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영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과 조용수가 이영근에게 어떤 자금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박정희 정권이 이미 짜놓은 재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1990년 5월 14일 이영근이 사망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지 통일일보를 창간, 대 조총련투쟁과 재일교포의 법적지위향상에 기여했다'는 공적으로 이영근에게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한다.
그럼에도 1961년 7월 12일 박정희가 설치한 이른바 혁명검찰부는 1961년 7월 23일 조용수 등 민족일보 관련자들을 혁명재판소에 기소한다. 그리고 혁명재판소 심판부(1심)는 1961년 8월 28일 조용수에게 소급입법으로 제정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적용해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로서 민족일보 사설 등을 게재하여 북한의 활동을 고무·동조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한다(당시 1심 재판부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배석했다). 그러자 당시 국제언론인협회, 세계신문인협회 등 언론인들은 조용수 구명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조용수 구명운동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이어서 1961년 10월 31일 박정희 정권의 상소심판부(2심)는 "사회단체 간부를 적용한 것은 잘못이나 정당의 주요간부"였으므로 위 특별법 위반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조용수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한다.
언론사 사장을 사형시킨 박정희
형이 집행되기 전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전문이 발표되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조용수 사장에 대한 구명운동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다수 국내언론은 침묵한 가운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12월 20일 조용수에 대한 사형문서에 결재한다. 그리고 결국 3심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 다음날인 1961년 12월 21일, 추운 겨울날 조용수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당한다. 이때가 그의 나이 고작 31세. 사형 당하기 전 조용수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민족을 위해 할 일을 못하고 가는 것이 억울하고, 신문을 만들기 위해 동지에게 꾼 돈을 갚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 민족일보 창간호 | |
ⓒ 오마이뉴스 |
1961년 5월 18일 당시 조용수 등에게 소급 적용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이 1961년 6월 22일 제정되기 이전인 상황에서 체포·구금되었다. 또한 당시 형사소송법상 구속기간이 수사기관 10일, 검찰 10일이며, 검찰은 10일을 초과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법원 허가를 받아 연장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용수 등은 1961년 5월 18일 체포·구금된 때로부터 66일간 구금되었다가 1961년 7월 23일 기소되었다. 결국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재판 과정에서도 역시 불법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저지른 것이다.
1961년 당시 육군중령으로 박정희가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을 지낸 이석제는 회고록에서, 1961년 5․16 직후 자신이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상황을 점검하던 중 미국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이석재는 '미국의 사상공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기 위해서 비상한 조치가 필요' 하다고 판단해 '혁명군이 강력한 반공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만큼 미국 측에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보여줘야만 혁명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보도연맹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게 보여주고자 결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전국 각지의 군경, 헌병대에 비상을 걸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으며, '나중에는 보도연맹 관련자들뿐만 아니라 소위 혁신정당 관련자, 좌파이데올로기에 물든 지식인, 사회단체지도자, 노조지도자 등 4000여 명에 이르는 사회 불만세력과 좌익 활동 경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체포, 수감'했다고 적고 있다.
조용수 사건은 먼저 민족일보 관련자들을 체포해 구금한 후 그들에게 적용될 소급입법을 만들어 기소와 재판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과정을 밟았다. 조용수에 대해서는 사장의 지위에서 게재한 민족일보 사설 등을 '정당의 주요간부 지위에서 게재한 것이며 그 내용이 북한을 고무·동조했다'고 왜곡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의 확인을 거치는 과정에서 감형 없이 조용수에게 사형을 집행했던 것이다.
10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2006년 11월 28일 진실위는 조용수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에 대해 이렇게 발표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북한을 고무·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박정희 정권) 혁명재판부의 판단이 잘못됐고...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조용수 사장의) 가족 3명을 간첩혐의로 불법감금하고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인정된다.
...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은 당시 대외적으로 5.16 주도세력이 철저한 반공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쿠데타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던 상황에서 불법으로 제정된 소급입법에 의해 당시 혁신계의 주장을 강하게 대변하고 있던 대표적인 신문 민족일보의 사장 조용수를 희생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민족일보 논지만으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생명권을 박탈한 것은 문명국가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에 해당한다."
진실위의 진실규명으로부터 2년이 흐른 2008년 1월 16일 열린 재심에서 지난 1961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박정희에 의해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결국 사후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 죽인 후 반세기 후에 죄가 없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박정희의 죄는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40주기 추도식에서 헌화를 위해 국화를 받고 있다. | |
ⓒ 연합뉴스 |
그럼에도 지난 10월 26일 박정희 40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이렇게 박정희를 평가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독보적인 성취와 성공의 기적을 일구어낸 분이다. (우리는) 박정희 정신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야당 대표 황교안씨가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차분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만약 황교안씨가 그토록 존경하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그가 야당 대표로 살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어두운 국정원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이미 사형선고를 받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황교안씨가 최근 "민주주의가 종언을 고했다", "좌파가 언론을 장악했다" 또는 "문재인 정부는 역대 가장 비(非)민주적인 정권"이라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다.
또, 한국당은 지난 20일 "좌편향으로 심각히 기울어진 미디어 환경을 바로 세우고자 한다"며 "불공정 보도에 대한 삼진아웃제를 도입해 불이익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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