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자료] 95년 6월
양봉수 동지의 분신투쟁을 헛되이 하지 말자!
1995년 5월 12일 16시 45분경 현대자동차 본관 정문 안쪽에서 양봉수동지(현대자동차 노조 대의원, 94년 2월 해고, 29세)가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했다.
5월 12일 16시 40분경 현대자동차에서 부당해고된 동지 5명이 현대자동차 공동소위원연합회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약 20여명의 회사측 경비들이 4-5명씩 조를 이뤄 해고자를 한 명씩 붙들고 문 밖으로 밀어내며 강력히 저지했다.
양봉수동지는 기름을 몸에 뿌리며 "내 몸에 손대지 말라!", "오늘도 내 몸에 손댄다면 불을 붙이겠다"며 출입을 요구했다. 그러나 4∼5명의 경비들은 양봉수동지를 붙잡고 막았다. 양봉수동지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치며 경비를 밀고 회사 안으로 3∼4미터 정도 들어갔다. 양봉수동지의 손에 든 기름병을 뺏으려는 경비와 뺏기지 않으려는 양봉수동지 사이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기름이 흘러 경비들의 옷에도 기름이 묻었다. 몸싸움 끝에 양봉수동지의 손에 든 기름병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곧바로 경비 1명이 양봉수동지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나머지 2∼3명의 경비들이 달라붙어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격분한 양봉수동지는 라이타 불을 당겼다. 순식간에 양봉수동지의 온몸은 불길에 휩싸였다. 양봉수동지를 붙잡고 있던 경비의 몸에도 불이 붙었다.
양봉수동지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발짝 움직였지만 결국 앞으로 쓰러졌다. 옆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든 동지들이 웃도리를 벗어 뒤덮고 공동 소위원연합회 깃발로 감쌌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자 경비실에 있던 분말소화기로 몸에 붙은 불을 끄고 회사 구급차에 실어 해성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해성병원에서는 응급조치만 하고 곧바로 화상병동이 있는 대구 동산병원으로 후송했다. 12일 20시 양봉수동지는 대구 동산병원에 도착했으며 의식은 있지만 전신 75%의 3도 화상으로 생명이 위태롭다는 진단을 받았다.
양봉수동지는 90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92년 성과분배투쟁으로 해고되었다가 93년 복직했고 94년 9월 8대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95년 2월 의장 2부에서 신차(마르샤) 투입과 관련한 UPH(시간당 생산대수) 상승 문제로 회사측과 2공장 대의원 사이에 협상을 하던 도중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자 이에 항의하며 생산 라인을 중단시켜 또다시 해고되었다. 양봉수 대의원은 해고된 뒤 21일 동안 공장 안에서 해고 철회 철야농성을 벌였다. 이 투쟁은 의장 2부 조합원 전체의 중식 집회투쟁과 잔업거부 투쟁으로, 승용 2공장 전체의 잔업거부 투쟁으로, 그리고 2공장 민주 대의원 10여명의 텐트 철야농성 결합으로 발전되었다.
5대 임원 선거 패배 이후 침체되어 있던 현장에 정말 오랜만에 노동가가 울려퍼졌고 조합원들의 동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투쟁은 1공장과 전 공장의 투쟁으로 확대되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지만 현대자동차의 민주세력이 새롭게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의 길', 직제개편 연구모임, 의장사업부 총연합, 3,4대 상집모임, 자동차업종 연구모임, 단순조립공, 공동소위원연합회 등으로 흩어져 있던 민주세력들은 3월 17일 '현장 민주조직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농성이 끝나자 회사측의 탄압은 보다 거세졌다. 양봉수동지는 3월 29일 아침 마르샤 M/H(단위 시간당 작업량)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협상장에 들어갔지만 "해고자는 조합원이 아니다"라며 들이닥친 경비 20여명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하고 정문 밖으로 끌려가 내던져졌다. 회사측은 한 술 더 떠 "회사가 손해를 봤으니 3,100만원을 물어내라"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했다. 양봉수동지는 부당 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통해 노동조합법과 단체협약에 따라 엄연히 조합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는데도 회사측에 의해 공장 출입마저 폭력으로 저지당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우리 회사에 해고자는 없다. 다만 사규를 위반한 면직자만 있을 뿐이다"라며 양봉수동지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양봉수동지는 자본의 신경영전략이 강요하는 노동강도 강화에 저항하며 투쟁하다 해고되었다. 공장 출입마저 가로막고 한술 더 떠 3,100만원의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자본의 노동조합 활동 탄압에 맞서, "현대자동차에 해고자는 없다"는 이영복 집행부의 몸서리처지는 배신에 맞서 물러섬 없이 해고자 복직투쟁을 벌여나갔다.
