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 반올림 대표(오른쪽)와 삼성전자 베트남 타이응우옌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르우티타인떰의 아버지 르우반띠엡이 지난 9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옌딘/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음식 접시를 내려놓으며 “꼭 베트남 방식대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는 말을 반복하던 아버지 앞에 다른 아버지가 앉았다. 그 아버지 역시 외로워도 슬퍼도 드러내 울 수 없던 긴 세월이 있었다. 화를 내면 감정적이라고 했고, 차분히 얘기하면 결국 돈을 받으려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 시간을 건너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웃는 사람이 됐다.
자신을 위해 차려진, 난생처음 보는 음식 접시에 그는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이제 그만 좀 앉으셔요. 밖에 어머니도 앉으라고 하세요. 우리 애 엄마도 딸 떠나고 저렇게 잘 울어요”라며, 또 한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2007년과 2016년을 사는 두 아버지
한 아버지의 이름은 르우반띠엡(53)이다. 2016년 8월 베트남 타이응우옌 삼성전자 공장에서 딸을 잃었다. 다른 아버지의 이름은 황상기(64)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딸은 2007년 3월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황상기의 딸 황유미는 만 18살에 입사해
그해 급성 심근염으로 사망했다. 건강하던 둘은 삼성공장에 다닌 지 각각 12개월, 4개월 만에 죽을병에 걸렸다.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딸의 영정사진을 떰의 아버지 르우반띠엡에게 보여주며 “삼성이 사망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위) 황상기 대표가 떰의 영정 앞에서 묵념하고 있다. 떰의 아버지는 여전히 딸의 영정사진을 치우지 못하고 있다.(아래) 옌딘/박종식 기자
삼성 공장에서 딸을 잃은 두 아버지가 지난 7월9일, 베트남 옌딘 르우반띠엡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둘러앉아 먹는 밥은 그 자체로 슬픔을 이야기로 바꾸고, 가슴속 응어리를 희멀건 액체로 쏟아지게 한다. 무표정이라 슬프고, 웃어서 기쁜 것이 아니다. 두 아버지는 모두 “자다가 벌떡 깨는, 납득되지 않은 죽음”의 이유를 알고 싶어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다. 그런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뒤로 옆으로 흐른다. 두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이 죽은 이유를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들의 삶은 그 해소되지 않는 의문 속에 자괴감과 무기력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여전히 죽음의 시간을 산다.
“이 말부터 통역을 좀 부탁합니다. 우리 가족은 사실 지금까지도…. (한숨) 우리 딸은 완전 건강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수 있을까… (멈춤)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우리 가족도 한국 아버님 가족의 아픔처럼…. 딸이 죽은 후부터 지금까지…. 내 아내, 딸의 엄마는 신경성 병에 걸렸습니다. 딸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거든요. 우리 가족은 딸이 죽고 아무 일을 못 할 정도로 그 아이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두 아버지는 결국 그 얘기부터 시작했다. 도무지 삶이 섞일 이유가 없던 두 아버지가 마주 앉은 그 조심스러운 시간에 한 아버지는 또 다른 아버지에게 아직도 납득할 수 없는 딸의 죽음을 하소연했다. 들어주는 이도 딸을 잃은 사람이다. 다만, 자식을 잃은 시간의 격동과 감정을 세월에 풍화시켜왔을 뿐이다. 다른 아버지가 대뜸 딸들의 시간을 삼성 이전으로 당겨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은 공부를 중간 정도 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전문대라도 가라고 하니까, 자기는 삼성에 취업해서 돈을 벌겠다고 대학교 안 가고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업했어요. 나는 그게 아직도 후회돼서 죽겠어요. 그때 내가 우겨서 대학을 보냈어야 했는데…. 떰은 어땠나요?”
