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주간울교협통신] 준비24호, 95.12.15

 

후3김시대의 '진검승부',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95년 6.27 지자체 선거 결과는 YS로 보자면 한마디로 '참패'였다. 자신의 집권으로 3김시대는 끝났다고 호언하던 YS는 DJ와 JP의 화려한 복귀 그리고 이른바 '후3김시대'의 개막이라는 탐탁치 않은 결과 앞에서 절박한 '회생(回生)의 수'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내몰렸다.

그러나 YS는 최고통치권자가 가용할 수 있는 권력자원들을 최대한 동원함으로써 소권(지자체 선거) 패배의 위기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비자금 수사와 12.12, 5.18 재수사로 드러난 최근의 정국은 총선(중권)과 대선(대권)에서의 '진검승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5,6공을 희생제물로 삼아 DJ와 JP를 '죽이고' 중권과 대권을 YS 직계체제가 거머쥔다는 이 야물찬 시나리오는 항간에 떠도는 '안개정국'이니 '럭비공정국'이니 하는 수사와는 다르게 치밀한 계획 하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덕룡을 중심으로 하는 YS 가신그룹은 서석재의 예고탄을 시발로 대폭적인 정치권 물갈이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비자금의 '확실한' 정보가 민주당에 건네졌다. 박계동이 졸지에 스타가 되면서 이른바 비자금 정국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노태우는 꼼짝없이 구속되었다. DJ는 이 회오리가 어디로 튈지 '잔대가리' 굴리다가 대선자금 20억을 노태우로부터 건네받았다는 '자충수'를 두면서 된통 이미지 구기고 고정표조차 삭감될 지경의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 사태의 사전 언질을 받았던 JP는 3주간의 칩거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침묵이 자충수보다야 백번 나았다. 6.27 지자체선거로 '경성'을 싹쓸이했고 이 여세를 몰아 화려한 정계 복귀에 성공하면서 '중원 평정'을 장담하던 DJ는 한방에 주도권을 YS에게 넘겨준 꼴이 되고 말았다.

2라운드는 거의 YS의 독무대였다. YS는 재야와 야당의 5.18 특별법 제정 요구를 전격 수용하면서 특검제 요구를 비껴가고 12.12 재수사까지 진행함으로써 이른바 대선자금 시비를 정면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DJ는 대선자금을 갖고 궁색한 시비를 걸다가 5.18 특별법 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또다시 궁색한 특검제 요구를 갖고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려 했지만 점점 더 핀치로 내몰리는 꼴이고 JP 역시 정치권 물갈이의 드센 파도가 임박함을 느끼자 특별법 제정 반대를 명확히 함으로써 보수우익 총단결로 자기 입지를 굳히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궁여지책인 감이 더 크다. DJ나 JP 둘다 '명분'에서 한참 뒤지고 '여론'을 뒤집을 특별한 카드 하나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반면 YS는 '과거청산=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확고부동의 국민적 '명분'과 친위 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사격에 힘입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쯤되면 숨겨둔 다른 카드들을 안쓰더라도 중,대권 장악은 그리 어려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사실 6.27 지자체 선거 직후 YS 측근의 초기 구도는 민자당 내 민주계와 3김 청산을 내세운 개혁신당의 연합 그리고 이회창 카드를 내세운 대선에서의 DJ 공략이었던 것 같다. 이른바 김덕룡의 '2002년 구상'은 이런 구도와 그림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구도는 YS가 이회창 카드에 대해 갖는 아주 강한 거부감으로 인해 YS측에서 보자면 차선 내지 차악의 카드였을 것이다. 그래서 중권 고지를 향한 '정면돌파'가 시도되었다. 노태우와 전두환이 제물로 바쳐졌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서 YS는 자기 아들 김현철까지도 구속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면돌파는 성공했다. 이제 총선 결과를 놓고 다음 판을 짜면 되는 여유까지 얻어내는 것에도 성공했다. 언제나 집권자들의 마지막 카드로 활용되어왔던 '통일' 카드를 굳이 써먹지 않더라도 현정국의 칼자루는 이미 YS의 손에 쥐어져 있다.

한편 여권내의 반란표로 추산되는 50여표가 '팽(烹)'되기 전에 이탈하더라도 자민련이 이를 다 흡수한다는 보장도 없고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거슬렀을 때 차기 총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이른바 보수우익의 총단결이라는 것도 세력화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보수우익의 정론지임을 자처해온 조선일보의 논조조차 5,6공 세력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는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앉아서 '팽'되는 수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팽윤환의 고민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수도권에서 DJ와 백중세만 유지할 수 있다면 YS나 신한국당 민주계로서는 경남 고정표를 기반으로 15대 국회 다수 의석 확보는 무난하리라 판단할 것이다. 대구경북의 표는 무주공산이 될 것이므로 DJ의 호남 고정표와 JP의 충청 고정표에 '상처'만 입히면 된다는 계산일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 계산이 대체로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거기다 개혁신당이 수도권에서 '약진'(글쎄?)한다면 사태는 더더욱 YS에게 유리하다. 그만큼 카드 하나가 덤으로 더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무엇보다 개혁신당에 '흡수통합'된 우리 '진보정치연합' 동지들의 거취가 걱정스러워진다. 이들이 루비콘강을 건넜느니 안건넜느니 하는 논란은 이미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문제로 되어버렸다. 모든 문제는 개혁신당의 공천 하나라도 어떻게든 건져내는 것에 죄다 쏠려 있고 15대 총선에서 의석 하나라도 확보하는 것에 온통 집중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이른바 '현실 정치'에서의 '생존'을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의 경로로 삼자마자 모든 것이 현실 정치의 논리와 힘에 휩쓸려 들어가는 꼴이 되고 만 셈이다. '노동의 정치'는 여기서 완전히 실종된다.

YS의 대담한 '칼춤'은 범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초기 국면을 유리하게 선점했던 DJ나 JP는 지금 '대마'가 위태로울 지경까지 몰리고 있다. 전두환의 외로운 '단식투쟁'은 이 살벌한 국면에서 '패'도 안되는 하나의 어거지 해프닝이다.

현실 정치판의 이 칼싸움에 노동자들은 그저 구경꾼이다. 아니 한편에서는 또다른 공안의 칼바람이 일고 민주노총 시대의 노동운동 전반에 대한 위압적 기선제압의 돌풍이 불어대는데도 '방어'에 급급하다. 한가한 구경꾼도 못되는 처지다.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40만 노동자들은 심하게 얘기하면 그야말로 위태위태한 '샌드백' 안의 모래 신세다.

진보적 노동운동의 일각을 자처해왔던 몇몇 동지들이 이 판에 두집이라도 내고 살겠다고 낑겨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정치'가 아니다. 비좁은 '너희들끼리의 판'을 엎고 넓은 마당을 여는 것이 노동의 정치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방어를 뛰어넘는 공세를 준비하고 우리 내부의 선진적 활동가들을 정치적으로 단결시키는 것이다. 15대 총,대선은 바로 이러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 변혁적 노동운동진영의 본대(本隊)와 정치적 주체 형성 - 를 앞당기기 위한 계기로 '활용'되어야 한다. 21세기를 바라보는 노동자의 정치적 단결만이 '개핵(?)' 드라이브로 포장된, 독점자본의 배타적 지배가 완성될 '신한국'이라는 '저들의 왕국'과 '세계화'가 강요하는 무한경쟁의 비인간적 고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고 전민중적 대안과 희망을 내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우리 선진노동자들이 96년에 움겨쥐어야 할 화두(話頭)가 바로 이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4 07:29 2005/02/14 07:29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