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기

[대세계의 역사2. 극동의 여명, 그리이스세계], 삼성출판사, 1982.

 

 

굶주리는 백성들

 

후한 중엽부터 환관, 외척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들과 호족에 의한 토지의 합병과 조세의 징발이 더욱 가중하여 토지를 잃는 농민이 증가하여 갔다.

 

또 그 무렵부터 중국 서부지방에 거주하는 티벳계 유목민인 강족의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 이에 대하여 한왕조는 자그마치 60년간에 걸치는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매년 정부의 연간 총수입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14억전이라는 군비가 소비되었다.

 

이 거액의 지출부담은 물론 농민의 어깨에 지워졌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과세는 갈수록 무거워졌다. 게다가 오랜 세월에 걸치는 전쟁에 따라, 무수한 농민이 향리를 등졌다. 황야에는 백골이 널렸고 전답은 황폐한 채로 버려졌다. 이리하여 농민은 파산의 지경에 빠지고 소작인이나, 토호의 노복이 되든지 촌락을 피해 나와 타향에서 방황하여 <몸에 걸치는 것도 없이 나무뿌리, 풀열매를 씹으며> 비인간적인 생활을 해야만 되었다. 이렇게 농민의 생활이 만성적인 기아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농민의 반란도 부득이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32년에서 172년에 이르는 40년간에 농민의 반란은 30여회나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 지역은 지금의 하남, 강소, 산동, 호북, 사천, 광동의 여러 성에 미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란들은 후한정부에 의하여 여러차례 진압되었으나, 필사적인 농민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민요로서 이런 것이 있다.

 

머리털과 부추는

아무리 잘라도 싹이 또 난다

두목과 수탉은

아무리 베어도 다시 때를 알린다

관리 따위는 무섭지 않아

아무렴 백성들은 살아 있지!

 

이러한 농민층의 끈질긴 생명력은 184년 마침내 후한왕조를 뒤엎는 황건적의 난으로 폭발했다.

 

황건적이라 함은, 거기에 가담한 사람들이 모두 누런 헝겊으로 머리를 싸맸던 까닭으로 생긴 명칭이다. 이때 수십만의 농민이 일시에 일어섰거니와 이는 결코 자연적 발생이 아니라, 봉쇄적 향촌의 사회를 뛰어넘어 농민의 고통을 연결시키는 운동이 오랫동안 행해진 때문이다. 이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은 하북의 거록 사람인 장각이 창립한 <태평도>라는 종교적 비밀결사였다.

 

후한시대에는 민간신앙이 만연하여 현세구제의 종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왕망과 광무제가 예언의 신봉자였던만큼, 상하를 막론하고 미신이 유행하였다. 특히 당시 대토호의 장원이 증가함에 따라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던 대중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흥종교에 몰렸던 것이다.

 

태평도는 후한 말기에 수없이 나타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오두미도와 더불어 훗날 도교의 원류가 된 것이다. 장각은 스스로 대현량사라 일컫고 구절장을 가지고 주문을 외며, 부적을 만들어 병자를 참회시킨 후 물과 함께 부적을 먹였다. 이것으로 병이 나으면 신심이 있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하북, 산동, 하남에 퍼져, 십수년간에 수십만의 신도를 획득하게 되었다.

 

 

황건적의 결성

 

장각은 이 신도를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전원을 36개의 <방>으로 편성하였다. 큰 <방>에는 인수가 약 1만, 작은 <방>에는 6,7천 정도로서 하나의 <방>에는 반드시 한 사람의 수령이 있어 그 직명도 역시 <방>이라 하였다.

 

그들은 <창천은 이미 죽고 황천이 마땅히 일어선다. 해는 갑자에 있어 천하가 대길하다>라는 정치 슬로우건을 내세웠다. <창천>이란 청을 숭상하는 목덕의 한조를, <황천>이란 황건적 자신들을 가리킨 것이며, <갑자>는 예정된 폭동의 해(184)이다. 즉 갑자년에 한왕조를 뒤엎고 자기들의 정권을 세우자, 그러면 <천하는 대길하다>라는 뜻이다.

 

또 <태평도>의 <태평>이란 대평균의 뜻으로서, 모든 자가 일하여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세우고 재산은 공유하여 어떠한 자도 이를 침범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이렇게 하여 장각은 도탄에서 헤매는 민중을 분기시켜, 토호족과 봉건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궐기시킬 수 있었다.

 

184년(갑자년) 봄 장각은 그의 제자인 대<방>의 마원의를 파견하여, 남방의 형주와 양주의 수만 농민을 태평도의 중심지인 업에 집결시키는 동시에 마원의는 남몰래 도읍인 낙양에 가서 환관과 금위군 관병을 그 조직에 가담시키고 3월 5일을 기하여 내외에 호응케 하여 수도 공략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제자인 당주라는 자가 이를 당국에 고발하였다. 한정부는 즉시 진압을 개시하여 마원의를 먼저 잡아다가 낙양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에 처하고, 낙양시민과 관병 중에서 태평도의 신도 1천여명을 색출하여 죽였다. 한편 하북의 군, 현에다 교주 장각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주의 배반으로 인하여 많은 조직이 파괴되었지만 장각은 결연히 폭동감행의 날짜를 2월로 앞당겼다. 장각 자신은 천공장군이라 호칭하고 아우 장보와 장량을 각기 지공장군, 인공장군이라 부르고 각처의 관청을 불사르며 부락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무서운 세력을 가진 대규모의 난동이 8개 주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것이다.