양봉수동지의 복직투쟁은 현대자동차 해복투 5인의 정문투쟁으로, 현총련 산하 37명의 해고노동자와 50여명에 이르는 울산해고자협의회 동지들의 순회 정문투쟁으로, 4월 18일 전해투의 중앙집중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투쟁에 대해 자본과 정권은 울해협 소속 해고자 4명을 구속하고 전해투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폭행·구속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양봉수동지는 노동강도 강화와 해고, 구속, 수배, 손해배상을 강요하는 자본과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끝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저항을 선택했다. 병상에서 "나는 3만 조합원을 사랑하고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하는 이 순수한 노동자가 왜 이런 극단적인 저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현대자동차 자본측의 무리한 노동강도 강요, 해고와 손해배상을 남발하는 비인간적 노무관리,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를 내세워 자본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전락한 어용 집행부, 그리고 구속, 수배 등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는 김영삼 정권 때문이다. 투쟁 말고는 이 3중의 벽을 허물 수 없고, 이 3중의 벽을 허물지 않고서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보장되지 않기에 양봉수동지는 자기 몸을 불태워 3만 조합원과 천만 노동자가 단결해서 투쟁하자고 절규한 것이다.
양봉수동지의 절규는 3만 조합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12일 19시 40분, 현대자동차 4공장 동지들의 잔업거부 투쟁을 시작으로 조합 앞 항의집회와 정문 앞 집회가 계속되었다. 울해협 동지들이 21시 20분부터 현대자동차 정문 앞 텐트 농성에 들어갔다.
22시 20분 윤국진 전무 명의의 '진상은 이렇습니다'라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자기 홧김에 분신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분노한 조합원들은 대자보를 찢어버렸다. 정문 앞에 급하게 만든 플랭카드가 설치되었다. "정당한 조합 활동 보장하라", "양봉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부당해고 철회하라", "살인마, 폭력 경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22시 50분 승용 2공장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13일 01시에 부서별 규탄집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시간 현총련에서는 5개 단사 위원장들이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12일부터 15일까지 현총련 위원장단 철야농성을 결의했다. 그리고 13일 14시 주리원 백화점 앞에서 계획되어 있던 산재 추방 선전을 양봉수동지 분신 내용과 결합하여 진행하고 각 단사 상집 11명을 급하게 대구 동산병원에 파견, 수습 때까지 남아 있게 했다.
13일 00시 20분 2,3,4대 전 위원장 3명, 승용 2공장 대의원 3명, 현대자동차 해복투 3명, 공동소위원연합회 의장단 3명 등 총 12명으로 〔양봉수동지 분신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대책위는 해고자 원직복직, 노동강도 강화 저지, 부당노동행위 금지, 조합 활동 보장, 노동조합 규약 준수, 최고책임자 처벌을 투쟁목표로 세우고 즉각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03시 의장 2부 대소위원 비상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04시부로 전면 파업이 결의되었다.
04시 의장 2부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승용 2공장 차체, 도장, 프레스 부서는 잔업거부와 본관 앞 항의 투쟁으로 결의를 이어받았다. 같은 시간 승용 1공장 대책위가 구성되었다.
08시 승용 2공장 전 라인이 중지되었다.
12시 정문 앞에는 4,000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현대정공 조합원 100여명을 비롯하여 현총련 의장단과 지역 단체들이 결합했다. 14시 전 해고자 30명이 모여 회의를 갖고 정문 앞 철야농성에 결합하기로 결의했다.
