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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끌려간 12만명이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손호철의 발자국] 9. 경북 영천 : 사상 최악의 부정부패가 야기한 '국민방위군 사건'을 기억하자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의 공통점은? 다들 알겠지만, 감옥에 간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인 죄명은 다르지만, 이들은 죄에는 부정부패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감옥을 갈 정도로 '부정부패의 나라'다.

 

어디 그뿐일까? '민주화 운동 대통령'인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아들이 부정부패로 감옥에 가야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명이 아닌, 여러 아들들이 줄줄이 감옥을 가거나 비리에 연루됐다. 이처럼 대통령 본인부터 그 자식들, 나아가 전두환 때의 장영자, 박근혜의 최측근 최순실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부정부패 사건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죄질이 나쁘고 악랄한 초대형 부정부패 사건은 무엇일까? 희대의 부정부패로 인해 무려 12만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어느 부정부패 사건도 이처럼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았다. 목숨을 부지했지만 손발을 잃은 사람도 20만 명에 달한다.


 

무슨 부정 사건이기에 12만 명이 목숨을 잃고 20만 명이 중상을 입었을까 기이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 부정부패의 흔적을 찾으려면 보은에 있는 한 기념탑, 그리고 영천에 있는 작은 추모비를 찾아가야 한다. 기념탑 명칭은 '국민방위군의용경찰전적기념탑', 추모비 명칭은 '국민방위군 추모비'다. 맞다. 역사상 가장 악랄한 부정부패 사건은 한국전쟁 기간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사건', 정확히 말하자면 '국민방위군 예산 착복 사건'이다.


 

▲ 충북 보은에 있는 국민방위군의용경찰전적기념탑. 지역의 국민방위군과 의용경찰이 속리산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기여한 것을 기리고 있다. ⓒ손호철
▲ 경북 영천에 있는 국민방위군추모비. 이곳에서 훈련받다가 굶어죽고 얼어 죽은 청장년들을 추모하기 위해 마을 어른들이 세웠다. ⓒ손호철

요즈음 식으로 말해, 국민방위군은 일종의 향토예비군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던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중국은 경고대로 참전해 한국전쟁 장기화가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군인, 경찰, 공무원과 학생을 제외한 17세~40세 사이의 모든 남자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키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50만 명을 소집해 서울에 집결시켰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를 지휘할 사령관과 부사령관에 군 경험이 전혀 없는 우익청년단장 김윤근과 우익청년단 총무국장 윤익헌을 임명했다. 그러나 50만 명에 이르는 청장년들을 지방 각지에 흩어진 군훈련소로 배치해 수용하고 훈련시킬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 1950년 말 제정된 국민방위군법에 따라 소집되어 온 청장년들

게다가 김윤근 등 국민방위군 책임자들과 그 위의 고위층들이 예산을 빼돌려, 소집된 사람들은 의복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끼니도 때우지 못한 채 지방의 훈련소로 이동해 훈련을 받으면서 대규모로 죽어나가고 동상으로 꽁꽁 언 손발을 잃었다. 그렇게 얼어 죽고 굶어죽은 사람이 약 12 만 명, 동상 등 중상을 입은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민방위군 5명 중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셈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려나간 12만 명이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굶어죽고 얼어 죽다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이들의 억울한 영혼을 누가 달래 줄 것인가? 한국전쟁의 국군 전사자 수는 공식적으로 13만 7899명이다. 즉 한국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와 비슷한 수의 젊은이들이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갔다가 식량과 의복 예산을 빼돌린 이승만의 부하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나중에 조사한 결과, 이렇게 빼돌린 돈을 이승만 측근 정치인들이 상납 받은 것이다. 가장 한심한 일은 아직 남아있다. 야당의 폭로로 이 문제가 터지자 이승만이 보인 반응이다. 이승만은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모략', '공비들의 술책'으로 몰아갔다. '위대한 음모론자 이승만' 만만세다!


 

이 사건은, 제보를 받은 이철승 의원이 부산으로 이전한 임시국회에서 폭로해 알려졌다. 국회 비상대책위원회의 조사 결과, 김윤근 등은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석 달 동안 현금 23억 원, 쌀 5만2000 섬 등 55억 원을 착복한 것으로 밝혀졌다. 70년 전의 55억 원이면 현재가로 얼마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엄청난 금액임은 확실하다. 김윤근 등 관련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친이승만계 국회의원 등 정치권에 이를 상납했다고 증언했다.


