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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준비9-11호, 95년 8월-9월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전개과정과 한국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머릿글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 노동계급의 자기진출과정은 사회변혁의 중심적 추동력으로서의 성숙 가능성과 더불어 그 가능성을 차단, 왜곡시키는 고통스러운 내적,외적 질곡지점을 풍부한 역동성을 갖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현단계 노동계급의 고난에 찬 역사적 전진이 한국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과제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해명할 목적으로 쓰여졌다.

1장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한 한국 노동계급운동의 역사를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91년 5월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은 급격한 양적ㅗ외연적 성장에서 질적ㅗ내포적 발전으로의 전화를 강제받게 된다. 이 전화과정은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조직적 발전과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전화,발전과정이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현단계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적 과제와 맞닿아 있으며, 그 상과 경로를 잡아가기 위한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함축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원리에 대한 이론적 접근의 가능성과 단초들을 잡아보고자 했다.

2장은 현단계 한국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의 상과 경로에 대한 이론적 해명과 조직적 전망을 제출하고자 했다. 이로부터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란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선진적 일부가 정치적으로 결사하는 것이며, 이 정치부대의 지도에 의해 노동계급이 수행하는 부분적 투쟁들이 전국적 계급투쟁으로 집중됨으로써, 노동계급이 한국사회 변혁을 이끌어갈 위력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과정임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노동의 정치'가 작동하는 기제를 '변혁 이념/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라는 관점 하에 정리하고, 그 전제의 확보과정과 전국적 정치조직 설계의 기본 입장을 정리하고자 했다.

 

1장.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전개과정

▣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91년 5월투쟁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로, 그리고 최대규모로 이루어진 노동대중의 전국적, 계급적 진출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한국사회가 심각한 계급대립과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위선적으로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이 장막을 걷고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87년 한여름에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 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감격적인 '인간선언'이었다. 노동자들의 이 자각은 역사적 체험을 통해 획득된 되돌이킬 수 없는 성과로 각인되었고, 전국 1,000여개 사업장에서의 폭발적인 신규 노동조합 건설로 이어졌다. 노동자로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고자 하는 투쟁이 단결의 무기인 노동조합이라는 성채를 구축해낸 것이다. 이 성채는 천만 노동자의 '생명'이었고, 그 누구도 이 성채를 파괴할 수 없었다. 88년 2월, 혹한의 겨울비 속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린 채 목숨을 걸고 싸웠던 현대엔진 민주노조 사수투쟁이 이를 극적으로 증명한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사태를 되돌이키려는 자본과 권력의 온갖 탄압을 뚫고, '마산ㅗ창원 노동조합 총연맹'을 필두로 서울,부산,진주,대구,인천,경기남부 등지에 '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함으로써 한 걸음 더 전진한다. 뿐만 아니라 병원,언론,사무ㅗ금융,교사,건설,대학,연구소 등 비제조업 분야에서도 업종별 노동조합들이 대거 결성되었다. 87년 7,8월의 저 위대했던 투쟁은 이렇듯 한국사회 전반에 노동조합운동을 보편화시켜냈다.

억압받고 소외되어왔던 개별적 노동자들이 더 이상 기계이기를, 그리고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단결함으로써 자신들이 인간임을 당당히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단결이 지닌 놀라운 위력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단결은 단위사업장의 틀을 넘어 지역별,업종별로 확대되어갔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87년 이전의 삶과 87년 이후의 삶은 '근본적'인 차이를 의미했다. 노동자들은 87년의 투쟁을 통해 기계에서 인간으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나는' 해방감을 '체험'했다. 87년 7,8월의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며 불가역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88년 말 노동법개정투쟁과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88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추모와 노동법 개정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5만여명의 노동자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 운집했다. 노동자들은 이 자리에서 전노협 건설의 역사적 정당성을 대중적으로 확인하고 노동악법 철폐를 강하게 촉구했다. 5만의 노동자대오가 신촌을 거쳐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해갔다. 이 날의 행진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최초의 전국적으로 조직된 정치적 시위였다. '건설! 전노협!'의 깃발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천만 노동자의 희망으로 집약되어갔다.

88년 노동법개정투쟁을 통한 조직된 정치적 시위를 전개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88년 12월 울산 현대중공업 투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서태수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쟁으로 시작된 현대중공업 노조민주화투쟁은 현대 자본측이 제임스 리라는 파업 파괴 전문가를 동원하여 집단 테러를 자행하고 급기야 식칼테러까지 서슴지 않자 해를 넘기는 전면 파업투쟁으로 폭발했다.

