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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자료] 95년 7월

 

무쟁의 현대중공업 임투, 활동의 재전환을 요구한다


1. 우리는 무방비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6월 15일, 현대중공업 노사는 총액 92,600원을 중심으로 한 임금 인상에 잠정 합의했다. 그날 오후 5시부터 개최된 전 공장 결의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조합원 1,000여명은 잠정 합의 소식을 듣고 박수를 쳤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정 합의안은 다음날 실시된 조합원 총회에서 68.9%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전국 임투 전선이 6월 19일을 향해 긴박하게 형성되고 있던 시점에, 투쟁의 중심을 지키고 서 있던 현대중공업 노조가 도중하차한 이 '사건'은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노동운동 탄압 분쇄 전선(주1)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한국통신과 서울지하철을 비롯한 주요 투쟁 노조들이 각개약진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주2). 임투는 지자제 선거에 묻혀버렸고, 자본에 의한 분리 타결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런 결과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사측 제시안에서 단 하루의 휴가를 더 따내는 것으로 투쟁을 마무리했다. 왜 그랬을까? 여기 '민주항해' 소식지의 편집을 담당했던 한 조합 간부가 6월 16일 찬성 가결 직후의 심정을 토로한 넋두리(?)를 들으면서 그 원인을 더듬어보자.

'동지들! 오늘 우리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조합이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투쟁을 하지 않고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멍합니다. 전국의 노동형제들과 제 민주세력이 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투쟁을 하지 않고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슴이 쓰리고 울컥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탓하길 거부합니다. 단지, 뻥 뚫린 우리의 가슴을 바라볼 뿐입니다. 자본의 전술은 집요하고 우리는 허술하였습니다. 저들은 조합원들의 심리를 잘 이용하였고, 우리에게는 운신의 폭이 적었습니다. 저들은 치밀하였고, 우리는 그저 관성과 습성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이 씌워놓은 올가미에 덮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노동조합의 안과 밖을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치고 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에 무방비였습니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은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지켜왔던 노동조합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존재합니다. 이제 더이상 지금까지의 방식과 생각으로는 그 무엇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더이상 악화될 것은 없습니다. 밑바닥까지 왔기 때문에 더 나빠질 것은 없습니다. 이제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다시 투쟁하는 발판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이미 없었다… 노동조합의 메카라는 신화도, 골리앗의 처절한 신화도 아닌, 엄혹한 현실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다시 일어서는 미래가 있다고, 그것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진술로부터 현대중공업이 최초로 '투쟁없이 타결'한 원인들을 뽑아 보자.

첫째, 자본은 집요하고 치밀하게 치고 들어온 반면, 노동조합은 무방비였고 관성과 습성이 전부였다. 그래서 가슴이 쓰리고 미어지지만 투쟁을 하지 않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 동력은 약했고 준비는 너무나 미흡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토록 힘겹게 지켜왔던 노동조합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부 대중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투쟁으로 또 한번 깨졌을 때, 작년 5,000여명이 조합을 탈퇴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노동조합이 분열될 우려가 컸다.

셋째, 현실은 이미 더이상 악화될 것조차 없는 밑바닥까지 와 있고, 그것이 더이상 지금까지의 생각과 방식으로는 돌파가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메카라는 신화도, 골리앗의 처절한 신화도 조합원들의 변화된 상태와 변화된 의식에 걸맞는,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노동조합의 전략과 정책, 활동 방식의 변화 없이는 지나간 전설일 뿐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자본의 분할지배전략에 포섭되어 가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버티고만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의 내적, 외적 환경은 급속히 변하고 있는데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위기를 돌파해나갈 방법론과 주체는 준비되지 않았다. 현실은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쳐 버렸다.

조합원들의 동력이 있다 없다를 떠나, 올해 투쟁이 또 한 번 대가리 박고 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누구 하나 적극적 대안을 제기하지 못했고, 노동조합 내부적으로 자신감과 확신을 갖지 못했다.

사측의 집요한 현장 장악 노력

사측은 올해 들어 'Reform '90s' 등 사업부별로 전개되던 경영혁신운동을 전면 재편하여 전사적 경영혁신운동인 '힘찬 21' 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올 1월 반장, 팀장, 과장 등 총 4천 64명을 대상으로 '경영혁신 운동 추진 직책 보임자 워크 겼'을 실시했다. 또한 3월에는 '사업부별 의식혁신실천 결의대회'가 실시되었다. 사업부별로 '경영혁신 추진 사무국'이 설치되어 조기청소, 두레활동(주3) 등 이른바 자율실천운동이 추진되었다.

사측은 "2년 안에 현장을 10명 내외의 반단위로 완전히 장악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고 있다. 실제 반별 인원을 10명 안으로 축소시키는 조직개편을 단행함으로써 현장감독자에 의한 밀착 통제가 가능한 '반생산 체제'로 급속히 전화하고 있다. 반단위 현장 재장악을 위한 현장 감독자 교육도 강화되고 있다. '직책자 조직활성화 교육', '가나안 농군학교 위탁교육', '다물 교육' 등이 대규모로 실시되고 있다. 또한 반단위로 '전사 조직혁신 연수'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 교육은 작년 11월부터 올해 8월까지 총 13,000명을 대상으로 매 차수 125명씩 2박 3일간 진행되고 있다.

