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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현대차지부 노보 <한라에서 백두까지> 원고

 


폭풍처럼 휘몰아친 노동자대투쟁 - 87년 여름, 울산

 

현대엔진 노조 결성과 투쟁의 확산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이날은 6월 9일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던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끝내 사망한 날이기도 했다. 현대엔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현대계열사와 울산지역 전체로 번져나가 7·8·9월 노동자대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7월 7일 울산화학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7월 15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39명이 노조를 결성하고 다음날 울산시청에 노조설립신고서류를 제출하려다 서류를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1,500여 미포조선 노동자들이 즉각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신문과 방송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결국 회사측은 서류 일체를 돌려줬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풀었다. ‘현대미포조선 노조설립신고서류 탈취사건’은 울산지역 현대계열사의 노조 결성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7.25 현대자동차, 7.28~31 현대중공업 어용노조 퇴진투쟁


7월 21일 현대중공업, 24일 현대자동차와 풍산금속에 어용노조가 급조됐다. 7월 25일 현대자동차 8,000여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실력으로 저지하고 파업과 농성에 돌입했다. 밤 12시 회사는 어용노조 임원진 사퇴와 이상범 임시집행부 인정에 합의했다. 7월 26일 현대중전기 노조가 결성됐다. 7월 27일 태광산업, 대한화섬 1,500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민주화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8월 2일까지 파업농성을 벌였다. 동양나이론과 동양포리에스터 2,000여 노동자들도 3일간 파업과 밤샘농성을 벌여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고 임금 12% 인상을 쟁취했다. 7월 28일 현대중공업에서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는 파업과 농성투쟁이 벌어졌다. 투쟁은 31일까지 계속됐고 현중노조개편대책위와 회사는 연말상여금 차등제 철폐, 두발 자유화, 새 노조 집행부 구성 등에 합의했다. 7월 29일 풍산금속 700여 노동자들이 밤샘 파업농성투쟁을 벌여 다음날 어용노조를 퇴진시켰다. 7월 30일 현대중전기,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같은 날 현대종합목재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7월 31일 울산여객 등 6개 시내버스 운전사 400여명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농성과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금호석유에서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현대계열사와 울산지역으로 확대되는 노동자대투쟁


8월 1일 현대종합목재 1,800여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을 벌였다. 같은 날 현대정공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1, 2공장 노동자 2,000여명이 도로와 회사를 점거하는 파업농성을 벌였다. 8월 3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임금 30% 인상을 내걸고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고려아연노동자 650명도 장기근속수당 지급 등을 요구하며 밤샘 파업농성을 벌여 5일 요구안을 관철시켰다. 8월 4일 고려화학, 현대강관, 한국프랜지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이날 효성금속, 효성알미늄, 대한알루미늄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8월 5일에는 고려화학 노동자 250명과 현대강관 노동자 600여명, 럭키울산공장 노동자 1,000여명, 경기화학 노동자 70여명, 한성기업 노동자 200여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8.6 현대중공업노동자 파업 재돌입


8월 6일 현대중공업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이 현장 조장급 이상 5,000여명을 모아놓고 “노조개편대책위와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등 연설을 하고 조회를 마치자 이에 격분한 현대중공업 노동자 2만여명이 다시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회사는 전면 휴업공고를 냈다. 같은 날 현대자동차 노동자 4,000여명이 임금인상 30%, 보너스 700% 보장 등을 내걸고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미원상사와 금강개발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진양화학 200여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내걸고 파업농성에 돌입, 21일까지 투쟁을 계속했다. 8월 7일 정일공업 노동자 100여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고 현대중전기 노동자 1,000여명이 기본급 25% 인상 등을 요구하며 밤샘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미원상사 노동자 200여명도 같은 날 파업을 벌였다.

 

8.8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


8월 8일 현대중공업 정문 앞 현대쇼핑센터(현 현대백화점 동구점)에서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가 결성됐다.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17일까지 협상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현대계열사 전 조합원을 동원해 실력행사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날 동해조선 노동자 400여명과 럭키온산공장 노동자 200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8월 9일 삼양사 노동자 200여명과 영남화학 노동자 40여명이 파업농성을 벌였다. 8월 10일 덕양산업 노동자 400여명이 노조설립보고대회를 갖고 파업에 들어갔다. 8월 11일 한국광업제련, 한국프랜지, 부산기업, 남양냉동, 풍산금속, 삼우화학, 우진기업, 경동레미콘, 삼미종합특수강, 제일물산, 동흥레미콘, 한국케미칼, 범아실업공사 등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날 한일이화 노동자 300여명이 노조를 설립하고 파업을 벌였다. 8월 12일 세운공업, 삼기산업, 우정산업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8.14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선거와 8.17 남목 행진


8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임원선거 총회를 실시해 이형건 위원장을 선출했다. 이날 대림유화 노동자 80여명이 파업을 벌였다. 8월 15일 (주)금강 언양공장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8월 16일 현대계열사에 무기한 휴업조치가 내려졌다. 이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정주영 회장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며 상경했다. 8월 17일 현대중공업 정문에 회사가 쳐놓은 바리케이트를 뚫고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현대그룹노조협의회 소속 노동자들이 운동장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은 거리시위에 나서 전투경찰의 저지를 돌파하고 남목까지 행진했다.