88년 4월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여소야대', 1988-1989년 '청문회정국'을 거친 6공 정부는 89년 초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빌미로 1989년 봄의 야만적인 '공안정국'을 창출하며 노동자들의 진군에 반격을 가했다.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128일 파업투쟁은 전국 각지에서 총동원되다시피한 백골단과 대규모 전투경찰병력과의 가두 바리케이트전으로까지 발전했다. 파업기금도 없었고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열악한 조건이었음에도 이렇듯 끈질긴 저항이 가능했던 것은 87년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노동자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들의 단결의 구심인 민주노조를 세우고 사수하겠다는 열망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이었는지를 확증해준다. 노동자들은 이 투쟁을 통해 자본측의 살인적인 폭력에 맞서 자신들의 생존과 단결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조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투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체득했으며, 이른바 '공권력'의 폭력적 계급성을 자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노동해방'이란 사회구조 전반의 변혁과 맞물릴 수밖에 없음을 초보적으로나마 통감하게 되었다. 128일간에 걸친 이 필사적인 투쟁은 전국의 지역노조협의회들과 업종노조들, 그리고 노동운동단체가 모여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를 구성하게끔 직접적으로 추동하였고 이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의 필연성과 동력을 이끌어냈다. 이제 노동자들의 단결은 투쟁을 통해 '건설! 전노협!'의 기치로 모아져갔다.

 

90년 1월 22일 민자당 출범과 전노협 결성

세계사적 격변을 예고하면서 90년대가 밝았을 때 역사적인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90년 1월 22일, 민자당과 전노협이 같은 날 출범한 것이다.

민자당의 출범은 87년 6월 항쟁이 배태한 과도기적 정치지형 속에서 자유주의적 민주화의 이른바 'YS적 길'이 'DJ적 길'을 따돌리고 6공 세력과 야합한 결과물이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전경련을 위시한 자본가 단체들이 '경제단체협의회'를 출범시킨 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사회의 경제적ㅗ정치적 지배권력의 계급적 구조화가 한층 더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성균관대학교 수원 캠퍼스에서 최루탄 가스 속에 기적적으로 출범한 전노협은 87년 이후 성장,발전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임을 천명했고 자신의 목표가 전국적인 산별조직의 건설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노동자들은 숱한 탄압과 폭력, 구속과 해고, 수배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전국조직을 마침내 건설해냈다. 그러나 90년 1월에 노동자들이 건설해낸 이 전국적 단결은 미완의 것이었고 과도적인 것이었다. 비제조업 분야의 업종노조들은 전노협 가입을 유보하고 독자적으로 업종회의를 구성했다. 대부분의 대기업 노조들은 단위사업장 내부의 노조민주화투쟁 속에서 전노협과의 직접적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당장 갓 출범한 전노협의 '생존'이 문제였다. 전노협은 산별노조로 가기 위한 과도기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서 대기업 노조와 결합함으로써 업종노조를 견인하여 민주노조총단결대오를 강화하고 이 힘을 바탕으로 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을 포괄해야 한다는 과제와 업종별,산업별 분화를 촉진,조정하는 산별노조 건설의 교두보이자 참모부로서의 역할, 그리고 전국적인 민중연대전선을 강화하여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끌어내야할 임무를 안고 탄생했지만 그 역사적 의미의 막중함은 그만큼의 가혹한 시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제 '건설! 전노협!'의 기치는 '사수! 전노협!'의 절박한 외침으로 대치되었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90년은 총자본과 총노동 간의 불가피한 일대 격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서기원 사장 퇴진과 언론 민주화를 요구하는 KBS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까스로 진화하는 데 성공한 총자본은 민자당 출범으로 이룩된 정치권의 상대적 안정을 기반으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경제위기론, 무노동 무임금, 임금가이드라인, 총액임금제, 노조업무조사 등의 이념적,행정적 공세와 더불어 안기부,보안사,검찰,경찰 등에 의한 직접적인 노동억압이 총동원되었다.