한편 현장 활동가들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활동가들에 대한 잔업 통제가 일상화되었고, '한 사람이라도 노조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반원 전체에 손해를 끼친다'는 논리로 동조하지 않으면 고립되어 버리는 반 내부의 집단 압력을 부추겨 왔다.

사측이 이렇듯 치밀하고 집요하게 치고 들어오는 동안 노동조합은 기존 활동방식을 답습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사측의 조직개편으로 반 팀이 흩어져 기존 '현장동지회'(주4)가 깨져나가도 속수무책이었다. 단협상에 그나마 확보되어 있는 조합원 교육시간도 사측이 '전사 조직혁신 연수' 시간에 나눠서 하라는 데에 대책없이 거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잔업 통제에 대해서는 상집 차원에서 중장비 사업부에 문제제기하여 철회시킨 예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속수무책이기는 마찬가지다. 부서장이 가정 통신문을 보내고 부인 생일과 결혼기념일까지 챙기는데 대소위원이나 상집들은 조합원 개개인을 인간적으로 만날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다.

집행력에 공백이 생긴 노동조합의 모습

 

더 큰 문제는 그나마 기존의 대소위원 활동조차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데 있다. 그 동안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활동했던 3,4선 대의원들이 작년 9대 대의원선거에 많이 출마하지 않았다. 그 공백이 이번 임투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다수의 조합원들은 이번 임투만큼 대의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고 얘기한다.

노동조합의 허리인 대의원 선에서 구멍이 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지쳤기 때문이다. 날마다 잡히는 회의 때문에 잔업은 아예 할 엄두도 못 낸다. 8년간 한 해도 안 빠지고 파업이 있었고 그때마다 무더기 징계가 떨어졌다. 월급이라고 집에 가져가는 건 뻔하고, 애들은 벌써 국민학생, 중학생이다. 고등학생 학부모인 40대 활동가들도 적지 않다. '가족'과 '생활'의 문제가 '운동'과 '활동'을 압박해 오는 만큼 '열정'과 '의리'는 더욱더 요구되었다. 피해가고 싶다! 이것이 많은 활동가들이 갖고 있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구나 조합원들의 이기적(?) 모습에 대한 배신감, 동료들이 하나 둘씩 활동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등은 그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대소위원 활동에 대한 제도적, 정책적 지원이 전무했던 것도 한 몫 거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대의원들이 작년 수준이라도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다면 상집 차원에서라도 직접 현장 조합원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임원-실-부서간에 유기적 업무 분담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서 또는 실 내부의 실무에 매몰되어, 전체적인 조합 활동의 방향 속에 자신의 업무를 배치해내고 이를 현장 정서에 걸맞게 적용해내지 못했다. 2만 조합원에 대한 집행 실무가 주는 객관적 하중은 엄청나다. 그러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집약된 실천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대소위원, 각 분과에 대한 책임 영역은 상집 내부에서 제대로 확정되지 못했다. 의사 결정과 집행, 그리고 집행에 대한 대중적 평가 과정 전체가 삐거덕거렸다. 현장 조합원들은 "간부들의 의견이 한 목소리가 아니다.", "집행간부도 대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조합원과 함께 할 수 있는 간부가 되었으면 한다.", "집행간부 얼굴 보기 힘들다.", "집행간부의 무사안일이 문제다."라고 서슴없이 비판한다. 상집이 현장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발로 현장을 뛸 조건조차도 마련되지 못했을 때 조합원들로부터의 이런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는데도 안하고 못한 것에 있다. 부위원장들이 이렇고, 대의원 분과장들이 저렇고, 조합원들이 그렇고, 그래서 실 또는 부서 차원에서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조차도 방기하지 않았는지는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조합원들의 동력이 저절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실제 조합원들은 '꿈적도 안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엔진부문 집회에 126명, 중전기부문 집회에 270명 밖에 참여하지 않자, 분과 집회를 취소하자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자발적으로 동의했느냐는 여부는 있지만, 사측의 무분규 서명에 만 여명의 조합원들이 동참했다는 점도 사태의 심각성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조합원들이 따라오는 시대는 이미 아니었다.

6월 15일 전 공장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선진 활동가 층이라 할 수 있는 1,000여명의 조합원들은 뒤를 돌아보면서 피눈물을 삼키며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울분과 아쉬움은 뼛속 깊이 남지만, 조합원이 있어야 할 텅 빈 뒷자리가 현실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당당하지 못하였고, 하나로 튼튼히 뭉치지 않았습니다

윤재건 위원장은 경찰에 자진 출두하기 하루 전인 6월 20일, 올해 임투를 간략히 총괄한 평가 글을 조합원들에게 발표했다.