아버지들의 대화는 시작부터 시점이 어긋났다. 그렇게 일쑤로 둘은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반듯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엇박자를 그리며 궤적에서 이탈하는 대화들이 통역 때문인가 싶었는데, 한참을 듣고 나서야 둘이 아직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상기의 지난 9년은 멀쩡하게 삼성에 다니던 딸이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인지, 그 비밀을 알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도모해온 과정으로 점철된 투쟁의 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슬픔은 일부 승리로 치환됐고, 손잡고 울어 줄 동지들을 만났다. 딸을 잃고 온통 뻑뻑하던 그의 삶은 오랜 싸움 끝에 조금은 윤기를 되찾고 있다.
반면, 르우반띠엡은 여전히 딸을 잃은 그 시간을 그대로 살고 있었다. 자신을 ‘시골 사람’이라 칭하는 그는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 시간을 견디고 있다. 밭매고 돼지 먹이고 아직 어린 아들(11살, 떰의 막내아우)을 돌보고, 이따금 체한 것 같은 답답함이 치밀면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렇게 여전히 딸을 잃은 시간을 사는 아버지는 다른 말로 받았다.
“삼성에 들어가기 전에 건강검진을 다 하고 꼼꼼하게 점검했잖아요. 그런데 왜 내 딸은 근무시간에 그렇게 갑자기 죽은 걸까요? 도대체 어떤 원인으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시골 사람들이라…. 한국에선 그걸 알 수 있나요. 한국의 경우는 소송이 되는데 베트남에선 평범한 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우니까….”
떰의 죽음을 가족 중에 가장 먼저 확인한 오빠가 말을 이었다.
“삼성은 그냥 심장병 때문에 떰이 죽었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 하나 있는데요. 신문에 기사를 내서 제 동생 사망의 원인이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통해 저희 가족에게, 죽은 우리 동생 떰의 죽음에 정의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 저희 간절한 희망입니다.”
떰의 가족들은 한국 언론의 보도로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옌딘/박종식 기자
익숙한 삼성의 대응, 어려운 진실 입증
모든 죽음은 항상 개별적이다. 르우티타인떰과 황유미의 죽음 역시 완전히 포개지지 않는다. 9년여의 시차를 두고 있는 두 죽음을 설명하는 언어에는 규명된 ‘사실’과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의견’이 섞여 있다. 오랜 투쟁 끝에 황유미의 죽음에 대해선 좀 더 많은 ‘사실’이 발굴됐다. 하지만 떰의 죽음은 황유미의 죽음이 처음에 그랬듯 아직 대부분 감춰져 있다.
시차를 두고 벌어진 죽음들은 삼성이 그 시간 동안 한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죽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 있다. 황유미와 떰은 모두 ‘클린룸’에서 일하다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했다. 클린룸은 먼지를 통제하기 위해 공조시스템으로 정화된 공기를 계속 주입하는 공정에 설치된다. ‘먼지 없는 방’으로 불리는데, 제품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환기 효율까지 낮춰 발암물질인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더 오래 머문다. 제품에는 완벽한 조건이지만, 노동자에겐 위협적인 환경이다.
두 클린룸 노동자의 죽음은 삼성 공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의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 황상기는 지난 10년 동안 삼성 공장이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는 화학물질의 황천길이라 외쳐왔다. ‘또 하나의 죽음’이라고 불린 황유미의 죽음은 그렇게 ‘사건’이 되었다.