격전이 이번에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전개되었다. 128일 파업지도부에 대한 재판에 참가하기 위해 조합원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어렵게 탄생한 신임 민주집행부의 이영현 위원장과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되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갑용 사무장을 의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총파업을 선언했다. 4월 28일 새벽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만여명의 전투경찰병력이 백골단을 앞세우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했다. 육,해,공 삼면에 걸친 이른바 '미포만' 작전이었다. 실제 전투상황을 방불케 하는 이 작전은 노동자들을 국가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입안되었다. 그러나 '공권력'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으로 향하던 경찰병력을 저지하면서 격렬한 가두 바리케이트전을 벌였던 것이다. 4.28 연대투쟁으로 불리우는 이날의 투쟁은 "현중이 깨지면 현자도 깨진다"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연대의식과 "여기서 더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지체한 공권력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저지선을 간신히 뚫고 현대중공업으로 진격해갔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현대중공업 정문의 1차 저지선이 무너지자 노동자들은 비상식량과 식수를 챙기고 난공불락의 요새 골리앗 크레인으로 올라가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골리앗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몰리고 몰린 마지막 벼랑 끝 골리앗 상공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고 선포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으로, 마창노련의 동맹총파업으로, 전노협의 5월 1일 전국 총파업으로, 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의 광범위한 파업 동참으로, 국민연합의 5월 9일 전국적인 반민자당 투쟁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한국사회 변혁의 '물리력'이 어떻게 생성,발전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법칙성이 확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정점에서 골리앗의 노동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새롭게 확증된 법칙성이 제기한 과제, 즉 그만큼의 정치적 무게를 노동자들이 담당해야만 할 필연성에 대한 뼈저린 자각과 이에 기초한 새로운 출발이 요구되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골리앗은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다. 골리앗을 정복함으로써 노동자들은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이념과 조직체계를 발전시켜야 할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128일 파업투쟁이 전노협 건설을 추동했다면 골리앗 투쟁은 전노협을 사수해냈다. 90년 벽두에 치러진 한국사회 양대 계급간의 이 대립과 격전은 일방에 의한 일방의 완전 승리가 아니라 양자의 주요 진지가 구축된 새로운 대립전선이 구조화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91년 5월 투쟁

새로운 대립구조의 객관적 운동은 91년 5월 투쟁이라는 시험대를 거쳐 본격화된다. 민주노조운동은 이 시기를 통과하면서 질적 전화를 강제받게 되고 그 전화를 위한 경험적 전제들을 습득하게 된다.

6공화국은 권력재편을 위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시험하고 있었다. 이는 '보수대연합'이라는 구도로 집약,표현되었다. 이른바 '보대연'은 독점자본을 권력의 계급적 중심으로 두면서 중소자본의 정치적 지분을 보장하고 시민운동 영역을 외연으로 포괄하는 총자본연합의 정치적 구상물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하나인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가 일정에 올랐다. 또한 92년은 총선과 대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주요 계급,계층들은 권력재편기의 역동적인 정치 공간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진출의 폭과 그 파장력을 시험받게 된다.

91년 5월 투쟁은 명지대학교에 다니던 강경대가 시위 도중 진압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연합을 비롯하여 전국의 모든 대중조직,재야,정치단체들을 망라하는 '범국민대책위'가 신속하게 구성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가두시위가 폭발했다. 범대위는 이 투쟁을 '보수대연합에 반대하는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으로 모아가고자 했다. 한편 평민당을 비롯한 제도권 야당들은 투쟁 수위를 조절하면서 지자제 협상의 유리한 교두보로 이 투쟁을 활용하고자 했다.

87년 6월 항쟁에 무차별 가두 대중으로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91년 5월 투쟁에서 자신의 독자적 조직대오와 투쟁무기를 가지고 참여하게 된다. 부산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옥중 사망 소식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범대위와 구별되는 '전국노동자대책위'라는 독자적 대오를 구성하게끔 추동했다. 노동자들은 5.1 총파업과 조직적 가두시위 등의 형태로 자신의 위력적 물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슬로건에 만족하지 않았다. 가두에서 노동자들은 '민중권력'과 '노동자권력'을 소리높여 외쳤다. 아직 정식화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범국민적인 정치투쟁 공간의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은 최초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 구호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노협이라는 개별 기업 노조들의 협의체라는 조직틀과 노대위라는 사안별 공동투쟁체계만으로 당면한 정치적 쟁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현장에서는 임투, 가두에서는 정투'라는 이분법적 한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완성된 형태의 정치파업이 조직되지도 않았고,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의 광범한 결합과 이에 기초한 민중연대투쟁으로의 역발전 역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고 개별 기업 단위로 힘겹게 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가두 정치를 현장 정치로 전화시키지 못하게 했던 내적,외적 한계를 안고 노동자들은 5월 투쟁의 결과물로 주어진 지자제 선거 공간에 참여한다. 최초의 노동자후보들이 전국 각지에서 선전했다. 몇명의 노동자후보와 민중후보들이 기초의회와 광역의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ㅗ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이 (지방)의회 안에 자신의 계급적ㅗ정치적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보다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정식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단결이 산별노조의 건설과 더불어 정치적 대오로까지 발전되어야 함을 자각하게 되었다.