'노동조합은…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조합원의 지혜와 힘으로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나 올해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당당하지 못하였고, 하나로 튼튼히 뭉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사측에 요구하지도 못하였습니다. 파업을 하지 않고 승리하는 것,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길은 천만 노동자가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만약 조선노협, 현총련, 민주노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올해, 우리가 임금을 얼마나 따냈는가를 중요시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조합을 중심으로 얼마나 뭉쳤는가? 우리는 최선을 다 했는가를 깊게 생각해 봅시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합시다. 올해를 중요한 교훈으로 삼아 노동조합의 희망찬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합시다… 동지들, 자신감을 가집시다…'

연대의 필요성과 자신감 회복에 대한 호소, 그리고 당당하지 못했던 투쟁 과정에 대한 자책의 글이었다. 사실 조합원의 자신감 회복, 연대의 필요성과 전망에 대한 대중적 확신의 조직화, 현장 조직력의 회복 및 강화는 올해 임투에서 쟁취해야 할 주요한 목표였다.

이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올해 임투에서는 무엇을 쟁취했고 무엇이 과제로 남았나?

9대 집행부는 올해 임투의 목표를 크게 세 가지로 잡았다.

첫째, 조합원의 자신감 회복. 이는 지난 8년간 특히 94 임투 이후 팽배해진 투쟁에 대한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전망과 자신감을 남기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둘째, 연대의 필요성과 산업별 단결의 전망에 대해 조합원 대중이 확신하도록 하는 것. 이는 "매번 전국 투쟁의 총대를 맸다가 우리만 깨진 것 아니냐?"는 연대 기피증을 극복하고, 연대의 성과가 조합원 대중들에게 피부로 느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잡혀진 것이다.

셋째, 사측의 신경영전략을 저지하고, 현장 조직력을 회복 강화하는 것.

조합원의 자신감 회복이라는 목표

첫째 목표에 비추어 봤을 때 올해 임투가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투쟁을 위한 투쟁을 피해야 한다는 것과 조합원의 자신감 회복이라는 과제를 무리하게, 또는 알게 모르게 등치 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투쟁을 위한 투쟁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파업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에게 전망과 자신감을 남기는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 8년동안 싸웠지만 남은 게 뭐냐?"는 조합원들의 피해의식이 직접 반영된 것이다.

올해 임투 속에서는 이 중 두 번째 측면이 과장되어 '투쟁을 위한 투쟁의 회피=조합원들의 피해의식 극복=조합원들의 자신감 회복'이라는 등식으로 은연 중에 비약된 면이 많다. 이러한 비약은 사측의 무분규 서명과 조합원 총회 소집 서명운동에 만명 단위가 참가한 것과 분과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이 백단위에 불과한 것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반면 첫번째 측면을 발전시켜내려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중 동력을 만들어내는 상집 내부의 일관된 계획과 실천은 거의 없었다. 대의원들 중 상당수는 아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사측이 대량으로 쏟아붇는 선전과 집요한 동원 공세 속에서 노동조합이 내는 대자보 하나 보기 힘들었다. 허리가 뚫리고 발이 잘리는데도 머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점은 위원장이 공석이었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대중 동력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알아서 올라오는 어떤 것으로 방치되었다.

조합원 대중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았을 때 사측과의 대결에서 수세로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윤재건 위원장의 자평처럼 '하나로 튼튼히 뭉치지' 못했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사측에 요구하지' 못한 것이다. '만들어가는 투쟁, 다가가는 조직화' 없이 대중 동력은 더 이상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평가 속에서나 얘기되는 금언이 아니다. 이번 임투는 그것이 이미 냉혹한 현실임을 분명하게 보여 줬다.

결국 투쟁을 위한 투쟁은 피할 수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자신감은 회복되지 않았다. '동지들, 자신감을 가집시다'라는 호소는 '다가가는 조직화와 만들어가는 투쟁'으로 구체화시켜야 할 힘겨운 과제로 남았다.

연대활동에 대해 조합원들이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가?

둘째, '조선노협, 현총련, 민주노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올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얼마나 많은 조합원들이 동의하고 공감할지 의문이다. '파업을 하지 않고 승리하는 것은 천만노동자가 하나로 뭉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자각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올해 임투 내내 '연대'와 '단사'는 끊임없이 대립되었다. 상당수 대의원들은 윤재건 위원장이 현총련 의장과 조선노협 의장에 선출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한국통신의 외로운 투쟁을 내 일로 받아들인 조합원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상집 내부에서조차 연대의 문제는 당위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천만의 단결이 2만의 단결을 보장하고, 천만의 이해가 2만의 이해를 실현시킨다'는 명제는 여전히 조합원 대중의 확신으로 자리잡지 못한 채 다음의 과제로 넘겨졌다.

