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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설화, 雪花

 

한 철 보지도 못했던 나무를

겨우내 내가 잠시 걸었던 길에서

맞닥드리고서는 무심코 꺾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그 나무는 여전히

죽어 있었지만 그 자리는 의연히

지키고 몸을 파묻고 있었다

 

초록에, 붉은 빛에만

아름다워 하지마라

겨울이 오면 눈꽃 피니

눈의 즐거움에,

생각이 주는 아름다움에,

지겨워 하거나 속지마라

 

가끔씩 마른 나무,

죽었다 업신여기지 말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고

함부러 말하지 마라

 

싹이 트고, 꽃이 피면

나를 조롱하듯 푸르름 속에 숨어있다 

눈맑음에, 흥건한 봄이랍시고

눈여기지 못하다가

겨울되고 눈내리면 꽃이 폈다 

즐거워 한다

 

마른 나무 쓸모없다 함부러

말하지 마라

마른 나무 꺾는 네 손이 함부러

딴짓하지 않게

 

기어오르는 덩굴손에 감싸안겨주는

마른나무가 더이상

미안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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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없다. 상황이 나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복수심이 있다면, 애초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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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

사회생활.

 

먼저 학벌 문제를 말한다. 학벌이 좋은 사람들이 나에게 피해 준 적 없다. 그러나 솔직히 불편하고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은, 있다. 학벌이라는 건, 없어지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이 뭉치면 학벌은 생기기 마련이다. 학벌은 소위, 배운 놈들끼리 노는 것이다. 그건 권력을 형성하려는 속성 때문이다. 따라서 실력에 따라 어느 학벌에 편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정치에 의해, 처세에 의해, 학벌이라는 기존의 방호구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부여하여 서로를 방어하면서도, 때로는 그 집단에 대한 배타적인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좋은 학벌. 그게 인생의 목표이든, 그것을 이용하여 이타적인 목적을 달성하든 간에, 어짜피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불편하기 그지 없으며, 그런 비과학적인 근거로 사람을 나누고 무리짓은 것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높은 학력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한 사회가 부여한 것이고, 좋은 일에 써달라는 인민의 배려라면, 학력을 권위쯤으로 여기고 남들과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장사꾼과 다름없다.

 

인생의 목표? 하고싶은 일? 인생의 목표는 여유롭고 잉여가 있다면 속된 것이기 마련이다. 마냥 돈을 많이 벌거나 승진하거나 인정받는 일 등. 그러나 몸 아픈 사람들의 목표는 건강이다. 그 뿐이다. 생계가 힘들지만 돈을 벌겠다는 이들, 그들은 독한 마음을 먹고 돈의 노예가 되기는 보다는, 돈을 벌어 자신과 남을 돕는다는 생각부터 한다. 그게 있는 놈과 없는 놈의 차이다.

 

없는 놈은 없을 때 행복을 알며,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행복의 최단거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과도하면 부담스러워하고 상위의 것을 취하는데 망설인다. 그러나 편케 살아온 자들에게는 그런 삶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바닥은 쉬이 보이지도 않으며 쉽게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게 루소가 말한 불평등의 본질이다. 그래서 있는 놈들이 바닥을 보는 순간, 세상은 뒤집히기 마련이다. 그 또한 맑스가 알려줬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주어지는 선택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도전, 성취라는 말들은 좋은 의미로 세뇌되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 인간에게 몇 개나 되는가. 결국 어떤 것을 도전하고 성취하고도 공허간 이유는 무엇인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할 일이든 간에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모두들 행복하려고 하는데, 인생의 목표에, 하고 싶다는 일에, 자기만 있고, 남은 없다. 때로는 남은 있지만 남이 대상이 되어 있다. 내 행복 때문에. 그건 옳지 않다. 행복은 좀 더 배운 놈이, 좀 더 건강한 사람이 좀 더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과 좀 더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사회생활에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변태적으로 포장하거나, 잘못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지극히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도피적인 대답이 될 수 있는 통로가 되거나, 목표의 정당성, 도전의 진취성을 포장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사회를 구성하지만, 사람은 여러 종류의 사람이므로 결국 한 사회는 다양한 색을 띨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색이 원색을 가져야 한다면 원색을 많이 투입해야 할 일이지 그 잡종색의 원색으로 둘러싸봐야 결국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을 왜곡하는 사회생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또한 진정 행복이 뭘까,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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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대문

로그인을 하고 블로그 대문을 처음 맞대면, 솔직히 잠시 잊었던 소외된 이들을 만나고,

나는 잠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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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오후 3시 52분에 든 생각.

"상황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 그때그때의 심정만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불편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늘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준비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준비하려는 그 마음 자체로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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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삼성, 참 큰 일 많이 치른다...

 

이번 대선에는 결국 태안 기름 유출로, BBK 관심을 최대한 옮기주시려나 부다. MK 동영상 보다 순진한 국민들은 그걸 볼 시간에 태안으로 가거나, 그것을 보고서 태안에 가거나, 태안에 가야될 것인데 라고 고민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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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대선

 

난리법석입니다. 애시당초 예상했던 바이지만, 가는 곳 마다 선거포스터에 홍보물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각 후보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공약들만 실현되어도 세상은 엄청나게 바뀔 것 같습니다. 공약대로 된다면야, 저는 기표용지에 1번부터 12번까지 잉크가 마를 때까지 죄다 찍고 싶습니다만. 선거가 자판기는 아니죠.

