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후기(後記)

2008/11/13 17:51

‘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 을 마치고

 

 

0.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을 조사할 때는 사무실에 앉아 책을 찾고 면사무소에 가서 자료를 뒤지는 것보다 일일이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나이든 노인들을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사건 현장을 갈 때 조사관들은 노트북, 프린터, 녹음기, 카메라, 수첩을 비롯해 인주, A4 용지, 스테이플러까지 모두 지고 간다. 그 날 이야기하는 분위기에 따라 어르신들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 얼마나 이야기를 해 주실 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음에 약속을 따로 잡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를 봐서 바로 조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이 많은 짐을 다 짊어지고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어깨도 아프고, 딱딱한 정장 구두를 신은 발도 아프다. 그래도 운동화나 등산화를 신고 출장을 갈 수는 없다. 시골에서는 ‘검정색 기지 바지’ 입고 ‘깜장 구두’를 신고 다녀야 있어 보이고, 동네 어른들한테 조금이나마 먹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는 꾀를 내서 구두 밑창에 운동화 깔창을 하나 더 깔아서 속은 운동화 같은 구두를 신고 다닌다.

 

1.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은 한국전쟁 때 주민 90여 명이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특히 일부 국군이 일본도(日本刀)로 주민들 목을 잘라서 살해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마을 주민들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사건 조사를 신청한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전체를 수색(?)해야 했다. 이틀쯤 마을에 살다시피 하니까 마을 분위기가 대충 파악됐다. 마을 어르신들께 군인들이 칼 휘두른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군인들이 일제강점기 순사들처럼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어요?”
“아니여, 빨간 보자기에 숨겨 왔어. 장교들이 가지고 다녔지. 그 칼로 사람 목을 치는데 우리가 보기에도 신기하게 칼질을 잘했어. 사람 목이 잘렸는데 사람 모가지 앞에 가죽만 붙어 있게 잘라서 누구 머리인지 알 수 있게 잘라 놨어. 그리고 거기에다 소금을 뿌렸어. 비린내 나지 말라고 그랬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2.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덕치리는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들을 조사할 때는 아예 등산화를 신고 다녔다. 조사는 겨울에 다녔는데 겨울은 조사관들에게는 가장 좋은 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은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라 아침 일찍부터 다들 논, 밭으로 일을 나가서 집에 사람이 있는 일이 거의 없는데 겨울에는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당이나 마을회관에 모여 있다.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으니 혼자 집에 있으면 외롭기도 하거니와 보일러 기름 값 걱정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지낸다.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에 있는 노인당을 찾아갔더니 역시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드리니 노인들은 젊은 사람이 시골에 온 것도 신기하거니와 ‘진실화해위원회’라고 무슨 국가기관이라는데 당최 뭐라고 하는지 어려워하는 눈치다. 한참을 약장사처럼 떠들면서 “어르신들이 해 주는 이야기가 정말 중요하다.” 하는 이야기를 하니, 노인들도“그 때 우리 아부지도 죽었소.”“내 남편도 거기 있다가 죽었소.”하며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동안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으로 인원체크(?)를 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내일 면사무소로 꼭 나오시라고 당부를 하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앉아계셨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암말도 안 허요?”하고 물으니 갑자기 눈물부터 쏟아내신다.

 

할머니가 노치마을로 시집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전쟁이 나고 국군들이 남편을 죽였다. 남편이 어이없게 죽고 할머니는 서러워할 새도 없었다. 살던 집도 군인들이 불을 질러서 오갈 때가 없었는데 배는 불러있었다.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몰래 애를 낳았다. 남편 죽고 혼자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할머니의 기구한 팔자 이야기를 눈물범벅을 해서 털어놓으신다.


서럽게 우는 할머니 옆에서 암말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하다가 “할머니, 제가 예쁜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게요”하고 사진을 찍었다. 눈이 동그란 할머니 사진은 아직도 나한테 있다. 사건 조사가 끝나서 도통 갈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를 접고 할머니 말이 담긴 보고서를 직접 들고 가 할머니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3.
한국 전쟁 때 공비토벌작전과 관련된 지역 조사를 할 때는 항상 육군본부에서 묶어 낸 『한국전쟁사료』를 옆에 두고 본다.『한국전쟁사료』는 한국 전쟁 때 전투 상황 보고, 정기 정보 보고, 작전 계획이나 명령 따위를 담은 국내의 유일한 사료(史料)이다. 이 사료를 보다보면 민간인희생사건과 관련된 날은 전투 기록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거창사건도 그렇고 함평사건도 그렇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져보고 또 뒤져본다.