연대의 문제는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질적 전화 발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일 뿐 아니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올해 임투 속에서 연대와 단위 노동조합의 단결력 강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딪치고 맞물렸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특히 1995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현총련과 조선노협의 중심사업장이자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선두에 서왔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전국적인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발전 전망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둘째는 경영 층의 신경영전략의 결과로 드러나는 노동조합 내부의 분열과 조합원 이탈, 그리고 노조의 현장 장악력 약화 등의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하여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조합원 전체의 신뢰를 받는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다시 설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과제는 한 쪽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쪽의 과제 역시 해결할 수 없는,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동시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과제들이다.'(주5)

전국 민주노조운동은 87년 이후 급격한 양적, 외연적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92년 현대자동차의 상여금투쟁이 패배한 이후 양적 성장의 한계는 분명해졌고, 민주노조운동은 질적, 내포적 전화 발전을 요구받는 단계로 진입했다. 전화 발전의 요구는 민주노조운동의 이념과 조직, 전술 전반에 걸친 총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94년 임투 직후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조직발전 논의는 조직형식 논의에만 치우쳐,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계승해야 할 성과와 극복되어야 할 한계에 대한 치밀한 검토 없이 진행되었다. 건설될 민주노총과 산별노조가 어떤 성격의 산별인지, 민주노총과 산별노조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민주노총-산별노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건설되어야 하는지, 무엇보다 조합원 대중이 민주노총-산별노조 건설운동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는 무엇이 준비되고 실천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 격론의 과정들이 없었다.

민주노총을 건설해 가는 과정 자체도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상층 중심의 의사결정 과정과 선포식 조직화 방식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산별로 가는 길에 대한 견해 대립은 표결로 제압되었다. 제조업과 비제조업, 자동차 업종과 조선 및 금속일반 업종, 전노협과 민주노총 준비위가 민주노총-산별노조 건설의 길목 길목마다에서 삐거덕거리고 있다.

현장의 요구와 투쟁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조직 건설 논의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꽉 막힌 원칙주의자가 떠드는 헛소리가 아니다. 전노협 건설을 투쟁으로 추동해냈고, 90년 골리앗 투쟁으로 전노협을 사수해냈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전국 민주노조운동의 최선봉에서 총자본의 무차별 공격을 견디며 전진해 온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천만 노동자의 희망이라는 찬사가 결코 허황된 신화가 아님을 온몸으로 증명해 온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바로 그 주역들이 지난 8년간의 격전 속에서 지쳐 나자빠지고 있는데, 자본의 무차별 난타로 현장 곳곳이 메우기 어려운 구멍들로 뻥뻥 뚫리고 있는데, 무엇으로 2만 조합원을 민주노총 건설과 산업별 단결의 길로 떨쳐나서자고 설득할 것인가? 현장이 무너지고 있는데, 일정의 제시만으로 산업별 단결의 희망이 생겨날 리 없다.

9대 집행부는 역대 그 어느 집행부보다도 연대의 필요성과 전망에 대한 확신을 조합원들에게 심어 주고자 적극 노력해 왔다. 현총련과 조선노협의 의장 사업장으로서, 영남지역 금속노조의 대표 사업장으로서, 민주노총 준비위의 중심 사업장으로서 맡겨진 책무를 최대한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상당 부분 위원장 개인의 업무로 치부되었고, 사사건건 내외의 조직적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5월 26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쟁의발생 신고를 결의하기로 한 결정은, 5월 24일 설계부문 대의원들이 바깥 일정에 맞춰 쟁의발생 시기를 앞당겨서는 안된다며 연기명 서명하여 위원장 면담을 요청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6월 쟁발로 번복되었다(주6). 그러나 다행히(?) 5월 25일 윤재건 위원장에 대한 경찰의 불법 연행 기도라는 비상사태가 터지면서 5월 27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가까스로 쟁의발생을 결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5월 27일 대의원대회는 대의원 총 217명 중 123명밖에 참석하지 않는 최악의 대의원대회가 되고 말았다. 6월 9일 운영위원회는 쟁대위 조직과 쟁의비 심의를 보류시켰다. 위원장이 복귀하면 그때 심의하자는 것이 이유였다.

대의원과 운영위원 선에서 계속 제동이 걸리는 와중에 사측은 무분규 서명과 총회 소집 서명 등 아래로부터 조합원 대중을 직접 동원하면서 치고 들어왔다. 대의원대회의 쟁발 결의를 '위원장 호신용'이라고 매도하면서 일선 현장 관리자들을 대거 동원해 만여명의 조합원들이 서명에 참여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6월 5일 경남 지노위에서 쟁의발생 신고 사유가 부적합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리자마자 6월 6일 곧바로 쟁의행위 및 업무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사측이 이 새로운 수법까지 동원한 이유는 뻔했다. 불법 파업이라는 부담을 지워 집행부와 그 동안 지쳐있던 활동가들을 위축시키려는 것이었다. 6월 7일 사측이 제시한 사상 유례 없는 1차 제시액은 작년 말 상여금 협상과 월급제 협상을 하면서 노사화합선언과 무쟁의선언을 요구했듯이 노동조합을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로 끊임없이 개량화시키려는 공작의 연장선에서 제출된 것이었다. 연대와 실리를 대립시켜 노동조합의 분열을 유도하려 한 것이다. '연대냐 실리냐' 하는 이분법은 '투쟁이냐 타결이냐' 라는 양자택일을 노동조합에 강요했다.