14일 17시 공작사업부 권기훈 동지가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분신을 하여 했지만 동료들의 제지로 화를 입지 않았다.
15일 승용 2공장이 전면 파업, 정문 앞으로 집결했고 본관 잔디밭에 대형 천막이 설치되었다. 13시 승용 1공장 전체가 파업에 들어갔고 14시에 3,000여명이 모인 승용 1,2공장 합동집회가 열렸다. 승용 1,2공장의 라인이 끊기자 회사측은 조기 퇴근을 실시했다. 이날 민주노총(준)에서는 7차 운영위원회와 주요사업장 회의가 열려 21일 광주에서의 전국노동자 결의대회와 25일 전국 단위노조대표자 비상결의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21시 현총련은 양봉수동지 분신 지역 공대위를 구성했다.
16일 파업대오는 1, 2, 3, 4공장으로 확대되었다. 17시 정문 앞 집회에는 5,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했고 이 자리에서 대책위는 17일부로 전면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날 10시에는 현총련 사무실에서 24차 영남지역 노동조합대표자회의가 열려 단위노조별 규탄집회를 결의했고, 민주노총(준)에 전국민적인 시국선언을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이날 한국통신 조백제 사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노조 간부 64명에 대한 파면 등 중징계 방침을 밝히자 유덕상 위원장은 특별지시 1호를 통해 전국 지부별 비상총회와 철야농성을 시달했다. 현대자동차 투쟁은 한국통신 투쟁과 더불어 이제 상반기 전국 투쟁전선의 한복판에 자리잡게 되었다.
17일 전공장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10시에 공장장, 시장, 노동부, 경찰, 검찰 등이 참가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효문 로타리와 명촌 정문 앞에 전경 차량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시부로 무기한 휴업 공고가 떨어졌고 공동대책위 12명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사태는 긴박해졌다. 공권력 투입이 임박한 것이다.
1,500여명의 조합원들이 철야농성장을 사수했다. 이 자리에서 공동대책위와는 별도로 각 사업부별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공권력 침탈에 대비한 무장을 부분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동대책위는 공권력이 침탈하면 무저항 비폭력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투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른바 '노동자의 길'과 '현자 노동자신문'으로 대별되는 공동대책위 내부의 견해 차이는 공권력 침탈이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만 하면 우리들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침탈한다면 그대로 잡혀가자"라는 투항론과 "여기서 접을 수는 없다. 끝까지 맞서가자"는 입장으로 대립이 확대되면서 막바지에는 어떤 단일한 결론도 이끌어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조합원 대중의 요구와 결의에 기초한 새로운 투쟁 지도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더 커졌다. 사업부별 대책위는 이러한 요구에 기초한 조합원들의 자발적 대응이었다. 이날 현총련에서는 지역 운영위원회가 열려 공권력 투입되면 전체 조합원이 잔업을 거부하고 현대자동차 정문 앞에 결집한다는 1차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18일 10시 집회에는 6,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했고 이 대오는 21시 촛불 집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공동대책위는 12시 기자회견에서 가족에게서 민사상의 위임장을 받았고 조합원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으므로 공동대책위의 교섭권을 인정하라고 사측에 요구했다. 한편 회사와 노동조합은 노조대책위로 창구를 일원화하고 양봉수동지의 가족과 협의하여 사태를 조기 수습하며 치료비 등 일체를 인도적 차원에서 지불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보았다.
이에 대해 공동대책위는 다시 기자회견을 갖고 노동조합이 협상의 대표성을 가지려면 양봉수동지에 대해 조합원임을 먼저 인정해야 하며, 가족이 위임장을 공동대책위에 전달한 상황이므로 공동대책위가 협상의 한쪽 당사자가 되어야 하며, 이 속에서 노동조합과의 공동대책위 구성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것과 몸값 치루는 것만으로 사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회사와 집행부는 사태가 이미 자기네 손을 떠났다고 하면서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제 상황은 피할 수 없는 공권력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합원들의 동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고했다. 한편 18일 새벽 예상되었던 공권력 침탈이 없었던 데다가 광주에 병력이 묶이는 상황을 놓고 볼 때 다소 여유를 가져도 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 되면서, 시간을 갖고 공권력 침탈에 대비하자는 결의도 있었다.