 

『한국전쟁사료』59권에는 전쟁 당시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전담했던 국군 11사단 제9연대, 13연대, 20연대의 전투와 작전 보고가 들어있다. 그래서 공비토벌작전과 관련된 민간인희생사건 조사를 할 때는 주로 59권을 자세히 살피면서 실마리를 찾는다.

 

남원지역 민간인희생 사건은 국군 제11사단이 남원에 주둔하였고, 지리산이 있는 지역이어서 9연대, 13연대, 20연대 보병부대 모두 작전을 한 지역이다. 여러 참고인들이나 노인들한테 물어보아도 ‘11사단’만 기억하지 더 이상 소속부대는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참전경찰들도 “11사단이라고만 알지 구체적인 소속 부대는 몰라.”하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 사건과 주천면 고기리 사건은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가운데 제11사단이 벌인 대표적인 사건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0년 5월 『동아일보』기사에 제11사단이 실렸고 이를 기초로 지금까지 거의 모든 언론자료나 민간인집단학살과 관련된 책과 글에도 ‘11사단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증거자료나 소속부대 자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다시 『한국전쟁사료』제59권을 펼쳐 보았다. 작전기록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한국전쟁사료』제60권을 펼쳤다. 이 제60권에는 제11사단이 1951년 4월부터 전방으로 배치되면서 벌인 작전 기록과 직할부대인 공병중대, 의무중대, 병기중대들의 기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전차공격대대가 들어 있다. 전차공격대대 작전보고를 보다보니 ‘남원 주천면 내기리 고촌리 전과’라는 글이 보였다. 더 제대로 말하자면 글씨가 느닷없이 나한테 달려온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작전보고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일일이 한글로 옮겼다. 대강면 강석마을 사건은 물론, 산내면 사건하고도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사건이 풀리기 시작했다.

 

작전기록을 정리하고 전차공격대대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생존 군인을 찾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60년이 지난 일이니 더더욱 그러하다. 거기다 명단을 확보하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대개 사망하였거나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전차공격대대 작전주임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계급이 중위였던 작전주임은 전차공격대대가 “남원에서 제11사단사령부 경비와 자체방어 임무, 수색임무, 작전규모가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고 말해 주었다. 자신은 전차공격대대의 부대이동, 배치, 작전 투입 시 부대 선정 같은 작전업무를 담당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사료』기록은 ‘괴문서’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사료』에 실린 전차공격대대장의 이름이 당시에 자신이 모시던 대대장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육군본부의 협조를 받아 전차공격대대 역대 대대장들을 확인해보니 『한국전쟁사료』와 같았다. 당시 전차공격대대 작전주임의 말은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 찾다보니 놀랍게도 당시 대대장이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통화를 하고 그 이후로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전화도 안 되고 집에도 없었다. 첫 통화 할 때 몸이 아파서 보훈병원에 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보훈병원에 조회를 해 보았으나 ‘그런 사람 없다’는 답변만 왔다. 출석요구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가해자 조사에 능숙한 인권침해조사국 조사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다시 2차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 드디어 대대장의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고 대대장은 전직 국회의원과 함께 위원회를 찾아왔다. 위원회에 출석한 전차공격대대장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지어 당시 사단장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주위 친구들에게 물어 쪽지에 적어 왔다며 쪽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중령 계급이었던 전차공격대대장을 불러놓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만 듣고 있었다. 집단희생조사국에서 가해부대 조사에 능통한 조사관들을 모두 동원하여 질문하였으나, 전차공격대대장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중에 조사관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런 중요한 분(?)은 한 번에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니 시간을 두고 일을 하는 법이라고 조언해 준다. 역사적 기록 하나 없이 묻혀진 사건이 산적한데다가 사건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프거나 죽은 경우가 많아서 항상 시간에 쫓기는 조사관들로써는 금방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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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이태준 2008/11/13 19:07

    형 요새 사무실에서도 계속 '검정색 기지 바지' 입고 '깜장 구두' 신고 다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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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만복이 2008/11/13 22:43

    그란께잉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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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hskim 2008/11/14 11:21

    오호라, 만복이님 최근포스트를 주욱 보니 제가 아는 분이군요.
    반가워요. 온라인 눈팅!!!.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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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만복이 2008/11/18 22:23

    hski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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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hskim 2008/11/19 09:19

    나 좋은현상이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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