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1만여 화학시설, 사고 예방 못하면 '지뢰'
주거지역과 안전거리 확보 등 재구조화 시급
» 화학산업 밀집지역에서 지진으로 인한 연쇄적인 재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의 야경. 여수/ 정용일 기자
산업단지(산단)의 잇따른 폭발사고와 누출사고로 주민이 불안하다(그림 1). 2017년 7월 여수산단 안 롯데케미칼 제1공장의 폴리프로필렌 저장고(사일로)에서 폭발음과 함께 화재가 발생했다. 2017년 5월 30일에는 여수산단 한화케미칼 폴리에틸렌 제조 설비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났고 5월 22일에도 여수산단 한화케미칼 공장에서 유독물질인 자일렌이 누출됐다. 화학사고는 폭발이나 화재가 아니더라도 위험물질 사고인 만큼 누출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인명피해를 불러온다(
여수산단 잇따른 폭발사고로 주민 불안).
2012년 9월 구미산업단지 휴브글로벌(LCD 액정 세척제 제조공장)에서 4t가량의 불화수소산(불산) 가스가 누출되면서 노동자 5명이 사망하고 인근 주민 7162명이 병원진료를 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3년 1월에는 상주 염산누출사고, 삼성반도체 화성공장 불산 누출로 인한 사망사고, 2015년 7월에는 울산 한화케미칼 2공장에서 폐수 저장소 폭발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사망하는 등 화학 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후화된 대규모 화학단지
우리나라의 화학산업은 12만명이 종사하는 생산규모가 세계 5위인 핵심 기간산업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화학산업은 생산의 효율화를 위해 대규모 산업단지(울산, 여수, 대산)로 집적화되어 있다. 이런 대규모 화학산업 단지는 시설이 낡아 누출과 폭발 등의 사고 위험이 매우 큰데도 산업단지와 인근 주민 거주지가 뒤섞여 있다. 게다가 불과 1~5㎞ 거리에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광역시가 있어 사소한 화학 사고가 대규모 재난으로 이어질 위험 또한 크다. 60, 70년대에 조성된 노후한 국가산업단지는 지진에 대한 대비도 미흡해 대규모 연쇄폭발과 화재로 인한 재앙도 기우라고 할 수만은 없다.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2015년 톈진 시안화 나트륨 폭발사고(
부패와 성장 집착한 톈진 항, 시안화 나트륨과 함께 폭발)나 1984년 인도 보팔사고가 남의 일이 아니다.
» 2015년 12월 25일 중국 톈진 항 물류창고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현장. 신화 연합뉴스
화학산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톈진 폭발사고처럼 화학물질 저장소나 화학물질을 이용하는 연관산업의 폭발 및 누출사고도 잦아 화학산업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특히 규제가 미치지 못하는 영세 하청업체나 임가공업체 같은 소규모 화학물질 사용업체, 취급소, 저장소 등 크고 작은 위험물 취급시설이 농어촌 지역이나 도시를 가리지 않고 전국 11만 4873곳에 분포되어 있다. 화학단지 인근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주변 곳곳에 화학 사고의 위험이 지뢰처럼 깔린 것이다.
화학사고 예방 및 대처를 위한 화관법 개정
산업에서 화학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웃 중국 톈진에서도 화학 사고로 인한 인명사고가 잦아지면서 정부도 화학 사고에 대한 대책을 보완했다. 기존의 ‘유해 화학물질 관리법’을 화학사고를 예방하고 화학 사고에 더욱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2015년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으로 개정한 것이다. 개정된 화관법에서는 ‘장외 영향평가’, ‘위해 관리 계획’, ‘취급시설 안전관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2012.12월 경북 구미시 산동면 봉산리 들녘에서 불산가스 누출사고에 오염된 벼 등 농작물을 본격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구미/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른 ‘장외 영향평가’는 2012년 구미 불산사고 이후 화학 사고로 사업장 외 인근 지역에까지 피해가 번지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도입된 정책이다. 기존의 제도는 사고에 먼저 대응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인근 지역 및 주민의 안전성을 보장하는데 미흡했다. 또한 산업단지와 거주지역 간의 적절한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일상적으로 주민이 유해물질에 노출될 뿐 아니라 사고 시 대형참사로 번질 위험이 상존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시설을 설치하거나 운영하려는 사업자는 주변 지역의 사람이나 환경 등에 미치는 영향을 사업장을 설계·설치할 때부터 반영하도록 장외 영향평가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위해 관리 계획’은 사고 대비 물질을 지정 수량 이상 취급하는 사업장에서 취급물질·시설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평가하고, 화학사고 발생 시 활용 가능한 비상 대응체계를 마련하여 화학사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다. 이를 위해서 사업장은 화학 사고가 발생할 때 화학사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비상 대응체계를 5년마다 수립하여 지역사회에 1년마다 고지하도록 하고 있다.