 

남목고개를 넘어 공설운동장으로 - 8.18 현대그룹 6만 노동자 연합시위


8월 18일 현대중공업 정문에 모인 현대계열사 노동자와 가족 6만여명은 정주영 회장 화형식을 치른 후 샌딩머신, 대형 지게차, 카고트럭, 덤프트럭, 소방차, 오토바이 등을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대열의 길이만 4㎞, 남목고개를 넘어 공설운동장까지 이날 행진한 거리는 16㎞였다. 공설운동장에서 집회가 열리는 동안 노동부차관이 울산에 내려와 협상에 들어갔다. 현대중공업 민주노조 인정, 9월 1일까지 임금인상 타결, 각 계열사 사장들에게 전권 위임 등 3개 항이 합의됐다. 한편 8월 19일 상경투쟁을 벌이던 현대중공업 이형건 집행부와 정주영 회장 간에 이형건 집행부 인정과 9월 1일까지 임금인상 타결 등 합의가 이뤄졌다. 이날 현대건설 언양알미늄 노동자들이 노조 위원장을 직접 선출했다.

 

울산 전역으로 번진 파업의 불길


8월 20일 현대정공에서 조합원 직선으로 노동조합 위원장이 선출됐다. 같은 날 고려화학 노동자 300여명이 합의사항 이행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다시 들어갔다. 금강개발 150여명, 한국비료 상용직 노동자 60명, 효성바스프 노동자 80여명, 인성산업 노동자 70여명도 이날 파업을 벌였다. 8월 21일 태창운수 택시운전사 39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22일에는 한국석유 노동자들이 파업농성을 벌였다. 8월 24일 현대중공업 내수하청업체 신성기업사, 한별공사, 덕원기업사, 진학도장공사 등 4개 사업장 375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대원교통 운전사들과 유공(현 SK) 청원경찰, 태창기업사, 우영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8월 25일 성일택시, 월성운수, 금강교통 택시노동자들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항운노조울산지부 300여 노동자들과 울산수협 소속 기선저인망선원 200여명이 파업을 벌였다. 8월 26일 삼성전관에 어용노조가 들어섰고 성진공업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8월 28일 삼성전관 노동자 500여명이 자유노조 결성 보장,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벌였고 럭키울산공장 노동자 300여명이 다시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8월 29일 화진교통, 한국흄관, 명화교통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8월 31일 럭키울산공장 노동자 300여명은 울산시내 태화호텔 앞에서 거리농성을 벌였다. 9월 1일 현대정공 노동자 1,500여명이 파업농성에 들어갔고 럭키울산공장 노동자들이 서울 여의도 쌍둥이빌딩 본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시청으로, 시청으로


9월 2일 임금협상 결렬에 분노한 현대중공업 노동자 2만여명은 중장비 80여대와 오토바이 700여대를 앞세우고 공설운동장을 거쳐 울산시청까지 거리투쟁을 벌였다. 시청 광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노동자들은 밤 10시경 공설운동장으로 돌아가 밤샘농성을 계속했다. 이때 차량을 통제하던 채태창 씨가 술 취한 운전자가 몬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9월 3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회사로 철수했다. 이날 고려아연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9월 4일 백골단과 전투경찰은 현대중공업 안으로 기습 침투해 100여명의 노조 간부를 연행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 1만5,000여명은 파업농성으로 맞섰다. 파업은 21일까지 계속됐다. 9월 6일 현대중공업 독신자 기숙사인 만세대 오좌불 숙소 노동자 1,000여명이 단전, 단수에 항의해 야간 거리투쟁을 벌였다. 9월 7일 현대중공업 노조간부 등 36명이 구속됐고 다음날 4명이 추가 구속됐다. 9월 8일 현대자동차노조 임원선거 2차 투표에서 이영복 후보가 당선됐다. 9월 9일 동오화학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인정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벌였다.

