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소 지인들에게 가끔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너는 누구 편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비판에 딱히 반론을 펼치지 않아서 나의 희미한 정파적 성향은 얼추 나의 특징처럼 굳어진 편이다.
그러다보니 진보진영의 분열이 격화될수록 나는 각 진영에서 좀 못 믿을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몇 년 전에는 절친한 친구로부터 “근묵자흑이라고, 너 요즘 저쪽 사람들과 어울리더니 많이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내가 약간 정색을 하면서 “야, 아무리 그래도 진보 운동 하는 사람들을 ‘흑(黑)’에 비유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말해도 그 친구는 “그쪽은 흑이야 흑!”이라는 관점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의 전반적인 생각을 존중하는 편인데, 그래도 서로를 ‘흑’이라 부르는 태도에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의 이런 회색적 성향에는 경험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과거 다녔던 회사에서 사측과 종종 부딪혔는데,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는 정말 한 사람의 동료가 절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너는 ○○파라서 함께 할 수 없어”라거나, “너는 △△파니까 우리의 동지가 아니야”라는 식의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옳고 너희는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애매한 관점을 갖고 사는 것은 좀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이게 피곤하다고 “그래, 어느 쪽이 100% 옳아!”라고 단언하는 것은 여전히 내 성향이 아니다. 내 미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싸움은 쪽수(!)의 문제고,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건 우리 편 쪽수를 늘려야 한다는 생각은 잘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사르트르와 카뮈
이와 관련해 내가 곱씹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문학가들이자, 20세기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로 꼽히는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에 관한 이야기다.
사르트르와 카뮈는 나치가 유럽을 장악한 1940년대 유럽 전체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인 진보적 문학가이자 철학자였다. 이 둘은 또한 매우 뛰어난 실천가들이기도 했다. 카뮈는 1942년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 ‘전투’라는 뜻)에 가담했고 이듬해 이 비밀조직이 발행하는 신문의 편집장을 맡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뒤 “프랑스에는 별도의 정부가 두 개 더 있다. 하나는 프랑스 중앙은행이고 나머지 하나는 갈리마르 출판사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그런데 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 바로 카뮈의 명저 『이방인』이었다. 그 정도로 카뮈가 프랑스 전역에 미친 영향력은 막강했다.
사르트르 역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포로가 된 경험이 있으며 이후 파리에서 나치에 저항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해방 운동에 깊이 간여했고,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대 전선에 나서는 등 누구보다도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이 두 사람은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 운동을 통해 서로 알게 됐다. 그리고 곧 사상적 동지가 된다. 두 사람은 종종 술잔도 함께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을 대표하는 두 실천적 지성의 우정은 당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지성의 결별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끝내 결별했다. 갈라선 결정적 이유는 폭력에 관한 입장 차이였다. 사르트르는 시대의 진보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카뮈는 그 어떤 이유로도 목적 달성을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결정적 차이는 격변의 시대였던 20세기 수많은 역사적 전환점에서 두 사람의 의견을 극단적으로 갈라놓았다. 예를 들어 러시아 혁명에 관한 평가에 대해 사르트르는 지지의 입장이었던 반면 카뮈는 격렬히 반대했다.
그래서 카뮈는 폭력 혁명으로 집권에 성공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난하며 “공산주의는 문명의 질병이고 현대의 광기다”라고 쏘아붙였다. 반면 195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로서의 노선을 확실히 한 사르트르는 “반(反)공산주의자는 개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자본주의 진영을 질타했다.
1950년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두 사람의 행보는 갈렸다. 폭력 투쟁을 지지했던 사르트르는 동지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의 유작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유럽이 우리 대륙에 손을 댔으니 그 손을 후려쳐서 떠나가게 만들어야 한다.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투쟁을 시작하자! 마땅한 무기가 없다고? 식칼이라도 들어라. 그것이면 충분하다!”
반면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에 부정적이었으며(참고로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두 나라 민중들이 프랑스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알제리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식민지도 아니고 독립국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는 애매한 연방제 국가를 지지했다.
알제리에 대한 카뮈의 이런 태도는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십자포화를 맞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좌익 지성계는 카뮈를 완전히 내놓은 자식 취급했다.
이 정도 사상적 대립을 겪었으면 사르트르와 카뮈는 피차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으로 봐야 한다. 지금이야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쉽게 소개하지만 당시 두 사람 주변에서는 서로를 얼마나 적대시했겠나?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때 누군가는 “폭력을 써서라도 일본놈들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는데, 누군가는 “느슨한 연방제 형태로 일본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면 그 둘은 피차를 원수로, 혹은 배신자로 여기고 경멸했을 것이다. 둘이 서로를 죽이자고 덤벼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이였다는 이야기다. 실제 카뮈와 사르트르는 1952년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논쟁으로 결별한 이후 카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1960년)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카뮈의 사망 이후 사르트르는 그의 생애를 기리는 추도사에서 “카뮈는 아마도 나의 마지막 좋은 친구였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우리를 가깝게 했던 것들은 많았고,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이념의 차이로 갈라선 뒤 완전히 다른 노선을 걸었던 두 사람. 심지어 카뮈는 최연소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된 반면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이를 거부한 것마저 둘은 달랐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차이에도 사르트르는 이렇게 회고한다. 자기들을 갈라놓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끔 곱씹는다. 특히 벗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분열과 대립이 격화될 때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나에게는 벗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대립에 대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잠깐씩 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분열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를 가깝게 했던 것들은 아주 많았고,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들은 얼마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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