91년 5월 투쟁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급속한 양적,외연적 성장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생적 발전의 한계 또한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은 87년 7,8월의 투쟁을 통해 기계에서 인간으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나는 불가역적 반전을 경험했다. 노동자들은 이때 이룩한 자신의 경제적 단결이 정치적으로 침해되어질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헌신적인 투쟁에 나섰고 자신의 경제적 단결을 지역적으로, 업종별로, 전국적으로 확대해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 투쟁 수단들 뿐이었고 전국적으로 확대된 단결 역시 기업별로 이루어진 경제적 단결에 근거한 과도적,협의체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 수단의 부재는 91년 5월의 급작스럽고 준비되지 않았던 '정치적' 경험들 속에서 질곡으로 작용했다. '위기'는 안팎으로부터 주어졌다. 90년 이래 본격화된 한국사회의 구조화된 계급역학은 지배권력의 노동통제전략의 변화를 가시화시켰다. 억압적 기제들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작업조직,임금체계,직제 등 노동 전반에 대한 관리 시스템을 효율화하고 이를 제도화하기 위한 시도가 구체화되었다. 생산관리와 노무관리를 융합시킨 개별 종업원에 대한 설득기제가 현장을 파고들었다. '물리력'이 아닌 '정치력'을 앞세운 총자본의 새로운 공세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계급적' 대응을 요구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전화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경제적 단결을 뛰어넘어 계급적,정치적 단결로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총자본의 입체적인 정치,경제 공세 앞에서 각개격파 당할 것인가? 91년 5월을 경과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은 87년 이후 자신의 경험적 전제들을 기초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민주노조운동의 이념, 조직발전 전망, 제반의 전술 원칙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내부 논쟁이 시작되었다.

91년 하반기∼현재

 

1.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 위기

91년 년말부터 시작되어 92년 1월 21일 현장에서 철수함으로써 끝이 났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상여금투쟁은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와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른바 '노동운동 위기론'이라 불리워지며 진행되었던 이 논쟁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사회발전적 노동조합주의,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신조합주의 또는 민주적(합리적) 조합주의 등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분출되었다(주1). 논쟁은 노동조합운동을 둘러싼 주ㅗ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규명하고 이에 걸맞는 대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야기된 한국사회 변혁이념의 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핵심은 현실 사회 변혁에 있어서의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과 '노동자ㅗ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91년 5월을 기점으로 질적 전화를 강제받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은 논쟁이 제기한 다양하고도 혼란스러운 '대안들' 앞에서 자신의 이념적 지향점과 원칙을 보다 분명하게 재정비해야 했다. 그러나 논쟁이 제기한 핵심은 다양한 쟁점들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고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 재정비 과정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재진행형에 머물고 있다.

 

정치적 분열과 계급적 분화의 가속화

92년의 총선 상황과 대선 상황에서 보여진 이른바 '재야' 또는 '운동권'의 정치적 분열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단초를 보여주었다. '민주대연합-민주당ㅗDJ 지지', '민중주도 민주대연합-사퇴를 전제한 독자후보', '사퇴하지 않는 독자적 민중후보-진보정당 건설'로 드러난 3분 구도는 노동 중심성의 문제와 민중적 정치세력화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어 왔던 관점들이 대선 공간 속에서 정치적,실천적으로 표현된 결과물이었다. 87년 대선 상황에서의 낡은 대립 구도를 본질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던 이러한 3분 구도는 YS의 승리로 인해 실천적으로 폐기,변경되었다.

이제 대립점은 문제의 핵심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전화된다. YS 신정부의 개혁을 둘러싸고 적극적 동참, 적극적 지지, 소극적(비판적) 지지 등의 형태로 동참과 지지를 표명했던 경향들은 사회변혁에 있어서의 노동계급 중심성의 원칙을 노골적으로 폐기하고 노동운동을 시민운동 영역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려 들었다. 대학 강단으로부터 사회민주주의의 복권 열풍이 불어댔고 포스트 맑시즘의 유행병이 이에 가세했다. 경실련을 위시한 시민운동 세력이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며 대선 패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기존 민중운동권의 자리를 위협했다. 한국사회의 근본 변혁을 지향하던 세력들은 피부로 와닿는 이러한 내적,외적 환경 변화 속에서 근본적인 자성과 기존 활동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재평가를 강제받았다. 사회변혁의 노동 중심성 원칙은 과연 폐기되어야 하는가?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구조 변화는 현단계 계급구성과 계급역학에 어떤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가? 시민운동의 활성화와 개혁의 누진적 진전만으로 근본 변혁이 가능한가? 낡은 사회주의적 패러다임의 극복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국사회에서 민중적 정치세력화의 상과 경로는 어떠해야 하는가? 변혁운동 진영은 이렇듯 총체적으로 제기되는 질문들 앞에서 힘겹게 자신의 답을 찾아가야 했다. 92년 겨울의 대통령 선거는 '재야'라고 불리워졌던 느슨한 틀을 해체시키고 변혁이념 그 자체의 위기를 둘러싼 계급적 분화를 가속화시켰다.

