',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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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라는 것

공부는 실천을 위한 탐구과정이지만, 연구는 대상을 탐구하는데 그친다.

 

종종 연구물을 읽어보면, 내가 지금 뭐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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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성환이가 왔었다. 내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이자 아직까지 무수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다. 중고등학교 때 프로이트와 칼 융에 대해서 이야기 했고, 노자와 장자에 대해서 밤새껏 토론한 적도 있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난 이후, 10여년만에 다시 대학에 들어갔지만 다시 얼마전에 그만뒀다. 그리고 그만둔 일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서른이 지난 나이에 그이에게 '졸업장'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전공이었던 '물리학'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졸업장이 주는 무게감을 쉽게 털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성환이의 에너지는 무엇보다 '역경'에서 비롯된다. 부모님 모두 사고와 병으로 돌아가시고, 장례를 지내는 동안 내내 같이 있으면서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두 명의 누나가 문제였다. 둘다 결혼은 했지만, 둘 다 몸에 이상이 있다. 큰 누나는 다리가 불편하고, 약을 끼고 살고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작은 누나다. 작은 누나는 '아이젠 멩거 증후군'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있다. 이 병은 심장과 폐를 동시에 이식해도 생존율이 얼마되지 않는다.

 

결국 성환이는 대학을 포기하고 나름대로의 사업과 직장생활을 전전한다. 집안 문제가 이렇게 만리장성처럼 그의 진로를 떡하니 가로 막고 있을 때, 또 하나 일어났던 사건은 '친구'문제가 있었다. 나랑도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생인 친구가 성환이에게 인터넷 사업을 제안했고, 성환이는 이에 응하여 사업을 같이 했다. 사업도 나름대로 되는 편이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그 친구라는 놈이, 양아치 몇 놈을 시켜 성환이에게 있는 돈을 다 내놓고 그 사업에서 손을 떼라고 한 것이다.

 

그 친구놈, 친구라고 부르기도 천박한 놈이 알고 보니 '양아치'였던 것이다. 성환이는 그 사업에서 손을 떼고 자신이 따로 사업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은 '성인콘텐츠'에 광고를 대행해주는 회사였는데, 이번도 성환이가 기술적인 부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일에 환멸을 느낀 것이 몇 개월이 지난 후, 성환이가 서울로 나를 찾았고 조만간에 그 일을 그만두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가치기준으로 살고 싶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나와 전순옥과 임금빈은 박성환을 만나 이야기를 했고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성환이는 나름대로 신변정리가 끝나게 되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 거주지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되지 않는다. 성환이도 걱정하지 않는다. 성환이가 경험한, 경험하고 있는 일들이 현실에서 60억 인구 중에 몇 명 되지 않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이는 지금을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환이는 그렇지 않다. 그이의 에너지가 힘있게 가동될 것이라고 믿는다. 가동되는 만큼 더욱 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성환이와 할 일이 있다. 몇 년 간 생각했던 공동의 꿈이 있다. 그 꿈을 위해 성환이를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해보고 싶은 일을 제대로 찾았을 때 기분이다. 결정되면 연락할께"

 

이 말을 남기고 성환이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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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영도

 

얼마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 친구 해민이는 배우 권해효의 조카다. 3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기일에 친구들 중 나만 그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매년 한 두번씩 전화는 왔지만 만나보지는 못했다.

 

기일에는 영도를 찾아가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갑자기 내고향 영도가 생각나 검색을 해보지 멋들어지게 찍어둔 사진을 몰래 훔쳐왔다. 그래도 밑에 출처가 있으니 별 일이야 있겠는가.

 

사진에 찍혀있는 곳은 사연도 많다. 고등학교 때 수능시험을 본 이후 책을 쫙쫙 찢어발기고 찍어발긴 책에 불을 댕겨 모닥불 삼아 막걸리를 마신 기억이나 오래전의 여자친구와 함께 수영을 즐긴 추억도 있다. 더군다나 내가 사랑하는 후배들과 친구들이 함께 고민을 털어놓고 새벽까지 술을 마신 곳이기도 하며, 뇌출혈로 죽은 내 선배의 뼛가루와 영혼을 뿌린 곳이기도 하다.

 

군사지역이라 들어가지 못했던 곳이기도 하고, 예전에 큰 배가 태풍으로 쓸려와 그 배를 다시 띄우기 위해 오랜시간에 걸쳐 둑을 쌓는 바람에 바다 앞에 작은 호수같은 것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은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하고 풀코스 산책길을 걸어본 이후, 바닷가 산책길이 영도의 저 길만큼이나 좋은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여름이 되면 다시 찾아가고 싶지만, 함께 갈 이가 없어 조금 쓸쓸하기는 하다. 그러나 막상 혼자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떼다 보면 묵혀있었던 감정들이 바다에 쓸려가 버린다. 그래서 고향은 내가 버릴 순 있어도 고향은 나를 버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굳게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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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식형

 

갑식형과 내가 그리 친하지 못한 것은 갑식이 형이 술을 안마시기 때문이거나 내가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형이 공부를 그만두면서, '노동법학'지는 내가 물려받았지만 그 이후 새로 나온 '노동법학'는 나에게 없다.

 

공부의 기본은 먼저 자료를 확보해두는 것인데, 나에게는 필요할 때 모아둔 것을 제외하고는 별로 자료가 없다. 갑식형에게 배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회사를 다니고 있고, 잘 연락이 안되지만 예전에 대학원 워크샵 때 '농협대학'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한 장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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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 수목원

전순옥 박사와 몇 명이 함께 '천리포 수목원'을 방문했다. 1박을 했고, 수목원 내부 한옥집에서 잤다. 

 

수목원은 약 1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으나 설명을 듣고 꼼꼼하게 살피면 하루도 모자랄 것이다.

이곳은 다양한 수목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잘 관리된 만큼 회원에게만 공개된다.

팜플렛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식물을 보유하더라도 그 식물의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면 그 식물에 대한 가치는 떨어집니다."

 

www.chollipo.org

 

뱀발: 후박나무, 양귀비, 배롱나무 등 몇 개 특이한 식물만 찍어서 남겼다.

 

                        

몇 개의 한옥집은 회원에게  공개                  양귀비는 팻말이 없었고, 그 꽃잎은 캉캉춤을

                                                                            추는 여인의 치마와 같았다.

 

                     

후박나무는 후덕한 인상만큼이나                  후박나무의 팻말

나무의 피부가 할머니의 손등같이

거칠면서도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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