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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처벌을 피하려 출산하지도, 처벌을 안받으니 임신하지도 않는다

[낙태죄, 후퇴가 아닌 진전을 ②] '낙태죄' 완전한 폐지가 국제적 권고가 된 이유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1953년 형법 제정 후 66년, 그리고 2012년 헌재의 낙태죄 합헌 판결 후 7년 만의 일이었다.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로부터 해방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올해 말까지 대체 입법이 마련돼야 하지만 21대 국회에서는 아직 관련 법안이 한 건도 발의되지 않은 상태다. 최근에야 정부가 관계부처와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부가 준비하는 안은 임신 14주 이내에는 허용하고 14주에서 22주 사이에는 사회 경제적 이유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안이다. 22주가 넘어가면 현행 처벌 조항이 그대로 적용된다. 즉, 낙태죄를 폐지하지 않고 처벌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셈이다.

 

이는 지난 8월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임신중지 비범죄화' 권고는 물론, 재생산권을 보장하라는 여성계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안이다. 여성계는 줄곧 "임신 주수에 따른 제한은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해 실효성이 없"으며 "처벌은 임신중지를 음성화할 뿐, 비범죄화 하더라도 임신중지 비율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석 달 남짓 남은 낙태죄의 시효를 두고 <프레시안>은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돼야 하는 이유와 재생산권 보장의 필요성에 대해 네 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우리는 충분하고 숙련된 지역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했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임신중지가 개별 의사의 개인적 재량에 달려 있지 않은 의료 서비스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건강보험조합이 다른 표준화 된 의료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임신중지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형법 218조(218 StGB)를 폐지해야만 가능합니다. 즉, 형법에서 낙태를 삭제하여 합법화해야 합니다."


 

위의 내용은 독일 형법 218조의 폐지를 요구하며 얼마 전 국제 서명운동 사이트인 Change.org에 올라온 글의 일부이다. 독일에서도 '낙태죄' 폐지 요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나치 시대 때 만들어진 '낙태죄' 조항이 여전히 형법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독일 형법 218조는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 벌금 또는 최대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의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 임신 12주 이내에 상담을 받고 3일의 숙려 기간을 거친 경우가 아니면 모두 불법에 해당한다.
 

 

작년 3월까지 219조a 조항에 따라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의사와 병원이, 자신의 병원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이 조항은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임신중지 시술을 한다'는 사실 외에는 임신중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알릴 수가 없다. 이런 현실 때문에 독일의 의료인들은 여전히 의과대학에서 임신중지에 관한 교육 시간은 90분 정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상담과 숙려기간', '주수에 따른 허용'?..."시기만 늦출 뿐"


 

또한 임신중지의 의무조항인 '상담과 숙려기간'은 실질적으로 이른 시기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12주까지는 허용', '상담과 숙려기간의 제공'과 같은 수사로 마치 이것이 여성들을 위한 제도인 양 알려졌지만, 실상은 형법상의 처벌 조항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임신 주수에 따른 제한이나 의무 상담, 강제 숙려기간 제도는 역설적으로 여성이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제때 적절한 처치를 받는 것을 가로막아 여성들의 건강과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과 비슷한 방식으로 법을 개정한 국가들에 나타나고 있다. 아일랜드의 경우 지난 2018년 비슷한 방식으로 법을 개정했다. 그러자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되레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발생했다.

 

가령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3일 전에 상담을 받았던 의사가 3일 후 재방문 했을 때 부재한 상태라면 다시 상담을 받고 3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사이 임신 12주를 넘기기도 했다.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합법이던 임신중지가 불법이 되어버리는 상황도 발생했다.


 

숙려기간은 임신중지 선택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처벌과 허용'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낙태죄는 실효성이 없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출산을 결심하는 여성도, 처벌받지 않기 때문에 임신을 하는 여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아일랜드의 여성들이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로 임신중지를 하러 가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연합뉴스
 

실패한 규제 조치를 도입하겠다는 문재인 정부


 

지금 정부가 내놓은 '낙태죄'의 개정 입법안은 이처럼 많은 문제들을 드러내며 보건의료 정책상으로도, 성과 재생산 권리의 보장 측면에서도 완전히 실패한 해외 법제의 종합판이다.


 

상담과 숙려기간의 의무화에 의료인의 거부권까지 더해지면 여성들은 상담을 하기 위한 기관을 찾아야 하고 다시 돌아와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 한다. 해당 병원이나 의사가 거부하면 또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서울 외 지역에는 그나마 찾아갈 수 있는 산부인과조차 매우 적다.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다른 자녀를 키우고 있거나 폭력이나 학대 상황에 있다면, 이 과정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 될 것이다. 성폭력이든 다른 사회·경제적 사유든 여성들은 그에 필요한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자신의 상황을 입증해야 하는 조건에 놓인다.


 

또한 독일의 현 상황처럼 보건의료인들도 최신의 의료 정보와 기술에서 뒤쳐지게 되고 다시 그만큼 여성들은 더 나은 의료 환경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미 30~40년 전부터 임신중지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여러 국가에서 이런 폐해가 확인되었기에 이제 세계보건기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은 안전한 임신중지에 영향을 미치는 법·정책적 규제 조치와 처벌 조항을 삭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 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이런 권고에도 완전히 역행하는 조치인 것이다.


 

처벌이 아닌 권리의 첫 페이지를 쓸 때다


 

독일 형법 218조의 '낙태죄'는 "나치 시대의 형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 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낙태죄'는 나치 시대의 법, 식민지 시대의 법, 독재 시대의 법으로 남아있다. 주수나 특정 사유를 통한 허용 방식도 마찬가지다. 삶의 조건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의무를 여성과 의사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더욱이 '임신중지가 가능한 사유'는 우생학적 기준으로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생명'을 선별해 강제 낙태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임신중지의 시간들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폭력, 차별과 낙인을 방치하고 여성의 몸을 인구정책의 도구로 삼아온 국가폭력의 역사이다. 2020년의 우리는 이런 무책임하고 차별적인 역사로부터 단절해야 한다. 처벌이 아니라 공공의료 체계를 통한 안전한 임신중지,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는 법과 정책이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로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할 때이다. 형법 '낙태죄'의 온전한 폐지로 그 시작을 열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0603003214502#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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