 

한 두 번 속는 장사가 아니라서 이제는 그 공약들이 딱히 신뢰는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누굴찍을 것인가를 고민하기 보다는 투표장에 갈까말까를 고민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딱히 찍을 후보자도 없을뿐더러 자기들 마음대로 뭉쳤다가 헤어졌다가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하니 지금 마음 속에 누굴 하나 정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도,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투표날이 지나고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하루 아침에 경제가 보일러 돌아가듯 뜨끈뜨끈하게 돌아가지도 않으며, 막힌 하수구가 뻥하고 시원하게 뚫리지도 않습니다. 라이터 불 하나로 세상을 밝힐 수 없고, 성냥불 하나로 온 방을 데울 수는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가 바늘두더지 일화를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바늘두더지 한 쌍은 너무나 추운 나머지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서로를 끌어안습니다. 그러자 뾰족하게 돋아난 털이 서로의 몸을 찌르게 되고 그 둘은 다시 떨어집니다. 다시 몸이 얼어붙자 서로를 끌어안지만 털이 서로의 몸을 찔러 그 고통으로 다시 떨어집니다. 결국 바늘두더지 한 쌍은 얼어죽고 맙니다. 이게 소위 ‘바늘두더지 딜레마’라는 겁니다.

 

신문을 보는데 눈을 바짝 갖다 댄다고 해서 신문의 작은 글자가 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거리가 유지될 때 신문의 작은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법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도, 어떤 일을 판단하는 일도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비교적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술집에 들어가도,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나도, 간만에 부모님을 만나도, 생판 모르는 보험외판사원을 만나도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누굴 찍을 겁니까”입니다. 죄다 대선 외에 다른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사람과도, 대선과도 거리를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어차피 대통령이 당선되면 국민들은 “저럴 줄 알았다”는 탄성을 쏟아내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이 되어도, 혹은 당선이 되지 않아도 걱정하실 필요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나는 저 사람 찍었으니 욕해도 돼”라고 하시면 되고, 자기가 원하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면 “저럴 줄 알고 나는 안 찍었으니깐 저 놈은 욕먹어도 싸”라고 하시면 됩니다.

 

인도의 정치인인 네루는 ‘정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근데 선거광고를 보면 정치인, 저네들이 울고 자빠졌습니다. 가끔씩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뭘로 닦아주실지 솔직히 겁부터 납니다. 이번 대선, 너무 걱정하시지도 마시고 너무 깊이 관심을 가지시지도 말고, 그냥 실눈을 뜨고 모르는 척하고 지나치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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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옷 한 벌

가을옷 한 벌

 

낙엽이 들어갑니다. 신림동 관악산에도, 종로의 인왕산에도, 여의도 거리에 늘어선 가로수에도 수줍은 듯 붉게 낙엽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밤거리를 지나면 형형색색 즐비한 네온사인이 비추는 색들은 동공을 자극

 

하기만 하지만, 자연 스스로가 온 몸을 물들인 색들은 인간의 시야를 맑게 합니다.
그런 이유에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의 색을 이용하기 시작했지요. 천연의, 자연의 색들은 눈 뿐만 아니라 몸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쪽물이나 홍화물을 들여 옷을 염색했습니다.

 

그러다 염색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서 고려시대 때부터는 오늘의 공기업에 해당하는 ‘관영직조’에서 염색을 전문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빗깔나는 옷을 위해 염색을 하고 수를 놓게 됩니다. 물론 왕족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입는 옷이 되었지만요.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다 장인들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아참, 그리고 천연염색하면 그 옷에 항균기능, 냄새제거기능, 항알러지기능이 강해진답니다. 요즘 어린이들의 아토피 때문에 천연소재와 천연염색을 한 웰빙의류가 히트를 치고 있는 것도 아마 그 탓이겠지요. 우리 ‘수다공방’에서 아줌마들의 손을 타는 그 옷감들이 천연염색을 한 옷감들이니 앞으로는 어른, 아이할 것 없이 그 옷들이 살갑지 않겠습니까.

 

가을바람이 이마를 타고 넘어갈 때 즈음이면 옷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천연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는 행복을 상상해 봅니다. 수다공방이라는 이름의 천연색을 빛과 바람으로 엮어 만든 그 옷을 입을 날만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가을이 되면서 ‘참 신나는 학교’도 새 단장을 했습니다. 지난 13일에는 한 기업과 하비타트라는 사랑의 집짓기 봉사단체에서 우리 학교의 속살을 다듬어 주셨습니다. 게다가 책상, 의자, 예쁜 메모지 판까지 달아주셨다고 하니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롭고 말끔한 옷을 갈아입고 우리 학생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학교를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없습니다. 학교 몸단장에 도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또한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항상 헌신적인 열정을 쏟아붓고 계시니 제 마음마저 훈훈해집니다.