 

여론이 심각해지자, 이승만 정부는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다. 군사재판을 열어 사흘 만에 김윤근에게 무죄를,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는 오히려 여론에 불을 붙였다. 사건을 공산주의자의 음모로 몰아가며 측근을 비호하는 이승만에 실망한 윤보선은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했다. 보다 못한 미군지휘관들이 이승만을 찾아가 이번 사태의 책임자인 신성모 국방장관을 해임하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이승만은 신성모를 해임하고 10년 뒤 4‧19 혁명에 의해 심판받게 되는 이기붕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 김윤근 등을 국민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비호하다 경질된 신성모 국방부 장관
▲ 청남대에 있는 이숭만 동상. 이승만은 국민방위군 사건을 공산주의자의 음모로 몰아갔다. ⓒ손호철

국회는 국민방위군 설립 넉 달 만인 1951년 4월 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요구했다. 1951년 7월에 열린 고등군법회의는 김윤근, 윤익헌 등 5인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로부터 상납을 받은 배후세력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착복한 돈을 친이승만계 정치인들에게 상납했다는 증언에 따른 조사와 심판이 이뤄지기도 전에 서둘러 관련자들에 대한 공개총살형을 집행했다. 그로 인해 이들 위의 검은 세력에 대한 진실은 어둠속에 묻히고 말았다.


 

▲ 이승만 정부는 문제가 커지자 '꼬리 자르기'를 위해 김윤근 등을 재빨리 공개 총살했다.

대만의 장제스는 이승만에 대비된다. 장제스는 이승만 같은 극우 독재자였지만, 부하들의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물론 장제스 군대도 본래 '부정부패 그 자체'였다. 미국이 홍군과 싸우라고 지원한 최첨단 무기는 다음 날이면 마오쩌둥 군대로 넘어가 장제스군을 겨누었다. 밤새 무기를 공산주의자들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정부패의 결과로 장제스는 홍군에게 참패해 대만으로 도주해야 했다.


 

이후 장제스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의 조카며느리가 밀수 등 부정부패에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각적인 수사를 지시했다. 조카며느리 집에서 엄청난 돈과 보석들이 발견되자, 장제스는 조카며느리를 불러 함께 식사를 한 뒤 선물함을 줬다. 집에 가 열어본 선물함에는 권총 한 자루가 담겨있었고, 조카며느리는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죄질이 나쁜 부패 공직자들을 수송기에 실어 태평양 한 가운데로 가 떨어뜨려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고지도자가 이처럼 강력한 부정부패 척결 의지를 보이자 대만은 '부정부패 청정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반면에 이승만의 미온적 태도는 단순히 국민방위군 착복 사건에 그치지 않고,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 사슬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정권이 바뀌어도 대대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우리의 부정부패는 "국민방위군사건은 좌파의 모략"이라고 했던 이승만의 한심한 대응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아가 1950년대에 만연했던 병역기피 풍조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소집됐으나 총 한번 쏴보지 못한 채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다 싸늘한 시신으로 스러진 12만 국민방위군 사건에 크게 기인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세에 밀린 북한군과 빨치산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의 지시에 따라 1950년 11월 지역 청년들로 구성된 국민방위군은 의용경찰과 함께 이들의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보은에 있는 국민방위군의용경찰 전적기념탑은 이를 기념하는 전적비다. 따라서 국민방위군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 증거는 영천 은해사 입구에 있는 국민방위군추모비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50만 명 중, 강원‧충청‧경기 일대 20~30대 장정 수백 명을 영천 차일리로 분산 수용해 군사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100여 명이 숨지자 이들을 집단 매장했다.

 

 

1984년 도로 확장이 이뤄질 때, 마을사람들은 도로변에 묻혀있던 이들을 현재의 위치인 야산으로 옮기고 위령제를 지내왔다. 2003년 육군의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으로 이들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돼 국민묘지로 이장되자, 영천시는 이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웠다. 너무도 뒤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2000년대 들어 과거사 조사에 나선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국민방위군으로 사망한 희생자 유가족 14명의 진상조사 요구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가 이에 대한 조사를 벌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암매장 등을 확인할 수 없었다. 국민방위군 대부분은 생사가 알리려지지 않았고 가족들에게 사망통지서조차 발송되지 않아 사후적인 예우가 어렵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진화위는 사망자‧실종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위령제 실시, 전사자에 상응하는 국가유공자 예우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권고했다.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정부패와 관련해, 국민방위군추모비는 한국역사상 최악의 부정부패사건의 아픈 현장이자 증거라는 점에서 모든 공직자가 한번 쯤 찾아가 봐야 할 곳이다. 아니, 모든 공직자에게 취임 시 의무적으로 찾도록 해야 할 반면교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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