 

대선과정에서 보여진 민주노조운동이 갖는 정치력의 수준과 한계

한편 대선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자신의 통일된 정치적 입장을 갖지 못한 채 공정선거를 감시하는 들러리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자신의 계급적 단결의 완성이 경제적 단결을 뛰어넘는 정치적 단결에 있음을 초보적으로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 자각은 '노동 중심성에 근거한 민중적 정치세력화'의 상과 경로, 그리고 총체적 변혁 프로그램으로까지 구체화되어야 할 '경험적 맹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모든 주요 계급, 계층이 총력전을 전개했던 92년의 역동적 권력재편기에 노동자들은 독자적 계급으로서가 아니라 개별적 시민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더군다나 이른바 '운동권'의 3분 양상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조운동이 갖는 '정치력'의 수준과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노동운동 위기론'은 대선을 지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 재정비과정과 결부하여 실천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둘러싼 추상적 대립점들은 YS정부의 '신노동정책'에 대한 정책대응력의 문제와 개혁에 대한 태도 문제를 둘러싸고 구체화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이제 맞부딪치고 있는 문제는 한국사회 전반이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총체적인 문제였다.

 

93년 현총련 공동임투

YS정부는 세계 경제전쟁 시대의 무한경쟁을 선포하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국민적인 '고통분담'을 요구해 왔다. DJ가 일선에서 물러난 민주당은 개혁의 파트너를 자처하고 나섰다.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운동세력은 자신들이 신한국 건설의 비판적 지지자임을 천명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YS 개혁을 지지하기 위해 파업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93년 현총련 공동임투는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93년 신정부와의 첫 힘겨루기에서 민주노조운동은 고통분담이 '고통전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은 YS 개혁의 계급적 한계를 돌파하는 자신의 청사진을 준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자기 입장을 국민적으로 설명할 사회적, 정치적 설득기제를 구축하지도 못했다.

이제 민주노조운동은 한국사회 전반의 변혁 방향에 대해 자신의 이념적 목표와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는 앙상한 생존권 투쟁만으로는 국민적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2. 조직발전을 둘러싼 논쟁

이러한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 위기는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논쟁으로 구체화되었다.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91년 노대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노협과 업종회의가 결합한 'ILO 공대위'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는 '민주노조 총단결'의 강화를 통해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가고자 했던 당시의 조직발전 전망을 어느 정도 공유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92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조직발전 전망에 대한 이러한 공유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전노협 중심성'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진전되기에 이르렀다.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졌고 논쟁은 한국사회에서의 산별 건설경로의 문제로 집약되었다.

 

전노협 '조직발전 소위원회'와 '김영대 안'

전노협 '조직발전 소위원회'가 제출한 안은 전노협을 과도기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이자 산별 건설의 정책단위로 설정하고 있다. 전노협과 대기업노조의 결합을 강화하고 제조업 내부의 업종 분화를 촉진,총괄하면서 업종회의를 견인, 민주노조 총단결 대오를 강화하는 속에서 민주노총 건설을 전망해가야 한다는 것이 이 안의 요지였다. 이에 대해 이른바 '김영대 안'으로 대표되는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이 안은 현재의 ILO 공대위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전노협, 대기업노조, 업종회의 및 광범한 중간노조들을 포괄하는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를 신속하게 구성, 이를 곧바로 민주노총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대립점은 산별 건설에 있어서 전노협의 역할과 임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표현되었지만 근저에는 건설되어질 산별노조의 상과 그 경로의 문제가 깔려 있었다. 즉 어떤 산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어떤 투쟁을 통해 건설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러나 논쟁은 다분히 조직형식적 측면에 머물면서 이 문제에 대한 내용적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한편 논쟁은 두가지 계기를 통해 실천적으로 대립된다. 그 하나가 93년 초 전노협,업종회의,현총련,대노협 등이 모여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회의'를 구성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93년 말 전노협 위원장 선거에서의 대립이었다. '전노대'는 구성에 있어서 '위로부터' 급조되었다는 비판과 더불어 상층의 합의가 하부 단위에서 반박되는 진통을 겪으면서 출범되었다. 전노대 구성을 둘러싼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논쟁은 이후 전노협 위원장 선거에서 다시 한번 대립되는데 전노협의 '전통적' 입장을 고수했던 양규헌 위원장이 선출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민주노총 건설을 둘러싼 내부논쟁 - 산별건설의 문제