또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제조·사용, 저장·보관, 차량 운반, 배관 이송하는) 시설은 배치시설과 관리기준이 ‘취급시설 안전관리’ 기준에 적합한지 1년(유해화학물질 영업 허가대상이 아닌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은 2년)마다 정기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 2013년 5월 7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살균제피해자모임,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화학물질안전관리위한 법률인 화학물질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개정안을 누더기로 만든 경제계와 국회를 비판하는 거리행위극을 벌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러나 구미 불산사고 이후 화학사고를 예방하고 조기 진압하겠다는 목표에서 서둘러 개정된 화관법은 법 시행 이전부터 정책적·기술적 우려가 제기되었다. 사고 예방을 위한다는 장외 영향평가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직접적인 법적 불이익은 없고 소규모 사업장은 장외 영향평가서를 자율적으로 제출하도록 하고 있어 꼭 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다. 또 장외 영향평가서나 화학물질 취급시설에 대한 정기·수시검사, 위해 관리계획서를 심사하는 인력이 부족해 심사의 지연이 심각하다. 2015~2016년 장외 영향평가서 검토와 위해 관리계획서 심사의 법적 처리기한(30일)의 준수율은 약 19.3%에 불과해 인력보강이나 기술적 준비 없이 시작된 화관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
주거지역과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지진에 대비해야
화관법이 애초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화학물질 사업장과 인근 주민 거주지와 안전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종합적인 산업단지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정부도 2011년부터 노후화된 산업단지의 재구조화를 위해서 산업단지 개선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산업단지의 구조 고도화 사업이나 산업체에 편의를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더욱 시급한 것은 단순한 화학 사고가 재앙이 되지 않도록 사업장과 사업장, 사업장과 지역주민, 사업장과 도시와의 안전거리와 안전지대를 확보할 수 있도록 산업단지를 재구조화하는 일인데, 정작 산업단지 개선사업에서는 이는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또 최근 들어 지진이 잦아지면서 원전의 내진성능 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60, 70년대에 조성된 화학단지의 내진성능을 보강하는 일은 원전의 내진성능을 보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화학 시설은 작은 사고로도 연쇄반응을 일으켜 커다란 피해를 낳는 일이 허다하다. 하물며 수많은 노후 배관과 저장시설로 이뤄진 화학산업 밀집지역에서 지진으로 인해 연쇄적인 위해물질의 폭발과 화재, 누출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재앙이다.
화학단지와 사고의 복원은 오염자 책임
» 2010년 6월 7일 보팔시 여성들이 보팔 법원 앞에서 인도 법원이 1984년 보팔 참사 책임자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다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성들이 신발로 때리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은 보팔 참사를 일으켰던 회사인 미국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전 회장 워런 앤더슨이다. 신화 연합
1984년 보팔에서 유니언 카바이드사에서 새어 나온 독성 화학가스로 수일 만에 3500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유니언 카바이드사는 사고 발생 5년 만인 1989년에야 보상금 4억7000만 달러를 지불했으며, 2001년 미국의 화학그룹 다우 케미컬에 인수되었다. 책임자는 사라졌지만, 보팔의 비극은 그날의 참사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도 의료연구협회는 사고 발생 10년이 지난 1994년까지 사망자만 무려 2만5000명에 이르고 생존자도 암, 시각장애와 같은 온갖 후유장해를 겪고 있으며 2세까지도 사고에 따른 유전적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보팔은 아직도 사고로 인한 토양, 지하수 오염과 같은 환경오염으로 주민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인도 ‘보팔 참사’ 보상 30년째 ‘제자리 걸음’).
사업장이 이전하거나 철수하고 나서 그 지역의 생태적 복원은 오염자인 사업장의 책임이다. 더구나 화학산업의 경우 철수된 사업장의 오염을 복원하는 일이 그 지역의 부담으로 남지 않도록 예방조처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업장이 사고나 경영의 문제로 파산하고 나면 그 부담은 오염에 시달렸던 지역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장외 환경영향평가에는 공장 철수 후의 환경복원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재정 확보방안까지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
위해 관리계획을 소방청 및 주민과 공유해야
화학사고는 예방이 최선이지만 불행히도 사고를 완전히 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고가 일어나고 수습할 때까지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다른 사고도 마찬가지지만 화학사고는 빠른 대처가 최우선 과제이다. 이를 위해 평상시에 사고를 예상하고 대처하는 계획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을 제도화한 것이 위해 관리계획이다.
사고를 수습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업장, 소방청,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인근 주민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위해 관리계획에서는 정보를 소방청과 지역주민에게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사업상의 기밀이라는 이유로 사고 수습을 담당하는 소방청에조차 취급물질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 소방청뿐 아니라 지역주민에게도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사고 수습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다. 사고의 예상 피해자에게 공개되지 않고 공유하지 못한 사고수습책은 있으나 마나이기 때문이다.
산업단지 복원계획은 산업단지 가동 중에 마련해야
» 지진 등으로 인한 대규모 사고가 일어날 것을 대비해 사전 예방 조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7년 11월 16일 오후 주민들이 대피한 포항 북구 홍해실내체육관에서 주민들이 배식을 받고 있다. 포항/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가동 중에도 크고 작은 누출사고로 지역주민과 지역 환경을 위협한다. 게다가 지역주민은 폭발, 화재, 대규모 누출 등과 같은 사고에 대한 불안도 늘 안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사업장이 폐쇄된다고 해서 환경오염과 건강에 대한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전이나 파산 등으로 사업장이 폐쇄된 후에도 토양오염과 지하수 오염과 같은 환경오염을 남긴다. 사업장을 통해 누군가는 이익을 챙기는 대신 환경오염과 정화부담은 그 지역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이제는 진부하게조차 느껴지는,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 없는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철수하고 난 사업장의 오염을 정화하는데 드는 비용이 지역에 전가되지 않도록 사업장이 들어서서 운영하는 동안 환경복원 비용을 적립하는 방안을 시행해야 한다. 그것이 ‘환경오염유발 행위자가 오염을 방지하고 제거하기 위한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국제 사회가 환경오염의 책임소재에 관한 제1 원칙으로 내세우는 ‘오염자 부담 원칙’이다.
■ 참고 문헌
재난안전 관리 현황과 주요 대책 분석Ⅱ-유해화학물질 안전관리 실태분석, 2017, 국회 예산정책처
이익모 외, 위험물질 사고유형 분석 및 안전관리 체계개선에 관한 연구, 2016, 경기도재난안전본부
이수경/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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