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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언어가 갖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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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8-11   |  발행일 2021-08-11 제18면   |  수정 2021-08-1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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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극단 나무의자 대표〉
 

1920년대 어느 날, 뉴욕의 어느 거리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는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I am blind)"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지만, 행인들은 아무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그때 행인 한 명이 다가와 그가 들고 있는 팻말에 글귀를 "봄은 오는데, 나는 봄을 볼 수가 없답니다(Spring is coming but I can't see it)"로 바꾸어 놓고 사라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게 된다. 냉담했던 행인들의 적선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개의 문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어서 냉담했던 행인들의 관심을 얻게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이 문장은 걸인에 대한 정보를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지만, 정작 걸인이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겪는 삶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에 대해 그가 느끼는 감정 등을 구체적으로 전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봄은 곧 오는데 나는 봄을 볼 수 없답니다"라는 문장에서는 핵심적인 단어를 쓰지 않고도 걸인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또 그가 시각장애인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 정서를 좀 더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가령 '봄'이라는 계절이 선사하는 다양한 체험을 떠올리면 만물이 소생하여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어나며 만물이 소생하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의 처지는 대조적이며, 팻말을 든 걸인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행인들의 안타까운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로 시의 언어가 가지는 힘을 확인할 수 있으며, 직접적인 정보 전달과 사실을 나열하는 것보다 감각적인 경험 내지는 정서를 구체적으로 환기하고 짧은 압축으로 행인들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시각장애인의 예화는 1920년대 뉴욕 거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그 장애인이 든 팻말의 문구를 바꿔 준 사람은 앙드레 불톤이라는 프랑스 시인이라고 한다.
김민선〈극단 나무의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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