협상의 진행과정

한편 노동조합은 위원장이 경찰의 침탈을 피해 있는 동안 '성실교섭 촉구'로 기조를 잡고 6월 3일까지 상집과 대소위원 밤샘 농성을 계속 진행했다. 6월 6일에는 전국 투쟁 중심 사업장 회의에 참석하여 아무리 어려워도 6월 19일 전국적 투쟁 집중 시기를 맞춘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6월 8일 해고자들이 노동조합 앞에 천막을 치고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6월 9일부터는 매일 아침 상집과 대소위원들이 정문 출근투쟁을 전개했다. 6월 10일에는 조직전문위원, 정책전문위원, 선동대 등 각종 전문위원 전체가 모여 간담회를 가졌다.

그러나 성실교섭 촉구 기간 동안 노동조합은 하다 못해 머리띠 하나 묶는 그 흔한 준법투쟁 전술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조합원의 피해의식에 대한 과장된 인식들이 애써 준비해 논 쟁의 프로그램을 조합 책상 서랍에서 썩게 했고, 발로 뛰어 현장 대소자보 작업이라도 수행하려는 건강한 동력들을 갉아먹었다. 위원장의 공석은 이를 더 부채질했다. "대책 없다. 위원장이 들어와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할거 아니냐?"는 것이 대다수 활동가들의 태도였다.

결국 윤재건 위원장은 6월 12일 현장에 복귀했다. 이날 전체 집회에는 5,000여명의 조합원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집행부와 대소위원 전체의 노동조합 밤샘 농성이 다시 시작되었다. 위원장 복귀 후 노동조합은 사측의 가처분 신청으로 인한 불법 파업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해고자 문제를 분리하여 이를 현총련 차원의 공동요구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월급제 문제와 우리사주 문제 등 현안문제에 대한 실무협상을 요구해 들어갔다. 또한 임금인상 적용시기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쟁점 화시키고 사측 제시 안의 맹점들을 치고 들어갔다. 동시에 사측이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6월 16일 조합원 총회에서 쟁의행위 결의를 위한 찬반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했다.

위원장이 복귀하자 현장 곳곳에는 작업복 차림의 사복 경찰 100여명이 쫙 깔렸다. 눈에 보이기 시작한 이 긴장이 조합원들의 투쟁 동력으로 되살아날 지는 미지수였다. 6월 13일 분과장들과 부서 대표들까지 참석한 소위원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현장 동력은 여전히 바닥을 맴돌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6월 15일 집회에 참석한 1,000명 남짓의 조합원 머릿수에서 다시금 분명해졌다.

경찰 측의 중재(?)로 6월 15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의 긴 협상 끝에 윤재건 위원장을 포함한 4명의 노조 대표와 김정국 사장을 포함한 4명의 사측 대표가 95년도 임금 인상에 잠정 합의했다.

몇몇 '현노투'(주7) 동지들이 부결 선동 대자보를 현장에 부착했다. '해고자 문제 해결 없이 타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6월 16일 중장비부문 대소위원들 역시 부결선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6월 16일 조합원 총회에서 조합원들은 68.9%의 찬성률로 잠정 합의 안에 동의했다. 끝까지 반대표를 던진 조합원들은 6,028명으로 투표자의 30.4%였다.(주8)

결국 올해 임투 속에서 연대의 필요성과 그 전망이 조합원 대중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으로 남게 하는 작업은 철저히 실패했다. 사측의 입체적 공세, 노동조합 내부에서 이른바 실리주의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집행부의 연대활동에 제동을 걸어왔던 점, 상집 전체의 팀뚺이 대중적 연대투쟁이 가능하게끔 유기적으로 가동되지 못한 점 등이 원인이다. 그리고 현총련과 조선노협 다른 노조들의 상태, 울산 지역 노동조합의 전반적 상태 등도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조합원들은 올해 임투를 통해 여전히 상급단체의 상을 경험하지 못했고, 단위사업장을 넘어서는 단결의 위력과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총-산별노조 건설의 문제는 현장 재탈환과 함께 여전히 무거운 화두(話頭)로 남게 되었다.

사측의 신경영전략에 어떻게 대응하며 현장조직력을 강화하고자 했는가?

셋째 목표를 보면, 노조는 사측의 신경영전략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다. 현장 조직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94년 출범한 '현장동지회연합'이 실질적인 활동을 중지한 이후 전 공장 현장 조직이 부재한 상태에서 현장 활동가들은 사측의 맨투맨 공작에 뿔뿔이 흩어져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현장 활동가들은 95년 들어 활동가들 간의 분과별 정기모임을 정례화하고 그간 현장 조직운동의 역사와 활동 방향에 대한 토론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3월 말에는 1박 2일의 수련회를 갖고 현장 조직 건설을 위한 고민들을 전 공장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그후 2개월간 각분과별 토론회와 조직 활동을 전개하면서 이 성과를 모아 분과 대표자회의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6월 2일 현장 활동가의 일상 활동이 전체 단위 조직 속에서 확고한 체계를 갖추고, 정권과 자본의 폭압적 탄압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민주노조의 정통성을 계승 발전시킬 조직적 대오로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전진하는 노동자회(준)>이 공식 출범한다.