 

이제 대립지점은 94년에 들어서면서 전노협 중심성의 문제를 넘어선 현실적 민주노총 건설의 문제로 구체화된다. 94년 5월 1일, 회복된 첫 노동절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전노대 이름으로 민주노총 건설이 선포되었다. 민주노총 건설은 이로써 민주노조운동 진영 전반의 현실적 과제로 등장했고 이를 현실화시켜내기 위한 치열한 내부 논쟁을 재개시켰다(주2). 새롭게 구성될 민주노총은 95년 11월 11일, 자기 위용을 드러낼 것이고 내부의 논쟁 역시도 새로운 대립과 통일의 지점들을 찾아낼 것이다(주3).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산별 건설의 문제는 노동자의 삶 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로부터 자신의 단결이 어떤 내용과 형식을 갖추게 되는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87년 이후의 민주노조운동은 이제 이념 재정비와 조직 재정비와 도약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3. 총 괄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조직적 전화, 발전과정은 총체적으로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 발전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무한국제경제전쟁시대의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 사회 전반의 비효율적 낭비 요인을 최소화하겠다는 YS의 개혁 청사진은 집권 초기 많은 국민의 기본적 동의를 이끌어냈지만 93년 현총련 공동임투 이후 곳곳의 누수를 경험했다.

 

개혁과 세계화의 계급적 함의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총체적 부정부패'를 근본적으로 척결할 능력과 철저함이 YS 정부에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심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회창 총리 경질과 공무원들의 '복지부동','복지동안'이라는 신조어 속에서 신정부의 개혁의지는 이미 상당히 훼손되었고 육해공 3면의 입체적 대형참사로 초기의 국민적 지지도는 되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곤두박질쳤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이른바 '개혁'의 계급적 함의이다. 개혁의 성패는 한국 자본주의의 체질개선에 달려 있는데 정부와 자본은 막대한 규모의 이 체질개선비용을 노동계급의 '고통전담분'으로 메꾸려하고 있다. 그리고 집권 후반기의 국정지표로 제시된 이른바 '세계화' 역시도 재벌 위주의 성장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임금 억제, 노동통제 강화를 통해 국내 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노동 배제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이른바 산업구조조정은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의 활성화보다는 독점자본 위주의 배타적 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추구되고 있다. UR 타결은 한국사회 농민들의 극심한 상실감을 가져왔으며 그들의 마지막 생존근거마저 박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점자본의 경쟁력=국가경쟁력이라는 등식은 국영기업들과 정부투자기관들, 그리고 준정부기관들을 민영화하거나 합리화하는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개혁이나 세계화는 거대독점자본의 '효율성'이 지배하는 왕국으로 민중 전체를 몰아가고 있는데 '합리적 자본주의'의 이러한 한국적 창조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거대독점자본의 보다 전면적인 지배시스템이 민중적 삶의 질과 관련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는지도 의문이다.

사회 전반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됨으로써 개별 국민들의 건강한 자기실현을 보장한다는 것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리성의 추구가 독점자본 위주의 배타적 합리성의 강제로 이루어질 경우 '저항'은 불가피해진다. 문제는 이러한 저항권이 제도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가이다. 이 점은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가를 판단하는 핵심적 지표가 되는데 초기의 개혁 실종과 세계화 전략의 본질을 볼때 YS 정부는 이 점에 관한 한 철저히 '계급적'이다. 민주노조운동은 현재 기업별 노조체계에 묶여 산업별로 단결할 권리조차 갖고 있지 못하며 무노동 무임금이다, 제3자 개입금지다, 긴급조정이다 하여 합법적 파업권마저 심각하게 제한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근본적으로 원천봉쇄되어 있는 상태다. 이는 국제 노동환경의 평균적 수준에도 못미치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과제 -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BR을 앞두고 노동관계법령의 손질은 불가피해졌지만 현재의 개혁이 사회적, 민중적 저항권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그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민주노조운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점자본 위주의 노동배제형 세계화 전략에 맞서 노동참여형 근본개혁의 청사진을 사회 전반에 제출해야 할 필연성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노조운동이 자신의 합법적 저항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개혁방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사회적으로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노조운동은 '계급이기주의'라는 일방적 비난 속에서 왜소하고 편협한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이념적, 조직적 전화과정은 이렇듯 자본주도형 사회개혁방향에 대한 위력적 대립항으로서의 자기정립과정이며 이는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현단계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전략적 과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원리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원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단결'과 '투쟁'일 것이다. 단결과 투쟁은 '노동'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삶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이다. 만일 누군가가 노동자로부터 단결과 투쟁을 빼앗아간다면 그는 노동자의 '생명'을 박탈하는 '살인행위'를 저지른 것이 된다.