유미처럼 떰도 클린룸에서 일했다는데…
황유미 실제 업무, 삼성이 거짓 기재
황상기씨 끈질긴 투쟁으로 겨우 뒤집어
삼성은 황유미 사망 이후 가족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을 때, 담당 업무를 은폐했다. 황유미가 유해 화학물질을 취급한 건 전체 근무 기간 중 3개월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박스에 스티커를 붙이는 단순 작업을 했다고 서류를 위조했다. 황상기는 딸이 입사 이후 계속 화학물질을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책상을 ‘탁’ 치며 “삼성 같은 큰 회사가, 사람이 몇 사람 죽었다고 사유를 이렇게 가짜로 올릴 것 같아요”라고 호통을 쳤다. 황상기는 삼성의 그 가짜 서류와 2년여의 법적 공방을 벌였고, 결국 다른 동료들의 진술이 나와 뒤집을 수 있었다. 삼성이 떰의 죽음을 설명하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삼성은 떰이 ‘클린룸에서 일하긴 했지만, 의류 운반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둘은 또한 교대 근무를 하며 기숙사에서 생활했단 점도 같다. 삼성 공장의 교대 근무는 최장 12시간에 이르는 긴 노동이 불규칙한 단위로 맞교환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그 자체로 노동자 건강권을 위협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 기숙사는 엄격한 규율 속에 서로 다른 근무 시간대 노동자들이 한방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성 공장에서 산재를 얻은 노동자들은 기숙사에 대해 “과다한 노동을 한 이후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보장받지 못한 채 다시 일을 기다리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딸을 잃고 황상기가 싸워온 시간 동안에도 무섭도록 많은 사람이 삼성 공장에서 일하길 원했다. 떰은 그중 하나였다. 황유미 이후 ‘반올림’에 산재 신청을 대행해달라고 요청한 사례는 삼성전자에서만 465명, 삼성 전체에선 559명이었다. 이에 대해 삼성은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직업병 피해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한 뒤,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원보상위원회를 꾸려 보상 신청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삼성의 대응은 여전히 한결같다. 그것들을 철저히 개별적인 것들로 만드는 것이다. 앓다가 죽어간 삼성 공장 노동자들의 문제는 낱개로 쪼개져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알려질 수 없었다. 삼성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주로 천문학적인 매출과 이익에, 그리고 누구에게로 언제 승계될지로 쏠렸다. 그사이 삼성은 더 많은 매출과 이익을 좇아, 더 많은 사람이 밀려올 나라들로 공장을 옮겼다.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좇아 지구를 유영하는 문제는 더는 뉴스가 아니었다. 그 큰 흐름에 밀려나거나 때때로 휩쓸려가는 사람들의 문제가 알려지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됐다.
황상기가 황유미의 일기를 꺼냈다.
“이건 우리 딸의 일기입니다. 반도체 공장에 다니면서 기숙사에 있었는데, 기숙사에 있으면서 공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록했어요. 유미가 이렇게 다 기록을 해놨는데 삼성은 유미가 기록한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거짓말을 했어요. 화학약품을 안 썼다고, 개인적인 질병이다, 석 달만 일했다고. 삼성에 한 스무살부터 다니다가 서른살 미만에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아요. 다 삼성이 거짓말을 했어요.”
죽음을 상상하기 힘든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유가족들이 마주한 현실의 양상도 비슷하다. 황유미 유가족들은 발병 직후부터 “개인적인 질환”이라며 끊임없는 회유와 합의를 종용받았다. 떰 가족 역시 사망을 확인한 직후 바로 “공장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통보받고 장례를 치르면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말부터 들었다. 공장과의 연관성을 줄이기 위해 삼성이 취한 방식도 마찬가지다. 황유미 유가족들이 산재 신청을 하자 삼성은 황유미의 업무가 ‘유해물질 취급은 전체 근무 기간 중 3개월뿐이었고, 이후 단순 스티커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떰 역시 ‘클린룸에서 일하긴 했지만 의류 수거 및 배달 일을 했다’는 것이 삼성의 설명이다.
떰의 죽음이 ‘개인적인 일로, 운이 없었을 뿐’이라던 삼성은 황유미 가족에게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업무 연관성은 부인하면서도 ‘보상’은 했다. 우리 돈으로 500만원에 해당하는 1억동을 떰 가족에게 두번 전달했다. 황유미의 경우 개인적인 질환이라고 규정했음에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으면 병원비를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었다. 떰 역시 공장과의 업무 연관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성격을 알 수 없는 돈을 보상금 형태로 지급했다. 베트남 노동법은 노동자 사망의 경우 업무 연관성이 인정되면 3년 치 월급, 그렇지 않으면 1년 치 월급을 지급하게 되어 있는데 삼성은 이 중간에 해당하는 금액을 두번에 나눠 떰 가족에게 지급했다.
