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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유지·예외적 허용’ 정부 개정안에 시민사회 “처벌도 허락도 필요 없다”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0/08 09:11
  • 수정일
    2020/10/08 09:1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10-07 19:23:32
수정 2020-10-07 19: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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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7일 낙태죄를 유지한 채 임신 주 수 등에 따라 예외적 허용한다는 취지의 형법 등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자, 여성계와 법조계는 “정부가 사실상 낙태죄를 부활시켰다”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라”라고 촉구했다.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임신 중단에 허락은 필요 없다,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9.24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 페미니즘' 회원들이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임신 중단에 허락은 필요 없다,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9.24ⓒ김철수 기자  
 
법무부·보건복지부가 이날 입법 예고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기존 낙태죄 처벌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임신 주 수에 따라 예외적 허용 조건을 신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여성 요청이 있으면 임신중지를 허용한다. 이후 24주까지는 ▲성범죄에 의한 임신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친족간 임신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여성의 건강을 심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만 일부 허용한다. 이때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여성은 상담을 받고 24시간 숙려기간을 거쳐야 한다.

임신 주 수 따라 처벌?
“과학적·법적 근거도 없다”

낙태한 여성에 대한 처벌 조항을 남겨두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지적이다. 여성계·의료계·노동계 등이 모인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은 이날 성명을 통해 “처벌이 전제됨으로써 여성의 건강권과 평등권, 자기결정권은 온전한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받지 못하는 요건이 구성됐다”라며 “여성의 권리는 국가의 허락에 의한 ‘조건부’의 권리가 된다. 처벌을 끝내 유지하며 권리 자격을 심사하겠다는 태도에 강한 분노를 표한다”라고 질타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역시 이날 성명서를 통해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대립하지 않는다고 본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언급하며 “이는 임신·출산으로 인한 모든 불이익은 여성이 감당하게 하고, 낙태한 여성을 형사처벌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생명을 보호한다고 자위했던 위선의 시대를 끝내라는 언명”이라고 말했다.

임신 주 수에 따라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조항은 과학적,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임신 주 수는 ‘추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낙폐는 “임신 주 수에 대한 판단은 마지막 월경일을 기준으로 하는지, 착상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임신당사자의 진술과 초음파상의 크기 등을 참고해 ‘유추’되는 것일 뿐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없다”라며 “주 수에 따른 제한 요건을 둔 것은 단지 처벌 조항을 유지하기 위한 억지 기준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민변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위배된다. 형사 처벌의 기준으로 삼으려면 임신 주 수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는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초음파 검사를 해도 태아 크기 등에 비춰 임신 주 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임부가 과연 임신 23주 5일째인지 24주 1일째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라고 짚었다.

여성의 현실과도 괴리된 지점이 있다. 보통 임신 시작일은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준으로 하는데, 생리 주기가 규칙적이지 않거나 임신증상이 특별히 없는 사람이라면 임신 14주 차까지 임신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낙태죄 위헌을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11일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인공임신중절 이른바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오자 기뻐하고 있다.
낙태죄 위헌을 주장하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11일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인공임신중절 이른바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오자 기뻐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임신 14주 차~24주 차에 사회·경제적 사유로 임신중지를 원할 경우 상담과 숙려기간을 의무로 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여성의 임신중지 시기를 늦출 뿐”이라고 지적했다.

민변은 “여성은 이미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대한 숙고를 거쳐 임신중지를 결정하며, 이 조건들은 대부분 단기간에 바뀌기 어렵다”라고 했다. 모낙폐는 “프랑스에서도 2015년 숙려기간 규정을 폐지했고,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의무 숙려기간 없이 상담은 당사자가 원하는 경우에만 받도록 한다”라며 “이에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위원회 등에서도 거듭 폐지를 권고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임신 24주 차 이후 임신중지를 무조건 처벌하는 데 대해서 민변은 “헌법상 기본권 제한 원칙인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된다. 강간 피해자가 장애, 나이 등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24주 이후 임신중지를 하면 처벌받는다. 수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24주를 넘긴 여성도 마찬가지”라며 “여성은 임신을 지속해 건강을 해치거나 임신중지를 하고 처벌받아야 한다. 여성을 기본권 주체로 보지 않는 태도가 극명하다”라고 비판했다.

임신 주 수를 고려하는 데서 중요한 방향은 ‘언제부터,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가 아니라 ‘안전한 임신중지르 위해 어떤 시기에, 무엇을 보장할 것이냐’가 돼야 한다고 모낙폐는 강조했다. 지난해 2월 보건사회연구원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지 경험 여성 중 95.3%가 12주 이내에 수술을 받았다. 주 수 제한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지적과 함께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도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의 삶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낙태죄 폐지 위해 모인 참가자들이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여성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낙태죄 폐지 위해 모인 참가자들이 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 집회를 열고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모자보건법 개정안에 임신중지 시술에 대한 의사의 진료 거부권을 명시한 점, 미성년자의 경우 동의 요건을 규정한 점도 여성의 건강권을 해치는 조항으로 지목됐다. 개정안에는 의사가 시술을 거부할 경우 관련 상담기관에 안내토록 할 뿐, 의료기관 연계 의무는 규정하지 않았다.

모낙폐는 “현재 산부인과의 지역별 격차도 매우 큰 상태에서 여성들은 상담기관과 의료기관을 찾아 전전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건강권을 크게 침해할 수밖에 없다”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아르헨티나에서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11세 소녀가 임신 초기 임신중지를 요청했으나, 동의 요건 제한과 의사의 거부로 인해 시술이 지연됐고, 3주에 이르러 태아가 생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제왕절개수술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낙태죄 폐지하면 ‘낙태 남용’한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들이 낙태를 ‘남용’한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국민의힘 강기윤 의원은 지난 6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라는 불분명한 기준이 들어있다. 너무 포괄적이고 낙태를 남용할 소지가 굉장히 농후해진다”라고 말했다.

이에 여성 누리꾼들은 “자신의 몸을 해치는 낙태 수술을 어떻게 남용할 수 있냐”라며 “낙태를 남용한 건 과거 국가가 정책적으로 낙태를 권장하고 여아 낙태가 성행하던 시기 가능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서지현 검사는 7일 페이스북을 통해 “간통죄 폐지가 간통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듯, 낙태죄 폐지가 낙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낙태죄’가 두려워 낙태하지 않는 여성은 없다. ‘불법화된 낙태’로 고통받는 여성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안과 달리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개정안을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이날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모낙폐는 “새로운 낙인과 허용의 기준이 아닌 임신중지를 필수의료행위로서 공공의료 영역에서 보장하는 법과 정책이 필요하다”라며 “위기 임신에 대한 예방 사업이 아닌 임신중지와 유지, 출산과 양육 전반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지원 사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라. 더는 여성을 기만하지 말라. 우리는 처벌도 허락도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지난 5일 시작된 국회 국민동의청원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은 3일 만에 3만여 명의 동의를 얻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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