이 자리에서 준비위는 조직 건설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첫째, 정권과 자본의 이념 공세와 물리적 탄압에 대응하기 위한 조직적 전망을 확보한다. 둘째, 노동조합 공식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장에서의 독자적 내용에 기반한 주체적 활동을 이끌어낸다. 셋째, 조직적 학습과 토론을 통해 한층 더 강화된 노동자 의식으로 무장하고 토론된 내용을 조합원들에게 직접 전달하여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하게끔 한다. 넷째, 올바른 조직관과 활동관으로 단련된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해낸다. 다섯째, 동지들 간의 상호 불신을 극복하고 옆에서 챙겨주는 동지애로 동지들 간에 힘이 되는 조직을 건설한다.

준비위는 6월 9일부터 해고자 천막 밤샘 농성에 결합했으며, 위원장 침탈시 즉각적인 점거농성을 계획하는 한편 조직 건설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6월 20일 <전진하는 노동자회>는 준비위를 거쳐 15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출범했다.

<전진하는 노동자회>는 91년 '노민추'와 94년 '현장동지회연합'의 적법한 계승자다. <전노회>는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민주노조 강화'와 '선진노동자의 독자적 정치활동 영역 개척'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과제는 95 임투를 경과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산별건설운동' 또는 '계급적 평조합원운동'(주9)으로 보다 명확해질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보여진다. 현장 재탈환은 이제 계급적 정치적 시야에서 장기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되고 조직되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지난 8년간의 경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미래 운동의 질서, 미래 삶의 질서에 대한 집단적 설계 작업은 이제 더이상 늦춰지거나 미루어질 수 없는 절박함으로 다가오고 있다. 현장 조직력 강화라는 과제는 이 작업에 기초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그만큼 현장은 삶의 총체적 질서에 대한 대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3. 이제, 더이상 지금까지의 방식과 생각으로는 그 무엇도 쟁취할 수 없다

기존의 활동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이제 95 임투가 남겨놓은 과제들을 정리해 보자.

첫째, 기존의 활동방식이 근본적으로 전화, 발전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의 즉자적 분노에 기반한 자생적 투쟁의 폭발은 한계에 다다랐다. '다가가는 조직화와 만들어 가는 투쟁'이 요구된다. 조합원을 끌어내는 다양한 정책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사측은 10명 내외의 반단위로 밀착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현장을 장악해 들어오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반을 기본 단위로 하는 현장 권력을 세워내야 한다. 소위원제도를 이에 걸맞게 재편하고 규약상 소위원 활동 여건을 획기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집행부는 전문위원 제도를 대폭 확대하여 턱없이 모자라는 집행력을 보강하고, 전문위 스스로가 자신의 독자적 활동 영역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인사저널, 혁신, 개선활동, 현중뉴스, 중장비뉴스 등등 쏟아지는 사측의 홍보전에 대응할 수 있는 현장 대항언론을 확대, 강화해야 한다. '다물 교육'이다 '전사조직혁신연수'다 대량으로 실시되는 사측의 교육에 맞서 조합원 교육을 일상화해야 한다. 지난 8년 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손볼 틈이 없었던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된 단협 조항들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쟁취해야 한다. 중전기부문 조합원들이 중공업 단협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대와 현장 조직력 강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둘째, 이러한 과제들이 단위사업장 자체로 완성될 수는 없다. 사측의 엄청난 자금력과 대규모 동원력에 맞서 노동조합이 현장 권력을 재장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큰 단결과 힘이 필요하다. 물론 산별노조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조합원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거대 산별노조가 관료화되고 총자본의 충실한 파트너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부터 단위사업장의 현장 동력을 유지, 강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연대와 현장 조직력 강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편 현장 조직운동은 단사 민주노조운동의 강화를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노력과 연결시키면서 노동조합운동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독자적 활동영역을 체계적으로 개척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산업별 단결'이라는 과제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성과인 민주성과 계급성, 변혁성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서 싸우자

셋째,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힘찬 21' 운동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공정개선, 자동화 등으로 추진되는 생산합리화, 반생산회의, 두레활동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작업조직개편, 능력주의적 인사관리를 목적으로 재정비되고 있는 승진 및 보상체계, 대규모로 전개되고 있는 기업문화전략 등이 조합원 대중을 동원하면서 운동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여기서 밀리면 남는 것은 강화된 노동강도와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간 노동통제, 빈발하는 산재사고와 또다른 양봉수, 박삼훈의 목숨을 내건 저항 뿐이다. 현장을 둘러싼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노동조합이 무력화되고, 개량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87년 이후 쌓아온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하나의 종업원이 되어 87년 이전의 비참한 임금노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중공업 95 임투는 패배했다. 이번 임투를 통해 우리는 지난 8년간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고 재점검해야 한다. 근본적인 반성 속에서 장기적 전망을 치밀하게 수립해 내는 것에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다. 올바른 평가와 미래에 대한 집단적 설계 작업이 당장 우리가 시작해야 할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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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5월 12일 현대 자동차 양봉수 동지가 분신하고 이 투쟁이 5월 17일 전 공장 총파업과 현총련, 영남노조대표자회의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해 가자, 김영삼 정부는 5월 19일 공권력을 투입해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한국통신 노조를 '국가 전복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초강경 탄압을 자행하고, 5월 25일에는 현대중공업 윤재건 위원장을 사전 영장도 없이 대로에서 강제 연행하려 했다.