현총련 역시 이날 중앙위원회를 열어 투쟁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의했고 현대중공업 임투 출정식에는 12,00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하는 등 현대자동차 투쟁을 계기로 지역 차원의 투쟁 열기가 급속하게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통신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 발부로 전국적 임투전선이 일정을 앞당겨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공동대책위는 투항이냐 전면전이냐를 놓고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고 새로운 사업부 단위 지도력은 전 공장 제2 지도부로까지 모아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 틈을 비집고 공권력은 기습했다. 19일 03시 40분 어떻게 손써볼 겨를도 없이 기습이 감행되었다. 250여명이 그 자리에서 연행되었다. 고작 천여명의 병력으로 단 10분만에 현장을 점령한 이날 기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설마 하는 틈을 비집고 시속 20Km로 병력을 이동하여 무혈입성한 '울산만 작전'은 성공했다. 이상범 공동의장은 그 자리에서 연행되었고 이헌구 공동의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그대로 연행되었다. 윤성근 공동의장은 굴뚝으로 올라가 항거하다가 잡혀 내려왔다.
공권력 침탈 소식을 전해들은 조합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격렬한 거리투쟁이 전개되었다. 현총련 각 단사별로 중식집회가 열렸고 현대정공의 집회에는 공권력에 밀려 들어간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이 결합했다. 현대중공업 조합원 150여명이 자발적으로 조퇴하여 거리투쟁에 합류했다. 잔업을 거부한 600여명의 현대중공업 오토바이 부대가 거리투쟁 현장으로 출동했다. 거리투쟁은 이날 20시 20분경까지 계속되었다.
현총련은 즉각 전체 단위사업장 상집 철농과 잔업거부에 들어갔다. 마창 공투본에서도 1차 비상대표자회의를 열어서 중식집회를 열고 투쟁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의했다. 조선노협도 현대중공업에서 비상 중집위를 열고 22일부터 소속 노조 간부 철야농성, 22∼23일 각 노조별 동시다발 규탄집회 개최, 윤재건 의장에 대한 정권의 침탈이 있을 때 조선노협의 임투 일정을 재조정하는 한편 어떠한 투쟁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결의했다. 민주노총(준)에서도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어 25일 전국단위노조대표자 비상결의대회와 27일 전국 동시다발집회, 6월 초순 전국적 투쟁집중을 결의했다.
현대자동차 공권력 투입작전에 성공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통신이 국가 전복 저의가 있다는 발표를 하며 95년 임투 전선 조기 진화에 나섰다. 한국통신 노동조합은 이날 대의원대회를 열고 정부에 25일까지의 냉각기간을 제의했지만 대통령을 앞세워 탄압의 칼날을 휘둘러대는 자본과 정권은 파면과 구속영장 집행을 강행하겠다고 대답했다. 투쟁의 중심은 현대자동차에서 한국통신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대중공업과 현총련으로 급속히 옮겨갔다.
20일로 예정되어 있던 현총련 집회는 비 때문에 22일로 연기되었다. 출근시간에 산발적 거리투쟁이 전개되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른바 울산만 작전으로 14명이 구속되고 12명이 고소·고발되었으며 5명에게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민주세력 핵심 대오가 거의 대부분 구속되거나 수배된 것이다.
21일 울산대학교에서 현대자동차 활동가 40여명이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격론 끝에 이번 투쟁을 접을 수 없다는 것과 정상 조업 시 현장에 출근하여 다시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이 결의되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결정되지는 않았다.