며칠 있으면 11월입니다. 꺼내놓은 선풍기도 어느 덧 창고에서 동면을 준비하고 있고, 이불 아래는 전기장판이 자리를 틀었습니다. 계절 탓이야 하겠지만 몸도 따스함을 원하고 있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하고 있는 일들도 많아졌지만 서서히 정리해야 할 일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이 시큰해지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줍시다. 그러나 그럴 준비가 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안겨줄 옷을 만들어 솜씨를 뽐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새 단장을 해서 좋은 분위기에서 우리 학생들을 품어줄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깐요. 그럼, 가장 좋은 천연의 가을 옷을 한 벌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게 진짜 옷이어도 좋고, 서로의 따스한 마음이 옷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 옷 하나면 칼바람이 불어도 무섭지 않을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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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의 기원

새로운 옷의 기원

 

사실, 제목은 그럴싸하지만 옷의 기원, 은박지처럼 얇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필자가 설명할 길이 없다. ‘옷’이라는 말의 어원이 윗옷을 가리키는 말로 ‘우티’에서 연유했다는 설 정도 밖에는. 그것도 정확한지 모르겠고,

 

옷의 기원을 설명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냥 상상력으로, 옷의 기원, 파고 들어가 본다.
옷. 이거 사실 본질은 ‘가리개’가 아니다. 벌거벗고 다녔던 것이 인류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속된 말로 다들 벗고 다니니깐, 쪽팔린 줄 몰랐던 것이다. 근데 날씨의 변동이 생기고, 춥고 덥고, 또 사냥하다가 긁히고. 그러니 몸을 보호할 뭔가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처럼 ‘사과’를 먹자마자 부끄러워 황급히 나뭇가지로 중요부분을 가렸다는 것은 조금 억척스럽기는 하다. 여하간 몸을 보호하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옷의 대용품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최고는 동물의 가죽 아니겠는가.

동물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는 사냥을 해야했고, 사냥을 통해 얻게 된 동물의 가죽을 도려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칼같은 도구를 필요로 했다. 그러한 도구의 발명. 이것도 옷의 기원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날카로운 도구의 발명은 인간의 손기술이 그 만큼 발전해갔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얻어진

 

동물의 가죽을 이어붙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도구를 만들 수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선사시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면, 주로 낚시에 사용된 것들이 많다. 돌칼, 낚시바늘, 뼈바늘, 바늘통 등이 대표적이다. 낚시그물을 엮는 것은 옷을 짜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옷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나.

옷을 보편적으로 입고 다니게 되는 시기부터는 옷이 ‘가리개’라는 본질과 더불어 ‘신분’을 상징하는 용도로 드러난다. 특히 신분을 드러내는 기능을 가진 옷을 만들게 되면서, 옷감과 옷을 만드는 기술은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 이후에는 옷도 시대의 요구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게 되면서 신분을 탈피하고 자유롭게 되지만, 그것은 사실 오래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옷의 모양과 경향들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점은 그 만큼 옷에 대한 기능적 부분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현해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옷의 본질이 이제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옷을 찾는다면 그에 맞는 옷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대안으로 수다공방이 만들어내는 옷이 유력할 수 있다. 수다공방이 빚어내는 옷이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게다가 인체에 유익하기까지 하다면 옷의 기능을 총망라한 최고의 옷이 아니겠는가. 옷은 제2의 피부이자, 이제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되고 있다. 수다공방의 자부심으로 만든 옷이 ‘새로운 옷의 기원’을 여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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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씨. 이 양반 어릴 때부터 안 해본 것 없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러면서 공부도 곧잘 했다죠. 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태백이 어릴 때 산에 들어가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너무 싫증이 나 그만 공부를 때려치우고 산에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산기슭 아래 냇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도끼를 바위에 갈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이태백이 묻습니다.


“할머니, 도끼를 갈아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하고 있네.”
할머니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을 이태백은 어떻게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사자후와 같은 한 마디가 이태백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중단하지 않는다면야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 수 있지.”
마부작침(磨斧作針). 결국 이태백은 산으로 다시 들어가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대 모방할 수 없는 최고의 시를 써내려갑니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은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신호이지요. 중도에 포기해버리거나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의 고통은 피할 수 있습니다.

참터가 올 하반기에 들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다공방 디자인 공모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고, 패션쇼 준비에도 여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큰 행사들이라 몇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가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 참터가 이런 큰 행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부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었죠. 그러나 수다공방 교육과 패션쇼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어 본 셈이죠. 그러나 마냥 바늘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요. 이제는 그 바늘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시는 분들도 많을뿐더러, 이제는 본격적으로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을 당당히 판매하여 소비자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진검승부를 해야 한단 말이죠. 물론 그 길이 쉽지 않지만,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지난 시간 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의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바늘로 실을 꿰어 한땀 한땀 수를 놓아 우리 봉제노동자들이 만든 옷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 날까지 너무 기다려집니다만. 그래서 참터는 수다공방 교육생님들과 회원님들의 진심어린 관심과 참여를 너무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단할 수 없다면야 함께 끝장을 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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