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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한겨레 신년사 “온 강토를 광복의 기운으로”

등록 :2019-01-01 07:14수정 :2019-01-01 10:28

 

 

신년에 부쳐-평화와 독립의 원년
1919년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 도쿄 유학생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19년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문을 발표한 도쿄 유학생들.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기미년(1919) 새해가 밝았다. 하나 신년을 맞이하는 백성들 마음에는 근심만 무량하다.

 

돌아보건대 지난 무오년(1918)은 굶주림과 폭압으로 얼룩진 고통의 시기였다. 쌀 한되에 11전에서 36전, 근 삼년 내리 세곱절이나 폭등한 쌀값에 식민지 조선 민초들은 찰흙에 기장과 조 같은 서속(黍粟) 가루를 섞어 쪄서 먹거나 풀뿌리 나무껍질을 씹으며 겨우 연명하고 있다. 충청·전라·경상 삼남에선 기근 탓에 살아 있는 아이를 땅에 묻는 극악한 일도 벌어진다고 하니 민생이 도탄에 빠졌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구라파(유럽)를 휩쓴 세계대전으로 물가가 앙등한데다 가뭄으로 인하여 작황이 부실한 것이 원인이라고 총독부는 주장하지만, 일본 정부가 자국의 쌀값 안정을 위해 조선쌀을 일본으로 반출한 것이 작금의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아는 바다. 일본인이 흙을 파서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또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국을 감염시킨 독감으로 14만명이나 목숨을 잃은 애석한 사건은 식민통치의 무능함을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독감으로 숨진 일본인이 조선인의 십분지 일도 아니 된다는 점은 무오년 독감이 정치와 무관한 유행성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러고서도 내지(일본 본토)와 조선은 차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일본인이 조선인을 멸시하며 부르는 ‘요보’(여보)라는 말, 조상묘까지도 공동묘지로 옮기라는 반인륜 행정, 조선인에 대한 직장 내 승급과 수당 제외 따위 일상의 차별을 말해 무엇하랴. 오호통재라, 식민지 백성의 설움이다. 나라 잃은 백성에게 신년이 무슨 대수란 말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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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탄에 빠진 민초들의 기근이 
어찌 가뭄 탓이라 하는가
일제의 잔혹한 수탈도
저항정신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구라파를 덮은 포연은 아직도 자욱하다. 세계대전은 1천만명 넘는 목숨을 앗고 나서야 4년 만인 지난해 11월11일 끝이 났다. 이달 불란서(프랑스) 파리에서는 전범국의 식민지 처리를 두고 영국·불란서 등 전승국들이 강화회의를 연다. 여기에서 조선에 대한 처리 문제가 논의될 가능성도 배제키 어렵다. 우리는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고, 서구 열강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해야 할 터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만백성 뜻을 모아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함과 대한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기미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서구 열강이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줄 거라 막연하게 믿고 있을 수만은 없다. 세계 모든 나라는 결국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사실 또한 국제정치의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조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실력이 없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사정에서 의병장 허위(許蔿)의 문하인 박상진(朴尙鎭)을 주축으로 을묘년(1915) 7월 대구에서 비밀결사된 대한광복회의 활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초 전국 조직망이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체포된 대한광복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부호의 의연(기부) 및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 압수로 무장 준비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 양성 △중국·노서아(러시아) 등에 의뢰하여 무기 구입 △무력이 준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 달성의 강령을 내세운 바 있다. 외교가 아닌 무력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말이다.

 

우리는 무오년이 저항의 시절이었다는 것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한다. 일본의 총칼에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이 되는 동안 총독부는 무력으로 우리를 짓밟고 짓눌렀다. 문명국을 자처했지만 조선인에게만 태형이 내려져 숱한 조선인을 반신불구로 만들었으며, 일본도를 찬 헌병들이 길목마다 지켰고 훈도시를 찬 교사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렇듯 폭력과 공포가 가중되는 시대였지만 조선인은 무오년에만 50여회 동맹파업을 일으켰고 지방에선 쌀값 폭등으로 인한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이 우리 강토를 짓밟고 앗아갔지만 우리 조선인의 저항 정신만은 빼앗지 못한 것이다.

 

기미년 새해, 밖으로는 독립 기운이, 안으로는 평화 기세가 더욱 퍼져나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겨레신문>은 조선 백성의 입장에서 독립과 평화의 길에 함께할 것임을 거듭 선언하는 바이다.

 

 

☞‘1919 한겨레’ PDF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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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6501.html?_fr=mt1#csidx8bc407e967c09049e729ee6c2e341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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