22일 일산 해수욕장에서 10,000여명의 조합원이 참석한 가운데 현총련 집회가 열렸다. '공권력 철수', '노동운동 탄압 중지', '해고자 복직', '3자 개입 금지 조항 철폐'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랭카드가 걸렸다. 현총련 산하 15개 단사의 위원장들이 참석했고 창원 정공에서는 5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울산 남구지역과 효문지역의 노동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현대자동차 동지들은 비록 깃발은 없었지만 2,000여명이 참석하여 여전히 살아 있는 동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윤재건 위원장은 연설을 통해 "현대자동차 투쟁의 성과는,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각성과 실리적 노사협조주의는 노동자의 목숨을 빼앗아 갈 뿐이라는 점, 연대투쟁 공동투쟁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사실을 제기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투쟁은 이제 현총련 공동임투로 대전환되었으며 모든 임투 일정을 재조정하고 정권의 침탈 시 총파업도 불사하는 선전포고를 감행할 것"임을 선포했다.
집회가 끝난 후 현대자동차 동지들은 삼삼오오 대책을 논의했으나 남아 있는 대책위의 지침이 전달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몇몇 대의원들이 '총대'를 매고 약식 집회를 가졌지만 대책위의 지침이 유인물로 전달될 것이므로 그 지침에 따르자는 것을 빼고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해산했다.
23일 휴업은 철회되었고 정상조업이 실시되었다. 출근률은 평상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책위 유인물은 대부분 정문에서 회수되었다. 사업부별로 활동가들이 모여 삼삼오오 향후 대책을 논의했고, 조합원들의 동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따라서 민주세력들이 빨리 대오를 정비하고 현장 내외를 잇는 투쟁 방향과 계획을 잡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양봉수동지의 분신에 대한 대책위 요구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조합원들 역시 이번 투쟁이 이렇게 접혀질 수는 없다는 분위기다. 따라서 조업 재개 후 정문 집결 출근투쟁이나 잔업거부투쟁, 대·소자보 작업 등 투쟁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행동지침들이 시급히 결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제2 대책위가 빠르게 구성되어야 했다. 병원비 지불만으로 사태를 조기 수습하려는 회사측과 조합 집행부의 기도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 92년 상여금 투쟁의 뼈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현대자동차 민주세력들이 지금의 고비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민주노조 재건의 성패가 달려 있다.
5월 25일 남아 있는 대책위원들은 마지막 소식지를 내고 투쟁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민주세력들 중 일부는 양정동 진한걸 지자제 선거 캠프에 합류해 버렸다. 남아 있는 공동대책위는 마지막 소식지에서 합법투쟁을 선언하면서 양봉수동지의 조합원 자격 인정, 복직 등 진정한 명예회복과 산재에 준하는 보상, 일체의 고소·고발 철회, 내부적 징계 계획 철회, 해고자의 회사 출입 자유 보장을 회사에 요구했다. 집행부에 대해서는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과 정당한 조합활동 여부에 대한 대의원대회 심의를 요구했다. 공식적 지도부가 합법투쟁으로의 선회하면서 투쟁을 일단락짓겠다는 선언을 공표하자 이대로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는 다수의 나머지 현장 활동가들은 사업부 중심으로 새로운 대책위 구성과 향후 투쟁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분신으로 촉발되고 급격한 총파업으로 발전한 현대자동차의 투쟁은 임투 초기 '노동운동탄압 분쇄투쟁'이라는 긴박한 전선 형성을 주도했으나 지금은 전선에서 잠시 비껴나 있다. 현장 활동가들은 지금 투쟁이 어쩔 수 없이 일단락 되더라도 이번 투쟁이 이후 임단투와 6대 임원선거 투쟁에 어떻게 연결·발전되어야 하는지 시급히 정리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현장 민주세력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통령까지 앞세운 정권과 자본의 초강공이 거세다. 상반기 임투전선은 일정이 앞당겨져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며, 한국통신과 현총련, 조선노협이 전선의 선두에 설 것이다. 이제 현대자동차 동지들은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상반기 투쟁의 파고를 받아 현대자동차 임단투에서 민주세력 독자의 요구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이 투쟁을 민주노조 재건투쟁으로 수렴해야 한다. 양봉수동지의 분신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