투쟁과 단결의 역사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최초에 노동자들은 개별 공장주에 맞서 개별적으로 저항했다. 이 저항들은 그러나 '범죄'와 구별되기 힘든 조악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주인의 물건을 훔치거나 토막낸 고양이 시체를 사장 집 뜰에 던져넣거나 술에 취해 악독한 고용주를 칼로 찔렀다. 이러한 '범죄'마저 불가능했던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우회적으로 자기 불만을 토로했다(주4).

개별적 저항이 어떤 개선도 가져다주지 않음을 깨닫게되자 노동자들은 기계에 눈을 돌렸다. 자신들의 절망적 상태를 가져온 기계라는 괴물을 파괴하는 무익한 폭동(주5)의 열풍이 지나간 후에 노동자들은 비로소 단결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이 단결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과 경쟁이라는 적과의 싸움을 거쳐서 개별 작업소와 공장 단위로 이루어졌다(주6). 노동자들은 자본의 단결에 맞서 지역적으로, 전국적으로, 산업별로 자신의 단결을 확대해간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한 파업투쟁이 고통의 결과만을 문제삼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단결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급기야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정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때 비로소 노동자들은 '계급'으로서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 된다.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자기완성

노동자들은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동자의 계급으로서의 자기완성과정은 계급적 대립 그 자체의 지양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계급적 정치세력으로서 국가권력에 도전하지만 노동자들의 궁극적 희망은 계급적 존재와 인간사회의 계급적 분열의 철폐에 있으며 나아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지양하여 국가 자체도 소멸시키는 데 있다.

 

단결과 투쟁의 법칙적 자기전개과정의 자기 동력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근본모순

단결과 투쟁의 이러한 법칙적 자기전개과정(자본주의적 질서-자본과 노동, 노동과 노동 사이의 분열-최초의 단결-노동과 노동 사이의 분열의 극복-단결의 발전-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열의 극복-계급과 국가의 역사적 종결-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회복)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내재해 있는 근본 모순을 자기 동력으로 하여 전개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주7)의 통일'로 나타난다. 노동과정은 인간생활에 필요한 재화, 즉 사용가치의 질적 산출을 의미하고 가치증식과정은 잉여가치의 양적 산출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과정의 질적 의미는 감소하고 대신에 가치증식과정의 양적 의미가 증대한다. 생산의 목적은 점차로 인간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윤 추구에 맞추어져갔다.

노동자에게 '노동'은 생존의 근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자기실현'의 유일한 통로다. 그는 기계를 통해 세계를 보고 노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고참 노동자의 '성실성'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몸에 밴' 것이다. 노동자가 단 하루도 저항을 그치지 않는 근본 이유는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의 인간적 질과 자주성'을 사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노동과정에서 보여지는 노동자들 내부의 집단적 자기 리듬(주8)은 생산공정과 작업조직의 그 어떠한 '합리화' 공세에도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다.

가치증식과정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즉자적 반항이 동료들의 신뢰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일상적 노동과정을 통해 표현되는 그 '인간'에 대한 전제된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단결의 혼'은 이렇듯 투쟁을 통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과정에서의 인간적 교류와 노력을 통해 서로 확인되는 신뢰를 바탕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노동의 인간적 질과 자주성을 사수하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단결과 투쟁으로 나아가는 근본 동력이다.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이념과 조직원리