지난 9일 떰의 어머니 르우티마이(50)가 손자를 안은 채 눈물을 보이고 있다. 옌딘/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그 죽음들은 ‘배상’되지 않았다
“아직도 일어날 때, 밥을 먹을 때마다 딸 생각이 나요. 어떤 날은 자다가 깨서 많은 생각을 해요. 아직도 딸의 얼굴이 다 기억나요.”
떰의 아버지가 말을 머금으며 담배를 피우러 일어났다. 떰의 오빠가 나머지 말을 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가족들이 정신적으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모두 우울증을 겪고 있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동생이 죽고 정신적으로 충격이 커서 몸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집에만 있어야 할 정도입니다. 어린 동생도 있고, 더 어린 제 아들도 있고 너무 어렵고 곤란한 상태입니다. 또한 저희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희는 여러분께 부탁드릴 수만 있습니다.”
전자공장의 위험성, 화학물질 사용 여부는 국내에서도 거의 정보공개가 이뤄지지 않는다. 기본적인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산재 입증이 어렵다. 삼성과 같은 대기업으로선 업무 관련 질병이나 죽음에 대한 통제가 그만큼 수월하다. 삼성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시민사회의 견제가 뚜렷한 국내에서도 근로복지공단은 ‘삼성복지공단’이라 불릴 정도였다. 정부는 물론 노동조합까지 삼성에 포섭되어 있는 베트남은 어떨까. 떰의 죽음에 대해 삼성은 그가 어떤 화학물질을 취급했고, 어떤 방식으로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현지 관련 법률 및 규정에 따라 전 임직원 및 화학물질 취급자에 대한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으며, MSDS(물질안전보건자료)와 같은 화학물질에 대한 안내서도 빠짐없이 현장에 부착해 놓고 있다”고만 밝혔다.
삼성은 좋은 제품을 만들고, 국위를 선양하고, 외국에 수출도 많이 한다.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넘어 때때로 한국 경제 그 자체로 표상된다. 한국 사회가 ‘삼성화’되었단 말이 떠돈 지 벌써 10여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사이 삼성은 글로벌 일류 기업이 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여전히 정상적인 노동의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상상하기 어려운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여전히 삼성이 잘돼야 나라도 잘된다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노동자의 희생은 눈감아도 좋은 것일까.
황상기씨는 단호히 말했다.
“떰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삼성에 그 원인이 있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죽음입니다. 삼성이 떰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떰의 가족이 못 나선다면 한국에서라도 나서야 합니다. 반올림이 돕겠습니다.” 황유미의 죽음 이후 결성된 반올림은 삼성 공장 직업병 문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2년째 싸우고 있다.
두 아버지는 떰의 묘지로 이동했다. 체감기온이 영상 40도를 웃돌던 날, 황상기씨는 오래 묘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울산바위에 뿌려진 딸을 생각했을까. 떰 집으로 오는 내내 한 송이 국화가 아니라 풍성한 꽃을 사고 싶다던 그였다. 향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 “떰씨, 공장에서 일할 적에 힘들었던 것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어요…. 저세상에서는 너무 힘들지 않게….” 내내 웃던 그가 처음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 반올림 대표가 르우티타인떰의 오빠 르우반띠엔(26)과 함께 지난 9일 베트남 옌딘에 있는 떰의 무덤에 헌화하고 있다. 옌딘/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떰의 아버지는 떠나는 황상기의 손을 꼭 붙잡고 인사했다.
“다시 한번 감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 계신 아버님의 따님이 우리 딸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먼 곳으로부터 우리 가족까지 방문하시고 안부를 물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가 경제적 조건 때문에 한국에 갈 수는 없어서 아버님의 가족께 직접 안부 말씀을 못 드리고 따님이 자랐던 고향도 못 봅니다. 저희 부족한 것은 많았어도 여러분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면 과거는 바뀔 수 있다던 드라마가 있었다. 딸을 잃은 두 아버지의 드라마는 어떻게 이어질까. 과거의 간절함과 현재의 간절함은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또 하나의 죽음’과 ‘또 한 번의 죽음’ 사이, 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삼성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옌딘/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03755.html?_fr=mt1#csidx8c42611788ba497acfc8c048b9dd6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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