정부의 상식을 무시한 일방 탄압이 계속되자, 5월 29일 224명의 교수들이 문민적 공안통치와 노동 탄압을 중단하라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6월 1일 35개 단체가 포괄된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의 발족으로 이어졌고, 6월 3일 12,000여명이 참석한 대규모 규탄 집회로 발전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같은 날 민주노총 부천시흥지역 준비위 간부 3명을 구속함으로써 탄압의 고삐를 더욱 죄었다. 그리고 6월 6일 급기야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같은 날 민주노총 준비위는 투쟁 중심 사업장 회의를 열고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대한 총력투쟁을 결의했다. 6월 7일 김영삼 정부의 노동탄압에 대한 노동계 시국선언이 발표되었고, 6월 10일 전국 12개 지역에서 총 35,000여명이 참가한 동시다발 총력투쟁 결의대회가 열렸다. 6월 12일 범국민대책위는 기자회견을 갖고 김영삼 대통령 탄핵 소추 청원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 6월 13일 명동성당에서는 전국의 모든 교구가 참석한 시국 미사가 열렸고, 6월 15일에는 조계사에서도 시국 대법회가 열렸다. 김영삼 정부에 대한 이러한 공분과 투쟁은 6월 중하순에 집중될 총력투쟁을 계기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키워가고 있었다.

2) 상반기 전체 임투를 총관장할 전국 사령탑(전국 투본)이 없는 조건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다.

3) 사측은 94년까지 추진해 온 분임조 활동을 '두레활동'으로 재편하기 위해 95년 1월 '두레활동 추진자 워크걼'을 전 사업본부에 실시했다.

두레활동은 주 1회 30분씩 반단위로 실시된다. 두레활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반원들에게 안전위원, 제안위원, 총무, 레크레이션위원 등 직책을 부여하여 두레활동에 대한 책임을 분담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둘째, 두레활동을 인간관계망 형성의 기제로 활용하고 있다. 사측은 이를 위해 가족사진을 제출케 하거나 결혼 기념일과 생일까지 파악하고 있다.

셋째, 반별 차등 포상을 통해 반끼리의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경쟁 유도의 또 다른 방식은 제안, 복장, 안전행동, 상호협조 등의 항목을 가지고 각 반원에 대해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다.

두레활동은 현재 도입단계에 있지만 조만간 정착단계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다소 유연했던 노동통제 양식이 노골적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4) 90년 골리앗 투쟁 이후 핵심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된 상태에서 현장 조직은 '부서동지회'라는 형태로 존속했다. 91년 '노민추'가 결성되어 부서, 분과로 흩어져 있는 활동역량들을 전 공장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냈지만, 6대 임원선거 패배 이후 노민추는 해체되었고, 현장 활동가들은 부서, 분과별 '현장동지회'로 산개되었다. 이 '현장동지회'들은 94년 임투에서 '현장동지회연합'이라는 전 공장 조직으로 새롭게 묶여진다. 그러나 94년 임투 이후 대중적 패배의식이 팽배해지고, 노조의 현장 통제력이 극도로 약화된 틈을 탄 사측의 신경영전략이 진행되면서, '현장동지회'는 자신의 독자적 활동영역을 상실하게 된다.

5)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정책 수립을 위한 현장 실태 보고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팀', 1995. 5.

6) 윤재건 위원장은 6월 쟁발로 연기하면서 대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냈다. 첫째, 쟁의발생 결의를 대의원 100%의 찬성으로 이끌어낸다. 둘째, 요구안 중 임금 이외의 해고자 문제, 현안 문제 일체를 끝까지 삭제 없이 요구한다. 셋째, 지도부 침탈시 총파업을 단행한다.

7) '현대중공업 노동자 투쟁위원회'는 93년 초에 발족한 현장 조직이다. 현대중공업 현장 민주조직운동의 역사 속에서 '현노투'는 다소 독특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87년 이후 많은 현장 조직들이 태동하고 소멸해 왔다. 88년 '민주노조선봉'그룹, '현해협', '현민회' 등의 현장 조직이 탄생하여 활동했고 이들은 88∼89년 128일 파업투쟁의 지도력을 형성했다. 128일 파업투쟁의 한가운데서 '한 목소리', '새벽깃발', '자생란' 등의 조직이 탄생했고, 투쟁 이후 '부서동지회'가 광범하게 결성되었다. 이렇게 활성화된 현장 조직활동과 자신감은 90년 골리앗투쟁을 대중적 투쟁으로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골리앗투쟁 이후 핵심활동가들의 대량 구속으로 발생한 현장 공백상태를 극복하고 새롭게 현장 지도력을 재 구축하기 위해 91년 5월 말 '노민추'가 결성되었다. '노민추'는 분과별 조직체계를 산하에 두는 전 공장 중앙집중조직을 구상하고 그렇게 추진되었던 첫번째 현장 조직이었다.