 

난동은 불리한 정세 아래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용감한 분투에 의하여 각지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하여 지배층은 그때까지의 심한 권력투쟁을 일시 중지하고, 서로 힘을 모아 공동으로 난동군을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정부는 지방군대에 대하여 각 <방>의 반란군을 견제해 놓도록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북중랑장 노식, 좌중랑장 황보숭, 우중랑장 주준과 그 밖의 부장에 명하여 황건적에 대하여 적극적인 각개 격파의 전법을 쓰도록 했다. 이 때문에 황하 이남에서 난동하던 황건적은 계속하여 불리한 정세에 몰려들어갔다.

 

그 무렵 황하 이북에서 활약하던 장각이 거느리는 황건적은 노식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남방군의 패배로 인하여 고립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이때 장각 자신도 진중에서 병사하였기 때문에 난군은 갑자기 뛰어난 지도자를 잃고 말았다.

 

황건적은 장량의 지도하에 황보숭의 군대와 싸웠으나, 이도 패하여 장량은 전사했다. 기세를 탄 황보숭은 이번에는 장보가 지도하는 황건적을 습격하여 그 최후의 거점이었던 하곡양을 탈취하였다.

 

 

흑산적과 오두미도

 

이리하여 장각 3형제는 모조리 죽고 황건적은 집압되었으나 그와 같은 난동의 물결은 그래도 가라앉지 않았다. 황하 이북 지역에는 아직도 대소 몇십개의 난동군이 존재하였는데, 그 중 세력이 컸던 것은 하북의 <흑산적>과 파, 한의 <오두미도>였다.

 

흑산적의 총수자는 장비연이라는 사납고 민첩한 사나이였다. 그는 184년, 장각과 동시에 거사하고 있었다. 장각이 패한 후 하북에서 1백만의 대군을 모아 의기충천하였으나 205년 군벌인 조조의 공격을 받자, 장비연은 덧없이 이에 항복하고 말았다.

 

또 한편 오두미도라는 것은 본래 태평도에서 갈라진 비밀결사의 하나로서 교주는 파군 사람 장수였다. 그는 기도로 병을 고쳐주고는 그 사례로 쌀 5말을 받았기 때문에 오두미라고 불려졌다. 184년 장각의 태평도가 중원에서 봉기했을 때 장수도 파군에서 봉기하였다.

 

오두미도에는 또 한 사람의 교주인 장로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도 역시 상당한 신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왕조의 귀족 유언이 익주의 장관이 되었을 때 사천의 독립을 계획하고 장수와 장로를 포섭하여 그들을 한중에 진격시켜 군태수인 소고를 죽이게 하였는데 이때 장로는 장수마저 죽이고 자기 혼자서 한중을 독립하고 오두미도에 의한 정권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장로는 스스로 <사군>이라 호칭하고 정치의 최고권을 장악, 백성 전부를 신도로 삼았는데 일반신도는 귀졸이라 일컫고 신도의 다소에 따라 몇 개의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부에는 정교를 관할하는 수장을 두어 이를 <좨주>라 하였다.

 

그 교의에 있어서는 특히 사람들에게 성심을 권하고 거짓을 징계하였다. 병자에게는 처음에 그 범한 죄과를 고백시켰다. 또 법을 범한 자에게도 고백을 시켰다. 만일 3회의 고백으로도 여전히 죄를 숨긴다면, 법에 의하여 처벌하였다. 또 각 지부에는 <의사>를 두어 거기에 쌀과 고기를 저장하고 여행자들이 누구나 자유로 숙박, 취식할 수 있게 하였다.

 

오두미도에서는 좨주 외에 어떤 관리도 두지 않았다. 한중의 백성도 이와 같은 완전한 자치에 의한 정치제도 아래서 장로가 한중을 장악한 196년 이래 20년간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태평도가 지도한 난동에는 확실한 정치적 이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215년 7월 대군벌 조조가 이끄는 10여만 대군의 공격을 받자 장로는 남정을 포기하고 사천의 파중으로 후퇴했으나 다시 추격을 받고 마침내는 조조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황건 이래의 농민반란은 마침내 궤멸하였지만, 그러나 이 대반란은 중국역사에 지극히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봉건사회에 있어서의 농민층은 아직도 스스로를 부하게 할 임무를 완성할 수는 없다. 황건적의 난도 물론 그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농민반란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반란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만큼 낡은 세력, 낡은 것들의 파괴도 철저히 행해졌으며 또 새로이 정권을 잡는 지배자에게도 그만큼 커다란 교훈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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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8 14:07 2006/01/1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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