 

현대중공업 조업 재개


9월 10일과 11일 현대중공업 회사측은 울산시에 노조해산명령을 요청했다. 울산시는 이를 반려했으나 12일 경남노동위원회에 현중노조 임원개선명령 의결요청서를 제출했다. 9월 12일 현대엔진노조 사무실 앞에서 현대중공업 경비원들이 현중노조 김형권 총무부장을 납치하려다 봉고차로 현대엔진 노동자 이상남 씨를 치어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남 열사는 89년 5월 16일 612일간의 투병 끝에 병원에서 운명했다. 9월 16일 정주영 회장이 14% 임금인상 등 현대중공업 조업 정상화방안을 내놓았다. 노동자들은 구속자 무조건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계속했다. 9월 17일 경남노동위원회는 현대중공업 노조임원개선명령을 의결했다. 조합원들은 임원개선명령을 취소하려며 격렬히 투쟁했지만 감옥에 있던 이형건 위원장은 9월 22일 정상조업 재개를 내용으로 하는 조업정상화방안 합의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9월 21일 현대그룹노조협의회는 동맹파업을 계획했으나 파업은 이뤄지지 않았고 22일 현대중공업은 조업이 재개됐다.

 

끝나지 않은 노동자대투쟁


9월 25일 현대자동차 노동자 4,000여명은 노조집행부의 임금합의안에 반발,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26일 현대자동차 노동자 3,000여명은 임금 5만원 인상과 노조 집행부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을 계속했다. 이 투쟁은 28일 이후 태업투쟁으로 전환해 소형차2공장을 중심으로 추석 전까지 계속됐다.

 

 

울산에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노동자대투쟁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은 7월말 부산으로 퍼져갔다.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세신정밀, 국제상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마산 창원지역에서도 노동자대투쟁의 불길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현대정공, 한국중공업, 효성중공업, 세신실업, 통일중공업, 금성사, 코리아타코마 노동자들이 파업농성과 거리시위를 벌였다. 8월 들어 대구, 구미, 포항지역으로 확산된 노동자대투쟁은 대전·충남지역으로, 인천으로, 전북으로, 광주·전남으로, 성남, 부천, 경기남부지역과 서울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광산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태백시 한성광업소, 삼척탄좌, 경북 문경의 대성탄좌 노동자들이 철도와 도로를 점거하는 거리투쟁을 감행했다. 전국 각 도시의 운수노동자들은 지역별 연대파업을 벌였다.

 

1987년 7·8·9월 석달동안 발생한 노동쟁의는 모두 3,341건으로 하루 평균 44건의 쟁의가 일어났다. 특히 8월에만 2,552건, 하루 평균 82건의 쟁의가 발생했고 8월 중순에는 하루 평균 300여개 사업장에서 파업농성투쟁이 벌어져 봇물 터지듯 투쟁이 분출했다.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명으로 당시 10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명의 37%에 이르렀다.

 

노동자대투쟁 기간 동안 노동조합 수도 급증했다. 87년 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조합 수는 6월말 2,742개에서 12월말 4,103개로 늘어났다. 조합원 수도 105만명에서 127만명으로 20여만명이 늘었다. 7월초 하루 2개 꼴로 새로 생기기 시작한 노동조합은 7월 중하순에는 4개, 8월 들어서면서 하루 22개씩 결성됐고 9, 10월에도 하루 5개 정도의 신규노조가 설립됐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진 노동자들의 ‘대중적, 계급적 진출’이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1987년 여름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고 1970년 “근로자도 인간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자기 몸을 불태웠던 전태일 열사의 ‘대중적 부활’이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자각은 되돌이킬 수 없는 성과로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각인됐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전국, 전산업에 걸쳐 동시다발로 폭발한 ‘사실상의 전국 총파업’이었고 파업이 파업을 낳으면서 들불처럼 번져간 ‘자연발생적 투쟁’이었다. 이 투쟁으로 전국 1,300여개 사업장에 신규 노동조합이 건설됐다. 노동자로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은 이렇듯 단결의 무기인 민주노조를 구축해냈다. 민주노조는 천만 노동자의 ‘생명’이었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사태를 되돌리려는 자본과 권력의 온갖 탄압을 뚫고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맹을 필두로 서울, 부산, 진주, 대구, 인천, 경기남부 등지에 ‘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건설함으로써 한걸음 더 전진한다. 여기에 병원, 언론, 사무금융, 교사, 대학, 연구소 등 비제조업 분야에서도 업종별 노동조합들이 대거 결성됨으로써 우리 사회 전반에 노동조합운동을 보편화시켜냈다. 민주노조운동은 19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90년 전노협, 91년 박창수 노대위와 ILO 공대위, 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95년 민주노총으로 확대·강화됐다.

 

억압받고 소외돼왔던 개별 노동자들이 더 이상 기계이기를, 그리고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단결함으로써 자신들이 인간임을 당당하게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단결이 지닌 놀라운 위력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단결은 단위사업장의 틀을 넘어 지역·업종별로 확대돼갔고 전노협을 거쳐 마침내 민주노총을 건설해냈으며 2005년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조직의 양과 질을 확대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87년 이전의 삶과 87년 이후의 삶은 ‘근본적인 차이’를 의미했다. 노동자들은 87년의 투쟁을 통해 분명 기계에서 인간으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방감을 ‘체험’했다. 이 체험은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각인으로 남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이렇듯 한국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불가역적(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인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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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9 09:43 2007/07/0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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