92년 초 6대 집행부 선거를 앞두고 '노민추' 세대와 1,2세대 석방자들이 모여 '민연추'를 결성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운동 역사상 최초로 1,2,3세대가 결합하여 각자의 장점을 강화하고 단점을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현장 지도력이 형성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민연추'는 세대간 강고한 결합에 실패했으며, 홍성률 후보를 앞세운 선거 역시도 이원건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노민추'의 대중 장악력이 취약하고, 1,2세대가 석방 후 변화된 상황에 채 적응하지 못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선거 패배 이후 '노민추'는 조직의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활동이 정지되면서 '부서동지회'로 뿔뿔이 흩어졌다. 92년 이원건 위원장의 직권조인 이후 직권조인 무효화투쟁과 노동조합 정상화투쟁이 근 8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현장 민주세력들은 이 시기에 '준비위', '비대위', '총투위'를 거치면서 내부의 난맥상과 분열상을 표출시켰다. 이 시기는 조직 활동의 방식과 내용을 둘러싸고 이견이 극심해지고, 조직 활동력이 가장 저하된 시기였다.

이러한 상태에 대한 역편향(?)으로 결성된 조직이 바로 '현노투'였다. '현노투'는 과거에 가져왔던 전투성을 대중적 여과없이 일면적으로 강조, 계승함으로써 변화된 현장 대중의 상태에 걸맞는 새로운 활동양식을 정립하지 못했다. 또한 결성 과정에서부터 현장활동가들 간의 광범한 토론없이 소수 모임으로 구성되어, 협소한 전투적 써클로 스스로를 한정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현노투'는 자신의 이념적 목표를 거칠게나마 대내외적으로 거리낌없이 표방하고 그에 근거한 실천 활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현대중공업 현장 조직운동의 역사상 노동조합운동을 뛰어넘는 새로운 조직 활동의 맹아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시도였다. 최근 '현노투'는 '전진하는 노동자회'에 적극 가입하여 그 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던 대중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8) 이 반대표를 다소 무리하게 도식화해 보면 이렇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전투적 문제의식을 가진 4,000대오 + 현노투와 중장비부문에서의 부결 선동에 동의하는 1,000대오 + 조금만 더 끌면 안전수당을 통상급으로 따낼 수 있다고 보고 순경제적 이유로 반대한 1,000대오

9) 87년 이후 예외없이 노조민주화투쟁으로 출발했던 대공장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파에 의한 노동조합 권력 장악 이후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취약한 조합의 실무집행력을 어떻게 강화하고 안착할 것인가, 직권조인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조합원 대중의 엄청난 투쟁 열기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과제를 안정적으로 풀지 못하게 하였다. 집행력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조합원 대중에 '떠밀려'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90년 현대자동차 이상범 집행부의 연말 상여금투쟁이 그 예이다. 이번에는 보다 세련된 직권조인이 반복되면서 노조민주화투쟁은 다시 민주파의 가장 1차적 과제로 등장한다. 또한 생존권적 요구에서 시작된 투쟁은 곧바로 국가권력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현대중공업 노조의 89년 128일 투쟁, 90년 골리앗투쟁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민주노조는 조합원 대중의 뜻에 따르는 민주성뿐 아니라 국가권력과의 전면전도 감당할 수 있는 정치성, 계급성을 동시에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현장 민주조직운동이 수행해야 할 정치적 과제는 보다 분명해졌다. 민주노조 재건 및 강화라는 과제와 국가권력과 전면전을 감당할 수 있는 선진노동자의 독자적 활동영역 개척이 그것이다. 91년 5월 투쟁은 선진노동자들의 독자적 정치활동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총자본의 탄압은 민주노조 강화라는 과제를 여전히 1차적 과제로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민주노조는 그 자체로 여전히 불안했고, 내외적 환경 변화는 민주노조의 존립마저 위협해 들어왔다. 92년 현대자동차 연말 상여금투쟁의 패배는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 전반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와 격론을 야기시켰다.

한편 이 시기부터 자본은 신경영전략이라는 이름 아래 현장을 재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공세를 전개해 왔다. 93년 현총련 공동임투와 94년 전지협투쟁은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그 성과가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운동의 전국 중앙 지도력으로 수렴, 발전되지 못했다. 그 결과 노동조합운동을 둘러싼 고민은 '조직발전 논의'로 협소화되었다. 이 사이 자본의 현장 재장악 기도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건설이 일정으로 제시되고 있는 동안 곳곳에서 '현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졌다.

여기서 우리는 <전노회>를 비롯한 대공장 현장 민주조직들의 고민을 본다. "단사의 현장 조직력 강화가 단사 차원의 노력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그렇다고 현장이 무너지는데 상층 논의만으로 산별노조가 건설될 리 만무하다. 현장의 위기를 돌파하는 속에서만 단결의 폭이 넓혀질 수 있고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다. 그게 뭔가?"

바로 이것이 이렇게 이름 붙여도 좋다면 '계급적 평조합원운동' 또는 '아래로부터의 산별건설운동'이 필요한 이유이다. 산별노조가 빠질 수 있는 관료성과 비민주성은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부터 이미 그 맹아가 나타나고 있다. 상층 중심으로 진행하는 문제나 표결식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이 양적으로 비대해질수록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를 조합원 대중이 주체로 나서서 고쳐나가지 않는 한 서구 노동조합운동의 관료적, 비민주적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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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07:11 2005/02/14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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