87년 이후 전개된 한국 민주노조운동이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할 이념과 조직원리를 정식화해내는 일은 민주노총(주9) 원년인 95년 시점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다가오고 있다. 87년 이후 구체화되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원리는 초보적이나마 '미래 사회의 삶의 원리'의 맹아를 담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자본운동의 기본 원리가 '경쟁'이라면 민주노조운동은 '단결'을 자기 운동의 기본 원리로 삼아왔다. 나눔과 섬김의 정신, 공동체의 발전과 자기 성장을 분리시키지 않는 태도 등이 투쟁 속에서 '동지애'를 서로 확인함으로써 축적되어왔다. 87년 이전 노동시장을 둘러싼 경쟁자에 지나지 않았던 동료관계가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이다. 자본에 의해 강요되어왔던 내부의 경쟁은 이제 새로운 공동체 원리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단결은 불가역적 이해관계로 내재화되었다. 내부의 분열과 배신행위는 조합원 전체에 의해 가차없이 단죄되었다. 단결은 자본이 쳐놓은 온갖 울타리를 뛰어넘어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단결의 정신은 자본의 운동논리에 한낱 부속으로 동원되어 기계이기를 강요받아왔던 현실을 뒤집는 인간 중심성의 원리와 개별로 흩어져 노예화되어왔던 과거를 깨뜨린 주인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발전과 이를 통한 계급적 분열 그 자체의 극복까지를 포함하는 계급성과 변혁지향성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민주노조운동은 대중 주체의 직접 민주주의 정신을 발전시켜왔다. 의사결정과정, 집행과정, 집행에 대한 평가 및 통제과정 전체에 걸쳐서 민주노조의 조직 원리로 정착되어온 정신이 바로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다. 민주노총 건설과정과 산별단일노조 건설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주요하게 계승하고 견지해야 할 운동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민주노조'의 염원은 그러나 최근 기존 실천양식의 근본적 전화 속에서 보다 명확히 구체화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자본이 아래로부터 치밀하게 현장을 재장악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대중이 총회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더이상 민주성은 아니게 되었다. 민주성은 이제 '다가가는 조직화'와 결합될 때만 온전히 계승되고 발전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원리로서 '자주성'의 원칙을 빼놓을 수 없다. 자주성은 87년 이전에 숙명처럼 받아들였던 자신의 처지와 삶을 이제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변혁시켜나간다는 정신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언명에 드러난 바로 그 정신이다. 자주성의 원칙은 노동계급 중심성의 원리를 내포한다. 노동자의 운명은 노동자 자신의 힘에 의해 개척될 수밖에 없다는 원칙은 '현실'의 이름을 빌린 다양한 비노동자적 대안세력과의 명백한 독립성을 견지할 것을 요구한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절대적 필요성이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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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이 논쟁에 대한 정리는 노중기, 「1987년 이후 거시적 노자관계의 변동과 노동운동」, 『동향과 전망』, 녹두, 1994년 겨울ㅗ봄 합본호, pp.127∼134를 참고할 것.

2) 이 논쟁에 관해서는 전국노련 정책실, [우리나라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 논의 검토],{월간 자료} 1995년 7월호, p108-114를 참고할 것.

3) 이 점과 관련해서는 빠른 시일 안에 독자 항목으로 정리할 계획에 있다.

4) 88 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노동조합이 없던 실제 어느 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동료들의 손가락을 셀 수 없을만큼 잘라먹었던 한 구닥다리 프레스 기계에 백목 글씨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쓰여져 있었다. '88 서울 올림픽 공식 지정 프레스'. '풍자'는 억압적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효과적인 저항의 일종이다.

5) 러다이트 운동. 우리나라에서도 집단적 폭동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생산수단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86년에 인천의 한 공장에서는 10대 소년 노동자가 공장이 없어지면 매일같은 잔업,철야가 없어지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공장을 방화했던 사건이 있었다.

6) 87년 이전에 한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밥줄'을 건 대모험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적은 동료의 '배신행위'였다.

7)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보면 후자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된다. 여기서 운동은 질적으로 고찰되며 그것의 특수한 방식에서 목적과 내용에 따라 고찰된다. 전자는 가치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추상적 인간 노동에 의해 성립한다. 여기서 운동은 양적으로 고찰된다. 노동이 그 작동에 필요로하는 시간 곧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기간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도 더이상 합목적적으로 작용하는 노동력을 위하여 기능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요인으로서의 의의를 갖지 못한다. 그것들은 그저 일정량의 대상화된 노동으로서만 계산에 들어갈 뿐이다. 생산 수단에 포함되어 있든 아니면 각 노동력에 의해서 부각되어 있는 노동은 시간 단위로 계산된다.

가치증식과정은 어느 특정한 점을 넘어서 연장된 가치 형성과정일 뿐이다. 가치형성과정이 자본으로 지불받은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생산물에 의해 보전되는 지점까지만 계속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가치형성과정이다. 이때 잉여가치의 생산은 없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한 가치형성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 가치형성과정이 이점을 점어 서면 그것은 가치 증식과정이다. 즉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이다.

8) 어느 공장에 가건 작업자들이 자기 담배 필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어떻게든 확보해내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9) 95년 11월 11일 건설될 예정인 민주노총은 첫째, 전노협, 대공장, 사무전문직으로 분화,발전되어온 민주노조운동이 박창수 노대위, ILO공대위, 전노대를 거쳐 발전시켜온 민주노조총단결대오의 일단락이고 둘째, 민간부문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적 총괄로서 이후 공공부문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를 모아 산별노조로 발전해갈 마지막 징검다리이며 셋째, 지금까지의 반어용노총을 기치로 한 소수파운동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다수파운동으로 전화하는 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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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15 2005/02/1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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