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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바이러스가 부른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세계화’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⑪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발행 2020-05-19 17:03:52
수정 2020-05-19 17:4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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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코비드-19는 코로나바이러스의 7번째 변형이라고 한다. 사스나 메르스도 코로나바이러스다. 경험과 전례를 무색하게 할 만큼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데, 이 악마적이기까지 한 바이러스가 가져올 미증유의 미래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단서와 징조는 많았고, 추세는 분명했다. 세기 말과 세기 초를 풍미했던 세계화는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전성기였다. 실상은 미국패권 질서이며, 자화자찬이 더해진 과대평가의 측면이 있지만,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 자유무역, 팍스아메리카나에 대한 국제적 합의와 수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질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흔들렸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꾸준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극우적 스트롱맨들이 대거 등장하며 실질적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인류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던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무역은 악화일로의 빈부격차를 초래했다. 그리고 미국의 고립주의와 미·중갈등은 팍스아메리카나가 무색하도록 국제정치의 안정성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코로나팬데믹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이런 추세를 폭발적으로 가속화 하는 변수로 봐야 한다. 세계화가 구축해온 초연결사회는 바이러스를 ‘물 만난 물고기’로 만들었다. 연결되던 사람들과 국가들은 이제 살기 위해 단절하고 봉쇄한다.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며, 잘못되면 파국이 올 수 있다. 정확히 1세기 전에 있었던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세계가 무너졌던 전례가 있다. 당시 영국의 쇠락과 미국의 고립주의는 리더십 부재를 낳았고, 국제협력은 사라졌으며,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과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활로 이어져 대공황과 비극적 전쟁을 치렀다.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하트 아일랜드에서 지난달 9일(현지 시간) 방호복을 입은 인부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숨진 사망자의 이름이 쓰인 관들을 매장하고 있다.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하트 아일랜드에서 지난달 9일(현지 시간) 방호복을 입은 인부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숨진 사망자의 이름이 쓰인 관들을 매장하고 있다.ⓒ뉴시스/AP

세계는 지금 글로벌공급의 가치사슬이 위기에 직면하고,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남은 죽이고 혼자만 살려는 사조가 확산하려 한다. 살기 위해 세계화에 의해 쫓겨났던 국가를 소환했다. 방역의 명분으로 전시를 방불한 비상권을 발동하여 시민의 삶을 통제한다. 국민 안전을 위해 공공성을 갖춘 착한 국가도 있지만, 과거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시장을 방해했던 나쁜 국가도 섞여 있다. 2016년 옥스퍼드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그해의 단어로 선정했었다. 객관적 진실보다 감정이나 선동이 지배하고, 페이크가 팩트를 압도하는 세상을 가리킨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브렉시트가 결정된 해에 이 단어가 선정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뉴욕타임스 역시 2016년 대선이 미국 역사상 감성적인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 했다. 절망과 분노를 일으키는 부정적 감성을 선동했던 트럼프가 긍정적 감성에 호소한 클린턴에게 승리했던 결과가 가리키는 지점도 예사롭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샴의 법칙은 팬데믹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을 가중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코로나 이전부터 흔들렸다
각자도생 사조의 확산, 절망과 분노 촉발하는 선동 횡행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긍정적 대안들도 조금씩 부상하고 있다. 미·중간 탈진실의 블레임 게임 속에서 프랑스, 독일, 캐나다, 한국 등 중견국들이 한목소리로 국제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효율보다 삶의 질이, 돈보다 생명이 중요한 사회에 대한 끌림이 커진다. 민주주의 부활, 자본의 무한확대를 당연시하던 자본주의의 수정, 그리고 국제협력의 재생으로 소위 ‘인간의 얼굴을 가진 세계화’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방역에 성공한 한국의 모델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국가가 무력해진 서구와 시민사회가 약한 권위주의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민주주의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가진 공적 국가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강한 국가와 강한 시민사회를 모두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로 점철된 강하지만 나쁜 국가의 역사를 가졌으나, 광주 의거에서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촛불로 이어지면서 강해진 시민사회가 공공성을 지닌 착한 국가를 불러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보건총회(WHA) 초청 연설을 하고 있다. 2020.05.18.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보건총회(WHA) 초청 연설을 하고 있다. 2020.05.18.ⓒ뉴시스

시쳇말로 ‘국뽕’에 취하지 말고, 사람이 죽어가는 비극적 상황에 대한 품격을 지키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천박한 자본주의가 가차 없이 내쳤던 생명, 생태, 환경의 가치를 수호해야 우리도 살고 세계도 사는 길이다. 미·중 패권갈등의 질서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제3지대를 구축할 수 있다. 각자도생의 단절과 고립 속에 우리는 도리어 가치와 협력의 공간을 지향하고, 각자도생하고 싶어도 방법과 능력이 없는 사각지대의 국가들을 도울 사명과 기회를 얻었다. 서구사회가 한국을 칭찬하는 것은 진심도 있지만, 중국 때리기의 오리엔탈리즘을 위해 한국을 내세우는 측면과 한국까지 포함한 아시아 전체의 집단주의와 인권경시를 비난하는 ‘더블 오리엔탈리즘’일 수 있다.

칼 폴라니는 『대전환(1944)』에서 고삐 풀린 시장이 인간과 환경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고통받던 인간과 자연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반시장 운동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가 예언한 것은 시장 만능의 세계가 몰락해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것이었지만, 이번 기회에 무자비한 자본확대를 추구하는 시장을 견제할 공적 국가의 등장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언택트의 세상이 확산하고, 혼돈과 불안이 일상이 되는 속에서 자본주의의 무한 욕망을 잠재우고 진정한 삶의 질을 추구하게 만드는 특효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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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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